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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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처럼, 친구처럼, 그러나 아픔을 준 김상현 의원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9.01.25 (최종수정 : 2019.02.21)
조회수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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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농 김상현 의원의 1주기가 다가온다. 지난 2018년 4월에 후농은 별세를 했다. 아는 사람이 많지 않겠지만 후농은 나에게 매우 각별한 정치인이었다. 후농과 나는 단국대학을 통해 인연을 맺었고, 정치인 중에서 나와 가장 친한 친구 같은 정치인이었다. 후농은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성격이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6선 의원으로 한국 현대정치를 이끈 거물이고 6월 항쟁을 이끌어낸 전략가이자 김대중 대통령의 대표적 참모로 인정받았지만 인생 후반기에는 김대중 대통령을 배신했다는 오해 섞인 비난을 받으며 관계가 멀어지기도 했다.  



내가 후농을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우리 대학 학생과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다. 4월 혁명이 일어난 뒤로 대학가가 뒤숭숭하고 학생들도 들떠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학생회 간부들이 허름한 복장을 한 청년을 잡아와 내 앞에 데려왔다. 학생회 간부들의 말인 즉 “이 놈이 우리 대학을 돌아다니며 등록금도 안낸 주제에 강의를 듣고 있어서 잡아 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도둑강의를 한다는 것인데 당시만 해도 우리 대학 학생이 워낙 적어서 낯선 학생은 쉽게 구별이 가능하기도 했고, 대학을 안다니면서 대학생인 척 하며 사기나 절도를 하는 사건도 잦아서 ‘대학생 사칭’은 꽤나 험악한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었다.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인 학생회 간부들을 말리고 내력을 들었다. 잡혀온 청년은 “자신은 조실부모를 하고 고학을 하며 학업을 이었는데 결국 고등학교를 못 마쳤고 집이 너무 가난해 대학을 못 갔지만 공부가 하고 싶어 도강을 했다”며 차분히 설명을 했다. 말을 듣다보니 무작정 우리 대학을 도강한 것이 아니었다. 재학생 중에 이 젊은이와 가까운, 나도 가깝게 지내는 학생들이 있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는 정치인을 꿈꾸고 있는데 단국대 정치학과의 모 교수의 강의를 꼭 듣고 싶었다”며 “마침 정치과에 친구가 있어서 그를 따라와서 강의를 들었다”고 밝혔다. 그 친한 학생은 김혁동이라고 당시 웅변으로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많이 해 유명한 학생이었다. 말을 듣다보니 그 자신도 웅변이 능해 상을 받기도 했다는데 말하는 품이 구수하고 솔직했다. 꾸밈없이 자신의 포부를 밝히며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비관하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는 자세에 인정이 끌렸다. 나는 그를 돕기로 했다. 나는 그를 교무과장에게 데려가 소개시켰다. 교무과장을 설득해 비록 학점을 받지는 못하지만 원하는 강의를 듣도록 해주도록 했다. 당시 실행중이던 청강생 제도를 빌려서 ‘비공식 청강생’으로 정치과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해준 것이다.

이 비공식 청강생이 바로 나중에 김대중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을 민주화추진협의회로 묶어 직선제 개헌을 만들어내 민주당 부총재를 지낼 김상현이었다. 당시 내 나이 29세였고 김상현 의원은 26세였다. 자주는 못 만났지만 나이가 비슷한 탓에 같이 밥먹고 술먹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이 새롭게 굵은 가지를 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국회의원이 되면서부터다.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뤄지는 과정에서 야당의원이 항의를 위해 사퇴를 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로 인해 실시한 서대문 갑구 보궐선거에 후농이 당선되었다. 그의 나이 30세 때의 일이니 그는 하루아침에 정치계의 스타가 된 셈이었다. 특유의 웅변실력으로 연설 잘하고, 패기있는 국회의원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지 얼마 안 된 시간에 그는 나를 찾아왔다. 비공식 청강생을 시켜준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국회의원이라 해도 가난을 떨치지 못해 그가 밥살 일은 없었다. 그는 술을 좋아했고, 주량도 상당했다. 나는 술을 즐기지 않는데 후농의 술자리는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도 술이 마시고 싶으면 나를 청했다. 그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로서 부담 없이 살아가는 얘기를 하는 데 서로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후농은 남에게 부담을 주는 성격이 아니었고 정이 많았다. 술좌석에서도 농담과 만담을 잘 해서 함께 자리를 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특히 그는 남도창을 구성지게 잘 불렀다. 그와 자리를 함께 하면 술값은 내가 부담하였다. 가난에 쫒겨 살아온 그의 내력을 비교적 잘 아는 나로서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립각을 세운 야당의 초선 의원에게 특별한 기대를 걸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저 그의 의지가 정계에서 시들지 않길 바라는 기대를 담아 술값을 냈던 것이다. 물론 술자리를 파하고 헤어질 때면 “장 총장에게 진 빚은 꼭 갚아야 겠다”고 입버릇처럼 장담을 하고 했다. 

