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전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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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래, 김병량, 김경현 : 특별장학금으로 길러낸 동문 인재의 세가지 유형

201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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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까지만 해도 전국의 지방도시에는 각 지역의 내로라하는 명문고등학교가 산재해 있었다.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도입되기 전이라 지방의 수재들이 몰리는 고등학교가 따로 있었다. 나는 당시 총장으로 학생선발을 책임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우수한 인재를 우리 대학에 끌어올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아무래도 세칭 명문대라 인정받는 대학에 입학을 하고 싶어 했다. 이 현실의 벽을 뚫고 인재를 단국대에 입학시키는 방법은 결국 총장이 직접 나서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전국의 지방 명문 고등학교를 골라 학업에 열의가 있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추천받았다. 그들을 직접 만나거나 해당 지방 출신의 교수들을 보내 모교를 방문하도록 지원했다. 나는 당시 다른 대학들이 하지 못하던 과감하고 획기적인 장학지원책을 마련했다. 지방의 우수 학생들에게는 4년간 숙소와 장학금을 수여할 뿐 아니라 교재와 참고서적까지 공급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당시만 해도 나라의 경제형편이 어려워 대학 등록금은 온 집안이 힘을 모아야만 해결되는 난제였다. 그 고민을 덜어줄 테니 단국대에서 마음껏 공부를 해서 나라와 모교를 빛내는 인재가 되라는 것이 내 진심이었다. 뜻이야 컸지만 대학의 힘은 그렇지 못했다. 1970년대만 해도 우리 대학은 입학정원이래야 2천명도 넘지 않았고, 재정규모나 여력이 다른 대학보다 많이 취약했다. 기숙사가 필수적인데 지을 힘이 없었다. 내가 하자고 해서 마련된 사업이니 내가 나서기로 결심했다. 우선 내가 살고 있던 집을 내놓았다. 학교 근처에 있던 한남동 소재의 내 집은 70 여 평 정도였다. 이 집을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활용토록 대학에 기부하였다. 바로 이 집이 수많은 판검사를 배출한 ‘법선재’였다. 내가 살 집이 없어서 나는 지금의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160평의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지금이야 강서구가 화려하게 변모했지만 당시 화곡동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먼 변두리였다. 나는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하니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경기중학교와 이화여중에 다니는 내 아들과 딸들은 등하교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한남동에서 살 때는 학교가 있는 광화문 지역까지 길어야 40분 걸리는 등교시간이 화곡동으로 이사한 뒤로는 빨라야 90분이 걸렸다. 하루에 3시간을 버스에 시달려야 했다. 한창 민감한 사춘기를 겪던 아이들이기에 애비 된 마음으로 왜 미안한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래도 인재를 키우는 것이 나의 숙명이니 가족들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아이들도 내 결정과 이후 겪어야 했던 불편을 비록 몸이 고단하고 마음이 힘들었겠지만 아빠인 나에게 일체 불평하거나 반발하지 않았다. 기특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훗날 한남동 집에서 숙식을 하던 고시반 학생들 가운데 부장검사, 차장 검사 그리고 부장판사 등 기라성 같은 인재가 속속 배출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서울대, 고대, 연대 다음으로 사법시험 합격자를 많이 배출하는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우리 대학이 한때 ‘사시단대(司試檀大)’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사법시험에서 강세를 보인 것도 이렇게 입학한 장학생들이 낳은 결과였다. 고시생 만이 아니라 많을 때는 100 여 명씩 특별 장학생으로 입학을 시켰다. 나의 의도는 꽤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 대학에 의과대나 치과대가 설치되기 전이어서 장학생들 가운데 과반수 이상은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다음은 관계로 진출했고 경제나 경영학을 공부한 학생들은 공인회계사나 은행으로 진로를 잡았다. 일일이 이름을 들추기는 뭐하지만 50대 이상의 동문들 가운데 국장, 차관급의 고위 관료나 은행장들을 종종 만나는데 이들은 대부분 이같은 특별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이들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장학생 중 정치인이 된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장학제도를 통해 단국대를 입학한 인재들이 많지만 나는 3명의 장학생이 살아온 내력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다. 첫 번째는 경상북도 안동고등학교 출신 조명래 군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조명래 군은 지금 환경부장관이 되었다. 조명래 장관은 지역개발학과(현재 도시계획 부동산학부의 전신)를 신설하면서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우수학생으로 입학했다. 학부 재학 4년간 전액 장학금을 후원했는데 조명래 군 본인이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보다 학문에 뜻을 두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고 나는 대학원 과정의 전장학금을 후원했다. 조명래 군은 주위의 평을 들어보면 성격이 조용하고 차분해 공부를 즐기는 편이어서 학자로 성장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었다. 좀 더 지원을 하면 모교를 빛낼 좋은 학자가 되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만났다. 나는 유학을 가는 것이 어떻냐고 물었더니 본인도 영국에서 박사 과정을 하고 싶다 포부를 밝혔다. 문제는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보내고 나서 학교 당국에 예비 전임강사로 발령하는 문제를 검토토록 했다. 다행히 교수들이 뜻을 모아 결국 좋은 결과를 얻었다. 영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조명래 교수는 급여와 내 개인적 후원을 받으며 등록금과 가족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귀국한 뒤 조명래 박사는 모교의 조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에게 대학발전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도움 받을까 하는 마음으로 보직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그는 학생지도와 연구에 전념하기를 원했다. 만약 그에게 나의 의욕을 앞세워 ‘유학에서 배운 지식을 대학행정에 연결시켜 나를 도와 달라’ 강력하게 인도했다면 그는 보직을 받아 모교에 봉사하는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아마도 학자로서의 성장을 못했을 것이다. 그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내가 직접 그를 만난 것은 아주 드물다. 서울대 대학원으로 보낼 때 그리고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인사 왔을 때 그리고 이번 장관에 취임하여 전화로 인사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의 장인되는 분이 우리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어서 그의 정황은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에 아쉬운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이런저런 사는 얘기나 자녀들 성장 등을 듣는 것은 사람을 기르고 돕는 사람에게 가장 큰 선물인데... 하지만 그 이쉬움은 나의 아쉬움이고 나라에 봉사하는 인재로 잘 성장한 것은 그의 노력이고 운명이다. 자기가 후원한 사람이 성공하면 그를 자기 기억에서 잊어야 하는 것이 인재를 키우는 사람의 본분이다. 영남 출신의 장학생으로 조명래 군을 선발했다면 호남 지역 출신 장학생으로 기억나는 인물이 김병량 교수이다. 김병량 군은 호남을 대표하는 명문 전주고등학교를 다닐 때 우수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나와 인연을 맺었다. 나중에 모교 교수로 봉직하여 부총장을 지냈지만 김병량 군 역시 조명래 군 못지않은 수재였다. 공부 잘하는 수재형 인물로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으나 크게 다른 점은 조명래 장관은 조용히 숨어서 일하고 연구하기를 좋아하는 편이나 김병량 부총장은 예능에도 소질 있고, 사교적이며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유형이다. 돌아보면 내가 학교 일로 어려움에 빠진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럴 때 학교를 위해서 행정적 방면에서 앞장서서 나를 도와준 졸업생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병량 교수이다. 김병량 군은 우리 대학에서 4년간 장학금으로 공부하고 내 권유로 일본 츠쿠바 대학(筑波大学)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일본 츠쿠바 대학은 일제시대 동경대학과 경쟁관계였던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모태로 하는 대학이다. 이후 1970년대에 종합대학으로 전환하면서 전후 유럽과 미국식 제도를 다양하게 받아들인 신흥 명문대학이다. 그는 일본에서 도시계획 및 지역개발을 연구하면서 특히 지역의 병원을 비롯한 공공시설계획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김병량 교수 유학 초기에는 일본의 도큐장학재단의 장학금으로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지원이 여의치 않아 금전적 고생이 많았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나와 친분이 깊은 일본의 유명한 저술가인 호소키 카즈코(細木水子)여사를 소개시켜 줘서 그의 장학금으로 박사학위를 받게 해주었다. 학위를 마친 김 박사는 1991년도에 천안캠퍼스 도시행정학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이에 앞서 김병량 군이 나를 돕게 된 계기는 천안캠퍼스에 의과대 부속병원을 신축할 때였다. 1988년에 의과대학을 설립하고, 이듬해 의과대 교사동과 부속병원을 신축 공사에 착수했는데 여러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처음 천안캠퍼스를 세울 때 가졌던 비전대로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종합병원을 짓고 싶었다. 800병상 규모의 대형 병원, 서울을 능가하는 최신식 의료시설을 갖춘 첨단 병원, 환자중심의 병원을 짓자는 것이 내 목표였다. 대학 내부에서는 재정적 어려움이 크다며 반대가 심했다. 실제 공사비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에 돈이 있어도 종합병원을 지으려면 설계나 공간배치 등에서 고도의 전문지식이 뒷받침해줘야 하는데 국내 대학들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때 김병량 군이 일본에서 병원 건축, 의료자원 공간배분 계획을 전공하고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박사 학위 지도 교수인 타니무라 히데히코(谷村秀彦)교수는 일본의 유명한 병원건축 설계 전문가였다. 또한 타니무라 교수의 장인되는 요시타케 야스미(吉武泰水)교수도 일본병원 건축 분야의 태두로서 당시 고오베 예술대학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김병량 군의 소개로 나는 이 두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김병량 군을 통해 내가 가진 인재양성에 대한 진심을 이해했고, 선뜻 도움을 주기로 결심했다. 이어서 장인과 사위를 필두로 자신들이 길러낸 제자들, 달리 보면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최고의 전문가들을 동원해 우리 종합병원 설계를 도와주었다. 이 모든 과정은 전적으로 한 푼의 금전적 대가없는 순전한 봉사로 이뤄졌다. 이후 많은 공사를 진행하면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그 결과 의과대학과 800 병상의 부속 병원을 완성할 수 있었고 거기에 최첨단 시설을 갖추어 전국의 많은 의료인들이 견학을 할 만큼 우수한 병원으로 우뚝설 수 있었다. 김병량 교수는 이 과정에서 병원 설계를 무상으로 마치도록 한 일도 공이 컸지만 내가 천안캠퍼스를 천안의 대표적 고등교육기관으로 성장시키는데 필요한 일들을 펼칠 때마다 내 옆에서 충직스럽게 내조를 해주었다. 좋은 일은 함께 하려하지만 어렵고 힘든 일, 자칫 욕먹을 일은 슬슬 피하려는게 사람의 속성이다. 천안캠퍼스에 대형 종합병원을 짓겠다며 설계하고 공사를 진행해갈 당시 나는 김영삼 정부에 미운 털이 박혀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난국이었다. 여러 행정 수단을 통해 신축사업을 방해했고 이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나를 돕다가 함께 망할까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병량 군은 아직 박사과정 재학 중인 수련생의 입장에서 자기 은사와 자기 은사의 제자들을 설득해 우리 병원이 완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온 힘을 쏟아 부었다. 비단 병원 신축사업만이 아니었다. 특히 죽전캠퍼스 신축 사업에서는 힘든 일을 넘어 욕 먹을 일인데도 이를 마다않고 감내하였다. 죽전 캠퍼스 신축 사업은 그 규모가 컸고 한남동 부지 개발에서 발생할 막대한 이권 때문에 정권의 실세들을 등에 업은 업자들이 사업권 쟁탈을 둘러싼 이전투구에 나서기도 했다. 때론 드러나는 행정 조치로, 때론 주무 관청을 통해, 때론 그늘에서 여러 압박과 압력이 전해졌다. 누구 하나 나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 험악하고 냉냉한 분위기 속에서 김병량 교수는 자칫 욕먹고 자신을 망칠 수도 있는 일에 자신을 내놓았다. 설계부터 시공에 이르는 과정에서 공개적으로 모든 구성원들이 알 수 있도록 일을 성사시켰다. 공개 입찰을 통해 설계안을 받고 한국건축가협회와 일본건축가협회가 공동으로 심사하도록 진행하여 추호의 부정이 개입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의 개입을 막아낸 길이기도 했다. 나중에 외환위기로 중단된 신축 공사를 재개할 때 실타래처럼 얽힌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의 이해관계를 풀어내는데도 김 교수의 인내와 분투가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장학금을 주어서 공부시킨 졸업생 가운데 대부분은 입신양명 형의 인물이 많았다. 공부 잘하고 출세하면 그것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사고방식이다. 모교에서 장학 혜택을 받았으나 모교를 위해서 헌신한다는 정신을 실천한 사례를 만나기 힘들다. 아니 나는 그동안 숱한 인재들에게 장학금을 주었지만 한번도 드러내놓고 모교에 그 은혜의 결실을 돌려주길 바란 적이 없다. 사회에 나가서 좋은 일꾼이 되어주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였다. 그러나 김병량교수는 자신을 위해서 연구만 하고 자기 이속을 차리는 형이 아니라 전적으로 봉사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게 여기는 삶의 철학을 가졌다. 20여 년 전에 NGO단체를 창설해서 이사장 등을 거치면서 봉사한 공로로 몇 년 전에 홍조근정훈장을 받은 일이나 전셋집에 살면서도 70주년 기념관 건립에 1억원을 약정하여 완납한 일에서 김교수의 철학의 일면이 읽혀진다. 이제 그는 학사 부총장의 자리에서 떠나서 조용히 자신의 학문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나는 그가 있었기에 천안 단국대병원의 성공이 있었고, 방대한 죽전캠퍼스 신축사업을 둘러싼 권력 실세들의 개입을 다 물리치고 이전을 마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경상도 안동 출신의 조명래 군, 전라도 전주 출신의 김병량 군이 자랑스러운 인재라면 서울 출신으로 김경현 군이 있다. 김경현 군은 서울 휘문고 출신이다. 김경현 군은 한마디로 ‘공부 벌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모교 출신 후배이기도 해서 각별한 애정을 갖고 그를 후원했다. 우리 대학 사학과에 진학한 그에게 나는 4년간 전액 장학금을 수여했다. 학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사 석사 과정을 이수한다 했을 때도 기꺼이 학비를 지원했다. 석사학위를 받은 뒤에는 내가 석사학위를 받은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밟으라 권유했고 김경현 군도 기꺼이 이를 따랐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학비를 지원했다. 나는 장학생을 고를 때 내 나름대로 하나의 기준을 우선 적용했다. 그것은 ‘학업성적과 가정형편’ 중 가정형편을 먼저 적용한다는 점이다. 전국에서 성적이 탁월한 학생을 추천받으면 나는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형편이 좋은 가정의 학생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최고의 성적은 아니더라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 거기에 학업에 성실한 학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대학을 다니지 못할 청년들이야말로 장학제도가 꿈이요 성공의 자극제가 될 것이라는 것이 내 믿음이었다. 그래야 우리나라의 인재가 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나름의 철학이기도 했다. 김경현 군도 그런 사례였다. 박사학위를 받자 나는 학과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 대학 사학과 전임강사 발령을 받도록 도왔다. 김경현 군은 우리 대학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본 동경대학과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추가로 자신의 고대 서양사 연구를 더 할 수 있었다. 마침 좋은 배필을 만났다 해서 주례를 부탁받고 기꺼이 주례를 서주었다. 사회적으로, 또한 학자로서 성장하는데 필요한 일, 그가 원하는 여러 가지 일을 나는 가능하면 다 들어주었다. 어려운 가정에서 공부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려는 그의 열정으로 좋은 학자로 자라도록 돕고 싶었다. 나의 기대에 부응하듯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학문에 열의를 바쳤다. 학생들이나 학계의 평판도 좋았다. 공부하는 교수, 연구에 몰두 하는 교수라는 좋은 평판에 좋은 논문을 많이 발표했다. 당연히 여러 대학에서 그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 무렵 고려대로 교수 자리를 옮길 기회가 생겼다. 나도 그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를 후원한 나와의 인간적 의리로는 모교에 남아 후배를 길러내야 했지만 고려대학교에서 자신을 탐내어 오라는 데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하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그의 고민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나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명예욕이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를 교수로 길러내기 까지 기울인 선배이자 스승인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면 처음부터 고민을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많은 동료, 선배 교수들이 그의 고민을 보며 ‘배신’이라는 말을 썼다. 그들이 보기에 내가 그에게 기울인 애정과 후원의 크기가 컸기에 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김경현 교수에게 고려대로 전직해도 무방하다는 말을 건넸다. 단국대 졸업생이 고려대 교수로 가는 것이 작게는 모교 사학과의 전통을 빛내주는 일이고 길게는 대학들의 학문적 성장을 촉진하는 일이라 덧붙였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내 마음은 어찌 편할 수 있었겠는가. 10 여 년 동안 장학금과 연구비 등을 후원하여 길러낸 인재가 단국대를 떠난다는데 서운하고 아픈 마음이 안 든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무엇보다 나마저 그를 비난하면 그는 모교의 배신자가 되고, 학계에서도 배은망덕한 인간이라 손가락질을 면치 못한다. 자칫 젊은 학자의 앞길을 매장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더군다나 내 마음대로 부리고,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 인재를 길러내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외국에서 길러낸 인재가 우리 대학에서 봉사를 할 수 있고, 우리 대학에서 길러낸 인재가 세계를 나가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재를 기르는 참뜻이기도 하다. 나는 아픈 마음을 뒤로 하고 그를 웃으며 보냈다. 시대가 바뀌고, 많은 대학들도 내가 시도한 방식의 장학생 유치를 시도하면서 특별 장학생 선발은 시대의 물결에 묻혀져 갔다. 그러나 우리 대학의 특별장학생 제도, 나의 후원을 거쳐간 많은 인재들이 사회의 지도자로 활약하고 자주 나에게 안부를 전하곤 한다. 그들을 찬찬히 회고하면 이렇게 언급한 세가지 부류의 인재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공직자가 된 인재, 모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봉사형 인재, 학식을 바탕으로 학문적 명예를 이루는 인재. 나는 그들을 통해 사람을 키우는 기쁨을 누렸으니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다.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들은 결국 모두 우리 단국인과 같은 길을 걸었던 소중한 인재들이다. 부디 모교의 명예를 빛내주길 바라고 응원할 뿐이다.

