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게시판 뷰
게시판 뷰페이지
석두성 - 청년실업가와 고학생이 맺은 40년의 인연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8.12.18
조회수 1,290
썸네일 /thumbnail.46556.jpg

1957년 3월에 대학을 졸업한 나는 명동의 증권가에 발을 내딛었다. 큰돈을 벌어 아버지의 육영사업을 돕고 싶다는 것이 동기였다. 또 하나는 내 나름대로 제대로 된 장학 사업을 하고 싶다는 꿈을 실현하고 싶어서였다. 내 나이 스물 대여섯 살로 한창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자부하던 때였다. 당시 명동은 한국의 돈이 몰리던 곳이었다. 증권사와 사채업자들, 거기에 암달러상까지 전쟁의 참극을 벗어나려는 신생독립국가의 금융 산업이 막 기지개를 켜던 요람이 바로 명동이었다. 당연히 나도 증권회사를 들어갔다. 당시 한창 잘나가던 대창증권 주식회사였다.

당시 증권회사의 돈벌이는 주식이 아니라 국채였다. 기업은 전쟁으로 시장이 다 무너진 판이니 제대로 된 회사가 없었고 주식도 당연히 수익을 낼만한 형편이 아니었다. 핵심인 되는 투자 수단은 국가가 발행하는 채권, 즉 국채였다. 휴전 뒤 부족한 복구자금을 융통하려고 정부는 5%의 이자를 보증하는 채권을 발행했다. 이 채권을 ‘5분리(五分利) 건국국채’라 불렀다. 이 채권은 발행 액면가에 비해 20% 정도의 가격으로 시장에 나오는 데, 이를 갖고 있으면 거치기간 뒤에 두세 배, 만기인 5년이 지나면 다섯 배의 상환금에 이자를 챙길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이 국채를 사려는 투자자들이 몰려 유통가격이 수시로 오르고 내리는데 바로 이 틈을 이용해 거래 수익을 챙길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요즘 증권이나 선물 거래에 이용되는 레버리지 효과도 활용할 수 있으니 작은 돈으로도 수십, 수백 배의 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나는 대창증권에서 국채 투자에 제법 능력을 발휘했다. 레버리지 효과를 활용해 굵직한 거래에 성공했고 당연히 큰 수익을 거뒀다. 1년도 안되어 나는 대창증권의 상임 감사 역을 맡았다. 지금으로 치면 투자 거래를 조정하는 역할이었다. 그 때 나와 같이 임원 직위에 있는 이들은 대체로 50세 정도였으니 나의 성과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증권에 머무르지 않고 본격적인 자본 투자 사업을 시작했다. 내가 세운 사업체는 흥이건설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건물이나 여러 시설들을 복구해야 했기에 이런저런 건설사업들이 줄을 이었다. 그러나 건설이나 설비 기술자들은 자본이 없었다. 그들은 명동에서 사업 자본을 구해 공사를 진행하고 대금을 받으면 빌린 돈을 갚았다. 이 과정에서 투입되는 대부금의 이자는 지독한 고율이었다. 공사를 진행해 이득이 나오면 보통 돈을 빌려준 대부업자가 70%를 갖고, 기술자들은 30%만 갖고 갈 정도였다. 나는 여윳돈을 여기에 투자했다. 물론 내 원칙은 달랐다. 나는 사업 이익의 30%를 갖고, 기술자들에게 70%를 배분했다. 대신에 공사대금을 떼먹힐 염려가 없는 안전한 프로젝트를 갖고 오도록 했다. 또한 공사를 가져오는 기술자들의 인품도 살펴보았다. 신용과 기술력이 좋은 이들에게 자금을 융통해주었다. 사기와 투기가 난무하던 시기였지만 ‘자본가 30%, 기술자 70%’라는 나의 사업 원칙은 빠르게 돈을 벌게 해줬다. 

업계의 나에 대한 평가도 좋았고, 젊은 사람이지만 큰 사업가가 될 것이라는 칭찬도 많이 받았다. 26살의 청년이 구하기 힘든 미제 세단 승용차를 타고 다니며 아버지 벌의 연세를 가진 이들을 부하직원으로 두고 사업했다. 다들 나를 청년실업가라 불렀고 나 역시 이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많은 돈을 만졌지만 나는 당시 사업가들에 유행하던 도박, 요정, 댄스 행락에 동참하지 않았다. 부친의 엄격함도 원인이었지만 처음부터 나는 사업의 목적을 장차 내 철학을 살린 장학사업을 한다는 데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학 이사장으로 계시는 부친께 용채를 드리는 

