장충식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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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감으로 분신을 외친 학생, 봉사하는 지성으로 키워내다

201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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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한국 대학가의 봄은 이미 펄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대학생들의 잇단 분신자살, 박종철 군 물고문 치사 사건으로 불거진 민주화 요구 시위는 대학을 분노의 함성과 거센 시위의 열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 열풍이 우리 대학에도 드세게 불어 닥쳤다. 4월 들어 학내 복지문제 해결을 주장하던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방향을 학내민주화, 학사부정 척결 등으로 틀었다. 수업거부, 중간고사 거부가 대세를 이루더니 급기야 대학 본관 총장실을 점거했다. 매일 2~3천여 명의 학생들이 농성과 시위를 펼치면서 학내는 사실상 교육과 연구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일련의 사태로 당시 총학생회의 퇴진 요구를 받던 김 모 부총장이 사직의사를 전 했지만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그 앞자리에 당시 총학생회장인 양종곤 군이 있었다. 양종곤 군은 매일 학내 농성, 혹은 학원 밖의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고, 때론 단식과 대중연설로 수천 명의 학생들을 강의실 밖으로 끌어냈다. 개교 이래 최대의 학생 시위가 이뤄졌다. 4월 27일로 기억한다. 한남동 캠퍼스의 본관 앞에 있는 노천극장에 5천 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함성을 외쳐댔다. 학생들은 대학민주화로 민주사회 앞당기자고 외쳤다. 노천극장의 중심에 양종곤 학생회장이 서있었다. 어쩌면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이 날은 달랐다. 양 군은 자기 옆에 20리터 기름통을 두고 있었다. 그 안에는 신나가 가득했다. 멀리 한강 쪽으로 이른 노을이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양 군이 신나 통을 들어 자기 몸에 부었다. 여학생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학생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양종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김 부총장이 물러났지만 아직 교직에 있습니다. 학교를 떠나야 합니다. 진상규명도 철저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학내에 군부정권에 협조한 어용무능 교수들이 퇴진해야 합니다. 장충식 총장님이 학생들 앞에 서서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저는 오후 6시에 분신을 하겠습니다.” 노천극장이 본관 앞에 있기에 한 눈에 상황을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은 극도의 흥분에 휩싸였다. 학생뿐만이 아니라 본관에서 이를 지켜보던 교무위원들이나 관계자들도 경악하고 충격에 말을 하지 못했다. 신나에 흠뻑 젖은 양종곤 군은 라이터를 들고 있었다. 잠시 뒤 동료 학생이 라이터를 인수해 치켜들었다. 신나는 발화점이 낮아 약간의 불꽃으로도 큰 불이 날 수 있다. 너무 위험하고 무모한 장면이었지만 현실이었다. 5천 명의 학생들은 학생대로, 학교 관계자들은 그들대로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 날 시위 전에 총학생회장이 모종의 극단적 조치를 결심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학원 동향을 체크하는 경찰이나 안기부에서도 같은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강경책을 준비하리라 짐작은 했지만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 결론이 나오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총장으로서 몸에 불을 붙이는 자살방법을 5천 명의 학생 앞에서 공언하는 광경을 보고 있는 일 자체가 가슴이 아팠다. 저 젊은이가 얼마나 상황에 몰리고, 쫒기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저런 도박같은 일을 약속하는 걸까... 상황이 벌어지자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정보 당국이나 공안 당국, 심지어 문교부(지금 교육부 전신)나 소방서까지 현장 상황을 확인하고, 대책을 묻거나 조언하는 전화들이었다. 노천극장과 가까운 정문 근처에는 소방서의 화재진압용 차, 구급차가 대기했다. 그 안쪽으로 경찰 진압대도 잠복해있었다. 노천극장과 주변으로 십 수 명의 기자들도 취재를 하고 있었다. 공안 당국은 학생들을 자극할까 병력을 드러내지 않고 적절한 현장진압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걸려온 전화들은 한 결 같이 지금 총장이 현장에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시위대를 더 흥분시키고, 자칫 구타나 폭력 시위 같은 상황으로 확대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었다. 심지어 저 휘발유통에 있는 액체는 물 같은 비인화물질이고 협박용일 뿐이라는 예단도 있었다. 학생들은 절규에 가까운 외침으로 장충식 총장은 노천극장으로 나오라 아우성이었다. 당시 내 집무실, 그러니까 총장실은 이미 총학생회의 활동대에게 점거를 당해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재단 소유 <단국빌딩>에 임시 사무실을 차려 근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위 시작과 함께 나는 현장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고자 해서 본관 회의실에 있었다. 모든 소리와 장면들을 선명히 보고 들을 수 있었다. 6시가 다가올수록 상황은 더 소란스럽고 어지러워 졌다. 정보 당국에서는 양종곤 총학생회장의 분신 자살 압박이 본인의 판단이라기 보다는 당시 시국을 주도하던 운동권 최상층부에서 내려온 지시라고 귀뜸했다. 그러니 총학생회가 분신으로 협박해도 절대로 ‘장충식 총장이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경찰이나 소방서 측도 총학생회장이 뿌린 것은 물일 수도 있으니 협박에 굴하지 말라고 거듭 강권했다. 심지어 문교부 장관실에서 조차 지금 단국대가 이 상황에서 양종곤 군의 요구를 들어주면 다른 대학도 교내 문제를 앞세워 학생들을 대대적인 시위로 유도할 빌미가 되니 결코 들어주지 말라는 얘기가 왔다. 시간이 임박하자 이것은 ‘장관님 지시’라는 압박이 더해졌다. 내 옆에 있는 교무위원들, 나를 걱정해주는 교직원들도 저런 위험한 현장에 나가서 봉변을 당하면 안된다며 총학생회장의 협박을 거부하자고 했다. 심지어 강경론자는 끝내 분신을 하면 그것은 극단적 운동권 학생의 죽음이지 학교는 할 만큼 했다는 주장까지 했다. 나는 그 소음과 오가는 논의와 대책의 혼란 사이에서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은 ‘저 젊은이를 그냥 놔둬서는 안 된다’는 소리였다. 나는 교육자이다. 총장이기 이전에 교수이고, 저런 젊은이도 내 학생이다. 시대와 이념, 현실과 이상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여러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우리 대학의 젊은이에게 닥칠 비극이 있다면 기꺼이 교수인 내가 먼저 나서서 막아줘야 한다. 그것이 내 마음 속 울림이었다. 신나를 뿌리고 연단에 주저앉아 오후 6시가 넘으면 분신하겠다는 저 어린 학생의 마음은 어떨까? 50일이 넘게 소리치고, 밥을 굶고, 때론 교직원과 멱살잡이를 하고, 심지어 기물을 파손하면서까지 저 젊은 친구가 얻으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정의감이라고 믿었다. 기성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열망이 저 젊은이의 피를 끓게 했을 것이다. 저 학생은 입학 당시 최우등급의 성적을 거둬 특별장학금을 받은 학생이었다. 서울에서 8시간을 차로 달려야 갈 수 있는 먼 객지에서 홀어머니의 기대를 안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 가슴 속에 어찌 성공과 행복에 대한 열망이 없겠는가? 그 모든 것들을 읽었기에 결국 저 젊은이는 ‘차라리 죽겠다’고 나선 것은 아닌가. “구해야 한다. 흥분한 시위대에 의해 내가 돌을 맞고, 정부의 지시를 어겨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내가 나서서 풀어줘야 한다.” 내 마음 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결론이었다. 그것은 교수로서의 본능이었다. 나는 관계자들 앞에서 내 입장을 천명했다. “저 학생을 외면할 수 없어요. 내가 외면하면 이번에는 양종곤 학생이 시위대의 외면을 감당 못하고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가겠습니다. 혼자 나갈 테니 이해해주세요.” 본관에서 노천극장을 내려가는 계단의 양쪽에는 이미 수 천 명의 학생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취재하는 내외신 기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르고 쇠파이프나 목봉을 들고 마스크를 쓴 채 시위 지도부를 호위하는 사수대 학생들도 많았다. 그들은 내 뒤를 따르던 교무위원들을 제지해 운동장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홀로 운동장에 섰고, 연단에 올랐다. 5 천명이 넘는 학생들의 이목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십여 분 남짓한 연설을 통해 “학생들의 요구를 애교심의 결과로 본다.”고 전제하면서 학생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학사관리에 오류가 있다면 총학생회가 지정하는 평교수들로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진상을 파악하고, 책임질 일이 있다면 총장인 내가 지겠다.”고 약속했다. 학생들은 내 말에 공감을 했다. 돌이 날아올 수도 있다던 주위의 걱정과 달리 우렁찬 박수로 내 고민과 대책을 공감해주었다. 총학생회장인 양종곤 군도 분신 자살이 아닌 학생들의 박수 속에 신나와 라이터를 거두고 시위 해산을 선언할 수 있었다. 극한적으로 치닫던 학교와 총학생회의 갈등도 조금씩 진정했다. 사태가 진정 국면으로 전환되었지만 양종곤 군은 총학생회장으로서 그동안 주도해온 일련의 일들에 매듭을 지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총학생회 지도부는 학생처의 집기를 파손했다. 거기에 총장실, 총무처까지 더해 피해액이 8천 만 원에 이르렀다. 공안당국은 이를 부각시켜 나에게 양종곤 군의 제적시켜 학원 밖으로 추방시키라 강권했다. 이를 거부하기는 했지만 대낮에 집단적으로 학교 기물을 파손한 일을 모른 척 할 수도 없었다. 책임자인 양종곤 군은 이미 집시법 위반, 기물파손죄로 수배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나는 자수를 권유했다. 하지만 양종곤 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이때 양종곤 군을 자수시킨 뒤 그의 미래를 함께 고민해야 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그가 단국대 학생을 대표하는 총학생회장으로서 보여준 리더십과 정의감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4,5월이 지나면서 총학생회는 학내문제에서 급격하게 사회민주화로 역량을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항쟁이라는 거대한 민주화 동력이 불어 닥쳤기 때문이다. 양종곤 군은 6월 항쟁에 동참하는 와중에 결국 체포되었다. 공안당국은 양종곤 군에 대한 수배 조치 이후 그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그의 동선을 파악한 사복 형사들은 6월 항쟁 기간 중 학교에서 기숙하다 시위를 위해 빠져나가던 양종곤 군 일행을 한남동 캠퍼스 후문 근처에서 덮쳐 체포에 성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바로 우리 재단의 고문변호사를 선임해 양종곤의 법률대리인을 맡겼다. ‘양종곤 군 제적’이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내가 나서서 그의 면학을 도울 테니 공부할 기회를 유지케 해 달라 설득했다. 