정치권력과의 불화 속에서 만난 봉사하는 지성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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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년 시절에 사업가로 큰 돈을 벌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 꿈을 접고 단국대학에 투신하게 된 배경에는 정치권력의 거대한 힘과 그 힘에 좌초할 수도 있는 사학의 숙명이 있다. 특히 1961년 5‧16군사정변이 발생하고 우리 대학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위기에 직면했다. 갓 출범한 군사정부는 몇몇 모리배의 모략을 믿고 선친이자 설립자인 장형 당시 이사장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고 체포령을 내렸다. 다행히 감옥을 가지는 않았지만 뒤이어 ‘주간부 폐쇄’라는 보복성 행정조치를 당해야 했다. 주간부 폐쇄의 이유가 ‘교수 1명 부족’으로 인한 기준미달이었다. 경고를 하거나 충원 지시를 내려 이행 조치를 하면 될 수준이었음에도 주간부 전체 학생들의 모집을 중지시켰으니 결국 대학 문을 닫으라는 암묵적 강요였다. 이 조치로 단국대학은 야간부 학생만으로 명맥을 유지해야 했다. 학생들은 대학을 등졌고 강의실은 텅 비었다. 대학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같은 신세와 다름없었다. 이승만 정권 때는 상해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을 도와 독립운동을 한 전력 때문에 ‘백범계열 대학’으로 찍혀 탄압을 받았다. 우리 대학 입장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살 길이 열릴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유당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민주당과 가까울 것이고, 장도영 장군(군사정변 당시 육군참모총장, 군사정부 출범 뒤 반혁명운동의 지도자로 숙청당함)의 친척이라는 혐의로 이같은 시련을 겪어야 했으니 힘없는 사학의 설움 치고는 정도가 심하다 할 것이다. 이 난국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박정숙 당시 이사장님의 간곡한 설득을 받아들여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단국대학에 되돌아왔고 평생을 대학과 함께 하고 있다. 대학에 내 운명을 바치기로 하고 대학 경영의 일선에 서면서 나는 한 가지 철칙을 세웠다. “정치권력에 날선 대립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치권력에 영합해 권력을 갖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정치권력을 대하는 자세였고 실천적 철학이었다.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주간부 폐쇄로 단국대학이 겪은 어려움을 설명하고, 종합대학 승격을 직접 호소하여 뜻을 이뤘을 때가 내 나이 37세였다. 당시 나의 패기를 눈여겨 본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 단국대학의 성장과 이를 위해 기울이는 나의 열정을 긍정적으로 살펴보았다. 국회의원 출마 권유나 문교부(교육부의 전신) 장관 입각과 같은 제안이나 권유가 왜 없었겠는가.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말기에 도입한 10월 유신이라는 막강한 권력독점체제에서 설치된 유정회 의원으로 국회에서 활동하라는 제안은 제안이라기 보다 지시에 가까웠다. 서슬퍼런 대통령의 강권을 정면으로 거부하기가 어려웠지만 내 철칙을 허물어뜨릴 수도 없었다. 대학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의 결과로 ‘친정부 총장’이라는 학생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는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장 팔아 권력을 얻은 교육자’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당시 수많은 교육자들이 대학을 떠나 관계로, 국회로 변신을 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지던 시대였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선친의 꿈, 박정숙 이사장님의 희망이었던 단국대 발전의 목표를 꼭 이루고 싶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완곡하게 공직 진출이 어렵다는 설명을 해 내 철칙을 지킬 수 있었다. 이같은 나의 자세는 정치적 격변기에서 나와 우리 대학에 불어 닥칠지도 모를 태풍이나 해일을 지키는 보이지않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정치 권력에 아부를 하여 당시 최고권력자로부터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특혜를 받아낼 수 있지만 언젠가 격변기가 되면 그 특혜는 음해와 험담의 소재가 되어 우리 대학을 해치는 독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의 이같은 철학도 받아들이는 상대방에 따라 다시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1993년에 온몸으로 체험케 된다. 1993년 2월에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다. 김영상 대통령은 새로운 정부를 ‘문민정부’라 불러 달라했다. 전두환, 노태우 전임 대통령이 서울의 봄 이후 탄생한 군사정권으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의 정권이 5‧16군사정변 이후 탄생한 최초의 민주정부라 차별화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에 앞서 1992년 김영삼 씨가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고 조금 지난 가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김 후보의 인척이라는 분이 내 조카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왔다. “김영삼 후보가 만나고 싶어 하는 데 서울 롯데호텔 ****호실로 오세요.”라는 전갈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대통령 선거에 도움을 달라는 뜻이라고 했다. 나는 평소 내 방침대로 면담을 사양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국가적 전환기에 대학 총장이 대통령 후보를 만나 선거 지원을 약속하고, 이를 실행하는 일이 좋지 않은 일이고,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로부터 1주일쯤이 지나서였다. 비슷한 얘기가, 이번에는 다른 경로를 통해 전달되었다. 우리 대학 부총장 중 한 사람, 재단 이사 그리고 원로 동창회장 등이 나를 찾아 와서 김영삼 대통령 후보를 만나줄 것을 강력하게 강조하였다. 여당 후보가 당선되도록 적극 돕고 재정 지원도하는 것이 학교 발전에 유익한 일이라고 역설했다. 나는 여야를 막론하고 대학 총장이 선거에 개입하는 일이 부당하고, 중립을 지키는 것이 옳은 길이라 고집했다. 결국 김영삼 후보와의 면담을 끝내 사양한 셈이었다. 그러던 중, 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님이 나를 만나자 했다. 민 장관은 대한체육회장도 지낸 교육계와 체육계의 원로로서 나를 매우 아껴주는 각별한 사이였다. 민 장관은 당시 김영삼 캠프를 돕고 있었다.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나를 걱정해주는 내용이었다. “내가 얼마 전 김 후보를 만났는데 자기가 당선이 되면 다른 대학은 몰라도 장충식 총장은 가만두지 않겠다하던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걱정을 했다. 나는 사정을 설명했다. 얘기를 들은 민 장관님은 “거산(김영삼 대통령의 아호)은 대통령이 되려고 정치에 입문했다고 밝힐 만큼 권력에 대한 집착이 심한 사람이고, ‘내 편’이 안 되면 반드시 대가를 치루게 하는 사람이니 오해를 풀어야 해.”라고 충고를 했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 원로의 말을 듣고 보니 걱정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왜 이런 식의 철학을 갖게 되었는지, 이런 자세를 지키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중언부언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될 사람이 설마 중립을 지키고 싶다는 대학의 총장에게 깊은 원망을 갖기야 하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 기대 섞인 생각은 어긋났다. 우려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김영삼 정부가 문민정부의 닻을 올린 1993년부터 우리 대학의 중요 현안들은 제대로 진행되는 일이 없었다. 당시 대학종합병원 신축공사가 진행되는 시기였다. 재정이 부족해 대출을 하려 해도 승인이 안 되었다. 부채가 많다는 지적에 부동산을 팔아 빚을 갚겠다 하면 이번에는 부동산 매각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부속병원 공사가 지연되면서 부채가 늘고, 이자도 급증하였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만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주무 관청의 인가 거부로 진척이 없었다. 결국 병원 신축공사를 맡은 극동건설이 아예 공사대금을 외상으로 떠맡겠다는 문서를 작성하고서야 개원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난국 속에서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느닷없이 교육부에서 단국대학에 대한 종합감사를 착수했다. 우리 대학이 입학 관련 서류를 폐기한 혐의가 있다고 시작된 감사는 대학과 재단의 재정 문제도 들추려는 종합감사로 확대되었다. 결국 대학 병원 건설을 위한 재정운용의 하자를 들어 당시 이용우 이사장과 총장이었던 나를 해임하고, 장병규 전 문교부 차관을 이사장으로 파견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장병규 관선 이사장은 취임 일성으로 자신이 교육부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파견된 문자 그대로 ‘관선 이사장’임을 명백히 하면서 우리 대학 부채를 청산할 유일한 방법이 ‘서울캠퍼스 매각’임을 밝혔다. 동시에 서울캠퍼스는 천안캠퍼스로 통합하는 것이 관선 이사장과 관선 이사들의 복안이었다. ‘빚진 죄인’이라고 나를 대학 총장에서 물러나게 한 정부 방침은 수용을 하겠지만 서울캠퍼스를 천안으로 통합하는 것은 방관할 수 없었다. 우선 나는 장병규 관선 이사장을 퇴진시키는데 팔을 걷어붙였다. 장병규 당시 이사장은 우리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이 때 공직자로서 받은 편의가 정도를 넘어섰음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이사장은 상근을 해야 하고, 겸직이 안 되는데도 버젓이 이를 무시하고 다른 교육기관과 우리 대학에서 이중으로 겸직을 하며 급여도 각각 수령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단국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관선 이사들의 임무인데 이를 위해 헌신하기는커녕 대책이라고는 서울캠퍼스 매각뿐이라 주장했다. 나는 장병규 이사장을 만나 단국인들은 이런 사실(서울캡퍼스 매각-천안캠퍼스로의 통합)을 알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단국대의 역사를 망치는 일이라 반박했다. 이 문제로 당시 교육부 장관을 만나 거칠게 항의를 했다. 그리고 한걸음 더나가 청와대의 김정남 교문 수석을 만나기도 했다. 나는 정부 책임자들을 만나 내 온 힘을 기울여 내 생각을 설득했다. 심지어 이런 무책임한 정책을 대학개혁이랍시고 펼치는 실체를 내가 스스로 언론에 기자회견이라도 열어 공개하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결국 장병규 이사장은 사직을 했다. 장병규 이사장의 파행은 막았지만 이제 진정으로 단국대의 진로를 타개할 역량있는 인물을 찾는 일이 시급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떠오른 분이 김학준 박사였다. 김정남 수석을 만나 관선이사장의 퇴진을 강력히 주장한 얼마 뒤 우리 대학의 임영재 교수를 통해 전갈이 왔다. 김학준 박사와 의논을 해보자는 내용이었다. 당시 임영재 교수는 현승일 박사와 오래된 교분을 갖고 있었다. 대학에 오기 전 언론사에서 같이 기자 생활을 했던 인연이 있었다. 현승일 박사는 또한 당시 청와대에서 문민정부의 패러다임을 짜고, 실행계획을 주도하던 ‘6‧3세대’의 핵심들과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김학준 박사 역시 이들 6‧3세대 학자, 정치인들과 동문으로서, 개혁적 학자로서 공감을 나누고 있었다. 나와도 김학준 박사는 개인적으로 인연이 많았다. 김학준 박사는 노태우 정부에서 공보 수석 겸 청와대 비서관을 지내고 있었다. 당시 나는 노태우 대통령을 자주 만나고 있었다. 나는 남북체육협상의 수석대표로 알하기도 했고, 대학 총장으로서는 헝가리나 몽골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대학들과 한국 최초로 교류의 문을 열었는데 이것이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과 상통해 대통령의 관심을 받고 있기도 했다. 이 때 업무 때문이라도 직간접적으로 김학준 수석과 논의하고, 공적인 관계를 맺어야 했었다. 공직 생활을 할 때도 김학준 박사는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으로서 책임감, 활동력이 대단했다. 우리나라의 정치학계를 이끄는 석학이면서도 국회의원을 지낼 정도로 정무감각도 뛰어난 분이었다. 정치적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합리적이고 온화한 성품으로 인적 관계도 넓은 현실론자이기도 했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을 한 끝에 김학준 박사를 만났다. 최근의 단국대가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김 박사는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25년을 교수로 생활한 교육자였다. 대학의 어려움이나 이사장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김학준 박사에게 우리 대학 이사장으로 일하시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다만 한가지 조건을 걸었다. “아시다시피 단국대는 설립자께서 내건 건학이념과 이상이 있습니다. 저는 이를 실천하는데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김 박사님이 이사장이 된다면 이를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십시오. 현재의 관선이사 체제처럼 교육부 방침대로 이사장 업무를 수행할 뜻이라면 우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김 박사는 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김 박사의 온화하지만 진지한 말 속에 “단국대를 돕고싶다”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김 박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김정남 수석 등과 사적으로는 대학 친구이지만 공적으로 걸어온 길은 전혀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김영삼 정부 사람이 아닙니다. 정부에서 저를 관선 이사장으로 선임하지도 않겠지만 저 또한 정부의 심부름을 하는 형식은 싫습니다. 하지만 장 총장님이 저를 이사장으로 요청하고, 제가 응한다면 이 정부에서 최소한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단국대 문제 해결을 위해 제 등을 떠밀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총장님과 단국대를 돕고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나는 김 박사의 말에 공감했다. 자리가 아니라 대학인으로서 대학의 진로를 함께 고민하고 열어가려는 의지가 있었다. 1994년 5월, 김학준 박사는 우리 대학의 이사장으로 부임했다. 김 이사장은 참으로 진지하고 열정적인 분이었다. 천안으로 서울캠퍼스를 흡수 이전하는 대신에 새로운 부지를 매입하고 신축해 이전하는 대안, 즉 신캠퍼스 건설을 정부가 수용케 했다. 말이 그렇지 이를 실행하는데 얼마나 많은 인허가 절차와 관계 부서들의 협조가 수반되어야 했겠는가. 그 모든 과정에서 김학준 이사장은 기꺼이 자신이 가진 인적 자산을 공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활용을 했다. 지금의 죽전캠퍼스 부지를 매입할 때도 김 이사장은 나를 믿어주었다. 당시 현 죽전캠퍼스 부지 소유자는 대지를 매각하는 조건으로 대금을 일시불로 달라고 전제했다. 500억 원 정도인 그 막대한 거금을 마련하는 문제는 정말 해결이 어려웠다. 급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고민 끝에 내가 현 죽전캠퍼스 부지를 매입키로 결심했을 때 이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이때 한남동 교지를 담보로 제공하고 대금을 차입하는 일도 김학준 이사장이 풀어나갔다. 무엇보다 “안 돼, 안 돼” 일색이던 정부 관청의 고압적 자세를 바꾸고 하나씩 인허가를 받는 일도 정말 어려운 일었다. 김학준 이사장의 역량이 없었다면 죽전캠퍼스 이전사업은 참으로 더 큰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이전사업의 기초를 닦고 김 이사장은 인천대학 총장으로 부임해갔다. 그 뒤로도 대학과 언론기관에서 그의 부드럽지만 과감한 리더십을 필요로 했고 김 박사는 동분서주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지금 김 박사는 우리 대학의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평일도, 휴일도, 낮과 밤도 가리지 않고 문헌을 파헤치며 공부를 하더니 마지막 역작이라며 <남북한문전>을 간행하고 있다. 상고시대부터 현대까지 우리나라에 관한 문헌, 저서들을 하나씩 짚어보고, 이를 주제어 별로 분류한 문헌사전이라고 한다. 권당 800페이지 씩 1만 페이지가 넘는 대작을 준비하는 김학준 박사의 열정이 한국학의 큰 봉우리로 남기를 기원한다.

