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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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 - 가련한 젊은이의 절망에 희망의 손길을 내밀은 까닭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8.11.13
조회수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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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이 저무는 12월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조찬 약속이 있어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뒤 학교로 돌아가려 차 속에 있었다. 9시를 넘은 시간이었다. 당시 서울캠퍼스가 있던 용산구 한남동은 제3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를 지나면 경부고속도로를 진입할 수 있는 교통 요지였다. 비록 차량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지만 러시아워에는 사방에서 밀려드는 차들로 제법 길이 막히곤 했다. 그 날은 유난히 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우리 대학으로 가까워질수록 차는 가다서다가 아닌 정체 상태로 빠져들었다. 학교 바로 앞인 한남동로터리에 들어서니 군인, 경찰이 차량 통행을 통제하고 있었다. 경광등이 번쩍이는 검은색 차가 늘어서있고, 경찰만이 아니라 무장 헌병과 군인들이 함께 근무하는 걸 보니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우리 대학을 나와 대로를 건너면 보이는 건물에는 다방(지하)과 중화요리집이 들어 있었는데 그 건물 주변을 포위하다시피 삼엄한 경계가 펼쳐져 있었다.

학교 앞에서 일어난 일이니 궁금증이 더해졌다. 혹시 우리 학생들이 다친 사건은 아닌지 걱정도 되어 출근을 마치자마자 연유를 알아보도록 했다. 보고를 들으니 무장 탈영병이 다방에 들어가 손님들을 인질로 잡고 군경과 대치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실내이지만 6발의 총탄을 다방 벽들에 쏘아대기도 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무장탈영병 사건이 적지 않게 일어나곤 했다. 군대 복무 여건이 험하기도 했고, 낙후된 경제여건으로 먹고살기가 힘들어 개인과 가정이 뜻밖의 불행을 당해 탈영을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인질극으로 연결되어 사람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적잖았다. 당일, 그러니까 1973년 12월 5일 오전 10시에 일어난 무장탈영병 인질사건 발생 공간은 다름 아닌 우리 대학의 바로 앞이었고, 인질극이 벌어지고 있던 무대는 ‘한일다방’이었다. 지금처럼 카페문화가 없던 ‘다방 전성시대’여서 학생들은 강의가 빈 시간에 다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시 풍습이었다. 문제의 한일다방은 학교를 나와 가장 가깝게 있는 곳이라 사랑방같은 구실을 하고 있었다.


현황을 알고 나니 이번에는 학생들 걱정에 일을 할 수 없었다. 당시 비서실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김상배 교수(당시 문리대 교수)를 불러 재학생이 인질로 붙잡혀 있는지 여부와 전후 상황을 소상히 파악하여 알려 달라 했다. 김 실장의 보고가 들어왔다. 걱정대로 우리 학생이 인질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이랄까, 아침 시간(오전 10시)이어서인지 손님도 10 명 이내였고 그 중 학생은 서울대생과 단대생해서 2명이라고 했다. 더욱 다행인 것은 무장 탈영병이 인질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을 했다는 것이었다. 정보관계자들도 나에게 “인질범의 언행을 보니 다른 사람을 해칠 정도는 아니다. 사람을 다치게 할 의도가 아니고 자신의 답답하고 초조한 상황을 못이겨 잠시 흥분한 것 같다’고 전언했다. 다만 인질로 잡힌 우리 대학의 학생에게 “혼자 남으신 어머님을 행복하게 해드리지 못해 죄송하다. 아버님 곁으로 먼저 가겠다.”는 유서를 쓰게 한 걸로 보아 자살의 위험성이 크다는 얘기도 들었다.