당시 우리 대학은 큰 시련을 겪고 있었다. 군사정부가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내 선친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고 주간부를 폐교했다. 이로 인해 학교 존립이 어려울 만큼 교세가 오그라들고 극심한 재정난이 왔다. 설립자이신 범정 장형 선생은 낙담하여 병고에 시달리다 별세를 했다. 나는 학장으로 발령받았다. 내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1966년 11월, 학장으로 취임하자 나는 단과대학인 단국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겠다고 공언했다. 쪼그라든 우리 대학의 현실을 극복할 유일한 대책이 종합대 승격이라고 믿었다. 졸업생이나 재학생 모두의 숙원이 종합대학 승격이었다. 


종합대학 승격은 문교부의 소관이었다. 그러나 장관의 결재를 받아도 국무회의를 거쳐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대학의 명운이 달린 문제여서 지역구에 대학을 둔 국회의원들도 직간접으로 이해관계가 얽혀있어서 국회의원들의 협조도 필수적이었다. 나는 종합대학 승격을 공언한 뒤 매일 문교부(지금의 교육부)를 찾아가서 주무 부서의 계장, 과장, 고등교육국 국장을 만나 민원을 들어 달라 호소했다. 국회의 도움을 받고자 문교부를 소관하는 문공위원회의 여당 간사로 있는 김종호 의원과 위원장인 이돈해 의원을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갔다. 두 분 모두 무난히 지원을 약속받았다. 

일이 잘 풀리는 듯 했지만 정작 종합대학의 인가의 실무적 최종 결재권을 가진 문홍주 장관을 만날 수가 없었다. 일을 착수한지 한 달이 다돼가는 12월이 왔다. 해가 바뀌면 대학 입학정원이 조정되고, 교육부 관료의 보직도 변화하고 그러다보면 우리 대학의 민원은 이리저리 치이다가 무산되고 말 가능성이 높았다. 애가 탄 나는 문홍주 장관 면담을 몇 번이나 신청했지만 면담 허락은 없었다. 오히려 문교부 차관의 결재가 난 승인 서류를 장관이 거부해 책상에 잠들어 있다는 전언을 들으니 실망이 더 클 수 밖에 없었다. 문 장관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나는 이리저리 수소문을 하고 도움을 요청하다 서울대 사대 입학동기의 도움으로 문홍주 장관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나는 장관 부인의 호의로 안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문 장관을 보고 대뜸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말을 꺼내려 했다. 

그러나 아침 식사 중이던 문 장관은 나를 보자마자 숟가락을 탁 놓으며 “당신 장 학장아냐. 학장 된지 한달 밖에 안되 총장 직을 하고 싶어 이 난리를 피는 거요. 국회의장님이 나에게 대구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해달라 했지만 거절한 나요. 주간부 복구한지 1년 밖에 안된 단국대가 종학대로 승격하면 다른 대학이나 청탁을 한 정치인들이 다 원수가 되는 건데 내가 단국대만 결재를 할 수 있겠소?”