법정에서 같은 취지의 호소를 했다. 양종곤 군은 재판을 통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처벌을 받고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나는 비서를 통해 그를 만나서 내 뜻을 전하고 운동권보다는 학문의 길에 들어와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를 개혁하는 진로에 대해 생각해보라 권유했다. 선 듯 자신에게는 ‘청산의 대상’이었던 나의 권유를 받기가 정서적으로 힘들어서인지 취업을 하기도 했다. 나는 양종곤 군의 경제 형편이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게 방을 임대할 보증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내 의지의 일단을 일깨우고 싶었다. 그 당시에 양종곤 군은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사귀던 동료 여학생이 있었다. 둘은 동료에서 연인으로 발전해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를 만나던 내 비서는 이같은 사실을 알리면서 처가될 집에서 양종곤 군의 집안 형편이 어렵고, 양종곤 군 본인의 미래도 불투명해 결혼을 강력히 반대한다고 보고했다. 나는 두 젊은이의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딸들도 그렇게 결혼시켰다. 내 딸이 사랑하는 남자라면 그 믿음을 존중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그래서 내가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래 아들을 하나 더 두는 셈으로 치자.” 그렇게 결심했다. 나는 경기도 용인으로 달려가 신부 측 부모를 만났다. 부모님들은 매우 강경했다. 험한 소리도 들었지만 이를 삭히면서 그 분들에게 약속했다. “내가 양종곤 군을 유학 보내고자 합니다. 물론 따님도 결혼시켜 같이 미국에서 공부토록 하겠습니다. 너무 심려마시고 양종곤 군의 미래를 믿어주세요.” 결국 결혼 승낙을 받아 1989년 봄에 혼례를 치뤘다. 물론 나는 주례를 자청해 두 사람을 축복했다. 양 군은 직장 생활과 결혼 과정에서 내가 권유하던 유학과 학문에 대한 결심을 굳혔다. 1990년에 두 사람은 대망의 꿈을 함께 나누며 오레곤 주에 있는 서던 오레곤 대학(Southern Oregon University)에 입학했다. 이런 과정에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총장을 쫓아내려한 운동권 학생을 결혼시키고, 유학 보내는 내 행동을 비판하기도 했다. 퇴학을 시켜도 분이 덜 풀릴 정도로 대학과 교직원들에게 위해를 했던 학생을 키우는 게 너무 온정적이라는 지적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그는 총학생회 회장으로서 학생들을 대표해 나를 비판한 것이다. 그의 주장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것은 없다. 인재를 키우는 것은 내 취향에 부합하는 젊은이를 선호하는 일이 아니라 정의감, 희생정신, 잠재력을 고려해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내 생각이었고, 양종곤 군은 그런 고려 사항에 적합했다. 양종곤 군에게 지원하는 유학비는 전적으로 나의 ‘사재’였다. 집에 줄 생활비를 아끼고, 내 쓸돈을 아껴가며 학비를 조달했다. 나는 대학의 어떤 지원도 거기에 추가하지 않았다. 학내에 그를 제적시켜도 아깝지 않다는 여론이 많은데 교비를 학비지원에 쓰면 오히려 양종곤 군이 더 욕을 먹을 것 같고, 그의 미래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양종곤 군은 석사 과정을 잘 마치고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나는 양종곤 군을 좋은 학자로 길러줄 훌륭한 경영학교수를 물색했다. 네브라스카 주립대의 이상문 교수를 양종곤 군에게 추천했다. 이상문 교수는 서울대를 나와 조지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의 대표적 경영학회인 의 회장을 장기간 역임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게 미국 경영학계에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네브라스카 주립대에서 석좌교수를 거쳐 정년퇴직한 의사결정, 글로벌 전략, 혁신경영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양 군은 기꺼이 내 조언을 받아들였다. 다행히 이상문 박사는 양종곤 군을 기꺼이 제자로 받아주었다. 양 군은 정들었던 오레곤을 떠나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인 네브라스카로 떠났다. 그 때, 나로서는 정말 힘든 시기가 닥쳤다. 나와 김영삼 정부와의 불화로 내가 총장의 직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나야 야인이 되면 그만이었지만 당장 급여를 받지 못하니 양종곤 군 학비를 지원할 수 없게 된 것이 큰일이었다. 집에 가져다 줄 월급이 없으니 유학비 지원은 여력이 더 없어졌다. 낯선 땅에서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아내와 아들까지 건사하면서. 나는 정권의 압박에 힘겨웠지만 양종곤 군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더 힘들어지기도 했다. 결국 이상문 박사에게 나의 진심을 전달했다. 이 박사는 다시 한번 큰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박사과정에 드는 어마어마한 학비를 상당 부분 해결해준 것이다. 그래도 가족의 생활비는 따로 풀 방법이 없었다. 양종곤 군은 결국 가족을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홀로 유학을 마치기로 했다. 모자른 학비도 벌고, 생활비도 벌면서 연구를 계속해야 하는 고달픈 시간이었다. 거기에 가족을 떠나보내고 감당해야 했던 깊고도 큰 고독...나 역시 홀로 미국 유학을 했기에 그 막막함을 공감할 수 있었지만 어린 자식을 양육하다가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했을 것이다. 고된 개인적 시련과 높은 벽을 넘어야 하는 학문적 단련을 거치면서 양종곤 군은 ‘운동권 학생’에서 ‘경영학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가 전해오는 편지나 선후배들의 전언을 통해 양종곤 군이 양종곤 박사로 잘 커나가고 있음을 간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내 기쁨이기도 했다. 1997년에 그는 정말 어렵고 힘든 과정과 논문 심사를 무사히 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훌륭한 지도 교수 덕분에 미국에 정착할 수도 있었지만 귀국을 해 좋은 직장에 안착하였다. 국내 경영컨설팅 회사를 거쳐 마지막으로는 세계적 글로벌 경영컨설팅 회사인 IBM BCS에서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 경영자문을 하며 전공 실무경험을 쌓았다. 주변에서 들으면 기업체 특강에서도 좋은 평을 받아 초청 강연이 많다고 했다. 나는 양종곤 박사를 만나자 했다. 그리고 그에게 마지막 미션을 주었다. “양 박사 이제 모교에서 후배들을 지도해야 겠어.” 양 박사는 부담스러웠을 게다. 모교에는 여전히 그에게 부정적 시작을 갖고 있는 선배들과 교수님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또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은 이들이 날선 비난을 오래오래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그는 지원을 해야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사명이니까. 후배이자 제자인 우리 대학 학생과 자신의 모교를 위해 감내해야 할 빚이니까. 다행히도 그는 공채 과정을 잘 통과해 모교의 교수로 발령받았다. 비단 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 셈이지만 나는 그가 학생운동을 통해 짊어진 숙제를 기억해 달라 말하고 싶다. 총학생회장 양종곤 군에서 양종곤 교수로 걸어갈 그의 삶 속에서 후배들을 위해 더 큰 일을 해달라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선배가 되달라고.

한복과 학교 사랑의 열정으로 아름다운 삶을 만든 석주선 박사님

2018.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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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학에는 한국 최고수준의 한국 전통복식 전문박물관이 있다. 지금이야 한류를 세계화시키니, 한복을 세계화시켜야 한다느니 하며 우리 전통의복에 관심과 투자가 눈에 띠게 커졌지만 불과 30년 전만해도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하루끼니가 걱정이던 시절에 그 누가 한복의 아름다움을 공부하고, 보전하려 했을까. 한복은 그저 버려지고 잊혀져가던 한 움큼의 추억에 불과했었다. 그 슬픈 한복의 운명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눈물과 피땀을 기울이던 이가 있었다. 이제는 하늘에서 영면하고 있는 난사(蘭斯) 석주선(石宙善) 선생이 바로 그 분이다. 내가 난사 선생을 유물 기증관계로 처음 만난 때는 40여 년 전인 1972년 무렵이었다. 경희대에서 지리학을 가르치던 조동규 교수의 소개였다. 조 교수는 우리 대학을 나와 경희대에 재직하였는데 그 부인께서 석주선 선생님의 제자로 한국복식을 배웠다고 했다. 두 내외의 말인 즉, 석주선 선생이 한국 복식을 연구하면서 복식과 민속 유물을 수집했는데 이제 정년이 되고 보니 이를 기증할 곳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역사학을 전공했고 사실 1960년대 초반에 동덕여대에 시간강사로 출강한 적이 있었고, 석주선 선생은 당시 재직 중이었기에 석주선 박사님에 대해서는 약간이나마 지식이 있었다. 석주선 선생의 오빠는 나비박사로 유명한 석주명 박사이다. 재밌게도 두 분은 모두 ‘수집’으로 학문의 기반을 닦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빠인 석주명 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손꼽히는 곤충학자, 특히 나비전문 학자였다. 20여 만 마리가 넘는 나비를 채집, 분류하고 이를 세계에 보고해 한국나비 분류의 체계화에 결정적 기여를 한 분이다. 더욱이 이런 모든 일들이 일제치하에서 얻은 학문적 업적이니 한국 과학계에 선구자로서 명성이 높은 학자였다. 불행히도 한국 전쟁의 와중에 그 방대한 양의 채집된 나비가 폭격에 소실되었고, 본인도 서울수복 뒤 총을 맞고 의문의 죽음을 당해 학계의 아쉬움이 더욱 남다른 분이었다. 오빠의 영향을 받아서였을까. 난사 석주선 선생도 한국 최고의 전통복식 유물 수집가이자 학자로 평판이 높았다. 난사 선생은 1911년 생으로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을 했다. 1940년 동경 일본고등양재학원을 나와 해방 때까지 교사로 재직했다. 공부는 서양 복식이었는데 해방 뒤 귀국하여 양장기술을 가르치다보니 한복에 관심이 가고, 특히 소중한 전통 복식 유물이 함부로 취급되고 없어지는 현실을 보고는 스스로 이를 거두기로 작정했다. 1952년부터 25년 동안 수도여대, 동덕여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난사 선생은 그 긴 시간 동안 본인을 위한 모든 안락함은 멀리하고 한복 연구에 모든 열정을 바쳤다. 복식의 변천과 고증, 복구는 모두 실제 한복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무덤을 옮길 때 나오는 출토복식들, 집의 한구석에 나뒹굴다가 고물상에 엿과 바꿔질 운명의 헌옷은 물론이고 고가의 장신구들까지 난사 선생은 이들을 하나하나 집으로 들였다. 호의호식이 아니라 평생 악의악식하면서 젊어서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평생 수집한 민속유물이 수 천 점에 이르렀다. 수집하고 공부하고, 이를 복원하여 되살리는 일에 매달리느라 재산을 물론이요 결혼도 거절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나는 조동규 교수 내외와 난사 선생을 면담했다. 난사 선생은 온화한 미소가 인상적인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 같은 자태를 갖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마음속에 품었던 궁금증을 드러냈다. “훌륭한 컬렉션이 있으니 다른 대학이나 공공 박물관에서 기증 제의가 있었을 텐데 왜 저한테 까지 기증 얘기가 나왔는지요?” 이 말을 들은 난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가 모은 복식유물들은 모두 내 자식처럼 소중하죠. 내가 모아서 소중한 게 아니라 복식유물들은 옷감들이라 시간이 지나면 삭아서 바스러집니다. 