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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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개를 주다가 한 개를 빠트려도 비틀어지는 사람의 마음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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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팔자는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좋은 팔자는 ‘남을 도울 수 있는 지위나 경제력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남을 돕는 일은 ‘우선 나부터 먹고 쓰고 남아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남보다 잘 먹고, 잘 살고, 그러고도 여유가 남아돌아 남들을 돕는 일이야 누군들 못하랴. 남을 돕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어렵고 힘든 환경이지만 내가 가진 힘이 남을 도울 수 있다면, 그렇게 삶을 꾸릴 수 있다면 그만한 팔자를 어찌 나쁘다 하겠는가. 다행히 나는 대학을 설립한 아버님을 만나 교육에 입신을 하고, 대학을 성장시키는 일에 매진해왔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여력이 다른 이들에게 삶을 개척할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내 힘을 보탰다. ‘먹고 쓰고 남아서’ 돕는 것이 아니라 내 도움이 상대방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믿었다. 팔자가 좋아서 돕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너는 이만하면 좋은 팔자가 아니냐? 그러니 스스로 만족하고 남을 돕는데 힘을 보태라.”고 스스로 결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마음가짐은 남을 도울 때 절대로 상대방이 은혜를 갚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저 내 도움을 받은 이들이 잘살고, 성공하면 그것으로 은혜를 갚은 셈치고 살아야 한다. “내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은혜를 갚으라”고 말을 하는 순간 내 삶의 평화는 흐트러진다고 생각한다. 지난 50년 간 얼추 계산해도 주례를 선 사람이 600여 명이 넘는다. 그 중에는 시장, 장관, 차관, 예체능계의 지도자, 총장이나 대학 교수들이 적지 않다. 그들 가운데 나를 찾고, 고마운 마음을 드러내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인간관계란 그런 것이다. 나는 부모님의 유산, 총장 시절의 수입, 아내의 도움 등을 바탕으로 장학재단을 만든 바 있다. 30년이 안되는 세월이지만 장학재단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1천500여명이 넘고, 금액으로는 70억 원이 넘는다. 지원받는 당시에는 “은혜를 기억하겠다. 꼭 다시 갚겠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이를 실천한 경우는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그래도 서운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성공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한다는 소식만 들으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이다. 그 만족감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 이상으로 바랄 것도 없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것만이 내 삶의 행복을 키우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부딪히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 잘 잊혀 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특별히 내가 무엇을 바라지도, 아니 돌아보아도 그 사람들에게 그릇된 일을 하지 않았는데 나와의 인연을 헌신짝처럼 버린 이들이 그렇다. 딱히 그럴만한 이유도 없는데 왜 그랬을까 라고 고민도 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고, 그런 고민은 결국 나에게 아픔이 되어 남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W교수이다. 내가 W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1982년경이었다. 당시 우리 대학 스키부는 한국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나는 이들을 알프스로 전지훈련 보낸 적이 있었다. 동계 스포츠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허약하던 때라 나는 대학 차원에서라도 세계수준의 여건을 갖춘 해외에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 이런 투자를 했다. 당시 전지훈련은 프랑스 쪽 알프스 산에 있는 스키장에서 이뤄졌다. 나는 훈련에 앞서 프랑스 스키협회에 현지에서 우리 선수들을 가르칠 프랑스 코치와 이를 통역해줄 한국인을 보내 달라 했다. 그래서 현지에 도착하니 바로 한국인 통역자로 나온 사람이 나중에 우리 대학 교수로 온 W교수였다. 당시 유학생이었던 W교수를 처음 본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를 마중 나온 통역자는 두 발을 쓰지 못해 양쪽 모두 목발로 도보를 하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당황했다. 가파른 언덕길, 그것도 설원을 헤매야 하는데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동행한단 말인가...나는 그에게 이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현지에 오는 한국인들을 자주 가이드 해줬다고 답했다. 이후 1주일 동안 그는 목발을 짚은 채 스키장을 누비고 다녔다. 물론 자주 넘어지고, 심지어 언덕을 뒹굴기도 했다. 선수들이 놀라 부축을 하려 하면 그는 손사래 치며 도움을 사양했다. 그 모습이 너무 씩씩하고 의젓해 교육자로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일주일을 같이 보내면서 가까워지자 나는 그의 인생 여정을 물었다. 그에게 박사 학위까지 있는데 이런 스키장 가이드로 고생을 하느냐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W교수는 어릴 적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어머니가 업어서 통학을 시켰다고 했다. 경희대 경영학과를 마치기까지 어렵고 힘들게 공부를 했고 신부님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유학 와 명문대인 그로노불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건 만 모국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이던 지방이던, 심지어 모교에도 지원을 했지만 교직을 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일반 기업체에도 구직을 했지만 장애인, 그것도 양족 목발이 없이는 이동하지 못하는 이를 받아주는 곳이 없어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야 했다고 고백했다. 프랑스는 그래도 장애인들에게 직업의 문호를 열어두고 이런 일이라도 해서 생계를 풀 수 있어 다행이라 말하던 그는 급기야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단국대에 응모한 적은 있느냐?”물었더니 없다는 대답이 왔다. 나는 그에게 단국대 교수 공채에 응시하라 권유했다. “우리 대학은 장애인 교육을 돕는 특수교육학과도 있고, 장애인 학생들도 입학하고 있으니 장애인 교수라고 박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 격려도 했다. 나는 이듬해 천안캠퍼스 경제학과에서 교수 선발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W교수에게 응모토록 연락을 했다. 다행히 W교수는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 34,5세 정도였다. W교수는 이후 나와 특별한 인연이 없이 지냈다. 총장인 내가 부담스러워서인지 그는 애써 나를 찾지 않았다. 물론 나는 내 철학이 그러하니 따로 그를 불러 얘기를 나누기가 겸연쩍었다. 몇 년이 흐르고 그는 나를 찾았다. 결혼을 하는데 주례를 서달라는 요청을 했다. 당연히 응낙했다. 그는 목발대신 휠체어를 카고 입장했다. 신부에게 결혼 결심을 물었는데 “자신의 오빠도 장애인인데 신랑을 장애인으로 구해 사회의 차별이 그릇된 인식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크게 안심을 하고 기뻐했다.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어야 하는 W교수의 난관, 이를 감내하고 돕겠다는 신부의 갸륵한 결심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선의를 베풀었다. 당시만 해도 천안캠퍼스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교사동이 없었기에 그가 맡은 과목의 강의실은 1층 강의실로만 배정토록 했다. 워낙 과목이 얽히고 설켜 있으니 이를 조정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같은 학과에서는 “장애인을 데려와 공연히 일을 만든다”는 볼멘소리도 들려왔다. 한바탕 목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애써 모른 척한 기억이 있다. 주례를 선 이후, 이런 일들로 설왕설래가 있는 때에도 W교수는 연락이 없었다. 공치사를 듣고자 함이 아니라 애써 초빙한 교수가 어찌 지내는지, 가정은 어떻게 잘 이끄는지 궁금했건만 전화 한통이 없었다. 그러다가 W교수가 교통사고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도 내가 인사를 갔다. 부상을 위로하고 건강을 기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학교 안팎에서 들리는 그에 관한 얘기들을 묻고 싶고, 그리고 같은 대학인으로서 지내는 바가 어떤지도 듣고 싶었다. 퇴원하면 연락이 있겠거니 했지만 이번에도 연락이 없었다. W교수와는 이 만남이 끝이었다. 그와는 총 4번의 만남이 전부였다. 프랑스 현지훈련 스키장에서 처음, 두 번째는 발령장을 줄 때, 세 번째는 결혼 주례를 서줄 때, 네 번째는 그가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 W교수에게 무슨 은혜를 갚아 달라 한 적도 없고, 생색을 낸 적도 없다. 내가 궁금한 것은 혹 부인과의 사이에 불편하고 어려움이 없는지 그리고 자녀는 얻었는지 같은 일상의 변화를 듣고 싶었다. 하다못해 주례를 서고나면 아이를 낳았을 때 이런저런 얘기를 듣거나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인사를 올리는 것이 양속이건만 그런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연구에 몰두해 좋은 논문을 생산한다는 얘기를 듣지도 못했다. 오히려 천안시에서 건물을 소개하고, 집을 중개하느라 바쁘다는 전언이 들려왔다. 실망이었다. 정년이 되어 학교를 떠날 때도 어떤 연락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던 걸까? 나도 모르게 내가 그에게 무슨 몹쓸 짓을 하기라도 한 건가? W교수를 생각하면 나는 남 돕기를 좋아하던 나를 보고 사람들이 해주곤 하던 충고가 생각난다. “장 박사, 어렵고 힘든 시절을 겪은 사람이 성공을 하고나면 자기가 받았던 도움은 쉽게 잊거나 아예 모른 척하기 십상이라네. 왜냐하면 불행했던 시절을 이겨낸 동력이 남의 도움 덕분이란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게 인지상정이거든. 그래서 야무진 성격의 사람들은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잘 내밀지 않는 법이야.” W교수는 지금부터 내가 말할 사람과 비교하면 그나마 또 다른 평가를 할 여지가 있다.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수십 년 동안 내가 보내준 후의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모든 인연을 부정적으로 돌려세운 사람도 있다. 그것도 내 비서실장을 했던 사람이 그럴 때는 남모르는 마음의 상처를 달래야 할 경우도 있었다. 내 비서를 지냈고, 비서실장도 지낸 S교수가 그런 사람이다. 나는 총장, 혹은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비서 또는 비서실장을 직접 발탁한 일이 거의 없다. 총무처에 공식적으로 의뢰하여 여러 간부들이 의논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적합한 인사를 추천하면 이를 받아들였다. 나와 일한 S교수는 서울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아버님이 대학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었다. 우리 대학 야간부를 졸업했는데 서무과, 학생과 등을 거쳐 내가 총장으로 취임하자 총장실 비서실장으로 추천되었다. 그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은 학교관련 대외 업무나 민원처리에 능하다는 점이었다. 공무원 생활을 했고, 70년대 식 표현으로 ‘풍채’가 좋아 대인관계에서 호의를 받기 쉬운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내가 부탁하는 대외 업무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고 있어서 나 역시 그를 믿었다. 당연히 승진도 빠르게 이뤄져 학생처장, 총무처장 등의 보직도 맡았다. 그는 한양대학교에서 도시행정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더니 교직에 뜻을 두었다. 나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교내 직원 인사문제와 재정을 책임 맡는 부총장으로 승진 발령하였다. 가정적으로도 친해져서 그의 아들과 딸의 경혼 주례도 맡아 주었다. 그가 정년을 맞자 나는 내가 설립한 범은장학재단 이사장직에 취임토록 했다. 차량을 공급해주고 아울러 봉급도 주었다. 내가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맡았을 적에는 그에게 적십자간호대학 이사장직에 임명하였다. 말하자면 나는 우리 대학 교직원 중에서 S교수를 가장 신임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총장으로서 그에게만 유독 관대한 혜택을 준 것이 있다. 그가 행정직원에서 교원으로 전환하고 싶어 할 때 이를 도와준 것이다. 도시행정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해당 과목을 강의하고 싶다고 했다. 박사학위까지 있는데 그만한 실력이 있으리라 믿었는데 불행히도 학문적 기초체력이 부실했던 것이다. 강의실에서 그 부실함이 학생들에게 드러나면서 자주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학생들이 뒤에서 그의 학문적 부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에게 들릴 정도였다. 그가 속한 전공에서는 강의 과목 배정을 놓고 언쟁이 높아졌다. 나는 이러한 불협화음을 애써 진정시키느라 교수들에게 자중을 호소하기도 했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을 당해도 인내하곤 했다. 학문은 미흡하지만 그가 학교를 위해 애쓴 일을 존중하기 때문이었다. 정년 뒤 범은장학재단 이사장으로 있게 해 기사딸린 승용차도 배정하며 예우를 했는데 9억 여원의 기금 손실을 가져왔다. 자리를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각별한 만남을 가질만한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천안캠퍼스 설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장에서 일이 생겼다. 나는 그 자리에서 축사를 했다. 천안캠퍼스 설립 과정을 아는 이라면 당연히 설립 작업 과정에서 김봉구 교수와 김유혁 교수가 얼마나 고생하며 많은 일을 했는지 다 알고 있기에 거기에 걸맞는 찬사를 보냈다. 그뿐이었다. S교수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천안캠퍼스 설립 30주년 축하의 자리에서 S교수에게 찬사를 보내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천안캠퍼스 설립 작업에 직접적인 참여를 한 적도, 업적이라 삼을만한 일을 한 적도 없었다. 더욱이 S교수를 의식해서 그를 무시한 것도, 천안캠퍼스 설립에 큰 기여를 했는데 그를 뺀 것도 아니었다. 연설을 하다가 노년에 들어 할아버지가 된 김유혁 교수, 김봉구 교수가 눈에 띄어 즉흥적으로 개교 당시의 역경을 이겨내던 두 노교수의 공덕을 치하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고 S교수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연설을 듣더니 얼굴을 붉히며 두 사람은 칭찬하면서 자신은 뺐다고 화를 냈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몇 주가 지난 뒤 이번에는 정년퇴임 교수들의 모임에서 S교수가 참석하여 당시 회장에게 말하기를 “이제부터 장충식과 인간관계를 끊겠다”는 절연을 선언했다고 했다. 당시 회장은 나에게 이를 전달하며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나는 의외로 무덤덤했다. “그러시라 하시죠.” 내가 한 말의 전부였다. 겉으로는 그리 말했지만 나는 기가 막히고 불쾌했다. 행정 직원이었던 그에게 신뢰와 중책을 부여했던 사람이 누구인가. 그의 부탁을 받아 아들과 딸의 주례를 서준 이가 누구인가. 그가 교직으로 전직시켜 달라 했을 때. 그의 강의와 연구업적이 기준에 못 미친다고 비난이 일 때마다 이를 내 책임이니 교수님들이 도와주시라 호소했던 이가 누구였던가. 사단법인인 범은장학재단에 자리를 만들어 급여와 예우를 해준 이는 누구였단 말인가?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내가 그를 비난한 적도 없고, 단지 공식 연설에서 그를 칭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절을 선언하다니...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S교수는 병원에 입원했다. 문안을 가고 싶었지만 수많은 원로교수들 앞에서 나를 의절하겠다는 선언을 했는데 찾아가는 일도 모양이 좋지 않아 뒤로 미루고 말았다. 그 뒤 S교수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별세를 했다. 그의 의절 소식을 들으며 나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열 가지, 백 가지 도움을 주고 호의를 베풀어도 단 한 가지 섭섭한 일이 생기면 그 전에 모든 일은 없던 일로 되는 것이 사람의 일이 아닌가. 남을 돕는 일이든, 장학 사업을 하던 이점을 잘 기억하고 싶다. 선하고 좋은 일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사람에게 이를 기대하지 마라. ‘선한 의지에는 보상이 없다. 사람 자체를 돕는 일로 보람을 느낄 뿐이다.’ 그것이 학연(學緣)을 가연(佳緣)으로 만드는 힘이고 내 삶을 성공시키는 길이다.

