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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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하는 '참 스승'의 길

2018.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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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는 연구와 교육이 존재 이유이다. 그러나 시대와 갈등을 겪고, 국가권력의 불의에 항의하다 핍박을 받기도 한다. 가르치는 일이 강단과 연구실에서 이뤄지기도 하지만 지식인으로서 비판적 지성을 실천하는 일도 ‘선생님의 또 다른 길’일 수 있다. 훌륭한 학덕을 갖고 계신 선생님이 정권과 타협하지 않을 때 생기는 불이익은 비단 선생님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 대학의 총장으로서 나 역시 교수들의 참여정신과 실천으로 난처한 경우를 직면하기도 했다. 이런 분들 가운데 지금까지 나의 지표로 기억 속에 살아 숨쉬는 분이 일석 이희승 선생님이시다. 한국 최고의 국어학자이자 국학자인 일석 선생님은 박정희 정권과 타협없는 불화를 겪었다. 하긴 일석 선생님이 박정희 정권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선생님은 이미 일제 강점기에 한글연구를 통해 민족정신을 지키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수감을 당했던 강골이기도 했다. 1969년은 대통령의 연임을 허용하자는 삼선개헌문제로 나라가 큰 진통을 겪을 때 일석 선생님은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 윤보선, 함석헌, 장준하,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인, 사상가 등과 함께 학계를 대표해 참여해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이 반대운동의 여파로 일석 선생님은 성균관대 대학원장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었다. 나는 일석 선생님을 찾아가 우리 대학의 동양학연구소 소장직을 맡아 달라 설득했다. 물론 선생님은 “여러 형편이 여의치 않은데 내가 단국대에 가면 장충식 총장이 난처해질 수 있다”면서 소장직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나는 “동양학연구소를 단국대의 간판 연구소로 키우고 싶은데 선생님의 학덕이 없이는 안된다”고 간곡히 부탁드렸다. 오히려 “이왕 소장직을 맡으시는 것만 아니라 동양학연구소의 기틀을 잡으려면 10년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10년 간 저와 함께 동양학연구소를 키워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젊은 총장의 패기가 맘에 드셨는지, 아니면 삼고초려를 마다않는 내 열의에 공감을 하셨는지, 선생님은 1971년에 1월에 동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셨다. 선생님이 고희를 눈앞에 둔 시기였다. 일석 선생님을 내가 모셔온다고 할 때 ‘남산’으로 불리던 정보기관의 관계자가 나에게 걱정하는 말투로 이렇게 충고하기도 했다. “재야인사로 대통령의 앞길에 사사건건 반대를 일삼는 양반을 단국대로 모셨다가 봉변을 당하면 어쩌시려 하십니까. 그것도 이미 정년퇴임을 한 나이든 양반을 굳이 소장직까지 임명하면서 말이죠...” 걱정의 말투에는 “잘 알아서 하라”는 경고의 냄새가 짙었다. 그러든 말든 일석 선생님은 정치에 대한 소신에 앞서 학식으로나 업적으로나 석학(碩學)이고 원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선생님의 지행일치, 강직과 겸손이 조화를 이룬 품성도 모자름이 없었다. 부임하시고 두 해가 지난 1973년 가을이었다. 당시 사회상황은 유신헌법이 발효되어 정치적으로 얼음처럼 냉랭한 상황이었다. 겨울이 막 시작되던 12월의 중순 경이었다. 시인 고은 씨가 이희승 소장님을 모시고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고은 씨는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가 심해지고 있는데 원로들의 참여가 절실하다. 일석 선생님이 삼선개헌에도 반대하는 성명서에 참여하셨으니 이번 유신헌법 철폐 운동에도 기꺼이 뜻을 같이 하시리라 믿고 뵈었는데 선생님께서 단국대와 장충식 총장님이 피해를 볼 수 있으니 미리 뵙고 거취를 알리시겠다며 이리 오셨다.”고 경위를 설명했다. 개헌 촉구 서명을 받으러 왔다가 일석 선생님이 사표에 서명을 하는 걸 먼저 보게 된 고은 시인도 난처한 표정이었다. 정작 일석 선생님은 평소의 온화한 표정과 말투에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동향학연구소 소장직 사표를 제출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자세를 보건데 제가 유신헌법을 고치라 요구하는 성명에 동참하면 나야 그렇다 치고, 장 총장님과 단국대도 불의의 피해를 볼 겁니다. 내가 앞으로도 내 소신을 바꾸지 않을 텐데 차라리 학교를 떠나야 총장과 대학이 편할 것입니다.” 사표를 건네시면서도 옅은 웃음을 띠셨지만 단국대에 누를 미치지 않겠다는 의지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 뜻을 알기에 더욱 더 나 역시 물러날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 서명하신 건 선생님의 소신이니까 그건 그거대로 됐습니다. 하지만 왜 동양학연구소장직 사표를 내십니까. 소장직은 정치나 유신헌법과 관계없이 저하고 하신 약속입니다. 저하고 처음 약속하시기를 동양학연구소에서 10년간 근무하시기로 하셨습니다. 한한대사전 편찬이 이제 시작인데 이 사전의 완간 책임을 다 하시고 떠나셔야 합니다.” 나 역시 웃으며 선생님의 사표를 반려했습니다. 같은 취지의 말이 몇 번 반복되었지만 나는 끝내 선생님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 일석 선생님께서는 결국 허허 웃으셨다. “장 총장 고집도 대단하시다”라면서 사표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가셨다. 