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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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 럭비선수 인연으로 탈냉전, 남북화해의 물꼬를 열다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9.07.11 (최종수정 : 2019.07.18)
조회수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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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대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다. 그 분과 나는 1932년 생으로 같은 나이이기도 하지만 대학시절 럭비선수로 활동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나는 서울대 사범대, 그 분은 육군사관학교의 럭비부 선수였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한 공사, 해사는 모두 스포츠를 통해 군인정신을 기른다는 교육 방침을 갖고 있어서 서로 경쟁심이 대단했다. 럭비 경기는 개인은 막강한 체력이 필요하고, 단체로는 빈틈없는 단합이 필수적인 종목이다. 공격과 수비의 역할이 분명하고, 과감한 전진과 후퇴하지 않는 감투정신이 럭비의 강점인데 이는 군인정신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 사관학교로서는 럭비를 교기처럼 떠받들 수밖에 없었고 럭비 선수는 사관학교의 주목을 받았다. 




나 역시 서울대 사범대의 럭비부에 속해있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문예반과 송구부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한국전쟁 때 학도의용군으로 전쟁을 겪으면서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격언을 몸으로 깨달았기에 대학에 진학해서는 럭비부에 입단했다. 서울대 사범대 럭비부는 일제시대부터 유지된 전통있는 럭비팀이었다. 평균 성적을 B학점 이상 유지해야 선수 생활이 허용되어서 선후배 모두 엘리트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사범대 럭비부는 또한 내 기억으로는 전쟁 중에 서울대가 공인한 운동부로는 유일했다. 그만큼 자부심이 강했다. 전쟁 통에 서울대 운동장을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서 운동 여건은 좋지 않았다. 따라서 그나마 멀쩡한 운동장을 가진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연습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육사 럭비부와 연습 경기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대회를 앞두면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육사 럭비부와 만나는 일이 매일이다 시피 했다. 그렇게 4년을 보내니 육사 선수들과 우정도 가볍지 않았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은 럭비부 주장이었으니 더 자주 만난 셈이었다. 특히 나는 스포츠 만이 아니라 공부에서도 노태우 전대통령과 인연이 있다. 노 전대통령이 육사시절에 법학을 배웠던 이광신 교수님이 계시는데 이 교수님은 내가 휘문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의 담임 선생님이셨다. 한국전쟁이 나자 이 교수님은 군복무를 치루느라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가셨고, 거기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광신 교수님은 그 뒤에 내가 우리 대학으로 초빙했고, 부총장을 지내시며 정년을 하셨다. 서울대나 단국대 교정에서는 아니었지만 나와는 또 다른 ‘학연’을 갖고 있는 셈이었다. 이같은 각별한 인연으로 그 분은 나를 변함없이 신뢰했고 올림픽 유치부터 북방정책, 남북 단일팀 협상 같은 중대사에서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내가 노태우 전 대통령과 서울올림픽 유치 캠페인에 나서게 된 첫 발자국은 전두환 전 대통령 때문이었다. 나는 스포츠를 통해 우리 대학의 젊은이들을 스포츠정신을 갖춘 지도자로 키우고 싶었다. 럭비, 씨름, 스키, 스케이트, 조정 등의 비인기 종목을 키운 것도 스포츠가 가진 교육적 기능을 인기 종목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내 소신 때문이었다. 그런 활동이 이어져 대한체육회 이사 겸 대학체육위원회 위원장(1977년~1983년)을 맡고 있었다. 제5공화국이 출범한지 얼마 안된 1981년 봄이었다.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동생이자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전경환 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형님께서 문교부(현 교육부 전신) 장관을 맡기고 싶어 하십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도 비슷한 제안을 받은 바 있었고 전두환 대통령과도 럭비선수로 같이 운동을 했던 인연도 있었다. 거기에 5공화국 출범에 공을 쌓은 여러 지인, 원로들이 나를 천거했다는 풍문도 들은 바 있었다. 물론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계나 관계에 발을 내딛지 않는다는 내 철학, 교육자가 권력을 가지면 결국 자신도 권력에 망가진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내 철학을 설파할 수는 없어서 “제가 허물이 많은 데 문교부 장관이 되면 다른 대학 총장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서 사양을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대한체육회장을 맡으라는 것이다. 

“나를 높게 평가하시는 건 고맙지만 대한체육회장은 상근직입니다. 대학 총장 일을 하기도 벅찬데 체육회장으로 상근하면 단국대학에 누를 미치는 일이니 양해해주세요.”

이렇게 설명했더니 다음에 한국올림픽위원회(KIOC) 부위원장으로 일해 달라는 요구가 왔다. KIOC 위원장은 대학체육회장이 겸직하도록 되어 있으니 부위원장이라도 맡으라는데 이를 거절하면 정부에 반대하는 총장으로 비칠까 염려해 수용했다. 당시 대한체육회는 유신정권 당시에 임명된 주요 인사들이 물러나면서 신군부 인사들이 빈자리를 채워나가던 일종의 과도기였다. 이 때 가장 큰 화두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학체육회를 중심으로 선언한 ‘올림픽 유치 사업’이었다. 