백 개를 주다가 한 개를 빠트려도 비틀어지는 사람의 마음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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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팔자는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좋은 팔자는 ‘남을 도울 수 있는 지위나 경제력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남을 돕는 일은 ‘우선 나부터 먹고 쓰고 남아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남보다 잘 먹고, 잘 살고, 그러고도 여유가 남아돌아 남들을 돕는 일이야 누군들 못하랴. 남을 돕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어렵고 힘든 환경이지만 내가 가진 힘이 남을 도울 수 있다면, 그렇게 삶을 꾸릴 수 있다면 그만한 팔자를 어찌 나쁘다 하겠는가. 다행히 나는 대학을 설립한 아버님을 만나 교육에 입신을 하고, 대학을 성장시키는 일에 매진해왔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여력이 다른 이들에게 삶을 개척할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내 힘을 보탰다. ‘먹고 쓰고 남아서’ 돕는 것이 아니라 내 도움이 상대방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믿었다. 팔자가 좋아서 돕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너는 이만하면 좋은 팔자가 아니냐? 그러니 스스로 만족하고 남을 돕는데 힘을 보태라.”고 스스로 결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마음가짐은 남을 도울 때 절대로 상대방이 은혜를 갚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저 내 도움을 받은 이들이 잘살고, 성공하면 그것으로 은혜를 갚은 셈치고 살아야 한다. “내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은혜를 갚으라”고 말을 하는 순간 내 삶의 평화는 흐트러진다고 생각한다. 지난 50년 간 얼추 계산해도 주례를 선 사람이 600여 명이 넘는다. 그 중에는 시장, 장관, 차관, 예체능계의 지도자, 총장이나 대학 교수들이 적지 않다. 그들 가운데 나를 찾고, 고마운 마음을 드러내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인간관계란 그런 것이다. 나는 부모님의 유산, 총장 시절의 수입, 아내의 도움 등을 바탕으로 장학재단을 만든 바 있다. 30년이 안되는 세월이지만 장학재단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1천500여명이 넘고, 금액으로는 70억 원이 넘는다. 지원받는 당시에는 “은혜를 기억하겠다. 꼭 다시 갚겠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이를 실천한 경우는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그래도 서운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성공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한다는 소식만 들으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이다. 그 만족감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 이상으로 바랄 것도 없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것만이 내 삶의 행복을 키우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부딪히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 잘 잊혀 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특별히 내가 무엇을 바라지도, 아니 돌아보아도 그 사람들에게 그릇된 일을 하지 않았는데 나와의 인연을 헌신짝처럼 버린 이들이 그렇다. 딱히 그럴만한 이유도 없는데 왜 그랬을까 라고 고민도 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고, 그런 고민은 결국 나에게 아픔이 되어 남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W교수이다. 내가 W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1982년경이었다. 당시 우리 대학 스키부는 한국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나는 이들을 알프스로 전지훈련 보낸 적이 있었다. 동계 스포츠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허약하던 때라 나는 대학 차원에서라도 세계수준의 여건을 갖춘 해외에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 이런 투자를 했다. 당시 전지훈련은 프랑스 쪽 알프스 산에 있는 스키장에서 이뤄졌다. 나는 훈련에 앞서 프랑스 스키협회에 현지에서 우리 선수들을 가르칠 프랑스 코치와 이를 통역해줄 한국인을 보내 달라 했다. 그래서 현지에 도착하니 바로 한국인 통역자로 나온 사람이 나중에 우리 대학 교수로 온 W교수였다. 당시 유학생이었던 W교수를 처음 본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를 마중 나온 통역자는 두 발을 쓰지 못해 양쪽 모두 목발로 도보를 하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당황했다. 가파른 언덕길, 그것도 설원을 헤매야 하는데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동행한단 말인가...나는 그에게 이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현지에 오는 한국인들을 자주 가이드 해줬다고 답했다. 이후 1주일 동안 그는 목발을 짚은 채 스키장을 누비고 다녔다. 물론 자주 넘어지고, 심지어 언덕을 뒹굴기도 했다. 선수들이 놀라 부축을 하려 하면 그는 손사래 치며 도움을 사양했다. 그 모습이 너무 씩씩하고 의젓해 교육자로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일주일을 같이 보내면서 가까워지자 나는 그의 인생 여정을 물었다. 그에게 박사 학위까지 있는데 이런 스키장 가이드로 고생을 하느냐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W교수는 어릴 적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어머니가 업어서 통학을 시켰다고 했다. 경희대 경영학과를 마치기까지 어렵고 힘들게 공부를 했고 신부님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유학 와 명문대인 그로노불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건 만 모국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이던 지방이던, 심지어 모교에도 지원을 했지만 교직을 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일반 기업체에도 구직을 했지만 장애인, 그것도 양족 목발이 없이는 이동하지 못하는 이를 받아주는 곳이 없어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야 했다고 고백했다. 프랑스는 그래도 장애인들에게 직업의 문호를 열어두고 이런 일이라도 해서 생계를 풀 수 있어 다행이라 말하던 그는 급기야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단국대에 응모한 적은 있느냐?”물었더니 없다는 대답이 왔다. 나는 그에게 단국대 교수 공채에 응시하라 권유했다. “우리 대학은 장애인 교육을 돕는 특수교육학과도 있고, 장애인 학생들도 입학하고 있으니 장애인 교수라고 박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 격려도 했다. 나는 이듬해 천안캠퍼스 경제학과에서 교수 선발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W교수에게 응모토록 연락을 했다. 다행히 W교수는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 34,5세 정도였다. W교수는 이후 나와 특별한 인연이 없이 지냈다. 총장인 내가 부담스러워서인지 그는 애써 나를 찾지 않았다. 물론 나는 내 철학이 그러하니 따로 그를 불러 얘기를 나누기가 겸연쩍었다. 몇 년이 흐르고 그는 나를 찾았다. 결혼을 하는데 주례를 서달라는 요청을 했다. 당연히 응낙했다. 그는 목발대신 휠체어를 카고 입장했다. 신부에게 결혼 결심을 물었는데 “자신의 오빠도 장애인인데 신랑을 장애인으로 구해 사회의 차별이 그릇된 인식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크게 안심을 하고 기뻐했다.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어야 하는 W교수의 난관, 이를 감내하고 돕겠다는 신부의 갸륵한 결심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선의를 베풀었다. 당시만 해도 천안캠퍼스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교사동이 없었기에 그가 맡은 과목의 강의실은 1층 강의실로만 배정토록 했다. 워낙 과목이 얽히고 설켜 있으니 이를 조정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같은 학과에서는 “장애인을 데려와 공연히 일을 만든다”는 볼멘소리도 들려왔다. 한바탕 목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애써 모른 척한 기억이 있다. 주례를 선 이후, 이런 일들로 설왕설래가 있는 때에도 W교수는 연락이 없었다. 공치사를 듣고자 함이 아니라 애써 초빙한 교수가 어찌 지내는지, 가정은 어떻게 잘 이끄는지 궁금했건만 전화 한통이 없었다. 그러다가 W교수가 교통사고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도 내가 인사를 갔다. 부상을 위로하고 건강을 기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학교 안팎에서 들리는 그에 관한 얘기들을 묻고 싶고, 그리고 같은 대학인으로서 지내는 바가 어떤지도 듣고 싶었다. 퇴원하면 연락이 있겠거니 했지만 이번에도 연락이 없었다. W교수와는 이 만남이 끝이었다. 그와는 총 4번의 만남이 전부였다. 프랑스 현지훈련 스키장에서 처음, 두 번째는 발령장을 줄 때, 세 번째는 결혼 주례를 서줄 때, 네 번째는 그가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 W교수에게 무슨 은혜를 갚아 달라 한 적도 없고, 생색을 낸 적도 없다. 내가 궁금한 것은 혹 부인과의 사이에 불편하고 어려움이 없는지 그리고 자녀는 얻었는지 같은 일상의 변화를 듣고 싶었다. 하다못해 주례를 서고나면 아이를 낳았을 때 이런저런 얘기를 듣거나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인사를 올리는 것이 양속이건만 그런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연구에 몰두해 좋은 논문을 생산한다는 얘기를 듣지도 못했다. 오히려 천안시에서 건물을 소개하고, 집을 중개하느라 바쁘다는 전언이 들려왔다. 실망이었다. 정년이 되어 학교를 떠날 때도 어떤 연락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던 걸까? 나도 모르게 내가 그에게 무슨 몹쓸 짓을 하기라도 한 건가? W교수를 생각하면 나는 남 돕기를 좋아하던 나를 보고 사람들이 해주곤 하던 충고가 생각난다. “장 박사, 어렵고 힘든 시절을 겪은 사람이 성공을 하고나면 자기가 받았던 도움은 쉽게 잊거나 아예 모른 척하기 십상이라네. 왜냐하면 불행했던 시절을 이겨낸 동력이 남의 도움 덕분이란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게 인지상정이거든. 그래서 야무진 성격의 사람들은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잘 내밀지 않는 법이야.” W교수는 지금부터 내가 말할 사람과 비교하면 그나마 또 다른 평가를 할 여지가 있다.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수십 년 동안 내가 보내준 후의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모든 인연을 부정적으로 돌려세운 사람도 있다. 그것도 내 비서실장을 했던 사람이 그럴 때는 남모르는 마음의 상처를 달래야 할 경우도 있었다. 내 비서를 지냈고, 비서실장도 지낸 S교수가 그런 사람이다. 나는 총장, 혹은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비서 또는 비서실장을 직접 발탁한 일이 거의 없다. 총무처에 공식적으로 의뢰하여 여러 간부들이 의논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적합한 인사를 추천하면 이를 받아들였다. 나와 일한 S교수는 서울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아버님이 대학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었다. 우리 대학 야간부를 졸업했는데 서무과, 학생과 등을 거쳐 내가 총장으로 취임하자 총장실 비서실장으로 추천되었다. 그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은 학교관련 대외 업무나 민원처리에 능하다는 점이었다. 공무원 생활을 했고, 70년대 식 표현으로 ‘풍채’가 좋아 대인관계에서 호의를 받기 쉬운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내가 부탁하는 대외 업무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고 있어서 나 역시 그를 믿었다. 당연히 승진도 빠르게 이뤄져 학생처장, 총무처장 등의 보직도 맡았다. 그는 한양대학교에서 도시행정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더니 교직에 뜻을 두었다. 나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교내 직원 인사문제와 재정을 책임 맡는 부총장으로 승진 발령하였다. 가정적으로도 친해져서 그의 아들과 딸의 경혼 주례도 맡아 주었다. 그가 정년을 맞자 나는 내가 설립한 범은장학재단 이사장직에 취임토록 했다. 차량을 공급해주고 아울러 봉급도 주었다. 내가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맡았을 적에는 그에게 적십자간호대학 이사장직에 임명하였다. 말하자면 나는 우리 대학 교직원 중에서 S교수를 가장 신임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총장으로서 그에게만 유독 관대한 혜택을 준 것이 있다. 그가 행정직원에서 교원으로 전환하고 싶어 할 때 이를 도와준 것이다. 도시행정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해당 과목을 강의하고 싶다고 했다. 박사학위까지 있는데 그만한 실력이 있으리라 믿었는데 불행히도 학문적 기초체력이 부실했던 것이다. 강의실에서 그 부실함이 학생들에게 드러나면서 자주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학생들이 뒤에서 그의 학문적 부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에게 들릴 정도였다. 그가 속한 전공에서는 강의 과목 배정을 놓고 언쟁이 높아졌다. 나는 이러한 불협화음을 애써 진정시키느라 교수들에게 자중을 호소하기도 했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을 당해도 인내하곤 했다. 학문은 미흡하지만 그가 학교를 위해 애쓴 일을 존중하기 때문이었다. 정년 뒤 범은장학재단 이사장으로 있게 해 기사딸린 승용차도 배정하며 예우를 했는데 9억 여원의 기금 손실을 가져왔다. 자리를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각별한 만남을 가질만한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천안캠퍼스 설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장에서 일이 생겼다. 나는 그 자리에서 축사를 했다. 천안캠퍼스 설립 과정을 아는 이라면 당연히 설립 작업 과정에서 김봉구 교수와 김유혁 교수가 얼마나 고생하며 많은 일을 했는지 다 알고 있기에 거기에 걸맞는 찬사를 보냈다. 그뿐이었다. S교수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천안캠퍼스 설립 30주년 축하의 자리에서 S교수에게 찬사를 보내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천안캠퍼스 설립 작업에 직접적인 참여를 한 적도, 업적이라 삼을만한 일을 한 적도 없었다. 더욱이 S교수를 의식해서 그를 무시한 것도, 천안캠퍼스 설립에 큰 기여를 했는데 그를 뺀 것도 아니었다. 연설을 하다가 노년에 들어 할아버지가 된 김유혁 교수, 김봉구 교수가 눈에 띄어 즉흥적으로 개교 당시의 역경을 이겨내던 두 노교수의 공덕을 치하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고 S교수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연설을 듣더니 얼굴을 붉히며 두 사람은 칭찬하면서 자신은 뺐다고 화를 냈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몇 주가 지난 뒤 이번에는 정년퇴임 교수들의 모임에서 S교수가 참석하여 당시 회장에게 말하기를 “이제부터 장충식과 인간관계를 끊겠다”는 절연을 선언했다고 했다. 당시 회장은 나에게 이를 전달하며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나는 의외로 무덤덤했다. “그러시라 하시죠.” 내가 한 말의 전부였다. 겉으로는 그리 말했지만 나는 기가 막히고 불쾌했다. 행정 직원이었던 그에게 신뢰와 중책을 부여했던 사람이 누구인가. 그의 부탁을 받아 아들과 딸의 주례를 서준 이가 누구인가. 그가 교직으로 전직시켜 달라 했을 때. 그의 강의와 연구업적이 기준에 못 미친다고 비난이 일 때마다 이를 내 책임이니 교수님들이 도와주시라 호소했던 이가 누구였던가. 사단법인인 범은장학재단에 자리를 만들어 급여와 예우를 해준 이는 누구였단 말인가?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내가 그를 비난한 적도 없고, 단지 공식 연설에서 그를 칭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절을 선언하다니...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S교수는 병원에 입원했다. 문안을 가고 싶었지만 수많은 원로교수들 앞에서 나를 의절하겠다는 선언을 했는데 찾아가는 일도 모양이 좋지 않아 뒤로 미루고 말았다. 그 뒤 S교수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별세를 했다. 그의 의절 소식을 들으며 나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열 가지, 백 가지 도움을 주고 호의를 베풀어도 단 한 가지 섭섭한 일이 생기면 그 전에 모든 일은 없던 일로 되는 것이 사람의 일이 아닌가. 남을 돕는 일이든, 장학 사업을 하던 이점을 잘 기억하고 싶다. 선하고 좋은 일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사람에게 이를 기대하지 마라. ‘선한 의지에는 보상이 없다. 사람 자체를 돕는 일로 보람을 느낄 뿐이다.’ 그것이 학연(學緣)을 가연(佳緣)으로 만드는 힘이고 내 삶을 성공시키는 길이다.

