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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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 피아노의 추억

201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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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건우’하면 많은 한국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자랑스러워 한다. 실제로 그는 매년 세계 각국에서 독주회를 여는 연주가로, 그리고 한때 한국을 대표하던 배우 윤정희 씨와 가정을 이뤄 좋은 삶을 살고 있다. 한국 피아니스트 1세대의 원로급 음악가인 백건우 씨이지만 나는 ‘소년 백건우’와, 그것도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쌓는데 필수적인 ‘피아노’를 통해 또 다른 인연을 맺었다. 반세기가 훨씬 넘은 60년 전의 일이다. 내가 백건우 씨를 직접 만나게 된 것은 그가 배재중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그는 중학생이었지만 이미 피아노 신동으로 국내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특히 1956년, 열 살이었던 어린 나이에 국립교향악단과 에드바르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을 협연하며 클래식 음악계에 정식으로 데뷔를 했다. 음악의 영재 또는 수재라는 칭찬을 벗어나 한국을 빛낼 인재로 촉망받고 있었다. 한국동란의 포성이 멎은 지 10년도 안된 한국 땅에 피아노를 가진 집이 흔할 리 없었다. 그 척박한 환경에서 등장한 백건우 소년에 대한 관심은 국가적이라 할 만큼 컸었다. 그 국민적 관심이 필자의 선친에게도 손을 내밀었었나보다. 선친께서는 어느 날 나에게 피아노 연주회에 가자고 제의를 하셨다. 명동에 있는 국제극장에서 백건우 소년이 미8군 군악대와 피아노 협연을 한다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야 내가 좋아하는 분야이기에 일부러라도 연주회를 가겠지만 선친께서는 국악은 매우 좋아하셨지만 서양 음악을 좋아하시는 편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중학생의 피아노 연주를 관람하신다고 나를 동행시켜 가실 분은 아니었다. 아버님을 따라 공연장에 가서야 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주회는 대단한 성황이었다. 공연장인 국제극장에는 관람객으로 북적였고 밖에는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표를 구하다가 되돌아 갈 정도였다. 들어가고 보니 그 곳에는 이북출신, 특히 평안북도 출신 유명 인사들은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북오도청(주 : 행정법 상 미수복지구인 황해도·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함경북도의 행정 및 조사연구를 위해 세워진 이북오도위원회의 산하 도청)의 평안북도 지사를 비롯해 각 군민회장, 기타 법조인 언론인 교육계 종교계 등에 재직 중인 많은 동향 분들을 볼 수 있었다. 선친께서는 그 중에서도 평안북도 도민회 회장의 특별 초대를 받고 가신 것이다. 각별한 이유가 또 있었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백건우 군 할아버지와 내 아버지는 고향친구 사이였다. 전쟁의 참혹함을 타향에서 견뎌야 하는 실향민이자 고향 친구의 일가에 생긴 경사이니 선친은 아들인 나를 특별히 동행해 연주회를 간 것이리라. 평안북도 도민회 회장이 백건우 군의 연주회에 내 아버지를 초대한 것은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백건우 소년의 재능을 살릴 장학지원에 대한 기대가 그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피아노는 일반 가정에 들여 놓을 수 없었던 고가의 악기인 동시에 가구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피아노를 생산하지 못했다. 수입에 의존해야 하지만 달러가 귀한 시절이라 당연히 외국산 피아노를 취급할 대리점 개설도 쉽지 않았기에 돈이 있어도 개인이 사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평안북도 출신 인사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유력한 분은 많았으나 백건우 군에게 피아노를 선뜻 사줄만한 분도 없었다. 