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전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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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사랑으로 풍성해진 '경주 9남매'의 성장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8.11.29 (최종수정 : 2018.11.30)
조회수 39,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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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0년이 된 건가. 1999년의 설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TV를 보고 있었다. 생활정보를 중심으로 제작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경상북도 경주시의 외곽에 살고 있는 가족들의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의 삶은 그저 휴식 삼아 화면을 바라보던 나의 가슴에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화면에 나오는 가족은 부모님과 9남매로 이뤄져 있었다. 9남매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장녀가 18살인가 했고, 막내는 4살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20년 전이지만 흔치 않은 대가족이었다. 주소로는 경주시이지만 양남면이라고 울산시 방향으로 도심지에서 한참 떨어진 산골이었다. 당시 초등학교를 다니려 해도 5Km를 걸어가야 하는 궁벽한 농촌이었다. 그러다보니 농사를 한다지만 9남매의 생계를 꾸리는 일이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먹고 사는 일의 고단함이야 그렇다 치지만 내 마음에 와 닿은 점은 그런 시련이 아니었다. 그 시련 속에서도 푸르고 어여쁜 마음을 잃지 않는 부모님과 자녀들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자기가 할 일을 맡아서 씩씩하게 제 몫을 다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일손을 덜어드리려 농사부터 가사까지 뭔가를 감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20년 전이라지만 이미 각박한 도시생활에 찌들었던 당시 사회상에 비춰보면 맑은 공기를 호흡하는 느낌이었다. 

더욱 대단한 점은 바로 부모님이었다. 육아를 하며, 또 생계를 꾸리다보면 지치고 힘든 낯빛과 기색을 보여야 하는데 이 분들은 싱글벙글 밝은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방송 내용 속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9남매 키우느라 힘드시지 않냐”고 묻자 “사실 13 남매를 낳으려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해 아쉽다”고 웃으며 답했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서도 “사람은 다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갖고 태어나는 법이니 미리 걱정할 일이 아니다”라는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세상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진실한 고민과 실천을 하는 과정에서 얻은 신앙의 결과라는 게 마음으로 다가왔다. 

그런 점이 신선한 충격을 주었지만 내가 큰 감동을 받은 부분은 또 있었다. 산골의 어둔 밤이  가고 아침이 되자 한 가족은 밥상에 다 모였다. 아버지가 이끄는 데로 아이들은 모두 성경책을 중심으로 모여 앉아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었다. 작은 방에 밥상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성경책을 놓고 기도를 하는 모습은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소박하지만 그 속에는 든든한 신앙의 기둥과 어질고 착한 부모님, 그리고 온전히 사랑으로 축복받고 자라는 아이들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나는 같은 기독인으로서 저 어린 아이들이 부모님의 사랑에 더해 사회의 보살핌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다. 저 아이들은 분명히 우리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어질고 착한 부모님의 학비 부담을 덜어줘 9남매가 안심하고 공부하려면 장학금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내 힘이 부쳐 대학까지 보장할 수는 없지만 고등학교 까지 학비를 해결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이 프로그램을 시청한 데는 하나님의 뜻이 작용했다는 믿음이 생겼다. 


이 무렵 나는 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나는 1995년부터 우리 대학의 서울캠퍼스를 지금의 죽전으로 이전하려는 사업을 개시했다. 하지만 외환위기라는 미증유의 국가적 위기에 부딪혀 이전 사업 자체가 와해될 위험에 당면하고 있었다. 학교와 재단 모두 극도의 재정난을 겪고 있었다. 나는 기독교로 개종한지 얼마 안 되지만 매일 하나님께 기도를 하며 내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나와 우리 대학을 도와줄 힘이 간절히 필요했다. 누구를 돕기 이전에 내가 도움을 받아야 할 시련의 연속이었다. 하나님에게 매일 위기를 이겨낼 힘을 달라 탄원하던 그 시기에 하나님은 ‘나를 도와줄 사람’보다 ‘내가 도와야 할 사람’을 보내줬다. 