나라고 대학 경영인으로서 왜 여러 생각이 생기지 않았을 까만은 당시 내가 이렇게 즉각적인 사표 거부를 한 동기는 나라도 선생님을 지켜야 한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해득실을 떠나 내 은사님, 대학의 선생님을 지키는 것이 총장의 임무라는 믿음이 본능처럼 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이희승 선생님과 고은 시인이 돌아간 뒤 두 시간 쯤 지났을까. 모 장관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이희승 박사님이 유신개헌 서명에 앞장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동양학연구소 소장 사표를 장 총장님이 책임지고 처리 하세요.” 마치 상사가 지시를 하는 명령조의 말투였다. 아무리 장관이라 해도, 대통령의 권력에 직결되는 문제라 해도 이런 지시를 받고 “네, 네”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장관에게 바로 응답했다. “저는 이희승 선생님의 사표를 수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 진심을 담아 설명했다. “일석 선생님은 제 은사님이십니다. 내가 서울대 학생시절에 선생님한테서 교양 국어를 1년간 배웠습니다. 제자가 은사님께 어떻게 사표를 운운합니까. 대학에서 선생님을 그리 모실 수는 없습니다. 만약 사표를 내야 한다면 제가 총장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가능합니다만 저는 총장으로서 내 선생님의 사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제의 도리이지만 결국 장관의 지시를 거부한 셈이 되었다. 대학을 관장하는 장관의 지시를 거부하였으니 조만간에 나의 총장 승인 취소 통지가 오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총장직 사표제출에 대한 움직임이나 일석 선생님을 대학 바깥으로 나가게 하려는 압력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유신헌법의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적 서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기도 했고, 정권은 ‘긴급조치 선포’라는 강경책을 실행해 치열한 대치국면에 접어들었다. 다행히도 일석 선생님에 대한 정부 차원의 비토는 더 이상 없었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내 철학이‘정치교수’, 혹은 ‘반정부 교수’에 대한 보호로 연장된 셈이다. 일석 선생님과 맺은 사제의 인연이 서울대 학부시절에서 비롯되었다면 대학원 시절에 맺은 인연을 지키려는 노력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개헌을 추진할 때 일석 선생님 만이 아니라 많은 대학 교수들이 개헌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고려대의 김성식 교수님도 그런 분이었다. 특히, 김 교수님은 삼선개헌 반대성명을 고려대에서 제일 먼저 발표하는 바람에 정부의 압력도 그만큼 클 수 밖에 없었다. 교수가 강단이 아닌 실물정치에 참여했으니 캠퍼스를 떠나라는 강요가 음으로, 양으로 대학에 통하던 시절이었다. 고려대는 김성식 교수님을 보호하지 못했고 김 교수님은 졸지에 해직교수가 되었다. 그런데 그 김 교수님은 내가 고려대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할 때 서양사를 수강한 은사님이었다. 자연스럽게 김 교수님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막상 사직을 하고나니 생계를 꾸리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비록 나는 동양사를 전공했지만 김성식 교수님의 학문적 성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직접 김 교수님의 강의를 수강한 내가 확신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 대학 사학과 교수님들을 설득했다. 사실 김성식 교수님의 해직에 앞서 나는 그 분의 수제자인 지동식 교수를 단국대에 초빙하기도 했다. 서양사 전공자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대학원생 시절의 스승인 김성식 교수님의 간곡한 부탁도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이같은 과정을 잘아는 사학과 교수님들은 당연히 김 교수님의 영입을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첫째는 서울대 출신 교수들이 당시 사학과의 주류였는데 고려대 출신 교수를 연이어 초빙하는 것에 대해 강한 반발을 했다. 두 번째는 정부의 서슬퍼런 압력이 있는데 정치교수로 낙인찍힌 교수를 포용했을 때 단국대와 장충식 총장이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염려였다. 나는 사학과 교수님들을 일일이 만나서 역사학자로서 김 교수님이 밝힌 소신으로 지금 고초를 당하는데 같은 역사학자들인 우리가 울타리를 쳐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역설했다. 거기에 만약 이번 일로 대학이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면 당연히 총장인 내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 그렇게 설득을 거듭하여 결국 김성식 교수님을 단국대에 안착시켰다. 김 교수님은 우리 대학에 출근하자마자 나를 찾아왔다.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고려대도 외면한 나를 단국대에서 불러주니 내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며 거듭 고마움을 밝혔다. 그러면서 “ 신의 수제자인 지동식 교수를 사학과에 영입해준 것이 첫 번째 신세인데 본인까지 신세를 져, 결국 평생 두 번의 은혜를 입었으니 장충식 총장이 베푼 신의를 꼭 단국대에서 갚겠다”고 약속을 했다. 