동문처럼, 친구처럼, 그러나 아픔을 준 김상현 의원

2019.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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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농 김상현 의원의 1주기가 다가온다. 지난 2018년 4월에 후농은 별세를 했다. 아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후농은 나에게 매우 각별한 정치인이었다. 후농과 나는 단국대학을 통해 인연을 맺었고, 정치인 중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 같은 정치인이었다. 후농은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성격이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6선 의원으로 한국 현대정치를 이끈 거물이고 6월 항쟁을 이끌어낸 전략가이자 김대중 대통령의 대표적 참모로 인정받았지만 인생 후반기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배신했다는 오해 섞인 비난을 받으며 관계가 멀어지기도 했다. 내가 후농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우리 대학 학생과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4월 혁명이 일어난 뒤로 대학가가 뒤숭숭하고 학생들도 들떠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학생회 간부들이 허름한 복장을 한 청년을 잡아와 내 앞에 데려왔다. 학생회 간부들의 말인 즉 “이 놈이 우리 대학을 돌아다니며 등록금도 안낸 주제에 강의를 듣고 있어서 잡아 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둑강의를 한다는 것인데 당시만 해도 우리 대학 학생이 워낙 적어서 낯선 학생은 쉽게 구별이 가능하기도 했고, 대학을 안다니면서 대학생인 척 하며 사기나 절도를 하는 사건도 잦아서 ‘대학생 사칭’은 꽤나 험악한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었다.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인 학생회 간부들을 말리고 내력을 들었다. 잡혀온 청년은 “자신은 조실부모를 하고 고학을 하며 학업을 이었는데 결국 고등학교를 못 마쳤고 집이 너무 가난해 대학을 못 갔지만 공부가 하고 싶어 도강을 했다”며 차분히 설명을 했다. 말을 듣다보니 무작정 우리 대학을 도강한 것이 아니었다. 재학생 중에 이 젊은이와 가까운, 나도 가깝게 지내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는 정치인을 꿈꾸고 있는데 단국대 정치학과의 모 교수의 강의를 꼭 듣고 싶었다”며 “마침 정치과에 친구가 있어서 그를 따라와서 강의를 들었다”고 밝혔다. 그 친한 학생은 김혁동이라고 당시 웅변으로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많이 해 유명한 학생이었다. 말을 듣다보니 그 자신도 웅변이 능해 상을 받기도 했다는데 말하는 품이 구수하고 솔직했다. 꾸밈없이 자신의 포부를 밝히며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비관하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는 자세에 인정이 끌렸다. 나는 그를 돕기로 했다. 나는 그를 교무과장에게 데려가 소개시켰다. 교무과장을 설득해 비록 학점을 받지는 못하지만 원하는 강의를 듣도록 해주도록 했다. 당시 실행중이던 청강생 제도를 빌려서 ‘비공식 청강생’으로 정치과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 비공식 청강생이 바로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을 민주화추진협의회로 묶어 직선제 개헌을 만들어내 민주당 부총재를 지낼 김상현이었다. 당시 내 나이 29세였고 김상현 의원은 26세였다. 자주는 못 만났지만 나이가 비슷한 탓에 같이 밥먹고 술먹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이 새롭게 굵은 가지를 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국회의원이 되면서부터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야당의원이 항의를 위해 사퇴를 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실시한 서대문 갑구 보궐선거에 후농이 당선되었다. 그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니 그는 하루아침에 정치계의 스타가 된 셈이었다. 특유의 웅변실력으로 연설 잘하고, 패기있는 국회의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지 얼마 안 된 시간에 그는 나를 찾아왔다. 비공식 청강생을 시켜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국회의원이라 해도 가난을 떨치지 못해 그가 밥살 일은 없었다. 그는 술을 좋아했고, 주량도 상당했다. 나는 술을 즐기지 않는데 후농의 술자리는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도 술이 마시고 싶으면 나를 청했다. 그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로서 부담 없이 살아가는 얘기를 하는 데 서로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후농은 남에게 부담을 주는 성격이 아니었고 정이 많았다. 술좌석에서도 농담과 만담을 잘 해서 함께 자리를 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그는 남도창을 구성지게 잘 불렀다. 그와 자리를 함께 하면 술값은 내가 부담하였다. 가난에 쫒겨 살아온 그의 내력을 비교적 잘 아는 나로서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립각을 세운 야당의 초선 의원에게 특별한 기대를 걸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저 그의 의지가 정계에서 시들지 않길 바라는 기대를 담아 술값을 냈던 것이다. 물론 술자리를 파하고 헤어질 때면 “장 총장에게 진 빚은 꼭 갚아야 겠다”고 입버릇처럼 장담을 하고 했다. 당시 우리 대학은 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군사정부가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내 선친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고 주간부를 폐교했다. 이로 인해 학교 존립이 어려울 만큼 교세가 오그라들고 극심한 재정난이 왔다. 설립자이신 범정 장형 선생은 낙담하여 병고에 시달리다 별세를 했다. 나는 학장으로 발령받았다. 내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1966년 11월, 학장으로 취임하자 나는 단과대학인 단국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쪼그라든 우리 대학의 현실을 극복할 유일한 대책이 종합대 승격이라고 믿었다. 졸업생이나 재학생 모두의 숙원이 종합대학 승격이었다. 종합대학 승격은 문교부의 소관이었다. 그러나 장관의 결재를 받아도 국무회의를 거쳐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대학의 명운이 달린 문제여서 지역구에 대학을 둔 국회의원들도 직간접으로 이해관계가 얽혀있어서 국회의원들의 협조도 필수적이었다. 나는 종합대학 승격을 공언한 뒤 매일 문교부(지금의 교육부)를 찾아가서 주무 부서의 계장, 과장, 고등교육국 국장을 만나 민원을 들어 달라 호소했다. 국회의 도움을 받고자 문교부를 소관하는 문공위원회의 여당 간사로 있는 김종호 의원과 위원장인 이돈해 의원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갔다. 두 분 모두 무난히 지원을 약속받았다. 일이 잘 풀리는 듯 했지만 정작 종합대학의 인가의 실무적 최종 결재권을 가진 문홍주 장관을 만날 수가 없었다. 일을 착수한지 한 달이 다돼가는 12월이 왔다. 해가 바뀌면 대학 입학정원이 조정되고, 교육부 관료의 보직도 변화하고 그러다보면 우리 대학의 민원은 이리저리 치이다가 무산되고 말 가능성이 높았다. 애가 탄 나는 문홍주 장관 면담을 몇 번이나 신청했지만 면담 허락은 없었다. 오히려 문교부 차관의 결재가 난 승인 서류를 장관이 거부해 책상에 잠들어 있다는 전언을 들으니 실망이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문 장관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는 이리저리 수소문을 하고 도움을 요청하다 서울대 사대 입학동기의 도움으로 문홍주 장관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장관 부인의 호의로 안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문 장관을 보고 대뜸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아침 식사 중이던 문 장관은 나를 보자마자 숟가락을 탁 놓으며 “당신 장 학장아냐. 학장 된지 한달 밖에 안되 총장 직을 하고 싶어 이 난리를 피는 거요. 국회의장님이 나에게 대구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해달라 했지만 거절한 나요. 주간부 복구한지 1년 밖에 안된 단국대가 종학대로 승격하면 다른 대학이나 청탁을 한 정치인들이 다 원수가 되는 건데 내가 단국대만 결재를 할 수 있겠소?” 그는 화를 내며 자리를 떨치고 출근을 재촉했다. 나라고 장관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은 수모를 당하는 창피함에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야당 의원이지만 김상현을 만나보자. 문공위 야당 간사를 맡고 있으니 내 하소연이라도 들어주겠지.” 나는 그길로 국회를 찾아가서 김상현 의원을 찾아갔다. 그는 나에게 정치과 도강을 부탁하던 시절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풍모도 의젓하고 용모도 단정했다. 하지만 나를 보자 반기는 표정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내 얘기를 들은 그는 “내가 언젠가 신세를 갚는다고 말했잖소. 내가 도울 일이 있다니 나도 기분이 좋은데요?”라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 의원은 “문 장관이 지금 나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어요. 1967년도 문교부 예산을 놓고 여야가 대립 중이거든요. 이걸 풀려고 문홍주 장관이 나에게 술자리를 갖자해서 곧 만납니다. 이 자리에 장 학장님이 동석하세요. 그러면 장 학장님의 민원을 소상히 설득할 수 있을거요.” 나는 장관의 비밀스러운 술자리에 3자인 내가 들어가면 더 큰 수모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김 의원은 “내가 문 장관에게는 장 학장과의 저녁식사가 마침 이 날로 선약했는데 장관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아예 두 분을 같이 합석하게 했다고 설명하면 장관도 화를 내지는 못하겠죠.”라며 “아니 이런 일이 있으면 당연히 나를 먼저 만나셨어야지 이제야 만나느냐?”며 농담을 건넸다. 나도 “야당 의원을 통해 청원을 하면 될 일도 안될 것 같아 그랬다”며 농담 섞인 진담을 하니 그는 웃으며 “그 날 만나면 내가 바람을 잡을 테니 장 학장님이 장관님을 아주 물고 늘어지라.”며 대꾸를 해 서로 웃으며 헤어졌다. 약속 장소는 신당동에 있는 작은 요정이었다. 그 당시 요정에서 중요한 논의를 하는 것이 정계의 관행이었는데 이곳은 그런 요정에서도 꽤 알려진 곳이라 했다. 김 의원과 문 장관은 저녁 7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나는 8시에 들어가는 것으로 각본을 짜두었다. 내가 도착해 방으로 들어가자 문홍주 장관은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장 학장이 여긴 무슨 일이요? 며칠 전에는 우리 집 안방에 쳐들어오더니 이젠 내 술집마저 찾아오고. 아주 형편없는 친구구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관이 껄껄 웃었다. 김 의원이 “제가 장 학장하고 오래된 인연이 있어 친구처럼 술마시는 사이입니다. 오늘 바로 그 약속이 있는 날인데 약속을 깰 사이가 아니라 이리로 오라했습니다.”라며 나를 두둔했다. 문 장관은 “장 학장이 재주가 좋구만. 이제 김 의원가지 동원해 단국대 일로 나를 꼼짝 못하게 묶어놓고. 기왕 왔으니 술이나 한 잔 합시다.” 두 사람은 이미 술을 마시고 있는 상태였다. 종합대학 승격에 관한 대화는 일체 꺼내지 않고 따라주는 술을 마셨다. 문 장관은 그런 나에게 “장 학장이랑 오늘 담판을 져야겠소.”라며 계속 잔을 주고받게 했다. 김상현 의원이 나를 대신해서 단국대학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였다. “장학장의 부친이자 단국대 설립자께서 모함을 받아 반혁명 인사로 몰렸고, 중앙정보부의 실수로 구속됐다가 풀려났어요. 단국대 주간부 폐교는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작용을 한거죠. 그런데 지난해는 정부에서 장형 선생에게 건국 유공자로 독립운동 공로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리고 주간부도 복원되었으니 그간의 일이 올바른 처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거죠. 이번에 단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해주셔서 억울함을 풀어주세요.”라고 사정을 했다. 문 장관은 진지하게 얘기를 듣더니 “아니, 그런데 김의원은 단대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렇게 장 학장의 민원을 대변하시는 거요?”라며 되물었다. 김 의원은 껄껄 웃으며 “저는 졸업장 없는 단국대 동창입니다. 등록금 내지 않고 단대 정치과에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학점도 없고 졸업장도 없지만 내 머리 속에는 나와 같이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 못지않게 정치학 지식이 내 머리 속에 가득차 있습니다. 그 덕으로 나는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 호의를 베푼게 장 학장이고요. 저는 장 학장하고 호형호제하는 사이입니다.”라며 다시 한번 장관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문 장관은 “내가 오늘 혹 떼러왔다가 혹 하나를 더 달고 가게 됐구만요. 좋소 이렇게 된 거 장 학장 나하고 내기 합시다.”라더니 조니 워커 3병을 주문했였다. 위스키 3병이 들어오자 “이거 한 병씩 각자가 다 마셔야 합니다. 장 학장이 나를 술로 이기면 총장감이 되는 인물이고 나보다 먼저 취해서 쓰러지면 종합대학 승격은 절대 불가하니 약속하겠소?” 하면서 내 술잔에 얼음도 넣지 않고 술을 가득 부어 마시라고 강요했다. 나는 “좋습니다. 평소 술을 마시지 않지만 마시다 죽어도 좋으니 다 마실 것입니다. 그러니 다 마시면 우리대학 종합대학 승격은 약속해주셔야 합니다!” 하고 장관과 술을 주고 받았다. 사실 나는 술을 즐기지도 않지만 체질적으로 술을 잘 마시지도 못했다. 맥주도 피하는 나인데 독한 양주를 별다른 안주나 얼음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다 마시고 나니 이미 나는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화장실을 가고 싶지만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서 일어나면 그대로 쓰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똑바로 앉으려 최선을 다했다. 이 자리에서 문 장관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하면 내가 아니라 대학이 쓰러질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술이 더 돌다가 문 장관은 완전히 취했다. 자리에서 스르르 옆으로 쓰러져 누워버렸다. 그러면서 혀가 풀린 목소리로 “술을 못 마신다는 사람이 진짜 한 병을 다 비웠구먼. 허허허 용기가 대단해!”라며 잠에 빠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넘었다. 당시에는 12시부터 통금이니 국회의원과 장관인 두 사람은 그렇다 치고 나는 집에 가기도 어려웠다. 문 장관은 비서관이 들어와 부측해서 모시고 갔고 김상현 의원도 만취가 되어 보좌관의 부측을 받아 귀가했다. 나는 요정에서 준비한 차를 타고 귀가했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속은 쓰리고 아팠고 머리는 온통 돌을 얹어놓은 듯 했지만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 나는 차를 집 앞에 세우고 기사는 통금에 단속될까 염려되니 우리 집에서 재우라 한 뒤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음날 김상현 의원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 몸을 걱정하고는 문 장관이 단국대 종합대학 승격 결재 서류를 장관실로 가지고 오라고 하부에 지시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진심으로 그의 도움과 일의 마무리까지 동참해주는 호의에 고마움을 느꼈다. 종합대학 승격의 1단계 난관을 이렇게 김상현 의원의 도움으로 풀어낼 수 있었다. 이후 2차 난관은 종합대학 승격 안건을 국무회의에 통과시키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차라리 대학을 국가에 헌납할 테니 단국대를 국가에서 운영하시라.” 호소하며 종합대 승격을 내락 받았다. 일부 국무위원들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는 정일권 국무총리를 설득해 끝내 관철시켰다. 결국 학장 취임 한단 여 만에, 1966년이 가기 전인 12월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최종 승격 인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여야 문공위원들의 반발이 없도록 의원들을 다독이는데 김상현 의원의 지원이 거듭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으니 ‘도강을 허락한’ 학연이 가져온 결실치고는 실로 크다 할 것이다. 