사실 올림픽을 ‘대한민국 서울’로 유치한다고 세계 스포츠계에 선언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을 당하면서 스포츠계는 혼란 속에 손을 놓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박정희 정부 시절에 우리나라는 1970년 아시안게임을 서울로 유치했다가 파기한 경력도 있었다. 아시안 게임 유치는 성공했지만 경제개발 우선론과 무장간첩사건 등이 겹치면서 벌금 25만 달러를 물어내며 개최권을 반납했다. 세계 스포츠계에서 큰 비난을 받았고 신용을 잃어버린 계기가 되었다. 국내 상황이 어렵다고 기껏 올림픽 유치를 세계인에게 공언하고 나선 마당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적 자존심과 신뢰성의 문제가 될 판이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올림픽 유치 캠페인을 제대로 전개할 형편도 아니긴 했다. 우선 중심이 될 대한체육회가 흔들리고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존 당시 그의 측근이었던 박종규 경호실장이 육영수 피격사건으로 낙마를 해 앉은 자리가 대한체육회장이었다. 올림픽 유치 사업은 박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결정된 사업이었다. 나는 당시 대한체육회 이사로 있었는데 박종규 회장이 검토하던 서울올림픽 유치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었다. 올림픽이 단순히 ‘달러를 소비하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경제와 문화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국가개발의 계기’라는 점을 역설했다. 박종규 회장은 “그렇다면 당신이 나랑 같이 박 대통령께 가서 올림픽 유치 필요성을 설명하자.”는 그의 지시 아닌 지시를 받고 이사 자격으로 동참해 같은 박대통령에게 논리를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 뒤 당시 중앙정보부가 분석에 나서서 서울올림픽 유치 가능성이 적지 않고, 경제개발에도 이롭다는 보고서가 나와서 올림픽 유치를 공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올림픽 유치 선언이 1979년 3월에 있었는데 바로 그해 10‧26이 발생해 서울의 봄을 거쳐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단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이 사퇴를 했고, 조상호 전 청와대 의전실장이 후임으로 와있었다. 올림픽 유치 사업을 하자던 주역이 없어졌으니 사업의 추진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아예 서울올림픽 자체를 반대하는 쪽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직후 측근들에게 서울올림픽 유치 활동를 중단시키고 새마을운동 역시 계승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전두환 정권은 유신정권의 후계자가 아닌 제5공화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의 상징인 새마을운동을 이어받으면 새로운 정부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는 정치적 문제라기 보다는 올림픽을 유치하면 도로, 경기시설 등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데 당시 극심한 불경기인 만큼 국가 재정에 무리를 주는 사업에 돈을 쓰지 않겠다는 경제적 계산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1979년 12월에 IOC로부터 1988년 올림픽 유치 후보도시로 공인받았음에도 1981년 2월, 제5공화국 출범 뒤에는 경제개발에 방해가 된다는 논리를 앞세운 고위관료들의 반발로 유치 신청 철회라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한체육회 부회장직을 맡은 지 한 달도 안 된 시간에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있던 이상주 수석이 나를 불렀다. 이 수석은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입니다. 서울올림픽 유치 사업을 포기한다는 결의를 해주십시오.”라는 부탁아닌 부탁을 했다. 대한체육회와 한국올림픽위원회가 공동 이사회를 열어 박정희 정부에서 공표한 서울올림픽 유치를 포기한다는 결의를 통과시키고 공식화해달라는 것이다. 서울올림픽을 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뜻임을 강조했지만 나는 따르지 못한다는 의지를 명확히 밝혔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이는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한 공언입니다. 지금 어려운 경제현실을 들어 올림픽이 경제력을 탕진한다는 주장을 경제 관료나 정치인들이 대통령께 여러 부정적 건의를 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만 해도 동경올림픽을 하고 나서 일본 상품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확 달라졌고 그래서 수출도 더 살아났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경제인들이 앞장서서 지금 1988년 나고야 올림픽을 유치한다고 저 난리를 치는 것 아니겠어요. 이코노믹 애니멀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본능적인 장사감각을 가진 일본이 손해를 본다면 저렇게 관료, 기업, 정치인들이 하나로 뭉쳐서 나고야 올림픽을 열게 해달라고 인심을 얻으려 전 세계를 누비고 있겠습니까?”


이상주 수석은 내 말의 취지를 이해는 하면서도 대통령의 지시이니 수용해달라며 헤어졌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조상호 대한체육회장을 만났다. 