일석 선생님도 그렇고, 김성식 교수님의 일도 있고 하니 자연스럽게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에 호출을 받기도 했고, 문교부(교육부 전신) 장관의 면담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또 다른 진보적 노동경제학자인 김윤환 교수 역시 해직이 되었는데 이 분을 우리 대학 상경대로 영입하자 관련 기관들의 눈초리는 더욱 싸늘해졌다. 특히 중앙정보부의 고압적 자세는 도를 넘어 ‘단국대 총장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식으로 확대되었다. 동시에 “김성식 교수, 김윤환 교수를 다시 내보내라.”고 압박을 했다. “교수가 연구를 위해서라면 이념적 좌우를 넘어 다양한 학문적 편력을 하는 것이고,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선생님으로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고 실천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나는 반문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말을 할 때는 총장 해임의 경우를 스스로 각오했기에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박정희 대통령이 나의 대학경영 철학과 성과에 대한 긍정적 이해가 있었기 때문인지 그 이상의 강제 조치는 없었다. 오히려 교육부 장관은 이러한 압력이 한숨 지난 뒤에 나를 만나 “고맙다.”고 하시면서“장 총장이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지만 단국대에 가서는 이희승 박사나 김성식 교수와 김윤환 교수가 정치 활동을 안 하고 조용히 계시니 다행”이라 고마워했다. 거기에 덧붙여“이희승 박사의 사표를 받고 김성식 교수와 김윤환 교수를 단국대에서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분들은 정부와 고려대를 향한 원망이 쌓이고 쌓여 정말 정치교수가 되어 극단적 비난을 퍼부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사의를 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힘들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정치상황이 이완된 시기가 왔다. 아쉽게도 김성식 교수님은 자신의 전직 대학으로 복귀를 했다. 평생을 단국대 학생을 위해 봉사하겠다던 눈물어린 약속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아니 물거품을 넘어서 고려대 출신으로 우리 사학과에 재직하던 제자 교수들도 함께 데리고 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제의 인연을 지키려 내 총장직을 담보로 걸고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또 최고의 대우와 연구비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기에 개인적으로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신의를 경우에 따라 헌신짝처럼 버리는 유형의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이 때 배웠으니 이 역시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일면이라 여겨야 할런지... 반면에 일석 선생님은 이후 우리 대학의 한한대사전 편찬 사업의 기틀을 잡아주시고, 동양학연구소의 학술활동, 연구업적 간행사업 등을 체계화하시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셨다. 나이어린 제자인 나에게도 늘 정중히 대해주셨다. 나는 그것이 대학의 권위를 지키려는 선생님의 배려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양학연구소 관련 업무를 상담할 때는 선생님을 오시라 하지 않고 내가 소장실을 찾아가 만났다. 그러면 선생님은 오히려 응당 총장실로 가야 한다면 노구를 이끌고 본관을 오시려 했다. 그러니 나 역시 방문 전화를 하고나면 부랴사랴 동양학연구소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다 보면 정작 사무실이 아니라 캠퍼스 한 복판인 범은정 앞, 학생회관 앞 계단(구 한남동캠퍼스)에서 만나기도 했으니 돌이켜보면 그 속에 숨은 선생님의 자애로움이 얼마나 컸던가. 이후 선생님은 나와의 약속대로 10년의 기간을 근무하시고 소장직을 떠났다. 더도 아닌, 덜도 아닌 1971년 1월부터 1981년 1월까지 임기를 마친 것이다. 나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약속과 후학들을 위한 배려를 앞세워 터럭만큼의 주저함이 없었다. 돌아가시면서도 평생 모은 정재를 후배 국어학자를 위한 학술기금으로 환원하신 것도 선생님다운 마무리였다. 존칭어로서의 ‘선생님’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그 뜻 그대로 삶을 일관하신 ‘선생님’이 바로 일석 이희승 선생님인 것이다. 가르침은 교단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삶과 생활 속에서도 부단히 그 진면목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교수의 권위와 이익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석 선생님의 삶을 통해 인연이란 만들어지는 것보다 그 인연을 가꾸는 노력과 신의가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백건우 피아노의 추억