우리 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이후에도 후농을 자주 만났다. 그는 1967년에 전국구로 공천을 받아 전국구로 재선 의원이 되었다. 후농은 테니스를 좋아했고 나 또한 테니스를 즐기는 편이라 일정이 비는 오후에 만나서 운동을 같이 했다. 술 좋아하고, 잘 마시기로 국회에서 최고로 꼽히는 후농이었기에 운동이 끝나면 식당을 찾아 술을 즐기는 편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나는 절대적으로 정치 얘기는 서로 피했다. 물론 회식을 하면 밥값은 내가 부담했다. 후농은 원래 가난했지만 정치인으로서도 치부를 하거나 돈을 밝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집에 돈을 가져가는 법이 없었다. 후농의 아내가 이것저것 작은 장사를 해 간신히 가정 경제를 꾸려나갔다. 후농은 또한 나를 자주 만나고 술을 같이 마셔도 절대로 나에게 돈을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후농은 재일교포 문제에 관심을 많이 쏟아 연구소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일본을 갈 때에 “여비가 없는데 좀 도와 달라”는 정도였다. 이렇게 교유를 하다가 정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지고 활동 범위도 커지면서 만남이 소원해졌다. 나도 대학 일로 점점 내 시간을 갖기가 힘들어졌고, 그도 김대중 총재의 최측근 보좌역으로서 나에게 신경을 쓰기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고 요정도 싫어하는 점을 그도 잘 알고 있었으니 술동무로서 내 역할도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연락이 뜸해지고 만남도 드물어지면서 시간이 흘렀다. 고학생 김상현과의 인연으로 뜻밖의 도움을 받았던 나는 이번에는 정치인 김상현과의 우정으로 뜻밖의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공표하면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는 해산되었다. 언론은 재갈을 물어야 했다. 동시에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장희 대통령에 맞선 김대중 총재와 그의 핵심 참모인 김상현 의원도 몇몇 핵심 야당 인사들과 함께 극심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후농은 국가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체포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물론 당시에는 은밀한 소문으로 구전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고문을 당하고 당하던 후농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다. 보안사 수사요원들은 고문을 하면서 “너에게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불라.”고 요구했다. 그 때 김현옥 서울시장과 내 이름을 나왔다고 했다. 나중에 태풍이 지나고 그 이유를 알게 됐지만 나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아닐 수 없는 문제였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던 나는 비상계엄 아래 학사운영을 논의하고자 학처장 회의를 하고 있었다. 계엄사령부에서 나를 만나러 왔다며 잠시 복도로 나와 달라는 전갈이 있었다. 나가보니 낯선 사람이 신분증을 보이며 동행을 요구했다. 계엄사령부가 발행한 임의동행 요청서도 있었다. 빨간 줄이 두줄로 그어 있는데 ‘계엄사령관 노재현’이라고 이름이 적혀 있었다. 비상계엄법에 의해서 영장 없이 임의 동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저기 세워놓은 검은 세단 차에 함께 타고 갑시다.” 수사관들은 명령조로 지시를 하였다. 나는 회의를 부총장에게 넘기고 번호판도 없는 검은 세단차를 두 사람과 함께 타고 갔다. 나는 계엄사령부로 가는 줄 알았는데 서빙고에 있는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이라고 하는 곳에 도착했다. 내 기억으로는 미8군 사령부에서 멀지 않은 언덕에 있는 2층 건물이었다. 2층인지 아래층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건물 구석진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방은 아주 작았지만 물이 차 있는 욕조가 있었다. 방안은 사무실 책상이 놓여 있고 수사관과 마주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두개 있었다. 한 눈에 이곳이 소문에 들었던 재야인사들을 잡아다 고문하는 곳이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물고문 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내가 무슨 큰 죄가 있다고 나를 물고문할까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잠시 뒤 계급장을 달지 않은 군복을 입고 ‘상고머리’를 한 삼십대 중반의 젊은이가 나를 신문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살기가 도는 분위기였다. 수사관은 나에게 종이를 주더니 내가 아는 정치인의 이름을 적으라했다. 나는 “안다는 뜻이 어느 범위를 말하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수사관은 “그런 것도 알려 줘야 하냐?”며 오히려 언성을 높혔다. 적당히 내가 아는 사람을 몇 명 적어 넣었다. 이를 건네받아 취조관이 명단을 읽어 보더니 갑자기 화를 내며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김상현의 이름은 왜 적지 않았냐”고 잔뜩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당신하고 제일 친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지 않은 것을 보니 뭘 숨기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서류를 꺼내더니 김상현 의원이 실토했다며 내용을 읽어줬다. 서류는 김 의원 취조 조서였는데 그가 실토했다는 내용은 “내가 거액을 지원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나는 그런 일이 없으니 당연히 부인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강하게 부인하면서 말도 안되는 내용을 왜 강요하느냐고 항의하자 나를 째려보던 수사관은 한명을 남겨두고 밖에 나갔다. 다시 돌아온 그는 “이 양반이 총장이라고 대접해주니 여기를 우습게 아는거요? 다 아는데 진술 거부하는거요?”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김상현 의원에게 밥을 사거나 술을 같이 한 적은 종종 있었고 그가 일본에 출장간다며 용돈을 달라고 해서 몇번 주었으나 그야 말로 내 월급의 반의 반도 안되는 돈이었다.”라는 요지로 간곡히 설명했다. 김상현 의원이 불었다는 조서에 따르면 금액이 내가 실제로 지원한 용돈의 10배도 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잠시 후농의 과장된 진술에 왜 이런 엉뚱한 말을 했을가 화가 났다. 그러나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도대체 얼마나 맞고, 고문을 당했으면 이렇게 있지고 않은 사실을 말했을까 하는 짐작이 들었다. 내가 겨겨한 반응을 보이며 왜곡된 사실에 계속 항의하자 그들은 물리적 고통을 가하기 시작했다. 거의 한나절을 매질에 시달렸다. 수사관의 구타는 육체적 아픔보다는 정신적 수모와 모욕감이 더 깊게 다가왔다. 자백을 강요했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강요받는 줄거리는 내가 ‘김상현 의원을 통해 김대중 총재에게 자금즐 역할을 했다’라는 것인데 그럴만한 재력이 나에게 없었으니 인정할래도 할 수가 없는 억지였다. 맞으면서 분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이면이구나. 암흑 세계가 이렇게 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우울했다. 군사쿠데타 직후 선친이 장면 총리 사건에 연루됐다는 무고에 휘말려 나 역시 끌려가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서빙고 분실의 구타는 그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아픔이었다. 취조는 하루 만에 끝났다. 정치에 간여하지 않은 그동안의 이력과 대학 육성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 여당에 협조하며 쌓은 네트워크가 더 이상의 악화를 막은 것 같았다. 내가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풀려 나온 후에 김상현 의원 부인이 우리 집을 찾아 왔다.부인은 “남편을 형무소로 면회가서 만났더니 정부와 여당에 가까운 사람의 이름을 대면 재야 인사들 보다는 고통을 받지 않을 것 같아서 부풀려 자백을 했다고 해요. 너무 고문이 심해 정신을 잃고 다시 고문을 받는 일을 일주일 넘게 당하니 급한 불을 피해야 했기에 폐를 끼쳤다며 미안하다 꼭 전해달라 해서 이렇게 찾아 왔어요.”라며 거듭 와서 죄송하다 했다. 말을 전하는 부인 역시 남편의 극심한 고통과 이로 인한 결례가 어찌 쉽게 받아들여지겠는가. 후농의 아내는 말 끝에 참혹한 현실을 놓고 눈물을 참지 못했다. 후농은 그 뒤로 2년 정도 감옥 생활을 했다. 출옥을 한 뒤 나를 찾지 않았다. 나는 그런 후농의 뜻을 서운해 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잠시 “당신의 진술로 나는 물론이고 대학과 대학 재단이 큰 봉변을 당할 뻔했다.”고 항변할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가 당한 고통의 크기는 얼마나 컸을까. 그리고 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나와의 재회를 피하게 하는 것이리라.”하는 마음으로 이해를 하기로 했다. 대학을 통해 맺은 인연으로 어느 동문보다 더 뜨겁게 나를 도와준 후농 김상현 의원의 유업이 우리나라 정치계에 좋은 자산으로 남기를 기원한다.

석두성 - 청년실업가와 고학생이 맺은 40년의 인연

2018.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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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3월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명동의 증권가에 발을 내딛었다. 큰돈을 벌어 아버지의 육영사업을 돕고 싶다는 것이 동기였다. 또 하나는 내 나름대로 제대로 된 장학 사업을 하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고 싶어서였다. 내 나이 스물 대여섯 살로 한창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자부하던 때였다. 당시 명동은 한국의 돈이 몰리던 곳이었다. 증권사와 사채업자들, 거기에 암달러상까지 전쟁의 참극을 벗어나려는 신생독립국가의 금융 산업이 막 기지개를 켜던 요람이 바로 명동이었다. 당연히 나도 증권회사를 들어갔다. 당시 한창 잘나가던 대창증권 주식회사였다. 당시 증권회사의 돈벌이는 주식이 아니라 국채였다. 기업은 전쟁으로 시장이 다 무너진 판이니 제대로 된 회사가 없었고 주식도 당연히 수익을 낼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핵심인 되는 투자 수단은 국가가 발행하는 채권, 즉 국채였다. 휴전 뒤 부족한 복구자금을 융통하려고 정부는 5%의 이자를 보증하는 채권을 발행했다. 이 채권을 ‘5분리(五分利) 건국국채’라 불렀다. 이 채권은 발행 액면가에 비해 20% 정도의 가격으로 시장에 나오는 데, 이를 갖고 있으면 거치기간 뒤에 두세 배, 만기인 5년이 지나면 다섯 배의 상환금에 이자를 챙길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 국채를 사려는 투자자들이 몰려 유통가격이 수시로 오르고 내리는데 바로 이 틈을 이용해 거래 수익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요즘 증권이나 선물 거래에 이용되는 레버리지 효과도 활용할 수 있으니 작은 돈으로도 수십, 수백 배의 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나는 대창증권에서 국채 투자에 제법 능력을 발휘했다. 레버리지 효과를 활용해 굵직한 거래에 성공했고 당연히 큰 수익을 거뒀다. 1년도 안되어 나는 대창증권의 상임 감사 역을 맡았다. 지금으로 치면 투자 거래를 조정하는 역할이었다. 그 때 나와 같이 임원 직위에 있는 이들은 대체로 50세 정도였으니 나의 성과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증권에 머무르지 않고 본격적인 자본 투자 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세운 사업체는 흥이건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건물이나 여러 시설들을 복구해야 했기에 이런저런 건설사업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건설이나 설비 기술자들은 자본이 없었다. 그들은 명동에서 사업 자본을 구해 공사를 진행하고 대금을 받으면 빌린 돈을 갚았다. 이 과정에서 투입되는 대부금의 이자는 지독한 고율이었다. 공사를 진행해 이득이 나오면 보통 돈을 빌려준 대부업자가 70%를 갖고, 기술자들은 30%만 갖고 갈 정도였다. 나는 여윳돈을 여기에 투자했다. 물론 내 원칙은 달랐다. 나는 사업 이익의 30%를 갖고, 기술자들에게 70%를 배분했다. 대신에 공사대금을 떼먹힐 염려가 없는 안전한 프로젝트를 갖고 오도록 했다. 또한 공사를 가져오는 기술자들의 인품도 살펴보았다. 신용과 기술력이 좋은 이들에게 자금을 융통해주었다. 사기와 투기가 난무하던 시기였지만 ‘자본가 30%, 기술자 70%’라는 나의 사업 원칙은 빠르게 돈을 벌게 해줬다. 업계의 나에 대한 평가도 좋았고, 젊은 사람이지만 큰 사업가가 될 것이라는 칭찬도 많이 받았다. 26살의 청년이 구하기 힘든 미제 세단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아버지 벌의 연세를 가진 이들을 부하직원으로 두고 사업했다. 다들 나를 청년실업가라 불렀고 나 역시 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많은 돈을 만졌지만 나는 당시 사업가들에 유행하던 도박, 요정, 댄스 행락에 동참하지 않았다. 부친의 엄격함도 원인이었지만 처음부터 나는 사업의 목적을 장차 내 철학을 살린 장학사업을 한다는 데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학 이사장으로 계시는 부친께 용채를 드리는 것이 기쁨이고 나름의 자부였다. 대학 때는 택시운전기사의 조수까지 시키며 나에게 호된 가르침을 주시던 부친에게 용돈을 드리면서 나는 효자라는 칭찬을 받았고 그것이 내 보람이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던 겨울이었다. 유난히 추운 날로 기억된다. 고등학생 모자를 쓰고 교복을 입은 학생이 우리 사무실에 들어왔다. 추위에 얼굴이 붉게 얼어 있었다.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돌아다녀서였는지 손도 붉게 얼어 있었다. 교복 윗주머니에 명찰이 있는데 ‘석두성’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얼굴이고 손이고 너무 추위에 얼어붙은 듯한 행색이어서 아마 밖이 너무 추우니 난로 불에 몸이라도 녹이려 들어왔나 보다 하고 일부러 시선을 돌리려했다. 그런데 학생은 머뭇거리며 뭔가를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추워서 들어온 게 아닌가 보네?” 내가 묻자 학생은 용건을 밝혔다. “저... 도장이나 명함 주문을 받으러 왔어요.” “교복을 입은 걸 보니 학생 같은데, 고등학생이 낮인데 학교는 안가고?” “저는 선린상고 다녀요. 야간부라 밤에 학교가니까, 낮에는 이걸로 돈을 법니다.” 고학생(苦學生)인 셈이었다. 당시에는 일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고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명동에서 이렇게 힘들게 일하며 배우는 학생을 만난다는 것은 기특하고도 서러운 일이었다. 내력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육이오 사변 나고 아버지가 좌익으로 몰려 총살을 당했어요. 어머니는 여주와 이천에서 참기름을 사서 동네에 찾아가 팔아 형제들과 생계를 꾸리고 있습니다. 형제로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는데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어요. 나 홀로 서울에 와서 야간부를 다니고 있는데 일을 해서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학생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이상하게 이 학생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없이 혼자 생계를 해결하면서 공부를 하려는 노력이 꺾일까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얘기를 듣자마자 집으로 전화를 해 아버님과 어머님께 사전 승낙을 받고 아내에게도 사전 통고를 했다. 그리곤 퇴근길에 이화동에 있는 내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에 남은 방이 있어서 혼자 사용하도록 했다. 나는 석두성 군에게 내 계획을 밝혔다. “당장 내일부터 명함이나 도장 주문 받으러 다니는 행상은 그만두거라. 내가 우리 회사에 사환으로 채용하도록 할 거야. 상고에서 공부 열심히 하면 더 좋은 일자리도 생기고, 아니면 네가 원한다면 대학공부도 할 수 있어. 그리고 두 동생들에게도 말해라. 이번 봄이 오면 서울로 와서 야간 학교에 다닐 준비를 하라고 해. 일자리는 내가 알아 봐줄 테니 3남매가 같이 일하면서 공부해서 차례로 취직하고 서로 도와주면 어머님도 편해 지실거야.” 