것이 기쁨이고 나름의 자부였다. 대학 때는 택시운전기사의 조수까지 시키며 나에게 호된 가르침을 주시던 부친에게 용돈을 드리면서 나는 효자라는 칭찬을 받았고 그것이 내 보람이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던 겨울이었다. 유난히 추운 날로 기억된다. 고등학생 모자를 쓰고 교복을 입은 학생이 우리 사무실에 들어왔다. 추위에 얼굴이 붉게 얼어 있었다.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돌아다녀서였는지 손도 붉게 얼어 있었다. 교복 윗주머니에 명찰이 있는데 ‘석두성’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얼굴이고 손이고 너무 추위에 얼어붙은 듯한 행색이어서 아마 밖이 너무 추우니 난로 불에 몸이라도 녹이려 들어왔나 보다 하고 일부러 시선을 돌리려했다. 그런데 학생은 머뭇거리며 뭔가를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추워서 들어온 게 아닌가 보네?” 내가 묻자 학생은 용건을 밝혔다.

“저... 도장이나 명함 주문을 받으러 왔어요.”

“교복을 입은 걸 보니 학생 같은데, 고등학생이 낮인데 학교는 안가고?”

“저는 선린상고 다녀요. 야간부라 밤에 학교가니까, 낮에는 이걸로 돈을 법니다.”

고학생(苦學生)인 셈이었다. 당시에는 일하면서 학교에 다니는 고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명동에서 이렇게 힘들게 일하며 배우는 학생을 만난다는 것은 기특하고도 서러운 일이었다. 내력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육이오 사변 나고 아버지가 좌익으로 몰려 총살을 당했어요. 어머니는 여주와 이천에서 참기름을 사서 동네에 찾아가 팔아 형제들과 생계를 꾸리고 있습니다. 형제로는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는데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어요. 나 홀로 서울에 와서 야간부를 다니고 있는데 일을 해서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학생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이상하게 이 학생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없이 혼자 생계를 해결하면서 공부를 하려는 노력이 꺾일까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얘기를 듣자마자 집으로 전화를 해 아버님과 어머님께 사전 승낙을 받고 아내에게도 사전 통고를 했다. 그리곤 퇴근길에 이화동에 있는 내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에 남은 방이 있어서 혼자 사용하도록 했다. 나는 석두성 군에게 내 계획을 밝혔다.

“당장 내일부터 명함이나 도장 주문 받으러 다니는 행상은 그만두거라. 내가 우리 회사에 사환으로 채용하도록 할 거야. 상고에서 공부 열심히 하면 더 좋은 일자리도 생기고, 아니면 네가 원한다면 대학공부도 할 수 있어. 그리고 두 동생들에게도 말해라. 이번 봄이 오면 서울로 와서 야간 학교에 다닐 준비를 하라고 해. 일자리는 내가 알아 봐줄 테니 3남매가 같이 일하면서 공부해서 차례로 취직하고 서로 도와주면 어머님도 편해 지실거야.”

나는 내가 말한 계획대로 하나씩 풀어갔다. 두성 학생은 사환으로 채용했고 두 동생도 봄에 신학기가 시작하면서 야간 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여동생은 아버지께 청원을 해 단국대학 재단의 상무이사실에서 사환으로 일할 수 있도록 했다. 석두성 군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단국대학 야간부 상학과에 입학시켰다. 학교 밖에서 일하면 공부에 지장이 있을 수 있어 대학  도서관에서 직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석두성 군은 4년간 낮에는 대학 직원으로, 밤에는 대학생으로 착실하게 공부를 마쳤다. 두 동생들도 똑같이 일하고 배우면서 성장했다. 석두성 삼남매가 모두 힘과 마음을 합쳐 여러 해 동안 월급을 꼬박꼬박 받아서 저축한 덕분에 어머니도 행상을 안하고 서울로 모시고 와서 함께 생활할 수 있었다.

나는 석두성 학생을 대학생으로 만든 뒤 ‘청년실업가’ 생활을 접기로 했다. 앞서 말한 국채 매매사업이 자유당 정부의 강제로 인해 일대 파동을 겪어야 했고, 이 과정에서 하루아침에 대창증권이 파산하고 말았다. 정부의 파행적 정책,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후진적 경제구조에서 기업이란 모래성과도 같은 허무한 일이라는 자각도 했다. 기업을 키우려면 권력을 섬기고, 돈 벌 일을 찾으려면 도박이나 술집을 출입해야 한다는 풍토도 나와는 맞지 않은 일이었다. 증권사업을 정리한 나는 학계 진출로 내 삶의 방향을 재정립해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에 전념하고 있었다. 