201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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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하면 많은 한국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자랑스러워 한다. 실제로 그는 매년 세계 각국에서 독주회를 여는 연주가로, 그리고 한때 한국을 대표하던 배우 윤정희 씨와 가정을 이뤄 좋은 삶을 살고 있다. 한국 피아니스트 1세대의 원로급 음악가인 백건우 씨이지만 나는 ‘소년 백건우’와, 그것도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쌓는데 필수적인 ‘피아노’를 통해 또 다른 인연을 맺었다. 반세기가 훨씬 넘은 60년 전의 일이다. 내가 백건우 씨를 직접 만나게 된 것은 그가 배재중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그는 중학생이었지만 이미 피아노 신동으로 국내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특히 1956년, 열 살이었던 어린 나이에 국립교향악단과 에드바르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을 협연하며 클래식 음악계에 정식으로 데뷔를 했다. 음악의 영재 또는 수재라는 칭찬을 벗어나 한국을 빛낼 인재로 촉망받고 있었다. 한국동란의 포성이 멎은 지 10년도 안된 한국 땅에 피아노를 가진 집이 흔할 리 없었다. 그 척박한 환경에서 등장한 백건우 소년에 대한 관심은 국가적이라 할 만큼 컸었다. 그 국민적 관심이 필자의 선친에게도 손을 내밀었었나보다. 선친께서는 어느 날 나에게 피아노 연주회에 가자고 제의를 하셨다. 명동에 있는 국제극장에서 백건우 소년이 미8군 군악대와 피아노 협연을 한다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야 내가 좋아하는 분야이기에 일부러라도 연주회를 가겠지만 선친께서는 국악은 매우 좋아하셨지만 서양 음악을 좋아하시는 편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중학생의 피아노 연주를 관람하신다고 나를 동행시켜 가실 분은 아니었다. 아버님을 따라 공연장에 가서야 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주회는 대단한 성황이었다. 공연장인 국제극장에는 관람객으로 북적였고 밖에는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표를 구하다가 되돌아 갈 정도였다. 들어가고 보니 그 곳에는 이북출신, 특히 평안북도 출신 유명 인사들은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북오도청(주 : 행정법 상 미수복지구인 황해도·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함경북도의 행정 및 조사연구를 위해 세워진 이북오도위원회의 산하 도청)의 평안북도 지사를 비롯해 각 군민회장, 기타 법조인 언론인 교육계 종교계 등에 재직 중인 많은 동향 분들을 볼 수 있었다. 선친께서는 그 중에서도 평안북도 도민회 회장의 특별 초대를 받고 가신 것이다. 각별한 이유가 또 있었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백건우 군 할아버지와 내 아버지는 고향친구 사이였다. 전쟁의 참혹함을 타향에서 견뎌야 하는 실향민이자 고향 친구의 일가에 생긴 경사이니 선친은 아들인 나를 특별히 동행해 연주회를 간 것이리라. 평안북도 도민회 회장이 백건우 군의 연주회에 내 아버지를 초대한 것은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백건우 소년의 재능을 살릴 장학지원에 대한 기대가 그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피아노는 일반 가정에 들여 놓을 수 없었던 고가의 악기인 동시에 가구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피아노를 생산하지 못했다. 수입에 의존해야 하지만 달러가 귀한 시절이라 당연히 외국산 피아노를 취급할 대리점 개설도 쉽지 않았기에 돈이 있어도 개인이 사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평안북도 출신 인사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유력한 분은 많았으나 백건우 군에게 피아노를 선뜻 사줄만한 분도 없었다. 평안도민회 회장은 피아노 천재 백건우 군을 위해 피아노를 기증해줄 분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나서는 인사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범정 장형 선생을 떠올린 것이다. 선친께서는 단국대를 설립해 육영 사업가로 이미 동향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 불우한 사람을 위해서 봉사를 많이 하는 분으로도 소문이 나있었다. 당시 평북도민회장은 이 점에 착안을 하여 내 선친을 찾아와 피아노를 사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물론 백건우 군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따로 개인 연습용 피아노를 사줄 수 없었다. 선친께 피아노 기증을 설득할 그 당시에 듣기로는 백건우 군이 배재중학교 강당에 있는 피아노를 방과 후 사용한다고 했다. 겨울에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난방 시설이 없는 추운 강당에서 나이 어린 소년이 피아노 연습을 하는 것은 ‘연습’ 이전에 ‘고행’이었으리라. 백건우 ‘어린이’는 매일 학교 강당에 가서 시린 손을 녹이고 연습을 하다가 다시 추위에 손가락이 굳으면 손을 비비며 녹이고 연습을 한다고 했다. 유일한 위로는 아버지가 저고리 속에 품어 보온을 한 온 우유를 마시는 것이었다. 어린 소년의 의지고 대단하고, 이를 사랑으로 뒷받침하는 부모의 심정이 또 어땠을까. 백건우 소년의 아버지가 하는 말씀을 듣자 선친의 마음은 바로 굳어졌다. 추위에 밥을 굶는 고학생을 봐도 어떻게든 장학금을 마련해주시던 선친이시니 이런 사연을 듣고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었다. 당장 피아노를 기증해준다는 약속을 하셨다. 다만 그 약속의 결과물, 즉 피아노를 마련하는 방법이 남달랐다. 선친께서는 나를 부르시더니 피아노를 내노라 분부하셨다. 연주회를 같이 가자하신 이유는 음악을 듣자는 것이라기 보다는 “너가 가진 피아노를 백건우 군에게 주라”는 암묵적 동의를 구하려는 '사전작업'이었던 셈이다. 