“회장님은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의 의전실장을 지내신 분이잖습니까. 정권이 바뀌어도 박 대통령이 국제무대에 공언한 바를 이제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회장님이 나서서 청와대를 설득하셔야 합니다.”

조상호 회장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일단 올림픽 유치 포기를 위한 이사회 결의는 지연시키면서 전두환 대통령의 인식을 바꾸는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노태우 당시 정무 제2장관의 도움이 컸다. 조상호 회장과 나는 대한체육회를 통해 올림픽이 국가발전에 미치는 긍정적 사례를 역대 올림픽의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하여 보고서를 만들어 청와대에 제공했다. 노태우 장관도 이에 찬동해 전두환 대통령의 가까운 거리에서 서울올림픽의 중요성과 효과를 설명해나갔다. 자신의 소관 분야인 외교와 안보 쪽의 논리로 서울올림픽이 세계인의 축제인 만큼 이를 준비하고, 개최하는 7년 동안 북한의 대남 침략 위협을 감소시킨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같은 안보논리에 적극 동감했다. 

전 대통령은 다시 마음을 바꿔 서울올림픽 개최를 결심했다. 우리보다 국력이 앞선 일본(1980년 당시 일본의 GNP는 우리나라의 16배였음)보다 유치 캠페인도 늦게 시작했으니 유리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쪽에서는 중앙정보부가 백업을 하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같은 기업 총수, 서울시장 등 민간인이 전면에 나서도록 했다. 나고야 올림픽 유치위원들은 한국을 우습게 보고 자신들이 승리한 듯이 기세를 과시했다. 

노태우 장관은 나를 불러 면담을 하며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제 한국과 일본의 국가적 자존심을 건 싸움이 됐다며 자신을 도와 IOC 위원들의 마음을 돌리는 득표 활동에 전력을 기울여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1981년 7월 루마니아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의 한국선수단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대회 기간 내내 나는 선수단의 성적보다도 해외 스포츠계 인사들에게 우리나라가 올림픽 유치에 진정성을 갖고 있으며 얼마든지 좋은 대회를 치룰 자신이 있다고 역설하고 다녔다. 힘있는 국제 스포츠계 인사들은 아시안 게임 반납 등의 과거를 예로 들며 우리 한국이 과연 진짜로 올림픽을 유치하겠다는 각오가 있는지를 의문시하고 있었다. 유치 활동이 확실한 전망을 보이지 않아 안절부절하고 있던 1981년 여름이었다. KOC의 김운용 부회장이 나에게 정보를 주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장 총장님, 제가 5월부터 유럽, 아시아 지역의 IOC위원들을 만나고 돌아왔잖아요. 어느 정도 한국의 올림픽 유치에 대한 진정성은 믿게 되었는데, 중동지역 아랍 국가들은 대부분 일본 나고야에 마음이 기울어 있더라구요. 이대로 가면 투표단이 82명인데 한국을 지지하는 위원들은 25명 안팎일 겁니다. 지지자를 더 늘려야 하는데 제가 알아보니 쿠웨이트의 쉐이크 파하드 NOC위원장이 핵심입니다. 이 양반에게 장 총장님이 단국대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시면 어떨까요? 그러면 본인에게도 영예로운 일이고 방한 기간 중에 우리가 잘 설득하면 한국에 친근감을 가질 테고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흔쾌히 응낙했다. 쉐이크 파하드 위원장은 쿠웨이트 왕의 막내 동생이었다. 아시안 올림픽위원회를 관장하는 책임자이고 막강한 권력과 경제력을 갖춘 아시아 스포츠계의 리더였다. 아시아 IOC위원들, 특히 중동국가에 대한 지배력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전통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아 친이스라엘 정책을 유지한데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반이스라엘, 친아랍 정책을 지켜온 북한이 더 가까운 우방인 셈이었다. 그를 한국지지로 돌리면 15표 안팎은 쉽게 일본 지지에서 이탈할 것이고 이는 한국의 득세를 의미하는 일이다. 나는 김운용 부회장에게 교섭을 해달라 부탁했다. 결국 성사되어 방한을 했다. 자신의 전세기를 띄워 가족, 친지, 참모들을 다 데리고 왔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귀국 이후 그는 서울 개최 지지로 방향을 틀었다.

