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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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과 학교 사랑의 열정으로 아름다운 삶을 만든 석주선 박사님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8.10.04
조회수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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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학에는 한국 최고수준의 한국 전통복식 전문박물관이 있다. 지금이야 한류를 세계화시키니, 한복을 세계화시켜야 한다느니 하며 우리 전통의복에 관심과 투자가 눈에 띠게 커졌지만 불과 30년 전만해도 상황은 전혀 딴판이었다. 하루끼니가 걱정이던 시절에 그 누가 한복의 아름다움을 공부하고, 보전하려 했을까. 한복은 그저 버려지고 잊혀져가던 한 움큼의 추억에 불과했었다. 그 슬픈 한복의 운명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눈물과 피땀을 기울이던 이가 있었다. 이제는 하늘에서 영면하고 있는 난사(蘭斯) 석주선(石宙善) 선생이 바로 그 분이다.

내가 난사 선생을 유물 기증관계로 처음 만난 때는 40여 년 전인 1972년 무렵이었다. 경희대에서 지리학을 가르치던 조동규 교수의 소개였다. 조 교수는 우리 대학을 나와 경희대에 재직하였는데 그 부인께서 석주선 선생님의 제자로 한국복식을 배웠다고 했다. 두 내외의 말인 즉, 석주선 선생이  한국 복식을 연구하면서 복식과 민속 유물을 수집했는데 이제 정년이 되고 보니 이를 기증할 곳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역사학을 전공했고 사실 1960년대 초반에 동덕여대에 시간강사로 출강한 적이 있었고, 석주선 선생은 당시 재직 중이었기에 석주선 박사님에 대해서는 약간이나마 지식이 있었다. 석주선 선생의 오빠는 나비박사로 유명한 석주명 박사이다. 재밌게도 두 분은 모두 ‘수집’으로 학문의 기반을 닦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빠인 석주명 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손꼽히는 곤충학자, 특히 나비전문 학자였다. 20여 만 마리가 넘는 나비를 채집, 분류하고 이를 세계에 보고해 한국나비 분류의 체계화에 결정적 기여를 한 분이다. 더욱이 이런 모든 일들이 일제치하에서 얻은 학문적 업적이니 한국 과학계에 선구자로서 명성이 높은 학자였다. 불행히도 한국 전쟁의 와중에 그 방대한 양의 채집된 나비가 폭격에 소실되었고, 본인도 서울수복 뒤 총을 맞고 의문의 죽음을 당해 학계의 아쉬움이 더욱 남다른 분이었다. 

오빠의 영향을 받아서였을까. 난사 석주선 선생도 한국 최고의 전통복식 유물 수집가이자 학자로 평판이 높았다. 난사 선생은 1911년 생으로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을 했다. 1940년 동경 일본고등양재학원을 나와 해방 때까지 교사로 재직했다. 공부는 서양 복식이었는데 해방 뒤 귀국하여 양장기술을 가르치다보니 한복에 관심이 가고, 특히 소중한 전통 복식 유물이 함부로 취급되고 없어지는 현실을 보고는 스스로 이를 거두기로 작정했다. 1952년부터 25년 동안 수도여대, 동덕여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난사 선생은 그 긴 시간 동안 본인을 위한 모든 안락함은 멀리하고 한복 연구에 모든 열정을 바쳤다. 복식의 변천과 고증, 복구는 모두 실제 한복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무덤을 옮길 때 나오는 출토복식들, 집의 한구석에 나뒹굴다가 고물상에 엿과 바꿔질 운명의 헌옷은 물론이고 고가의 장신구들까지 난사 선생은 이들을 하나하나 집으로 들였다. 호의호식이 아니라 평생 악의악식하면서 젊어서부터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평생 수집한 민속유물이 수 천 점에 이르렀다. 수집하고 공부하고, 이를 복원하여 되살리는 일에 매달리느라 재산을 물론이요 결혼도 거절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나는 조동규 교수 내외와 난사 선생을 면담했다. 난사 선생은 온화한 미소가 인상적인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 같은 자태를 갖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나는 마음속에 품었던 궁금증을 드러냈다.  

“훌륭한 컬렉션이 있으니 다른 대학이나 공공 박물관에서 기증 제의가 있었을 텐데 왜 저한테 까지 기증 얘기가 나왔는지요?”