백건우 군의 재능이야 하늘이 주신 선물이고, 그 노력 또한 감동스럽지만 내가 마련한 피아노 역시 내게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 피아노는 독일산이었는데 우리 집에 들이기까지, 즉 수입과정에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비단 수입 과정에서 들인 노고가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그 피아노를 마련한 이유는 내 큰딸아이 때문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던 나는 내 자식들에게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게 하고픈 희망이 있었다. 자식들이 음악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도록 키워주고픈 아비의 마음이 담긴 피아노였다. 그 피아노를 사고 싶어 아내와 나는 첫 아이인 큰 딸이 태어나고부터 저축을 했다. 큰 딸이 4살 나던 해에 간신히 피아노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나마 증권회사와 개인 사업으로 약간의 돈을 만지던 때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몇 해를 걸쳐 저축을 하고, 1년을 들여 수입해온 피아노를 다른 집 아이를 위해 기증하신다니 내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선친께서는 한마디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고 당연한 일을 하시는 듯 피아노를 가져가셨다. 선친의 의지를, 더군다나 어려운 환경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는 소년에게 필요하다는 장학사업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선친께서는 피아노를 가져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림이(큰 딸의 이름)는 아직 어리잖니, 그리고 백건우 같은 영재도 아니고, 당장 피아노가 없어도 될 거야. 하지만 백건우를 보라구. 이제 해외 연주도 해야 한다 하고, 미국으로 유학도 간다는데 연습할 피아노가 꼭 있어야 하지 않겠니? 나중에 나라를 빛낼 재능이 있는 아이에게 좋은 일을 하는게 우리가 할 일이야.” 그리고는 우리 딸에게 준 피아노를 가지고 가셨다. 내 기억으로는 세관에서 수속을 마치고 피아노를 집으로 옮겨 놓은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날이었다. 피아노를 다른 사람에게 내준다고 얘기를 했지만 네 살배기 어린 아이가 이해를 할 수 없었으리라. 혹시 피아노가 상할까 마음대로 치지도 못했는데... 큰 딸은 영문도 모른 채 피아노가 집밖으로 실려 나가는 날 많이 울었다. 피아노가 들어오자 좋아했던 만큼 슬픔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피아노가 있던 자리를 보면서 울기도 했다. 나는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화분을 놓았다. 딸 아이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그런 일이 있은 후 배재중학교로부터 연락이 왔다. 피아노 기증식을 정식으로 갖기로 결정하였으니 참석해달라는 것이다. 날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배재중학교 강당 현관 앞에서 여러분들과 기념 촬영을 한 일은 선명하다. 당시 배재중학교 교장선생님, 평북도민회 회장, 평북지사와 용천군 군민회장, 그리고 나의 선친과 내가 참석하였다. 우리 대학 측에서도 많은 분들이 동석을 하여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기증식에서 만난 백건우 군은 무척 마르고 왜소한 체격에 상고머리를 하고 있었다. 기증식을 치루면서 나는 조용하고 차분해보이던 그 소년에게 새로 얻은 피아노가 큰 기쁨이 되길 염원했다. 나 역시 음악 교육을 위해 애를 써서 마련한 피아노였고, 그 피아노를 집에 들이자 뛸 듯이 기뻐한 내 딸아이의 표정이 눈에 선했으니까. 물론 일주일도 못 채우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서 헤어져야 했고 딸의 눈물만 자아내고 말았지만... 그 뒤, 백건우 소년은 1961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줄리어드음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스무살을 넘기자마자 국제콩쿠르에 입상해 성공가도에 입문하고 지금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노연주가로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내 큰딸은 유년기에 겪은 ‘피아노 기증 사건’때문인지 피아노대신 첼로로 선회해 성실히 음악 공부를 했다. ‘상고머리 중학생’이었던 백건우 소년은 이미 고희를 넘겨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나 역시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다. 피아노 기증은 이미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그야말로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피아노가 과연 내 선친께서 희망했던 대로 백건우 소년의 성장에 유익했었는지, 그리고 어찌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혹시나 비록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집에서 쓰던 피아노를 기증했다고 타박이라도 받지 않았을까 염려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물건이고, 나름 갸륵한 정성이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그 가치가 티끌처럼 가벼워지기도 하는 것이 세상의 일이니까. 언젠가 같은 자리에서 만나 그 희미한 옛 일을 놓고 정담을 나눌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 아니 흘러간 강물이니 추억 속으로 흘려보내는 게 도리인 걸까...

