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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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 '반혁명 고문'에서 '정계입문권유'까지 이어진 곡절(상편)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9.11.25 (최종수정 : 2019.12.13)
조회수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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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국대학이 설립할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 년의 여정을 지켜봤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과 좋든, 그렇지 않든 많은 인연을 맺었다. 그 짧지 않은 시간 속에서 우리 대학에 가장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주었던 사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5‧16 군사정변과 주간부 폐교’를 꼽고 싶다. 단국대학에도 힘들었지만 내 인생에 가장 큰 전기가 되었던 시간 역시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중심에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 



주간부 폐교 사건이 나던 해는 1961년이었고, 나는 30세로 우리 대학에 입교해 학생과장 보직을 맡고 있었다. 선친이신 범정 선생은 당시 우리 대학 이사장직에 계셨다. 군사정부가 들어선지 얼마 안 된 1961년 7월에 ‘장도영 장군 반혁명 사건’이 터졌다. 군사정변의 핵심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수반으로 모셨던 장도영 장군을 불과 2개월 만에 ‘반혁명 주모자’로 몰아세운 정변은 한국 사회를 얼어붙게 했다. 이 사건은 사실 ‘장도영 장군으로 대변되는 군부 내 비육사 이북출신 세력과 장면이 이끄는 민주당 정치세력’을 추방시키려는 군사정부 주체세력의 의지가 빚어낸 일이다. 그러나 이 여파가 말 그대로 뜬금없이 범정 장형 선생에게 영향을 미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선친과 장도영 장군은 같은 인동(仁同) 장(張) 씨였으니 먼 친척이었다. 고향도 이북이라는 공통점은 있었지만 그것이 막 들어선 군사정부를 전복시키는 ‘반혁명음모’를 공유할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친은 악연을 맺었던 정상배들의 음모로 반혁명 운동에 자금을 대줬다는 혐의를 받아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졌다. 선친의 도피를 돕던 나는 중앙정보부에 아버지 대신 끌려가 3일 동안 고문과 심문을 당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어머니와 아내를 끌고와 고문으로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여주며 선친의 행방을 대라는 협박을 받아야 했다. 결국 풀려나기는 했지만 마음에 남은 상처가 아물기 전에 우리 대학에 더 큰 충격이 닥쳤다. 1961년 11월에 군사정부가 발표한 ‘대학정비령’에 의해 우리 대학 주간부가 폐교를 당한 것이다. 당시 전국 대학들이 실태조사를 받았는데 우리 대학은 학생대비 정교수 확보가 기준에 1명 모자르다는 결과가 나왔고 이로 인해 주간부 폐교 조치가 내려졌다(좀 더 상세한 내용은 『시대를 넘어 미래를 열다』 2011. 9. 노스보스 간. p15~p36 참조). 


이런 충격을 받은 후 선친께서는 건강을 잃었다. 그 전에는 나의 유학을 허락하지 않던 범정 선생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에 시달린 일을 무척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또한 군사정부의 난폭함과 현실에 좌절하셨는지 나에게 미국 유학을 허락했다. 나는 브리검영 대학교 (Brigham Young University)에 유학을 갔다. 한국에서 몰몬교 목회활동을 한 스펜서 파머(Spencer J. Palmer, 1927-2001)라는 분이 귀국을 해서 박사학위 연구를 하는데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에 대한 주제가 있었다. 이를 수행하려면 한국, 중국, 일본의 관련 자료를 영어로 번역해야 해야 했다. 파머 교수는 한중일 3개 국어를 잘 알면서 영어도 할 줄 아는 연구 조교가 필요했다. 나는 이 공채 공고를 접했고 응시를 해 합격을 했다. 미국 왕복 항공편, 브리검영 대학 전액 장학금 및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좋은 조건이었다.