김운용 KOC부회장과 손을 잡고 국제 스포츠 리더들을 친한파로 돌리는 일은 또 있었다. IOC 부위원장을 지내고 있던 코트디부아르(영어식은 아이보리코스트)의 루이스 귀란도 응디아예 위원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뜻을 돌리게 했다. 귀란도 위원은 주 캐나다 대사로 일하던 이였다. 서부아프리카 IOC위원들을 리드한다는 귀뜸을 받고 초청을 해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런 일들은 주로 김운용 부회장, 노태우 장관과 손을 잡고 이뤄졌다. 그들을 한국으로 불러내어 섭외를 할 때 체육단체나 국가기관의 초청장을 내밀 수는 없지만 대학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북한은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하면 체제경쟁에서 뒤떨어진다는 경계심에서 한국의 유치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비동맹 국가나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에 대한 우호적 영향력을 이용해 일본 나고야 개최로 결론 나도록 주력했다. 냉전시대의 경쟁은 민족도 뒤로 돌리는 힘이 있었다. 아랍과 아프리카에 대한 북한의 외교력이 적지 않았던 상황에서 두 스포츠 지도자를 돌려세우는데 단국대의 명예박사학위 수여는 큰 동기가 된 셈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1981년 9월 바덴바덴 총회에서 서울올림픽 개최라는 기적이 탄생한 셈이었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나자 줄이어 서울아시안게임 개최권도 한국에게 굴러왔다. 서울올림픽에서 보여준 우리의 추진력을 보고 경쟁국가가 나서지 않은 결과였다. 노태우 장관은 국제스포츠 행사를 착실히 준비하자는 취지에서 새로이 설치된 체육부의 초대 장관으로 임명되고 이어 내무부 장관을 지내더니 1984년에 대한체육회장과 KOC위원장에 올랐다. 관계와 민간단체를 거치며 서울올림픽, 서울아시안게임을 총괄하는 자리를 역임하고 있었다. 

나는 유니버시아드 선수단 단장, 아시안 게임 및 올림픽을 개최하는 나라가 의무적으로 시행하는 세계 스포츠 과학학술회의 주관대학의 총장으로 분주히 민간 스포츠 외교 활동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5년 들어 IOC위 주선으로 서울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납북체육협상이 열렸다.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열린 회담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 회담에서 김종하 KOC 위원장이 수석을 맡았고 KOC 부위원장인 나는 차석으로 회담에 참여했다. 결실을 맺지 못한 회담이었지만 북한의 논리와 회담 진행방식, 우리 측의 전략이 가진 장단점을 숙지하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서울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좋은 경험을 한 것이 있다. 우리나라 에스페란토협회 회장으로 중국에 들어갈 수 있었고 공산권 국가와 교류의 작은 구멍을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에스페란토어는 19세기 말에 폴란드의 의사가 창안한 국제어이다. 언어적 구성을 단순화시켜 세계인이 배우고 쓰기 쉽게 만든 인공언어이다. 나는 언어를 통해 다른 나라 사람들과 격차없이 언어를 습득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1980년쯤부터 학습을 시작했다. 한창 활동을 펼칠 때는 우리 대학에 에스페란토 수업을 정식 교과목으로 만들어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스페란토어협회가 내부 갈등을 겪다가 나를 회장으로 추대해 1982년부터 한국협회장을 맡고 있었다. 

에스페란토 협회는 1년에 한번 씩 세계대회를 열어 관련 사업들을 논의하는데 1984년 총회는 중국에서 열렸다. 당시 미국과 소련을 줌심으로 한 냉전이 가열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에스페란토어는 인종, 이념, 국경을 초월해 인류애와 평화를 지향하자고 생긴 언어여서 총회 역시 서구권, 동구권을 가리지 않고 돌아가면 열렸다. 즉 엄격한 비자나 입국심사가 일상화된 사회주의 국가에 입국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한국 대표로 자연스럽게 중국의 비자를 받고 북경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중국은 우리와 비수교 국가이고, 친북한 국가이며 한국의 적성 국가였다. 당연히 북한의 주재요원들이 나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 요원인지, 외교관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북한 요원들은 내가 머무는 호텔까지 찾아와 우리에게 온갖 욕설과 협박을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왔느냐, 죽고 싶냐”는 논지였고 대회장도 가지 못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중국 공안당국에 항의 겸 신변보호를 요청하여 대회장에 나갔고 에스페란토 말로 연설을 하였다. 


사실 이렇게 대회 참가에 애를 쓴 이유는 에스페란토 어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이 대회를 통해 동구권 국가에 대한 교류의 실마리를 만들고픈 희망 때문이었다. 중국이라는 거대 공산국가에 당연히 동구권의 다양한 인사들이 참가할 것이 확실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당시 대한체육회장으로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주도하고 있었다. 1984년 LA올림픽에 동구권 국가들이 불참했으니 서울올림픽에는 반드시 참여토록하는 것도 중요한 성공요인이었다. 나는 이 점에 착안했다. 정치적인 문제는 담지 않은 순수하게 한국의 산업발전 상황, 문화 수준을 홍보할 브로슈어를 에스페란토어로 만들어 북경총회에서 배포하고, 회원국가의 지도자들에게 발송하자는 생각이었다.