이 말을 들은 난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제가 모은 복식유물들은 모두 내 자식처럼 소중하죠. 내가 모아서 소중한 게 아니라 복식유물들은 옷감들이라 시간이 지나면 삭아서 바스러집니다. 또 그런 유물을 보관만 하는 게 아니라 고증에 맞춰 복원하고 그 속에 담긴 정신과 기술을 전수도 할 수 있어야 하죠. 그래서 항온항습 시설을 갖춘 별도의 박물관이 있어야 해요. 연구실과 강의실도 필수적이고요. 그런데 내가 만나본 대학이나 박물관들은 그럴 의지가 없었어요. 그냥 내가 가진 유물에만 관심이 있는거죠.”

조동규 교수님도 얘기를 거들었다.

“장 총장님은 역사학을 공부하셨으니까 석주선 박사님의 유물이 학문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이런 유물을 어떻게 보존해야 할지 잘 이해하시리라 믿음이 가죠. 다른 대학들을 소개했는데 모두 독립 박물관을 만들려는 생각은 없었어요. 국립박물관들도 그랬고요. 그냥 전시만 한다는 정도라서...”

이 만남이 있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난사 선생의 집을 들리기로 했다. 컬렉션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난사 선생이 초청을 해주었다. 서울시 중구 신당동에 있는 작은 집이었다. 집을 들어가다 대문에 머리를 찧을 뻔했을 만큼 작은 집이었다. 3개의 방이 있었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모든 방마다 유물이 가득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유물 상자들이었다. 그 상자들이 옷장 속에도, 그 옷장의 위에도, 벽의 선반을 달아 그 선반에도, 심지어 다락방까지. 난사 선생이 누울 수 있는 딱 한 명분의 공간을 제외한 모든 곳이 임시 전시실이고 보존실이었다. 유물들은 조선시대 왕족과 사대부의 의상 및 장신구부터 서민들의 복장과 장식구 등 다양한 것이었다. 아마도 난사 선생이 수집하지 않았다면 이 귀중한 우리 민족문화 자산이 일본으로 팔려갈 것이 뻔했다.

감탄은 잠깐이고 더 큰 걱정이 들었다. 난사 선생이 아무리 정성을 기울인 들 저런 상태로 얼마나 갈 것인가. 손으로 힘만 주어도 부서질 옷들인데. 거기에 혹시 불이라도 나면 이 소중한 유물들이 어찌되는 걸까. 아니 이 집 옆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 가운데 하나에서 불이 나면 저 많은 유물들을 누가 지키겠는가. 


나의 걱정 어린 눈길을 알아챘는지 석주선 선생님은 학자로서, 그리고 인간적인 하소연을 했다.

“이제 정년이 되고 보니 정말 두려움이 더 커져요. 저 유물들은 대부분 옷감이라 좀이 슬거나 곰팡이가 생기면 안되요. 옆집에서 불이다도 나거나 아니면 혼자 있는 집에 문화재 전문 강도라도 오면 어떻게 되는 거죠. 대학이나 공공기관들은 그저 일반 전시실에 진열만 하고 싶어 하기만 하는 거죠. 그런데 전시장도 오동나무에 항온항습시설이 갖춰져야 해요. 복식유물들을 제대로 분류하고 정리해서 체계를 잡는데도 10년이 넘게 시간이 들 텐데... 매일매일 불안하고 걱정이 돼서 잠을 못자요. 내 나이 스물이 넘어서부터 지금까지 내 봉급을 털어 모은 유물들인데 어찌해야 할지...”

그동안 기증만 받을 욕심에 여러 기관에서 상처를 받아온 사정을 설명하던 난사 선생은 말을 하다가 눈물을 흘렸다. 문득 ‘잘난 아들이나 잘난 남편을 두었다면 저리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겠는 가’하는 인정이 발동했다. 무엇보다 같은 학자로서 사명감이 크게 다가왔다. 역사란 결국 문헌과 유물로 대변된다. 힘없는 학자가 평생 동안 국가가 하지 못한 일을 홀몸으로 해왔는데 이를 받들기보다 기증품받는 욕심으로만 접근하는 한국 학계의 잘못을 방관할 수 없지 않겠는가. 저 소중한 유물들은 ‘전시물’이 아니라 ‘연구와 보존’의 학술자료로 영원히 전승돼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 돈이 들더라도 해야 한다. 지금 돈이 없으면 한 푼이라도 모아서 우선 잘 보관하고, 예산을 끌어 모아 독립 전시관을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 마음을 당장 밝히기는 경솔해보여 난사 선생의 애타는 마음을 위로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4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난사 선생과 계속 교류를 했다. 난사 선생의 건강과 안부를 묻고,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다고 응원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박물관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었다. 특별회계를 설정하고 건설자금을 적립토록 했다. 17억 원의 자금이 모였다. 다른 사립대학들이 운영자금을 모아 요즘 말하는 ‘강남땅’을 사는 것이 당시 유행이었다. 내 기억으로 17억원은 당시 한창 주목받던 강남의 신사동 땅 1만 여 평을 살 수 있는 가치였다. 