동문처럼, 친구처럼, 그러나 아픔을 준 김상현 의원

2019.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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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농 김상현 의원의 1주기가 다가온다. 지난 2018년 4월에 후농은 별세를 했다. 아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후농은 나에게 매우 각별한 정치인이었다. 후농과 나는 단국대학을 통해 인연을 맺었고, 정치인 중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 같은 정치인이었다. 후농은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성격이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6선 의원으로 한국 현대정치를 이끈 거물이고 6월 항쟁을 이끌어낸 전략가이자 김대중 대통령의 대표적 참모로 인정받았지만 인생 후반기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배신했다는 오해 섞인 비난을 받으며 관계가 멀어지기도 했다. 내가 후농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우리 대학 학생과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4월 혁명이 일어난 뒤로 대학가가 뒤숭숭하고 학생들도 들떠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학생회 간부들이 허름한 복장을 한 청년을 잡아와 내 앞에 데려왔다. 학생회 간부들의 말인 즉 “이 놈이 우리 대학을 돌아다니며 등록금도 안낸 주제에 강의를 듣고 있어서 잡아 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둑강의를 한다는 것인데 당시만 해도 우리 대학 학생이 워낙 적어서 낯선 학생은 쉽게 구별이 가능하기도 했고, 대학을 안다니면서 대학생인 척 하며 사기나 절도를 하는 사건도 잦아서 ‘대학생 사칭’은 꽤나 험악한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었다.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인 학생회 간부들을 말리고 내력을 들었다. 잡혀온 청년은 “자신은 조실부모를 하고 고학을 하며 학업을 이었는데 결국 고등학교를 못 마쳤고 집이 너무 가난해 대학을 못 갔지만 공부가 하고 싶어 도강을 했다”며 차분히 설명을 했다. 말을 듣다보니 무작정 우리 대학을 도강한 것이 아니었다. 재학생 중에 이 젊은이와 가까운, 나도 가깝게 지내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는 정치인을 꿈꾸고 있는데 단국대 정치학과의 모 교수의 강의를 꼭 듣고 싶었다”며 “마침 정치과에 친구가 있어서 그를 따라와서 강의를 들었다”고 밝혔다. 그 친한 학생은 김혁동이라고 당시 웅변으로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많이 해 유명한 학생이었다. 말을 듣다보니 그 자신도 웅변이 능해 상을 받기도 했다는데 말하는 품이 구수하고 솔직했다. 꾸밈없이 자신의 포부를 밝히며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비관하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는 자세에 인정이 끌렸다. 나는 그를 돕기로 했다. 나는 그를 교무과장에게 데려가 소개시켰다. 교무과장을 설득해 비록 학점을 받지는 못하지만 원하는 강의를 듣도록 해주도록 했다. 당시 실행중이던 청강생 제도를 빌려서 ‘비공식 청강생’으로 정치과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 비공식 청강생이 바로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을 민주화추진협의회로 묶어 직선제 개헌을 만들어내 민주당 부총재를 지낼 김상현이었다. 당시 내 나이 29세였고 김상현 의원은 26세였다. 자주는 못 만났지만 나이가 비슷한 탓에 같이 밥먹고 술먹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이 새롭게 굵은 가지를 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국회의원이 되면서부터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야당의원이 항의를 위해 사퇴를 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실시한 서대문 갑구 보궐선거에 후농이 당선되었다. 그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니 그는 하루아침에 정치계의 스타가 된 셈이었다. 특유의 웅변실력으로 연설 잘하고, 패기있는 국회의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지 얼마 안 된 시간에 그는 나를 찾아왔다. 비공식 청강생을 시켜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국회의원이라 해도 가난을 떨치지 못해 그가 밥살 일은 없었다. 그는 술을 좋아했고, 주량도 상당했다. 나는 술을 즐기지 않는데 후농의 술자리는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도 술이 마시고 싶으면 나를 청했다. 그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로서 부담 없이 살아가는 얘기를 하는 데 서로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후농은 남에게 부담을 주는 성격이 아니었고 정이 많았다. 술좌석에서도 농담과 만담을 잘 해서 함께 자리를 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그는 남도창을 구성지게 잘 불렀다. 그와 자리를 함께 하면 술값은 내가 부담하였다. 가난에 쫒겨 살아온 그의 내력을 비교적 잘 아는 나로서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립각을 세운 야당의 초선 의원에게 특별한 기대를 걸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저 그의 의지가 정계에서 시들지 않길 바라는 기대를 담아 술값을 냈던 것이다. 물론 술자리를 파하고 헤어질 때면 “장 총장에게 진 빚은 꼭 갚아야 겠다”고 입버릇처럼 장담을 하고 했다. 당시 우리 대학은 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군사정부가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내 선친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고 주간부를 폐교했다. 이로 인해 학교 존립이 어려울 만큼 교세가 오그라들고 극심한 재정난이 왔다. 설립자이신 범정 장형 선생은 낙담하여 병고에 시달리다 별세를 했다. 나는 학장으로 발령받았다. 내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1966년 11월, 학장으로 취임하자 나는 단과대학인 단국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쪼그라든 우리 대학의 현실을 극복할 유일한 대책이 종합대 승격이라고 믿었다. 졸업생이나 재학생 모두의 숙원이 종합대학 승격이었다. 종합대학 승격은 문교부의 소관이었다. 그러나 장관의 결재를 받아도 국무회의를 거쳐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대학의 명운이 달린 문제여서 지역구에 대학을 둔 국회의원들도 직간접으로 이해관계가 얽혀있어서 국회의원들의 협조도 필수적이었다. 나는 종합대학 승격을 공언한 뒤 매일 문교부(지금의 교육부)를 찾아가서 주무 부서의 계장, 과장, 고등교육국 국장을 만나 민원을 들어 달라 호소했다. 국회의 도움을 받고자 문교부를 소관하는 문공위원회의 여당 간사로 있는 김종호 의원과 위원장인 이돈해 의원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갔다. 두 분 모두 무난히 지원을 약속받았다. 일이 잘 풀리는 듯 했지만 정작 종합대학의 인가의 실무적 최종 결재권을 가진 문홍주 장관을 만날 수가 없었다. 일을 착수한지 한 달이 다돼가는 12월이 왔다. 해가 바뀌면 대학 입학정원이 조정되고, 교육부 관료의 보직도 변화하고 그러다보면 우리 대학의 민원은 이리저리 치이다가 무산되고 말 가능성이 높았다. 애가 탄 나는 문홍주 장관 면담을 몇 번이나 신청했지만 면담 허락은 없었다. 오히려 문교부 차관의 결재가 난 승인 서류를 장관이 거부해 책상에 잠들어 있다는 전언을 들으니 실망이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문 장관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는 이리저리 수소문을 하고 도움을 요청하다 서울대 사대 입학동기의 도움으로 문홍주 장관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장관 부인의 호의로 안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문 장관을 보고 대뜸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아침 식사 중이던 문 장관은 나를 보자마자 숟가락을 탁 놓으며 “당신 장 학장아냐. 학장 된지 한달 밖에 안되 총장 직을 하고 싶어 이 난리를 피는 거요. 국회의장님이 나에게 대구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해달라 했지만 거절한 나요. 주간부 복구한지 1년 밖에 안된 단국대가 종학대로 승격하면 다른 대학이나 청탁을 한 정치인들이 다 원수가 되는 건데 내가 단국대만 결재를 할 수 있겠소?” 그는 화를 내며 자리를 떨치고 출근을 재촉했다. 나라고 장관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은 수모를 당하는 창피함에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야당 의원이지만 김상현을 만나보자. 문공위 야당 간사를 맡고 있으니 내 하소연이라도 들어주겠지.” 나는 그길로 국회를 찾아가서 김상현 의원을 찾아갔다. 그는 나에게 정치과 도강을 부탁하던 시절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풍모도 의젓하고 용모도 단정했다. 하지만 나를 보자 반기는 표정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내 얘기를 들은 그는 “내가 언젠가 신세를 갚는다고 말했잖소. 내가 도울 일이 있다니 나도 기분이 좋은데요?”라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 의원은 “문 장관이 지금 나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어요. 1967년도 문교부 예산을 놓고 여야가 대립 중이거든요. 이걸 풀려고 문홍주 장관이 나에게 술자리를 갖자해서 곧 만납니다. 이 자리에 장 학장님이 동석하세요. 그러면 장 학장님의 민원을 소상히 설득할 수 있을거요.” 나는 장관의 비밀스러운 술자리에 3자인 내가 들어가면 더 큰 수모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김 의원은 “내가 문 장관에게는 장 학장과의 저녁식사가 마침 이 날로 선약했는데 장관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아예 두 분을 같이 합석하게 했다고 설명하면 장관도 화를 내지는 못하겠죠.”라며 “아니 이런 일이 있으면 당연히 나를 먼저 만나셨어야지 이제야 만나느냐?”며 농담을 건넸다. 나도 “야당 의원을 통해 청원을 하면 될 일도 안될 것 같아 그랬다”며 농담 섞인 진담을 하니 그는 웃으며 “그 날 만나면 내가 바람을 잡을 테니 장 학장님이 장관님을 아주 물고 늘어지라.”며 대꾸를 해 서로 웃으며 헤어졌다. 약속 장소는 신당동에 있는 작은 요정이었다. 그 당시 요정에서 중요한 논의를 하는 것이 정계의 관행이었는데 이곳은 그런 요정에서도 꽤 알려진 곳이라 했다. 김 의원과 문 장관은 저녁 7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나는 8시에 들어가는 것으로 각본을 짜두었다. 내가 도착해 방으로 들어가자 문홍주 장관은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장 학장이 여긴 무슨 일이요? 며칠 전에는 우리 집 안방에 쳐들어오더니 이젠 내 술집마저 찾아오고. 아주 형편없는 친구구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관이 껄껄 웃었다. 김 의원이 “제가 장 학장하고 오래된 인연이 있어 친구처럼 술마시는 사이입니다. 오늘 바로 그 약속이 있는 날인데 약속을 깰 사이가 아니라 이리로 오라했습니다.”라며 나를 두둔했다. 문 장관은 “장 학장이 재주가 좋구만. 이제 김 의원가지 동원해 단국대 일로 나를 꼼짝 못하게 묶어놓고. 기왕 왔으니 술이나 한 잔 합시다.” 두 사람은 이미 술을 마시고 있는 상태였다. 종합대학 승격에 관한 대화는 일체 꺼내지 않고 따라주는 술을 마셨다. 문 장관은 그런 나에게 “장 학장이랑 오늘 담판을 져야겠소.”라며 계속 잔을 주고받게 했다. 김상현 의원이 나를 대신해서 단국대학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였다. “장학장의 부친이자 단국대 설립자께서 모함을 받아 반혁명 인사로 몰렸고, 중앙정보부의 실수로 구속됐다가 풀려났어요. 단국대 주간부 폐교는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작용을 한거죠. 그런데 지난해는 정부에서 장형 선생에게 건국 유공자로 독립운동 공로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리고 주간부도 복원되었으니 그간의 일이 올바른 처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거죠. 이번에 단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해주셔서 억울함을 풀어주세요.”라고 사정을 했다. 문 장관은 진지하게 얘기를 듣더니 “아니, 그런데 김의원은 단대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렇게 장 학장의 민원을 대변하시는 거요?”라며 되물었다. 김 의원은 껄껄 웃으며 “저는 졸업장 없는 단국대 동창입니다. 등록금 내지 않고 단대 정치과에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학점도 없고 졸업장도 없지만 내 머리 속에는 나와 같이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 못지않게 정치학 지식이 내 머리 속에 가득차 있습니다. 