1963년 9월부터 대학원에 입학해 파머 교수의 연구를 돕고, 박사학위 공부를 하느라 두 배의 노력을 해야 했지만 정말 보람찬 면학의 시간이었다. 파머 교수는 내 도움으로 훌륭한 박사 논문을 완성했다. 내 능력을 인정한 파머 교수는 나에게 박사학위를 빨리 마치고 아예 미국 이민을 하라고 권했다. 나도 그럴 결심을 했다. 한국에서 당한 시련이, 그 과정에서 누구도 아닌 단국대를 나온 동문들과 당시 대학을 이끌던 학장 등 원로 교수, 법인의 이사들이 안겨준 상처가 젊은 나에게는 너무 아프고 쓰라렸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병이 위중해지고 홀로 한국에서 살림을 꾸리던 아내의 건강도 쇠약해진다는 기별에 나는 잠시 귀국을 했다. 1964년 9월경,  아버지를 뵙고 미국 이민 결심을 알린 뒤 아내와 미국으로 떠나려고 잠시 귀국을 했다. 그러나 단국대와의 인연을 나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이민 수속을 하러 들어갔던 입국은 같은 해 12월 30일에 아버님이 별세를 하면서 계획이 비틀어졌다. 부친의 별세 직후 이사장직에 오른 박정숙 이사장님의 강권으로 다시 단국대 일을 보게 되었다. 이후 1966년에 학장의 보임을 받고나니 내 삶은 내 것이 아니라 단국대의 것이 되고 말았다. 내 나이 서른다섯 때의 일이다. 증권회사도 해보고, 토목건설회사 일도 해봐서 어떻게 하면 돈을 버는지 경험도 있었다. 장학금과 생활비도 줄테니 미국으로 이민 와서 공부를 하라는 제안도 받아 놓았다. 한창 젊은 내가 욕심을 내고 내 앞길을 도모한다면 못 이룰 것이 무엇일까. 만약 안정되고 강건한 교세를 가진 대학이었다면 나는 단국대에 남지 않고 기업 경영을 하거나 학자로서 나의 인생을 개척해나갔을 것이다.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나는 1961년 주간부 폐교로 인해 약해진 교세를 일거에 전환시킬 계기를 찾는데 고민했다. 그 고민 결과 ‘종합대 승격’이 최선책이라는 점에 착안을 하고 이를 실현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아무리 내 주변을 둘러봐도 우리 대학 안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 젊은 내가 나서자. 나 하나 잘되자는 일이 아니고 억울한 일을 당한 대학의 원을 풀어달라는 일인데 뭐가 두려울까.” 굳은 각오로 종합대학 승격 추진에 나섰다.

가만 생각해보니 주간부 폐교나 내 부친의 반혁명 관련 혐의나 모두 군사정부가 등장하고 나서 일어난 일이고, 그 최고 권력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있었다. “박 대통령의 군사정부 시절에 일어난 일로 단국대학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그 피해를 시정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막상 내가 무슨 힘이 있고, 배경이 있어서 청와대를 들어가 대통령을 독대한단 말인가. 

대통령을 독대할 기회를 만들어줄만한 사람을 직접 찾기로 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일제 강점기에 대구사범(경북대 병설 교육대의 전신)을 나와 교사 생활을 했고, 지금도 그 동창생들과 교유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작정 대구사범 동창 출신 유명인을 찾아갔다. 서정귀 당시 흥국상사 사장을 찾아갔다. 국회의원, 재무부 차관을 지내고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으로 재계에 입신해 자금 후원을 한다는 실력자였다. 그러나 단박에 내 부탁을 거절했다. 그 밖에 여러 사람에게 부탁을 했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러던 중 고려대 교육대학원장이던 왕학수 박사님이 나를 돕겠다고 나섰다. 내가 고려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던 중에 만난 인연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왕 박사님이 나를 돕겠다며 소개를 시켜준 사람은 권상하 당시 청와대 정보비서관이었다. 

권상하 비서관은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동기생이었고 박정희이 대통령이 직접 정보비서관으로 발탁했다. 대통령 친인척에 대한 엄격한 관리를 전담하는 측근이었다. 왕 박사님의 주선으로 권 비서관을 면회할 수 있었다. 

“대통령 각하를 왜 독대하겠다는 거죠? 뭘 원하는 겁니까?”

권 비서관이 딱딱한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대통령 각하께 바칠 것이 있습니다.”

그러자 무엇을 바칠 것인지 정보비서관인 자신은 알아야 하니 말하라 했다.

“대통령 각하 외에 다른 분께는 결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쁜 일이 아니니 직접 뵙고 말씀드리게 해주세요.”

