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전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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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대신 열정으로 화가의 꿈 이룬 오순이 교수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8.09.19
조회수 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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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교수가 된 오순이 양이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순이 학생’, ‘마산의 오뚝이 순이’가 더 낯익고 정겹다. 내가 순이 학생을 만난 것은 43년 전이었다. 순이 학생이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까 11살쯤 이었다. 퇴근을 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특이하게도 그 소녀는 발가락에 붓을 끼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동양화를 그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어린 아이가 팔이 없는 불행을 안고 사는 것도 놀랍지만 그럼에도 의연하게 발가락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 더 놀라웠다. 담임 선생님이 강요를 한다고 될 일이겠는가? 얼마나 노력을 해야 발가락에 붓을 잡고,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어린아이의 의지가 낳은 결과였다. 



놀람과 감동은 이내 걱정으로 변했다. 저렇게 연약한 아이가, 화면으로 보면 가정 형편이 넉넉해 보이지도 않던데, 얼마나 저 가상한 뜻을 지킬 수 있을까? 아니, 만약 단순한 의지가 아니라 그 의지가 화가로 열매 맺을 수 있는 재능도 함께 갖고 있다면... 재능이란 꿈이라는 꽃을 피울 씨이다. 그 씨가 꽃피려면 여건과 격려, 교육이라는 알맞은 토양이 있어야 한다. 나는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했다. 자칫 한 인간의 미래를 내 교육자적 의욕만으로 대들었다가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낳는 게 아닌지 두려웠다. 그러나 몇 번을 고민해도 결론은 같았다. 지금 내가 나서야 한다. 순이 양의 열의, 재능이 꽃피울 수 있도록 내가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다음 날 비서로 하여금 마산을 내려가 오순이 학생을 직접 면담하고 여러 가지 알아보도록 했다. 순이 학생은 부친이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목공으로 가계를 꾸리고 있었고, 집이 철로 변에 있었다. 복구할 수 없는 불행을 당한 것은 3살 때였다. 집 근처 철로 변에서 놀다 넘어졌는데 달려온 열차에 치여 두 팔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깊고 깊은 어두움에 빠진 순이 학생에게 작은 빛을 던진 분은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다. 어린 순이가 가슴에 묻어두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아픔을 그림으로 풀어보라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의 애정이 아무리 커도 순이 양을 화가로 성공시키려면 좀 더 장기적이고 강한 지원이 필요했다. 현장을 살피고 온 비서의 보고를 받고 나는 이것이 하늘에서 나에 내려준 계시라 생각했다. 고민을 접고 순이 학생 후원을 실천한다는 결심을 했다. 다시 비서를 오순이양 집으로 보내 부모님과 담임선생을 만나도록 했다. 앞으로 순이 학생이 좋은 화가로 성장하도록 돕겠다는 내 뜻을 전했다.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도 기꺼이 동의를 해주었다.


만남을 시작하고 다음 달 부터 좋은 화가를 구해서 순이 양의 개인 지도를 맡게 했고, 화가로서 커나갈 기본기를 키워 주라는 책임을 지웠다. 강사료나 그림 공부에 필요한 비용은 내가 부담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좋은 화가의 개인 지도를 받도록 경제적 후원을 지속했다. 순이 양은 비록 팔을 잃어서 발로 붓을 잡기는 했지만 대단히 의지가 강한 노력형의 인재였다. 무엇보다 집중력이 좋았고 한번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는 뒤로 미루거나 포기하지 않고 울며불며 힘들어하면서도 지도를 따라갔다. 예술은 매우 민감한 작업이다. 순이 양에게는 남모를 장애의 고통과 불편함이 매 순간마다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순이 양은 붓을 놓지 않고 하루하루 정진했다. 

그 인고의 시간은 결국 큰 보람으로 바뀌었다. 순이 학생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5년이었을 게다. 지금은 없지만 당시 홍익대학 주최로 열리는 ‘전국 남녀 고교 미술 실기대회’가 있었다. 대학 입학의 특전이 걸린 상당한 권위의 대회였는데 순이 학생이 이 대회 사군자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나는 내 딸이 우승한 듯한 기쁨을 느꼈다. 몸이 겪는 그 고통과 불편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로 인해 마음이 당하는 아픔을 이겨내려면 얼마나 인내를 해야 했겠는가. 아무리 재능이 있다한 들 발로 동양화를, 그것도 섬세한 붓놀림이 필수적인 사군자에서 우승을 하다니... 순이 양보다 더 좋은 육체적 조건과 물리적 환경에서 동양화를 배우고 익힌 내로라하는 고등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든 전국대회에서 차지한 1등의 영예는 얼마든지 자랑해도 부족함이 없는 보람이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홍익대에 입학하기를 희망한다. 순이 학생인들 안 그랬겠는가. 홍익대도 오순이 양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겠다면 입학을 종용하였다. 순이 양은 기쁜 마음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홍대에 입학하겠다고 희망을 말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다른 특혜는 없는가 물었더니 없다고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홍익대에 가지 말라고 했다. 나는 바로 이유를 설명했다. 


