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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의 ‘닉 부이치치’, 신호빈 씨를 아시나요?
분류 피플
작성자 이기태
날짜 2013.07.22 (최종수정 : 2013.07.23)
조회수 12,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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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본인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힘든 투병생활 속에서도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주인공에게 많은 응원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신호빈씨 트위터 주소 : https://twitter.com/shim0288
또는 트위터에서 @shim0288로 검색

7월 19일(금) 오후 2시.
한 사람이 아버지와 함께 휠체어에 의지한 채 죽전캠퍼스 법학관에 들어섰다.
입학 당시 은사였던 조성용, 김석현 교수(이상 법과대학 법학과)를 만나기 위해 엘리베이터 5층에서 내린 그녀는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는 두 명의 교수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나 와 보고 싶었던 학교였습니다. 그동안 투병하느라 학교를 올 엄두를 못냈는데 학교도 이전하고 마침 집이 수지라서 시간을 내어 와 볼 수 있었습니다. 무려 10년 만이에요”

신호빈 씨.
그녀는 지난 2002년 4년 장학금을 받으며 서울캠퍼스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1학년때부터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할 정도로 법조인으로서의 꿈을 키워가던 그녀에게 불행이 닥친 것은 다음해인 2학년때 였다.

1학년때부터 공부를 하면서 피곤함과 무력감을 느꼈던 그녀는 2학년을 마치고 일상생활을 불가능할 정도로 병이 진전되자 휴학을 하고 길고 긴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병명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몰라 여러 병원을 전전한 끝에 진단받은 병명은 ‘경피증’. 그중에서도 가장 증상이 심하다는 ‘전신성 경화증’이었다.
(*주, 전신성 경화증은 피부나 혈관, 내부장기가 두꺼워지거나 딱딱해지는 현상을 일으키는 질병)

20살의 젊은 나이, 성공의 꿈을 그리며 미래를 투자했던 그녀의 인생은 그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금방 치료가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속에서 투병생활을 시작했지만 증상은 점점 악화되어 갔다.

당시 175cm의 키에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는 점점 야위어 갔고 그녀의 유난한 건강함은 젊은 사람에게 오히려 빨리 진행되는 병을 더욱 악화시키기만 했다. 부모님은 맏딸인 그녀의 병간호를 위해 아버지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며 딸의 치료에 매달렸고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일을 계속했다. 그녀 역시도 계속되는 투병생활에 지쳐 점점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게 되었다.


▶ 법과대학 입구에서 포즈를 취한 신호빈씨

주변의 노력과 치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병은 계속 악화되어 갔다. 2007년부터 손과 발에 괴사가 진행되어 2009년 발가락을 절단하기도 했다. 결국 지난 2011년 11월 병원으로부터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산소호흡기에 의지한재 죽음을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지만 기적적으로 회복이 되었고 그녀는 이후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삶을 위해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했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다시 조금 회복하고 나니 다시 주어진 삶을 소중히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생을 마감할지 모르는 자신의 운명앞에 작은 흔적을 남기고자 글을 쓰기 시작한 그녀는 자주가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자신의 사연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존경하는 사람들에게도 직접 편지를 보냈다.
커뮤니티의 사람들은 댓글을 모아 책을 만들어 보내주었으며, 이해인 수녀, 고은 시인, 박원순 서울시장, 연예인 차인표 씨, 야구선수 박찬호, 장호성 단국대 총장 등 사회각계 계층의 사람들이 그녀의 편지를 받고 위로와 격려의 답장을 보내주었다. 장호성 총장은 그녀의 편지를 받고 중국의 유명한 한의사를 찾아 그녀가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 법과대학 사무실을 방문한 신호빈 씨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하며 살아갈 용기를 얻었던 그녀에게 다시한번 시련이 닥쳤다. 2012년 10월 결국 심한통증으로 두 다리를 절단하게 되었다. 몇 번의 삶과 죽음의 고비에서 다시 회복한 그녀는 자신이 쓴 글을 모아 지난 3월 ‘신호빈의 나를 외치다(도서출판 미래지향)’라는 책을 출간했다. 책에는 그녀가 썼던 글, 10여년을 보살핀 아버지의 심정 등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책이 출간되고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을 이어가는 그녀가 살면서 못내 아쉬움이 남았던 곳이 바로 대학이다. 입학해서 공부하느라 투병생활 하느라 제대로 누려보지 못한 대학생활의 아쉬움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마침 대학이 한남동에서 용인시 죽전동으로 이전하면서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 은사님들과의 기념촬영(왼쪽부터 김석현 교수, 조성용 교수, 신호빈씨, 신태균씨(아버지))

“처음에는 울기도 많이 하고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부터 정말 주어진 시간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러면서 책도 쓰고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모교가 근처에 있으니 너무나 와보고 싶더라구요. 소원 한가지를 이룬 것 같아 정말로 기쁩니다. 모든 사람이 저같은 삶을 살지는 않겠지만 주어진 삶을 정말로 최선을 다해서 살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랜 투병생활과 음식을 소화하지 못해 우유만 먹고 있어 앙상한 몸이지만 그녀의 얼굴에서는 시종일관 웃음이 넘쳤다. 은사를 만난 자리에서 입학 당시를 회상하는 그녀의 기억은 꽤 정확했다. 대학 방문을 마치고 법과대학 식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는 그녀의 밝고 명랑한 목소리는 오히려 주변을 환하게 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 법과대학 식구들과 함께

‘치유의 길을 가려면 정직해야 함을 물론이고 상황을 있는 그대로 기꺼이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실수, 오기, 분노, 고통까지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는 건 할 수 있겠는데, 어려움에 눈물 흘리지 않고 강해지려면 어찌해야 하나 생각하다 독하게 참는 것 밖에는 안 떠올라 웃었다'(그녀의 책 ’나를 외치다‘ 91p에서 발췌)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최선을 다해 살아가며 밝은 웃음으로 우리에게 긍정적인 삶의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그녀. 그녀의 빠른 회복을 기원하며 세상과의 소통을 시작한 그녀에게 많은 응원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