지금 생각하면 무슨 배짱으로 그런 말을 하기로 결심했는지 이해가 안되지만 내 표정이 하도 진지해서인지, 아니면 젊은 학장이라는 사람이 설마 엉뚱한 일이야 하겠냐는 믿음에서 였는지 “그럼 연락을 기다리라”는 답을 주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청와대 비서실이라며 연락이 왔다. “아침 6시까지 권상하 비서관 집으로 오라.”는 전갈이었다. 그날 권상하 비서관 댁에 갔더니 권 비서관은 자신의 관용차인 지프차에 동승하라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오전 10시로 기억하는데 접견실이라는 곳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더니 대통령이 들어왔다. 자리를 잡자 권 비서관이 동석해 용건을 말해보라 했다.

“각하께 뭐를 바친다는 거죠?”

나는 우리 대학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 반드시 솔직하고 직선적으로 말하겠다고 결심했다. 

“각하, 단국대학을 각하께 바치고자 합니다..”

“단국대를요? 사립대학인데 왜 단국대학을 나에게 바친다는 겁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정색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대통령은 웃음을 지었지만 약간 긴장하고 정색을 하며 권상하 비서관을 쳐다보았다. 권 비서관도 당황했는지 대통령 앞에서 화를 내며 나를 끌고 나가려 했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대통령이 권 비서관을 만류했다. 

“권 비서관, 들어봅시다.”

나는 숨을 크게 쉬고 대통령께 내 마음을 담아 진정을 했다.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은 선친이 억울하게 반혁명 분자로 낙인 찍히고 나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일,  이로 인해 응당 받아야 했던 채권을 포기하고야 반혁명 후원자의 음해를 벗어날 수 있었던 일, 거기에 결국 교수 1명이 부족하다 해서 주간부를 폐교 당하고 그 뒤 개인 집을 팔아서 교직원 월급을 주면서 대학을 운영한 일....

그동안의 억울한 일을 풀어낸 나는 이렇게 매듭을 지었다.

“그러니 사립대학인 단국대를 저는 더 이상 운영할 힘이 없습니다. 국가이든 대통령 각하께서든 이 대학을 기증받아 좋은 대학으로 키워주신다면 더 이상 보람이 없겠습니다. 아니시면 우리 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주시면 단국대가 회생하고 제 모든 걸 바쳐 대학을 성장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각하께 누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 청원에 좀 당황하는 표정이었지만 가타부타 언급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임에도 시종일관 사립대의 고민을 듣는 자세가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면담이 끝나자 권 비서관은 나를 내쫒듯 청와대 밖으로 보냈다. 그러나 내 사연을 터무니 없게 받아들여 내치거나 불쾌해 하지도 않았다. 이 점 역시 고마운 일이었다. 그 뒤 나는 국회의원도 만나고, 장관도 만나고, 국무총리도 만나고 정말 최선을 다해 단국대의 억울함과 종합대학 승격의 절실함을 설득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적인 도움의 손길을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말 무수히 많은 곡절을 겪고, 어려움이 있을 때면 뭔가 단국대와 나에 대한 호의가,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가까운 이들일수록, 알게 모르게 나에게 무언의 도움이 작용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학장으로 취임한지 70여 일 만에 우리 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겠다는 다짐을 실현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단과대학, 종합대학, 전문대학이라는 명칭으로 대학의 수준이 정해지지 않고 그 차이도 지금의 정서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1967년 당시에 종합대학이냐 아니냐의 기준에 따라 대학에 대한 신뢰, 또는 대학졸업장에 대한 기업의 인식이 달라졌다. 다른 측면에서는 대학 발전의 중대한 갈림길이어서 전국 대학들의 로비가 극심했고, 그 후유증으로 장관이나 정치인들의 운명이 갈라지기도 했다. 오죽하면 우리 대학의 종합대 승격이 공표되자 이를 시기한 정치인들이 나를 공격하고, 중앙정보부도 나서서 나를 연행하기에 이르렀을까. 



실제로 1967년 이후 우리 대학은 단과대 체제에서 벗어나 학과 신설, 모집정원 증원에서 급성장세에 접어들었다. 초대 총장으로 부임한 나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대학을 키우는데 내 모든 정성을 바친다는 각오로 밤낮없이 일했다. 