반면에 석두성군은 대학을 졸업하더니 자신의 경제적 발판이었던 대학 직원직을 떠나 증권 회사로 전직했다. 고교 동창의 권유가 있었다는 데 증권업계가 아무래도 돈을 벌고 출세하기가 빠르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대학 교직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어서 증권회사 정식 사원으로 취업이 되었다. 그가 몇 년의 세월이 흘러 제법 정사원으로 활동할 수 있을 쯤 나를 찾아와서 자기네 증권회사에 투자를 할 사람을 소개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증권회사는 당시만 해도 사원이 성장하려면 굵직한 투자 자금을 유치하는 것이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나는 기꺼이 내 장인을 소개 해주었다. 내 장인은 석두성 군이 우리 집에서 여러 해 동안 숙식을 하면서 가족처럼 지냈기 때문에 그를 믿고 상당한 금액을 투자하였다. 결과적으로 내 장인의 투자는 쪽박을 찰만큼 결정적인 실패가 되고 말았다. 석두성 군은 장인을 자기 증권사의 고객으로 유치한 것이 아니라 장인의 돈으로 자신이 직접 투자를 한 것이다. 장인의 투자는 해당 증권회사와 무관한 개인의 문제가 돼버렸다. 그나마 석두성 군이 투자한 종목이 사고가 생겨서 홀딱 망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내 장인의 투자금은 하나도 남는 것이 없이 손해를 보고 말았다.

그뿐 만이 아니라 증권회사의 공금을 유용하여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나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 결국 장인어른의 피땀 어린 자산을 사기꾼에게 갖다 바치도록 유도한 셈이 되었다. 석두성 군의 해직도 회사에 연락하고서야 알 수 있었다. 석두성군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피하고 있었다. 그가 학교를 떠나 증권회사로 옮겨가서 성공하기를 빌었건만... 그가 근무하던 회사를 찾아가 들어보니 회사 공금을 횡령한 죄로 따귀를 맞고 쫓겨났다는 말에 탄식을 감출 수 없었다. 그 회사 간부에게 물어 보았다. 공금을 횡령했으면 왜 회사에서 고소하지 않았느냐고. 그 간부는 석두성 군이 회사 사장의 이종사촌과 결혼했기 때문에 고소할 수 없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배신감에 분통이 터졌다. 하지만 내가 그를 동생으로 삼아 공부시키고 대학 직원으로 취업을 시켰으면 끝까지 붙잡고 인간 교육을 시켜야 했는데 이를 이루지 못한 것이 나의 죄라고 자성했다. 그리고 장인에게 용서를 빌고 석두성 군을 믿고 거액을 투자한 전액을 변상해드렸다. 

석두성 군이 일국증권에서 해직당하고 전혀 소식이 없었다. 우리 집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내 동생처럼 지냈는데 내 장인의 노후 자금을 송두리째 가로챈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렇게 일이년이 흘렀다. 소식 한 줄 없던 석두성 군이 나를 집으로 찾아 왔다. 

“아니 이런 배은망덕한 놈이 또 무슨 일을 하려고 왔어?” 분한 마음에 야단을 쳤다.

그는 무릎을 꿇고 울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한번만 용서해주십시오.”

옷이 남루하고 구두도 신지 못하고 헌 고무신을 신고 왔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영양실조가 생긴 듯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그런 행색을 보니 화가 치밀다가 가엾은 생각이 나서 그간의 경위를 물었다. 자기 딴에는 개인적으로 회사 돈과 내 장인의 돈을 이용해 주식에 투자하여 성공하면 이익을 더해 돌려주고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저 했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회사마저 쫓겨난 것이다. 2년 만에 초라한 그의 모습을 보자 그에 대한 증오심보다는 가여운 생각이 들어서 용서하기로 결심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르기 마련인데 이로 인해 인생 전체가 실패로 내몰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번 일로 반성하고 새사람이 되기를 당부하였다. 나는 석두성 군을 용서하고 다시 우리 대학의 재무처 직원으로 복직을 시켰다. 일부 간부들은 학교를 등지고 떠난 자를 왜 복직시키는가 반대의 여론도 끓었다. 나는 재기의 기회를 주자고 고집하여 채용하였다. 복직한 그는 열심히 일했다. 