나는 내가 말한 계획대로 하나씩 풀어갔다. 두성 학생은 사환으로 채용했고 두 동생도 봄에 신학기가 시작하면서 야간 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여동생은 아버지께 청원을 해 단국대학 재단의 상무이사실에서 사환으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석두성 군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단국대학 야간부 상학과에 입학시켰다. 학교 밖에서 일하면 공부에 지장이 있을 수 있어 대학 도서관에서 직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석두성 군은 4년간 낮에는 대학 직원으로, 밤에는 대학생으로 착실하게 공부를 마쳤다. 두 동생들도 똑같이 일하고 배우면서 성장했다. 석두성 삼남매가 모두 힘과 마음을 합쳐 여러 해 동안 월급을 꼬박꼬박 받아서 저축한 덕분에 어머니도 행상을 안하고 서울로 모시고 와서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나는 석두성 학생을 대학생으로 만든 뒤 ‘청년실업가’ 생활을 접기로 했다. 앞서 말한 국채 매매사업이 자유당 정부의 강제로 인해 일대 파동을 겪어야 했고, 이 과정에서 하루아침에 대창증권이 파산하고 말았다. 정부의 파행적 정책,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후진적 경제구조에서 기업이란 모래성과도 같은 허무한 일이라는 자각도 했다. 기업을 키우려면 권력을 섬기고, 돈 벌 일을 찾으려면 도박이나 술집을 출입해야 한다는 풍토도 나와는 맞지 않은 일이었다. 증권사업을 정리한 나는 학계 진출로 내 삶의 방향을 재정립해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반면에 석두성군은 대학을 졸업하더니 자신의 경제적 발판이었던 대학 직원직을 떠나 증권 회사로 전직했다. 고교 동창의 권유가 있었다는 데 증권업계가 아무래도 돈을 벌고 출세하기가 빠르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대학 교직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증권회사 정식 사원으로 취업이 되었다. 그가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제법 정사원으로 활동할 수 있을 쯤 나를 찾아와서 자기네 증권회사에 투자를 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증권회사는 당시만 해도 사원이 성장하려면 굵직한 투자 자금을 유치하는 것이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나는 기꺼이 내 장인을 소개 해주었다. 내 장인은 석두성 군이 우리 집에서 여러 해 동안 숙식을 하면서 가족처럼 지냈기 때문에 그를 믿고 상당한 금액을 투자하였다. 결과적으로 내 장인의 투자는 쪽박을 찰만큼 결정적인 실패가 되고 말았다. 석두성 군은 장인을 자기 증권사의 고객으로 유치한 것이 아니라 장인의 돈으로 자신이 직접 투자를 한 것이다. 장인의 투자는 해당 증권회사와 무관한 개인의 문제가 돼버렸다. 그나마 석두성 군이 투자한 종목이 사고가 생겨서 홀딱 망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내 장인의 투자금은 하나도 남는 것이 없이 손해를 보고 말았다. 그뿐 만이 아니라 증권회사의 공금을 유용하여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결국 장인어른의 피땀 어린 자산을 사기꾼에게 갖다 바치도록 유도한 셈이 되었다. 석두성 군의 해직도 회사에 연락하고서야 알 수 있었다. 석두성군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피하고 있었다. 그가 학교를 떠나 증권회사로 옮겨가서 성공하기를 빌었건만... 그가 근무하던 회사를 찾아가 들어보니 회사 공금을 횡령한 죄로 따귀를 맞고 쫓겨났다는 말에 탄식을 감출 수 없었다. 그 회사 간부에게 물어 보았다. 공금을 횡령했으면 왜 회사에서 고소하지 않았느냐고. 그 간부는 석두성 군이 회사 사장의 이종사촌과 결혼했기 때문에 고소할 수 없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배신감에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내가 그를 동생으로 삼아 공부시키고 대학 직원으로 취업을 시켰으면 끝까지 붙잡고 인간 교육을 시켜야 했는데 이를 이루지 못한 것이 나의 죄라고 자성했다. 그리고 장인에게 용서를 빌고 석두성 군을 믿고 거액을 투자한 전액을 변상해드렸다. 석두성 군이 일국증권에서 해직당하고 전혀 소식이 없었다. 우리 집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내 동생처럼 지냈는데 내 장인의 노후 자금을 송두리째 가로챈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렇게 일이년이 흘렀다. 소식 한 줄 없던 석두성 군이 나를 집으로 찾아 왔다. “아니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 또 무슨 일을 하려고 왔어?” 분한 마음에 야단을 쳤다. 그는 무릎을 꿇고 울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옷이 남루하고 구두도 신지 못하고 헌 고무신을 신고 왔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영양실조가 생긴 듯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그런 행색을 보니 화가 치밀다가 가엾은 생각이 나서 그간의 경위를 물었다. 자기 딴에는 개인적으로 회사 돈과 내 장인의 돈을 이용해 주식에 투자하여 성공하면 이익을 더해 돌려주고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저 했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회사마저 쫓겨난 것이다. 2년 만에 초라한 그의 모습을 보자 그에 대한 증오심보다는 가여운 생각이 들어서 용서하기로 결심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인데 이로 인해 인생 전체가 실패로 내몰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번 일로 반성하고 새사람이 되기를 당부하였다. 나는 석두성 군을 용서하고 다시 우리 대학의 재무처 직원으로 복직을 시켰다. 일부 간부들은 학교를 등지고 떠난 자를 왜 복직시키는가 반대의 여론도 끓었다. 나는 재기의 기회를 주자고 고집하여 채용하였다. 복직한 그는 열심히 일했다. 그 무렵의 나는 단국대학교의 규모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몰고 갔다. 내가 학장으로 취임해서 종합대학 총장으로 승진하는 기간이 불과 7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사학의 재정 형편은 철저히 재학생 규모에 좌우되었다. 학생 수가 많아야 그들이 내는 등록금으로 교사도 짓고 교수도 많이 채용할 수 있었다. 규모가 큰 대학이 명문 대학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학장 취임 직후의 단국대학교 학생 수는 1천2백 여 명으로 전국 4년제 대학 가운데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교직원 수는 60여 명이었다. 나는 교세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세우고 어느 대학보다도 교세 확충에 주력했다. 사학 최초로 천안캠퍼스를 설립하여 학생정원을 확충했다. 어떻게든 대학의 외형을 확충하여 다른 대학에 비견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자는 의지로 몸부림을 쳤다. 당시 학생 수는 급속도로 증원되었지만 학생이 납입하는 등록금 가운데 교사와 대지를 마련하기 위한 재원으로 쓸 수 있는 돈은 등록금 전체의 20%를 넘지 못했다. 당연히 은행의 융자나 급하면 사채도 필요했다. 교수나 직원들은 대학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발전하는 데는 기뻐했지만 자금을 마련하는 문제에서는 대부분은 나 몰라라 였고 성의도 능력도 없었다. 10년이 넘는 간절한 노력 끝에 사립대학 중 학생 수로는 5위권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같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가장 크게 협조해준 직원이 석두성 군이었다. 종합대학 승격, 천안캠퍼스 설립 등 대학이 발전하면서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석두성 군은 나를 도와 열심히 일했고 직위도 재무처장까지 승진하였다. 한때는 법인과 대학의 재무처장을 겸직하여 다른 이들의 시샘을 받기도 하였다. 사실 법인과 대학은 사립학교법으로는 재정적으로 분리하도록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더해서 법인은 대학의 재정운용을 감사하는 것이 주요 업무이기도 하다. 나는 이같은 법률적 우려를 감안해 법인 사무처 처장 겸직이 곤란하니 하나는 내놓고 일하라고 했다. 석 처장은 그것이 섭섭하였던지 사표를 제출했다. 내가 만류하자 그는 ‘학교가 아니더라도 먹고 살 수 있다’면서 ‘나가서 내 사업을 하겠다’고 고집했다. 생각을 다시 하라며 사표를 만류했지만 자신의 결심은 변함이 없다고 하여 결국 학교를 떠났다. 그가 떠나고 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석두성 처장이 이미 경기도 포천군(당시는 시 승격 전이었음)에 스키장을 세우려 10여 만 평의 임야를 샀다는 소문을 들려줬다. 1980년 대 들어 정부의 스포츠 육성정책이나 소득증대에 따른 스키 인구 확대에 힘입어 스키장 사업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고학생에서 대학 직원이 되어 증권회사 직원이 될 때도 훌쩍 떠났다가 장인의 돈까지 날려먹고 결국 고무신을 신은 채로 울며 도움을 요청해 받아줬는데 또 ‘학교가 아니라도 살 수 있다’며 떠나다니...서운한 마음이야 어찌 없겠는가. 그래도 부디 꿈꾸는 사업이 잘 되기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석 처장은 다시 나에게 왔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산을 사서 스키장을 만들면 큰 수입이 생기리라 생각하고 관청에 허가 신청을 냈지만 허가가 나지 않았다. 스키장 개장을 허가 받기위한 신청서는 다 반환되었다. 결국 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었다. 결국 그는 나를 찾아와서 자기가 사놓은 산에 스키장이 개장되는 허가를 얻는 데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다. 이게 무슨 인연이던가. 그의 과거, 그리고 최근 나에게 몰인정하게 대하며 떠난 일을 생각하면 다시는 그를 상대하지 않으려고 결심했건만... “그래 그 어려운 고학생이 이제 사업가가 되려 큰 도전을 한다는데 도와야지. 학교에 사표도 냈는데 이 일이 안되면 망하는 일이 아닌가. 나도 한때 청년 실업가로 큰돈을 벌겠다는 야망을 키운 적이 있지 않던가.” 결국 결심을 허물고 그를 돕는 일에 발을 내딛었다. 만나야 할 사람, 내 자존심을 굽히고 부탁을 해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장관급 인사와 현직 장관만 해도 일곱, 여덟 명을 만나야만 했다. 석두성 전 처장이 만나자 한다고 면담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경기도 지사를 비롯하여 내무부 장관, 건설부 장관, 국방부 장관, 산림청장 등을 한 달 사이에 쫒아가 다 만났다. 면담을 하며 스키장의 당위성을 설득해 허가를 내주도록 구두 약속을 받았다. 그들은 나와 단국대학이 오래전부터 많은 스키 선수와 스케이트 선수를 양성한 한국 동계스포츠의 개척자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오랜 노력이 쌓여 우리나라가 국제 동계스포츠 무대에서 국위를 선양한 기반이 되었음을 인정하여 스키장 허가를 해준 것이다. 1985년에 결국 석두성 전 처장은 스키장 사장이 되었다. 내 공덕을 잊지 않겠다며 석 사장은 스키장 이름도 단국대의 상징 동물인 곰을 빌어 베어스 타운(Bear’s Town)이라 이름 지었다. 자기는 그런 뜻이라 했지만 정작 나는 ‘베어스 타운이’ 단국대를 연상시키면서 단국대학이 소유권이 있는 양 오해를 받기도 했다. 특히, 이런 오해가 루머로 변질되어 정보나 사정기관에서 내가 베어스 타운의 숨은 소유주이니, 대학 총장이 무슨 돈이 있어 스키장을 세우느냐며 비밀리에 조사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물론 석 사장은 감사의 표시로 나에게 개인적으로 주식을 증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선물을 받을 내가 아니었다. 그런 대가를 받으려 내가 키운 사람에게 주식을 받을 일이 있겠는가. 정보기관의 뒷조사는 그저 루머를 확인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석두성 사장의 사업은 그 뒤로 순조롭게 발전했다. 서울에서 멀지않은 거리라는 강점이 스키어들을 불러 모았다. 이에 힘입어 스키장 내에 콘도를 지어 분양을 했는데 이것이 인기를 끌면서 회사 규모가 한 단계 도약을 했다. 돈이 잘 벌리자 그는 석두성 회장으로 위상을 높혔다. 그리고 나에게 은혜를 갚겠다면서 콘도를 선물하겠다 했지만 역시 거절했다. 나는 석두성 회장의 이런 선물을 거절할 때 마다 “사업이 잘되면 나보다 자네가 성장하는 데 발판이 된 단국대학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많이 주는 게 나를 돕는 길일세.”라고 당부하곤 했다. 석두성 회장은 대신에 베어스타운 회사의 주식 20%를 기부하고 1990년도에 우리 대학이 미국 오리건주 애쉬랜드시에 동양문화연구소를 설립할 때에 5억 원을 기부하였다. 더욱 큰 회사로 성장했으면 좋겠지만 나의 기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사업이 잘되자 건설업에도 진출했다. 특히 일본에 있는 골프장까지 인수하였는데 골프장 근처의 화산이 터졌다. 이로 인한 화산재가 매일 골프장에 쌓이는 바람에 결국 영업이 안 되어 큰 적자 부담을 지고 말았다. 건설사도 국가적 재정위기가 닥치자 극심한 불경기에 휩싸이면서 도산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인수한 건설회사는 우리 대학 교사 신축사업을 하청받기도 했으나 재정난이 겹치면서 결국 우리 대학에도 피해를 미치고 말았다. 사람은 어려운 형편에 맞닥뜨려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몇 년의 사태 진행에서 석두성 회장은 우리 대학에는 피해를, 나에게는 실로 견디기 힘든 실망을 주었다. 재물은 쌓았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주고받은 은혜와 신의는 그렇게 가볍게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유리하면 등을 돌리고 불리하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그런 석두성 회장이지만 그는 우리 대학의 역사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우리 대학이 신캠퍼스 건설 사업을 착수하려는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 요건인 대학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때 이 부지를, 그러니까 지금의 죽전캠퍼스 부지를 매입하도록 알선해준 이가 바로 석두성 회장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1957년에 명동에서 맺은 고학생과의 작은 만남이 나에게 마냥 아픔만 준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아무튼 1990년대 후반 이후 몇 번의 부침을 겪다가 석두성 회장이 세운 회사는 이랜드라는 그룹회사로 매각되었다. 후일담이지만 매각을 했는데 제대로 대가를 받지 못해 그 충격으로 병석에 들었다는 전언을 듣기도 했다. 주식을 매각하면서 우리 대학이 소유했던 베어스타운의 주식도 20%에서 단 1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것이 나와 석두성 회장의 40년에 걸친 인연의 상징이라 생각한다. 어린 고학생을 집에 데리고 와서 같이 살며 성장을 했지만 인간적 의리보다 이재에 매몰되어 소중한 인연을 1주의 주식처럼 가볍게 날려버린 인생 여정. 가만히 자신에게 되물어 볼 일이다. 지금의 나에게 베풀어진 호의와 선의, 그리고 하늘이 주신 도움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신앙과 사랑으로 풍성해진 '경주 9남매'의 성장

