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전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게시판 뷰
게시판 뷰페이지
박애정신으로 역사의 앙금을 뛰어넘은 이시가와 다카오 선생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9.09.04 (최종수정 : 2019.09.05)
조회수 3,964
썸네일 /thumbnail.54740.jpg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양국의 역사해석을 둘러싼 갈등이 확대되면서 경제와 안보문제로 불이 번지더니 급기야 혐이니 혐일이니 다투다가 양국 민간부문도 분쟁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전쟁과 한일병탄이라는 아픈 역사를 가진 양국에 그나마 60 여 년에 걸쳐 쌓은 친선관계가 뿌리째 흔들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나는 중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기도 했지만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매동소학교(현 매동초등학교)에서 교육과정을 마쳤다. 당시 총독부는 국어, 그러니까 일본어를 학교에서 일상 언어로 사용토록 강제하고 있었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와 만주에서 생활하며 유년기를 보냈기에 본능적으로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일본어는 어색하기도 했거니와 이미 유년기부터 일제에 대한 반항심을 몸으로 길러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조선어’(당시 국어는 일본어였다)가 입밖으로 불쑥불쑥 튀어 나오곤 했다. 그럴 때 선생님이 계시면 그 날은 치도곤을 당하는 날이 되었다. 

국어(일본어)를 안쓰고 조선어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손바닥을 맞거나 뺨을 맞고 걷어차이는 폭력을 당했다. 그런 폭력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잘못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분하고 화가 나는 심정이었다. 그것이 지금도 70년을 넘어서까지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힘이 센 선생님이 힘 약한 어린이를, 내 나라말을 안 쓴다는 이유로 구타를 할 만큼 제국주의통치는 무섭고 비인간적 체제였다, 피식민 국가의 국민은 서러운 운명이었다. 내가 학연가연에서 밝히듯 내 힘이 닿는 한 사람들을 돕고 청년 인재를 아끼는 이유도 바로 이 어린 시절에 겪은 설움을 통해 ‘억강부약(抑强扶弱)’의 뜻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만주로 망명을 하고, 어린 아들은 식민지에서 매를 맞으며 아동기 시절을 보냈으니 나 역시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했고,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어서 한일관계를 미움과 갈등의 맥락에서만 해석하지 않을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거기에 대학을 경영하면서 만나 인연을 맺은 많은 일본인들과의 우의도 큰 역할을 했다. 

그 중에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일본인으로 이시가와 다카오(石川堯雄)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이시가와 선생은 1916년 생으로 동경대에서 치의학을 배운 치과의사이다. 츠루미대학(學見大學)에 치학부(齒學部, 우리의 치과대학에 해당)를 설치하는 개설위원으로 초빙되어 교수 생활을 시작한 분이다. 츠루미 대학은 치의학 분야에서 일본의 최상위권의 성가를 거두고 있는데 이같은 경쟁력의 기반이 바로 이시가와 선생이 쌓은 학덕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분과의 인연으로 1987년 츠루미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었고 지금도 양쪽 대학이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대학이 이시가와 선생과 맺은 인연은 자매결연에 앞선 치과대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에서 시작했고 치과대 병원을 설립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이시가와 선생은 우리 치과병원 설립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이자 안내자였다. 어찌보면 오늘날 한강 이남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천안캠퍼스 치과병원을 있게 한 동반자라고 해도 과한 말이 아니다.



내가 이시가와 다카오 선생을 만난 것은 1977년이었다. 당시 나는 마음 속으로 천안캠퍼스를 종합대학으로 성장시킨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다른 대학들은 지방에 설치한 제2캠퍼스를 ‘분교’로 취급하며 서울에 있는 본교의 부속기관으로 취급하는 정도였다. 나는 미국의 대학처럼 천안캠퍼스를 문자 그대로 하나의 완결된 교육, 연구체계를 갖춘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 만들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당초 천안캠퍼스를 설립할 때 천안시에 제시한 미래상이고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인구가 갓 10만 여 명을 넘은 천안시에 내가 대학을 세우겠다며 나설 때 천안시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은 내 의지와 포부를 반신반의했다. 나는 그들에게 천안을 한국 최고의 교육도시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우리가 성공하면 다른 대학들이 몰려올 것이라 확신했고 그렇게 설득했다. 당시만 해도 천안시는 경부고속도로에 인접한 교통요충지임을 내세워 관광업을 미래 발전목표로 갖고 있었다. 이에 근거해 지금 천안캠퍼스가 위치한 부지도 관광호텔을 세울 부지로 설정하고 있었다. 나는 천안시장에게 그 부지를 대학캠퍼스 부지로 활용하자고 했다. 부지 매입을 위한 자금이 들어있는 통장을 천안지역 유지들의 공동체인 천안시번영회에 맡겨놓고 일을 시작했다. 엉뚱한 부동산 투자가 아니냐는 지역사회의 의구심을 처음부터 불식시키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고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렇게 시작한 천안캠퍼스를 처음 약속대로 발전시키려면 치과대나 의과대를 세우고 병원을 세워야 천안시와 충남지역의 의료복지도 증진시키면서 천안캠퍼스의 성장기반도 확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의학관련 교육연구시설을 세우는 일이니 쉬울 리가 없었다. 자금력도 없었고, 쌓아놓은 노하우도 없었다. 당연히 다른 대학의 선례를 알아보고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아야 했다.