내 제안을 들은 노태우 회장은 대환영을 했다. 많은 돈이 드는 일이었지만 노태우 회장의 지원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나는 에스페란토 어를 이용해 우리나라의 문화, 산업시설, 아름다운 도시 풍경, 교육시설과 산업제품 등을 컬러로 인쇄해 갖고 갔다. 물론 동구권에 중점적으로 발송하기도 했다.

엄혹한 냉전시대에 남한의 발전상을 적성국가인 중국의 북경 한복판에서 홍보할 수 있었으니 북한 요원들이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할 만하지 않았는가. 과연 한국 홍보책자는 바라던 결과를 가져왔다. 대회에 참가한 헝가리 대표단 가운데 부다페스트 공과대의 부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야노쉬 긴스트러(Janos Ginsztler) 박사님이 있었다. 이 분이 홍보 책자를 보고는 한국과 우리 대학에 호감을 갖게되어 귀국 뒤에도 편지를 보내와 교류를 하게 되었다. 우정 어린 서신이 오고 가면서 점차 양국간 수교관계는 아니지만 우선 양 쪽 대학이라도 자매결연을 맺고 학생들을 교류하자는 데 합의가 되었다.

그 때 노태우 대한체육회장이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고 1987년 12월 직선제 개헌과 대통령선거를 거쳐 이듬해 2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5개월 만에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공표했다. 7‧7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은 <북방정책>으로 가시화되면서 기존관념을 넘어선 대담한 외교관계를 열어갔다. 그 첫 관문이 헝가리였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헝가리 부다페스트공대와 자매결연을 맺고 학생들을 교류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윽고 7‧7선언 이후 첫 결실인 주 헝가리 상주대표부가 설치되고 이듬해 2월에 주 한국 헝가리 상주대표부가 설치되었다. 분단 이후 최초의 동구권 국가와의 수교였다. 


나는 1989년 2월에 부다페스트 공과대를 방문했다. 부다페스트 공대는 외형으로 봐서는 규모가 컸지만 자세히 보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기자재는 많이 낡았고 새로 도입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공산화 이전에는 과연 노벨상을 수상한 학자들을 배출하고 유렵의 명문대라 자부할만한 대학이라는 전통이 담겨진 캠퍼스였다. 지금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와 교류한 부총장은 매우 인자하면서 실용적인 분이라는 것을 대화에서 엿볼 수 있엇다. 그는 우리 대학의 홍보물과 한국을 알리는 잡지를 보고 그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우리 대학에는 원자로가 있는데 몇 년 전에 고장이 났지만 고칠 돈이 없어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걸 고치면 헝가리 만이 아니라 동유럽의 이공계 학생들을 위한 재교육기관을 설치해서 공학교육에 진일보시킬 수 있을텐데...”

현실을 안타까워 하던 그는 내가 공감을 하자 1백만 달러 만 지원해달라는 말을 꺼냈다.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No’라고 하자니 선량한 학자에게 실망을 주는 것 같고, ‘Yes’라고 하자니 우리 대학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 떠올랐다. 일단 나는 우리 대학도 사립이라 학부형의 등록금에 의존하고 있으니 교비지원은 어렵다고 솔직히 말했다. 대신에 귀국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서 꼭 도움이 되는 길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또한 이런 지원 사업을 하려면 우선 양교가 자매결연을 맺고 서로 학생도 교환하면서 한국의 지원을 유도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자매 결연을 맺고 돌아왔다.

 나는 귀국하는 즉시 이상희 과학기술처 장관을 만났다. 부다페스트 공대를 후원하여 두 나라가 국교를 맺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자고 역설했다. 헝가리부터 한국 기업과 상품이 진출하면 동구권으로 문호가 더 열리지 않겠냐고 지원을 호소했다. 이상득 장관은 나의 논리에 공감했다. 지원 가능자금을 검토한다 하더니 300만 달러 정도 가능하다고 답을 줬다. 그러면서 대통령도 보고를 듣고 궁금해 한다며 직접 면담을 하며 여러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노 대통령과 오랜만에 면담을 했다. 대학 간의 민간 교류가 확대되어야 헝가리나 동구권 지식인들에게 반공국가라는 고정 관념을 말금히 털어내어 마음을 사고, 이를 통해 대기업들이 진출하여 경제 교류로 확산시키는 방안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오랜 인연이 있어서인지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었다. 면담 뒤에 지원 액수가 300만 달러에서 500만 달러로 증액되었다. 

주선을 하는 나로서는 부다페스트 공과대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알릴 수 있어서 기쁘고 감사했다. 이 지원금으로 부다페스트 공대는 원자로를 고치는 숙원사업을 해결했다. 또한 주변 동구권 국가의 인재들을 불려 들여 기획했던 공학생 재교육 과정을 신설했다. 그리고 단국대의 학생들을 부다페스트 공과대에 교환학생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이 때 파견한 3명의 학생 가운데 한 명인 지금 우리 대학에서 근무하는 현준원 군은 자연과학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있었다. 현준원 군은 석사학위 과정에 입학해 열심히 공부하여 부다페스트 공대에서 성실한 학생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현준원 군은 1994년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동구권 유학생이면서 사회주의 국가에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한 당시 내가 삼성문화재단의 이사로 있었던 인연으로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그룹의 헝가리 진출을 권유해 현실화했는데 이 때 현준원 학생이 통역을 맡아 맹활약을 하기도 했다.