2018.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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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이 된 건가. 1999년의 설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TV를 보고 있었다. 생활정보를 중심으로 제작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경상북도 경주시의 외곽에 살고 있는 가족들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그저 휴식 삼아 화면을 바라보던 나의 가슴에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화면에 나오는 가족은 부모님과 9남매로 이뤄져 있었다. 9남매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장녀가 18살인가 했고, 막내는 4살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0년 전이지만 흔치 않은 대가족이었다. 주소로는 경주시이지만 양남면이라고 울산시 방향으로 도심지에서 한참 떨어진 산골이었다. 당시 초등학교를 다니려 해도 5Km를 걸어가야 하는 궁벽한 농촌이었다. 그러다보니 농사를 한다지만 9남매의 생계를 꾸리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이야 그렇다 치지만 내 마음에 와 닿은 점은 그런 시련이 아니었다. 그 시련 속에서도 푸르고 어여쁜 마음을 잃지 않는 부모님과 자녀들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자기가 할 일을 맡아서 씩씩하게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일손을 덜어드리려 농사부터 가사까지 뭔가를 감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20년 전이라지만 이미 각박한 도시생활에 찌들었던 당시 사회상에 비춰보면 맑은 공기를 호흡하는 느낌이었다. 더욱 대단한 점은 바로 부모님이었다. 육아를 하며, 또 생계를 꾸리다보면 지치고 힘든 낯빛과 기색을 보여야 하는데 이 분들은 싱글벙글 밝은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방송 내용 속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9남매 키우느라 힘드시지 않냐”고 묻자 “사실 13 남매를 낳으려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해 아쉽다”고 웃으며 답했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사람은 다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갖고 태어나는 법이니 미리 걱정할 일이 아니다”라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세상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진실한 고민과 실천을 하는 과정에서 얻은 신앙의 결과라는 게 마음으로 다가왔다. 그런 점이 신선한 충격을 주었지만 내가 큰 감동을 받은 부분은 또 있었다. 산골의 어둔 밤이 가고 아침이 되자 한 가족은 밥상에 다 모였다. 아버지가 이끄는 데로 아이들은 모두 성경책을 중심으로 모여 앉아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작은 방에 밥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성경책을 놓고 기도를 하는 모습은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소박하지만 그 속에는 든든한 신앙의 기둥과 어질고 착한 부모님, 그리고 온전히 사랑으로 축복받고 자라는 아이들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같은 기독인으로서 저 어린 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에 더해 사회의 보살핌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저 아이들은 분명히 우리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어질고 착한 부모님의 학비 부담을 덜어줘 9남매가 안심하고 공부하려면 장학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내 힘이 부쳐 대학까지 보장할 수는 없지만 고등학교 까지 학비를 해결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이 프로그램을 시청한 데는 하나님의 뜻이 작용했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 무렵 나는 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나는 1995년부터 우리 대학의 서울캠퍼스를 지금의 죽전으로 이전하려는 사업을 개시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라는 미증유의 국가적 위기에 부딪혀 이전 사업 자체가 와해될 위험에 당면하고 있었다. 학교와 재단 모두 극도의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나는 기독교로 개종한지 얼마 안 되지만 매일 하나님께 기도를 하며 내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나와 우리 대학을 도와줄 힘이 간절히 필요했다. 누구를 돕기 이전에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할 시련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에게 매일 위기를 이겨낼 힘을 달라 탄원하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나를 도와줄 사람’보다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을 보내줬다. 어질고 선한 부모님은 TV에는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비췄겠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얼마나 큰 간절함이 있었을까. 9남매와 살아가면서 자녀들을 키울 걱정이 왜 없었겠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 가족에 대한 존경과 사랑, 신앙에 대한 강한 의지로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들을 만나고, 그들을 도움으로써 내가 누리고 가진 것이 결코 적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이를 통해 나의 부족함을 채우라는 것이 하나님이 내개 주신 해답은 아니었을까. 나는 방송을 보고나서 아내에게 “저 사람들을 돕겠어요. 저 아이들 학비를 지원해야 겠어요”라고 선언했다. 아내도 그런 나의 선언, 아니 약속을 기쁜 마음으로 격려해주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사람은 늘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한다. 자기가 가진 것은 늘 부족하고 아쉽다며 하늘의 도움, 국가의 도움, 뜻밖의 행운을 기대한다. 이런 갈증으로 삶의 행복을 만들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그런 갈증으로 사막같은 삶을 살다 가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이 가진 것을 감사해 하며 자신에게 남는 것은 남들에게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지면 오히려 삶은 좀 더 보람차지는 것이리라. 남을 돕는 일은 그래서 결국은 나를 돕는 길로 통하는 법이다. 방송을 보고 바로 다음날 나는 ‘경주 9남매 가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 내 비서를 직접 현지에 보내 가족들을 만나고 고충을 들어보라 했다. 9남매의 아버지는 서순필 씨(당시 51세), 어머니는 이순남 씨(45세), 두 분은 독실한 기독인으로 신앙이 굳은 배필을 찾다가 오히려 혼인이 늦었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청년시절에는 고아원을 차려 고아들을 돕는데 평생을 바치려는 꿈이 있었다고 한다. 9남매는 7남2녀로 형제 가운데 맏이인 장녀는 서미미 양(당시 17세)으로 울산시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어서 형제들이 줄을 이어 초등, 중등,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 생계야 부모님들이 땀을 아끼지 않고 노동을 해 굶지 않는다지만 학비는 정말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보고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메시지를 전해 약속했다. “9남매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일체의 학비를 장학금으로 지원하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학용품도 지원하겠습니다.” 그렇게 9남매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9남매에 대한 장학금 지원은 필요한 학비를 수합해 알려오면 계좌 이체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나는 가능하면 부모님이나 9남매와 직접적으로 만나지 않으려 했다. 한창 자라는 나이이고 그 중에는 사춘기를 겪는 아이들이 계속 생기는데 잘못하면 도움 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장녀인 서미미 양과는 간헐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소통을 했다. 나중에는 내가 이메일을 주로 활용하면서 서신도 이메일로 오고갔다. 서미미 양은 부모님만큼 독실한 기독신앙을 갖고 있다. 매사에 기도를 통해 진지한 성찰을 하고 어릴 적부터 10Km가 넘는 통학길을 걸어서 등하교를 하면서도 어린 형제들을 챙기며 부모님을 도왔다. 미미 양의 이런 인내와 어른스러움이 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보이지 않은 유대감을 만들었으리라 충분히 이해가 됐다. 나는 그런 미미 양에게 각별한 당부를 했다. “미미 양이 대학에 진학을 해야 동생들도 희망을 갖고 분발 할꺼야. 우리 대학에 진학하면 장학금도 지원할 테니 열심히 공부해요.” 미미 양은 열심히 노력해 우리 대학을 입학하는데 성공했다. 전공은 경영학을 선택했다. 나는 약속대로 미미 양에게 대학 학비도 지원했다. 거기에 더해 가정 경제가 어려워 별도로 주거공간을 얻지 못할 거라 생각해 기숙사에 들어가도록 했다. 미미 양은 뛰어난 성실성을 보였다. 성적도 좋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생들을 돕기도 했다. 미미 양이 대학을 입학한 뒤 셋째도 우리 대학에 입학했다. 물론 학비를 지원했다. 여덟째도 우리 대학에 입학했다. 당연히 학비를 지원했다. 미미 양은 전공을 경영학에서 회계학으로 전환하더니 다시 대학원에 진학해 회계학 석사학위도 취득했다. 착한 성품의 부모님이 기울인 정성 덕분이었을까. 9남매는 모두 대학에 진학했다. 그 중에는 우리 대학 만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에 다니는 동생들도 있었다. 그들이 서울의 어디에 기숙하며 학업을 잇겠는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2010년 하반기부터 2년 간 대학 재단이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에 거주토록 했다. 다른 형제들도 근면 성실하지만 미미 양은 장녀로서의 사명감이 있어서인지 더욱 진지했다. 나는 그런 미미 양의 내면에 있는 책임감을 신뢰했다. 미미 양이 석사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미미 양에게 연락을 했다. “다른 직장에 갈 거 모 있어. 범은장학재단에서 회계 관리를 책임지라고.” 범은장학재단은 내가 1990년에 설립했다. 우리 대학을 설립한 범정 장형 선생과 혜당 조희재 여사의 육영의지를 기리자는 취지에서 사재를 털어 만든 장학사업 전문기관이다. 현재까지 7천9백 여 명의 학생, 교수들에게 68억 여 원의 재정지원을 해오고 있다. 처음에는 단촐한 규모였지만 업무가 복잡해지면서 전문적 회계 관리가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미미 양이라면 범은장학재단의 재정을 제대로 관리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믿음은 한번도 깨지지 않았다. 이런 서미미 양을 위해 나는 중국어도 공부하게 했다. 회계전문가로 제 구실을 하려면 관련 법이나 행정에 대한 지식도 필요할 것 같아 사이버대학에 보내 행정법무학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하나 더 받게 했다. 또한 미미 양이 클래식 음악을 어려서부터 좋아한다고 들어서 아코디언과 피아노도 공부시켰다. 지금은 교회에서 반주 봉사를 할 만큼 발전을 했다. 평양감사도 싫으면 못한다는 데 미미 양은 무엇이든 기회를 주면 특유의 성실성으로 앞길을 열어가니 이런 것이 사람을 가르치고 키우는 교육의 기쁨이 아니던가. 최근에 미미 양의 부친께서 칠순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들어 이제는 서 과장으로 부르는 미미 양에게 가족들의 근황을 물었다. 비단 미미 양만이 아니고 이들 9남매는 모두 대학을 나와 자신의 앞길을 개척하며 알찬 삶을 살아가고 있다. 둘째는 산업디자이너로 일하다 자신의 뜻이 요리에 있다고 선언하고 쉐프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셋째는 우리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쇼핑몰 운영관리를 맡고 있다. 넷째는 경영학을 배우고 신학대학원에서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 다섯째는 사범대를 나와 지금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여섯째는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자산관리사로 일하고 있다. 일곱째는 정보통신 보안학을 공부해 프로그래머로 활약 중이다. 여덟째는 우리 대학 응용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학사장교를 지원해 대기 중이다. 아홉째 막내는 통계학과에 다니고 있는데 군복무를 위해 휴학 중이라 한다. 이들의 현황을 이렇게 짚어보는 이유는 내가 했던 장학 사업이 맺은 결실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반듯하게 장성한 자녀를 둔 부모님, 그러니까 서순필 씨와 이순남 씨 부부의 기쁨은 얼마나 크고 자랑스러울지를 함께 공감하고자 함이다. 매일 그 작은 방에서 밥상을 놓고 둘러앉아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던 가족들이 오늘날 이처럼 크고 풍성한 아름드리 나무로 자란 것이다. 하나님이 이들을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고, 시련과 고통을 인내와 기도로 극복한 두 부부의 보람이다. 이 풍성한 사랑의 가족에 내 성의가 함께 있었음을 나는 기쁜 마음으로 기억한다. 나는 미미 양의 하나뿐인 여동생인 혜미 양의 결혼에 주례를 서기도 했다. 미미 양이 아버님의 부탁이라며 주례를 맡아 달라 했을 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자랑스럽고 기뻤다. 평생 서온 주례 가운데 가장 기분 좋은 주례 자리였다. 가끔 소식을 듣는데 9남매의 부모님은 지금도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두 분은 그 기도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와 내 아내의 건강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단국대와 범은장학재단의 발전을 기원한다고 한다. 어쩌면 거칠고 모진 바람이 불 때 내가 온전히 서있는 힘은 이처럼 소박한 휴머니즘과 신의 가호 덕분은 아닐는지...나 역시 ‘경주 9남매’의 행복과 부모님의 장수를 기도한다.

이*승 - 가련한 젊은이의 절망에 희망의 손길을 내밀은 까닭

201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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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이 저무는 12월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조찬 약속이 있어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뒤 학교로 돌아가려 차 속에 있었다. 9시를 넘은 시간이었다. 당시 서울캠퍼스가 있던 용산구 한남동은 제3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를 지나면 경부고속도로를 진입할 수 있는 교통 요지였다. 비록 차량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워에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차들로 제법 길이 막히곤 했다. 그 날은 유난히 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우리 대학으로 가까워질수록 차는 가다서다가 아닌 정체 상태로 빠져들었다. 학교 바로 앞인 한남동로터리에 들어서니 군인, 경찰이 차량 통행을 통제하고 있었다. 경광등이 번쩍이는 검은색 차가 늘어서있고, 경찰만이 아니라 무장 헌병과 군인들이 함께 근무하는 걸 보니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 대학을 나와 대로를 건너면 보이는 건물에는 다방(지하)과 중화요리집이 들어 있었는데 그 건물 주변을 포위하다시피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학교 앞에서 일어난 일이니 궁금증이 더해졌다. 혹시 우리 학생들이 다친 사건은 아닌지 걱정도 되어 출근을 마치자마자 연유를 알아보도록 했다. 보고를 들으니 무장 탈영병이 다방에 들어가 손님들을 인질로 잡고 군경과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실내이지만 6발의 총탄을 다방 벽들에 쏘아대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무장탈영병 사건이 적지 않게 일어나곤 했다. 군대 복무 여건이 험하기도 했고, 낙후된 경제여건으로 먹고살기가 힘들어 개인과 가정이 뜻밖의 불행을 당해 탈영을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인질극으로 연결되어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적잖았다. 당일, 그러니까 1973년 12월 5일 오전 10시에 일어난 무장탈영병 인질사건 발생 공간은 다름 아닌 우리 대학의 바로 앞이었고,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던 무대는 ‘한일다방’이었다. 지금처럼 카페문화가 없던 ‘다방 전성시대’여서 학생들은 강의가 빈 시간에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시 풍습이었다. 문제의 한일다방은 학교를 나와 가장 가깝게 있는 곳이라 사랑방같은 구실을 하고 있었다. 현황을 알고 나니 이번에는 학생들 걱정에 일을 할 수 없었다. 당시 비서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상배 교수(당시 문리대 교수)를 불러 재학생이 인질로 붙잡혀 있는지 여부와 전후 상황을 소상히 파악하여 알려 달라 했다. 김 실장의 보고가 들어왔다. 걱정대로 우리 학생이 인질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랄까, 아침 시간(오전 10시)이어서인지 손님도 10 명 이내였고 그 중 학생은 서울대생과 단대생해서 2명이라고 했다. 더욱 다행인 것은 무장 탈영병이 인질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정보관계자들도 나에게 “인질범의 언행을 보니 다른 사람을 해칠 정도는 아니다. 사람을 다치게 할 의도가 아니고 자신의 답답하고 초조한 상황을 못이겨 잠시 흥분한 것 같다’고 전언했다. 