그 덕으로 나는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 호의를 베푼게 장 학장이고요. 저는 장 학장하고 호형호제하는 사이입니다.”라며 다시 한번 장관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문 장관은 “내가 오늘 혹 떼러왔다가 혹 하나를 더 달고 가게 됐구만요. 좋소 이렇게 된 거 장 학장 나하고 내기 합시다.”라더니 조니 워커 3병을 주문했였다. 위스키 3병이 들어오자 “이거 한 병씩 각자가 다 마셔야 합니다. 장 학장이 나를 술로 이기면 총장감이 되는 인물이고 나보다 먼저 취해서 쓰러지면 종합대학 승격은 절대 불가하니 약속하겠소?” 하면서 내 술잔에 얼음도 넣지 않고 술을 가득 부어 마시라고 강요했다. 나는 “좋습니다. 평소 술을 마시지 않지만 마시다 죽어도 좋으니 다 마실 것입니다. 그러니 다 마시면 우리대학 종합대학 승격은 약속해주셔야 합니다!” 하고 장관과 술을 주고 받았다. 사실 나는 술을 즐기지도 않지만 체질적으로 술을 잘 마시지도 못했다. 맥주도 피하는 나인데 독한 양주를 별다른 안주나 얼음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다 마시고 나니 이미 나는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화장실을 가고 싶지만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서 일어나면 그대로 쓰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똑바로 앉으려 최선을 다했다. 이 자리에서 문 장관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하면 내가 아니라 대학이 쓰러질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술이 더 돌다가 문 장관은 완전히 취했다. 자리에서 스르르 옆으로 쓰러져 누워버렸다. 그러면서 혀가 풀린 목소리로 “술을 못 마신다는 사람이 진짜 한 병을 다 비웠구먼. 허허허 용기가 대단해!”라며 잠에 빠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넘었다. 당시에는 12시부터 통금이니 국회의원과 장관인 두 사람은 그렇다 치고 나는 집에 가기도 어려웠다. 문 장관은 비서관이 들어와 부측해서 모시고 갔고 김상현 의원도 만취가 되어 보좌관의 부측을 받아 귀가했다. 나는 요정에서 준비한 차를 타고 귀가했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속은 쓰리고 아팠고 머리는 온통 돌을 얹어놓은 듯 했지만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 나는 차를 집 앞에 세우고 기사는 통금에 단속될까 염려되니 우리 집에서 재우라 한 뒤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음날 김상현 의원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 몸을 걱정하고는 문 장관이 단국대 종합대학 승격 결재 서류를 장관실로 가지고 오라고 하부에 지시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진심으로 그의 도움과 일의 마무리까지 동참해주는 호의에 고마움을 느꼈다. 종합대학 승격의 1단계 난관을 이렇게 김상현 의원의 도움으로 풀어낼 수 있었다. 이후 2차 난관은 종합대학 승격 안건을 국무회의에 통과시키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차라리 대학을 국가에 헌납할 테니 단국대를 국가에서 운영하시라.” 호소하며 종합대 승격을 내락 받았다. 일부 국무위원들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는 정일권 국무총리를 설득해 끝내 관철시켰다. 결국 학장 취임 한단 여 만에, 1966년이 가기 전인 12월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최종 승격 인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여야 문공위원들의 반발이 없도록 의원들을 다독이는데 김상현 의원의 지원이 거듭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으니 ‘도강을 허락한’ 학연이 가져온 결실치고는 실로 크다 할 것이다. 우리 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이후에도 후농을 자주 만났다. 그는 1967년에 전국구로 공천을 받아 전국구로 재선 의원이 되었다. 후농은 테니스를 좋아했고 나 또한 테니스를 즐기는 편이라 일정이 비는 오후에 만나서 운동을 같이 했다. 술 좋아하고, 잘 마시기로 국회에서 최고로 꼽히는 후농이었기에 운동이 끝나면 식당을 찾아 술을 즐기는 편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나는 절대적으로 정치 얘기는 서로 피했다. 물론 회식을 하면 밥값은 내가 부담했다. 후농은 원래 가난했지만 정치인으로서도 치부를 하거나 돈을 밝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집에 돈을 가져가는 법이 없었다. 후농의 아내가 이것저것 작은 장사를 해 간신히 가정 경제를 꾸려나갔다. 후농은 또한 나를 자주 만나고 술을 같이 마셔도 절대로 나에게 돈을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후농은 재일교포 문제에 관심을 많이 쏟아 연구소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일본을 갈 때에 “여비가 없는데 좀 도와 달라”는 정도였다. 이렇게 교유를 하다가 정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지고 활동 범위도 커지면서 만남이 소원해졌다. 나도 대학 일로 점점 내 시간을 갖기가 힘들어졌고, 그도 김대중 총재의 최측근 보좌역으로서 나에게 신경을 쓰기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고 요정도 싫어하는 점을 그도 잘 알고 있었으니 술동무로서 내 역할도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연락이 뜸해지고 만남도 드물어지면서 시간이 흘렀다. 고학생 김상현과의 인연으로 뜻밖의 도움을 받았던 나는 이번에는 정치인 김상현과의 우정으로 뜻밖의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공표하면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는 해산되었다. 언론은 재갈을 물어야 했다. 동시에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장희 대통령에 맞선 김대중 총재와 그의 핵심 참모인 김상현 의원도 몇몇 핵심 야당 인사들과 함께 극심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후농은 국가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체포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물론 당시에는 은밀한 소문으로 구전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고문을 당하고 당하던 후농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다. 보안사 수사요원들은 고문을 하면서 “너에게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불라.”고 요구했다. 그 때 김현옥 서울시장과 내 이름을 나왔다고 했다. 나중에 태풍이 지나고 그 이유를 알게 됐지만 나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아닐 수 없는 문제였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던 나는 비상계엄 아래 학사운영을 논의하고자 학처장 회의를 하고 있었다. 계엄사령부에서 나를 만나러 왔다며 잠시 복도로 나와 달라는 전갈이 있었다. 나가보니 낯선 사람이 신분증을 보이며 동행을 요구했다. 계엄사령부가 발행한 임의동행 요청서도 있었다. 빨간 줄이 두줄로 그어 있는데 ‘계엄사령관 노재현’이라고 이름이 적혀 있었다. 비상계엄법에 의해서 영장 없이 임의 동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저기 세워놓은 검은 세단 차에 함께 타고 갑시다.” 수사관들은 명령조로 지시를 하였다. 나는 회의를 부총장에게 넘기고 번호판도 없는 검은 세단차를 두 사람과 함께 타고 갔다. 나는 계엄사령부로 가는 줄 알았는데 서빙고에 있는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이라고 하는 곳에 도착했다. 내 기억으로는 미8군 사령부에서 멀지 않은 언덕에 있는 2층 건물이었다. 2층인지 아래층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건물 구석진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방은 아주 작았지만 물이 차 있는 욕조가 있었다. 방안은 사무실 책상이 놓여 있고 수사관과 마주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두개 있었다. 한 눈에 이곳이 소문에 들었던 재야인사들을 잡아다 고문하는 곳이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물고문 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내가 무슨 큰 죄가 있다고 나를 물고문할까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잠시 뒤 계급장을 달지 않은 군복을 입고 ‘상고머리’를 한 삼십대 중반의 젊은이가 나를 신문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살기가 도는 분위기였다. 수사관은 나에게 종이를 주더니 내가 아는 정치인의 이름을 적으라했다. 나는 “안다는 뜻이 어느 범위를 말하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수사관은 “그런 것도 알려 줘야 하냐?”며 오히려 언성을 높혔다. 적당히 내가 아는 사람을 몇 명 적어 넣었다. 이를 건네받아 취조관이 명단을 읽어 보더니 갑자기 화를 내며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김상현의 이름은 왜 적지 않았냐”고 잔뜩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당신하고 제일 친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지 않은 것을 보니 뭘 숨기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서류를 꺼내더니 김상현 의원이 실토했다며 내용을 읽어줬다. 서류는 김 의원 취조 조서였는데 그가 실토했다는 내용은 “내가 거액을 지원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나는 그런 일이 없으니 당연히 부인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강하게 부인하면서 말도 안되는 내용을 왜 강요하느냐고 항의하자 나를 째려보던 수사관은 한명을 남겨두고 밖에 나갔다. 다시 돌아온 그는 “이 양반이 총장이라고 대접해주니 여기를 우습게 아는거요? 다 아는데 진술 거부하는거요?”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김상현 의원에게 밥을 사거나 술을 같이 한 적은 종종 있었고 그가 일본에 출장간다며 용돈을 달라고 해서 몇번 주었으나 그야 말로 내 월급의 반의 반도 안되는 돈이었다.”라는 요지로 간곡히 설명했다. 김상현 의원이 불었다는 조서에 따르면 금액이 내가 실제로 지원한 용돈의 10배도 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잠시 후농의 과장된 진술에 왜 이런 엉뚱한 말을 했을가 화가 났다. 그러나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도대체 얼마나 맞고, 고문을 당했으면 이렇게 있지고 않은 사실을 말했을까 하는 짐작이 들었다. 내가 겨겨한 반응을 보이며 왜곡된 사실에 계속 항의하자 그들은 물리적 고통을 가하기 시작했다. 거의 한나절을 매질에 시달렸다. 수사관의 구타는 육체적 아픔보다는 정신적 수모와 모욕감이 더 깊게 다가왔다. 자백을 강요했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강요받는 줄거리는 내가 ‘김상현 의원을 통해 김대중 총재에게 자금즐 역할을 했다’라는 것인데 그럴만한 재력이 나에게 없었으니 인정할래도 할 수가 없는 억지였다. 맞으면서 분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이면이구나. 암흑 세계가 이렇게 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우울했다. 군사쿠데타 직후 선친이 장면 총리 사건에 연루됐다는 무고에 휘말려 나 역시 끌려가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서빙고 분실의 구타는 그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아픔이었다. 취조는 하루 만에 끝났다. 정치에 간여하지 않은 그동안의 이력과 대학 육성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 여당에 협조하며 쌓은 네트워크가 더 이상의 악화를 막은 것 같았다. 내가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풀려 나온 후에 김상현 의원 부인이 우리 집을 찾아 왔다.부인은 “남편을 형무소로 면회가서 만났더니 정부와 여당에 가까운 사람의 이름을 대면 재야 인사들 보다는 고통을 받지 않을 것 같아서 부풀려 자백을 했다고 해요. 너무 고문이 심해 정신을 잃고 다시 고문을 받는 일을 일주일 넘게 당하니 급한 불을 피해야 했기에 폐를 끼쳤다며 미안하다 꼭 전해달라 해서 이렇게 찾아 왔어요.”라며 거듭 와서 죄송하다 했다. 말을 전하는 부인 역시 남편의 극심한 고통과 이로 인한 결례가 어찌 쉽게 받아들여지겠는가. 후농의 아내는 말 끝에 참혹한 현실을 놓고 눈물을 참지 못했다. 후농은 그 뒤로 2년 정도 감옥 생활을 했다. 출옥을 한 뒤 나를 찾지 않았다. 나는 그런 후농의 뜻을 서운해 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잠시 “당신의 진술로 나는 물론이고 대학과 대학 재단이 큰 봉변을 당할 뻔했다.”고 항변할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가 당한 고통의 크기는 얼마나 컸을까. 그리고 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나와의 재회를 피하게 하는 것이리라.”하는 마음으로 이해를 하기로 했다. 대학을 통해 맺은 인연으로 어느 동문보다 더 뜨겁게 나를 도와준 후농 김상현 의원의 유업이 우리나라 정치계에 좋은 자산으로 남기를 기원한다.