우리 학생들이 헝가리로 나간 이후 헝가리에서도 5명의 학생들이 우리 대학에 들어왔다. 동구국가에서 온 최초의 교환학생이었다. 어찌보면 귀한 손님같은 학생들인데 막상 그들이 머물 숙소가 마땅치 않았다. 우리 대학 서울캠퍼스에 운동부 기숙사는 있지만 유학생을 위한 기숙사는 없었던 탓이다. 한국어나 영어가 익숙치 않은 학생들이라 아무데나 의탁시킬 수도 없었다. 화곡동에 있던 내 집을 그들의 기숙사로 내놓았다. 나는 아파트로 전세를 얻어 이사를 갔다. 화곡동 집은 자연스럽게 대학에 기부를 한 셈이 되었다. 화곡동 집은 대지가 160평, 건평이 180평인 큰 집이었다. 두 세 명이 잘 수 있는 방이 7개나 있었다. 이 집은 선친이 물려주신 유산과 내 아내가 저축한 돈으로 지은 것이다. 한남동에 있던 집도 법선재로 기부한 뒤여서 평생 산다는 각오로 내 딴에는 든든하고 고급스럽게 짓겠다는 결심으로 공사를 감독하며 마련한 집이다. 이역에서 고생하는 헝가리 유학생들이 집이 따뜻해서 좋다는 말을 들으면 스스로 더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내놓은 집이지만 애정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 지금의 죽전캠퍼스를 신축하는 과정에서 건설 감리비가 급히 필요하다는 이유로 기부자인 나와는 상의도 없이 매각이 결정되었다. 이윽고 번개 불에 콩 구어 먹듯이 하루 아침에, 그것도 헐값에 팔리고 보니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북방정책을 성사시키느라 뛰어다니면서 정작 내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모습까지 봐야 했으니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옛말이 실감된다. 


헝가리와 교류를 시작하며 북방정책의 실마리를 푸는 과정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나의 추진력이나 이념을 넘어서는 실용주의에 더 큰 신뢰를 받은 듯 했다. 바로 1989년 3월에 시작되는 <북경 아시안게임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의 남측 수석대표로 나를 임명했다. 나는 한양대 체육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학래 교수(당시 KOC 상임위원)를 차석대표로 앉히고 회담을 개시했다. 북경아시안게임이 2년도 안남은 상태에서 북한이 제의해 열린 회담은 1989년 3월 9일부터 1990년 2월까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본회담 9차례, 실무대표 접촉이 6차례 이뤄졌다. 남북한 모두 굉장한 관심을 받으며 회담을 진행했고, 나는 체력의 한계를 느낄 정도로 신경과 에너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북단일팀의 호칭, 단기, 단가, 공동단장제, 선수단 구성 및 실무 사무국 설치 등의 구체적 합의를 끌어낸 것은 남북 양측 모두 자부할만한 성과였다. 회담을 통해 얼개를 완성했지만 최종 협상의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시점에서 북측은 더 이상의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남측도 원로 체육인들은 해당 경기종목이 단일팀 구성으로 메달을 못 따면 뒤따를 불이익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부 쪽에서는 북경아시안 게임에서 종합순위 2위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 일본에 질 수 없다는 주장도 득세를 해갔다. 

이 자리에서 소상하게 밝히기 어려운 여러 가지 정치적 셈법, 우여곡절이 얽히면서 결국 회담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협상을 통해 많은 문제가 풀렸고, 그 성과는 북경 아시안 게임으로 이어졌다.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정동성 당시 체육부 장관이 나를 만났다. 세 가지 지침을 받았다. 하나, 북경 아시안 게임의 선수단장을 맡아달라. 둘, 북경 아시안게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도록 중국과 우호관계를 구축해달라. 셋, 아시안 게임이 끝나면 이어지는 국제대회에서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참가하도록 비밀리에 성사시키라는 것이었다.



정동성 체육부 장관은 유도부 출신으로 기백이 씩씩하고 성격이 활달했다. 스스로 대통령의 지시라면서 “장충식 총장님이 좋은 성과를 거두도록 도울 수 있는 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나는 이미 유니버시아드 단장을 네 번이나 역임을 했다. 그 당시 헝가리, 몽골, 남북체육협상 등으로 육체적으로 지치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었다. 좌절한 남북체육협상의 불씨를 되살리고 싶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이 결국은 남북간의 화해로 이어져야 그 값어치가 살고, 우리 민족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다섯 번째 선수단장 직을 수락하기로 했다.