어질고 선한 부모님은 TV에는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으로 비췄겠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얼마나 큰 간절함이 있었을까. 9남매와 살아가면서 자녀들을 키울 걱정이 왜 없었겠으며 미래에 대한 불안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그 어려움 속에서 가족에 대한 존경과 사랑, 신앙에 대한 강한 의지로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들을 만나고, 그들을 도움으로써 내가 누리고 가진 것이 결코 적지 않음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이를 통해 나의 부족함을 채우라는 것이 하나님이 내개 주신 해답은 아니었을까. 나는 방송을 보고나서 아내에게 “저 사람들을 돕겠어요. 저 아이들 학비를 지원해야 겠어요”라고 선언했다. 아내도 그런 나의 선언, 아니 약속을 기쁜 마음으로 격려해주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그렇다. 사람은 늘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한다. 자기가 가진 것은 늘 부족하고 아쉽다며 하늘의 도움, 국가의 도움, 뜻밖의 행운을 기대한다. 이런 갈증으로 삶의 행복을 만들 수는 없다. 결국 우리는 그런 갈증으로 사막같은 삶을 살다 가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이 가진 것을 감사해 하며 자신에게 남는 것은 남들에게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지면 오히려 삶은 좀 더 보람차지는 것이리라. 남을 돕는 일은 그래서 결국은 나를 돕는 길로 통하는 법이다. 


방송을 보고 바로 다음날 나는 ‘경주 9남매 가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았다. 내 비서를 직접 현지에 보내 가족들을 만나고 고충을 들어보라 했다. 9남매의 아버지는 서순필 씨(당시 51세), 어머니는 이순남 씨(45세), 두 분은 독실한 기독인으로 신앙이 굳은 배필을 찾다가 오히려 혼인이 늦었다는 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청년시절에는 고아원을 차려 고아들을 돕는데 평생을 바치려는 꿈이 있었다고 한다. 

9남매는 7남2녀로 형제 가운데 맏이인 장녀는 서미미 양(당시 17세)으로 울산시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이어서 형제들이 줄을 이어 초등, 중등, 고등학교로 진학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 생계야 부모님들이 땀을 아끼지 않고 노동을 해 굶지 않는다지만 학비는 정말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는 보고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메시지를 전해 약속했다. “9남매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일체의 학비를 장학금으로 지원하겠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학용품도 지원하겠습니다.”

그렇게 9남매와의 인연을 시작했다. 9남매에 대한 장학금 지원은 필요한 학비를 수합해 알려오면 계좌 이체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나는 가능하면 부모님이나 9남매와 직접적으로 만나지 않으려 했다. 한창 자라는 나이이고 그 중에는 사춘기를 겪는 아이들이 계속 생기는데 잘못하면 도움 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장녀인 서미미 양과는 간헐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소통을 했다. 나중에는 내가 이메일을 주로 활용하면서 서신도 이메일로 오고갔다. 서미미 양은 부모님만큼 독실한 기독신앙을 갖고 있다. 매사에 기도를 통해 진지한 성찰을 하고 어릴 적부터 10Km가 넘는 통학길을 걸어서 등하교를 하면서도 어린 형제들을 챙기며 부모님을 도왔다. 미미 양의 이런 인내와 어른스러움이 동생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보이지 않은 유대감을 만들었으리라 충분히 이해가 됐다.



나는 그런 미미 양에게 각별한 당부를 했다. 

“미미 양이 대학에 진학을 해야 동생들도 희망을 갖고 분발 할꺼야. 우리 대학에 진학하면 장학금도 지원할 테니 열심히 공부해요.” 

미미 양은 열심히 노력해 우리 대학을 입학하는데 성공했다. 전공은 경영학을 선택했다. 나는 약속대로 미미 양에게 대학 학비도 지원했다. 거기에 더해 가정 경제가 어려워 별도로 주거공간을 얻지 못할 거라 생각해 기숙사에 들어가도록 했다. 미미 양은 뛰어난 성실성을 보였다. 성적도 좋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며 동생들을 돕기도 했다. 미미 양이 대학을 입학한 뒤 셋째도 우리 대학에 입학했다. 물론 학비를 지원했다. 여덟째도 우리 대학에 입학했다. 당연히 학비를 지원했다. 미미 양은 전공을 경영학에서 회계학으로 전환하더니 다시 대학원에 진학해 회계학 석사학위도 취득했다.

착한 성품의 부모님이 기울인 정성 덕분이었을까. 9남매는 모두 대학에 진학했다. 그 중에는 우리 대학 만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다른 대학에 다니는 동생들도 있었다. 그들이 서울의 어디에 기숙하며 학업을 잇겠는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래서 2010년 하반기부터 2년 간 대학 재단이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에 거주토록 했다. 