“순이야, 홍익대가 설사 4년 동안 장학금을 준다 해도 너는 그 대학에 가면 안된다. 너는 장학금만으로는 너가 가진 핸디캡을 이겨내고 예술가로 성장할 수 없단다. 그러니 너를 화가로 성장시키고 평생 동안 창작 활동을 하도록 도와줄 그런 대학을 찾아서 그 대학에 입학해야 해.”

나의 말에 순이 학생은 어리둥절해 하며 되물었다. 

“그런 대학이 어딨을 까예?”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단국대학이란다.” 이어서 나는 순이 양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순이 너의 몸은 하나이지만 다른 학생과 달리 너는 두 몸을 가지고 있는 셈이야. 네 언니가 잠시라도 곁에 없으면 생활을 할 수가 없는 입장이잖니?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하는 자잘한 일을 언니가 수발을 들어줘야 하는 거고. 그리고 통학하기 보다는 기숙사를 써야 하는데 너는 다른 학생과 한 방을 같이 사용할 수가 없을 거야. 언니하고 같은 방을 써야 하니까. 식사도 발로 수저를 들어 홀로 먹지만 식판을 들고, 식당 자리나 강의실 좌석도 특별히 배려를 받아야 할 꺼고... 이런 일상적인 생활 속에 필요한 시설, 제도적 지원, 그리고 전면적인 경제적 후원을 해줄 수 대학이 필요한 거지. 나와 단국대학은 너를 성공시킬 때 까지 후원할 꺼야.”

순이 양의 부모님이 이런 모든 일을 해결할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이런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할 수도 없었다. 나는 순이 양을 만난 이후 9년 동안 순이 양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맺은 인연이 결국 평생을 가야 한다는 것을 이미 나는 결심하고 있었다. 단국대 입학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오순이 화백’의 꿈을 향한 하나의 중간 과정이었던 셈이다.


내 권유에 맞춰 오순이 양은 우리 대학 동양화과에 지원을 하였다. 이제는 단국대의 품에서 청년 예술가의 꿈을 키워나가면 된다는 생각에 나도 순이 양의 합격 소식을 고대하고 있었다. 실기 점수의 비중이 높은 만큼 당연히 입학 전형을 무사통과하리라 믿고 있었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순이 양이 낙방을 하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경위를 알아보니  면접시험에서 당시 미술대 학장이 오순이 양에게 F 등급을 줬다는 것이다. 더 알아보니 미술대 학장은 서양화 전공이었다. 이미 경력이 말해주듯 순이 양의 동양화 실기실력을 전국 최상위권이었다. 평소 생활 자세를 이미 10년 동안 봤기에 자세가 불량하거나 예의 없는 성품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면접 과정에서  F 등급을 줬다는 것은 순이 양을 학생으로 입학시키고 싶지 않다는, 즉 장애인이기에 우리 대학에서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없음을 공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우리가 주변에서 교수를 만나고는 하지만 때로는 명목이 대학교 선생님이지 교육자로서 사고력과 인간성이 수준 이하인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문제는 이런 교수님들로 인해 유망한 학생들이 아픔을 겪고 좌절하는 일이 발생하는 경우이다. 불행히도 대학가에서 그런 경우를 당하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랐다. 뒤이어 분노가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선친 때부터 억강부약(抑强扶弱)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장애는 약점이지 불가능이 아니다. 교육자, 그것도 대학 교수이면 제자와 학생들에게는 강자이다. 강자가 약자를 도와야 하는 법이다. 강자는 약자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것이 도리이고, 바로 그 사명을 자부하는 사람이 교수가 아닌가. 나는 대학의 공식 회의가 있는 자리에서 미술대 학장을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학장님, 오순이 수험생에게 면점 점수를 F로 주었는데 어떤 이유때문입니까?”

“미술 전공 학생이 팔이 없다는데 과연 전공을 제대로 이수할지 회의적이라서 그랬습니다.”

“학장님, 그러면 오순이 양이 발로 그린 그림을 본적이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그럼 구족화가라는 말은 들어보셨나요?”

“네, 있습니다.”