또 그런 유물을 보관만 하는 게 아니라 고증에 맞춰 복원하고 그 속에 담긴 정신과 기술을 전수도 할 수 있어야 하죠. 그래서 항온항습 시설을 갖춘 별도의 박물관이 있어야 해요. 연구실과 강의실도 필수적이고요. 그런데 내가 만나본 대학이나 박물관들은 그럴 의지가 없었어요. 그냥 내가 가진 유물에만 관심이 있는거죠.” 조동규 교수님도 얘기를 거들었다. “장 총장님은 역사학을 공부하셨으니까 석주선 박사님의 유물이 학문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이런 유물을 어떻게 보존해야 할지 잘 이해하시리라 믿음이 가죠. 다른 대학들을 소개했는데 모두 독립 박물관을 만들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국립박물관들도 그랬고요. 그냥 전시만 한다는 정도라서...” 이 만남이 있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난사 선생의 집을 들리기로 했다. 컬렉션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난사 선생이 초청을 해주었다. 서울시 중구 신당동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집을 들어가다 대문에 머리를 찧을 뻔했을 만큼 작은 집이었다. 3개의 방이 있었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모든 방마다 유물이 가득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물 상자들이었다. 그 상자들이 옷장 속에도, 그 옷장의 위에도, 벽의 선반을 달아 그 선반에도, 심지어 다락방까지. 난사 선생이 누울 수 있는 딱 한 명분의 공간을 제외한 모든 곳이 임시 전시실이고 보존실이었다. 유물들은 조선시대 왕족과 사대부의 의상 및 장신구부터 서민들의 복장과 장식구 등 다양한 것이었다. 아마도 난사 선생이 수집하지 않았다면 이 귀중한 우리 민족문화 자산이 일본으로 팔려갈 것이 뻔했다. 감탄은 잠깐이고 더 큰 걱정이 들었다. 난사 선생이 아무리 정성을 기울인 들 저런 상태로 얼마나 갈 것인가. 손으로 힘만 주어도 부서질 옷들인데. 거기에 혹시 불이라도 나면 이 소중한 유물들이 어찌되는 걸까. 아니 이 집 옆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가운데 하나에서 불이 나면 저 많은 유물들을 누가 지키겠는가. 나의 걱정 어린 눈길을 알아챘는지 석주선 선생님은 학자로서, 그리고 인간적인 하소연을 했다. “이제 정년이 되고 보니 정말 두려움이 더 커져요. 저 유물들은 대부분 옷감이라 좀이 슬거나 곰팡이가 생기면 안되요. 옆집에서 불이다도 나거나 아니면 혼자 있는 집에 문화재 전문 강도라도 오면 어떻게 되는 거죠. 대학이나 공공기관들은 그저 일반 전시실에 진열만 하고 싶어 하기만 하는 거죠. 그런데 전시장도 오동나무에 항온항습시설이 갖춰져야 해요. 복식유물들을 제대로 분류하고 정리해서 체계를 잡는데도 10년이 넘게 시간이 들 텐데... 매일매일 불안하고 걱정이 돼서 잠을 못자요. 내 나이 스물이 넘어서부터 지금까지 내 봉급을 털어 모은 유물들인데 어찌해야 할지...” 그동안 기증만 받을 욕심에 여러 기관에서 상처를 받아온 사정을 설명하던 난사 선생은 말을 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문득 ‘잘난 아들이나 잘난 남편을 두었다면 저리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겠는 가’하는 인정이 발동했다. 무엇보다 같은 학자로서 사명감이 크게 다가왔다. 역사란 결국 문헌과 유물로 대변된다. 힘없는 학자가 평생 동안 국가가 하지 못한 일을 홀몸으로 해왔는데 이를 받들기보다 기증품받는 욕심으로만 접근하는 한국 학계의 잘못을 방관할 수 없지 않겠는가. 저 소중한 유물들은 ‘전시물’이 아니라 ‘연구와 보존’의 학술자료로 영원히 전승돼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돈이 들더라도 해야 한다. 지금 돈이 없으면 한 푼이라도 모아서 우선 잘 보관하고, 예산을 끌어 모아 독립 전시관을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 마음을 당장 밝히기는 경솔해보여 난사 선생의 애타는 마음을 위로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4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난사 선생과 계속 교류를 했다. 난사 선생의 건강과 안부를 묻고,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응원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박물관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었다. 특별회계를 설정하고 건설자금을 적립토록 했다. 17억 원의 자금이 모였다. 다른 사립대학들이 운영자금을 모아 요즘 말하는 ‘강남땅’을 사는 것이 당시 유행이었다. 내 기억으로 17억원은 당시 한창 주목받던 강남의 신사동 땅 1만 여 평을 살 수 있는 가치였다. 돈이 모이자 몇 가지 구상을 하고 결심한 뒤 다시 난사 선생을 찾았다. 나는 일단 여섯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첫째, 기증 유물을 보존할 전시관은 ‘단국대학교 석주선 민속박물관’으로 이름 지어 독립된 박물관을 신축한다. 둘째, 석주선 민속박물관을 건설하기 위해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 셋째, 유물들은 석주선 박사의 감독 아래 오동나무 박스를 제작하여 보관한다. 박물관 보관 창고는 습기 제거 장치와 항온장치를 갖추도록 한다. 넷째, 석주선 박사는 특별교원으로 채용하며 교수 특호봉으로 대우한다. 고령을 감안해 전용차량과 운전 기사를 제공한다. 다섯째, 평생 동안 지낼 아파트를 제공한다. 여섯째, 추천하는 연구원 2명을 박물관 연구원으로 모든 신분을 약정한다. 나는 당시 박정숙 이사장님을 설득해 이를 동의받고 위 조건을 공약한 문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와 이사장님이 공동 서명한 문서로 작성해 난사 선생께 전달했다. 연이어 우리 대학 동양학연구소장이신 일석 이희승 박사님, 서울대의 이병도 박사님, 고려대의 신석호 교수님, 그리고 우리 대학 중앙박물관장 정영호 교수 등으로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언론을 통해 발표하였다. 나의 굳은 의지를 확인한 석주선 선생은 그제서야 자신이 정리한 모든 유물의 목록을 정리한 문건과 보관함을 열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나를 만나러 왔다. 1976년 9월 1일 조촐하지만 진심어린 정성을 담아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 소장품 기증식’을 가질 수 있었다. 박물관 신축 사업에 착수하자 실무자들 사이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 박사님은 까다로운 분”이라는 불평이었다. 하기는 난사 선생은 제자나 직원들을 엄격한 자세로 대했다. 자신의 방침이 지켜지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혼을 내는 스타일이라 한번 당해보면 원망이 나곤 했다. 특히 당시 박물관 신축 및 보존 시설의 도입을 행정부서에서는 총무처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불평이 높아 내 귀에도 전해질 정도였다. 나는 더 큰 갈등이 생기기 전에 직접 나서기로 했다. 총무처 소속 직원들에게 “석 박사님을 내 어머님이라 알고 대해 달라”고 설득했다. “나이 드신 내 모친이 여러분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일일이 변명하거나 말대꾸를 하겠어요? 그리고 사택에 들일 가구나 비품들도 총장의 어머님에게 해드린다는 생각으로 잘해드리고 자상하게 배려를 해주세요. 그러다보면 석 박사님도 ‘단국대 사람들은 다르구나’ 하고 마음에 맺힌 것들이 풀리고 한 식구가 될 겁니다.” 시간이 흐르고 하루는 난사 선생이 찾아왔다. 얼굴에 환한 빛이 가득했다. 선생은 웃으며 얘기했다. “장 총장님이 제 평생의 고생과 한을 다 풀어주십니다. 제가 그동안 혼자 모든 일을 하다 보니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일시키는 게 내 맘같지 않아서 화도 많이 내고 까탈스럽게 했는데 다들 잘 받아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보관시설도 훌륭하고 박물관도 아름답게 세워질 것 같고. 고마워요 장 총장님.” 말을 미쳐 마치지 못하고 난사 선생은 내 손을 덥석 잡고는 눈물을 흘리셨다. 행복한 웃음과 눈물이었다. 나는 “앞으로 현재 소장한 유물이 아니라도 필요한 유물이 있으면 대학이 구입하도록 하겠다”며 “오래 사셔서 큰 업적을 만드시라” 덕담을 했다. 박물관 준공을 앞둔 1977년 당시 난사 선생의 나이가 66세였으니 지금과 달리 노령인 셈이었다. 나는 말이 나온 김에 난사 선생이 더 나이들기 전에 흉상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에 얼굴 마스크를 본떠 흉상을 만들어 생전에는 사무실에 보관하다가 돌아가시면 박물관 홀에 상설시켜 선생님의 유덕을 기리자는 뜻이었다. 난사 선생도 기쁘게 받아들여 흉상을 제작했다. 지금도 민속박물관 입구에는 난사 선생의 흉상이 생전의 인자한 미소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으니 볼 때마다 내 감회가 남다르다. 1977년 11월 3일, 개교 30주년을 맞는 뜻깊은 날에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었다. 진심으로 난사 선생의 꿈이 이루어진 것을 축하해줬다. 복식연구가들과 한국학 관계자들은 칭찬과 축하를 나눴다. 지금도 개관식 당일에 자부심과 행복감에 가득해 반짝이던 선생의 눈빛을 기억한다. 학자로서, 그리고 민속 유물 수집가로서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나 역시 자칫 세월에 스러지고, 사회의 외면 속에 사라질 소중한 전통복식 유물을 영원히 우리 대학에 보존하고, 거기에 복식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생각에 큰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난사 선생과 나는 때론 모자지간처럼, 때론 한국학에 대한 애정을 나누는 동지로 20년을 보냈다. 가끔 박물관에 들리면 난사 선생은 나를 아들처럼 사랑스러운 눈빛과 웃음으로 바라보며 감사하다는 말을 거듭, 거듭 전했다.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은 한국 유일, 또는 최고의 전문 박물관으로 다양한 학술 활동을 펼쳐 우리 대학의 명예를 높혀줬다. 세월이 흘러 1995년 하반기들어 선생은 병석에 눕고 말았다. 다행히 이때 우리 대학 병원이 문을 열어 장기 입원을 시켜 돌봐드릴 수 있었다. 정성껏 모셨지만 병세는 날로 심해지더니 이듬해 나에게 “더 이상 힘들다”는 보고가 왔다. 임종이 가깝다는 소식에 서둘러 병석을 찾았다. 위문 손님이 여럿있었는데 선생은 나와 단 둘이 얘기를 하고 싶다며 사람들을 물렸다. 단 둘이 남자 난사 선생은 나를 가까이 오라 하시더니 손을 꼭 잡고는 내귀를 당신의 입에 대며 힘들여 말을 이었다. “그동안 총장님이 내 소원을 다 들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단국대가 내 살림을 다 맡아주고 월급도 줬으니 내가 돈쓸 데가 어디 있겠어요. 그 돈으로 정기적금 저축을 해서 모아 놨고, 박물관에 근무하는 이에게 맡겨 놨어요. 통장에 보관해놨으니 그걸 찾아서 장학금으로 써주세요.” 나는 놀라기도 했지만 선생의 그 학교 사랑과 끝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른 이에게 선용하려는 그 의지에 그만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내 눈물을 보면서 선생도 눈물을 흘리셨다. “장 총장님을 만나서 내가 정말 행복하게 여생을 보냈어요. 내 죽어서도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꺼예요.” 마지막 유언을 마친 양 난사 선생은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조금 더 시간이 있으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할텐데... 안타까움에, 그동안 쌓인 인정에 나는 모친이 돌아가신 것처럼 눈물을 흘렸다. 1996년 3월 3일, 85세의 나이로 선생은 영면에 드셨다. 장례식이 끝나고 난사 선생은 용인 천주교 공원에 있는 유택에 모셔졌다. 오빠 석주명 박사의 유택 옆이다. 따로 자손이 없기에 나는 학교에서 유족을 대신해 묘소를 관리토록 했다. 그리고 한남동 캠퍼스를 떠나 죽전 신캠퍼스를 지을 때 우리 대학은 한남동 시대보다 2배 넓은 박물관을 지었다. 동시에 대학 중앙박물관과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을 ‘석주선 기념박물관’으로 통합했다. 난사 선생의 유지와 학덕을 영원히 기리는 박물관이 되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박물관 서관의 로비에는 지금도 난사 선생의 흉상이 누구나 그대로 지나치지 않을 위치에서 오가는 이들을 보고 있다. 난사 선생의 전통복식에 대한 열정과 희생, 이타적 삶을 우리 단국인만이라도 기억해주길 바랄 뿐이다.

