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전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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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력과의 불화 속에서 만난 봉사하는 지성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9.05.13 (최종수정 : 2019.05.22)
조회수 3,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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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년 시절에 사업가로 큰 돈을 벌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 꿈을 접고 단국대학에 투신하게 된 배경에는 정치권력의 거대한 힘과 그 힘에 좌초할 수도 있는 사학의 숙명이 있다. 특히 1961년 5‧16군사정변이 발생하고 우리 대학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위기에 직면했다. 갓 출범한 군사정부는 몇몇 모리배의 모략을 믿고 선친이자 설립자인 장형 당시 이사장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고 체포령을 내렸다. 다행히 감옥을 가지는 않았지만 뒤이어 ‘주간부 폐쇄’라는 보복성 행정조치를 당해야 했다.

주간부 폐쇄의 이유가 ‘교수 1명 부족’으로 인한 기준미달이었다. 경고를 하거나 충원 지시를 내려 이행 조치를 하면 될 수준이었음에도 주간부 전체 학생들의 모집을 중지시켰으니 결국 대학 문을 닫으라는 암묵적 강요였다. 이 조치로 단국대학은 야간부 학생만으로 명맥을 유지해야 했다. 학생들은 대학을 등졌고 강의실은 텅 비었다. 대학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같은 신세와 다름없었다. 이승만 정권 때는 상해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을 도와 독립운동을 한 전력 때문에 ‘백범계열 대학’으로 찍혀 탄압을 받았다. 우리 대학 입장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살 길이 열릴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유당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민주당과 가까울 것이고, 장도영 장군(군사정변 당시 육군참모총장, 군사정부 출범 뒤 반혁명운동의 지도자로 숙청당함)의 친척이라는 혐의로 이같은 시련을 겪어야 했으니 힘없는 사학의 설움 치고는 정도가 심하다 할 것이다.

이 난국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박정숙 당시 이사장님의 간곡한 설득을 받아들여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단국대학에 되돌아왔고 평생을 대학과 함께 하고 있다. 대학에 내 운명을 바치기로 하고 대학 경영의 일선에 서면서 나는 한 가지 철칙을 세웠다. “정치권력에 날선 대립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치권력에 영합해 권력을 갖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정치권력을 대하는 자세였고 실천적 철학이었다.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주간부 폐쇄로 단국대학이 겪은 어려움을 설명하고, 종합대학 승격을 직접 호소하여 뜻을 이뤘을 때가 내 나이 37세였다. 당시 나의 패기를 눈여겨 본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 단국대학의 성장과 이를 위해 기울이는 나의 열정을 긍정적으로 살펴보았다. 국회의원 출마 권유나 문교부(교육부의 전신) 장관 입각과 같은 제안이나 권유가 왜 없었겠는가.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말기에 도입한 10월 유신이라는 막강한 권력독점체제에서 설치된 유정회 의원으로 국회에서 활동하라는 제안은 제안이라기 보다 지시에 가까웠다. 

서슬퍼런 대통령의 강권을 정면으로 거부하기가 어려웠지만 내 철칙을 허물어뜨릴 수도 없었다. 대학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의 결과로 ‘친정부 총장’이라는 학생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는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장 팔아 권력을 얻은 교육자’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당시 수많은 교육자들이 대학을 떠나 관계로, 국회로 변신을 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지던 시대였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선친의 꿈, 박정숙 이사장님의 희망이었던 단국대 발전의 목표를 꼭 이루고 싶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완곡하게 공직 진출이 어렵다는 설명을 해 내 철칙을 지킬 수 있었다. 

이같은 나의 자세는 정치적 격변기에서 나와 우리 대학에 불어 닥칠지도 모를 태풍이나 해일을 지키는 보이지않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정치 권력에 아부를 하여 당시 최고권력자로부터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특혜를 받아낼 수 있지만 언젠가 격변기가 되면 그 특혜는 음해와 험담의 소재가 되어 우리 대학을 해치는 독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의 이같은 철학도 받아들이는 상대방에 따라 다시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1993년에 온몸으로 체험케 된다.


1993년 2월에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다. 김영상 대통령은 새로운 정부를 ‘문민정부’라 불러 달라했다. 전두환, 노태우 전임 대통령이 서울의 봄 이후 탄생한 군사정권으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의 정권이 5‧16군사정변 이후 탄생한 최초의 민주정부라 차별화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에 앞서 1992년 김영삼 씨가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고 조금 지난 가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김 후보의 인척이라는 분이 내 조카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왔다. “김영삼 후보가 만나고 싶어 하는 데 서울 롯데호텔 ****호실로 오세요.”라는 전갈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대통령 선거에 도움을 달라는 뜻이라고 했다. 나는 평소 내 방침대로 면담을 사양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국가적 전환기에 대학 총장이 대통령 후보를 만나 선거 지원을 약속하고, 이를 실행하는 일이 좋지 않은 일이고,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로부터 1주일쯤이 지나서였다. 비슷한 얘기가, 이번에는 다른 경로를 통해 전달되었다. 우리 대학 부총장 중 한 사람, 재단 이사 그리고 원로 동창회장 등이 나를 찾아 와서 김영삼 대통령 후보를 만나줄 것을 강력하게 강조하였다. 여당 후보가 당선되도록 적극 돕고 재정 지원도하는 것이 학교 발전에 유익한 일이라고 역설했다. 나는 여야를 막론하고 대학 총장이 선거에 개입하는 일이 부당하고, 중립을 지키는 것이 옳은 길이라 고집했다. 결국 김영삼 후보와의 면담을 끝내 사양한 셈이었다.