“오순이 학생이 바로 구족화가입니다. 순이 학생은 발로 그림을 그립니다. 면접을 보면서 그 학생이 어떻게 그림을 배우고, 이 자리에 까지 왔는지 물어보고, 확인해보지도 않으시다니...”

나는 머리가 뜨거워졌지만 차마 성미 그대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대신에 순이 학생의 과거와 나의 생각을 여러 사람 앞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 학생은 전국 고등학교 학생 미술대회에서 1등을 해서 홍익대가 4년 장학금을 주고 특기생으로 선발하려던 학생입니다. 그런 젊은이를 내가 공부하는데 뒤따르는 여러 가지 난제를 후원해주고, 장차 외국에 유학 까지 보낼 생각으로 우리 대학에 원서를 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학장님이 장애에 대한 선입견으로 입학을 거부했으니 당신이야 말로 교육자로서 능력이 의심스럽고 통찰력이 부족한 교수님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였기에 우리 대학과 나의 교육 철학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제가 우리 대학에 전국 대학에서는 가장 앞장서서 특수교육과를 창설하고 입학생들에게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인재들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대학 출신 특수교육 교사들이 교장부터 교원까지 우리나라 특수교육계를 리드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은 ‘특수한 조건을 가진 일반인’입니다. 이 사람들이 가진 특수한 조건을 이겨내 일반인으로 살게 하는 것이 대학의 봉사정신이고, 우리 대학이 갈 길입니다.”

나는 총장(당시)으로서 해당 교수님을 면접단에서 제외하도록 조치했다. 오순이 양은 1986년 우리 대학에 입학했다. 순이 학생을 기숙사에 거주토록했고, 언니와 같이 쓸 수 있는 방으로 정해 주었다. 순이 양은 식사를 발로 하는데 간혹 철없는 이들이 그걸 구경하듯 바라봐 마음에 상처를 받곤 했다. 그래서 별도의 방에서 언니와 식사를 하도록 했다. 학비만 감면받아 살 수는 없었고, 순이 양 언니도 직업이 필요했다. 나는 순이 양의 언니를 우리 대학 직원으로 특채했다. 


그후 오순이양은 4년간 열심히 공부를 했다. 전공과목인 미술 과목만이 아니라 국어, 경영학원론, 법학통론 등 다른 교양과목도 모두 A학점을 받았다. 1990년 학과 수석으로 졸업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이미 10살 때부터 미술에 입문할 때는 붓을 잡느라 걷지도 못할만큼 발가락이 부어오를 때까지 연습을 했던 순이 양이었다. 나는 입학 때 공언한 대로 대만으로 유학을 보냈다. 중국이 아닌 대만을 선택한 것은 나의 오랜 친구이자 대만의 저명한 화가 리치마오(李奇茂)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리치마오 교수는 스페인 미술박물관 등 유럽의 국립미술관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작품을 소장하고 있을 만큼 인정받는 화가이다. 그는 내 부탁을 들어 자신의 집에서 기숙시키며 2년 동안 대만 중화미술원에서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림을 사사받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를 통해 중국어를 배운 것도 큰 소득이었다. 이후 1994년 항저우(杭州)의 <항저우국립 중국미술대>에 입학했다. 오랜 이역 생활에 지치고 힘들었지만 이 역시 잘 이겨냈다. 순이 양은 10년을 넘는 산고를 겪으며 마침내 산수화 분야를 전공한 한국 유학생으로서 중국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이라는 기록을 새로이 만들고 귀국했다.  



순이 양은 이제 마산의 오뚝이 소녀 순이 학생이 아니라 어엿한 지성인이자 장인정신을 갖춘 한국화가로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04년 이후 그녀는 자신의 모교인 우리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화단에서도 중견으로 맹활약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보람찬 일이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 했는데 오순이 교수를 보면 그 말이 진실임을 새삼 실감한다. 작고 여린 싹이 이제는 훤칠한 나무가 되어 제자들에게 그늘도 줄 만큼 컸으니 내가 처음 순이 양을 만났을 때 결심한 바를 얼추 이룬 셈이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나의 노력이 아직 미흡하다는 아릿한 자책감이 있다. 오순이 교수의 반려자를 찾아주지 못한 것이다. 그뿐인가. 오 교수를 곁에서 도와준 오 교수의 언니도 아직 독신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까지는 둘이 서로 손발이 되고, 마음의 기둥이 되어 살아왔는데 이제 좋은 배우자를 만나 의좋게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기쁠 터인가. 부디 큰 사랑의 빛이 순이 양과 언니의 곁에 가득해지길 염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