그는 화를 내며 자리를 떨치고 출근을 재촉했다. 나라고 장관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 순간은 수모를 당하는 창피함에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야당 의원이지만 김상현을 만나보자. 문공위 야당 간사를 맡고 있으니 내 하소연이라도 들어주겠지.” 나는 그길로 국회를 찾아가서 김상현 의원을 찾아갔다. 그는 나에게 정치과 도강을 부탁하던 시절과는 크게 달라져 있었다. 풍모도 의젓하고 용모도 단정했다. 하지만 나를 보자 반기는 표정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내 얘기를 들은 그는 “내가 언젠가 신세를 갚는다고 말했잖소. 내가 도울 일이 있다니 나도 기분이 좋은데요?”라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 의원은 “문 장관이 지금 나에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할 일이 있어요. 1967년도 문교부 예산을 놓고 여야가 대립 중이거든요. 이걸 풀려고 문홍주 장관이 나에게 술자리를 갖자해서 곧 만납니다. 이 자리에 장 학장님이 동석하세요. 그러면 장 학장님의 민원을 소상히 설득할 수 있을거요.”

나는 장관의 비밀스러운 술자리에 3자인 내가 들어가면 더 큰 수모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김 의원은 “내가 문 장관에게는 장 학장과의 저녁식사가 마침 이 날로 선약했는데 장관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아예 두 분을 같이 합석하게 했다고 설명하면 장관도 화를 내지는 못하겠죠.”라며 “아니 이런 일이 있으면 당연히 나를 먼저 만나셨어야지 이제야 만나느냐?”며 농담을 건넸다. 나도 “야당 의원을 통해 청원을 하면 될 일도 안될 것 같아 그랬다”며 농담 섞인 진담을 하니 그는 웃으며 “그 날 만나면 내가 바람을 잡을 테니 장 학장님이 장관님을 아주 물고 늘어지라.”며 대꾸를 해 서로 웃으며 헤어졌다.


약속 장소는 신당동에 있는 작은 요정이었다. 그 당시 요정에서 중요한 논의를 하는 것이 정계의 관행이었는데 이곳은 그런 요정에서도 꽤 알려진 곳이라 했다. 김 의원과 문 장관은 저녁 7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나는 8시에 들어가는 것으로 각본을 짜두었다. 내가 도착해 방으로 들어가자 문홍주 장관은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장 학장이 여긴 무슨 일이요? 며칠 전에는 우리 집 안방에 쳐들어오더니 이젠 내 술집마저 찾아오고. 아주 형편없는 친구구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관이 껄껄 웃었다. 

김 의원이 “제가 장 학장하고 오래된 인연이 있어 친구처럼 술마시는 사이입니다. 오늘 바로 그 약속이 있는 날인데 약속을 깰 사이가 아니라 이리로 오라했습니다.”라며 나를 두둔했다.

문 장관은 “장 학장이 재주가 좋구만. 이제 김 의원가지 동원해 단국대 일로 나를 꼼짝 못하게 묶어놓고. 기왕 왔으니 술이나 한 잔 합시다.”

두 사람은 이미 술을 마시고 있는 상태였다. 종합대학 승격에 관한 대화는 일체 꺼내지 않고 따라주는 술을 마셨다. 문 장관은 그런 나에게 “장 학장이랑 오늘 담판을 져야겠소.”라며 계속 잔을 주고받게 했다.

김상현 의원이 나를 대신해서 단국대학의 어려운 사정을 설명하였다. 

“장학장의 부친이자 단국대 설립자께서 모함을 받아 반혁명 인사로 몰렸고, 중앙정보부의 실수로 구속됐다가 풀려났어요. 단국대 주간부 폐교는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작용을 한거죠. 그런데 지난해는 정부에서 장형 선생에게 건국 유공자로 독립운동 공로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그리고 주간부도 복원되었으니 그간의 일이 올바른 처사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거죠. 이번에 단대를 종합대학으로 승격해주셔서 억울함을 풀어주세요.”라고 사정을 했다. 

문 장관은 진지하게 얘기를 듣더니 “아니, 그런데 김의원은 단대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렇게 장 학장의 민원을 대변하시는 거요?”라며 되물었다.