그러던 중, 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님이 나를 만나자 했다. 민 장관은 대한체육회장도 지낸 교육계와 체육계의 원로로서 나를 매우 아껴주는 각별한 사이였다. 민 장관은 당시 김영삼 캠프를 돕고 있었다.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나를 걱정해주는 내용이었다. “내가 얼마 전 김 후보를 만났는데 자기가 당선이 되면 다른 대학은 몰라도 장충식 총장은 가만두지 않겠다하던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걱정을 했다. 나는 사정을 설명했다. 얘기를 들은 민 장관님은 “거산(김영삼 대통령의 아호)은 대통령이 되려고 정치에 입문했다고 밝힐 만큼 권력에 대한 집착이 심한 사람이고, ‘내 편’이 안 되면 반드시 대가를 치루게 하는 사람이니 오해를 풀어야 해.”라고 충고를 했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 원로의 말을 듣고 보니 걱정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왜 이런 식의 철학을 갖게 되었는지, 이런 자세를 지키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중언부언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될 사람이 설마 중립을 지키고 싶다는 대학의 총장에게 깊은 원망을 갖기야 하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 기대 섞인 생각은 어긋났다. 우려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김영삼 정부가 문민정부의 닻을 올린 1993년부터 우리 대학의 중요 현안들은 제대로 진행되는 일이 없었다. 당시 대학종합병원 신축공사가 진행되는 시기였다. 재정이 부족해 대출을 하려 해도 승인이 안 되었다. 부채가 많다는 지적에 부동산을 팔아 빚을 갚겠다 하면 이번에는 부동산 매각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부속병원 공사가 지연되면서 부채가 늘고, 이자도 급증하였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만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주무 관청의 인가 거부로 진척이 없었다. 결국 병원 신축공사를 맡은 극동건설이 아예 공사대금을 외상으로 떠맡겠다는 문서를 작성하고서야 개원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난국 속에서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느닷없이 교육부에서 단국대학에 대한 종합감사를 착수했다. 우리 대학이 입학 관련 서류를 폐기한 혐의가 있다고 시작된 감사는 대학과 재단의 재정 문제도 들추려는 종합감사로 확대되었다. 결국 대학 병원 건설을 위한 재정운용의 하자를 들어 당시 이용우 이사장과 총장이었던 나를 해임하고, 장병규 전 문교부 차관을 이사장으로 파견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장병규 관선 이사장은 취임 일성으로 자신이 교육부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파견된 문자 그대로 ‘관선 이사장’임을 명백히 하면서 우리 대학 부채를 청산할 유일한 방법이 ‘서울캠퍼스 매각’임을 밝혔다. 동시에 서울캠퍼스는 천안캠퍼스로 통합하는 것이 관선 이사장과 관선 이사들의 복안이었다. ‘빚진 죄인’이라고 나를 대학 총장에서 물러나게 한 정부 방침은 수용을 하겠지만 서울캠퍼스를 천안으로 통합하는 것은 방관할 수 없었다. 


우선 나는 장병규 관선 이사장을 퇴진시키는데 팔을 걷어붙였다. 장병규 당시 이사장은 우리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이 때 공직자로서 받은 편의가 정도를 넘어섰음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이사장은 상근을 해야 하고, 겸직이 안 되는데도 버젓이 이를 무시하고 다른 교육기관과 우리 대학에서 이중으로 겸직을 하며 급여도 각각 수령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단국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관선 이사들의 임무인데 이를 위해 헌신하기는커녕 대책이라고는 서울캠퍼스 매각뿐이라 주장했다. 나는 장병규 이사장을 만나 단국인들은 이런 사실(서울캡퍼스 매각-천안캠퍼스로의 통합)을 알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단국대의 역사를 망치는 일이라 반박했다. 