추억의 그림-<span style=바바라 부룩스의 설경(雪景)" style="width:208px;height:136px;" />

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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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교 천안병원 로비에는 외국의 풍경을 그린 대형 그림이 두 점 걸려있다. 하나는 캐나다 로키산맥 관광의 중심지인 재스퍼(Jasper) 인근의 산봉우리와 설경(雪景)을 그린 그림이다. 다른 하나는 로키산맥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 숲을 담고 있다. 장대하면서도 신선한 자연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 풍경화들은 캐나다의 여류화가 바바라 브룩스 (Barbara Brooks, 1941~2009)가 그린 작품이다. 두 그림 중 하나인 로키산 설경은 36년 전 내가 재스퍼 타운에 있는 화랑에서 직접 구입한 그림이고 자작나무 숲 그림은 바바라가 나를 위해서 그려 준 그림이다. 지금은 세상을 달리했지만 바바라 씨는 태평양을 건너 천안의 단국대병원에서 그림을 통해 대자연에 대한 애정을 여전히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 인연의 처음은 1983년 하계유니버시아드가 끝난 직후 시작되었다. 당시 대회는 캐나다 애드먼튼에서 열렸다. 나는 이 대회의 선수단장으로 참가해 성공적으로 대회를 끝내고 개인 시간을 가졌다. 당시 한국선수단의 통역을 현지 교포인 한영자 선생이 나를 자신이 경영하는 쇼핑 몰로 안내했다. 그동안의 수고를 위로할 겸 한 선생의 쇼핑 몰에서 물건을 팔아주려는 생각이었다. 쇼핑 몰을 둘러보던 중 우연히 로키산의 설경을 그린 그림을 마주했다. 로키산의 웅장함을 유화가 아닌 수채화로 담아낸 것이 특색이었고, 자연을 맑고 담백하게 표현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을 사고 싶어 가격을 물으니 2천 캐나다 달러라 했다. 현금이 없었기에 포기를 해야 했지만 이상하게 시선을 거둘 수 없었고 결국 계약금을 일부 내놓고 귀국 뒤에 잔금을 보낼 테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아 달라 부탁을 했다. 귀국 뒤에 잔금을 송금했고 한영자 씨가 모국을 방문하는 길에 이를 갖다가 본관 벽에 걸어놓고 관람을 했다. 화가가 유명하지도 않아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화풍이 좋아 게시를 하였는데 보는 이들이 모두 칭찬을 했다. 자꾸 좋은 그림이라는 칭찬을 하는데 정작 화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지만 바쁜 공무에 쫒기면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10 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비로소 수소문을 하였다. 한영자씨를 통해서 작가의 신상 소식이 전해왔다. “바바라 씨의 국적은 처음에는 미국이었다. 가족들과 캐나다에 여행을 왔다가 로키산의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서 캐나다 이민을 요청했다. 단순히 풍경을 즐기려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남편이 이를 거부하면서 결국 이혼하고 재스퍼 타운으로 두 딸을 데리고 이주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관광업 밖에는 따로 마땅한 산업이 없는 산골도시 재스퍼에서 그림으로 생업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니 비록 소원대로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리고 사는 삶에 행복과 보람을 느끼고 살지만 경제 형편을 늘 쪼들릴 수 밖에 없다는 얘기도 들었다. 내가 산 그림도 1년 내내 화방에 걸려 있었지만 팔리지 않았던 그림이었다. 심지어 두 딸과 사는 집의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날 형편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의 예술적 의지를 위해 용기를 냈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의 궁핍함과 생활고, 그리고 두 딸을 가진 어머니가 겪어왔을 마음 속 고통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동시에 두 딸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시련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은 열정에 걸맞게 바바라 씨의 작품에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풍부하게 녹아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아니, 이런 예술적 역량이 좀 더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바바라 씨를 한국에 초청해 우리나라의 미술 애호가에게 소개를 하면 어떨까 싶었다. 가난에 쫒기는 세 모녀에게 예술혼을 이어갈 작은 계기라도 마련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는 그녀를 초청해 개인전을 열어주자는 결심을 했다. 1993년 들어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나는 MBC 방송국의 간부들을 설득했다. 