김 실장은 인질로 잡혀 있다가 풀려난 학생도 만나고 해서 더 상세한 얘기를 해줬다.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는데 여자 쪽 부모님 반대로 애인이 변심한 듯했다. 인질범은 애인을 불러 이를 설득하려다 탈영을 했다. 여자 쪽의 결혼 반대 원인이 탈영병의 가난한 가정형편과 이로 인한 진학 실패, 불안한 미래 때문이라는데 범인은 이같은 현실에 절망하여 자포자기한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는 보고를 들으며 그 탈영병의 고통에 공감이 갔다. 오죽 어렵고 힘든 형편이면 저런 막장에 다다른 극단적 행동을 했을까...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공부를 못한 것이 무슨 죄라고 저런 설움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앞서 말했듯이 탈영병 사건이 일어나면 대체로 비슷한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극단적 선택을 하게 했음을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가난과 불우한 환경, 대학 진학의 좌절, 애인의 변심, 군대의 상습적 폭력 등이 겹쳐 죽음을 빚는 비극으로 이어졌었다. 그때마다 나는 교육자로서 우리 사회가 젊은이에게 절망이 아닌 희망을 줘야 한다는 자성을 하곤 했다. 바로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앞마당에서 이런 참담한 일이 일어났는데 자성만 하고 행동을 뒤로 미룰 수 없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저 젊은이를 살려야 한다. 저렇게 죽게 놔둘 수는 없다.”는 울림이 치밀어 올랐다. 인질을 하나 둘씩 풀어주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자칫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예감도 들었다. 시간이 촉박함을 느낀 나는 김상배 실장에게 서둘러 부탁을 했다. 

“내가 관계 당국에 얘기를 했으니 김 실장이 그 탈영병 젊은이를 만나 봐요. 내가 그 젊은이를 최선을 다해 도울 테니 더 이상 과한 일을 벌이지 말고 자수하라고. 대학 공부도 시켜주고 가족들 먹고 살 취직자리도 알아봐줄 꺼라고 약속하세요. 이 장충식이 보장한다고. 얼마든지 떳떳한 생활을 하도록 도울 것이니 두려워말고 자수한 뒤 새 출발을 하자고 해요.”

 

김상배 실장은 용산경찰서 형사를 대동하고 인질극이 벌어지는 한일다방을 찾아갔다. 비록 내 부탁을 받고 방문했지만 김상배 실장의 배짱도 보통은 아닌 셈이었다. 나나 김 실장 모두 40대 초반이었기에 그런 발상과 실천이 가능했을 것이다. 

탈영병을 만나고 돌아온 결과는 앞서 들은 보고와 같았고 구체적인 사항이 밝혀졌다. 이름은 이*승, 당시 21세. 육군 일병. 일찍 부친이 별세하고 모친은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지만 생계가 어려웠다. 이*승 군이 장남으로 모친과 5남매를 책임져야 했다. 심한 가난에 시달리면서 고등학교 때 전교회장을 지내고 대학 입시도 2번이나 합격했지만 결국 입학을 포기해야 했다. 약국 등에서 일하면서 중학교 동창과 연애를 했는데 입대를 하자 멀어지고 여자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자 애인을 설득한다고 외출을 한 뒤 곧바로 탈영을 했다. 김 실장은 이*승 군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만나보니 눈빛이 오히려 자기가 저지른 일 때문에 겁먹은 듯 하고, 자수를 설득하니 눈물이 그렁거리는 게 성품은 착한 사람으로 보였다.”며 “곧 애인을 만날 것이고 그러면 자수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새 출발을 전적으로 돕겠다’고 한 나의 약속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승 군은 당일 오후에 자수를 했다. 인질극 발생 두 시간이 갓 넘었을 때였다. 사건이 끝나고 당일 석간이나 이튿날 조간은 온통 이 사건을 톱기사로 다뤘다. 나는 이*승 군을 돕기로 결심했고 내 의지를 전달했기에 연락을 기다렸지만 이*승 군은 어떤 연락도 없이 형무소에 수감이 되었다. 고민하던 가운데 나는 사건 당일 인질로 잡혀 있던 우리 대학 학생을 수소문해 만나보았다. 인질로 잡혀 있는 동안 이*승 군과 얘기를 나눴는데 탈영이니 강도니 험한 일을 할만한 성격이 아니라는 증언을 했다. 탈영을 할 생각은 전혀 아니었는데 애인과 하루 밤을 보내고 귀대시간을 넘기면서 일이 커졌다는 사연이었다. 얘기를 듣고 보니 이런 젊은이가 감옥에서 청춘을 보내면 더욱 좌절하여 진짜 범죄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된 ‘진학의 꿈’, 공부를 시키는 것이 최선이라 믿었다. 나는 내 생각을 솔직히 밝힌 편지를 이*승 군에게 보냈다. 희망을 가지라 격려했고, 내가 진심으로 돕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김 실장을 보내 면회도 하게 했다.