팔 대신 열정으로 화가의 꿈 이룬 오순이 교수

2018.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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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교수가 된 오순이 양이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순이 학생’, ‘마산의 오뚝이 순이’가 더 낯익고 정겹다. 내가 순이 학생을 만난 것은 43년 전이었다. 순이 학생이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까 11살쯤 이었다. 퇴근을 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특이하게도 그 소녀는 발가락에 붓을 끼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동양화를 그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어린 아이가 팔이 없는 불행을 안고 사는 것도 놀랍지만 그럼에도 의연하게 발가락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 더 놀라웠다. 담임 선생님이 강요를 한다고 될 일이겠는가? 얼마나 노력을 해야 발가락에 붓을 잡고,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어린아이의 의지가 낳은 결과였다. 놀람과 감동은 이내 걱정으로 변했다. 저렇게 연약한 아이가, 화면으로 보면 가정 형편이 넉넉해 보이지도 않던데, 얼마나 저 가상한 뜻을 지킬 수 있을까? 아니, 만약 단순한 의지가 아니라 그 의지가 화가로 열매 맺을 수 있는 재능도 함께 갖고 있다면... 재능이란 꿈이라는 꽃을 피울 씨이다. 그 씨가 꽃피려면 여건과 격려, 교육이라는 알맞은 토양이 있어야 한다. 나는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했다. 자칫 한 인간의 미래를 내 교육자적 의욕만으로 대들었다가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낳는 게 아닌지 두려웠다. 그러나 몇 번을 고민해도 결론은 같았다. 지금 내가 나서야 한다. 순이 양의 열의, 재능이 꽃피울 수 있도록 내가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다음 날 비서로 하여금 마산을 내려가 오순이 학생을 직접 면담하고 여러 가지 알아보도록 했다. 순이 학생은 부친이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목공으로 가계를 꾸리고 있었고, 집이 철로 변에 있었다. 복구할 수 없는 불행을 당한 것은 3살 때였다. 집 근처 철로 변에서 놀다 넘어졌는데 달려온 열차에 치여 두 팔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깊고 깊은 어두움에 빠진 순이 학생에게 작은 빛을 던진 분은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다. 어린 순이가 가슴에 묻어두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아픔을 그림으로 풀어보라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의 애정이 아무리 커도 순이 양을 화가로 성공시키려면 좀 더 장기적이고 강한 지원이 필요했다. 현장을 살피고 온 비서의 보고를 받고 나는 이것이 하늘에서 나에 내려준 계시라 생각했다. 고민을 접고 순이 학생 후원을 실천한다는 결심을 했다. 다시 비서를 오순이양 집으로 보내 부모님과 담임선생을 만나도록 했다. 앞으로 순이 학생이 좋은 화가로 성장하도록 돕겠다는 내 뜻을 전했다.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도 기꺼이 동의를 해주었다. 만남을 시작하고 다음 달 부터 좋은 화가를 구해서 순이 양의 개인 지도를 맡게 했고, 화가로서 커나갈 기본기를 키워 주라는 책임을 지웠다. 강사료나 그림 공부에 필요한 비용은 내가 부담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좋은 화가의 개인 지도를 받도록 경제적 후원을 지속했다. 순이 양은 비록 팔을 잃어서 발로 붓을 잡기는 했지만 대단히 의지가 강한 노력형의 인재였다. 무엇보다 집중력이 좋았고 한번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는 뒤로 미루거나 포기하지 않고 울며불며 힘들어하면서도 지도를 따라갔다. 예술은 매우 민감한 작업이다. 순이 양에게는 남모를 장애의 고통과 불편함이 매 순간마다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순이 양은 붓을 놓지 않고 하루하루 정진했다. 그 인고의 시간은 결국 큰 보람으로 바뀌었다. 순이 학생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5년이었을 게다. 지금은 없지만 당시 홍익대학 주최로 열리는 ‘전국 남녀 고교 미술 실기대회’가 있었다. 대학 입학의 특전이 걸린 상당한 권위의 대회였는데 순이 학생이 이 대회 사군자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나는 내 딸이 우승한 듯한 기쁨을 느꼈다. 몸이 겪는 그 고통과 불편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로 인해 마음이 당하는 아픔을 이겨내려면 얼마나 인내를 해야 했겠는가. 아무리 재능이 있다한 들 발로 동양화를, 그것도 섬세한 붓놀림이 필수적인 사군자에서 우승을 하다니... 순이 양보다 더 좋은 육체적 조건과 물리적 환경에서 동양화를 배우고 익힌 내로라하는 고등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든 전국대회에서 차지한 1등의 영예는 얼마든지 자랑해도 부족함이 없는 보람이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홍익대에 입학하기를 희망한다. 순이 학생인들 안 그랬겠는가. 홍익대도 오순이 양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겠다면 입학을 종용하였다. 순이 양은 기쁜 마음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홍대에 입학하겠다고 희망을 말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다른 특혜는 없는가 물었더니 없다고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홍익대에 가지 말라고 했다. 나는 바로 이유를 설명했다. “순이야, 홍익대가 설사 4년 동안 장학금을 준다 해도 너는 그 대학에 가면 안된다. 너는 장학금만으로는 너가 가진 핸디캡을 이겨내고 예술가로 성장할 수 없단다. 그러니 너를 화가로 성장시키고 평생 동안 창작 활동을 하도록 도와줄 그런 대학을 찾아서 그 대학에 입학해야 해.” 나의 말에 순이 학생은 어리둥절해 하며 되물었다. “그런 대학이 어딨을 까예?”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단국대학이란다.” 이어서 나는 순이 양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순이 너의 몸은 하나이지만 다른 학생과 달리 너는 두 몸을 가지고 있는 셈이야. 네 언니가 잠시라도 곁에 없으면 생활을 할 수가 없는 입장이잖니?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하는 자잘한 일을 언니가 수발을 들어줘야 하는 거고. 그리고 통학하기 보다는 기숙사를 써야 하는데 너는 다른 학생과 한 방을 같이 사용할 수가 없을 거야. 언니하고 같은 방을 써야 하니까. 식사도 발로 수저를 들어 홀로 먹지만 식판을 들고, 식당 자리나 강의실 좌석도 특별히 배려를 받아야 할 꺼고... 이런 일상적인 생활 속에 필요한 시설, 제도적 지원, 그리고 전면적인 경제적 후원을 해줄 수 대학이 필요한 거지. 나와 단국대학은 너를 성공시킬 때 까지 후원할 꺼야.” 순이 양의 부모님이 이런 모든 일을 해결할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이런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할 수도 없었다. 나는 순이 양을 만난 이후 9년 동안 순이 양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맺은 인연이 결국 평생을 가야 한다는 것을 이미 나는 결심하고 있었다. 단국대 입학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오순이 화백’의 꿈을 향한 하나의 중간 과정이었던 셈이다. 내 권유에 맞춰 오순이 양은 우리 대학 동양화과에 지원을 하였다. 이제는 단국대의 품에서 청년 예술가의 꿈을 키워나가면 된다는 생각에 나도 순이 양의 합격 소식을 고대하고 있었다. 실기 점수의 비중이 높은 만큼 당연히 입학 전형을 무사통과하리라 믿고 있었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순이 양이 낙방을 하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경위를 알아보니 면접시험에서 당시 미술대 학장이 오순이 양에게 F 등급을 줬다는 것이다. 더 알아보니 미술대 학장은 서양화 전공이었다. 이미 경력이 말해주듯 순이 양의 동양화 실기실력을 전국 최상위권이었다. 평소 생활 자세를 이미 10년 동안 봤기에 자세가 불량하거나 예의 없는 성품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면접 과정에서 F 등급을 줬다는 것은 순이 양을 학생으로 입학시키고 싶지 않다는, 즉 장애인이기에 우리 대학에서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없음을 공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우리가 주변에서 교수를 만나고는 하지만 때로는 명목이 대학교 선생님이지 교육자로서 사고력과 인간성이 수준 이하인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문제는 이런 교수님들로 인해 유망한 학생들이 아픔을 겪고 좌절하는 일이 발생하는 경우이다. 불행히도 대학가에서 그런 경우를 당하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랐다. 뒤이어 분노가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선친 때부터 억강부약(抑强扶弱)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장애는 약점이지 불가능이 아니다. 교육자, 그것도 대학 교수이면 제자와 학생들에게는 강자이다. 강자가 약자를 도와야 하는 법이다. 강자는 약자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것이 도리이고, 바로 그 사명을 자부하는 사람이 교수가 아닌가. 나는 대학의 공식 회의가 있는 자리에서 미술대 학장을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학장님, 오순이 수험생에게 면점 점수를 F로 주었는데 어떤 이유때문입니까?” “미술 전공 학생이 팔이 없다는데 과연 전공을 제대로 이수할지 회의적이라서 그랬습니다.” “학장님, 그러면 오순이 양이 발로 그린 그림을 본적이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그럼 구족화가라는 말은 들어보셨나요?” “네, 있습니다.” “오순이 학생이 바로 구족화가입니다. 순이 학생은 발로 그림을 그립니다. 면접을 보면서 그 학생이 어떻게 그림을 배우고, 이 자리에 까지 왔는지 물어보고, 확인해보지도 않으시다니...” 나는 머리가 뜨거워졌지만 차마 성미 그대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대신에 순이 학생의 과거와 나의 생각을 여러 사람 앞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 학생은 전국 고등학교 학생 미술대회에서 1등을 해서 홍익대가 4년 장학금을 주고 특기생으로 선발하려던 학생입니다. 