평안도민회 회장은 피아노 천재 백건우 군을 위해 피아노를 기증해줄 분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나서는 인사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범정 장형 선생을 떠올린 것이다. 선친께서는 단국대를 설립해 육영 사업가로 이미 동향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 불우한 사람을 위해서 봉사를 많이 하는 분으로도 소문이 나있었다. 당시 평북도민회장은 이 점에 착안을 하여 내 선친을 찾아와 피아노를 사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물론 백건우 군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따로 개인 연습용 피아노를 사줄 수 없었다. 선친께 피아노 기증을 설득할 그 당시에 듣기로는 백건우 군이 배재중학교 강당에 있는 피아노를 방과 후 사용한다고 했다. 겨울에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난방 시설이 없는 추운 강당에서 나이 어린 소년이 피아노 연습을 하는 것은 ‘연습’ 이전에 ‘고행’이었으리라. 백건우 ‘어린이’는 매일 학교 강당에 가서 시린 손을 녹이고 연습을 하다가 다시 추위에 손가락이 굳으면 손을 비비며 녹이고 연습을 한다고 했다. 유일한 위로는 아버지가 저고리 속에 품어 보온을 한 온 우유를 마시는 것이었다. 어린 소년의 의지고 대단하고, 이를 사랑으로 뒷받침하는 부모의 심정이 또 어땠을까. 백건우 소년의 아버지가 하는 말씀을 듣자 선친의 마음은 바로 굳어졌다. 추위에 밥을 굶는 고학생을 봐도 어떻게든 장학금을 마련해주시던 선친이시니 이런 사연을 듣고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었다. 당장 피아노를 기증해준다는 약속을 하셨다. 다만 그 약속의 결과물, 즉 피아노를 마련하는 방법이 남달랐다. 선친께서는 나를 부르시더니 피아노를 내노라 분부하셨다. 연주회를 같이 가자하신 이유는 음악을 듣자는 것이라기 보다는 “너가 가진 피아노를 백건우 군에게 주라”는 암묵적 동의를 구하려는 '사전작업'이었던 셈이다. 백건우 군의 재능이야 하늘이 주신 선물이고, 그 노력 또한 감동스럽지만 내가 마련한 피아노 역시 내게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 피아노는 독일산이었는데 우리 집에 들이기까지, 즉 수입과정에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비단 수입 과정에서 들인 노고가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그 피아노를 마련한 이유는 내 큰딸아이 때문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던 나는 내 자식들에게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게 하고픈 희망이 있었다. 자식들이 음악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도록 키워주고픈 아비의 마음이 담긴 피아노였다. 그 피아노를 사고 싶어 아내와 나는 첫 아이인 큰 딸이 태어나고부터 저축을 했다. 큰 딸이 4살 나던 해에 간신히 피아노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나마 증권회사와 개인 사업으로 약간의 돈을 만지던 때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몇 해를 걸쳐 저축을 하고, 1년을 들여 수입해온 피아노를 다른 집 아이를 위해 기증하신다니 내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선친께서는 한마디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고 당연한 일을 하시는 듯 피아노를 가져가셨다. 선친의 의지를, 더군다나 어려운 환경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는 소년에게 필요하다는 장학사업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선친께서는 피아노를 가져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림이(큰 딸의 이름)는 아직 어리잖니, 그리고 백건우 같은 영재도 아니고, 당장 피아노가 없어도 될 거야. 하지만 백건우를 보라구. 이제 해외 연주도 해야 한다 하고, 미국으로 유학도 간다는데 연습할 피아노가 꼭 있어야 하지 않겠니? 나중에 나라를 빛낼 재능이 있는 아이에게 좋은 일을 하는게 우리가 할 일이야.” 그리고는 우리 딸에게 준 피아노를 가지고 가셨다. 내 기억으로는 세관에서 수속을 마치고 피아노를 집으로 옮겨 놓은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날이었다. 