내가 직접 그를 만날 때가 온 것이다.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서 춘천 육군교도소로 이감됐다고 했다. 그를 만나온 김상배 실장을 대동하여 이 군을 만났다. 깡마르고 초췌한 젊은이가 면회소로 나왔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며 대화를 나눴다. 얘기를 나누면서 속으로 ‘이렇게 온순한 청년이 어떻게 인질극을 벌이려 했단 말인가. 그건 천성이 아니라 상황에 내몰리고 쫓겨 이뤄진 비극적 해프닝이다’라는 심증을 굳힐 수 있었다. 무엇보다 용기를 주고 싶었다. 아직 희망이 있음을, 지금부터라도 얼마든지 새로운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었다. 


이 군을 만나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는 김상배 실장과 대화를 나웠다.

“만나보고 나니 선량한 성격을 더욱 잘 느낄 수 있었어요. 이 군을 잘 지도하면 선량한 시민으로 사회에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선 이 군을 하루 빨리 감옥에서 풀어나오게 하고, 그 다음으로 대학에 진학시켜서 엔지니어로 키우면 취업도 쉽고, 동생들도 돌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김상배 실장도 내 말에 동의를 했다. 이미 김 실장은 내 지시로 경기도 북부에 있는 이 군의 고향집을 찾아가 모친과 형제들을 만나고, 형편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우리 둘은 우선 형기를 단축시키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궁리를 했다. 이 군의 형기는 징역 6년이었다. 인질과 택시강도 혐의가 겹쳐 무거운 형을 받은 것이다. 젊은이에게 6년은 너무 길다. 자칫 감옥 속에서 사회에 대한 증오가 쌓이고, 범죄자에게 물들을 수도 있었다. 해결책은 유일했다. 법무부 장관을 만나 탄원하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물론 대학 총장이라는 내 지위를 앞세워 내가 모든 일을 책임진다는 공약을 전제해야 했지만...

당시 법무장관은 황산덕 교수님이었다. 서울대가 배출한 최초의 법학박사이자 우리나라 법학계에는 법철학, 형법학 분야를 개척한 석학이기도 하다.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며 우리 대학에도 출강을 해 나와도 오랜 교분을 쌓고 있었다. 항 장관님을 찾아갔다. 탈영병 이*승 군의 사연을 설명했다. 

“순간의 잘못으로 부대를 이탈했습니다. 헤어지려 하는 애인을 설득하려 서울에 따라와 갈피를 못잡고 실수를 했는데 이로 인해 평생 불행한 생활을 겪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홀어머니와 어린 형제들도 나락에 빠질 수 있으니 이를 막고 싶습니다. 가족들을 살펴보니 다들 선량한 농민입니다. 제가 돕겠습니다. 모친의 일자리도 주고, 두 동생은 학업을 이어가도록 제가 재정 지원을 하려 합니다. 이*승 군도 장관님이 선처해주시면 교도소에서 대입 예비고사(지금의 수학능력 시험 같은 제도)를 준비하도록 하고 돕겠습니다. 물론 대입에 성공하면 이 역시 제가 공부를 무사히 마치도록 뒷바라지 하겠습니다. 젊은이와 불쌍한 가족들의 미래가 걸린 일이니 꼭 장관님이 도와주세요.”

진심으로 부탁했다. 황 장관님은 내 성품을 잘 아시는 분이라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셨지만 쉽게 응낙을 하지 못했다. 형법학자로서 당연한 소신이 있지 않겠는가. 죄의 무게도 가볍지 않았다. 나 역시 한 번의 청원으로 풀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김상배 실장으로 하여금 계속 이*승 가족의 살아가는 일과 이 군의 반성하는 모습 등을 전하고, 감형을 청원토록 했다. 김 실장은 심지어 황 장관의 자택이 있는 혜화동까지 찾아가 여러번, 간절히 부탁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닌가. 황 장관님은 결국 이 군의 감형을 위해 몸소 여러 가지 일을 앞장서 주었다. 관계 당국을 찾아가 나 대신 설득도 하고, 완고한 군관계자들에게도 부탁을 했다. 나약한 젊은이를 도우려는 황 장관님의 정성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토록 많은 분들의 선의가 모이고, 쌓였기 때문일까. 이 군에게 큰 선물이 다가왔다. 징역 6년의 중형이 2년20일로 감형된 것이다. 그리고 1975년 성탄절에 이*승 군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이 군을 불러 격려를 하고, 수시로 김상배 실장이 이 군과 이 군의 가족이 사는데 근 어려움이 생기지 않게 지원하도록 했다. 옛 한남동 캠퍼스의 바로 옆에 있는 아파트를 얻어 가족들이 살도록 했다. 이 군이 거주하는 아파트는 자신이 탈영하여 인질극을 벌인 한일다방 건너편이고 매일 그곳을 지나쳐야 등교를 할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매일 그 곳을 지나치면서 자신의 과거를 곰씹고, 미래에 대한 결의를 다지라는 뜻으로 그 아파트를 얻었다. 그저 사회의 저명인사가 던진 공수표로만 알았던 내 약속이 하나씩 이뤄지자 이 군도 달라졌다. 형무소 안에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더니 석방된 이듬해에 바로 전문대학에 입학을 했다. 삶을 바꾸겠다는 열정이 생기자 이 군은 열심히 공부를 했다. 2년 뒤에 이 군은 전문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측지기사와 중등교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2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나온 직후 2년 만에 얻은 성과로는 결코 작지 않았다. 