김 의원은 껄껄 웃으며 “저는 졸업장 없는 단국대 동창입니다. 등록금 내지 않고 단대 정치과에서 강의를 들었습니다. 학점도 없고 졸업장도 없지만 내 머리 속에는 나와 같이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 못지않게 정치학 지식이 내 머리 속에 가득차 있습니다. 그 덕으로 나는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그 호의를 베푼게 장 학장이고요. 저는 장 학장하고 호형호제하는 사이입니다.”라며 다시 한번 장관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문 장관은 “내가 오늘 혹 떼러왔다가 혹 하나를 더 달고 가게 됐구만요. 좋소 이렇게 된 거  장 학장 나하고 내기 합시다.”라더니 조니 워커 3병을 주문했였다.

위스키 3병이 들어오자 “이거 한 병씩 각자가 다 마셔야 합니다. 장 학장이 나를 술로 이기면 총장감이 되는 인물이고 나보다 먼저 취해서 쓰러지면 종합대학 승격은 절대 불가하니 약속하겠소?” 하면서 내 술잔에 얼음도 넣지 않고 술을 가득 부어 마시라고 강요했다.

나는 “좋습니다. 평소 술을 마시지 않지만 마시다 죽어도 좋으니 다 마실 것입니다. 그러니 다 마시면 우리대학 종합대학 승격은 약속해주셔야 합니다!” 하고 장관과 술을 주고 받았다. 사실 나는 술을 즐기지도 않지만 체질적으로 술을 잘 마시지도 못했다. 맥주도 피하는 나인데 독한 양주를 별다른 안주나 얼음도 없이 스트레이트로 다 마시고 나니 이미 나는 호흡이 곤란할 지경이었다. 화장실을 가고 싶지만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서 일어나면 그대로 쓰러지고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똑바로 앉으려 최선을 다했다. 이 자리에서 문 장관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하면 내가 아니라 대학이 쓰러질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술이 더 돌다가 문 장관은 완전히 취했다. 자리에서 스르르 옆으로 쓰러져 누워버렸다. 그러면서 혀가 풀린 목소리로 “술을 못 마신다는 사람이 진짜 한 병을 다 비웠구먼. 허허허  용기가 대단해!”라며 잠에 빠졌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가 넘었다. 당시에는 12시부터 통금이니 국회의원과 장관인 두 사람은 그렇다 치고 나는 집에 가기도 어려웠다. 문 장관은 비서관이 들어와 부측해서 모시고 갔고 김상현 의원도 만취가 되어 보좌관의 부측을 받아 귀가했다. 나는 요정에서 준비한 차를 타고 귀가했다.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속은 쓰리고 아팠고 머리는 온통 돌을 얹어놓은 듯 했지만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 나는 차를  집 앞에 세우고 기사는 통금에 단속될까 염려되니 우리 집에서 재우라 한 뒤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음날 김상현 의원한테서 전화가 왔다. 내 몸을 걱정하고는 문 장관이 단국대 종합대학 승격 결재 서류를 장관실로 가지고 오라고 하부에 지시했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진심으로 그의 도움과 일의 마무리까지 동참해주는 호의에 고마움을 느꼈다. 

종합대학 승격의 1단계 난관을 이렇게 김상현 의원의 도움으로 풀어낼 수 있었다. 이후 2차 난관은 종합대학 승격 안건을 국무회의에 통과시키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차라리 대학을 국가에 헌납할 테니 단국대를 국가에서 운영하시라.” 호소하며 종합대 승격을 내락 받았다. 일부 국무위원들의 반대에 부딪혔을 때는 정일권 국무총리를 설득해 끝내 관철시켰다. 결국 학장 취임 한단 여 만에, 1966년이 가기 전인 12월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최종 승격 인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여야 문공위원들의 반발이 없도록 의원들을 다독이는데 김상현 의원의 지원이 거듭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으니 ‘도강을 허락한’ 학연이 가져온 결실치고는 실로 크다 할 것이다. 