피아노를 다른 사람에게 내준다고 얘기를 했지만 네 살배기 어린 아이가 이해를 할 수 없었으리라. 혹시 피아노가 상할까 마음대로 치지도 못했는데... 큰 딸은 영문도 모른 채 피아노가 집밖으로 실려 나가는 날 많이 울었다. 피아노가 들어오자 좋아했던 만큼 슬픔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피아노가 있던 자리를 보면서 울기도 했다. 나는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화분을 놓았다. 딸 아이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그런 일이 있은 후 배재중학교로부터 연락이 왔다. 피아노 기증식을 정식으로 갖기로 결정하였으니 참석해달라는 것이다. 날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배재중학교 강당 현관 앞에서 여러분들과 기념 촬영을 한 일은 선명하다. 당시 배재중학교 교장선생님, 평북도민회 회장, 평북지사와 용천군 군민회장, 그리고 나의 선친과 내가 참석하였다. 우리 대학 측에서도 많은 분들이 동석을 하여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기증식에서 만난 백건우 군은 무척 마르고 왜소한 체격에 상고머리를 하고 있었다. 기증식을 치루면서 나는 조용하고 차분해보이던 그 소년에게 새로 얻은 피아노가 큰 기쁨이 되길 염원했다. 나 역시 음악 교육을 위해 애를 써서 마련한 피아노였고, 그 피아노를 집에 들이자 뛸 듯이 기뻐한 내 딸아이의 표정이 눈에 선했으니까. 물론 일주일도 못 채우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서 헤어져야 했고 딸의 눈물만 자아내고 말았지만... 그 뒤, 백건우 소년은 1961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줄리어드음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스무살을 넘기자마자 국제콩쿠르에 입상해 성공가도에 입문하고 지금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노연주가로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내 큰딸은 유년기에 겪은 ‘피아노 기증 사건’때문인지 피아노대신 첼로로 선회해 성실히 음악 공부를 했다. ‘상고머리 중학생’이었던 백건우 소년은 이미 고희를 넘겨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나 역시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다. 피아노 기증은 이미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그야말로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피아노가 과연 내 선친께서 희망했던 대로 백건우 소년의 성장에 유익했었는지, 그리고 어찌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혹시나 비록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집에서 쓰던 피아노를 기증했다고 타박이라도 받지 않았을까 염려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물건이고, 나름 갸륵한 정성이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그 가치가 티끌처럼 가벼워지기도 하는 것이 세상의 일이니까. 언젠가 같은 자리에서 만나 그 희미한 옛 일을 놓고 정담을 나눌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 아니 흘러간 강물이니 추억 속으로 흘려보내는 게 도리인 걸까...

추억의 그림-<span style=바바라 부룩스의 설경(雪景)" style="width:208px;height:136px;" />

2018.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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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글 (1)