우선 국내 최고라는 서울대와 연세대 치과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결과는 외면이었다. 아니 사실상의 거절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의학계는 자신들의 영역에 높은 울타리를 쌓길 원한다. 진입장벽을 높이려면 치과나 의과 대학 설립, 병원 건설부터 의료장비 확보 등의 노하우를 공유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거기에 천안시에 치과대와 병원을 세운다니, 그들 생각에는 단국대가 되지도 않을 일에 헛된 꿈을 꾼다고 비아냥거리기 좋은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이렇다 저렇다 답이 없었다. 

나는 일본에 가보자는 결심을 했다. 한국에서 안 되니 외국에서 병원 설립 자문도 받고 뭔가 돌파구를 찾자고 생각했다. 상대국가로 일본을 정했다. 가깝고, 대학의 운영체제도 비슷하면서 의학이 발달한 곳이 일본이니 멀리 생각할 수도 없었다. 마침 일본에는 <일본사립치과대학협회>가 있었다. 이를 알고서 나는 바로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협회의 사무총장에게 우리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내 응답이 왔다. 추천해준 대학과 병원은 두 개였다. 하나는 동경에 있는 니혼대학교의 마츠도치과대학(松戶齒科大學)이었고 다른 하나가 요코하마에 있는 츠루미대학(鶴見大學)의 치과학부였다. 나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일본 치의학계에서 학덕이 높고 인품이 좋은 교수님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한국의 치의학자들한테 들을 수 없었던 병원 설립에 대한 자문을 듣고 싶었다. 내 말을 들은 그 사무총장은 망설이지 않고 학자 한 분을 추천해줬다. 그 분이 바로 이시가와 다카오 선생이었다. 더군다나 그 분은 바로 우리가 방문할 츠루미대학 치과학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뭔가 좋은 방향으로 일이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만남을 주선해달라 부탁하고 바로 요코하마에 있는 츠루미대학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1977년 8월로 기억한다. 일본의 여름은 우리나라의 무더위를 능가한다. 앉아있어도 짜증이 나는 더위 속에서 캠퍼스를 찾아가 만난 이시가와 선생은 생김새부터 호인의 기질이 보였다. 둥근 턱선과 인자한 눈빛이 누구라도 포용할 인상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내 생각을 전했다.

“자그마한 지방도시인 천안시에 치과병원을 세우고 싶습니다. 우리나라가 공업화는 빠르게 진행하지만 의료복지는 그렇지 못합니다. 좋은 의료시설은 서울에 편중되어 지방 농촌도시는 그 혜택을 받기가 힘듭니다. 더군다나 치과 병원은 보건소가 고작이고 있더라도 작은 개인병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지방도시에도 서울 못지않은 치과 전문병원을 세워 농민들의 구강보건을 돌보고 싶군요. 제가 그 일을 하고 싶은데 뜻은 있지만 처음 하는 일이라 여러모로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시가와 선생은 내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되물었다.

“장 총장님은 의사 출신 총장이신가요?”

“아뇨, 저는 역사학을 전공했습니다. 문과대 출신이죠.”

내 답변을 듣는 이시가와 선생은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의외로군요. 의사 출신도 아니신데 시골 사람들의 의료 복지에 이처럼 강한 소신을 갖고 계시다뇨. 제가 오늘 정말 훌륭한 총장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힘닿는 데로 돕겠습니다.”

강한 어조로 이시가와 선생은 처음 만난 나에게 병원 설립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시가와선생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나를 만난 날 저녁에 만찬을 대접한다는 의사를 전하더니 그 자리에 쓰루미대학 치의학부 보직교수 전체를 불러 동석케 했다. 나를 비롯해 출장에 동행한 우리 대학의 병원 설립 관계자들과 보직 교수들이 상견례를 하도록 주선하겠다는 취지였다. 이 자리에서 이시가와 선생은 저녁 식사의 목적을 밝히며 직접 “장충식 총장님과 단국대학이 하려는 훌륭한 일들이 성취되도록 우리 츠루미대 치의학부 교수들이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같은 동포인 한국의 치과대 의사들이 외면하고 거절했던 일을 일본인들이 나서서 팔을 걷어 부친 것이다. 