그런 젊은이를 내가 공부하는데 뒤따르는 여러 가지 난제를 후원해주고, 장차 외국에 유학 까지 보낼 생각으로 우리 대학에 원서를 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학장님이 장애에 대한 선입견으로 입학을 거부했으니 당신이야 말로 교육자로서 능력이 의심스럽고 통찰력이 부족한 교수님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였기에 우리 대학과 나의 교육 철학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제가 우리 대학에 전국 대학에서는 가장 앞장서서 특수교육과를 창설하고 입학생들에게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인재들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대학 출신 특수교육 교사들이 교장부터 교원까지 우리나라 특수교육계를 리드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은 ‘특수한 조건을 가진 일반인’입니다. 이 사람들이 가진 특수한 조건을 이겨내 일반인으로 살게 하는 것이 대학의 봉사정신이고, 우리 대학이 갈 길입니다.” 나는 총장(당시)으로서 해당 교수님을 면접단에서 제외하도록 조치했다. 오순이 양은 1986년 우리 대학에 입학했다. 순이 학생을 기숙사에 거주토록했고, 언니와 같이 쓸 수 있는 방으로 정해 주었다. 순이 양은 식사를 발로 하는데 간혹 철없는 이들이 그걸 구경하듯 바라봐 마음에 상처를 받곤 했다. 그래서 별도의 방에서 언니와 식사를 하도록 했다. 학비만 감면받아 살 수는 없었고, 순이 양 언니도 직업이 필요했다. 나는 순이 양의 언니를 우리 대학 직원으로 특채했다. 그후 오순이양은 4년간 열심히 공부를 했다. 전공과목인 미술 과목만이 아니라 국어, 경영학원론, 법학통론 등 다른 교양과목도 모두 A학점을 받았다. 1990년 학과 수석으로 졸업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이미 10살 때부터 미술에 입문할 때는 붓을 잡느라 걷지도 못할만큼 발가락이 부어오를 때까지 연습을 했던 순이 양이었다. 나는 입학 때 공언한 대로 대만으로 유학을 보냈다. 중국이 아닌 대만을 선택한 것은 나의 오랜 친구이자 대만의 저명한 화가 리치마오(李奇茂)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리치마오 교수는 스페인 미술박물관 등 유럽의 국립미술관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작품을 소장하고 있을 만큼 인정받는 화가이다. 그는 내 부탁을 들어 자신의 집에서 기숙시키며 2년 동안 대만 중화미술원에서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림을 사사받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를 통해 중국어를 배운 것도 큰 소득이었다. 이후 1994년 항저우(杭州)의 <항저우국립 중국미술대>에 입학했다. 오랜 이역 생활에 지치고 힘들었지만 이 역시 잘 이겨냈다. 순이 양은 10년을 넘는 산고를 겪으며 마침내 산수화 분야를 전공한 한국 유학생으로서 중국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이라는 기록을 새로이 만들고 귀국했다. 순이 양은 이제 마산의 오뚝이 소녀 순이 학생이 아니라 어엿한 지성인이자 장인정신을 갖춘 한국화가로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04년 이후 그녀는 자신의 모교인 우리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화단에서도 중견으로 맹활약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보람찬 일이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 했는데 오순이 교수를 보면 그 말이 진실임을 새삼 실감한다. 작고 여린 싹이 이제는 훤칠한 나무가 되어 제자들에게 그늘도 줄 만큼 컸으니 내가 처음 순이 양을 만났을 때 결심한 바를 얼추 이룬 셈이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나의 노력이 아직 미흡하다는 아릿한 자책감이 있다. 오순이 교수의 반려자를 찾아주지 못한 것이다. 그뿐인가. 오 교수를 곁에서 도와준 오 교수의 언니도 아직 독신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까지는 둘이 서로 손발이 되고, 마음의 기둥이 되어 살아왔는데 이제 좋은 배우자를 만나 의좋게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기쁠 터인가. 부디 큰 사랑의 빛이 순이 양과 언니의 곁에 가득해지길 염원한다.

시대를 초월하는 '참 스승'의 길

2018.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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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는 연구와 교육이 존재 이유이다. 그러나 시대와 갈등을 겪고, 국가권력의 불의에 항의하다 핍박을 받기도 한다. 가르치는 일이 강단과 연구실에서 이뤄지기도 하지만 지식인으로서 비판적 지성을 실천하는 일도 ‘선생님의 또 다른 길’일 수 있다. 훌륭한 학덕을 갖고 계신 선생님이 정권과 타협하지 않을 때 생기는 불이익은 비단 선생님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 대학의 총장으로서 나 역시 교수들의 참여정신과 실천으로 난처한 경우를 직면하기도 했다. 이런 분들 가운데 지금까지 나의 지표로 기억 속에 살아 숨쉬는 분이 일석 이희승 선생님이시다. 한국 최고의 국어학자이자 국학자인 일석 선생님은 박정희 정권과 타협없는 불화를 겪었다. 하긴 일석 선생님이 박정희 정권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선생님은 이미 일제 강점기에 한글연구를 통해 민족정신을 지키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수감을 당했던 강골이기도 했다. 1969년은 대통령의 연임을 허용하자는 삼선개헌문제로 나라가 큰 진통을 겪을 때 일석 선생님은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 윤보선, 함석헌, 장준하,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인, 사상가 등과 함께 학계를 대표해 참여해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이 반대운동의 여파로 일석 선생님은 성균관대 대학원장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었다. 나는 일석 선생님을 찾아가 우리 대학의 동양학연구소 소장직을 맡아 달라 설득했다. 물론 선생님은 “여러 형편이 여의치 않은데 내가 단국대에 가면 장충식 총장이 난처해질 수 있다”면서 소장직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나는 “동양학연구소를 단국대의 간판 연구소로 키우고 싶은데 선생님의 학덕이 없이는 안된다”고 간곡히 부탁드렸다. 오히려 “이왕 소장직을 맡으시는 것만 아니라 동양학연구소의 기틀을 잡으려면 10년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10년 간 저와 함께 동양학연구소를 키워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젊은 총장의 패기가 맘에 드셨는지, 아니면 삼고초려를 마다않는 내 열의에 공감을 하셨는지, 선생님은 1971년에 1월에 동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셨다. 선생님이 고희를 눈앞에 둔 시기였다. 일석 선생님을 내가 모셔온다고 할 때 ‘남산’으로 불리던 정보기관의 관계자가 나에게 걱정하는 말투로 이렇게 충고하기도 했다. “재야인사로 대통령의 앞길에 사사건건 반대를 일삼는 양반을 단국대로 모셨다가 봉변을 당하면 어쩌시려 하십니까. 그것도 이미 정년퇴임을 한 나이든 양반을 굳이 소장직까지 임명하면서 말이죠...” 걱정의 말투에는 “잘 알아서 하라”는 경고의 냄새가 짙었다. 그러든 말든 일석 선생님은 정치에 대한 소신에 앞서 학식으로나 업적으로나 석학(碩學)이고 원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선생님의 지행일치, 강직과 겸손이 조화를 이룬 품성도 모자름이 없었다. 부임하시고 두 해가 지난 1973년 가을이었다. 당시 사회상황은 유신헌법이 발효되어 정치적으로 얼음처럼 냉랭한 상황이었다. 겨울이 막 시작되던 12월의 중순 경이었다. 시인 고은 씨가 이희승 소장님을 모시고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고은 씨는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가 심해지고 있는데 원로들의 참여가 절실하다. 일석 선생님이 삼선개헌에도 반대하는 성명서에 참여하셨으니 이번 유신헌법 철폐 운동에도 기꺼이 뜻을 같이 하시리라 믿고 뵈었는데 선생님께서 단국대와 장충식 총장님이 피해를 볼 수 있으니 미리 뵙고 거취를 알리시겠다며 이리 오셨다.”고 경위를 설명했다. 개헌 촉구 서명을 받으러 왔다가 일석 선생님이 사표에 서명을 하는 걸 먼저 보게 된 고은 시인도 난처한 표정이었다. 정작 일석 선생님은 평소의 온화한 표정과 말투에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동향학연구소 소장직 사표를 제출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자세를 보건데 제가 유신헌법을 고치라 요구하는 성명에 동참하면 나야 그렇다 치고, 장 총장님과 단국대도 불의의 피해를 볼 겁니다. 내가 앞으로도 내 소신을 바꾸지 않을 텐데 차라리 학교를 떠나야 총장과 대학이 편할 것입니다.” 사표를 건네시면서도 옅은 웃음을 띠셨지만 단국대에 누를 미치지 않겠다는 의지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 뜻을 알기에 더욱 더 나 역시 물러날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 서명하신 건 선생님의 소신이니까 그건 그거대로 됐습니다. 하지만 왜 동양학연구소장직 사표를 내십니까. 소장직은 정치나 유신헌법과 관계없이 저하고 하신 약속입니다. 저하고 처음 약속하시기를 동양학연구소에서 10년간 근무하시기로 하셨습니다. 한한대사전 편찬이 이제 시작인데 이 사전의 완간 책임을 다 하시고 떠나셔야 합니다.” 나 역시 웃으며 선생님의 사표를 반려했습니다. 같은 취지의 말이 몇 번 반복되었지만 나는 끝내 선생님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 일석 선생님께서는 결국 허허 웃으셨다. “장 총장 고집도 대단하시다”라면서 사표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가셨다. 나라고 대학 경영인으로서 왜 여러 생각이 생기지 않았을 까만은 당시 내가 이렇게 즉각적인 사표 거부를 한 동기는 나라도 선생님을 지켜야 한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해득실을 떠나 내 은사님, 대학의 선생님을 지키는 것이 총장의 임무라는 믿음이 본능처럼 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이희승 선생님과 고은 시인이 돌아간 뒤 두 시간 쯤 지났을까. 모 장관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이희승 박사님이 유신개헌 서명에 앞장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동양학연구소 소장 사표를 장 총장님이 책임지고 처리 하세요.” 마치 상사가 지시를 하는 명령조의 말투였다. 아무리 장관이라 해도, 대통령의 권력에 직결되는 문제라 해도 이런 지시를 받고 “네, 네”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장관에게 바로 응답했다. “저는 이희승 선생님의 사표를 수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 진심을 담아 설명했다. “일석 선생님은 제 은사님이십니다. 