단국대학교 천안병원 로비에는 외국의 풍경을 그린 대형 그림이 두 점 걸려있다. 하나는 캐나다 로키산맥 관광의 중심지인 재스퍼(Jasper) 인근의 산봉우리와 설경(雪景)을 그린 그림이다. 다른 하나는 로키산맥에서 자생하는 자작나무 숲을 담고 있다. 장대하면서도 신선한 자연을 생생하게 그려낸 이 풍경화들은 캐나다의 여류화가 바바라 브룩스 (Barbara Brooks, 1941~2009)가 그린 작품이다. 두 그림 중 하나인 로키산 설경은 36년 전 내가 재스퍼 타운에 있는 화랑에서 직접 구입한 그림이고 자작나무 숲 그림은 바바라가 나를 위해서 그려 준 그림이다. 지금은 세상을 달리했지만 바바라 씨는 태평양을 건너 천안의 단국대병원에서 그림을 통해 대자연에 대한 애정을 여전히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 인연의 처음은 1983년 하계유니버시아드가 끝난 직후 시작되었다. 당시 대회는 캐나다 애드먼튼에서 열렸다. 나는 이 대회의 선수단장으로 참가해 성공적으로 대회를 끝내고 개인 시간을 가졌다. 당시 한국선수단의 통역을 현지 교포인 한영자 선생이 나를 자신이 경영하는 쇼핑 몰로 안내했다. 그동안의 수고를 위로할 겸 한 선생의 쇼핑 몰에서 물건을 팔아주려는 생각이었다. 쇼핑 몰을 둘러보던 중 우연히 로키산의 설경을 그린 그림을 마주했다. 로키산의 웅장함을 유화가 아닌 수채화로 담아낸 것이 특색이었고, 자연을 맑고 담백하게 표현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림을 사고 싶어 가격을 물으니 2천 캐나다 달러라 했다. 현금이 없었기에 포기를 해야 했지만 이상하게 시선을 거둘 수 없었고 결국 계약금을 일부 내놓고 귀국 뒤에 잔금을 보낼 테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말아 달라 부탁을 했다. 귀국 뒤에 잔금을 송금했고 한영자 씨가 모국을 방문하는 길에 이를 갖다가 본관 벽에 걸어놓고 관람을 했다. 화가가 유명하지도 않아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화풍이 좋아 게시를 하였는데 보는 이들이 모두 칭찬을 했다. 자꾸 좋은 그림이라는 칭찬을 하는데 정작 화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웠지만 바쁜 공무에 쫒기면서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10 여 년의 세월이 흐르고 비로소 수소문을 하였다. 한영자씨를 통해서 작가의 신상 소식이 전해왔다. “바바라 씨의 국적은 처음에는 미국이었다. 가족들과 캐나다에 여행을 왔다가 로키산의 아름다운 풍경에 빠져서 캐나다 이민을 요청했다. 단순히 풍경을 즐기려는 게 아니라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남편이 이를 거부하면서 결국 이혼하고 재스퍼 타운으로 두 딸을 데리고 이주해 살고 있다.”는 것이다. 관광업 밖에는 따로 마땅한 산업이 없는 산골도시 재스퍼에서 그림으로 생업을 해결하기가 쉽지 않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니 비록 소원대로 아름다운 풍경화를 그리고 사는 삶에 행복과 보람을 느끼고 살지만 경제 형편을 늘 쪼들릴 수 밖에 없다는 얘기도 들었다. 내가 산 그림도 1년 내내 화방에 걸려 있었지만 팔리지 않았던 그림이었다. 심지어 두 딸과 사는 집의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날 형편이라고 덧붙였다. 자신의 예술적 의지를 위해 용기를 냈지만 녹록지 않은 현실의 궁핍함과 생활고, 그리고 두 딸을 가진 어머니가 겪어왔을 마음 속 고통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동시에 두 딸의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시련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은 열정에 걸맞게 바바라 씨의 작품에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풍부하게 녹아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아니, 이런 예술적 역량이 좀 더 널리 알려져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바바라 씨를 한국에 초청해 우리나라의 미술 애호가에게 소개를 하면 어떨까 싶었다. 가난에 쫒기는 세 모녀에게 예술혼을 이어갈 작은 계기라도 마련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나는 그녀를 초청해 개인전을 열어주자는 결심을 했다. 1993년 들어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로 하고 나는 MBC 방송국의 간부들을 설득했다. 유럽과 미국에 치우쳐 있는 외국 화단 소개의 비중을 캐나다, 그것도 여자 화가를 초청해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는 점을 역설했다. MBC도 긍정적 자세를 보여 단국대학교와 MBC가 공동으로 수채화가 <바바라 브룩스 초청전>을 열기로 했다. 장소도 세종로의 프레스 센터 전시실을 빌려 규모를 키웠다. 언론사의 홍보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비록 캐나다에서는 제대로 평가를 못 받았지만 바바라 씨의 그림을 한국의 애호가들은 달리 평가해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바바라 씨가 김포 공항에 도착하는 날 나는 그를 영접하러 공항에 나가서 처음 만났다. 