의사로서 가장 기본인 박애주의(博愛主義)를 발휘해 국경을 넘어 도움을 주려는 이시가와 선생의 소신은 단순히 감사한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울리는 일이었다.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귀국을 해서 치과대 부속병원 건축에 착수했다. 


이시가와 선생의 지원을 약속받고 치과대학과 치과대 부속병원 설립 작업을 본격화했다. 천안캠퍼스 신축 작업이 선행되어야 해서 이를 준공한 뒤 치과대학 신설을 허가받았다. 여기에 4년의 세월이 들어갔다. 천안캠퍼스가 안착되었다는 확신이 들은 1981년 가을에 이시가와 선생, 그리고 당시 츠루미대학 치과병원 원장이었던 와타나베 선생 등 3명을 초청했다. 우리 대학의 현황을 직접 시찰하고 난 그들은 “단국대가 이렇게 크고 한창 발전하는 대학인 걸 미처 몰랐다”며 치과병원을 충분히 성공시킬 힘이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후 우리 대학의 관계자들을 츠루미 대학에 보내 병원 설계, 교육과정 등을 자문받게 했다. 그들 역시 실무자들을 파견해 병원 부지, 입지, 원하는 기자재의 배치 등을 자세히 조사했다. 구체적 건축 계획이 잡히자 그들은 아예 자기들이 병원 건축 설계도 해주기로 했다. 사실 국내에 병원 건물을 설계할 전문가들은 그리 많지도 않았고, 설계비도 큰 돈이 필요로 하는 난제였다. 국내에 맡기면 수억 원을 상회하는 거액이 필요했다. 감당하지 못할 금액을 요구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있었는데 이시가와 선생을 비롯한 츠루미 대학의 전문가들은 이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중에 설계도 및 시방서를 완성해 이를 제출했는데 나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 건설 사업을 시작하면서 입수한 우리나라 대학의 치과병원은 1권으로 매듭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제출한 설계도는 그 분량이 10배를 상회하고 있었다. 대단히 정밀하고 꼼꼼한 설계도였다. 더욱이 그 설계도는 일본어가 아니라 모두 영어로 작성해 놓았다. 그들은 이 설계도를 만들기 위해 한번은 츠루미 치과대의 교수 및 치과진료장비 제작회사인 모리타제작소의 관계자 15명이 천안캠퍼스 병원 부지와 우리나라 치과병원을 시찰, 조사하고 가기도 했다. 이 때도 출장비를 부담하겠다는 내 제의를 거절하고 전액을 츠루미대학이 부담했다. 그들은 이렇게 정성을 들여 만든 병원 설계도를 우리 대학에 선선히 기증을 했다. 나중에 이만한 규모의 병원 설계비는 얼마나 필요한지 알아봤더니 달러 기준으로 약 40~50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들의 진정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2년 치과병원을 착공하고 나니 역시 재정문제가 걸림돌로 다가왔다. 병원 공사비는 어찌 어찌 꾸리겠지만 그 안에 들어갈 치과 의료장비를 수입해야 하는데 이를 해결하기가 막막했다. 사실 나는 치과대 설립과 치대 병원 신축을 기획하면서 우리나라 치의학계에 대한 조사를 했다. 국내 치의학은 의과대의 산하에 부속된 일개 전공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의료시설도 종합병원의 진료과목에 병합되어 있는 현실이었고, 치과 의사를 낮춰보는 편견이 있었다. 종합병원 내에서 인식이 그러니 진료시설 투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이를 바로잡고 싶었다. 독립된 치과대를 세웠으니 병원도 종합병원 규모의 독립적 시설과 시스템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를 돕는 일본 측 교수들도 내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독립병원을 세운다고 나섰으니 그 큰 규모의 병원에 들어갈 의료장비도 이에 걸맞게 채워줘야 하지 않겠는가. 

병원 착공 당시 우리 대학은 대대적인 교육시설 투자를 진행하고 있었다. 대학 본관, 천안캠퍼스 학생회관, 체육관, 과학관 등 건설 공사가 중을 잇고 있었다. 이 상황에 치대 부속병원에 설치해야 할 기자재 구입비를 산출해보니 미화 80만 달러가 필요한 것으로 나왔다. 당시 원화로 환산하면 6억4천 여 만원 안팎의 거금이었다. 당시 등록금이 1인당 40만원 정도였으니 1천6백 여 명의 학생이 내는 등록금을 합쳐야 의료장비를 들여올 수 있는 규모였다. 대학 수입으로 감당이 어려운 대형 투자였다. 지금이라도 하기 힘든 투자였다.