이 문제로 당시 교육부 장관을 만나 거칠게 항의를 했다. 그리고 한걸음 더나가 청와대의 김정남 교문 수석을 만나기도 했다. 나는 정부 책임자들을 만나 내 온 힘을 기울여 내 생각을 설득했다. 심지어 이런 무책임한 정책을 대학개혁이랍시고 펼치는 실체를 내가 스스로 언론에 기자회견이라도 열어 공개하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결국 장병규 이사장은 사직을 했다. 장병규 이사장의 파행은 막았지만 이제 진정으로 단국대의 진로를 타개할 역량있는 인물을 찾는 일이 시급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떠오른 분이 김학준 박사였다. 김정남 수석을 만나 관선이사장의 퇴진을 강력히 주장한 얼마 뒤 우리 대학의 임영재 교수를 통해 전갈이 왔다. 김학준 박사와 의논을 해보자는 내용이었다. 당시 임영재 교수는 현승일 박사와 오래된 교분을 갖고 있었다. 대학에 오기 전 언론사에서 같이 기자 생활을 했던 인연이 있었다. 현승일 박사는 또한 당시 청와대에서 문민정부의 패러다임을 짜고, 실행계획을 주도하던 ‘6‧3세대’의 핵심들과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김학준 박사 역시 이들 6‧3세대 학자, 정치인들과 동문으로서, 개혁적 학자로서 공감을 나누고 있었다. 나와도 김학준 박사는 개인적으로 인연이 많았다. 김학준 박사는 노태우 정부에서 공보 수석 겸 청와대 비서관을 지내고 있었다. 당시 나는 노태우 대통령을 자주 만나고 있었다. 나는 남북체육협상의 수석대표로 알하기도 했고, 대학 총장으로서는 헝가리나 몽골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대학들과 한국 최초로 교류의 문을 열었는데 이것이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과 상통해 대통령의 관심을 받고 있기도 했다. 이 때 업무 때문이라도 직간접적으로 김학준 수석과 논의하고, 공적인 관계를 맺어야 했었다. 

공직 생활을 할 때도 김학준 박사는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으로서 책임감, 활동력이 대단했다. 우리나라의 정치학계를 이끄는 석학이면서도 국회의원을 지낼 정도로 정무감각도 뛰어난 분이었다. 정치적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합리적이고 온화한 성품으로 인적 관계도 넓은 현실론자이기도 했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을 한 끝에 김학준 박사를 만났다. 최근의 단국대가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김 박사는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25년을 교수로 생활한 교육자였다. 대학의 어려움이나 이사장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김학준 박사에게 우리 대학 이사장으로 일하시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다만 한가지 조건을 걸었다.

“아시다시피 단국대는 설립자께서 내건 건학이념과 이상이 있습니다. 저는 이를 실천하는데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김 박사님이 이사장이 된다면 이를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십시오. 현재의 관선이사 체제처럼 교육부 방침대로 이사장 업무를 수행할 뜻이라면 우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김 박사는 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김 박사의 온화하지만 진지한 말 속에 “단국대를 돕고싶다”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김 박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김정남 수석 등과 사적으로는 대학 친구이지만 공적으로 걸어온 길은 전혀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김영삼 정부 사람이 아닙니다. 정부에서 저를 관선 이사장으로 선임하지도 않겠지만 저 또한 정부의 심부름을 하는 형식은 싫습니다. 하지만 장 총장님이 저를 이사장으로 요청하고, 제가 응한다면 이 정부에서 최소한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단국대 문제 해결을 위해 제 등을 떠밀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총장님과 단국대를 돕고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나는 김 박사의 말에 공감했다. 자리가 아니라 대학인으로서 대학의 진로를 함께 고민하고 열어가려는 의지가 있었다. 1994년 5월, 김학준 박사는 우리 대학의 이사장으로 부임했다. 김 이사장은 참으로 진지하고 열정적인 분이었다. 천안으로 서울캠퍼스를 흡수 이전하는 대신에 새로운 부지를 매입하고 신축해 이전하는 대안, 즉 신캠퍼스 건설을 정부가 수용케 했다. 말이 그렇지 이를 실행하는데 얼마나 많은 인허가 절차와 관계 부서들의 협조가 수반되어야 했겠는가. 그 모든 과정에서 김학준 이사장은 기꺼이 자신이 가진 인적 자산을 공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활용을 했다. 

지금의 죽전캠퍼스 부지를 매입할 때도 김 이사장은 나를 믿어주었다. 당시 현 죽전캠퍼스 부지 소유자는 대지를 매각하는 조건으로 대금을 일시불로 달라고 전제했다. 500억 원 정도인 그 막대한 거금을 마련하는 문제는 정말 해결이 어려웠다. 급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고민 끝에 내가 현 죽전캠퍼스 부지를 매입키로 결심했을 때 이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이때 한남동 교지를 담보로 제공하고 대금을 차입하는 일도 김학준 이사장이 풀어나갔다. 무엇보다 “안 돼, 안 돼” 일색이던 정부 관청의 고압적 자세를 바꾸고 하나씩 인허가를 받는 일도 정말 어려운 일었다. 김학준 이사장의 역량이 없었다면 죽전캠퍼스 이전사업은 참으로 더 큰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이전사업의 기초를 닦고 김 이사장은 인천대학 총장으로 부임해갔다. 그 뒤로도 대학과 언론기관에서 그의 부드럽지만 과감한 리더십을 필요로 했고 김 박사는 동분서주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지금 김 박사는 우리 대학의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평일도, 휴일도, 낮과 밤도 가리지 않고 문헌을 파헤치며 공부를 하더니 마지막 역작이라며 <남북한문전>을 간행하고 있다. 상고시대부터 현대까지 우리나라에 관한 문헌, 저서들을 하나씩 짚어보고, 이를 주제어 별로 분류한 문헌사전이라고 한다. 권당 800페이지 씩 1만 페이지가 넘는 대작을 준비하는 김학준 박사의 열정이 한국학의 큰 봉우리로 남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