다만 인질로 잡힌 우리 대학의 학생에게 “혼자 남으신 어머님을 행복하게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 아버님 곁으로 먼저 가겠다.”는 유서를 쓰게 한 걸로 보아 자살의 위험성이 크다는 얘기도 들었다. 김 실장은 인질로 잡혀 있다가 풀려난 학생도 만나고 해서 더 상세한 얘기를 해줬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는데 여자 쪽 부모님 반대로 애인이 변심한 듯했다. 인질범은 애인을 불러 이를 설득하려다 탈영을 했다. 여자 쪽의 결혼 반대 원인이 탈영병의 가난한 가정형편과 이로 인한 진학 실패, 불안한 미래 때문이라는데 범인은 이같은 현실에 절망하여 자포자기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보고를 들으며 그 탈영병의 고통에 공감이 갔다. 오죽 어렵고 힘든 형편이면 저런 막장에 다다른 극단적 행동을 했을까...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공부를 못한 것이 무슨 죄라고 저런 설움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앞서 말했듯이 탈영병 사건이 일어나면 대체로 비슷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극단적 선택을 하게 했음을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가난과 불우한 환경, 대학 진학의 좌절, 애인의 변심, 군대의 상습적 폭력 등이 겹쳐 죽음을 빚는 비극으로 이어졌었다. 그때마다 나는 교육자로서 우리 사회가 젊은이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을 줘야 한다는 자성을 하곤 했다. 바로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앞마당에서 이런 참담한 일이 일어났는데 자성만 하고 행동을 뒤로 미룰 수 없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저 젊은이를 살려야 한다. 저렇게 죽게 놔둘 수는 없다.”는 울림이 치밀어 올랐다. 인질을 하나 둘씩 풀어주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자칫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예감도 들었다. 시간이 촉박함을 느낀 나는 김상배 실장에게 서둘러 부탁을 했다. “내가 관계 당국에 얘기를 했으니 김 실장이 그 탈영병 젊은이를 만나 봐요. 내가 그 젊은이를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 더 이상 과한 일을 벌이지 말고 자수하라고. 대학 공부도 시켜주고 가족들 먹고 살 취직자리도 알아봐줄 꺼라고 약속하세요. 이 장충식이 보장한다고. 얼마든지 떳떳한 생활을 하도록 도울 것이니 두려워말고 자수한 뒤 새 출발을 하자고 해요.” 김상배 실장은 용산경찰서 형사를 대동하고 인질극이 벌어지는 한일다방을 찾아갔다. 비록 내 부탁을 받고 방문했지만 김상배 실장의 배짱도 보통은 아닌 셈이었다. 나나 김 실장 모두 40대 초반이었기에 그런 발상과 실천이 가능했을 것이다. 탈영병을 만나고 돌아온 결과는 앞서 들은 보고와 같았고 구체적인 사항이 밝혀졌다. 이름은 이*승, 당시 21세. 육군 일병. 일찍 부친이 별세하고 모친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지만 생계가 어려웠다. 이*승 군이 장남으로 모친과 5남매를 책임져야 했다. 심한 가난에 시달리면서 고등학교 때 전교회장을 지내고 대학 입시도 2번이나 합격했지만 결국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약국 등에서 일하면서 중학교 동창과 연애를 했는데 입대를 하자 멀어지고 여자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자 애인을 설득한다고 외출을 한 뒤 곧바로 탈영을 했다. 김 실장은 이*승 군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만나보니 눈빛이 오히려 자기가 저지른 일 때문에 겁먹은 듯 하고, 자수를 설득하니 눈물이 그렁거리는 게 성품은 착한 사람으로 보였다.”며 “곧 애인을 만날 것이고 그러면 자수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새 출발을 전적으로 돕겠다’고 한 나의 약속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승 군은 당일 오후에 자수를 했다. 인질극 발생 두 시간이 갓 넘었을 때였다. 사건이 끝나고 당일 석간이나 이튿날 조간은 온통 이 사건을 톱기사로 다뤘다. 나는 이*승 군을 돕기로 결심했고 내 의지를 전달했기에 연락을 기다렸지만 이*승 군은 어떤 연락도 없이 형무소에 수감이 되었다. 고민하던 가운데 나는 사건 당일 인질로 잡혀 있던 우리 대학 학생을 수소문해 만나보았다.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이*승 군과 얘기를 나눴는데 탈영이니 강도니 험한 일을 할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증언을 했다. 탈영을 할 생각은 전혀 아니었는데 애인과 하루 밤을 보내고 귀대시간을 넘기면서 일이 커졌다는 사연이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이런 젊은이가 감옥에서 청춘을 보내면 더욱 좌절하여 진짜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된 ‘진학의 꿈’, 공부를 시키는 것이 최선이라 믿었다. 나는 내 생각을 솔직히 밝힌 편지를 이*승 군에게 보냈다. 희망을 가지라 격려했고, 내가 진심으로 돕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김 실장을 보내 면회도 하게 했다. 내가 직접 그를 만날 때가 온 것이다.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춘천 육군교도소로 이감됐다고 했다. 그를 만나온 김상배 실장을 대동하여 이 군을 만났다. 깡마르고 초췌한 젊은이가 면회소로 나왔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며 대화를 나눴다. 얘기를 나누면서 속으로 ‘이렇게 온순한 청년이 어떻게 인질극을 벌이려 했단 말인가. 그건 천성이 아니라 상황에 내몰리고 쫓겨 이뤄진 비극적 해프닝이다’라는 심증을 굳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용기를 주고 싶었다. 아직 희망이 있음을, 지금부터라도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 이 군을 만나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는 김상배 실장과 대화를 나웠다. “만나보고 나니 선량한 성격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어요. 이 군을 잘 지도하면 선량한 시민으로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선 이 군을 하루 빨리 감옥에서 풀어나오게 하고, 그 다음으로 대학에 진학시켜서 엔지니어로 키우면 취업도 쉽고, 동생들도 돌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상배 실장도 내 말에 동의를 했다. 이미 김 실장은 내 지시로 경기도 북부에 있는 이 군의 고향집을 찾아가 모친과 형제들을 만나고, 형편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우리 둘은 우선 형기를 단축시키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궁리를 했다. 이 군의 형기는 징역 6년이었다. 인질과 택시강도 혐의가 겹쳐 무거운 형을 받은 것이다. 젊은이에게 6년은 너무 길다. 자칫 감옥 속에서 사회에 대한 증오가 쌓이고, 범죄자에게 물들을 수도 있었다. 해결책은 유일했다. 법무부 장관을 만나 탄원하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물론 대학 총장이라는 내 지위를 앞세워 내가 모든 일을 책임진다는 공약을 전제해야 했지만... 당시 법무장관은 황산덕 교수님이었다. 서울대가 배출한 최초의 법학박사이자 우리나라 법학계에는 법철학, 형법학 분야를 개척한 석학이기도 하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며 우리 대학에도 출강을 해 나와도 오랜 교분을 쌓고 있었다. 항 장관님을 찾아갔다. 탈영병 이*승 군의 사연을 설명했다. “순간의 잘못으로 부대를 이탈했습니다. 헤어지려 하는 애인을 설득하려 서울에 따라와 갈피를 못잡고 실수를 했는데 이로 인해 평생 불행한 생활을 겪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홀어머니와 어린 형제들도 나락에 빠질 수 있으니 이를 막고 싶습니다. 가족들을 살펴보니 다들 선량한 농민입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모친의 일자리도 주고, 두 동생은 학업을 이어가도록 제가 재정 지원을 하려 합니다. 이*승 군도 장관님이 선처해주시면 교도소에서 대입 예비고사(지금의 수학능력 시험 같은 제도)를 준비하도록 하고 돕겠습니다. 물론 대입에 성공하면 이 역시 제가 공부를 무사히 마치도록 뒷바라지 하겠습니다. 젊은이와 불쌍한 가족들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 꼭 장관님이 도와주세요.” 진심으로 부탁했다. 황 장관님은 내 성품을 잘 아시는 분이라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셨지만 쉽게 응낙을 하지 못했다. 형법학자로서 당연한 소신이 있지 않겠는가. 죄의 무게도 가볍지 않았다. 나 역시 한 번의 청원으로 풀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김상배 실장으로 하여금 계속 이*승 가족의 살아가는 일과 이 군의 반성하는 모습 등을 전하고, 감형을 청원토록 했다. 김 실장은 심지어 황 장관의 자택이 있는 혜화동까지 찾아가 여러번, 간절히 부탁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닌가. 황 장관님은 결국 이 군의 감형을 위해 몸소 여러 가지 일을 앞장서 주었다. 관계 당국을 찾아가 나 대신 설득도 하고, 완고한 군관계자들에게도 부탁을 했다. 나약한 젊은이를 도우려는 황 장관님의 정성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토록 많은 분들의 선의가 모이고, 쌓였기 때문일까. 이 군에게 큰 선물이 다가왔다. 징역 6년의 중형이 2년20일로 감형된 것이다. 그리고 1975년 성탄절에 이*승 군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이 군을 불러 격려를 하고, 수시로 김상배 실장이 이 군과 이 군의 가족이 사는데 근 어려움이 생기지 않게 지원하도록 했다. 옛 한남동 캠퍼스의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를 얻어 가족들이 살도록 했다. 이 군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자신이 탈영하여 인질극을 벌인 한일다방 건너편이고 매일 그곳을 지나쳐야 등교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매일 그 곳을 지나치면서 자신의 과거를 곰씹고, 미래에 대한 결의를 다지라는 뜻으로 그 아파트를 얻었다. 그저 사회의 저명인사가 던진 공수표로만 알았던 내 약속이 하나씩 이뤄지자 이 군도 달라졌다. 형무소 안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더니 석방된 이듬해에 바로 전문대학에 입학을 했다. 삶을 바꾸겠다는 열정이 생기자 이 군은 열심히 공부를 했다. 2년 뒤에 이 군은 전문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측지기사와 중등교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2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직후 2년 만에 얻은 성과로는 결코 작지 않았다. 더욱이 이 군은 곧바로 우리 대학 토목공학과 편입시험을 치렀는데 이 시험에도 합격을 했다. 해당 학과 편입시험에서 최고의 시험성적을 받았다. 다른 대학이 아닌 단국대학을 진학한 이유에 대해 본인은 “총장님의 도움이 나를 얼마나 변하게 했는지, 내가 얼마나 좋은 일들을 성취하는지 가장 가까운데서 보여드리고 싶다.”고 설명했다. 사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는 기쁨이 아니다. 그러나 청년을 기르는 일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 거기에 도움을 받는 청년이 이렇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것이 교육하는 사람들이 얻는 최고의 선물인 셈이다. 그의 두 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그 두 사람을 우리 대학의 직원으로 채용하게 했다. 한 사람은 우리 대학 법인 사무처에, 또 한 사람은 수위로 근무했다. 혹시나 과거 물의를 일으킨 사람의 가족이라는 것이 알려져 만의 하나라도 험담을 들을까 우려해 비밀을 유지했다. 교내에서도 개인적으로 두 사람을 아는 척하거나 아예 언급을 피했다. 이*승 군은 무사히 대학 공부를 마치고 우리 대학의 건축 및 설비관련 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당시 건설업이 호황기라 일반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이왕이면 그의 성실함이 대학 행정에도 좋은 성과로 연결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3남매는 모두 직장인이 되어 안정된 삶을 가꿀 수 있었다. 나중에 이 군의 여동생은 뜻한 바가 있어 가톨릭 수녀가 되었다. 남동생은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명예퇴직을 했다. 이*승 군은 전공에 맞춰 우리 대학의 건축업무에 잘 근무했다. 나도 그를 믿고 많은 일을 시켰다. 적잖은 공사 현장에서 현장 관리와 기술 감독을 하더니 홀연히 대학 행정직을 그만두고 건축회사를 차렸다. 대학을 그만둘 때 작별 인사라도 있기를 바랐지만 무엇이 급한지 그동안의 여정을 정리할 틈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척을 하면 할수록 자칙 과거의 아픔을 다른 이에게 노출시키는 일이 될까 두려워 한 번도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고 마음에 묻어 두었다. 나중에 들으니 사업이 여의치 않게 풀려 다시 한 번 큰 시련을 겪다가 기독교에 의지해 신학대학을 졸업해 지금은 충청남도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그가 단 한 번도 안부를 전하는 적이 없으니 아마 그로서는 자신의 과거, 나를 포함한 과거의 인연이 잊혀 지기를 바라는 것이라 짐작을 한다. 살아오면서 돌아보니 사람을 키우는 과정에서 내가 그 당사자를 위해 기울인 애정과 노고의 무게에 상응하는 애정이나 노고를 되돌려 받은 적이 나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서운하지는 않다. 어차피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부모님께 받은 은혜도 제대로 갚지 못하고 별세한 뒤에야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들이다. 하물며 사회 속에서 맺은 인연이야 어쩌겠는가. 그저 폐를 끼치지 않고, 서로의 믿음을 잃지 않고 사는 것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할 일이다. 사람을 키우는 것은 보답을 받기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받은 만큼 다음 사람에게 베풀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정의감으로 분신을 외친 학생, 봉사하는 지성으로 키워내다