석두성 - 청년실업가와 고학생이 맺은 40년의 인연

2018.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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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3월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명동의 증권가에 발을 내딛었다. 큰돈을 벌어 아버지의 육영사업을 돕고 싶다는 것이 동기였다. 또 하나는 내 나름대로 제대로 된 장학 사업을 하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고 싶어서였다. 내 나이 스물 대여섯 살로 한창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자부하던 때였다. 당시 명동은 한국의 돈이 몰리던 곳이었다. 증권사와 사채업자들, 거기에 암달러상까지 전쟁의 참극을 벗어나려는 신생독립국가의 금융 산업이 막 기지개를 켜던 요람이 바로 명동이었다. 당연히 나도 증권회사를 들어갔다. 당시 한창 잘나가던 대창증권 주식회사였다. 당시 증권회사의 돈벌이는 주식이 아니라 국채였다. 기업은 전쟁으로 시장이 다 무너진 판이니 제대로 된 회사가 없었고 주식도 당연히 수익을 낼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핵심인 되는 투자 수단은 국가가 발행하는 채권, 즉 국채였다. 휴전 뒤 부족한 복구자금을 융통하려고 정부는 5%의 이자를 보증하는 채권을 발행했다. 이 채권을 ‘5분리(五分利) 건국국채’라 불렀다. 이 채권은 발행 액면가에 비해 20% 정도의 가격으로 시장에 나오는 데, 이를 갖고 있으면 거치기간 뒤에 두세 배, 만기인 5년이 지나면 다섯 배의 상환금에 이자를 챙길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 국채를 사려는 투자자들이 몰려 유통가격이 수시로 오르고 내리는데 바로 이 틈을 이용해 거래 수익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요즘 증권이나 선물 거래에 이용되는 레버리지 효과도 활용할 수 있으니 작은 돈으로도 수십, 수백 배의 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나는 대창증권에서 국채 투자에 제법 능력을 발휘했다. 레버리지 효과를 활용해 굵직한 거래에 성공했고 당연히 큰 수익을 거뒀다. 1년도 안되어 나는 대창증권의 상임 감사 역을 맡았다. 지금으로 치면 투자 거래를 조정하는 역할이었다. 그 때 나와 같이 임원 직위에 있는 이들은 대체로 50세 정도였으니 나의 성과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증권에 머무르지 않고 본격적인 자본 투자 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세운 사업체는 흥이건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건물이나 여러 시설들을 복구해야 했기에 이런저런 건설사업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건설이나 설비 기술자들은 자본이 없었다. 그들은 명동에서 사업 자본을 구해 공사를 진행하고 대금을 받으면 빌린 돈을 갚았다. 이 과정에서 투입되는 대부금의 이자는 지독한 고율이었다. 공사를 진행해 이득이 나오면 보통 돈을 빌려준 대부업자가 70%를 갖고, 기술자들은 30%만 갖고 갈 정도였다. 나는 여윳돈을 여기에 투자했다. 물론 내 원칙은 달랐다. 나는 사업 이익의 30%를 갖고, 기술자들에게 70%를 배분했다. 대신에 공사대금을 떼먹힐 염려가 없는 안전한 프로젝트를 갖고 오도록 했다. 또한 공사를 가져오는 기술자들의 인품도 살펴보았다. 신용과 기술력이 좋은 이들에게 자금을 융통해주었다. 사기와 투기가 난무하던 시기였지만 ‘자본가 30%, 기술자 70%’라는 나의 사업 원칙은 빠르게 돈을 벌게 해줬다. 업계의 나에 대한 평가도 좋았고, 젊은 사람이지만 큰 사업가가 될 것이라는 칭찬도 많이 받았다. 26살의 청년이 구하기 힘든 미제 세단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아버지 벌의 연세를 가진 이들을 부하직원으로 두고 사업했다. 다들 나를 청년실업가라 불렀고 나 역시 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많은 돈을 만졌지만 나는 당시 사업가들에 유행하던 도박, 요정, 댄스 행락에 동참하지 않았다. 부친의 엄격함도 원인이었지만 처음부터 나는 사업의 목적을 장차 내 철학을 살린 장학사업을 한다는 데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학 이사장으로 계시는 부친께 용채를 드리는 것이 기쁨이고 나름의 자부였다. 대학 때는 택시운전기사의 조수까지 시키며 나에게 호된 가르침을 주시던 부친에게 용돈을 드리면서 나는 효자라는 칭찬을 받았고 그것이 내 보람이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던 겨울이었다. 유난히 추운 날로 기억된다. 고등학생 모자를 쓰고 교복을 입은 학생이 우리 사무실에 들어왔다. 추위에 얼굴이 붉게 얼어 있었다.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돌아다녀서였는지 손도 붉게 얼어 있었다. 교복 윗주머니에 명찰이 있는데 ‘석두성’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얼굴이고 손이고 너무 추위에 얼어붙은 듯한 행색이어서 아마 밖이 너무 추우니 난로 불에 몸이라도 녹이려 들어왔나 보다 하고 일부러 시선을 돌리려했다. 그런데 학생은 머뭇거리며 뭔가를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추워서 들어온 게 아닌가 보네?” 내가 묻자 학생은 용건을 밝혔다. “저... 도장이나 명함 주문을 받으러 왔어요.” “교복을 입은 걸 보니 학생 같은데, 고등학생이 낮인데 학교는 안가고?” “저는 선린상고 다녀요. 야간부라 밤에 학교가니까, 낮에는 이걸로 돈을 법니다.” 고학생(苦學生)인 셈이었다. 당시에는 일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고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명동에서 이렇게 힘들게 일하며 배우는 학생을 만난다는 것은 기특하고도 서러운 일이었다. 내력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육이오 사변 나고 아버지가 좌익으로 몰려 총살을 당했어요. 어머니는 여주와 이천에서 참기름을 사서 동네에 찾아가 팔아 형제들과 생계를 꾸리고 있습니다. 형제로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는데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어요. 나 홀로 서울에 와서 야간부를 다니고 있는데 일을 해서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학생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이상하게 이 학생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없이 혼자 생계를 해결하면서 공부를 하려는 노력이 꺾일까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얘기를 듣자마자 집으로 전화를 해 아버님과 어머님께 사전 승낙을 받고 아내에게도 사전 통고를 했다. 그리곤 퇴근길에 이화동에 있는 내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에 남은 방이 있어서 혼자 사용하도록 했다. 나는 석두성 군에게 내 계획을 밝혔다. “당장 내일부터 명함이나 도장 주문 받으러 다니는 행상은 그만두거라. 내가 우리 회사에 사환으로 채용하도록 할 거야. 상고에서 공부 열심히 하면 더 좋은 일자리도 생기고, 아니면 네가 원한다면 대학공부도 할 수 있어. 그리고 두 동생들에게도 말해라. 이번 봄이 오면 서울로 와서 야간 학교에 다닐 준비를 하라고 해. 일자리는 내가 알아 봐줄 테니 3남매가 같이 일하면서 공부해서 차례로 취직하고 서로 도와주면 어머님도 편해 지실거야.” 나는 내가 말한 계획대로 하나씩 풀어갔다. 두성 학생은 사환으로 채용했고 두 동생도 봄에 신학기가 시작하면서 야간 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여동생은 아버지께 청원을 해 단국대학 재단의 상무이사실에서 사환으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석두성 군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단국대학 야간부 상학과에 입학시켰다. 학교 밖에서 일하면 공부에 지장이 있을 수 있어 대학 도서관에서 직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석두성 군은 4년간 낮에는 대학 직원으로, 밤에는 대학생으로 착실하게 공부를 마쳤다. 두 동생들도 똑같이 일하고 배우면서 성장했다. 석두성 삼남매가 모두 힘과 마음을 합쳐 여러 해 동안 월급을 꼬박꼬박 받아서 저축한 덕분에 어머니도 행상을 안하고 서울로 모시고 와서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나는 석두성 학생을 대학생으로 만든 뒤 ‘청년실업가’ 생활을 접기로 했다. 앞서 말한 국채 매매사업이 자유당 정부의 강제로 인해 일대 파동을 겪어야 했고, 이 과정에서 하루아침에 대창증권이 파산하고 말았다. 정부의 파행적 정책,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후진적 경제구조에서 기업이란 모래성과도 같은 허무한 일이라는 자각도 했다. 기업을 키우려면 권력을 섬기고, 돈 벌 일을 찾으려면 도박이나 술집을 출입해야 한다는 풍토도 나와는 맞지 않은 일이었다. 증권사업을 정리한 나는 학계 진출로 내 삶의 방향을 재정립해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반면에 석두성군은 대학을 졸업하더니 자신의 경제적 발판이었던 대학 직원직을 떠나 증권 회사로 전직했다. 고교 동창의 권유가 있었다는 데 증권업계가 아무래도 돈을 벌고 출세하기가 빠르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대학 교직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증권회사 정식 사원으로 취업이 되었다. 그가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제법 정사원으로 활동할 수 있을 쯤 나를 찾아와서 자기네 증권회사에 투자를 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증권회사는 당시만 해도 사원이 성장하려면 굵직한 투자 자금을 유치하는 것이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나는 기꺼이 내 장인을 소개 해주었다. 내 장인은 석두성 군이 우리 집에서 여러 해 동안 숙식을 하면서 가족처럼 지냈기 때문에 그를 믿고 상당한 금액을 투자하였다. 결과적으로 내 장인의 투자는 쪽박을 찰만큼 결정적인 실패가 되고 말았다. 석두성 군은 장인을 자기 증권사의 고객으로 유치한 것이 아니라 장인의 돈으로 자신이 직접 투자를 한 것이다. 장인의 투자는 해당 증권회사와 무관한 개인의 문제가 돼버렸다. 그나마 석두성 군이 투자한 종목이 사고가 생겨서 홀딱 망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내 장인의 투자금은 하나도 남는 것이 없이 손해를 보고 말았다. 그뿐 만이 아니라 증권회사의 공금을 유용하여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결국 장인어른의 피땀 어린 자산을 사기꾼에게 갖다 바치도록 유도한 셈이 되었다. 석두성 군의 해직도 회사에 연락하고서야 알 수 있었다. 석두성군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피하고 있었다. 그가 학교를 떠나 증권회사로 옮겨가서 성공하기를 빌었건만... 그가 근무하던 회사를 찾아가 들어보니 회사 공금을 횡령한 죄로 따귀를 맞고 쫓겨났다는 말에 탄식을 감출 수 없었다. 그 회사 간부에게 물어 보았다. 공금을 횡령했으면 왜 회사에서 고소하지 않았느냐고. 그 간부는 석두성 군이 회사 사장의 이종사촌과 결혼했기 때문에 고소할 수 없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배신감에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내가 그를 동생으로 삼아 공부시키고 대학 직원으로 취업을 시켰으면 끝까지 붙잡고 인간 교육을 시켜야 했는데 이를 이루지 못한 것이 나의 죄라고 자성했다. 그리고 장인에게 용서를 빌고 석두성 군을 믿고 거액을 투자한 전액을 변상해드렸다. 석두성 군이 일국증권에서 해직당하고 전혀 소식이 없었다. 우리 집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내 동생처럼 지냈는데 내 장인의 노후 자금을 송두리째 가로챈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렇게 일이년이 흘렀다. 소식 한 줄 없던 석두성 군이 나를 집으로 찾아 왔다. “아니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 또 무슨 일을 하려고 왔어?” 분한 마음에 야단을 쳤다. 그는 무릎을 꿇고 울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옷이 남루하고 구두도 신지 못하고 헌 고무신을 신고 왔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영양실조가 생긴 듯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그런 행색을 보니 화가 치밀다가 가엾은 생각이 나서 그간의 경위를 물었다. 자기 딴에는 개인적으로 회사 돈과 내 장인의 돈을 이용해 주식에 투자하여 성공하면 이익을 더해 돌려주고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저 했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회사마저 쫓겨난 것이다. 2년 만에 초라한 그의 모습을 보자 그에 대한 증오심보다는 가여운 생각이 들어서 용서하기로 결심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인데 이로 인해 인생 전체가 실패로 내몰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번 일로 반성하고 새사람이 되기를 당부하였다. 나는 석두성 군을 용서하고 다시 우리 대학의 재무처 직원으로 복직을 시켰다. 일부 간부들은 학교를 등지고 떠난 자를 왜 복직시키는가 반대의 여론도 끓었다. 나는 재기의 기회를 주자고 고집하여 채용하였다. 복직한 그는 열심히 일했다. 그 무렵의 나는 단국대학교의 규모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몰고 갔다. 내가 학장으로 취임해서 종합대학 총장으로 승진하는 기간이 불과 7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사학의 재정 형편은 철저히 재학생 규모에 좌우되었다. 학생 수가 많아야 그들이 내는 등록금으로 교사도 짓고 교수도 많이 채용할 수 있었다. 규모가 큰 대학이 명문 대학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학장 취임 직후의 단국대학교 학생 수는 1천2백 여 명으로 전국 4년제 대학 가운데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교직원 수는 60여 명이었다. 나는 교세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세우고 어느 대학보다도 교세 확충에 주력했다. 사학 최초로 천안캠퍼스를 설립하여 학생정원을 확충했다. 어떻게든 대학의 외형을 확충하여 다른 대학에 비견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자는 의지로 몸부림을 쳤다. 당시 학생 수는 급속도로 증원되었지만 학생이 납입하는 등록금 가운데 교사와 대지를 마련하기 위한 재원으로 쓸 수 있는 돈은 등록금 전체의 20%를 넘지 못했다. 당연히 은행의 융자나 급하면 사채도 필요했다. 교수나 직원들은 대학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발전하는 데는 기뻐했지만 자금을 마련하는 문제에서는 대부분은 나 몰라라 였고 성의도 능력도 없었다. 10년이 넘는 간절한 노력 끝에 사립대학 중 학생 수로는 5위권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같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가장 크게 협조해준 직원이 석두성 군이었다. 종합대학 승격, 천안캠퍼스 설립 등 대학이 발전하면서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석두성 군은 나를 도와 열심히 일했고 직위도 재무처장까지 승진하였다. 한때는 법인과 대학의 재무처장을 겸직하여 다른 이들의 시샘을 받기도 하였다. 사실 법인과 대학은 사립학교법으로는 재정적으로 분리하도록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더해서 법인은 대학의 재정운용을 감사하는 것이 주요 업무이기도 하다. 나는 이같은 법률적 우려를 감안해 법인 사무처 처장 겸직이 곤란하니 하나는 내놓고 일하라고 했다. 석 처장은 그것이 섭섭하였던지 사표를 제출했다. 내가 만류하자 그는 ‘학교가 아니더라도 먹고 살 수 있다’면서 ‘나가서 내 사업을 하겠다’고 고집했다. 생각을 다시 하라며 사표를 만류했지만 자신의 결심은 변함이 없다고 하여 결국 학교를 떠났다. 그가 떠나고 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석두성 처장이 이미 경기도 포천군(당시는 시 승격 전이었음)에 스키장을 세우려 10여 만 평의 임야를 샀다는 소문을 들려줬다. 1980년 대 들어 정부의 스포츠 육성정책이나 소득증대에 따른 스키 인구 확대에 힘입어 스키장 사업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고학생에서 대학 직원이 되어 증권회사 직원이 될 때도 훌쩍 떠났다가 장인의 돈까지 날려먹고 결국 고무신을 신은 채로 울며 도움을 요청해 받아줬는데 또 ‘학교가 아니라도 살 수 있다’며 떠나다니...서운한 마음이야 어찌 없겠는가. 그래도 부디 꿈꾸는 사업이 잘 되기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석 처장은 다시 나에게 왔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산을 사서 스키장을 만들면 큰 수입이 생기리라 생각하고 관청에 허가 신청을 냈지만 허가가 나지 않았다. 스키장 개장을 허가 받기위한 신청서는 다 반환되었다. 결국 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었다. 결국 그는 나를 찾아와서 자기가 사놓은 산에 스키장이 개장되는 허가를 얻는 데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다. 이게 무슨 인연이던가. 그의 과거, 그리고 최근 나에게 몰인정하게 대하며 떠난 일을 생각하면 다시는 그를 상대하지 않으려고 결심했건만... “그래 그 어려운 고학생이 이제 사업가가 되려 큰 도전을 한다는데 도와야지. 학교에 사표도 냈는데 이 일이 안되면 망하는 일이 아닌가. 나도 한때 청년 실업가로 큰돈을 벌겠다는 야망을 키운 적이 있지 않던가.” 결국 결심을 허물고 그를 돕는 일에 발을 내딛었다. 만나야 할 사람, 내 자존심을 굽히고 부탁을 해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장관급 인사와 현직 장관만 해도 일곱, 여덟 명을 만나야만 했다. 석두성 전 처장이 만나자 한다고 면담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경기도 지사를 비롯하여 내무부 장관, 건설부 장관, 국방부 장관, 산림청장 등을 한 달 사이에 쫒아가 다 만났다. 면담을 하며 스키장의 당위성을 설득해 허가를 내주도록 구두 약속을 받았다. 그들은 나와 단국대학이 오래전부터 많은 스키 선수와 스케이트 선수를 양성한 한국 동계스포츠의 개척자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오랜 노력이 쌓여 우리나라가 국제 동계스포츠 무대에서 국위를 선양한 기반이 되었음을 인정하여 스키장 허가를 해준 것이다. 1985년에 결국 석두성 전 처장은 스키장 사장이 되었다. 내 공덕을 잊지 않겠다며 석 사장은 스키장 이름도 단국대의 상징 동물인 곰을 빌어 베어스 타운(Bear’s Town)이라 이름 지었다. 자기는 그런 뜻이라 했지만 정작 나는 ‘베어스 타운이’ 단국대를 연상시키면서 단국대학이 소유권이 있는 양 오해를 받기도 했다. 