내가 서울대 학생시절에 선생님한테서 교양 국어를 1년간 배웠습니다. 제자가 은사님께 어떻게 사표를 운운합니까. 대학에서 선생님을 그리 모실 수는 없습니다. 만약 사표를 내야 한다면 제가 총장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가능합니다만 저는 총장으로서 내 선생님의 사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제의 도리이지만 결국 장관의 지시를 거부한 셈이 되었다. 대학을 관장하는 장관의 지시를 거부하였으니 조만간에 나의 총장 승인 취소 통지가 오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총장직 사표제출에 대한 움직임이나 일석 선생님을 대학 바깥으로 나가게 하려는 압력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유신헌법의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적 서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기도 했고, 정권은 ‘긴급조치 선포’라는 강경책을 실행해 치열한 대치국면에 접어들었다. 다행히도 일석 선생님에 대한 정부 차원의 비토는 더 이상 없었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내 철학이‘정치교수’, 혹은 ‘반정부 교수’에 대한 보호로 연장된 셈이다. 일석 선생님과 맺은 사제의 인연이 서울대 학부시절에서 비롯되었다면 대학원 시절에 맺은 인연을 지키려는 노력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개헌을 추진할 때 일석 선생님 만이 아니라 많은 대학 교수들이 개헌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고려대의 김성식 교수님도 그런 분이었다. 특히, 김 교수님은 삼선개헌 반대성명을 고려대에서 제일 먼저 발표하는 바람에 정부의 압력도 그만큼 클 수 밖에 없었다. 교수가 강단이 아닌 실물정치에 참여했으니 캠퍼스를 떠나라는 강요가 음으로, 양으로 대학에 통하던 시절이었다. 고려대는 김성식 교수님을 보호하지 못했고 김 교수님은 졸지에 해직교수가 되었다. 그런데 그 김 교수님은 내가 고려대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할 때 서양사를 수강한 은사님이었다. 자연스럽게 김 교수님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막상 사직을 하고나니 생계를 꾸리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비록 나는 동양사를 전공했지만 김성식 교수님의 학문적 성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직접 김 교수님의 강의를 수강한 내가 확신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 대학 사학과 교수님들을 설득했다. 사실 김성식 교수님의 해직에 앞서 나는 그 분의 수제자인 지동식 교수를 단국대에 초빙하기도 했다. 서양사 전공자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대학원생 시절의 스승인 김성식 교수님의 간곡한 부탁도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이같은 과정을 잘아는 사학과 교수님들은 당연히 김 교수님의 영입을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첫째는 서울대 출신 교수들이 당시 사학과의 주류였는데 고려대 출신 교수를 연이어 초빙하는 것에 대해 강한 반발을 했다. 두 번째는 정부의 서슬퍼런 압력이 있는데 정치교수로 낙인찍힌 교수를 포용했을 때 단국대와 장충식 총장이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염려였다. 나는 사학과 교수님들을 일일이 만나서 역사학자로서 김 교수님이 밝힌 소신으로 지금 고초를 당하는데 같은 역사학자들인 우리가 울타리를 쳐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역설했다. 거기에 만약 이번 일로 대학이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면 당연히 총장인 내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 그렇게 설득을 거듭하여 결국 김성식 교수님을 단국대에 안착시켰다. 김 교수님은 우리 대학에 출근하자마자 나를 찾아왔다.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고려대도 외면한 나를 단국대에서 불러주니 내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며 거듭 고마움을 밝혔다. 그러면서 “ 신의 수제자인 지동식 교수를 사학과에 영입해준 것이 첫 번째 신세인데 본인까지 신세를 져, 결국 평생 두 번의 은혜를 입었으니 장충식 총장이 베푼 신의를 꼭 단국대에서 갚겠다”고 약속을 했다. 일석 선생님도 그렇고, 김성식 교수님의 일도 있고 하니 자연스럽게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에 호출을 받기도 했고, 문교부(교육부 전신) 장관의 면담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또 다른 진보적 노동경제학자인 김윤환 교수 역시 해직이 되었는데 이 분을 우리 대학 상경대로 영입하자 관련 기관들의 눈초리는 더욱 싸늘해졌다. 특히 중앙정보부의 고압적 자세는 도를 넘어 ‘단국대 총장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식으로 확대되었다. 동시에 “김성식 교수, 김윤환 교수를 다시 내보내라.”고 압박을 했다. “교수가 연구를 위해서라면 이념적 좌우를 넘어 다양한 학문적 편력을 하는 것이고,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선생님으로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고 실천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나는 반문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말을 할 때는 총장 해임의 경우를 스스로 각오했기에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박정희 대통령이 나의 대학경영 철학과 성과에 대한 긍정적 이해가 있었기 때문인지 그 이상의 강제 조치는 없었다. 오히려 교육부 장관은 이러한 압력이 한숨 지난 뒤에 나를 만나 “고맙다.”고 하시면서“장 총장이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지만 단국대에 가서는 이희승 박사나 김성식 교수와 김윤환 교수가 정치 활동을 안 하고 조용히 계시니 다행”이라 고마워했다. 거기에 덧붙여“이희승 박사의 사표를 받고 김성식 교수와 김윤환 교수를 단국대에서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분들은 정부와 고려대를 향한 원망이 쌓이고 쌓여 정말 정치교수가 되어 극단적 비난을 퍼부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사의를 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힘들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정치상황이 이완된 시기가 왔다. 아쉽게도 김성식 교수님은 자신의 전직 대학으로 복귀를 했다. 평생을 단국대 학생을 위해 봉사하겠다던 눈물어린 약속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아니 물거품을 넘어서 고려대 출신으로 우리 사학과에 재직하던 제자 교수들도 함께 데리고 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제의 인연을 지키려 내 총장직을 담보로 걸고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또 최고의 대우와 연구비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기에 개인적으로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신의를 경우에 따라 헌신짝처럼 버리는 유형의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이 때 배웠으니 이 역시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일면이라 여겨야 할런지... 반면에 일석 선생님은 이후 우리 대학의 한한대사전 편찬 사업의 기틀을 잡아주시고, 동양학연구소의 학술활동, 연구업적 간행사업 등을 체계화하시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셨다. 나이어린 제자인 나에게도 늘 정중히 대해주셨다. 나는 그것이 대학의 권위를 지키려는 선생님의 배려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양학연구소 관련 업무를 상담할 때는 선생님을 오시라 하지 않고 내가 소장실을 찾아가 만났다. 그러면 선생님은 오히려 응당 총장실로 가야 한다면 노구를 이끌고 본관을 오시려 했다. 그러니 나 역시 방문 전화를 하고나면 부랴사랴 동양학연구소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다 보면 정작 사무실이 아니라 캠퍼스 한 복판인 범은정 앞, 학생회관 앞 계단(구 한남동캠퍼스)에서 만나기도 했으니 돌이켜보면 그 속에 숨은 선생님의 자애로움이 얼마나 컸던가. 이후 선생님은 나와의 약속대로 10년의 기간을 근무하시고 소장직을 떠났다. 더도 아닌, 덜도 아닌 1971년 1월부터 1981년 1월까지 임기를 마친 것이다. 나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약속과 후학들을 위한 배려를 앞세워 터럭만큼의 주저함이 없었다. 돌아가시면서도 평생 모은 정재를 후배 국어학자를 위한 학술기금으로 환원하신 것도 선생님다운 마무리였다. 존칭어로서의 ‘선생님’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그 뜻 그대로 삶을 일관하신 ‘선생님’이 바로 일석 이희승 선생님인 것이다. 가르침은 교단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삶과 생활 속에서도 부단히 그 진면목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교수의 권위와 이익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석 선생님의 삶을 통해 인연이란 만들어지는 것보다 그 인연을 가꾸는 노력과 신의가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백건우 피아노의 추억