2018.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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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한국 대학가의 봄은 이미 펄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대학생들의 잇단 분신자살, 박종철 군 물고문 치사 사건으로 불거진 민주화 요구 시위는 대학을 분노의 함성과 거센 시위의 열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 열풍이 우리 대학에도 드세게 불어 닥쳤다. 4월 들어 학내 복지문제 해결을 주장하던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방향을 학내민주화, 학사부정 척결 등으로 틀었다. 수업거부, 중간고사 거부가 대세를 이루더니 급기야 대학 본관 총장실을 점거했다. 매일 2~3천여 명의 학생들이 농성과 시위를 펼치면서 학내는 사실상 교육과 연구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일련의 사태로 당시 총학생회의 퇴진 요구를 받던 김 모 부총장이 사직의사를 전 했지만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그 앞자리에 당시 총학생회장인 양종곤 군이 있었다. 양종곤 군은 매일 학내 농성, 혹은 학원 밖의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고, 때론 단식과 대중연설로 수천 명의 학생들을 강의실 밖으로 끌어냈다. 개교 이래 최대의 학생 시위가 이뤄졌다. 4월 27일로 기억한다. 한남동 캠퍼스의 본관 앞에 있는 노천극장에 5천 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함성을 외쳐댔다. 학생들은 대학민주화로 민주사회 앞당기자고 외쳤다. 노천극장의 중심에 양종곤 학생회장이 서있었다. 어쩌면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이 날은 달랐다. 양 군은 자기 옆에 20리터 기름통을 두고 있었다. 그 안에는 신나가 가득했다. 멀리 한강 쪽으로 이른 노을이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양 군이 신나 통을 들어 자기 몸에 부었다. 여학생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학생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양종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김 부총장이 물러났지만 아직 교직에 있습니다. 학교를 떠나야 합니다. 진상규명도 철저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학내에 군부정권에 협조한 어용무능 교수들이 퇴진해야 합니다. 장충식 총장님이 학생들 앞에 서서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저는 오후 6시에 분신을 하겠습니다.” 노천극장이 본관 앞에 있기에 한 눈에 상황을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은 극도의 흥분에 휩싸였다. 학생뿐만이 아니라 본관에서 이를 지켜보던 교무위원들이나 관계자들도 경악하고 충격에 말을 하지 못했다. 신나에 흠뻑 젖은 양종곤 군은 라이터를 들고 있었다. 잠시 뒤 동료 학생이 라이터를 인수해 치켜들었다. 신나는 발화점이 낮아 약간의 불꽃으로도 큰 불이 날 수 있다. 너무 위험하고 무모한 장면이었지만 현실이었다. 5천 명의 학생들은 학생대로, 학교 관계자들은 그들대로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 날 시위 전에 총학생회장이 모종의 극단적 조치를 결심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학원 동향을 체크하는 경찰이나 안기부에서도 같은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강경책을 준비하리라 짐작은 했지만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 결론이 나오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총장으로서 몸에 불을 붙이는 자살방법을 5천 명의 학생 앞에서 공언하는 광경을 보고 있는 일 자체가 가슴이 아팠다. 저 젊은이가 얼마나 상황에 몰리고, 쫒기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저런 도박같은 일을 약속하는 걸까... 상황이 벌어지자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정보 당국이나 공안 당국, 심지어 문교부(지금 교육부 전신)나 소방서까지 현장 상황을 확인하고, 대책을 묻거나 조언하는 전화들이었다. 노천극장과 가까운 정문 근처에는 소방서의 화재진압용 차, 구급차가 대기했다. 그 안쪽으로 경찰 진압대도 잠복해있었다. 노천극장과 주변으로 십 수 명의 기자들도 취재를 하고 있었다. 공안 당국은 학생들을 자극할까 병력을 드러내지 않고 적절한 현장진압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걸려온 전화들은 한 결 같이 지금 총장이 현장에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시위대를 더 흥분시키고, 자칫 구타나 폭력 시위 같은 상황으로 확대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었다. 심지어 저 휘발유통에 있는 액체는 물 같은 비인화물질이고 협박용일 뿐이라는 예단도 있었다. 학생들은 절규에 가까운 외침으로 장충식 총장은 노천극장으로 나오라 아우성이었다. 당시 내 집무실, 그러니까 총장실은 이미 총학생회의 활동대에게 점거를 당해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재단 소유 <단국빌딩>에 임시 사무실을 차려 근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위 시작과 함께 나는 현장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고자 해서 본관 회의실에 있었다. 모든 소리와 장면들을 선명히 보고 들을 수 있었다. 6시가 다가올수록 상황은 더 소란스럽고 어지러워 졌다. 정보 당국에서는 양종곤 총학생회장의 분신 자살 압박이 본인의 판단이라기 보다는 당시 시국을 주도하던 운동권 최상층부에서 내려온 지시라고 귀뜸했다. 그러니 총학생회가 분신으로 협박해도 절대로 ‘장충식 총장이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경찰이나 소방서 측도 총학생회장이 뿌린 것은 물일 수도 있으니 협박에 굴하지 말라고 거듭 강권했다. 심지어 문교부 장관실에서 조차 지금 단국대가 이 상황에서 양종곤 군의 요구를 들어주면 다른 대학도 교내 문제를 앞세워 학생들을 대대적인 시위로 유도할 빌미가 되니 결코 들어주지 말라는 얘기가 왔다. 시간이 임박하자 이것은 ‘장관님 지시’라는 압박이 더해졌다. 내 옆에 있는 교무위원들, 나를 걱정해주는 교직원들도 저런 위험한 현장에 나가서 봉변을 당하면 안된다며 총학생회장의 협박을 거부하자고 했다. 심지어 강경론자는 끝내 분신을 하면 그것은 극단적 운동권 학생의 죽음이지 학교는 할 만큼 했다는 주장까지 했다. 나는 그 소음과 오가는 논의와 대책의 혼란 사이에서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은 ‘저 젊은이를 그냥 놔둬서는 안 된다’는 소리였다. 나는 교육자이다. 총장이기 이전에 교수이고, 저런 젊은이도 내 학생이다. 시대와 이념, 현실과 이상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여러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우리 대학의 젊은이에게 닥칠 비극이 있다면 기꺼이 교수인 내가 먼저 나서서 막아줘야 한다. 그것이 내 마음 속 울림이었다. 신나를 뿌리고 연단에 주저앉아 오후 6시가 넘으면 분신하겠다는 저 어린 학생의 마음은 어떨까? 50일이 넘게 소리치고, 밥을 굶고, 때론 교직원과 멱살잡이를 하고, 심지어 기물을 파손하면서까지 저 젊은 친구가 얻으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정의감이라고 믿었다. 기성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열망이 저 젊은이의 피를 끓게 했을 것이다. 저 학생은 입학 당시 최우등급의 성적을 거둬 특별장학금을 받은 학생이었다. 서울에서 8시간을 차로 달려야 갈 수 있는 먼 객지에서 홀어머니의 기대를 안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 가슴 속에 어찌 성공과 행복에 대한 열망이 없겠는가? 그 모든 것들을 읽었기에 결국 저 젊은이는 ‘차라리 죽겠다’고 나선 것은 아닌가. “구해야 한다. 흥분한 시위대에 의해 내가 돌을 맞고, 정부의 지시를 어겨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내가 나서서 풀어줘야 한다.” 내 마음 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결론이었다. 그것은 교수로서의 본능이었다. 나는 관계자들 앞에서 내 입장을 천명했다. “저 학생을 외면할 수 없어요. 내가 외면하면 이번에는 양종곤 학생이 시위대의 외면을 감당 못하고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가겠습니다. 혼자 나갈 테니 이해해주세요.” 본관에서 노천극장을 내려가는 계단의 양쪽에는 이미 수 천 명의 학생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취재하는 내외신 기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르고 쇠파이프나 목봉을 들고 마스크를 쓴 채 시위 지도부를 호위하는 사수대 학생들도 많았다. 그들은 내 뒤를 따르던 교무위원들을 제지해 운동장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홀로 운동장에 섰고, 연단에 올랐다. 5 천명이 넘는 학생들의 이목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십여 분 남짓한 연설을 통해 “학생들의 요구를 애교심의 결과로 본다.”고 전제하면서 학생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학사관리에 오류가 있다면 총학생회가 지정하는 평교수들로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진상을 파악하고, 책임질 일이 있다면 총장인 내가 지겠다.”고 약속했다. 학생들은 내 말에 공감을 했다. 돌이 날아올 수도 있다던 주위의 걱정과 달리 우렁찬 박수로 내 고민과 대책을 공감해주었다. 총학생회장인 양종곤 군도 분신 자살이 아닌 학생들의 박수 속에 신나와 라이터를 거두고 시위 해산을 선언할 수 있었다. 극한적으로 치닫던 학교와 총학생회의 갈등도 조금씩 진정했다. 사태가 진정 국면으로 전환되었지만 양종곤 군은 총학생회장으로서 그동안 주도해온 일련의 일들에 매듭을 지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총학생회 지도부는 학생처의 집기를 파손했다. 거기에 총장실, 총무처까지 더해 피해액이 8천 만 원에 이르렀다. 공안당국은 이를 부각시켜 나에게 양종곤 군의 제적시켜 학원 밖으로 추방시키라 강권했다. 이를 거부하기는 했지만 대낮에 집단적으로 학교 기물을 파손한 일을 모른 척 할 수도 없었다. 책임자인 양종곤 군은 이미 집시법 위반, 기물파손죄로 수배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나는 자수를 권유했다. 하지만 양종곤 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이때 양종곤 군을 자수시킨 뒤 그의 미래를 함께 고민해야 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그가 단국대 학생을 대표하는 총학생회장으로서 보여준 리더십과 정의감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4,5월이 지나면서 총학생회는 학내문제에서 급격하게 사회민주화로 역량을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항쟁이라는 거대한 민주화 동력이 불어 닥쳤기 때문이다. 양종곤 군은 6월 항쟁에 동참하는 와중에 결국 체포되었다. 공안당국은 양종곤 군에 대한 수배 조치 이후 그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그의 동선을 파악한 사복 형사들은 6월 항쟁 기간 중 학교에서 기숙하다 시위를 위해 빠져나가던 양종곤 군 일행을 한남동 캠퍼스 후문 근처에서 덮쳐 체포에 성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바로 우리 재단의 고문변호사를 선임해 양종곤의 법률대리인을 맡겼다. ‘양종곤 군 제적’이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내가 나서서 그의 면학을 도울 테니 공부할 기회를 유지케 해 달라 설득했다. 법정에서 같은 취지의 호소를 했다. 양종곤 군은 재판을 통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처벌을 받고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나는 비서를 통해 그를 만나서 내 뜻을 전하고 운동권보다는 학문의 길에 들어와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를 개혁하는 진로에 대해 생각해보라 권유했다. 선 듯 자신에게는 ‘청산의 대상’이었던 나의 권유를 받기가 정서적으로 힘들어서인지 취업을 하기도 했다. 나는 양종곤 군의 경제 형편이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게 방을 임대할 보증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내 의지의 일단을 일깨우고 싶었다. 그 당시에 양종곤 군은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사귀던 동료 여학생이 있었다. 둘은 동료에서 연인으로 발전해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를 만나던 내 비서는 이같은 사실을 알리면서 처가될 집에서 양종곤 군의 집안 형편이 어렵고, 양종곤 군 본인의 미래도 불투명해 결혼을 강력히 반대한다고 보고했다. 나는 두 젊은이의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딸들도 그렇게 결혼시켰다. 내 딸이 사랑하는 남자라면 그 믿음을 존중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그래서 내가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래 아들을 하나 더 두는 셈으로 치자.” 그렇게 결심했다. 나는 경기도 용인으로 달려가 신부 측 부모를 만났다. 부모님들은 매우 강경했다. 험한 소리도 들었지만 이를 삭히면서 그 분들에게 약속했다. “내가 양종곤 군을 유학 보내고자 합니다. 물론 따님도 결혼시켜 같이 미국에서 공부토록 하겠습니다. 너무 심려마시고 양종곤 군의 미래를 믿어주세요.” 결국 결혼 승낙을 받아 1989년 봄에 혼례를 치뤘다. 물론 나는 주례를 자청해 두 사람을 축복했다. 양 군은 직장 생활과 결혼 과정에서 내가 권유하던 유학과 학문에 대한 결심을 굳혔다. 1990년에 두 사람은 대망의 꿈을 함께 나누며 오레곤 주에 있는 서던 오레곤 대학(Southern Oregon University)에 입학했다. 이런 과정에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총장을 쫓아내려한 운동권 학생을 결혼시키고, 유학 보내는 내 행동을 비판하기도 했다. 퇴학을 시켜도 분이 덜 풀릴 정도로 대학과 교직원들에게 위해를 했던 학생을 키우는 게 너무 온정적이라는 지적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그는 총학생회 회장으로서 학생들을 대표해 나를 비판한 것이다. 그의 주장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것은 없다. 인재를 키우는 것은 내 취향에 부합하는 젊은이를 선호하는 일이 아니라 정의감, 희생정신, 잠재력을 고려해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내 생각이었고, 양종곤 군은 그런 고려 사항에 적합했다. 양종곤 군에게 지원하는 유학비는 전적으로 나의 ‘사재’였다. 집에 줄 생활비를 아끼고, 내 쓸돈을 아껴가며 학비를 조달했다. 나는 대학의 어떤 지원도 거기에 추가하지 않았다. 학내에 그를 제적시켜도 아깝지 않다는 여론이 많은데 교비를 학비지원에 쓰면 오히려 양종곤 군이 더 욕을 먹을 것 같고, 그의 미래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양종곤 군은 석사 과정을 잘 마치고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나는 양종곤 군을 좋은 학자로 길러줄 훌륭한 경영학교수를 물색했다. 네브라스카 주립대의 이상문 교수를 양종곤 군에게 추천했다. 이상문 교수는 서울대를 나와 조지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의 대표적 경영학회인 의 회장을 장기간 역임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게 미국 경영학계에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네브라스카 주립대에서 석좌교수를 거쳐 정년퇴직한 의사결정, 글로벌 전략, 혁신경영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양 군은 기꺼이 내 조언을 받아들였다. 다행히 이상문 박사는 양종곤 군을 기꺼이 제자로 받아주었다. 양 군은 정들었던 오레곤을 떠나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인 네브라스카로 떠났다. 그 때, 나로서는 정말 힘든 시기가 닥쳤다. 나와 김영삼 정부와의 불화로 내가 총장의 직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나야 야인이 되면 그만이었지만 당장 급여를 받지 못하니 양종곤 군 학비를 지원할 수 없게 된 것이 큰일이었다. 집에 가져다 줄 월급이 없으니 유학비 지원은 여력이 더 없어졌다. 낯선 땅에서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아내와 아들까지 건사하면서. 나는 정권의 압박에 힘겨웠지만 양종곤 군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더 힘들어지기도 했다. 결국 이상문 박사에게 나의 진심을 전달했다. 이 박사는 다시 한번 큰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박사과정에 드는 어마어마한 학비를 상당 부분 해결해준 것이다. 그래도 가족의 생활비는 따로 풀 방법이 없었다. 양종곤 군은 결국 가족을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홀로 유학을 마치기로 했다. 모자른 학비도 벌고, 생활비도 벌면서 연구를 계속해야 하는 고달픈 시간이었다. 거기에 가족을 떠나보내고 감당해야 했던 깊고도 큰 고독...나 역시 홀로 미국 유학을 했기에 그 막막함을 공감할 수 있었지만 어린 자식을 양육하다가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했을 것이다. 고된 개인적 시련과 높은 벽을 넘어야 하는 학문적 단련을 거치면서 양종곤 군은 ‘운동권 학생’에서 ‘경영학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가 전해오는 편지나 선후배들의 전언을 통해 양종곤 군이 양종곤 박사로 잘 커나가고 있음을 간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내 기쁨이기도 했다. 1997년에 그는 정말 어렵고 힘든 과정과 논문 심사를 무사히 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훌륭한 지도 교수 덕분에 미국에 정착할 수도 있었지만 귀국을 해 좋은 직장에 안착하였다. 국내 경영컨설팅 회사를 거쳐 마지막으로는 세계적 글로벌 경영컨설팅 회사인 IBM BCS에서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 경영자문을 하며 전공 실무경험을 쌓았다. 주변에서 들으면 기업체 특강에서도 좋은 평을 받아 초청 강연이 많다고 했다. 나는 양종곤 박사를 만나자 했다. 그리고 그에게 마지막 미션을 주었다. “양 박사 이제 모교에서 후배들을 지도해야 겠어.” 양 박사는 부담스러웠을 게다. 모교에는 여전히 그에게 부정적 시작을 갖고 있는 선배들과 교수님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또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은 이들이 날선 비난을 오래오래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그는 지원을 해야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사명이니까. 후배이자 제자인 우리 대학 학생과 자신의 모교를 위해 감내해야 할 빚이니까. 다행히도 그는 공채 과정을 잘 통과해 모교의 교수로 발령받았다. 비단 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 셈이지만 나는 그가 학생운동을 통해 짊어진 숙제를 기억해 달라 말하고 싶다. 총학생회장 양종곤 군에서 양종곤 교수로 걸어갈 그의 삶 속에서 후배들을 위해 더 큰 일을 해달라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선배가 되달라고.