돈이 모이자 몇 가지 구상을 하고 결심한 뒤 다시 난사 선생을 찾았다. 나는 일단 여섯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첫째, 기증 유물을 보존할 전시관은 ‘단국대학교 석주선 민속박물관’으로 이름 지어 독립된 박물관을 신축한다.

둘째, 석주선 민속박물관을 건설하기 위해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 

셋째, 유물들은 석주선 박사의 감독 아래 오동나무 박스를 제작하여 보관한다.
        박물관 보관 창고는 습기 제거 장치와 항온장치를 갖추도록 한다.

넷째, 석주선 박사는 특별교원으로 채용하며 교수 특호봉으로 대우한다. 고령을 감안해 전용차량과 운전 기사를 제공한다.

다섯째, 평생 동안 지낼 아파트를 제공한다.

여섯째, 추천하는 연구원 2명을 박물관 연구원으로 모든 신분을 약정한다.

나는 당시 박정숙 이사장님을 설득해 이를 동의받고 위 조건을 공약한 문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와 이사장님이 공동 서명한 문서로 작성해 난사 선생께 전달했다. 연이어 우리 대학 동양학연구소장이신 일석 이희승 박사님, 서울대의 이병도 박사님, 고려대의 신석호 교수님, 그리고 우리 대학 중앙박물관장 정영호 교수 등으로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언론을 통해 발표하였다. 나의 굳은 의지를 확인한 석주선 선생은 그제서야 자신이 정리한 모든 유물의 목록을 정리한 문건과 보관함을 열수 있는 열쇠를 가지고 나를 만나러 왔다. 1976년 9월 1일 조촐하지만 진심어린 정성을 담아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 소장품 기증식’을 가질 수 있었다. 



박물관 신축 사업에 착수하자 실무자들 사이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석 박사님은 까다로운 분”이라는 불평이었다. 하기는 난사 선생은 제자나 직원들을  엄격한 자세로 대했다. 자신의 방침이 지켜지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며 혼을 내는 스타일이라 한번 당해보면 원망이 나곤 했다. 특히 당시 박물관 신축 및 보존 시설의 도입을 행정부서에서는 총무처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불평이 높아 내 귀에도 전해질 정도였다. 나는 더 큰 갈등이 생기기 전에 직접 나서기로 했다. 총무처 소속 직원들에게 “석 박사님을 내 어머님이라 알고 대해 달라”고 설득했다. “나이 드신 내 모친이 여러분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일일이 변명하거나 말대꾸를 하겠어요? 그리고 사택에 들일 가구나 비품들도 총장의 어머님에게 해드린다는 생각으로 잘해드리고 자상하게 배려를 해주세요. 그러다보면 석 박사님도 ‘단국대 사람들은 다르구나’ 하고 마음에 맺힌 것들이 풀리고 한 식구가 될 겁니다.”

시간이 흐르고 하루는 난사 선생이 찾아왔다. 얼굴에 환한 빛이 가득했다. 선생은 웃으며 얘기했다. 

“장 총장님이 제 평생의 고생과 한을 다 풀어주십니다. 제가 그동안 혼자 모든 일을 하다 보니 여러 사람들을 데리고 일시키는 게 내 맘같지 않아서 화도 많이 내고 까탈스럽게 했는데 다들 잘 받아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보관시설도 훌륭하고 박물관도 아름답게 세워질 것 같고. 고마워요 장 총장님.”

