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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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 시국사범 굴레 쓴 젊은이에게 대학문을 열어준 이유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9.07.31 (최종수정 : 2019.08.01)
조회수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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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면서 정치상황은 한겨울의 호수처럼 얼어붙었다. 비상계엄시대나 마찬가지인 현실이었지만 대학생들의 항거는 끊이지 않았다. 1975년 5월이었던 일로 기억한다. 서울대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 앞서 4월에 발생한 서울대 학생 김상진 군이 10월 유신을 철회하라는 주장을 외치며 할복자살을 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학생들이 5월 22일 김상진 군 추모 행사를 하다가 대대적인 항의시위를 벌인 것이다. 

4천 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는데 10월 유신 발동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고 투석전까지 벌어졌다. 이 시위로 서울대 총장이 사임을 하고,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과 남부서장이 경질되었다. 70명이 넘는 서울대 학생들도 무더기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살거나 제적이 되었다. 여기에 박원순 군(당시 서울대 사회계열 재학)이 있었다. 

이 시위가 있던 해인 1975년은 박원순 군이 입학을 한 해였다. 입학한 지 두 달도 안 된 신입생이 알면 무엇을 얼마나 알았겠는가? 나중에 들어보니 운동권 조직에 속해서 시위를 한 것이 아니라 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진압경찰들이 시위 학생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장면을 보고 시위에 참가했다고 했다. 동기는 단순했지만 결과는 엄혹했다. 박원순 군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국가 사범으로 전락했다. 19살의 미성년자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은 박 군은 4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물론 대학은 제적을 당했다. 법학과 진학(당시는 계열별 입시였고 2학년 때 학과를 선택했음)을 꿈꾸는 시골 수재에서 국가 안보를 훼손한 위험인물로 전락하면서 박 군과 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1979년도 입시전형이 막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우리 대학을 담당하는 정보기관의 출입자가 나를 면담하고자 했다. 만나보니 박원순 군에 대한 일이었다. 정보기관 출입자의 주장은 이랬다.

“박원순이란 학생이 단국대에 입학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박원순을 합격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장 총장님께 꼭 전달하라는 상부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나는 기관원의 말이 나의 원칙을 거스르는 말이라 반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특별 지시를 받았다지만 대학이 학생을 입학시키고 말고는 담당 학과 교수와 총장인 나에게 있는 것이지 어찌 정보기관의 책임자가 입학 시켜라 말라 하는 거요. 법적인 하자가 없으면 입학을 하겠다고 원서를 넣은 학생을 놓고 합격 여부를 미리 정하는 것은 교육기관이 할 일이 아니니 상관에게 내 방침을 잘 전해줘요.” 

담당 기관원을 돌려보내고 교무처(당시는 입학업무도 담당했음)에 박원순 이라는 학생이 입학원서를 제출했는지 알아봤다. 박원순 학생 입학원서가 접수되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학생처장, 교무처장과 업무 담당자들을 불러 현황을 파악토록하고 입장을 피력하라 했다.

“박원순 학생은 이미 서울대에서 제적당하고 교도소도 복역하고 나온 학생입니다. 타 대학에서 형사 처벌받고 제적된 학생을 입학시켜서는 안됩니다. 유신정부의 방침이 시위 학생은 대학에 적을 두어서는 된다는 것인데 우리 대학 재학했다가 제적된 학생도 아니고 다른 대학의 제적생을 받아줄 수 없습니다.”

처장들이나 직원들 모두 학생보다는 정권에 밉보일 때 당할 대학과 나의 안위를 걱정해 박원순 군의 입학을 불허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내 생각을 밝혔다.

