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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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그림-<span style=바바라 부룩스의 설경(雪景)" style="width:208px;height:136px;" />

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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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교 천안병원 로비에는 외국의 풍경을 그린 대형 그림이 두 점 걸려있다. 하나는 캐나다 로키산맥 관광의 중심지인 재스퍼(Jasper) 인근의 산봉우리와 설경(雪景)을 그린 그림이다. 다른 하나는 로키산맥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 숲을 담고 있다. 장대하면서도 신선한 자연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 풍경화들은 캐나다의 여류화가 바바라 브룩스 (Barbara Brooks, 1941~2009)가 그린 작품이다. 두 그림 중 하나인 로키산 설경은 36년 전 내가 재스퍼 타운에 있는 화랑에서 직접 구입한 그림이고 자작나무 숲 그림은 바바라가 나를 위해서 그려 준 그림이다. 지금은 세상을 달리했지만 바바라 씨는 태평양을 건너 천안의 단국대병원에서 그림을 통해 대자연에 대한 애정을 여전히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 인연의 처음은 1983년 하계유니버시아드가 끝난 직후 시작되었다. 당시 대회는 캐나다 애드먼튼에서 열렸다. 나는 이 대회의 선수단장으로 참가해 성공적으로 대회를 끝내고 개인 시간을 가졌다. 당시 한국선수단의 통역을 현지 교포인 한영자 선생이 나를 자신이 경영하는 쇼핑 몰로 안내했다. 그동안의 수고를 위로할 겸 한 선생의 쇼핑 몰에서 물건을 팔아주려는 생각이었다. 쇼핑 몰을 둘러보던 중 우연히 로키산의 설경을 그린 그림을 마주했다. 로키산의 웅장함을 유화가 아닌 수채화로 담아낸 것이 특색이었고, 자연을 맑고 담백하게 표현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을 사고 싶어 가격을 물으니 2천 캐나다 달러라 했다. 현금이 없었기에 포기를 해야 했지만 이상하게 시선을 거둘 수 없었고 결국 계약금을 일부 내놓고 귀국 뒤에 잔금을 보낼 테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아 달라 부탁을 했다. 귀국 뒤에 잔금을 송금했고 한영자 씨가 모국을 방문하는 길에 이를 갖다가 본관 벽에 걸어놓고 관람을 했다. 화가가 유명하지도 않아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화풍이 좋아 게시를 하였는데 보는 이들이 모두 칭찬을 했다. 자꾸 좋은 그림이라는 칭찬을 하는데 정작 화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지만 바쁜 공무에 쫒기면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10 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비로소 수소문을 하였다. 한영자씨를 통해서 작가의 신상 소식이 전해왔다. “바바라 씨의 국적은 처음에는 미국이었다. 가족들과 캐나다에 여행을 왔다가 로키산의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서 캐나다 이민을 요청했다. 단순히 풍경을 즐기려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남편이 이를 거부하면서 결국 이혼하고 재스퍼 타운으로 두 딸을 데리고 이주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관광업 밖에는 따로 마땅한 산업이 없는 산골도시 재스퍼에서 그림으로 생업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니 비록 소원대로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리고 사는 삶에 행복과 보람을 느끼고 살지만 경제 형편을 늘 쪼들릴 수 밖에 없다는 얘기도 들었다. 내가 산 그림도 1년 내내 화방에 걸려 있었지만 팔리지 않았던 그림이었다. 심지어 두 딸과 사는 집의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날 형편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의 예술적 의지를 위해 용기를 냈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의 궁핍함과 생활고, 그리고 두 딸을 가진 어머니가 겪어왔을 마음 속 고통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동시에 두 딸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시련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은 열정에 걸맞게 바바라 씨의 작품에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풍부하게 녹아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아니, 이런 예술적 역량이 좀 더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바바라 씨를 한국에 초청해 우리나라의 미술 애호가에게 소개를 하면 어떨까 싶었다. 