우리 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이후에도 후농을 자주 만났다. 그는 1967년에 전국구로 공천을 받아 전국구로 재선 의원이 되었다. 후농은 테니스를 좋아했고 나 또한 테니스를 즐기는 편이라 일정이 비는 오후에 만나서 운동을 같이 했다. 술 좋아하고, 잘 마시기로 국회에서 최고로 꼽히는 후농이었기에 운동이 끝나면 식당을 찾아 술을 즐기는 편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나는 절대적으로 정치 얘기는 서로 피했다. 물론 회식을 하면 밥값은 내가 부담했다. 후농은 원래 가난했지만 정치인으로서도 치부를 하거나 돈을 밝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집에 돈을 가져가는 법이 없었다. 후농의 아내가 이것저것 작은 장사를 해 간신히 가정 경제를 꾸려나갔다. 후농은 또한 나를 자주 만나고 술을 같이 마셔도 절대로 나에게  돈을 요구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후농은 재일교포 문제에 관심을 많이 쏟아 연구소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일본을 갈 때에 “여비가 없는데 좀 도와 달라”는 정도였다.

이렇게 교유를 하다가 정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지고 활동 범위도 커지면서 만남이 소원해졌다. 나도 대학 일로 점점 내 시간을 갖기가 힘들어졌고, 그도 김대중 총재의 최측근 보좌역으로서 나에게 신경을 쓰기 힘들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고 요정도 싫어하는 점을 그도 잘 알고 있었으니 술동무로서 내 역할도 그리 좋은 편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연락이 뜸해지고 만남도 드물어지면서 시간이 흘렀다. 고학생 김상현과의 인연으로 뜻밖의 도움을 받았던 나는 이번에는 정치인 김상현과의 우정으로 뜻밖의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을 공표하면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는 해산되었다. 언론은 재갈을 물어야 했다. 동시에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장희 대통령에 맞선 김대중 총재와 그의 핵심 참모인 김상현 의원도 몇몇 핵심 야당 인사들과 함께 극심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후농은 국가보안사령부 서빙고분실로 체포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했다. 물론 당시에는 은밀한 소문으로 구전되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고문을 당하고 당하던 후농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다. 

보안사 수사요원들은 고문을 하면서 “너에게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불라.”고 요구했다. 그 때 김현옥 서울시장과 내 이름을 나왔다고 했다. 나중에 태풍이 지나고 그 이유를 알게 됐지만 나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가 아닐 수 없는 문제였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던 나는 비상계엄 아래 학사운영을 논의하고자 학처장 회의를 하고 있었다. 계엄사령부에서 나를 만나러 왔다며 잠시 복도로 나와 달라는 전갈이 있었다. 나가보니 낯선 사람이 신분증을 보이며 동행을 요구했다. 계엄사령부가 발행한 임의동행 요청서도 있었다. 빨간 줄이 두줄로 그어 있는데 ‘계엄사령관 노재현’이라고 이름이 적혀 있었다. 비상계엄법에 의해서 영장 없이 임의 동행할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저기 세워놓은 검은 세단 차에 함께 타고 갑시다.” 수사관들은 명령조로 지시를 하였다. 

나는 회의를 부총장에게 넘기고 번호판도 없는 검은 세단차를 두 사람과 함께 타고 갔다. 나는 계엄사령부로 가는 줄 알았는데 서빙고에 있는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이라고 하는 곳에 도착했다. 내 기억으로는 미8군 사령부에서 멀지 않은 언덕에 있는 2층 건물이었다. 2층인지 아래층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건물 구석진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방은 아주 작았지만  물이 차 있는 욕조가 있었다. 방안은 사무실 책상이 놓여 있고 수사관과 마주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두개 있었다. 한 눈에 이곳이 소문에 들었던 재야인사들을 잡아다 고문하는 곳이구나 하는 느낌이  왔다. 물고문 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내가 무슨 큰 죄가 있다고 나를 물고문할까 하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잠시 뒤 계급장을 달지 않은 군복을 입고 ‘상고머리’를 한 삼십대 중반의 젊은이가 나를 신문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살기가 도는 분위기였다. 수사관은 나에게 종이를 주더니 내가 아는 정치인의 이름을 적으라했다. 나는 “안다는 뜻이 어느 범위를 말하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수사관은 “그런 것도 알려 줘야 하냐?”며 오히려 언성을 높혔다. 적당히 내가 아는 사람을 몇 명 적어 넣었다. 이를 건네받아 취조관이 명단을 읽어 보더니 갑자기 화를 내며 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김상현의 이름은 왜 적지 않았냐”고 잔뜩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당신하고 제일 친한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지 않은 것을 보니 뭘 숨기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서류를 꺼내더니 김상현 의원이 실토했다며 내용을 읽어줬다. 서류는 김 의원 취조 조서였는데 그가 실토했다는 내용은 “내가 거액을 지원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나는 그런 일이 없으니 당연히 부인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강하게 부인하면서 말도 안되는 내용을 왜 강요하느냐고 항의하자 나를 째려보던 수사관은 한명을 남겨두고 밖에 나갔다. 