“박원순 군은 서울대 학생 신분으로 데모를 주동했다고 해서 이미 제적을 당한 학생입니다. 지금 박원순 학생은 편입생이 아니라 신입생으로 입학하는 겁니다. 일반 고등학교 졸업장하고 예비고사 성적표를 갖고 입학 허가를 요청한 겁니다. 단국대 입시생으로 자격을 갖추었는데 서울대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우리 대학이 서울대의 처사를 따라가라는 법은 없어요. 우리는 우리의 철학과 입장이 있는 겁니다. 교육 당국이나 정보기관의 입장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나는 결론을 내리면서 ‘다른 학생과 동등하게 입시를 치루도록 해주라’고 거듭 지시하였다. 총장 재직을 하면서 나는 반정부 데모에 참가한 학생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시위에 참여하여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을 위반해 실형을 받으면 제적 처분을 받기는 하지만 법적 책임을 다 지고 나오면 전원 복학을 허락했다. 또한 그들이 졸업해서 사회인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내가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편의를 제공했다. 학생들은 정부가 독재라고 생각하면 반대 의사를 밝힐 권리가 있고 그런 시위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 교수들의 자세여야 한다고 믿었다. 


이제와 하는 얘기지만 나는 박원순 학생이 단국대학에 지원한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원순 군이 직접 밝힌 얘기를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총장님(박원순 씨가 쓰는 장충식 이사장의 명칭)을 처음 빈 것은 내가 서울대에서 제적되어 감옥에 갔다 온 후 어느 대학에서도 받아주지 않던 때였다. 당시 유신 정권 아래에서는 시위 사건으로 학교에서 제적되고 감옥까지 갔다 온 사람은 어느 대학도 갈 수가 없었다. 천형과도 같은 것이었다. (중략) 장충식 총장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총장님은 예상과는 달리 젊은 시절에 데모한 것은 자랑이면 자랑이지 결코 흠이 될 수 없다면서 오히려 격려를 해 주셨다. 시대의 굴절 때문에 상처 입은 젊은이에게 그것은 새로운 인간상이기도 했다. 사회에 대한 좌절과 고민이 어려 있을 때 이런 총장님도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후 단국대학교를 거쳐간 많은 사람들에게서 총장님에 대해 내가 느꼈던 동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런 모습이 누구에게나 여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략) 그 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되고 민주화의 봄바람이 잠시 불었던 1980년 초, 서울대학교에서 복학하라는 통지가 왔다. 나는 한 번 내쫓은 대학을 어떻게 다시 다니겠는가 하고 그 복학 통지서를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 단국대 사학과를 야간에 까지 수강하여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정말 주경야독인 셈이었다.”(『빈 들에 씨를 뿌리며』,  ‘비범한 정신력의 중재(中齋)’ 중 발췌)



박원순 군의 말처럼 나는 학생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이데올로기나 정권의 이해관계로 가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가진 정의감,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나 역사의식을 잘 가르쳐서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대학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박원순 군은 우리 대학에 입학할만한 좋은 성적을 얻었고 결국 입학했다. 그러나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도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경찰 공안담당 부서에서는 박 군이 입학하면 다시 소요를 일으켜 대학과 사회를 어지럽힐 거라 근거 없는 예단을 하며 여러 가지 협박을 했다. 나중에는 학원 담당 고위 간부들도 나에게 여러 안좋은 얘기를 하며 입학 철회를 압박했다. 

심지어 학교 안에서도 박원순 학생을 합격시키기 전에 그로 하여금 입학하면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케 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교육자로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내는지 화가 났지만 웃는 낯으로 자제를 시켰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 언약을 주었다. “박원순 학생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 했어요. 공부하기도 바쁠 겁니다. 만약에 당신들이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면 내가 총장의 직을 걸겠소!” 물론 박원순 학생은 입학 뒤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내가 기증한 집을 기반으로 고시 준비 학생들을 위해 설립된 법선재에서 후배들과도 같이 공부를 하기도 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이윽고 재학생 시절에 법원 사무관 시험에 합격해 등기소 소장을 지내더니 1980년에는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로 임용되었다. 