특히, 이런 오해가 루머로 변질되어 정보나 사정기관에서 내가 베어스 타운의 숨은 소유주이니, 대학 총장이 무슨 돈이 있어 스키장을 세우느냐며 비밀리에 조사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물론 석 사장은 감사의 표시로 나에게 개인적으로 주식을 증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선물을 받을 내가 아니었다. 그런 대가를 받으려 내가 키운 사람에게 주식을 받을 일이 있겠는가. 정보기관의 뒷조사는 그저 루머를 확인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석두성 사장의 사업은 그 뒤로 순조롭게 발전했다. 서울에서 멀지않은 거리라는 강점이 스키어들을 불러 모았다. 이에 힘입어 스키장 내에 콘도를 지어 분양을 했는데 이것이 인기를 끌면서 회사 규모가 한 단계 도약을 했다. 돈이 잘 벌리자 그는 석두성 회장으로 위상을 높혔다. 그리고 나에게 은혜를 갚겠다면서 콘도를 선물하겠다 했지만 역시 거절했다. 나는 석두성 회장의 이런 선물을 거절할 때 마다 “사업이 잘되면 나보다 자네가 성장하는 데 발판이 된 단국대학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많이 주는 게 나를 돕는 길일세.”라고 당부하곤 했다. 석두성 회장은 대신에 베어스타운 회사의 주식 20%를 기부하고 1990년도에 우리 대학이 미국 오리건주 애쉬랜드시에 동양문화연구소를 설립할 때에 5억 원을 기부하였다. 더욱 큰 회사로 성장했으면 좋겠지만 나의 기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사업이 잘되자 건설업에도 진출했다. 특히 일본에 있는 골프장까지 인수하였는데 골프장 근처의 화산이 터졌다. 이로 인한 화산재가 매일 골프장에 쌓이는 바람에 결국 영업이 안 되어 큰 적자 부담을 지고 말았다. 건설사도 국가적 재정위기가 닥치자 극심한 불경기에 휩싸이면서 도산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인수한 건설회사는 우리 대학 교사 신축사업을 하청받기도 했으나 재정난이 겹치면서 결국 우리 대학에도 피해를 미치고 말았다. 사람은 어려운 형편에 맞닥뜨려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몇 년의 사태 진행에서 석두성 회장은 우리 대학에는 피해를, 나에게는 실로 견디기 힘든 실망을 주었다. 재물은 쌓았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주고받은 은혜와 신의는 그렇게 가볍게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유리하면 등을 돌리고 불리하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그런 석두성 회장이지만 그는 우리 대학의 역사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우리 대학이 신캠퍼스 건설 사업을 착수하려는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 요건인 대학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때 이 부지를, 그러니까 지금의 죽전캠퍼스 부지를 매입하도록 알선해준 이가 바로 석두성 회장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1957년에 명동에서 맺은 고학생과의 작은 만남이 나에게 마냥 아픔만 준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아무튼 1990년대 후반 이후 몇 번의 부침을 겪다가 석두성 회장이 세운 회사는 이랜드라는 그룹회사로 매각되었다. 후일담이지만 매각을 했는데 제대로 대가를 받지 못해 그 충격으로 병석에 들었다는 전언을 듣기도 했다. 주식을 매각하면서 우리 대학이 소유했던 베어스타운의 주식도 20%에서 단 1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것이 나와 석두성 회장의 40년에 걸친 인연의 상징이라 생각한다. 어린 고학생을 집에 데리고 와서 같이 살며 성장을 했지만 인간적 의리보다 이재에 매몰되어 소중한 인연을 1주의 주식처럼 가볍게 날려버린 인생 여정. 가만히 자신에게 되물어 볼 일이다. 지금의 나에게 베풀어진 호의와 선의, 그리고 하늘이 주신 도움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신앙과 사랑으로 풍성해진 '경주 9남매'의 성장

2018.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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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이 된 건가. 1999년의 설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TV를 보고 있었다. 생활정보를 중심으로 제작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경상북도 경주시의 외곽에 살고 있는 가족들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그저 휴식 삼아 화면을 바라보던 나의 가슴에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화면에 나오는 가족은 부모님과 9남매로 이뤄져 있었다. 9남매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장녀가 18살인가 했고, 막내는 4살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0년 전이지만 흔치 않은 대가족이었다. 주소로는 경주시이지만 양남면이라고 울산시 방향으로 도심지에서 한참 떨어진 산골이었다. 당시 초등학교를 다니려 해도 5Km를 걸어가야 하는 궁벽한 농촌이었다. 그러다보니 농사를 한다지만 9남매의 생계를 꾸리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이야 그렇다 치지만 내 마음에 와 닿은 점은 그런 시련이 아니었다. 그 시련 속에서도 푸르고 어여쁜 마음을 잃지 않는 부모님과 자녀들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자기가 할 일을 맡아서 씩씩하게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일손을 덜어드리려 농사부터 가사까지 뭔가를 감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20년 전이라지만 이미 각박한 도시생활에 찌들었던 당시 사회상에 비춰보면 맑은 공기를 호흡하는 느낌이었다. 더욱 대단한 점은 바로 부모님이었다. 육아를 하며, 또 생계를 꾸리다보면 지치고 힘든 낯빛과 기색을 보여야 하는데 이 분들은 싱글벙글 밝은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방송 내용 속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9남매 키우느라 힘드시지 않냐”고 묻자 “사실 13 남매를 낳으려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해 아쉽다”고 웃으며 답했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사람은 다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갖고 태어나는 법이니 미리 걱정할 일이 아니다”라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세상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진실한 고민과 실천을 하는 과정에서 얻은 신앙의 결과라는 게 마음으로 다가왔다. 그런 점이 신선한 충격을 주었지만 내가 큰 감동을 받은 부분은 또 있었다. 산골의 어둔 밤이 가고 아침이 되자 한 가족은 밥상에 다 모였다. 아버지가 이끄는 데로 아이들은 모두 성경책을 중심으로 모여 앉아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작은 방에 밥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성경책을 놓고 기도를 하는 모습은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소박하지만 그 속에는 든든한 신앙의 기둥과 어질고 착한 부모님, 그리고 온전히 사랑으로 축복받고 자라는 아이들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같은 기독인으로서 저 어린 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에 더해 사회의 보살핌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저 아이들은 분명히 우리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어질고 착한 부모님의 학비 부담을 덜어줘 9남매가 안심하고 공부하려면 장학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내 힘이 부쳐 대학까지 보장할 수는 없지만 고등학교 까지 학비를 해결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이 프로그램을 시청한 데는 하나님의 뜻이 작용했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 무렵 나는 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나는 1995년부터 우리 대학의 서울캠퍼스를 지금의 죽전으로 이전하려는 사업을 개시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라는 미증유의 국가적 위기에 부딪혀 이전 사업 자체가 와해될 위험에 당면하고 있었다. 학교와 재단 모두 극도의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나는 기독교로 개종한지 얼마 안 되지만 매일 하나님께 기도를 하며 내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나와 우리 대학을 도와줄 힘이 간절히 필요했다. 누구를 돕기 이전에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할 시련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에게 매일 위기를 이겨낼 힘을 달라 탄원하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나를 도와줄 사람’보다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을 보내줬다. 어질고 선한 부모님은 TV에는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비췄겠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얼마나 큰 간절함이 있었을까. 9남매와 살아가면서 자녀들을 키울 걱정이 왜 없었겠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 가족에 대한 존경과 사랑, 신앙에 대한 강한 의지로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들을 만나고, 그들을 도움으로써 내가 누리고 가진 것이 결코 적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이를 통해 나의 부족함을 채우라는 것이 하나님이 내개 주신 해답은 아니었을까. 나는 방송을 보고나서 아내에게 “저 사람들을 돕겠어요. 저 아이들 학비를 지원해야 겠어요”라고 선언했다. 아내도 그런 나의 선언, 아니 약속을 기쁜 마음으로 격려해주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사람은 늘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한다. 자기가 가진 것은 늘 부족하고 아쉽다며 하늘의 도움, 국가의 도움, 뜻밖의 행운을 기대한다. 이런 갈증으로 삶의 행복을 만들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그런 갈증으로 사막같은 삶을 살다 가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이 가진 것을 감사해 하며 자신에게 남는 것은 남들에게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지면 오히려 삶은 좀 더 보람차지는 것이리라. 남을 돕는 일은 그래서 결국은 나를 돕는 길로 통하는 법이다. 방송을 보고 바로 다음날 나는 ‘경주 9남매 가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 내 비서를 직접 현지에 보내 가족들을 만나고 고충을 들어보라 했다. 9남매의 아버지는 서순필 씨(당시 51세), 어머니는 이순남 씨(45세), 두 분은 독실한 기독인으로 신앙이 굳은 배필을 찾다가 오히려 혼인이 늦었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청년시절에는 고아원을 차려 고아들을 돕는데 평생을 바치려는 꿈이 있었다고 한다. 9남매는 7남2녀로 형제 가운데 맏이인 장녀는 서미미 양(당시 17세)으로 울산시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어서 형제들이 줄을 이어 초등, 중등,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 생계야 부모님들이 땀을 아끼지 않고 노동을 해 굶지 않는다지만 학비는 정말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보고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메시지를 전해 약속했다. “9남매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일체의 학비를 장학금으로 지원하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학용품도 지원하겠습니다.” 그렇게 9남매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9남매에 대한 장학금 지원은 필요한 학비를 수합해 알려오면 계좌 이체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나는 가능하면 부모님이나 9남매와 직접적으로 만나지 않으려 했다. 한창 자라는 나이이고 그 중에는 사춘기를 겪는 아이들이 계속 생기는데 잘못하면 도움 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장녀인 서미미 양과는 간헐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소통을 했다. 나중에는 내가 이메일을 주로 활용하면서 서신도 이메일로 오고갔다. 서미미 양은 부모님만큼 독실한 기독신앙을 갖고 있다. 매사에 기도를 통해 진지한 성찰을 하고 어릴 적부터 10Km가 넘는 통학길을 걸어서 등하교를 하면서도 어린 형제들을 챙기며 부모님을 도왔다. 미미 양의 이런 인내와 어른스러움이 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보이지 않은 유대감을 만들었으리라 충분히 이해가 됐다. 나는 그런 미미 양에게 각별한 당부를 했다. “미미 양이 대학에 진학을 해야 동생들도 희망을 갖고 분발 할꺼야. 우리 대학에 진학하면 장학금도 지원할 테니 열심히 공부해요.” 미미 양은 열심히 노력해 우리 대학을 입학하는데 성공했다. 전공은 경영학을 선택했다. 나는 약속대로 미미 양에게 대학 학비도 지원했다. 거기에 더해 가정 경제가 어려워 별도로 주거공간을 얻지 못할 거라 생각해 기숙사에 들어가도록 했다. 미미 양은 뛰어난 성실성을 보였다. 성적도 좋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생들을 돕기도 했다. 미미 양이 대학을 입학한 뒤 셋째도 우리 대학에 입학했다. 물론 학비를 지원했다. 여덟째도 우리 대학에 입학했다. 당연히 학비를 지원했다. 미미 양은 전공을 경영학에서 회계학으로 전환하더니 다시 대학원에 진학해 회계학 석사학위도 취득했다. 착한 성품의 부모님이 기울인 정성 덕분이었을까. 9남매는 모두 대학에 진학했다. 그 중에는 우리 대학 만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에 다니는 동생들도 있었다. 그들이 서울의 어디에 기숙하며 학업을 잇겠는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2010년 하반기부터 2년 간 대학 재단이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에 거주토록 했다. 다른 형제들도 근면 성실하지만 미미 양은 장녀로서의 사명감이 있어서인지 더욱 진지했다. 나는 그런 미미 양의 내면에 있는 책임감을 신뢰했다. 미미 양이 석사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미미 양에게 연락을 했다. “다른 직장에 갈 거 모 있어. 범은장학재단에서 회계 관리를 책임지라고.” 범은장학재단은 내가 1990년에 설립했다. 우리 대학을 설립한 범정 장형 선생과 혜당 조희재 여사의 육영의지를 기리자는 취지에서 사재를 털어 만든 장학사업 전문기관이다. 현재까지 7천9백 여 명의 학생, 교수들에게 68억 여 원의 재정지원을 해오고 있다. 처음에는 단촐한 규모였지만 업무가 복잡해지면서 전문적 회계 관리가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미미 양이라면 범은장학재단의 재정을 제대로 관리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믿음은 한번도 깨지지 않았다. 이런 서미미 양을 위해 나는 중국어도 공부하게 했다. 회계전문가로 제 구실을 하려면 관련 법이나 행정에 대한 지식도 필요할 것 같아 사이버대학에 보내 행정법무학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하나 더 받게 했다. 또한 미미 양이 클래식 음악을 어려서부터 좋아한다고 들어서 아코디언과 피아노도 공부시켰다. 지금은 교회에서 반주 봉사를 할 만큼 발전을 했다. 평양감사도 싫으면 못한다는 데 미미 양은 무엇이든 기회를 주면 특유의 성실성으로 앞길을 열어가니 이런 것이 사람을 가르치고 키우는 교육의 기쁨이 아니던가. 최근에 미미 양의 부친께서 칠순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들어 이제는 서 과장으로 부르는 미미 양에게 가족들의 근황을 물었다. 비단 미미 양만이 아니고 이들 9남매는 모두 대학을 나와 자신의 앞길을 개척하며 알찬 삶을 살아가고 있다. 둘째는 산업디자이너로 일하다 자신의 뜻이 요리에 있다고 선언하고 쉐프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셋째는 우리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쇼핑몰 운영관리를 맡고 있다. 넷째는 경영학을 배우고 신학대학원에서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 다섯째는 사범대를 나와 지금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여섯째는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자산관리사로 일하고 있다. 일곱째는 정보통신 보안학을 공부해 프로그래머로 활약 중이다. 여덟째는 우리 대학 응용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학사장교를 지원해 대기 중이다. 아홉째 막내는 통계학과에 다니고 있는데 군복무를 위해 휴학 중이라 한다. 이들의 현황을 이렇게 짚어보는 이유는 내가 했던 장학 사업이 맺은 결실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반듯하게 장성한 자녀를 둔 부모님, 그러니까 서순필 씨와 이순남 씨 부부의 기쁨은 얼마나 크고 자랑스러울지를 함께 공감하고자 함이다. 매일 그 작은 방에서 밥상을 놓고 둘러앉아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던 가족들이 오늘날 이처럼 크고 풍성한 아름드리 나무로 자란 것이다. 하나님이 이들을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고, 시련과 고통을 인내와 기도로 극복한 두 부부의 보람이다. 이 풍성한 사랑의 가족에 내 성의가 함께 있었음을 나는 기쁜 마음으로 기억한다. 나는 미미 양의 하나뿐인 여동생인 혜미 양의 결혼에 주례를 서기도 했다. 미미 양이 아버님의 부탁이라며 주례를 맡아 달라 했을 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자랑스럽고 기뻤다. 평생 서온 주례 가운데 가장 기분 좋은 주례 자리였다. 가끔 소식을 듣는데 9남매의 부모님은 지금도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두 분은 그 기도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와 내 아내의 건강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단국대와 범은장학재단의 발전을 기원한다고 한다. 어쩌면 거칠고 모진 바람이 불 때 내가 온전히 서있는 힘은 이처럼 소박한 휴머니즘과 신의 가호 덕분은 아닐는지...나 역시 ‘경주 9남매’의 행복과 부모님의 장수를 기도한다.