201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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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하면 많은 한국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자랑스러워 한다. 실제로 그는 매년 세계 각국에서 독주회를 여는 연주가로, 그리고 한때 한국을 대표하던 배우 윤정희 씨와 가정을 이뤄 좋은 삶을 살고 있다. 한국 피아니스트 1세대의 원로급 음악가인 백건우 씨이지만 나는 ‘소년 백건우’와, 그것도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쌓는데 필수적인 ‘피아노’를 통해 또 다른 인연을 맺었다. 반세기가 훨씬 넘은 60년 전의 일이다. 내가 백건우 씨를 직접 만나게 된 것은 그가 배재중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그는 중학생이었지만 이미 피아노 신동으로 국내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특히 1956년, 열 살이었던 어린 나이에 국립교향악단과 에드바르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을 협연하며 클래식 음악계에 정식으로 데뷔를 했다. 음악의 영재 또는 수재라는 칭찬을 벗어나 한국을 빛낼 인재로 촉망받고 있었다. 한국동란의 포성이 멎은 지 10년도 안된 한국 땅에 피아노를 가진 집이 흔할 리 없었다. 그 척박한 환경에서 등장한 백건우 소년에 대한 관심은 국가적이라 할 만큼 컸었다. 그 국민적 관심이 필자의 선친에게도 손을 내밀었었나보다. 선친께서는 어느 날 나에게 피아노 연주회에 가자고 제의를 하셨다. 명동에 있는 국제극장에서 백건우 소년이 미8군 군악대와 피아노 협연을 한다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야 내가 좋아하는 분야이기에 일부러라도 연주회를 가겠지만 선친께서는 국악은 매우 좋아하셨지만 서양 음악을 좋아하시는 편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중학생의 피아노 연주를 관람하신다고 나를 동행시켜 가실 분은 아니었다. 아버님을 따라 공연장에 가서야 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주회는 대단한 성황이었다. 공연장인 국제극장에는 관람객으로 북적였고 밖에는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표를 구하다가 되돌아 갈 정도였다. 들어가고 보니 그 곳에는 이북출신, 특히 평안북도 출신 유명 인사들은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북오도청(주 : 행정법 상 미수복지구인 황해도·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함경북도의 행정 및 조사연구를 위해 세워진 이북오도위원회의 산하 도청)의 평안북도 지사를 비롯해 각 군민회장, 기타 법조인 언론인 교육계 종교계 등에 재직 중인 많은 동향 분들을 볼 수 있었다. 선친께서는 그 중에서도 평안북도 도민회 회장의 특별 초대를 받고 가신 것이다. 각별한 이유가 또 있었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백건우 군 할아버지와 내 아버지는 고향친구 사이였다. 전쟁의 참혹함을 타향에서 견뎌야 하는 실향민이자 고향 친구의 일가에 생긴 경사이니 선친은 아들인 나를 특별히 동행해 연주회를 간 것이리라. 평안북도 도민회 회장이 백건우 군의 연주회에 내 아버지를 초대한 것은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백건우 소년의 재능을 살릴 장학지원에 대한 기대가 그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피아노는 일반 가정에 들여 놓을 수 없었던 고가의 악기인 동시에 가구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피아노를 생산하지 못했다. 수입에 의존해야 하지만 달러가 귀한 시절이라 당연히 외국산 피아노를 취급할 대리점 개설도 쉽지 않았기에 돈이 있어도 개인이 사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평안북도 출신 인사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유력한 분은 많았으나 백건우 군에게 피아노를 선뜻 사줄만한 분도 없었다. 평안도민회 회장은 피아노 천재 백건우 군을 위해 피아노를 기증해줄 분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나서는 인사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범정 장형 선생을 떠올린 것이다. 선친께서는 단국대를 설립해 육영 사업가로 이미 동향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 불우한 사람을 위해서 봉사를 많이 하는 분으로도 소문이 나있었다. 당시 평북도민회장은 이 점에 착안을 하여 내 선친을 찾아와 피아노를 사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물론 백건우 군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따로 개인 연습용 피아노를 사줄 수 없었다. 선친께 피아노 기증을 설득할 그 당시에 듣기로는 백건우 군이 배재중학교 강당에 있는 피아노를 방과 후 사용한다고 했다. 겨울에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난방 시설이 없는 추운 강당에서 나이 어린 소년이 피아노 연습을 하는 것은 ‘연습’ 이전에 ‘고행’이었으리라. 백건우 ‘어린이’는 매일 학교 강당에 가서 시린 손을 녹이고 연습을 하다가 다시 추위에 손가락이 굳으면 손을 비비며 녹이고 연습을 한다고 했다. 유일한 위로는 아버지가 저고리 속에 품어 보온을 한 온 우유를 마시는 것이었다. 어린 소년의 의지고 대단하고, 이를 사랑으로 뒷받침하는 부모의 심정이 또 어땠을까. 백건우 소년의 아버지가 하는 말씀을 듣자 선친의 마음은 바로 굳어졌다. 추위에 밥을 굶는 고학생을 봐도 어떻게든 장학금을 마련해주시던 선친이시니 이런 사연을 듣고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었다. 당장 피아노를 기증해준다는 약속을 하셨다. 다만 그 약속의 결과물, 즉 피아노를 마련하는 방법이 남달랐다. 선친께서는 나를 부르시더니 피아노를 내노라 분부하셨다. 연주회를 같이 가자하신 이유는 음악을 듣자는 것이라기 보다는 “너가 가진 피아노를 백건우 군에게 주라”는 암묵적 동의를 구하려는 '사전작업'이었던 셈이다. 백건우 군의 재능이야 하늘이 주신 선물이고, 그 노력 또한 감동스럽지만 내가 마련한 피아노 역시 내게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 피아노는 독일산이었는데 우리 집에 들이기까지, 즉 수입과정에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비단 수입 과정에서 들인 노고가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그 피아노를 마련한 이유는 내 큰딸아이 때문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던 나는 내 자식들에게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게 하고픈 희망이 있었다. 자식들이 음악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도록 키워주고픈 아비의 마음이 담긴 피아노였다. 그 피아노를 사고 싶어 아내와 나는 첫 아이인 큰 딸이 태어나고부터 저축을 했다. 큰 딸이 4살 나던 해에 간신히 피아노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나마 증권회사와 개인 사업으로 약간의 돈을 만지던 때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몇 해를 걸쳐 저축을 하고, 1년을 들여 수입해온 피아노를 다른 집 아이를 위해 기증하신다니 내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선친께서는 한마디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고 당연한 일을 하시는 듯 피아노를 가져가셨다. 선친의 의지를, 더군다나 어려운 환경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는 소년에게 필요하다는 장학사업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선친께서는 피아노를 가져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림이(큰 딸의 이름)는 아직 어리잖니, 그리고 백건우 같은 영재도 아니고, 당장 피아노가 없어도 될 거야. 하지만 백건우를 보라구. 이제 해외 연주도 해야 한다 하고, 미국으로 유학도 간다는데 연습할 피아노가 꼭 있어야 하지 않겠니? 나중에 나라를 빛낼 재능이 있는 아이에게 좋은 일을 하는게 우리가 할 일이야.” 그리고는 우리 딸에게 준 피아노를 가지고 가셨다. 내 기억으로는 세관에서 수속을 마치고 피아노를 집으로 옮겨 놓은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날이었다. 피아노를 다른 사람에게 내준다고 얘기를 했지만 네 살배기 어린 아이가 이해를 할 수 없었으리라. 혹시 피아노가 상할까 마음대로 치지도 못했는데... 큰 딸은 영문도 모른 채 피아노가 집밖으로 실려 나가는 날 많이 울었다. 피아노가 들어오자 좋아했던 만큼 슬픔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피아노가 있던 자리를 보면서 울기도 했다. 나는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화분을 놓았다. 딸 아이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그런 일이 있은 후 배재중학교로부터 연락이 왔다. 피아노 기증식을 정식으로 갖기로 결정하였으니 참석해달라는 것이다. 날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배재중학교 강당 현관 앞에서 여러분들과 기념 촬영을 한 일은 선명하다. 당시 배재중학교 교장선생님, 평북도민회 회장, 평북지사와 용천군 군민회장, 그리고 나의 선친과 내가 참석하였다. 우리 대학 측에서도 많은 분들이 동석을 하여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기증식에서 만난 백건우 군은 무척 마르고 왜소한 체격에 상고머리를 하고 있었다. 기증식을 치루면서 나는 조용하고 차분해보이던 그 소년에게 새로 얻은 피아노가 큰 기쁨이 되길 염원했다. 나 역시 음악 교육을 위해 애를 써서 마련한 피아노였고, 그 피아노를 집에 들이자 뛸 듯이 기뻐한 내 딸아이의 표정이 눈에 선했으니까. 물론 일주일도 못 채우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서 헤어져야 했고 딸의 눈물만 자아내고 말았지만... 그 뒤, 백건우 소년은 1961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줄리어드음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스무살을 넘기자마자 국제콩쿠르에 입상해 성공가도에 입문하고 지금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노연주가로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내 큰딸은 유년기에 겪은 ‘피아노 기증 사건’때문인지 피아노대신 첼로로 선회해 성실히 음악 공부를 했다. ‘상고머리 중학생’이었던 백건우 소년은 이미 고희를 넘겨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나 역시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다. 피아노 기증은 이미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그야말로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피아노가 과연 내 선친께서 희망했던 대로 백건우 소년의 성장에 유익했었는지, 그리고 어찌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혹시나 비록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집에서 쓰던 피아노를 기증했다고 타박이라도 받지 않았을까 염려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물건이고, 나름 갸륵한 정성이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그 가치가 티끌처럼 가벼워지기도 하는 것이 세상의 일이니까. 언젠가 같은 자리에서 만나 그 희미한 옛 일을 놓고 정담을 나눌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 아니 흘러간 강물이니 추억 속으로 흘려보내는 게 도리인 걸까...