종합대학 승격이 된 이듬해, 1968년에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이 좀 더 가까워진 계기가 생겼다. 이에 앞서 우리나라는 1965년 10월부터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파견했다. 전 세계적 냉전이 치열했던 당시 정세에서 베트남전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의 입김이 들어간 전쟁이었다. 미국의 전략을 거부하기 힘든 우리나라는 베트남파병을 받아들였다. 1966년 경에는 파견 병력이 청룡부대 1개 여단, 맹호부대 1개 사단, 지원부대를 합치면 군단급 규모에 이르렀다. 당시 베트남전쟁에 파견된 국군을 위문하는 일은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큰 관심사였고, 중대한 민간 봉사였다. 정부는 대학생, 교수들로 위문단을 구성해 젊은 파월군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길 바랬다. 종합대학의 학생처장, 학생회장, 교수들이 참여한 전국 규모의 위문 봉사단이었다. 그런데 이를 이끌 단장으로 대학총장이 필요함에도 묘하게 나서는 이가 없었다. 

나야 이제 막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대학의 총장이라 나설 입장이 안 되어 관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치열한 월남전 일선을 누벼야 하는데 자칫 그 전장에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대학 총장들의 발길을 잡아 둔 이유였다. 베트남은 전형적인 게릴라전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전방과 후방이 따로 없고, 어디서 폭탄과 수류탄이 터질지 모르는 형국이었다. 거기에 한국군은 그 용맹함으로 인해 미국군과 더불어 가장 최일선에서 전쟁을 감당하고 있었다. 이 위험지대를 2주 동안 누비고 다녀야 하니 쉽게 “내가 가리다”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교육부의 권유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원로 선배 총장들이 있는데 나서기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기도 싫었고 심지어 당시 37세인데 내가 인솔하고 나갈 학생처장들은 모두 나보다 한참 연상이었다. 전장의 위험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젊은 총장이라는 대학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미룰 명분이 없었다. 당시 문홍부 문교부 장관도 “차라리 가장 젊은 장 총장이 나서서 다른 선배 총장들 부담을 덜어주는게 좋겠소.”라며 권유했다. 결국 내가 단장을 맡겠다고 했다. 

전국대학 학생처장, 학생회 임원 등을 해서 관련 공무원까지 합치니 400 여 명이 가까운 대식구였다. 해군 수송선을 타고 월남에 도착해 격전지를 방문했다. 육로에서는 일행들은 군용트럭을, 나는 헬리콥터를 이용했다. 어디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긴장도 겪었다. 모두들 지치고, 힘든 일정이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장병들을 만났다. 장병들도 정말 형제, 부모를 만난 것처럼 반겨주었다. 처음으로 정부의 공식적 사업을 이끄는 중책을 맡았지만 큰 보람을 얻은 활동이었다.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아서인지, 좋은 평가가 줄을 이어서인지, 박정희 대통령은 나와 주요 인물들을 청와대로 불러 사업보고를 겸한 위로 다과회를 열었다. 청와대에서 두 번째로 대통령을 만났다. 내가 귀국 보고를 직접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진심으로 위문단에게 위로와 고마운 인사를 건넸다. 간담회에서 대통령은 나에게 질문을 했다.

“장 총장, 동란 때 전쟁에 나갔어요?”

한국전쟁 때 참전했냐는 질문이었다. 

“네, 학도의용군 1기생이었습니다. 나중에 학도병이 육군으로 편입되어서 1등병으로 제대했습니다.”

내 답변을 들은 박 대통령의 낯에 부드러운 웃음이 흘렀다. 한국전쟁이라는 난리 통에 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그 전쟁을 피하려 그 못지않게 각종 연줄과 핑계를 동원해 복무를 회피한 일도 많았다. 군인으로서 전쟁을 치룬 박 대통령이기에 전쟁에 참전한 총장이 나름 흡족했으리라. 그래서 일까, 위문단을 위로하는 틈틈이 박 대통령은 나에게 많은 격려를 해주었다. 자리를 함께 한 교육부 장관이나 관료들, 정치인들도 나에게 인사와 덕담을 건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