유럽과 미국에 치우쳐 있는 외국 화단 소개의 비중을 캐나다, 그것도 여자 화가를 초청해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는 점을 역설했다. MBC도 긍정적 자세를 보여 단국대학교와 MBC가 공동으로 수채화가 <바바라 브룩스 초청전>을 열기로 했다. 장소도 세종로의 프레스 센터 전시실을 빌려 규모를 키웠다. 언론사의 홍보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비록 캐나다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못 받았지만 바바라 씨의 그림을 한국의 애호가들은 달리 평가해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바바라 씨가 김포 공항에 도착하는 날 나는 그를 영접하러 공항에 나가서 처음 만났다. 많은 사진 기자들이 나와서 그녀를 카메라에 담느라 번잡하였다. 공항에서 그를 처음 만났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키가 작은 편이 아니었는데 나보다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로키산맥의 호연지기를 온 몸으로 담아낸 풍모였다. 또한 여성임에도 그분이 입고 온 옷이 너무 허름해서 또 한 번 놀랐다. 혹시라도 한국 사회가 가진 부정적 관행(사람을 외형으로 평가하는)에 불이익을 입을까 염려되어 지인을 통해 특별히 부탁해서 하루 밤 사이에 여성 정장을 만들어 선물하였다. 옷차림이 달라지니 비록 체격은 커보였지만 서양 미녀의 자태가 살아나 초대전 개막식에서 많은 팬의 시선을 끌었다. 언론도 한국에서 처음 보는 캐나다 화가의 작품이라는 점에 적극적으로 보도를 해 전시회 첫날에는 전시장에는 발을 드려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람객이 참석하였다. 전시회가 열리는 첫날 주한 캐나다 대사 내외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외교 사절들이 참석했고 우리나라 정부 요인과 외무부, 문화관광부의 고위 인사를 비롯하여 문화 예술계 인사들, 특히 유명 화가들과 그의 문하생들도 많이 자리를 함께 해 성황을 이루었다. 바바라 여사가 캐나다에서 가지고 온 그림은 15일의 전시 기간에 전부 매진되었다. 주한 캐나다 대사는 “한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된 이후 캐나다 예술가로서는 한국에서 처음 갖는 초청전임에도 그 어떤 이벤트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화행사”라며 “바바라 씨가 캐나다의 명예를 빛낸 분”이라고 개막연설을 통해 극찬을 했다. 지금 정확한 기억은 아닐 수 있지만 당시 전시회가 매진되면서 얻은 수입금은 세금을 제외하고 미화 10만 달러가 넘었다. 물론 나는 그림 판매 수입 전액을 그녀에게 증여하였다. 전시회가 끝난 뒤 캐나다 대사관 측은 바바라 씨에게 감사장을 수여하고 캐나다 정부에 한국-캐나다 문화교류에 기여했다는 공적을 보고했다. 캐 나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바바라 씨의 거주지인 재스퍼 타운이 속한 알버타 주의 대표 화가로 지명했다. 이를 뉴스로 접한 강원도가 같은 산악중심 관광 산업을 진흥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알버타주와 공식적인 자매결연까지 맺었다. 그리고 다음해 강원도가 정식으로 바바라 씨를 초청하여 전시회를 열기로 공표하였다. 가난한 화가의 창작열을 돕겠다고 나선 나의 선의가 당사자에게는 물론이고 한국-캐나다의 우의를 키우는 계기가 되었으니 내게도 큰 기쁨을 준 셈이다. 인연은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로 확대되었다. 미담을 들은 알버타 주 출신의 국회의원이 나를 초청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월터 트윈(Walter P. Twinn)으로 캐나다 원주민의 혈통을 갖고 있었다. 원주민을 대표해, 그리고 알버타 주의 대표로 상원의원이 된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러 캐나다를 간다는 사실을 안 바바라 씨는 기꺼이 나를 환영해주러 캐나다 뱅쿠버 공항까지 달려왔다. 재스퍼에서 밴쿠버 공항까지 차로 10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인 데 바바라 씨는 자신이 직접 차를 몰고 달려왔다. 바바라 화가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환영인사를 위해 10시간을 차를 몰고 달려온 것도 그렇지만 나를 위해 아예 새 차를 샀다고 말하는 바바라 씨의 얼굴은 행복한 웃음이 가득해 나를 감동케 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빚에 몰려 셋방에서 쫓겨날 불행한 처지에서 10만 달러가 넘는 수입에 알바타 주의 대표 화가이자 그림도 잘 팔리는 유명화가가 되어 자신만의 화실까지 마련했다는 근황에 나는 더 큰 자부심과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재스퍼 타운에 도착한 뒤 바바라 화백은 각종 자리에서 나를 자신의 은인, 운명을 바꿔놓은 멘토로 소개했다. 월터 트윈 상원의원도 바바라 씨의 설명을 들은 터라 더욱 더 나에게 우호적이었고 한국과 단국대학에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나는 그런 월터 트윈 의원에게 명예박사학위 수여를 제안했다. 