추억의 그림-<span style=바바라 부룩스의 설경(雪景)" style="width:208px;height:136px;" />

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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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교 천안병원 로비에는 외국의 풍경을 그린 대형 그림이 두 점 걸려있다. 하나는 캐나다 로키산맥 관광의 중심지인 재스퍼(Jasper) 인근의 산봉우리와 설경(雪景)을 그린 그림이다. 다른 하나는 로키산맥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 숲을 담고 있다. 장대하면서도 신선한 자연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 풍경화들은 캐나다의 여류화가 바바라 브룩스 (Barbara Brooks, 1941~2009)가 그린 작품이다. 두 그림 중 하나인 로키산 설경은 36년 전 내가 재스퍼 타운에 있는 화랑에서 직접 구입한 그림이고 자작나무 숲 그림은 바바라가 나를 위해서 그려 준 그림이다. 지금은 세상을 달리했지만 바바라 씨는 태평양을 건너 천안의 단국대병원에서 그림을 통해 대자연에 대한 애정을 여전히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 인연의 처음은 1983년 하계유니버시아드가 끝난 직후 시작되었다. 당시 대회는 캐나다 애드먼튼에서 열렸다. 나는 이 대회의 선수단장으로 참가해 성공적으로 대회를 끝내고 개인 시간을 가졌다. 당시 한국선수단의 통역을 현지 교포인 한영자 선생이 나를 자신이 경영하는 쇼핑 몰로 안내했다. 그동안의 수고를 위로할 겸 한 선생의 쇼핑 몰에서 물건을 팔아주려는 생각이었다. 쇼핑 몰을 둘러보던 중 우연히 로키산의 설경을 그린 그림을 마주했다. 로키산의 웅장함을 유화가 아닌 수채화로 담아낸 것이 특색이었고, 자연을 맑고 담백하게 표현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을 사고 싶어 가격을 물으니 2천 캐나다 달러라 했다. 현금이 없었기에 포기를 해야 했지만 이상하게 시선을 거둘 수 없었고 결국 계약금을 일부 내놓고 귀국 뒤에 잔금을 보낼 테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아 달라 부탁을 했다. 귀국 뒤에 잔금을 송금했고 한영자 씨가 모국을 방문하는 길에 이를 갖다가 본관 벽에 걸어놓고 관람을 했다. 화가가 유명하지도 않아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화풍이 좋아 게시를 하였는데 보는 이들이 모두 칭찬을 했다. 자꾸 좋은 그림이라는 칭찬을 하는데 정작 화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지만 바쁜 공무에 쫒기면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10 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비로소 수소문을 하였다. 한영자씨를 통해서 작가의 신상 소식이 전해왔다. “바바라 씨의 국적은 처음에는 미국이었다. 가족들과 캐나다에 여행을 왔다가 로키산의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서 캐나다 이민을 요청했다. 단순히 풍경을 즐기려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남편이 이를 거부하면서 결국 이혼하고 재스퍼 타운으로 두 딸을 데리고 이주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관광업 밖에는 따로 마땅한 산업이 없는 산골도시 재스퍼에서 그림으로 생업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니 비록 소원대로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리고 사는 삶에 행복과 보람을 느끼고 살지만 경제 형편을 늘 쪼들릴 수 밖에 없다는 얘기도 들었다. 내가 산 그림도 1년 내내 화방에 걸려 있었지만 팔리지 않았던 그림이었다. 심지어 두 딸과 사는 집의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날 형편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의 예술적 의지를 위해 용기를 냈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의 궁핍함과 생활고, 그리고 두 딸을 가진 어머니가 겪어왔을 마음 속 고통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동시에 두 딸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시련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은 열정에 걸맞게 바바라 씨의 작품에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풍부하게 녹아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아니, 이런 예술적 역량이 좀 더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바바라 씨를 한국에 초청해 우리나라의 미술 애호가에게 소개를 하면 어떨까 싶었다. 가난에 쫒기는 세 모녀에게 예술혼을 이어갈 작은 계기라도 마련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는 그녀를 초청해 개인전을 열어주자는 결심을 했다. 1993년 들어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나는 MBC 방송국의 간부들을 설득했다. 유럽과 미국에 치우쳐 있는 외국 화단 소개의 비중을 캐나다, 그것도 여자 화가를 초청해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는 점을 역설했다. MBC도 긍정적 자세를 보여 단국대학교와 MBC가 공동으로 수채화가 <바바라 브룩스 초청전>을 열기로 했다. 장소도 세종로의 프레스 센터 전시실을 빌려 규모를 키웠다. 언론사의 홍보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비록 캐나다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못 받았지만 바바라 씨의 그림을 한국의 애호가들은 달리 평가해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바바라 씨가 김포 공항에 도착하는 날 나는 그를 영접하러 공항에 나가서 처음 만났다. 많은 사진 기자들이 나와서 그녀를 카메라에 담느라 번잡하였다. 공항에서 그를 처음 만났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키가 작은 편이 아니었는데 나보다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로키산맥의 호연지기를 온 몸으로 담아낸 풍모였다. 또한 여성임에도 그분이 입고 온 옷이 너무 허름해서 또 한 번 놀랐다. 혹시라도 한국 사회가 가진 부정적 관행(사람을 외형으로 평가하는)에 불이익을 입을까 염려되어 지인을 통해 특별히 부탁해서 하루 밤 사이에 여성 정장을 만들어 선물하였다. 옷차림이 달라지니 비록 체격은 커보였지만 서양 미녀의 자태가 살아나 초대전 개막식에서 많은 팬의 시선을 끌었다. 언론도 한국에서 처음 보는 캐나다 화가의 작품이라는 점에 적극적으로 보도를 해 전시회 첫날에는 전시장에는 발을 드려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람객이 참석하였다. 전시회가 열리는 첫날 주한 캐나다 대사 내외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외교 사절들이 참석했고 우리나라 정부 요인과 외무부, 문화관광부의 고위 인사를 비롯하여 문화 예술계 인사들, 특히 유명 화가들과 그의 문하생들도 많이 자리를 함께 해 성황을 이루었다. 바바라 여사가 캐나다에서 가지고 온 그림은 15일의 전시 기간에 전부 매진되었다. 주한 캐나다 대사는 “한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된 이후 캐나다 예술가로서는 한국에서 처음 갖는 초청전임에도 그 어떤 이벤트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화행사”라며 “바바라 씨가 캐나다의 명예를 빛낸 분”이라고 개막연설을 통해 극찬을 했다. 지금 정확한 기억은 아닐 수 있지만 당시 전시회가 매진되면서 얻은 수입금은 세금을 제외하고 미화 10만 달러가 넘었다. 물론 나는 그림 판매 수입 전액을 그녀에게 증여하였다. 전시회가 끝난 뒤 캐나다 대사관 측은 바바라 씨에게 감사장을 수여하고 캐나다 정부에 한국-캐나다 문화교류에 기여했다는 공적을 보고했다. 캐 나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바바라 씨의 거주지인 재스퍼 타운이 속한 알버타 주의 대표 화가로 지명했다. 이를 뉴스로 접한 강원도가 같은 산악중심 관광 산업을 진흥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알버타주와 공식적인 자매결연까지 맺었다. 그리고 다음해 강원도가 정식으로 바바라 씨를 초청하여 전시회를 열기로 공표하였다. 가난한 화가의 창작열을 돕겠다고 나선 나의 선의가 당사자에게는 물론이고 한국-캐나다의 우의를 키우는 계기가 되었으니 내게도 큰 기쁨을 준 셈이다. 인연은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로 확대되었다. 미담을 들은 알버타 주 출신의 국회의원이 나를 초청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월터 트윈(Walter P. Twinn)으로 캐나다 원주민의 혈통을 갖고 있었다. 원주민을 대표해, 그리고 알버타 주의 대표로 상원의원이 된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러 캐나다를 간다는 사실을 안 바바라 씨는 기꺼이 나를 환영해주러 캐나다 뱅쿠버 공항까지 달려왔다. 재스퍼에서 밴쿠버 공항까지 차로 10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인 데 바바라 씨는 자신이 직접 차를 몰고 달려왔다. 바바라 화가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환영인사를 위해 10시간을 차를 몰고 달려온 것도 그렇지만 나를 위해 아예 새 차를 샀다고 말하는 바바라 씨의 얼굴은 행복한 웃음이 가득해 나를 감동케 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빚에 몰려 셋방에서 쫓겨날 불행한 처지에서 10만 달러가 넘는 수입에 알바타 주의 대표 화가이자 그림도 잘 팔리는 유명화가가 되어 자신만의 화실까지 마련했다는 근황에 나는 더 큰 자부심과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재스퍼 타운에 도착한 뒤 바바라 화백은 각종 자리에서 나를 자신의 은인, 운명을 바꿔놓은 멘토로 소개했다. 월터 트윈 상원의원도 바바라 씨의 설명을 들은 터라 더욱 더 나에게 우호적이었고 한국과 단국대학에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나는 그런 월터 트윈 의원에게 명예박사학위 수여를 제안했다. 실제로 1995년 4월 10일 나는 그를 초청해 명예경제학 박사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방문 기간 동안 바바라 여사는 새로 마련한 화실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햇볕이 잘드는 아담한 화실은 화가의 창작열을 북돋기에 충분했다. 그 자리에서 바바라 씨는 우리 대학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50장의 그림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실제로 내가 한국에 돌아온 뒤 그 후 8장의 그림이 우송되어 왔다. 바바라 씨의 건강이 지속되었다면 이 약속은 실현되었으리라 믿는다. 한편 나를 초청한 월터 트윈 의원은 알버타 주에서 나오는 생수를 제조, 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생수는 캐나다 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에 수출이 되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착안해 바바라 씨의 그림을 월터 트윈 의원이 제조하는 생수병의 바탕 그림으로 사용하도록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도 현실화되어 바바라 씨의 작품은 급기야 생수병에 부착이 되어 미국, 유럽까지 선보였고, 약 100만 여 병이 넘게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확한 계약 조건은 몰랐지만 큰 수입이 바바라 화백에게 돌아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활발한 우정을 나눴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명성과 경제적 여유가 시작된 1995년을 넘으면서 바바라 여사는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그의 장기인 수채화를 일본 등 해외에서 가르치는 등 많은 사업을 시작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건강을 지키지 못해서인지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 나 역시 서울캠퍼스 이전, 신캠퍼스 건설 사업으로 많은 일을 겪으면서 바바라 씨를 따로 챙기지 못하고 후일을 기약할 뿐이었다. 2009년의 일이었다. 재스퍼에 거주하는 지인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바바라 여사가 중병에 시달려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바라 여사가 죽기 전에 꼭 한번 장충식 박사님을 보고 싶다며 소원이라 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바바라 화백을 자주 만난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 분과 단둘이 식사를 한 적도 없었다. 나는 그를 위해서 봉사를 했는데 그 일이 바바라 화백을 국제적인 유명 화가로서의 명예를 얻게 한 것이다. 나는 한번도 이 일의 대가나 급부를 기대하지 않았다. 이후 들리는 말로는 바바라 씨가 한국 교민을 만나거나 현지 언론과 접하는 자리에서 “장충식 총장님이 자기 운명을 바꾸어 놓은 커다란 은인”이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내가 은인인들 죽기 전에 만나기를 소원한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죽어가는 예술가의 마지막을 위로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위독하다 하니 지인을 동행시켜 캐나다로 서둘러 갔다. 바바라 씨는 재스퍼의 시립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는 그의 안색이 위중한 상황을 암시해주었다. 재스퍼가 산악지대의 작은 도시라 그의 병을 치료할만한 의사가 없어서 에드먼튼에 있는 전문의를 특별히 초청하여 연명 치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병실에 들어서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꼭 잡았다. 오래 동안 보고 싶었고 다시 한국을 방문해 단국대에 좋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이리 되었다며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 그리고는 기력이 다한 듯 곧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옆에 있던 주치의와 간호사가 바바라 화백의 운명을 알려주었다. 2009년 8월의 일이었다. 바바라 화백의 작품을 처음 만난 때로부터 30년이 훨씬 넘은 일이다. 비록 그는 세상을 달리했지만 그의 그림은 우리 대학 병원 로비에 걸려 있다. 방문객들도, 교직원들도 그림을 보더라도 평범한 시선을 보낸 뒤 그대로 지나친다. 어느 누구도 바바라 화백의 사연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로키산의 풍광을 사랑하고 태평양을 건너와 화가로서 새로운 힘을 얻어 가서 죽을 때 까지 그림에 몰두하고, 단국대와 맺은 인연, 내가 보낸 응원을 기억했던 화가의 삶을 누가 기억하겠는가. 나밖에는... 그래서 추억을 더듬어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