그 무렵의 나는 단국대학교의 규모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몰고 갔다. 내가 학장으로 취임해서 종합대학 총장으로 승진하는 기간이 불과 7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당시 사학의 재정 형편은 철저히 재학생 규모에 좌우되었다. 학생 수가 많아야 그들이 내는 등록금으로 교사도 짓고 교수도 많이 채용할 수 있었다. 규모가 큰 대학이 명문 대학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학장 취임 직후의 단국대학교 학생 수는 1천2백 여 명으로 전국 4년제 대학 가운데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교직원 수는 60여 명이었다. 나는 교세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세우고 어느 대학보다도 교세 확충에 주력했다. 사학 최초로 천안캠퍼스를 설립하여 학생정원을 확충했다. 어떻게든 대학의 외형을 확충하여 다른 대학에 비견하는 수준으로 발전하자는 의지로 몸부림을 쳤다. 당시 학생 수는 급속도로 증원되었지만 학생이 납입하는 등록금 가운데 교사와 대지를 마련하기 위한 재원으로 쓸 수 있는 돈은 등록금 전체의 20%를 넘지 못했다. 당연히 은행의 융자나 급하면 사채도 필요했다. 교수나 직원들은 대학이 욱일승천의 기세로 발전하는 데는 기뻐했지만 자금을 마련하는 문제에서는 대부분은 나 몰라라 였고 성의도 능력도 없었다.  10년이 넘는 간절한 노력 끝에 사립대학 중 학생 수로는 5위권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같은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는 데 가장 크게 협조해준 직원이 석두성 군이었다. 

종합대학 승격, 천안캠퍼스 설립 등 대학이 발전하면서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석두성 군은 나를 도와 열심히 일했고 직위도 재무처장까지 승진하였다. 한때는 법인과 대학의 재무처장을 겸직하여 다른 이들의 시샘을 받기도 하였다. 사실 법인과 대학은 사립학교법으로는 재정적으로 분리하도록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더해서 법인은 대학의 재정운용을 감사하는 것이 주요 업무이기도 하다. 나는 이같은 법률적 우려를 감안해 법인 사무처 처장 겸직이 곤란하니 하나는 내놓고 일하라고 했다. 석 처장은 그것이 섭섭하였던지 사표를 제출했다. 

내가 만류하자 그는 ‘학교가 아니더라도 먹고 살 수 있다’면서 ‘나가서 내 사업을 하겠다’고 고집했다. 생각을 다시 하라며 사표를 만류했지만 자신의 결심은 변함이 없다고 하여 결국 학교를 떠났다. 그가 떠나고 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석두성 처장이 이미 경기도 포천군(당시는 시 승격 전이었음)에 스키장을 세우려 10여 만 평의 임야를 샀다는 소문을 들려줬다. 1980년 대 들어 정부의 스포츠 육성정책이나 소득증대에 따른 스키 인구 확대에 힘입어 스키장 사업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가 믿는 바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고학생에서 대학 직원이 되어 증권회사 직원이 될 때도 훌쩍 떠났다가 장인의 돈까지 날려먹고 결국 고무신을 신은 채로 울며 도움을 요청해 받아줬는데 또 ‘학교가 아니라도 살 수 있다’며 떠나다니...서운한 마음이야 어찌 없겠는가. 그래도 부디 꿈꾸는 사업이 잘 되기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석 처장은 다시 나에게 왔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산을 사서 스키장을 만들면 큰 수입이 생기리라 생각하고 관청에 허가 신청을 냈지만 허가가 나지 않았다. 스키장 개장을 허가 받기위한 신청서는 다 반환되었다. 결국 허가를 내줄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었다. 결국 그는 나를 찾아와서 자기가 사놓은 산에 스키장이 개장되는 허가를 얻는 데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다. 이게 무슨 인연이던가. 그의 과거, 그리고 최근 나에게 몰인정하게 대하며 떠난 일을 생각하면 다시는 그를 상대하지 않으려고 결심했건만...

“그래 그 어려운 고학생이 이제 사업가가 되려 큰 도전을 한다는데 도와야지. 학교에 사표도 냈는데 이 일이 안되면 망하는 일이 아닌가. 나도 한때 청년 실업가로 큰돈을 벌겠다는 야망을 키운 적이 있지 않던가.”