말을 미쳐 마치지 못하고 난사 선생은 내 손을 덥석 잡고는 눈물을 흘리셨다. 행복한 웃음과 눈물이었다. 나는 “앞으로 현재 소장한 유물이 아니라도 필요한 유물이 있으면 대학이 구입하도록 하겠다”며 “오래 사셔서 큰 업적을 만드시라” 덕담을 했다. 박물관 준공을 앞둔 1977년 당시 난사 선생의 나이가 66세였으니 지금과 달리 노령인 셈이었다. 나는 말이 나온 김에 난사 선생이 더 나이들기 전에 흉상을 만들자고 제의했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에 얼굴 마스크를 본떠 흉상을 만들어 생전에는 사무실에 보관하다가 돌아가시면 박물관 홀에 상설시켜 선생님의 유덕을 기리자는 뜻이었다. 난사 선생도 기쁘게 받아들여 흉상을 제작했다. 지금도 민속박물관 입구에는 난사 선생의 흉상이 생전의 인자한 미소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으니 볼 때마다 내 감회가 남다르다.



1977년 11월 3일, 개교 30주년을 맞는 뜻깊은 날에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해주었다. 진심으로 난사 선생의 꿈이 이루어진 것을 축하해줬다. 복식연구가들과 한국학 관계자들은 칭찬과 축하를 나눴다. 지금도 개관식 당일에 자부심과 행복감에 가득해 반짝이던 선생의 눈빛을 기억한다. 학자로서, 그리고 민속 유물 수집가로서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나 역시 자칫 세월에 스러지고, 사회의 외면 속에 사라질 소중한 전통복식 유물을 영원히 우리 대학에 보존하고, 거기에 복식 연구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생각에 큰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난사 선생과 나는 때론 모자지간처럼, 때론 한국학에 대한 애정을 나누는 동지로 20년을 보냈다. 가끔 박물관에 들리면 난사 선생은 나를 아들처럼 사랑스러운 눈빛과 웃음으로 바라보며 감사하다는 말을 거듭, 거듭 전했다.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은 한국 유일, 또는 최고의 전문 박물관으로 다양한 학술 활동을 펼쳐 우리 대학의 명예를 높혀줬다. 세월이 흘러 1995년 하반기들어 선생은 병석에 눕고 말았다. 다행히 이때 우리 대학 병원이 문을 열어 장기 입원을 시켜 돌봐드릴 수 있었다. 정성껏 모셨지만 병세는 날로 심해지더니 이듬해 나에게 “더 이상 힘들다”는 보고가 왔다. 임종이 가깝다는 소식에 서둘러 병석을 찾았다. 위문 손님이 여럿있었는데 선생은 나와 단 둘이 얘기를 하고 싶다며 사람들을 물렸다.

단 둘이 남자 난사 선생은 나를 가까이 오라 하시더니 손을 꼭 잡고는 내귀를 당신의 입에 대며 힘들여 말을 이었다. 

“그동안 총장님이 내 소원을 다 들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단국대가 내 살림을 다 맡아주고 월급도 줬으니 내가 돈쓸 데가 어디 있겠어요. 그 돈으로 정기적금 저축을 해서 모아 놨고, 박물관에 근무하는 이에게 맡겨 놨어요. 통장에 보관해놨으니 그걸 찾아서 장학금으로 써주세요.”

나는 놀라기도 했지만 선생의 그 학교 사랑과 끝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른 이에게 선용하려는 그 의지에 그만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내 눈물을 보면서 선생도 눈물을 흘리셨다.

“장 총장님을 만나서 내가 정말 행복하게 여생을 보냈어요. 내 죽어서도 이 은혜는 잊지 않을 꺼예요.”

마지막 유언을 마친 양 난사 선생은 나를 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조금 더 시간이 있으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할텐데... 안타까움에, 그동안 쌓인 인정에 나는 모친이 돌아가신 것처럼 눈물을 흘렸다. 


1996년 3월 3일, 85세의 나이로 선생은 영면에 드셨다. 장례식이 끝나고 난사 선생은 용인 천주교 공원에 있는 유택에 모셔졌다. 오빠 석주명 박사의 유택 옆이다. 따로 자손이 없기에 나는 학교에서 유족을 대신해 묘소를 관리토록 했다. 그리고 한남동 캠퍼스를 떠나 죽전 신캠퍼스를 지을 때 우리 대학은 한남동 시대보다 2배 넓은 박물관을 지었다. 동시에 대학 중앙박물관과 석주선 기념 민속박물관을 ‘석주선 기념박물관’으로 통합했다. 난사 선생의 유지와 학덕을 영원히 기리는 박물관이 되라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박물관 서관의 로비에는 지금도 난사 선생의 흉상이 누구나 그대로 지나치지 않을 위치에서 오가는 이들을 보고 있다. 난사 선생의 전통복식에 대한 열정과 희생, 이타적 삶을 우리 단국인만이라도 기억해주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