이*승 - 가련한 젊은이의 절망에 희망의 손길을 내밀은 까닭

2018.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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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이 저무는 12월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조찬 약속이 있어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뒤 학교로 돌아가려 차 속에 있었다. 9시를 넘은 시간이었다. 당시 서울캠퍼스가 있던 용산구 한남동은 제3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를 지나면 경부고속도로를 진입할 수 있는 교통 요지였다. 비록 차량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워에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차들로 제법 길이 막히곤 했다. 그 날은 유난히 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우리 대학으로 가까워질수록 차는 가다서다가 아닌 정체 상태로 빠져들었다. 학교 바로 앞인 한남동로터리에 들어서니 군인, 경찰이 차량 통행을 통제하고 있었다. 경광등이 번쩍이는 검은색 차가 늘어서있고, 경찰만이 아니라 무장 헌병과 군인들이 함께 근무하는 걸 보니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 대학을 나와 대로를 건너면 보이는 건물에는 다방(지하)과 중화요리집이 들어 있었는데 그 건물 주변을 포위하다시피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학교 앞에서 일어난 일이니 궁금증이 더해졌다. 혹시 우리 학생들이 다친 사건은 아닌지 걱정도 되어 출근을 마치자마자 연유를 알아보도록 했다. 보고를 들으니 무장 탈영병이 다방에 들어가 손님들을 인질로 잡고 군경과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실내이지만 6발의 총탄을 다방 벽들에 쏘아대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무장탈영병 사건이 적지 않게 일어나곤 했다. 군대 복무 여건이 험하기도 했고, 낙후된 경제여건으로 먹고살기가 힘들어 개인과 가정이 뜻밖의 불행을 당해 탈영을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인질극으로 연결되어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적잖았다. 당일, 그러니까 1973년 12월 5일 오전 10시에 일어난 무장탈영병 인질사건 발생 공간은 다름 아닌 우리 대학의 바로 앞이었고,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던 무대는 ‘한일다방’이었다. 지금처럼 카페문화가 없던 ‘다방 전성시대’여서 학생들은 강의가 빈 시간에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시 풍습이었다. 문제의 한일다방은 학교를 나와 가장 가깝게 있는 곳이라 사랑방같은 구실을 하고 있었다. 현황을 알고 나니 이번에는 학생들 걱정에 일을 할 수 없었다. 당시 비서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상배 교수(당시 문리대 교수)를 불러 재학생이 인질로 붙잡혀 있는지 여부와 전후 상황을 소상히 파악하여 알려 달라 했다. 김 실장의 보고가 들어왔다. 걱정대로 우리 학생이 인질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랄까, 아침 시간(오전 10시)이어서인지 손님도 10 명 이내였고 그 중 학생은 서울대생과 단대생해서 2명이라고 했다. 더욱 다행인 것은 무장 탈영병이 인질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정보관계자들도 나에게 “인질범의 언행을 보니 다른 사람을 해칠 정도는 아니다. 사람을 다치게 할 의도가 아니고 자신의 답답하고 초조한 상황을 못이겨 잠시 흥분한 것 같다’고 전언했다. 다만 인질로 잡힌 우리 대학의 학생에게 “혼자 남으신 어머님을 행복하게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 아버님 곁으로 먼저 가겠다.”는 유서를 쓰게 한 걸로 보아 자살의 위험성이 크다는 얘기도 들었다. 김 실장은 인질로 잡혀 있다가 풀려난 학생도 만나고 해서 더 상세한 얘기를 해줬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는데 여자 쪽 부모님 반대로 애인이 변심한 듯했다. 인질범은 애인을 불러 이를 설득하려다 탈영을 했다. 여자 쪽의 결혼 반대 원인이 탈영병의 가난한 가정형편과 이로 인한 진학 실패, 불안한 미래 때문이라는데 범인은 이같은 현실에 절망하여 자포자기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보고를 들으며 그 탈영병의 고통에 공감이 갔다. 오죽 어렵고 힘든 형편이면 저런 막장에 다다른 극단적 행동을 했을까...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공부를 못한 것이 무슨 죄라고 저런 설움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앞서 말했듯이 탈영병 사건이 일어나면 대체로 비슷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극단적 선택을 하게 했음을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가난과 불우한 환경, 대학 진학의 좌절, 애인의 변심, 군대의 상습적 폭력 등이 겹쳐 죽음을 빚는 비극으로 이어졌었다. 그때마다 나는 교육자로서 우리 사회가 젊은이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을 줘야 한다는 자성을 하곤 했다. 바로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앞마당에서 이런 참담한 일이 일어났는데 자성만 하고 행동을 뒤로 미룰 수 없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저 젊은이를 살려야 한다. 저렇게 죽게 놔둘 수는 없다.”는 울림이 치밀어 올랐다. 인질을 하나 둘씩 풀어주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자칫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예감도 들었다. 시간이 촉박함을 느낀 나는 김상배 실장에게 서둘러 부탁을 했다. “내가 관계 당국에 얘기를 했으니 김 실장이 그 탈영병 젊은이를 만나 봐요. 내가 그 젊은이를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 더 이상 과한 일을 벌이지 말고 자수하라고. 대학 공부도 시켜주고 가족들 먹고 살 취직자리도 알아봐줄 꺼라고 약속하세요. 이 장충식이 보장한다고. 얼마든지 떳떳한 생활을 하도록 도울 것이니 두려워말고 자수한 뒤 새 출발을 하자고 해요.” 김상배 실장은 용산경찰서 형사를 대동하고 인질극이 벌어지는 한일다방을 찾아갔다. 비록 내 부탁을 받고 방문했지만 김상배 실장의 배짱도 보통은 아닌 셈이었다. 나나 김 실장 모두 40대 초반이었기에 그런 발상과 실천이 가능했을 것이다. 탈영병을 만나고 돌아온 결과는 앞서 들은 보고와 같았고 구체적인 사항이 밝혀졌다. 이름은 이*승, 당시 21세. 육군 일병. 일찍 부친이 별세하고 모친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지만 생계가 어려웠다. 이*승 군이 장남으로 모친과 5남매를 책임져야 했다. 심한 가난에 시달리면서 고등학교 때 전교회장을 지내고 대학 입시도 2번이나 합격했지만 결국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약국 등에서 일하면서 중학교 동창과 연애를 했는데 입대를 하자 멀어지고 여자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자 애인을 설득한다고 외출을 한 뒤 곧바로 탈영을 했다. 김 실장은 이*승 군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만나보니 눈빛이 오히려 자기가 저지른 일 때문에 겁먹은 듯 하고, 자수를 설득하니 눈물이 그렁거리는 게 성품은 착한 사람으로 보였다.”며 “곧 애인을 만날 것이고 그러면 자수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새 출발을 전적으로 돕겠다’고 한 나의 약속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승 군은 당일 오후에 자수를 했다. 인질극 발생 두 시간이 갓 넘었을 때였다. 사건이 끝나고 당일 석간이나 이튿날 조간은 온통 이 사건을 톱기사로 다뤘다. 나는 이*승 군을 돕기로 결심했고 내 의지를 전달했기에 연락을 기다렸지만 이*승 군은 어떤 연락도 없이 형무소에 수감이 되었다. 고민하던 가운데 나는 사건 당일 인질로 잡혀 있던 우리 대학 학생을 수소문해 만나보았다.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이*승 군과 얘기를 나눴는데 탈영이니 강도니 험한 일을 할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증언을 했다. 탈영을 할 생각은 전혀 아니었는데 애인과 하루 밤을 보내고 귀대시간을 넘기면서 일이 커졌다는 사연이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이런 젊은이가 감옥에서 청춘을 보내면 더욱 좌절하여 진짜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된 ‘진학의 꿈’, 공부를 시키는 것이 최선이라 믿었다. 나는 내 생각을 솔직히 밝힌 편지를 이*승 군에게 보냈다. 희망을 가지라 격려했고, 내가 진심으로 돕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김 실장을 보내 면회도 하게 했다. 내가 직접 그를 만날 때가 온 것이다.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춘천 육군교도소로 이감됐다고 했다. 그를 만나온 김상배 실장을 대동하여 이 군을 만났다. 깡마르고 초췌한 젊은이가 면회소로 나왔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며 대화를 나눴다. 얘기를 나누면서 속으로 ‘이렇게 온순한 청년이 어떻게 인질극을 벌이려 했단 말인가. 그건 천성이 아니라 상황에 내몰리고 쫓겨 이뤄진 비극적 해프닝이다’라는 심증을 굳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용기를 주고 싶었다. 아직 희망이 있음을, 지금부터라도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 이 군을 만나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는 김상배 실장과 대화를 나웠다. “만나보고 나니 선량한 성격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어요. 이 군을 잘 지도하면 선량한 시민으로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선 이 군을 하루 빨리 감옥에서 풀어나오게 하고, 그 다음으로 대학에 진학시켜서 엔지니어로 키우면 취업도 쉽고, 동생들도 돌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상배 실장도 내 말에 동의를 했다. 이미 김 실장은 내 지시로 경기도 북부에 있는 이 군의 고향집을 찾아가 모친과 형제들을 만나고, 형편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우리 둘은 우선 형기를 단축시키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궁리를 했다. 이 군의 형기는 징역 6년이었다. 인질과 택시강도 혐의가 겹쳐 무거운 형을 받은 것이다. 젊은이에게 6년은 너무 길다. 자칫 감옥 속에서 사회에 대한 증오가 쌓이고, 범죄자에게 물들을 수도 있었다. 해결책은 유일했다. 법무부 장관을 만나 탄원하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물론 대학 총장이라는 내 지위를 앞세워 내가 모든 일을 책임진다는 공약을 전제해야 했지만... 당시 법무장관은 황산덕 교수님이었다. 서울대가 배출한 최초의 법학박사이자 우리나라 법학계에는 법철학, 형법학 분야를 개척한 석학이기도 하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며 우리 대학에도 출강을 해 나와도 오랜 교분을 쌓고 있었다. 항 장관님을 찾아갔다. 탈영병 이*승 군의 사연을 설명했다. “순간의 잘못으로 부대를 이탈했습니다. 헤어지려 하는 애인을 설득하려 서울에 따라와 갈피를 못잡고 실수를 했는데 이로 인해 평생 불행한 생활을 겪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홀어머니와 어린 형제들도 나락에 빠질 수 있으니 이를 막고 싶습니다. 가족들을 살펴보니 다들 선량한 농민입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모친의 일자리도 주고, 두 동생은 학업을 이어가도록 제가 재정 지원을 하려 합니다. 이*승 군도 장관님이 선처해주시면 교도소에서 대입 예비고사(지금의 수학능력 시험 같은 제도)를 준비하도록 하고 돕겠습니다. 물론 대입에 성공하면 이 역시 제가 공부를 무사히 마치도록 뒷바라지 하겠습니다. 젊은이와 불쌍한 가족들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 꼭 장관님이 도와주세요.” 진심으로 부탁했다. 황 장관님은 내 성품을 잘 아시는 분이라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셨지만 쉽게 응낙을 하지 못했다. 형법학자로서 당연한 소신이 있지 않겠는가. 죄의 무게도 가볍지 않았다. 나 역시 한 번의 청원으로 풀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김상배 실장으로 하여금 계속 이*승 가족의 살아가는 일과 이 군의 반성하는 모습 등을 전하고, 감형을 청원토록 했다. 김 실장은 심지어 황 장관의 자택이 있는 혜화동까지 찾아가 여러번, 간절히 부탁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닌가. 황 장관님은 결국 이 군의 감형을 위해 몸소 여러 가지 일을 앞장서 주었다. 관계 당국을 찾아가 나 대신 설득도 하고, 완고한 군관계자들에게도 부탁을 했다. 나약한 젊은이를 도우려는 황 장관님의 정성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토록 많은 분들의 선의가 모이고, 쌓였기 때문일까. 이 군에게 큰 선물이 다가왔다. 징역 6년의 중형이 2년20일로 감형된 것이다. 그리고 1975년 성탄절에 이*승 군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이 군을 불러 격려를 하고, 수시로 김상배 실장이 이 군과 이 군의 가족이 사는데 근 어려움이 생기지 않게 지원하도록 했다. 옛 한남동 캠퍼스의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를 얻어 가족들이 살도록 했다. 이 군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자신이 탈영하여 인질극을 벌인 한일다방 건너편이고 매일 그곳을 지나쳐야 등교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매일 그 곳을 지나치면서 자신의 과거를 곰씹고, 미래에 대한 결의를 다지라는 뜻으로 그 아파트를 얻었다. 그저 사회의 저명인사가 던진 공수표로만 알았던 내 약속이 하나씩 이뤄지자 이 군도 달라졌다. 형무소 안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더니 석방된 이듬해에 바로 전문대학에 입학을 했다. 삶을 바꾸겠다는 열정이 생기자 이 군은 열심히 공부를 했다. 2년 뒤에 이 군은 전문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측지기사와 중등교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2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직후 2년 만에 얻은 성과로는 결코 작지 않았다. 더욱이 이 군은 곧바로 우리 대학 토목공학과 편입시험을 치렀는데 이 시험에도 합격을 했다. 해당 학과 편입시험에서 최고의 시험성적을 받았다. 다른 대학이 아닌 단국대학을 진학한 이유에 대해 본인은 “총장님의 도움이 나를 얼마나 변하게 했는지, 내가 얼마나 좋은 일들을 성취하는지 가장 가까운데서 보여드리고 싶다.”고 설명했다. 사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는 기쁨이 아니다. 그러나 청년을 기르는 일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 거기에 도움을 받는 청년이 이렇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것이 교육하는 사람들이 얻는 최고의 선물인 셈이다. 그의 두 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그 두 사람을 우리 대학의 직원으로 채용하게 했다. 한 사람은 우리 대학 법인 사무처에, 또 한 사람은 수위로 근무했다. 혹시나 과거 물의를 일으킨 사람의 가족이라는 것이 알려져 만의 하나라도 험담을 들을까 우려해 비밀을 유지했다. 교내에서도 개인적으로 두 사람을 아는 척하거나 아예 언급을 피했다. 이*승 군은 무사히 대학 공부를 마치고 우리 대학의 건축 및 설비관련 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당시 건설업이 호황기라 일반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이왕이면 그의 성실함이 대학 행정에도 좋은 성과로 연결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3남매는 모두 직장인이 되어 안정된 삶을 가꿀 수 있었다. 나중에 이 군의 여동생은 뜻한 바가 있어 가톨릭 수녀가 되었다. 남동생은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명예퇴직을 했다. 이*승 군은 전공에 맞춰 우리 대학의 건축업무에 잘 근무했다. 나도 그를 믿고 많은 일을 시켰다. 적잖은 공사 현장에서 현장 관리와 기술 감독을 하더니 홀연히 대학 행정직을 그만두고 건축회사를 차렸다. 대학을 그만둘 때 작별 인사라도 있기를 바랐지만 무엇이 급한지 그동안의 여정을 정리할 틈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척을 하면 할수록 자칙 과거의 아픔을 다른 이에게 노출시키는 일이 될까 두려워 한 번도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고 마음에 묻어 두었다. 나중에 들으니 사업이 여의치 않게 풀려 다시 한 번 큰 시련을 겪다가 기독교에 의지해 신학대학을 졸업해 지금은 충청남도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그가 단 한 번도 안부를 전하는 적이 없으니 아마 그로서는 자신의 과거, 나를 포함한 과거의 인연이 잊혀 지기를 바라는 것이라 짐작을 한다. 살아오면서 돌아보니 사람을 키우는 과정에서 내가 그 당사자를 위해 기울인 애정과 노고의 무게에 상응하는 애정이나 노고를 되돌려 받은 적이 나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서운하지는 않다. 어차피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부모님께 받은 은혜도 제대로 갚지 못하고 별세한 뒤에야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들이다. 하물며 사회 속에서 맺은 인연이야 어쩌겠는가. 그저 폐를 끼치지 않고, 서로의 믿음을 잃지 않고 사는 것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할 일이다. 사람을 키우는 것은 보답을 받기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받은 만큼 다음 사람에게 베풀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