가난에 쫒기는 세 모녀에게 예술혼을 이어갈 작은 계기라도 마련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는 그녀를 초청해 개인전을 열어주자는 결심을 했다. 1993년 들어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나는 MBC 방송국의 간부들을 설득했다. 유럽과 미국에 치우쳐 있는 외국 화단 소개의 비중을 캐나다, 그것도 여자 화가를 초청해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는 점을 역설했다. MBC도 긍정적 자세를 보여 단국대학교와 MBC가 공동으로 수채화가 <바바라 브룩스 초청전>을 열기로 했다. 장소도 세종로의 프레스 센터 전시실을 빌려 규모를 키웠다. 언론사의 홍보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비록 캐나다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못 받았지만 바바라 씨의 그림을 한국의 애호가들은 달리 평가해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바바라 씨가 김포 공항에 도착하는 날 나는 그를 영접하러 공항에 나가서 처음 만났다. 많은 사진 기자들이 나와서 그녀를 카메라에 담느라 번잡하였다. 공항에서 그를 처음 만났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키가 작은 편이 아니었는데 나보다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로키산맥의 호연지기를 온 몸으로 담아낸 풍모였다. 또한 여성임에도 그분이 입고 온 옷이 너무 허름해서 또 한 번 놀랐다. 혹시라도 한국 사회가 가진 부정적 관행(사람을 외형으로 평가하는)에 불이익을 입을까 염려되어 지인을 통해 특별히 부탁해서 하루 밤 사이에 여성 정장을 만들어 선물하였다. 옷차림이 달라지니 비록 체격은 커보였지만 서양 미녀의 자태가 살아나 초대전 개막식에서 많은 팬의 시선을 끌었다. 언론도 한국에서 처음 보는 캐나다 화가의 작품이라는 점에 적극적으로 보도를 해 전시회 첫날에는 전시장에는 발을 드려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람객이 참석하였다. 전시회가 열리는 첫날 주한 캐나다 대사 내외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외교 사절들이 참석했고 우리나라 정부 요인과 외무부, 문화관광부의 고위 인사를 비롯하여 문화 예술계 인사들, 특히 유명 화가들과 그의 문하생들도 많이 자리를 함께 해 성황을 이루었다. 바바라 여사가 캐나다에서 가지고 온 그림은 15일의 전시 기간에 전부 매진되었다. 주한 캐나다 대사는 “한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된 이후 캐나다 예술가로서는 한국에서 처음 갖는 초청전임에도 그 어떤 이벤트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화행사”라며 “바바라 씨가 캐나다의 명예를 빛낸 분”이라고 개막연설을 통해 극찬을 했다. 지금 정확한 기억은 아닐 수 있지만 당시 전시회가 매진되면서 얻은 수입금은 세금을 제외하고 미화 10만 달러가 넘었다. 물론 나는 그림 판매 수입 전액을 그녀에게 증여하였다. 전시회가 끝난 뒤 캐나다 대사관 측은 바바라 씨에게 감사장을 수여하고 캐나다 정부에 한국-캐나다 문화교류에 기여했다는 공적을 보고했다. 캐 나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바바라 씨의 거주지인 재스퍼 타운이 속한 알버타 주의 대표 화가로 지명했다. 이를 뉴스로 접한 강원도가 같은 산악중심 관광 산업을 진흥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알버타주와 공식적인 자매결연까지 맺었다. 그리고 다음해 강원도가 정식으로 바바라 씨를 초청하여 전시회를 열기로 공표하였다. 가난한 화가의 창작열을 돕겠다고 나선 나의 선의가 당사자에게는 물론이고 한국-캐나다의 우의를 키우는 계기가 되었으니 내게도 큰 기쁨을 준 셈이다. 인연은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로 확대되었다. 미담을 들은 알버타 주 출신의 국회의원이 나를 초청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월터 트윈(Walter P. Twinn)으로 캐나다 원주민의 혈통을 갖고 있었다. 원주민을 대표해, 그리고 알버타 주의 대표로 상원의원이 된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러 캐나다를 간다는 사실을 안 바바라 씨는 기꺼이 나를 환영해주러 캐나다 뱅쿠버 공항까지 달려왔다. 재스퍼에서 밴쿠버 공항까지 차로 10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인 데 바바라 씨는 자신이 직접 차를 몰고 달려왔다. 바바라 화가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환영인사를 위해 10시간을 차를 몰고 달려온 것도 그렇지만 나를 위해 아예 새 차를 샀다고 말하는 바바라 씨의 얼굴은 행복한 웃음이 가득해 나를 감동케 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빚에 몰려 셋방에서 쫓겨날 불행한 처지에서 10만 달러가 넘는 수입에 알바타 주의 대표 화가이자 그림도 잘 팔리는 유명화가가 되어 자신만의 화실까지 마련했다는 근황에 나는 더 큰 자부심과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재스퍼 타운에 도착한 뒤 바바라 화백은 각종 자리에서 나를 자신의 은인, 운명을 바꿔놓은 멘토로 소개했다. 