더욱이 이 군은 곧바로 우리 대학 토목공학과 편입시험을 치렀는데 이 시험에도 합격을 했다. 해당 학과 편입시험에서 최고의 시험성적을 받았다. 다른 대학이 아닌 단국대학을 진학한 이유에 대해 본인은 “총장님의 도움이 나를 얼마나 변하게 했는지, 내가 얼마나 좋은 일들을 성취하는지 가장 가까운데서 보여드리고 싶다.”고 설명했다. 사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는 기쁨이 아니다. 그러나 청년을 기르는 일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 거기에 도움을 받는 청년이 이렇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것이 교육하는 사람들이 얻는 최고의 선물인 셈이다.

그의 두 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나는 그 두 사람을 우리 대학의 직원으로 채용하게 했다. 한 사람은 우리 대학 법인 사무처에, 또 한 사람은 수위로 근무했다. 혹시나 과거 물의를 일으킨 사람의 가족이라는 것이 알려져 만의 하나라도 험담을 들을까 우려해 비밀을 유지했다. 교내에서도 개인적으로 두 사람을 아는 척하거나 아예 언급을 피했다. 이*승 군은 무사히 대학 공부를 마치고 우리 대학의 건축 및 설비관련 업무에 종사하게 되었다. 당시 건설업이 호황기라 일반 회사에 취직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이왕이면 그의 성실함이 대학 행정에도 좋은 성과로 연결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3남매는 모두 직장인이 되어 안정된 삶을 가꿀 수 있었다. 나중에 이 군의 여동생은 뜻한 바가 있어 가톨릭 수녀가 되었다. 남동생은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명예퇴직을 했다.


이*승 군은 전공에 맞춰 우리 대학의 건축업무에 잘 근무했다. 나도 그를 믿고 많은 일을 시켰다. 적잖은 공사 현장에서 현장 관리와 기술 감독을 하더니 홀연히 대학 행정직을 그만두고 건축회사를 차렸다. 대학을 그만둘 때 작별 인사라도 있기를 바랐지만 무엇이 급한지 그동안의 여정을 정리할 틈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내가 그에 대해 아는 척을 하면 할수록 자칙 과거의 아픔을 다른 이에게 노출시키는 일이 될까 두려워 한 번도 이런저런 말을 하지 않고 마음에 묻어 두었다.

나중에 들으니 사업이 여의치 않게 풀려 다시 한 번 큰 시련을 겪다가 기독교에 의지해 신학대학을 졸업해 지금은 충청남도의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그가 단 한 번도 안부를 전하는 적이 없으니 아마 그로서는 자신의 과거, 나를 포함한 과거의 인연이 잊혀 지기를 바라는 것이라 짐작을 한다. 살아오면서 돌아보니 사람을 키우는 과정에서 내가 그 당사자를 위해 기울인 애정과 노고의 무게에 상응하는 애정이나 노고를 되돌려 받은 적이 나는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서운하지는 않다. 어차피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부모님께 받은 은혜도 제대로 갚지 못하고 별세한 뒤에야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들이다. 하물며 사회 속에서 맺은 인연이야 어쩌겠는가. 그저 폐를 끼치지 않고, 서로의 믿음을 잃지 않고 사는 것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할 일이다. 

사람을 키우는 것은 보답을 받기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받은 만큼 다음 사람에게 베풀어주길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