1990년 9월, 한국선수단장으로 북경을 입성하고 나니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집무실이 준비되어 있었다. 겉은 김우중 회장의 집무실이지만 남북한 협상 관계자들이 여기에서 비밀 회담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놓았다. 언론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협상을 할 수 있어 얘기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시안 게임의 개막식 다음날인 9월 23일 남북체육장관 회담이 열렸다. 양측 장관은 단일팀 구성을 한다는 문제에 합의를 했다. 원칙은 정하고 각론은 다시 “남측은 장충식 수석, 이학래 차석이, 북측은 김형진 수석과 박시남 차석이 만나 타결키로 했다.”는 결론을 공유했다.  우리 대표단은 이미 지난 회담에서 상당한 합의를 이뤘기에 이번 회담은 더욱 스피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결국 9월 29일 나와 김형진 수석이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남북통일축구경기>를 갖기로 했음을 선언했다. 협상 가운데 어려운 점은 취재언론인의 규모를 제한하는 일이었다. 북측은 취재단을 7명으로 제한하자고 했지만 나는 그들의 강력한 주장을 성의껏 설득해 12개 언론사 20명으로 확대했다.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쉴 때 청와대에서 긴급 훈령이 왔다. 정동성 체육부 장관이 우리 선수단과 평양에 같이 참석할 수 있도록 교섭하라는 지시였다. 원래는 선수단장인 내가 선수단을 이끌고 방북하기로 합의한 문제였다. 북측 대표와 얘기하니 난색을 보였다. 협상이 끝난 사안이라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고, 이를 번복할 결심은 ‘최고 수령 동지’만이 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북경에 주재하는 북한 대사를 면담하고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간절히 호소를 하자 김정일 위원장의 재가를 받았다며 정 장관의 참가로 변경할 수 있었다. 

나 역시 해방 후 최초로 열리는 통일축구 경평전에 왜 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나는 나의 입장을 단 한 번도 내세우지 않았다. 나는 협상을 성사시키는 사명을 받았으니 정부의 뜻을 이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일이 마무리되자 노태우 대통령은 축하의 전문을 보내주고 격려해주었다.



중국과의 수교를 현실화하려면 중국에 남한이 가진 힘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는 진정성을 전달하는 일이 중요했다. 북경 아시안 게임은 달리보면 해방 이후 단절된 남한의 젊은이, 그 배경이 되는 한국사회의 역량을 중국의 심장에서 펼쳐보이는 기회의 장이기도 했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이기도 했다.  

마침 북경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있었던 장백발(張百發) 체육위원회 부위원장(우리나라 차관급)은 나와 오랜 인연이 있었다. 그는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88 서울올림픽에 맞춰 열린 스포츠과학 학술회의에 중국대표단을 인솔하고 참석하여 많은 활동을 펼쳤다. 이 회의의 조직위원장인 나와는 각별히 자주 만났는데 성(姓)이 같은 장 씨에다 나이도 나보다 훨씬 위라 사석에서는 나를 동생이라고 호칭하면서 가깝게 지냈다.

그와 만나다 보니 북경 아시안 게임이 눈앞에 왔는데 가장 큰 걱정은 자동차 문제라는 고백을 들었다. 각국 선수단 단장과 임원들이 사용해야 할 차량이 500 여대 정도 필요한데 예산 형편이 감당키 어려워 택시를 활용할 실정이라 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자동차를 생산하기 힘들었고,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자동차 생산 국가였으니 이를 수입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장 부위원장은 한국에서 자동차를 생산하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통사정하였다. 나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님을 찾아가 이 문제를 전달했다. 정주영 회장은 도량이 큰 기업가였다. 현대차 500대를 북경대회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조직위원회는 대단히 기뻐하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뜻을 나와 정주영 회장에게 전해왔다. 

내가 북경대회에 선수단장으로 참석하였을 때 장백발 위원장이 가장 크게 기뻐했다. 한국선수단에 관련된 일이라면 조직위원회는 내 요구를 대부분 다 들어주었다. 우선 선수촌에 입촌하려고 남북한 선수단의 숙소 위치를 알아보니 동과 서, 양쪽 끝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혹시나 가까이 배치했다가 불상사가 일어날까 염려해 격리하다시피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같은 민족인데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젊은이들의 마음이 어떻겠느냐 설득했다. 그들은 선선히 나의 요구를 들어줬다. 대회 기간 중에 남북한 선수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나중에는 반가운 인사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지기도 했다. 