월터 트윈 상원의원도 바바라 씨의 설명을 들은 터라 더욱 더 나에게 우호적이었고 한국과 단국대학에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나는 그런 월터 트윈 의원에게 명예박사학위 수여를 제안했다. 실제로 1995년 4월 10일 나는 그를 초청해 명예경제학 박사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방문 기간 동안 바바라 여사는 새로 마련한 화실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햇볕이 잘드는 아담한 화실은 화가의 창작열을 북돋기에 충분했다. 그 자리에서 바바라 씨는 우리 대학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50장의 그림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실제로 내가 한국에 돌아온 뒤 그 후 8장의 그림이 우송되어 왔다. 바바라 씨의 건강이 지속되었다면 이 약속은 실현되었으리라 믿는다. 한편 나를 초청한 월터 트윈 의원은 알버타 주에서 나오는 생수를 제조, 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생수는 캐나다 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에 수출이 되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착안해 바바라 씨의 그림을 월터 트윈 의원이 제조하는 생수병의 바탕 그림으로 사용하도록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도 현실화되어 바바라 씨의 작품은 급기야 생수병에 부착이 되어 미국, 유럽까지 선보였고, 약 100만 여 병이 넘게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확한 계약 조건은 몰랐지만 큰 수입이 바바라 화백에게 돌아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활발한 우정을 나눴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명성과 경제적 여유가 시작된 1995년을 넘으면서 바바라 여사는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그의 장기인 수채화를 일본 등 해외에서 가르치는 등 많은 사업을 시작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건강을 지키지 못해서인지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 나 역시 서울캠퍼스 이전, 신캠퍼스 건설 사업으로 많은 일을 겪으면서 바바라 씨를 따로 챙기지 못하고 후일을 기약할 뿐이었다. 2009년의 일이었다. 재스퍼에 거주하는 지인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바바라 여사가 중병에 시달려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바라 여사가 죽기 전에 꼭 한번 장충식 박사님을 보고 싶다며 소원이라 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바바라 화백을 자주 만난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 분과 단둘이 식사를 한 적도 없었다. 나는 그를 위해서 봉사를 했는데 그 일이 바바라 화백을 국제적인 유명 화가로서의 명예를 얻게 한 것이다. 나는 한번도 이 일의 대가나 급부를 기대하지 않았다. 이후 들리는 말로는 바바라 씨가 한국 교민을 만나거나 현지 언론과 접하는 자리에서 “장충식 총장님이 자기 운명을 바꾸어 놓은 커다란 은인”이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내가 은인인들 죽기 전에 만나기를 소원한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죽어가는 예술가의 마지막을 위로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위독하다 하니 지인을 동행시켜 캐나다로 서둘러 갔다. 바바라 씨는 재스퍼의 시립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는 그의 안색이 위중한 상황을 암시해주었다. 재스퍼가 산악지대의 작은 도시라 그의 병을 치료할만한 의사가 없어서 에드먼튼에 있는 전문의를 특별히 초청하여 연명 치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병실에 들어서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꼭 잡았다. 오래 동안 보고 싶었고 다시 한국을 방문해 단국대에 좋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이리 되었다며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 그리고는 기력이 다한 듯 곧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옆에 있던 주치의와 간호사가 바바라 화백의 운명을 알려주었다. 2009년 8월의 일이었다. 바바라 화백의 작품을 처음 만난 때로부터 30년이 훨씬 넘은 일이다. 비록 그는 세상을 달리했지만 그의 그림은 우리 대학 병원 로비에 걸려 있다. 방문객들도, 교직원들도 그림을 보더라도 평범한 시선을 보낸 뒤 그대로 지나친다. 어느 누구도 바바라 화백의 사연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로키산의 풍광을 사랑하고 태평양을 건너와 화가로서 새로운 힘을 얻어 가서 죽을 때 까지 그림에 몰두하고, 단국대와 맺은 인연, 내가 보낸 응원을 기억했던 화가의 삶을 누가 기억하겠는가. 나밖에는... 그래서 추억을 더듬어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