검사에 임용된 지 6개월인가 지나서 박원순 검사는 스스로 검찰을 떠났다. 사람에게 벌을 주는 직업을 견디기 힘들다고 했고 변호사로 인권을 지키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1982년 소중한 배필을 만나 혼례를 치루는 데 나에게 주례를 부탁했다. 물론 쾌히 승낙을 했다. 나중에 박 변호사는 “(신원보증인이 되어 대학 입학을 허락한) 인연으로 평생에 한 번 있는 결혼식의 주례로 모셨는데 신랑의 넥타이 색깔이 무엇인지 물어보신 후 당신이 넥타이 색깔까지 거기에 맞추어 매고 나오셨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의 결혼식에는 많은 하객들로 북적였는데 그들 가운데는 정보기관 사람들도 많았다. 내가 주례를 서려 식장에 들어가려는 데 정보과 형사가 “아니 이제 총장님께서 데모꾼 주례도 서주시냐?”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그 말 속에 심한 비아냥이 느껴져 지금도 불쾌한 기분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정보기관의 비뚤어진 감시가 있던 없건 박원순 군은 가정에도 충실하면서 자신의 활동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학업에도 시간이 허락하는 최선을 다한 끝에 1985년 사학과를 졸업했다.

인권변호사로 맹활약하던 박원순 변호사는 법률적 성과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시민운동에 나섰다. 나는 먼발치에서 박 변호사를 응원했다. 그는 1995년 참여연대를 창립하고 사무처장에 취임했다. 하루는 나를 찾아 와 도움을 요청했다. 내용인 즉 우리 대학 병원이 업무 상 보험회사와 보험을 많이 계약하는데 이 알선 업무를 자신이 이끄는 참여연대에 위임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시민운동 단체이다 보니 활동의 자율성을 지키는 것이 핵심원칙인데 대기업의 기부금, 정부의 지원금을 함부로 받아들일 수 없고, 시민들의 후원금도 미약해 재정이 어렵다는 고충을 밝혔다. 물론 나는 이를 받아들였다. 개인이 아니라 신민운동의 정의를 지키려는 박 변호사를 노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를 안정적 기반에 올려놓은 박원순 변호사는 이번에는 <아름다운 가게>라는 새로운 사업 모델을 갖고 나를 찾아왔다. 처음듣는 사업이라 내용을 물었다.

“생활형편에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 쓰지 않는 의류, 가정용 비품 등을 기부하면 이를 수집, 정리하고 수선하여 필요한 사람들이 구입하도록 하는 사업입니다. 자원도 절약하고, 환경도 보호하고, 중산층이 서민들의 가계에 보탬도 되면서 수익금은 다시 시민운동단체에 환원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단국대 교직원도 참여하고 총장님께서 나서주시면 이 운동을 확산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장호성 당시 부총장으로 하여금 대학 차원에서 이를 돕는 방안을 찾도록 했다. 장호성 당시 부총장은 박원순 변호사와 경기고등학교 동기동창이어서 친분이 두터워 이내 ‘후원기관 협정식’을 맺게 되었다. 기증용 물품을 수집하는 시설도 설치하고, 홍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개인적으로는 아내와 함께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가까운 이웃들에게 이를 소개하고 여러 물품들을 기부하도록 했다. 내가 사는 워커힐아파트는 젊은이들보다는 나이든 분들이 많이 살거니와 소득 수준도 낮지 않은 세대가 많아서 그만큼 도움 될 만한 물품들이 많았다. 

아내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600가구 가운데 알고 지내는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부를 설득했다. 나중에는 친구들까지 참가토록 했고 며느리(주 : 장호성 전 총장의 부인 조기정 씨)도 힘을 보탰다. 