또한 선수촌 가까이 한식 식당을 차리도록 허가를 내달라 부탁을 했다. 대회 기간 중 한국 손님들이 많이 올 텐데 식당이 멀리 있으면 귀빈들과 관광객들이 불편할 거라며 협조를 구했다. 이 역시 허가를 받아내 많은 이들이 한국 음식을 먹으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1990년 10월 7일 북경 아시안 게임은 막을 내렸다. 한국은 중국에 이어 종합순위 2등을 차지했다. 나는 처음 선수단장을 맡으며 부여받은 노태우 대통령의 지침을 모두 마쳤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곧 다가올 한중수교를 예감하면서 중국 정부 관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대회 기간 중 한국을 도와줘 감사하다는 인사를 나눴다. 그 때마다 중국 측에서는 한국이 500대의 차량을 지원해준 것을 사례로 들며 한국 측의 지원에 거듭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이에 앞서 9월 29일 남북 통일 축구를 공표하면서 남북한 대표단이 기자회견을 끝나고 서로를 포옹했을 때의 감격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찐한 격정이 서로에게 전달되면서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북경을 떠난 뒤 나는 노태우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했다. 여러 가지 수고를 했다며 오찬을 대접받는 식사 자리였다. 2시간의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노태우 대통령과 나, 단 둘만 있는 편안한 자리였다. 북경 아시안 게임을 치루면서 진행된 여러 가지 일들, 남북협상의 향후 전망, 중국 인사들의 한국에 대한 생각 등을 부담 없이 전하고 듣는 자리였다. 나는 마음 속에 오랫동안 품어왔던 얘기를 꺼냈다. 

“노 대통령님, 우리나라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시고 물러나 편안한 세월을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님을 보면 더욱 걱정이 되고 안타깝습니다. 대통령 임기를 끝내면 정치나 권력에 연연해 하시지 말아야 합니다. 노 대통령님이 새로운 길을 열어보이세요. 제가 단국대 총장직을 물러날 테니 대통령께서 우리 대학의 총장으로 오세요. 그래서 대통령 재임 때 쌓은 인덕으로 단국대를 발전시켜주세요. 대통령님이 총장으로 오시면 대학에 발전기금을 내려는 이들도 많아질 겁니다. 대통령님도 정계나 기업계가 아닌 대학의 교육자로 계시는데 누가 사시로 볼 수 있겠습니까.”

내 진지한 주장이 통했을까. 노 대통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더니 이윽고 대답을 했다. “장 총장님 말씀이 맞아요. 나는 전두환 대통령처럼 일해재단을 만든다거나 참모들과 어울려 다닐 뜻이 없어요. 아내랑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제가 퇴임하면 단국대 총장으로 갈께요. 장 총장님 약속 지키시는 겁니다.”

이렇게 언약을 주고 받으며 오찬 자리는 즐겁게 끝이 났다. 

1992년 8월 24일 우리나라와 중국은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리고 한달 뒤인 9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중국 북경에 발을 내딛었다. 그때 한중 교류가 활발해지는 것을 상징하듯 북경 한복판에 서라벌이라는 한식당이 문을 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났다. 내가 느끼는 남다른 감회를 노태우 대통령도 공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치하를 주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체육부 장관으로 다른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건넸다. 물론 나는 대학에 있고 싶다는 대답을 했다. 그것이 나로서는 최선의 길이니까.

임기가 1년을 채 남기지 않았을 때도 노 대통령은 나에게 총리직을 제의했다. 무엇이 그 분으로 하여금 나에 대한 믿음을 그리 크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제안 역시 거부했다. 대신에 내가 고려대 대학원을 다닐 때 학생처장을 역임하신 현승종 박사님을 추천하였다. 그 분이 가진 담백한 인품과 제자를 아끼는 마음, 소탈한 자세라면 정권 과도기를 무난히 이끌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현 박사님은 노태우 정권 말기의 화두였던 중립내각의 총리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나와 노태우 대통령만이 아는 비밀이었는데 나중에 현 박사님이 대통령에게 자신을 어떻게 총리로 임명하실 생각을 했냐고 묻자 이를 알려줘다고 한다.

나는 노 대통령이 단국대 총장으로 오라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를 실천한다는 약속을 믿었다. 럭비 선수로 함께 땀 흘렸던 남자로서 그는 분명히 대학의 문을 두드릴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퇴임 이후 노 태통령은 단국대로 온다는 약속을 미루었다. 아니 갓 출범한 김영삼 정부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부는 바람은 점점 강해지더니 수천 억 원에 이르는 정치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노 전대통령은 철창 안으로 전락했고 단국대 총장 부임의 약속도 흐려졌다. 대학시절 럭비 선수로 시작해 대통령과 체육인으로 함께 일을 하며 통일을 위한 일을 함께 했으니 보통 인연이 아니지 않을까. 

이후로 노 대통령은 수감 생활을 하고나서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은둔을 하고 있다. 뇌 질환을 앓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권력의 속성은 늘 우리 같은 범상한 사람의 마음에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기 마련인가보다. 부디 건강하고 복된 나날이 돌아오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