산업은행을 찾아가 대출이 가능한지 설득했지만 교육기관에 뭘 믿고 그 큰 돈을 대출하냐는 논리로 거절당했다. 고민 끝에 나는 다시 이시가와 선생을 찾아가 이를 털어 놓았다. 이시가와 선생은 이 문제를 들고 유수의 의료장비 전문 회사인 모리타제작소, 모리타 상회를 찾았다. 이 회사의 CEO인 모리타 대표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모리타 대표는 구입 대금을 일본수출입은행에서 우리 대학에 대출해주어 대금을 충당토록 주선했다. 혹자는 모리타 대표가 자기네 회사 장비를 팔려는 욕심에 대출을 주선하지 않았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사야 할 기자재는 모리타 회사만이 아니라 독일 제품도 상당히 많았다. 이 장비들을 포함한 구입대금 대출만이 아니라 대출 상환을 보증할 보증인이 필요했는데 이 보증문제도 모리타 상회가 서주기로 했다. 처음 보는 외국의 대학에 이같은 호의를 베풀기가 과연 쉬었을까? 설계도를 작성해 무상기부하고, 장비 구입비를 보증까지 서면서 대출하도록 도와주는 이 호의의 참뜻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치과병원, 치의학계에 새로운 기원을 열어달라는 대학인으로서의 동료애, 국경을 넘어 사회적 약자들에게 좋은 의료 서비스를 하자는 인간애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건물을 짓자 츠루미대학의 교수, 모리타 상회의 기술자들이 와서 꼼꼼히 장비를 설치하고, 점검했다. 의료 기자재를 설치하는데 1년이 필요했다. 이 기간 동안 이시가와 선생은 츠루미 치과대의 시설 담당 간부를 우리 치대병원이 개원때 까지 한국에 상주시키며 자문, 기술 감독을 하도록 했다. 우리대학에서 채재비 부담을 하려고 해도 절대 받아들이 않고 자신들의 비용으로 다 감당해주었다.

단국인의 도전정신, 일본 전문가들의 우의로 치과대 병원을 준공할 수 있었다. 그 때가 1984년 9월 경이었다. 개원 이후 단대 치과병원의 위용을 본 국내 치의학 관계자, 병원 관계자들은 시설과 규모에 감탄을 했고 입소문을 탔다. 견학 신청이 줄이어 병원 운영에 방해가 된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다른 대학은 우리 최과대의 시설을 보고 자기들의 현실을 성찰했다. 국내 치과대와 치과병원들도 시설 현대화 사업을 앞 다퉈 개시했다. 우리 대학 치과대 부속병원이 가져온 작은 성과인 셈이다.

다행히 처음 일본수출입은행의 대출조건대로 10년 간 분할을 해서 전액 상환을 했다. 사실 일본의 전문가들도 인구 13만 명의 소도시에 이만한 설비를 갖춘 치과병원을 세워 기대만큼 운영 수익을 거둘 수 있을지 염려하는 의견도 있었다. 인구가 50만 명은 되어야 안정적 운영이가능하다고 전망했다. 개원 초기에는 약간의 시련이 있었다. 그러나 개원할 때 최고의 의료진을 초빙했고 교직원 모두가 힘을 합쳐 무사히 대출금을 상환할 수 있었다. 

나는 이시가와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어떤 대가도 없이 큰 호의를 베푼 이시가와 선생에게 내 우정의 뜻을 전하고 싶었다. 1989년 3월 그가 오랜 교직생활을 접고 정년 퇴임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개교 42주년을 맞아 선생과 부인을 초청했다. 그리고 선생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증정했다. 총장인 내가 바치는 최고의 헌사인 셈이었다. 



현재 우리는 일본과 역사, 경제, 국제정치 등 여러 면에서 근 60년 만의 큰 갈등을 겪고 있다. 나 역시 일제 강점기에 나고 자란 세대로 마음 속에 남아있는 여한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나는 일본의 역사적 책임과 아울러 이시가와 선생같은 휴머니즘과 박애정신을 갖춘 의인이 많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우리의 이웃이다. 이웃과 싸울 수는 있지만 그를 적으로 내몰고 서로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새롭게 주고 받는 일은 피해야 한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역사를 평가하고 자성하는 일은 언제나 필요하다. 동시에 미래를 향해 마음을 열고 우정을 공유하며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한국과 일본이 함께 증진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일본을 이기는 길이고 조국을 발전시키는 길이다. 끝으로 이시가와 다카오 선생의 명복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