다른 형제들도 근면 성실하지만 미미 양은 장녀로서의 사명감이 있어서인지 더욱 진지했다. 나는 그런 미미 양의 내면에 있는 책임감을 신뢰했다. 미미 양이 석사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미미 양에게 연락을 했다. 

“다른 직장에 갈 거 모 있어. 범은장학재단에서 회계 관리를 책임지라고.”

범은장학재단은 내가 1990년에 설립했다. 우리 대학을 설립한 범정 장형 선생과 혜당 조희재 여사의 육영의지를 기리자는 취지에서 사재를 털어 만든 장학사업 전문기관이다. 현재까지 7천9백 여 명의 학생, 교수들에게 68억 여 원의 재정지원을 해오고 있다. 처음에는 단촐한 규모였지만 업무가 복잡해지면서 전문적 회계 관리가 필요했던 시점이었다. 미미 양이라면 범은장학재단의 재정을 제대로 관리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믿음은 한번도 깨지지 않았다.

이런 서미미 양을 위해 나는 중국어도 공부하게 했다. 회계전문가로 제 구실을 하려면 관련 법이나 행정에 대한 지식도 필요할 것 같아 사이버대학에 보내 행정법무학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하나 더 받게 했다. 또한 미미 양이 클래식 음악을 어려서부터 좋아한다고 들어서 아코디언과 피아노도 공부시켰다. 지금은 교회에서 반주 봉사를 할 만큼 발전을 했다. 평양감사도 싫으면 못한다는 데 미미 양은 무엇이든 기회를 주면 특유의 성실성으로 앞길을 열어가니 이런 것이 사람을 가르치고 키우는 교육의 기쁨이 아니던가.

최근에 미미 양의 부친께서 칠순연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문득 궁금한 마음이 들어 이제는 서 과장으로 부르는 미미 양에게 가족들의 근황을 물었다. 비단 미미 양만이 아니고 이들 9남매는 모두 대학을 나와 자신의 앞길을 개척하며 알찬 삶을 살아가고 있다. 둘째는 산업디자이너로 일하다 자신의 뜻이 요리에 있다고 선언하고 쉐프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셋째는 우리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쇼핑몰 운영관리를 맡고 있다. 넷째는 경영학을 배우고 신학대학원에서 목회자의 길을 준비하고 있다. 다섯째는 사범대를 나와 지금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여섯째는 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자산관리사로 일하고 있다. 일곱째는 정보통신 보안학을 공부해 프로그래머로 활약 중이다. 여덟째는 우리 대학 응용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하고 학사장교를 지원해 대기 중이다. 아홉째 막내는 통계학과에 다니고 있는데 군복무를 위해 휴학 중이라 한다.



이들의 현황을 이렇게 짚어보는 이유는 내가 했던 장학 사업이 맺은 결실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렇듯 반듯하게 장성한 자녀를 둔 부모님, 그러니까 서순필 씨와 이순남 씨 부부의 기쁨은 얼마나 크고 자랑스러울지를 함께 공감하고자 함이다. 매일 그 작은 방에서 밥상을 놓고 둘러앉아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던 가족들이 오늘날 이처럼 크고 풍성한 아름드리 나무로 자란 것이다. 하나님이 이들을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알려주는 증거이고, 시련과 고통을 인내와 기도로 극복한 두 부부의 보람이다. 

이 풍성한 사랑의 가족에 내 성의가 함께 있었음을 나는 기쁜 마음으로 기억한다. 나는 미미 양의 하나뿐인 여동생인 혜미 양의 결혼에 주례를 서기도 했다. 미미 양이 아버님의 부탁이라며 주례를 맡아 달라 했을 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나 역시 자랑스럽고 기뻤다. 평생 서온 주례 가운데 가장 기분 좋은 주례 자리였다. 

가끔 소식을 듣는데 9남매의 부모님은 지금도 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고 한다. 두 분은 그 기도에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와 내 아내의 건강을 하나님께 간구하고, 단국대와 범은장학재단의 발전을 기원한다고 한다. 어쩌면 거칠고 모진 바람이 불 때 내가 온전히 서있는 힘은 이처럼 소박한 휴머니즘과 신의 가호 덕분은 아닐는지...나 역시 ‘경주 9남매’의 행복과 부모님의 장수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