실제로 1995년 4월 10일 나는 그를 초청해 명예경제학 박사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방문 기간 동안 바바라 여사는 새로 마련한 화실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햇볕이 잘드는 아담한 화실은 화가의 창작열을 북돋기에 충분했다. 그 자리에서 바바라 씨는 우리 대학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50장의 그림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실제로 내가 한국에 돌아온 뒤 그 후 8장의 그림이 우송되어 왔다. 바바라 씨의 건강이 지속되었다면 이 약속은 실현되었으리라 믿는다. 한편 나를 초청한 월터 트윈 의원은 알버타 주에서 나오는 생수를 제조, 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생수는 캐나다 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에 수출이 되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착안해 바바라 씨의 그림을 월터 트윈 의원이 제조하는 생수병의 바탕 그림으로 사용하도록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도 현실화되어 바바라 씨의 작품은 급기야 생수병에 부착이 되어 미국, 유럽까지 선보였고, 약 100만 여 병이 넘게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확한 계약 조건은 몰랐지만 큰 수입이 바바라 화백에게 돌아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활발한 우정을 나눴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명성과 경제적 여유가 시작된 1995년을 넘으면서 바바라 여사는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그의 장기인 수채화를 일본 등 해외에서 가르치는 등 많은 사업을 시작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건강을 지키지 못해서인지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 나 역시 서울캠퍼스 이전, 신캠퍼스 건설 사업으로 많은 일을 겪으면서 바바라 씨를 따로 챙기지 못하고 후일을 기약할 뿐이었다. 2009년의 일이었다. 재스퍼에 거주하는 지인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바바라 여사가 중병에 시달려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바라 여사가 죽기 전에 꼭 한번 장충식 박사님을 보고 싶다며 소원이라 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바바라 화백을 자주 만난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 분과 단둘이 식사를 한 적도 없었다. 나는 그를 위해서 봉사를 했는데 그 일이 바바라 화백을 국제적인 유명 화가로서의 명예를 얻게 한 것이다. 나는 한번도 이 일의 대가나 급부를 기대하지 않았다. 이후 들리는 말로는 바바라 씨가 한국 교민을 만나거나 현지 언론과 접하는 자리에서 “장충식 총장님이 자기 운명을 바꾸어 놓은 커다란 은인”이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내가 은인인들 죽기 전에 만나기를 소원한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죽어가는 예술가의 마지막을 위로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위독하다 하니 지인을 동행시켜 캐나다로 서둘러 갔다. 바바라 씨는 재스퍼의 시립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는 그의 안색이 위중한 상황을 암시해주었다. 재스퍼가 산악지대의 작은 도시라 그의 병을 치료할만한 의사가 없어서 에드먼튼에 있는 전문의를 특별히 초청하여 연명 치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병실에 들어서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꼭 잡았다. 오래 동안 보고 싶었고 다시 한국을 방문해 단국대에 좋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이리 되었다며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 그리고는 기력이 다한 듯 곧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옆에 있던 주치의와 간호사가 바바라 화백의 운명을 알려주었다. 2009년 8월의 일이었다. 바바라 화백의 작품을 처음 만난 때로부터 30년이 훨씬 넘은 일이다. 비록 그는 세상을 달리했지만 그의 그림은 우리 대학 병원 로비에 걸려 있다. 방문객들도, 교직원들도 그림을 보더라도 평범한 시선을 보낸 뒤 그대로 지나친다. 어느 누구도 바바라 화백의 사연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로키산의 풍광을 사랑하고 태평양을 건너와 화가로서 새로운 힘을 얻어 가서 죽을 때 까지 그림에 몰두하고, 단국대와 맺은 인연, 내가 보낸 응원을 기억했던 화가의 삶을 누가 기억하겠는가. 나밖에는... 그래서 추억을 더듬어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