결국 결심을 허물고 그를 돕는 일에 발을 내딛었다. 만나야 할 사람, 내 자존심을 굽히고 부탁을 해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장관급 인사와 현직 장관만 해도 일곱, 여덟 명을 만나야만 했다. 석두성 전 처장이 만나자 한다고 면담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경기도 지사를 비롯하여 내무부 장관, 건설부 장관, 국방부 장관, 산림청장 등을 한 달 사이에 쫒아가 다 만났다. 면담을 하며 스키장의 당위성을 설득해 허가를 내주도록 구두 약속을 받았다. 그들은 나와 단국대학이 오래전부터 많은 스키 선수와 스케이트 선수를 양성한 한국 동계스포츠의 개척자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오랜 노력이 쌓여 우리나라가 국제 동계스포츠 무대에서 국위를 선양한 기반이 되었음을 인정하여 스키장 허가를 해준 것이다. 1985년에 결국 석두성 전 처장은 스키장 사장이 되었다. 내 공덕을 잊지 않겠다며 석 사장은 스키장 이름도 단국대의 상징 동물인 곰을 빌어 베어스 타운(Bear’s Town)이라 이름 지었다. 자기는 그런 뜻이라 했지만 정작 나는 ‘베어스 타운이’ 단국대를 연상시키면서 단국대학이 소유권이 있는 양 오해를 받기도 했다. 특히, 이런 오해가 루머로 변질되어 정보나 사정기관에서 내가 베어스 타운의 숨은 소유주이니, 대학 총장이 무슨 돈이 있어 스키장을 세우느냐며 비밀리에 조사를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물론 석 사장은 감사의 표시로 나에게 개인적으로 주식을 증여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선물을 받을 내가 아니었다. 그런 대가를 받으려 내가 키운 사람에게 주식을 받을 일이 있겠는가. 정보기관의 뒷조사는 그저 루머를 확인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석두성 사장의 사업은 그 뒤로 순조롭게 발전했다. 서울에서 멀지않은 거리라는 강점이 스키어들을 불러 모았다. 이에 힘입어 스키장 내에 콘도를 지어 분양을 했는데 이것이 인기를 끌면서 회사 규모가 한 단계 도약을 했다. 돈이 잘 벌리자 그는 석두성 회장으로 위상을 높혔다. 그리고 나에게 은혜를 갚겠다면서 콘도를 선물하겠다 했지만 역시 거절했다. 나는 석두성 회장의 이런 선물을 거절할 때 마다 “사업이 잘되면 나보다 자네가 성장하는 데 발판이 된 단국대학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많이 주는 게 나를 돕는 길일세.”라고 당부하곤 했다. 

석두성 회장은 대신에 베어스타운 회사의 주식 20%를 기부하고 1990년도에 우리 대학이 미국 오리건주 애쉬랜드시에 동양문화연구소를 설립할 때에 5억 원을 기부하였다. 

더욱 큰 회사로 성장했으면 좋겠지만 나의 기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는 사업이 잘되자 건설업에도 진출했다. 특히 일본에 있는 골프장까지 인수하였는데 골프장 근처의 화산이 터졌다. 이로 인한 화산재가 매일 골프장에 쌓이는 바람에 결국 영업이 안 되어 큰 적자 부담을 지고 말았다. 건설사도 국가적 재정위기가 닥치자 극심한 불경기에 휩싸이면서 도산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인수한 건설회사는 우리 대학 교사 신축사업을 하청받기도 했으나 재정난이 겹치면서 결국 우리 대학에도 피해를 미치고 말았다. 사람은 어려운 형편에 맞닥뜨려야 진면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몇 년의 사태 진행에서 석두성 회장은 우리 대학에는 피해를, 나에게는 실로 견디기 힘든 실망을 주었다. 

재물은 쌓았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주고받은 은혜와 신의는 그렇게 가볍게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유리하면 등을 돌리고 불리하면 찾아와서 도와달라고 사정했다. 

그런 석두성 회장이지만 그는 우리 대학의 역사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다. 우리 대학이 신캠퍼스 건설 사업을 착수하려는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 요건인 대학 부지를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때 이 부지를, 그러니까 지금의 죽전캠퍼스 부지를 매입하도록 알선해준 이가 바로 석두성 회장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1957년에 명동에서 맺은 고학생과의 작은 만남이 나에게 마냥 아픔만 준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아무튼 1990년대 후반 이후 몇 번의 부침을 겪다가 석두성 회장이 세운 회사는 이랜드라는 그룹회사로 매각되었다. 후일담이지만 매각을 했는데 제대로 대가를 받지 못해 그 충격으로 병석에 들었다는 전언을 듣기도 했다. 주식을 매각하면서 우리 대학이 소유했던 베어스타운의 주식도 20%에서 단 1주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나는 그것이 나와 석두성 회장의 40년에 걸친 인연의 상징이라 생각한다. 어린 고학생을 집에 데리고 와서 같이 살며 성장을 했지만 인간적 의리보다 이재에 매몰되어 소중한 인연을 1주의 주식처럼 가볍게 날려버린 인생 여정. 

가만히 자신에게 되물어 볼 일이다. 지금의 나에게 베풀어진 호의와 선의, 그리고 하늘이 주신 도움을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