많은 사진 기자들이 나와서 그녀를 카메라에 담느라 번잡하였다. 공항에서 그를 처음 만났는데 나는 깜짝 놀랐다. 나도 키가 작은 편이 아니었는데 나보다 크고 건장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로키산맥의 호연지기를 온 몸으로 담아낸 풍모였다. 또한 여성임에도 그분이 입고 온 옷이 너무 허름해서 또 한 번 놀랐다. 혹시라도 한국 사회가 가진 부정적 관행(사람을 외형으로 평가하는)에 불이익을 입을까 염려되어 지인을 통해 특별히 부탁해서 하루 밤 사이에 여성 정장을 만들어 선물하였다. 옷차림이 달라지니 비록 체격은 커보였지만 서양 미녀의 자태가 살아나 초대전 개막식에서 많은 팬의 시선을 끌었다. 언론도 한국에서 처음 보는 캐나다 화가의 작품이라는 점에 적극적으로 보도를 해 전시회 첫날에는 전시장에는 발을 드려놓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람객이 참석하였다. 전시회가 열리는 첫날 주한 캐나다 대사 내외를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외교 사절들이 참석했고 우리나라 정부 요인과 외무부, 문화관광부의 고위 인사를 비롯하여 문화 예술계 인사들, 특히 유명 화가들과 그의 문하생들도 많이 자리를 함께 해 성황을 이루었다. 바바라 여사가 캐나다에서 가지고 온 그림은 15일의 전시 기간에 전부 매진되었다. 주한 캐나다 대사는 “한국과 외교관계가 수립된 이후 캐나다 예술가로서는 한국에서 처음 갖는 초청전임에도 그 어떤 이벤트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문화행사”라며 “바바라 씨가 캐나다의 명예를 빛낸 분”이라고 개막연설을 통해 극찬을 했다. 지금 정확한 기억은 아닐 수 있지만 당시 전시회가 매진되면서 얻은 수입금은 세금을 제외하고 미화 10만 달러가 넘었다. 물론 나는 그림 판매 수입 전액을 그녀에게 증여하였다. 전시회가 끝난 뒤 캐나다 대사관 측은 바바라 씨에게 감사장을 수여하고 캐나다 정부에 한국-캐나다 문화교류에 기여했다는 공적을 보고했다. 캐 나다 정부는 이를 받아들여 바바라 씨의 거주지인 재스퍼 타운이 속한 알버타 주의 대표 화가로 지명했다. 이를 뉴스로 접한 강원도가 같은 산악중심 관광 산업을 진흥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알버타주와 공식적인 자매결연까지 맺었다. 그리고 다음해 강원도가 정식으로 바바라 씨를 초청하여 전시회를 열기로 공표하였다. 가난한 화가의 창작열을 돕겠다고 나선 나의 선의가 당사자에게는 물론이고 한국-캐나다의 우의를 키우는 계기가 되었으니 내게도 큰 기쁨을 준 셈이다. 인연은 태평양을 건너 캐나다로 확대되었다. 미담을 들은 알버타 주 출신의 국회의원이 나를 초청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월터 트윈(Walter P. Twinn)으로 캐나다 원주민의 혈통을 갖고 있었다. 원주민을 대표해, 그리고 알버타 주의 대표로 상원의원이 된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러 캐나다를 간다는 사실을 안 바바라 씨는 기꺼이 나를 환영해주러 캐나다 뱅쿠버 공항까지 달려왔다. 재스퍼에서 밴쿠버 공항까지 차로 10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인 데 바바라 씨는 자신이 직접 차를 몰고 달려왔다. 바바라 화가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환영인사를 위해 10시간을 차를 몰고 달려온 것도 그렇지만 나를 위해 아예 새 차를 샀다고 말하는 바바라 씨의 얼굴은 행복한 웃음이 가득해 나를 감동케 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빚에 몰려 셋방에서 쫓겨날 불행한 처지에서 10만 달러가 넘는 수입에 알바타 주의 대표 화가이자 그림도 잘 팔리는 유명화가가 되어 자신만의 화실까지 마련했다는 근황에 나는 더 큰 자부심과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재스퍼 타운에 도착한 뒤 바바라 화백은 각종 자리에서 나를 자신의 은인, 운명을 바꿔놓은 멘토로 소개했다. 월터 트윈 상원의원도 바바라 씨의 설명을 들은 터라 더욱 더 나에게 우호적이었고 한국과 단국대학에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나는 그런 월터 트윈 의원에게 명예박사학위 수여를 제안했다. 실제로 1995년 4월 10일 나는 그를 초청해 명예경제학 박사학위를 수여하기도 했다. 방문 기간 동안 바바라 여사는 새로 마련한 화실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햇볕이 잘드는 아담한 화실은 화가의 창작열을 북돋기에 충분했다. 