한복과 학교 사랑의 열정으로 아름다운 삶을 만든 석주선 박사님

2018.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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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학에는 한국 최고수준의 한국 전통복식 전문박물관이 있다. 지금이야 한류를 세계화시키니, 한복을 세계화시켜야 한다느니 하며 우리 전통의복에 관심과 투자가 눈에 띠게 커졌지만 불과 30년 전만해도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하루끼니가 걱정이던 시절에 그 누가 한복의 아름다움을 공부하고, 보전하려 했을까. 한복은 그저 버려지고 잊혀져가던 한 움큼의 추억에 불과했었다. 그 슬픈 한복의 운명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눈물과 피땀을 기울이던 이가 있었다. 이제는 하늘에서 영면하고 있는 난사(蘭斯) 석주선(石宙善) 선생이 바로 그 분이다. 내가 난사 선생을 유물 기증관계로 처음 만난 때는 40여 년 전인 1972년 무렵이었다. 경희대에서 지리학을 가르치던 조동규 교수의 소개였다. 조 교수는 우리 대학을 나와 경희대에 재직하였는데 그 부인께서 석주선 선생님의 제자로 한국복식을 배웠다고 했다. 두 내외의 말인 즉, 석주선 선생이 한국 복식을 연구하면서 복식과 민속 유물을 수집했는데 이제 정년이 되고 보니 이를 기증할 곳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역사학을 전공했고 사실 1960년대 초반에 동덕여대에 시간강사로 출강한 적이 있었고, 석주선 선생은 당시 재직 중이었기에 석주선 박사님에 대해서는 약간이나마 지식이 있었다. 석주선 선생의 오빠는 나비박사로 유명한 석주명 박사이다. 재밌게도 두 분은 모두 ‘수집’으로 학문의 기반을 닦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빠인 석주명 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손꼽히는 곤충학자, 특히 나비전문 학자였다. 20여 만 마리가 넘는 나비를 채집, 분류하고 이를 세계에 보고해 한국나비 분류의 체계화에 결정적 기여를 한 분이다. 더욱이 이런 모든 일들이 일제치하에서 얻은 학문적 업적이니 한국 과학계에 선구자로서 명성이 높은 학자였다. 불행히도 한국 전쟁의 와중에 그 방대한 양의 채집된 나비가 폭격에 소실되었고, 본인도 서울수복 뒤 총을 맞고 의문의 죽음을 당해 학계의 아쉬움이 더욱 남다른 분이었다. 오빠의 영향을 받아서였을까. 난사 석주선 선생도 한국 최고의 전통복식 유물 수집가이자 학자로 평판이 높았다. 난사 선생은 1911년 생으로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을 했다. 1940년 동경 일본고등양재학원을 나와 해방 때까지 교사로 재직했다. 공부는 서양 복식이었는데 해방 뒤 귀국하여 양장기술을 가르치다보니 한복에 관심이 가고, 특히 소중한 전통 복식 유물이 함부로 취급되고 없어지는 현실을 보고는 스스로 이를 거두기로 작정했다. 1952년부터 25년 동안 수도여대, 동덕여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난사 선생은 그 긴 시간 동안 본인을 위한 모든 안락함은 멀리하고 한복 연구에 모든 열정을 바쳤다. 복식의 변천과 고증, 복구는 모두 실제 한복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무덤을 옮길 때 나오는 출토복식들, 집의 한구석에 나뒹굴다가 고물상에 엿과 바꿔질 운명의 헌옷은 물론이고 고가의 장신구들까지 난사 선생은 이들을 하나하나 집으로 들였다. 호의호식이 아니라 평생 악의악식하면서 젊어서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평생 수집한 민속유물이 수 천 점에 이르렀다. 수집하고 공부하고, 이를 복원하여 되살리는 일에 매달리느라 재산을 물론이요 결혼도 거절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나는 조동규 교수 내외와 난사 선생을 면담했다. 난사 선생은 온화한 미소가 인상적인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 같은 자태를 갖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마음속에 품었던 궁금증을 드러냈다. “훌륭한 컬렉션이 있으니 다른 대학이나 공공 박물관에서 기증 제의가 있었을 텐데 왜 저한테 까지 기증 얘기가 나왔는지요?” 이 말을 들은 난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가 모은 복식유물들은 모두 내 자식처럼 소중하죠. 내가 모아서 소중한 게 아니라 복식유물들은 옷감들이라 시간이 지나면 삭아서 바스러집니다. 또 그런 유물을 보관만 하는 게 아니라 고증에 맞춰 복원하고 그 속에 담긴 정신과 기술을 전수도 할 수 있어야 하죠. 그래서 항온항습 시설을 갖춘 별도의 박물관이 있어야 해요. 연구실과 강의실도 필수적이고요. 그런데 내가 만나본 대학이나 박물관들은 그럴 의지가 없었어요. 그냥 내가 가진 유물에만 관심이 있는거죠.” 조동규 교수님도 얘기를 거들었다. “장 총장님은 역사학을 공부하셨으니까 석주선 박사님의 유물이 학문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이런 유물을 어떻게 보존해야 할지 잘 이해하시리라 믿음이 가죠. 다른 대학들을 소개했는데 모두 독립 박물관을 만들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국립박물관들도 그랬고요. 그냥 전시만 한다는 정도라서...” 이 만남이 있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난사 선생의 집을 들리기로 했다. 컬렉션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난사 선생이 초청을 해주었다. 서울시 중구 신당동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집을 들어가다 대문에 머리를 찧을 뻔했을 만큼 작은 집이었다. 3개의 방이 있었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모든 방마다 유물이 가득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물 상자들이었다. 그 상자들이 옷장 속에도, 그 옷장의 위에도, 벽의 선반을 달아 그 선반에도, 심지어 다락방까지. 난사 선생이 누울 수 있는 딱 한 명분의 공간을 제외한 모든 곳이 임시 전시실이고 보존실이었다. 유물들은 조선시대 왕족과 사대부의 의상 및 장신구부터 서민들의 복장과 장식구 등 다양한 것이었다. 아마도 난사 선생이 수집하지 않았다면 이 귀중한 우리 민족문화 자산이 일본으로 팔려갈 것이 뻔했다. 감탄은 잠깐이고 더 큰 걱정이 들었다. 난사 선생이 아무리 정성을 기울인 들 저런 상태로 얼마나 갈 것인가. 손으로 힘만 주어도 부서질 옷들인데. 거기에 혹시 불이라도 나면 이 소중한 유물들이 어찌되는 걸까. 아니 이 집 옆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가운데 하나에서 불이 나면 저 많은 유물들을 누가 지키겠는가. 나의 걱정 어린 눈길을 알아챘는지 석주선 선생님은 학자로서, 그리고 인간적인 하소연을 했다. “이제 정년이 되고 보니 정말 두려움이 더 커져요. 저 유물들은 대부분 옷감이라 좀이 슬거나 곰팡이가 생기면 안되요. 옆집에서 불이다도 나거나 아니면 혼자 있는 집에 문화재 전문 강도라도 오면 어떻게 되는 거죠. 대학이나 공공기관들은 그저 일반 전시실에 진열만 하고 싶어 하기만 하는 거죠. 그런데 전시장도 오동나무에 항온항습시설이 갖춰져야 해요. 복식유물들을 제대로 분류하고 정리해서 체계를 잡는데도 10년이 넘게 시간이 들 텐데... 매일매일 불안하고 걱정이 돼서 잠을 못자요. 내 나이 스물이 넘어서부터 지금까지 내 봉급을 털어 모은 유물들인데 어찌해야 할지...” 그동안 기증만 받을 욕심에 여러 기관에서 상처를 받아온 사정을 설명하던 난사 선생은 말을 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문득 ‘잘난 아들이나 잘난 남편을 두었다면 저리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겠는 가’하는 인정이 발동했다. 무엇보다 같은 학자로서 사명감이 크게 다가왔다. 역사란 결국 문헌과 유물로 대변된다. 힘없는 학자가 평생 동안 국가가 하지 못한 일을 홀몸으로 해왔는데 이를 받들기보다 기증품받는 욕심으로만 접근하는 한국 학계의 잘못을 방관할 수 없지 않겠는가. 저 소중한 유물들은 ‘전시물’이 아니라 ‘연구와 보존’의 학술자료로 영원히 전승돼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돈이 들더라도 해야 한다. 지금 돈이 없으면 한 푼이라도 모아서 우선 잘 보관하고, 예산을 끌어 모아 독립 전시관을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 마음을 당장 밝히기는 경솔해보여 난사 선생의 애타는 마음을 위로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4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난사 선생과 계속 교류를 했다. 난사 선생의 건강과 안부를 묻고,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응원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박물관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었다. 특별회계를 설정하고 건설자금을 적립토록 했다. 17억 원의 자금이 모였다. 다른 사립대학들이 운영자금을 모아 요즘 말하는 ‘강남땅’을 사는 것이 당시 유행이었다. 내 기억으로 17억원은 당시 한창 주목받던 강남의 신사동 땅 1만 여 평을 살 수 있는 가치였다. 돈이 모이자 몇 가지 구상을 하고 결심한 뒤 다시 난사 선생을 찾았다. 나는 일단 여섯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첫째, 기증 유물을 보존할 전시관은 ‘단국대학교 석주선 민속박물관’으로 이름 지어 독립된 박물관을 신축한다. 둘째, 석주선 민속박물관을 건설하기 위해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 셋째, 유물들은 석주선 박사의 감독 아래 오동나무 박스를 제작하여 보관한다. 박물관 보관 창고는 습기 제거 장치와 항온장치를 갖추도록 한다. 넷째, 석주선 박사는 특별교원으로 채용하며 교수 특호봉으로 대우한다. 고령을 감안해 전용차량과 운전 기사를 제공한다. 다섯째, 평생 동안 지낼 아파트를 제공한다. 여섯째, 추천하는 연구원 2명을 박물관 연구원으로 모든 신분을 약정한다. 나는 당시 박정숙 이사장님을 설득해 이를 동의받고 위 조건을 공약한 문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와 이사장님이 공동 서명한 문서로 작성해 난사 선생께 전달했다. 연이어 우리 대학 동양학연구소장이신 일석 이희승 박사님, 서울대의 이병도 박사님, 고려대의 신석호 교수님, 그리고 우리 대학 중앙박물관장 정영호 교수 등으로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언론을 통해 발표하였다. 나의 굳은 의지를 확인한 석주선 선생은 그제서야 자신이 정리한 모든 유물의 목록을 정리한 문건과 보관함을 열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나를 만나러 왔다. 1976년 9월 1일 조촐하지만 진심어린 정성을 담아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 소장품 기증식’을 가질 수 있었다. 박물관 신축 사업에 착수하자 실무자들 사이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 박사님은 까다로운 분”이라는 불평이었다. 하기는 난사 선생은 제자나 직원들을 엄격한 자세로 대했다. 자신의 방침이 지켜지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혼을 내는 스타일이라 한번 당해보면 원망이 나곤 했다. 특히 당시 박물관 신축 및 보존 시설의 도입을 행정부서에서는 총무처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불평이 높아 내 귀에도 전해질 정도였다. 나는 더 큰 갈등이 생기기 전에 직접 나서기로 했다. 총무처 소속 직원들에게 “석 박사님을 내 어머님이라 알고 대해 달라”고 설득했다. “나이 드신 내 모친이 여러분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일일이 변명하거나 말대꾸를 하겠어요? 그리고 사택에 들일 가구나 비품들도 총장의 어머님에게 해드린다는 생각으로 잘해드리고 자상하게 배려를 해주세요. 그러다보면 석 박사님도 ‘단국대 사람들은 다르구나’ 하고 마음에 맺힌 것들이 풀리고 한 식구가 될 겁니다.” 시간이 흐르고 하루는 난사 선생이 찾아왔다. 얼굴에 환한 빛이 가득했다. 선생은 웃으며 얘기했다. “장 총장님이 제 평생의 고생과 한을 다 풀어주십니다. 제가 그동안 혼자 모든 일을 하다 보니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일시키는 게 내 맘같지 않아서 화도 많이 내고 까탈스럽게 했는데 다들 잘 받아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보관시설도 훌륭하고 박물관도 아름답게 세워질 것 같고. 고마워요 장 총장님.” 말을 미쳐 마치지 못하고 난사 선생은 내 손을 덥석 잡고는 눈물을 흘리셨다. 행복한 웃음과 눈물이었다. 나는 “앞으로 현재 소장한 유물이 아니라도 필요한 유물이 있으면 대학이 구입하도록 하겠다”며 “오래 사셔서 큰 업적을 만드시라” 덕담을 했다. 박물관 준공을 앞둔 1977년 당시 난사 선생의 나이가 66세였으니 지금과 달리 노령인 셈이었다. 나는 말이 나온 김에 난사 선생이 더 나이들기 전에 흉상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에 얼굴 마스크를 본떠 흉상을 만들어 생전에는 사무실에 보관하다가 돌아가시면 박물관 홀에 상설시켜 선생님의 유덕을 기리자는 뜻이었다. 난사 선생도 기쁘게 받아들여 흉상을 제작했다. 지금도 민속박물관 입구에는 난사 선생의 흉상이 생전의 인자한 미소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으니 볼 때마다 내 감회가 남다르다. 1977년 11월 3일, 개교 30주년을 맞는 뜻깊은 날에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었다. 진심으로 난사 선생의 꿈이 이루어진 것을 축하해줬다. 복식연구가들과 한국학 관계자들은 칭찬과 축하를 나눴다. 지금도 개관식 당일에 자부심과 행복감에 가득해 반짝이던 선생의 눈빛을 기억한다. 학자로서, 그리고 민속 유물 수집가로서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나 역시 자칫 세월에 스러지고, 사회의 외면 속에 사라질 소중한 전통복식 유물을 영원히 우리 대학에 보존하고, 거기에 복식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생각에 큰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난사 선생과 나는 때론 모자지간처럼, 때론 한국학에 대한 애정을 나누는 동지로 20년을 보냈다. 가끔 박물관에 들리면 난사 선생은 나를 아들처럼 사랑스러운 눈빛과 웃음으로 바라보며 감사하다는 말을 거듭, 거듭 전했다.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은 한국 유일, 또는 최고의 전문 박물관으로 다양한 학술 활동을 펼쳐 우리 대학의 명예를 높혀줬다. 세월이 흘러 1995년 하반기들어 선생은 병석에 눕고 말았다. 다행히 이때 우리 대학 병원이 문을 열어 장기 입원을 시켜 돌봐드릴 수 있었다. 정성껏 모셨지만 병세는 날로 심해지더니 이듬해 나에게 “더 이상 힘들다”는 보고가 왔다. 임종이 가깝다는 소식에 서둘러 병석을 찾았다. 위문 손님이 여럿있었는데 선생은 나와 단 둘이 얘기를 하고 싶다며 사람들을 물렸다. 단 둘이 남자 난사 선생은 나를 가까이 오라 하시더니 손을 꼭 잡고는 내귀를 당신의 입에 대며 힘들여 말을 이었다. “그동안 총장님이 내 소원을 다 들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단국대가 내 살림을 다 맡아주고 월급도 줬으니 내가 돈쓸 데가 어디 있겠어요. 그 돈으로 정기적금 저축을 해서 모아 놨고, 박물관에 근무하는 이에게 맡겨 놨어요. 통장에 보관해놨으니 그걸 찾아서 장학금으로 써주세요.” 나는 놀라기도 했지만 선생의 그 학교 사랑과 끝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른 이에게 선용하려는 그 의지에 그만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내 눈물을 보면서 선생도 눈물을 흘리셨다. “장 총장님을 만나서 내가 정말 행복하게 여생을 보냈어요. 내 죽어서도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꺼예요.” 마지막 유언을 마친 양 난사 선생은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조금 더 시간이 있으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할텐데... 안타까움에, 그동안 쌓인 인정에 나는 모친이 돌아가신 것처럼 눈물을 흘렸다. 1996년 3월 3일, 85세의 나이로 선생은 영면에 드셨다. 장례식이 끝나고 난사 선생은 용인 천주교 공원에 있는 유택에 모셔졌다. 오빠 석주명 박사의 유택 옆이다. 따로 자손이 없기에 나는 학교에서 유족을 대신해 묘소를 관리토록 했다. 그리고 한남동 캠퍼스를 떠나 죽전 신캠퍼스를 지을 때 우리 대학은 한남동 시대보다 2배 넓은 박물관을 지었다. 동시에 대학 중앙박물관과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을 ‘석주선 기념박물관’으로 통합했다. 난사 선생의 유지와 학덕을 영원히 기리는 박물관이 되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박물관 서관의 로비에는 지금도 난사 선생의 흉상이 누구나 그대로 지나치지 않을 위치에서 오가는 이들을 보고 있다. 난사 선생의 전통복식에 대한 열정과 희생, 이타적 삶을 우리 단국인만이라도 기억해주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