다시 돌아온 그는 “이 양반이 총장이라고 대접해주니 여기를 우습게 아는거요? 다 아는데 진술 거부하는거요?”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김상현 의원에게 밥을 사거나 술을 같이 한 적은 종종 있었고 그가 일본에 출장간다며 용돈을 달라고 해서 몇번 주었으나 그야 말로 내 월급의 반의 반도 안되는 돈이었다.”라는 요지로 간곡히 설명했다. 김상현 의원이 불었다는 조서에 따르면 금액이 내가 실제로 지원한 용돈의 10배도 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잠시 후농의 과장된 진술에 왜 이런 엉뚱한 말을 했을가 화가 났다. 그러나 이내 생각이 바뀌었다. 도대체 얼마나 맞고, 고문을 당했으면 이렇게 있지고 않은 사실을 말했을까 하는 짐작이 들었다. 내가 겨겨한 반응을 보이며 왜곡된 사실에 계속 항의하자 그들은 물리적 고통을 가하기 시작했다. 거의 한나절을 매질에 시달렸다. 수사관의 구타는 육체적 아픔보다는 정신적 수모와 모욕감이 더 깊게 다가왔다. 

자백을 강요했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강요받는 줄거리는 내가 ‘김상현 의원을 통해 김대중 총재에게 자금즐 역할을 했다’라는 것인데 그럴만한 재력이 나에게 없었으니 인정할래도 할 수가 없는 억지였다. 맞으면서 분하기도 했지만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의 이면이구나. 암흑 세계가 이렇게 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우울했다. 군사쿠데타 직후 선친이 장면 총리 사건에 연루됐다는 무고에 휘말려 나 역시 끌려가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서빙고 분실의 구타는 그때보다 더 고통스러운 아픔이었다. 취조는 하루 만에 끝났다. 정치에 간여하지 않은 그동안의 이력과 대학 육성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 여당에 협조하며 쌓은 네트워크가 더 이상의 악화를 막은 것 같았다.

내가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서 풀려 나온 후에 김상현 의원 부인이 우리 집을 찾아 왔다.부인은 “남편을 형무소로 면회가서 만났더니 정부와 여당에 가까운 사람의 이름을 대면 재야 인사들 보다는 고통을 받지 않을 것 같아서 부풀려 자백을 했다고 해요. 너무 고문이 심해 정신을 잃고 다시 고문을 받는 일을 일주일 넘게 당하니 급한 불을 피해야 했기에 폐를 끼쳤다며 미안하다 꼭 전해달라 해서 이렇게 찾아 왔어요.”라며 거듭 와서 죄송하다 했다. 말을 전하는 부인 역시 남편의 극심한 고통과 이로 인한 결례가 어찌 쉽게 받아들여지겠는가. 후농의 아내는 말 끝에 참혹한 현실을 놓고 눈물을 참지 못했다.


후농은 그 뒤로 2년 정도 감옥 생활을 했다. 출옥을 한 뒤 나를 찾지 않았다. 나는 그런 후농의 뜻을 서운해 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잠시 “당신의 진술로 나는 물론이고 대학과 대학 재단이 큰 봉변을 당할 뻔했다.”고 항변할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가 당한 고통의 크기는 얼마나 컸을까. 그리고 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나와의 재회를 피하게 하는 것이리라.”하는 마음으로 이해를 하기로 했다. 

대학을 통해 맺은 인연으로 어느 동문보다 더 뜨겁게 나를 도와준 후농 김상현 의원의 유업이 우리나라 정치계에 좋은 자산으로 남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