여러 물품을 모으고 거두어 아름다운 가게에 보내다 보니 수집한 분량이 좀 아쉽다 싶을 때는 아예 철이 바뀌면 입어야 할 옷들도 꺼내서 기증품에 넣기도 했다. 많이 기부해서 이름을 과시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애정이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새로운 시민운동의 실마리를 열려는 박원순 변호사의 노력을 격려하고픈 마음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 때 활동을 열심히 한 며느리는 <아름다운 가게 서초점> 점장을 맡기도 했다. 2003년 당시 내며느리는 모 대학교의 영문과 교수로 출강하고 있었다. 남편의 동창이 하는 일이라 관심을 갖고 참가했는데 아름다운 가게의 가치를 마음에 들어 하더니 급기야 기존의 직업은 뒤로 하고 이 일에 전념했다. 일체의 보수도 받지 않고 개인의 이익보다 시민 공동체의 발전에 애정을 기울이는 며느리가 한결 지혜롭게 느껴졌다.



박원순 변호사가 하는 아름다운 가게에 대해 나는 주위에서 받는 좋은 평가를 기뻐했다. 정치계 입문에 대한 얘기가 돌 때 나는 그가 서민을 위한 자선사업과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을 하리라 기대했다. 어느 날 갑자기 서울시장에 출마를 한다고 해서 깜작 놀랬다. 진심으로 나는 그가 정치적 권력을 잡지 않기를 희망했다. 박 변호사는 정의를 위해 권력을 비판하면서 겪는 고초는 감수할 수 있지만 권력을 행사하면서 부딪힐 갈등은 매우 힘들어할 성격으로 보였다. 1천만 명을 대표하는 서울시장이 된다면 얼마나 많은 갈등을 감당해야 하겠는가...

그래도 선거를 시작하자 나는 처음 생각과 달리 박원순 후보를 돕고 있었다. 이왕 출마했는데 낙선을 하면 또 상처를 받을까 염려되었다. 내가 그의 결혼의 주례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어느 잡지사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는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분명히 그가 서울 시장에 출마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내 생각을 밝혔다. 그러나 막상 그가 최종적으로 서울시장 입후보로 등록을 하자 내 생각은 바꾸어졌다.

휴대폰을 한 대 더 마련했다. 기존의 휴대폰은 업무용으로 겸용을 하니 전화가 수시로 오고 사용이 번거로웠다. 서울시에 거주하는 친지들을 찾아보고 전화를 돌렸다. 내가 있는 단국대를 나온 인재이니 시장으로 활약할 기회를 주라는 부탁을 했다. 그런데 내 얘기를 듣는 상대편은 “박 후보가 무슨 단국대 출신이냐, 언론에는 서울대로 나온다.”며 나를 당황하게 했다. 많은 미디어에서 그를 단국대가 아닌 서울대 출신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박 후보가 학력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도 나왔다. 언론의 속성에 실망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박 후보를 도와달라며 전화를 돌렸다. 얼핏 추산해보니 전화만 1천 통을 넘긴 것 같았다.  

그래도 박원순 후보에게는 일체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왕 시작한 일이니 동문이 잘되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한 일었을 뿐이다. 나중에 선거에서 당선되고 박원순 시장은 나와 아내, 그리고 아들 내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헤아려보니 그의 주례를 서고 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였다. 저녁 자리보다 우리 동문 20만 명 가운데 처음으로 서울시장이 나왔다는 그 사실이 기뻤고, 나에게 이런 기쁨을 준 박 시장이 고마웠다. 나와 박원순 시장의 이런 저런 인연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에서 많은 부탁이 들어왔다. 세상 인심이란 그런 것이고 애써 그런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 연락을 않고 지낸다. 



우리는 ‘대학(大學)’이라는 단어를 ‘크고 심오한 학문’을 배우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대학’에는 그 정신적 터전,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게 가지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이에게 시국사범의 굴레를 씌우고 삶을 송두리째 흔들면서 이를 당연시하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도 우리 기성세대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 수도 있다. 젊은이에게 더 넓고 관대한 문호를 열어주려는 노력이 대학의 본분일 것이다. 그 인간적 풍토에서 미래를 열어갈 인재가 성장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