그 자리에서 바바라 씨는 우리 대학 개교 50주년을 기념해 50장의 그림을 기부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실제로 내가 한국에 돌아온 뒤 그 후 8장의 그림이 우송되어 왔다. 바바라 씨의 건강이 지속되었다면 이 약속은 실현되었으리라 믿는다. 한편 나를 초청한 월터 트윈 의원은 알버타 주에서 나오는 생수를 제조, 판매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다. 생수는 캐나다 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에 수출이 되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 착안해 바바라 씨의 그림을 월터 트윈 의원이 제조하는 생수병의 바탕 그림으로 사용하도록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도 현실화되어 바바라 씨의 작품은 급기야 생수병에 부착이 되어 미국, 유럽까지 선보였고, 약 100만 여 병이 넘게 팔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확한 계약 조건은 몰랐지만 큰 수입이 바바라 화백에게 돌아갔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활발한 우정을 나눴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명성과 경제적 여유가 시작된 1995년을 넘으면서 바바라 여사는 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그의 장기인 수채화를 일본 등 해외에서 가르치는 등 많은 사업을 시작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건강을 지키지 못해서인지 그는 병석에 눕고 말았다. 나 역시 서울캠퍼스 이전, 신캠퍼스 건설 사업으로 많은 일을 겪으면서 바바라 씨를 따로 챙기지 못하고 후일을 기약할 뿐이었다. 2009년의 일이었다. 재스퍼에 거주하는 지인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바바라 여사가 중병에 시달려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바라 여사가 죽기 전에 꼭 한번 장충식 박사님을 보고 싶다며 소원이라 합니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바바라 화백을 자주 만난 적도 없었다. 그리고 그 분과 단둘이 식사를 한 적도 없었다. 나는 그를 위해서 봉사를 했는데 그 일이 바바라 화백을 국제적인 유명 화가로서의 명예를 얻게 한 것이다. 나는 한번도 이 일의 대가나 급부를 기대하지 않았다. 이후 들리는 말로는 바바라 씨가 한국 교민을 만나거나 현지 언론과 접하는 자리에서 “장충식 총장님이 자기 운명을 바꾸어 놓은 커다란 은인”이라고 입버릇처럼 강조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내가 은인인들 죽기 전에 만나기를 소원한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죽어가는 예술가의 마지막을 위로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위독하다 하니 지인을 동행시켜 캐나다로 서둘러 갔다. 바바라 씨는 재스퍼의 시립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있는 그의 안색이 위중한 상황을 암시해주었다. 재스퍼가 산악지대의 작은 도시라 그의 병을 치료할만한 의사가 없어서 에드먼튼에 있는 전문의를 특별히 초청하여 연명 치료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병실에 들어서자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내 손을 꼭 잡았다. 오래 동안 보고 싶었고 다시 한국을 방문해 단국대에 좋은 일을 하고 싶었는데 이리 되었다며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였다. 그리고는 기력이 다한 듯 곧 조용히 눈을 감았다. 옆에 있던 주치의와 간호사가 바바라 화백의 운명을 알려주었다. 2009년 8월의 일이었다. 바바라 화백의 작품을 처음 만난 때로부터 30년이 훨씬 넘은 일이다. 비록 그는 세상을 달리했지만 그의 그림은 우리 대학 병원 로비에 걸려 있다. 방문객들도, 교직원들도 그림을 보더라도 평범한 시선을 보낸 뒤 그대로 지나친다. 어느 누구도 바바라 화백의 사연을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로키산의 풍광을 사랑하고 태평양을 건너와 화가로서 새로운 힘을 얻어 가서 죽을 때 까지 그림에 몰두하고, 단국대와 맺은 인연, 내가 보낸 응원을 기억했던 화가의 삶을 누가 기억하겠는가. 나밖에는... 그래서 추억을 더듬어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