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전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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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 '반혁명 고문'에서 '정계입문권유'까지 이어진 곡절(하편)
작성자 단국대학교 장충식
날짜 2019.12.13 (최종수정 : 2021.06.04)
조회수 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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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름지기 “사람이 가진 능력이란 일을 하면 할수록 커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종합대학 승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을 비롯해 국무총리 등 행정부 고위관료, 국회의원과 일선에서 활약하는 동문들과 인연 내지는 친분을 두터이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단국대학을 싫어하고, 내 선친을 반대하던 이들도 만나서 얘기하다보면 하나 둘 우호적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37세의 젊은 총장이 시들어가던 대학을 키워보겠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 하나, 사회를 이끄는 세대의 교체기라는 점도 나에게는 긍정적 조건이었다.1961년 5‧16군사정변을 일으킬 당시 ‘혁명주체세력’의 나이는 35세에서 45세의 연령대였다. 이들이 ‘국가재건’의 명분을 걸고 국정을 운영하는 전면에 나서자 우리 사회는 급작스러운 세대교체를 경험하게 되었다. 내가 총장직에 오른 나이도 36세였는데, 총장으로서는 젊은 나이었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50세, 공화당 당의장을 지낸 김종필 의원이 41세였다. 자연스럽게 사회분위기도 ‘경륜’보다는 ‘패기’가 앞서는 시대였다. 이런 사회적 환경에 더해 일찍부터 사업을 하면서 몸으로 배운 ‘하면 된다’는 도전정신은 자연스럽게 당시 우리 사회를 이끌던 주도세력의 호감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이같은 안팎의 여건이 잘 맞아서 이뤄진 일이 내곡동 국유지 매입을 성사시킨 일이었다. 1967년에 총장 취임을 하고, 다시 1971년에 연임을 하게 되면서 내 마음 속에는 ‘신 캠퍼스’를 건설해야 한다는 의욕이 불처럼 일었다. 죽전캠퍼스를 신축하기 전 서울캠퍼스가 자리하고 있던 한남동 부지는 터도 비좁지만 주변이 군사시설보호지역, 개발 제한구역으로 묶여 설사 학교가 돈을 들여도 부지를 넓힐 수가 없었다. 넓고 자연환경이 좋은 부지에서 우리 학생들을 공부시키고 싶었다. 공과대학, 체육대학, 예술대학처럼 실습 공간이 많이 필요한 학과들을 육성할 캠퍼스를 새로 짓고 싶었다. 그것은 혁신적으로 교육, 연구시설을 확장해 단국대를 한국 최고의 사립대학으로 도약시킨다는 나의 비전이기도 했다.

다부진 마음으로 수소문 끝에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전신)가 보유하고 있는 강남구(당시는 성동구로 편입되어 있었음) 내곡동의 국유지를 후보지로 물색하게 되었다. 처음 이 땅을 보러갔을 때 받았던 인상을 지금도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대모산 기슭에서 남향으로 완만히 펼쳐진 구릉과 넓게 펼쳐진 논밭, 햇빛이 잘드는 남향의 지형은 내가 그리던 캠퍼스 건설 부지로 딱 마음을 설레게 했다. 면적도 79만㎡(24만 여 평)으로 한남동 부지의 6배 정도로 넓었다. 정부에서는 지금의 강남구에 해당하는 당시 영동지구를 국가 정책목표로 세우고 개발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단국대의 미래를 여는 캠퍼스로 딱 맞는 땅이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 땅의 소유주는 개인이 아닌 국가였다. 거기에 국유지 불하를 둘러싼 각종 비리, 부정부패 사건이 줄이어 터지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국유지 불하 금지’ 지시를 내려 공무원들은 국유지 불하 신청을 접수하려 하지도 않았다. 열망은 크지만 여건이 따라 주지 않아 고민이 커져 갔다. 그 때, 연당(硏堂) 이갑성 선생(1889~1981)께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아직 봄의 기운이 희미했던 1971년 3월 쯤으로 기억한다. 이갑성 선생은 3‧1만세운동의 독립선언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두 번이나 투옥이 된 강골이기도 했지만 민립대학 설립운동, 신간회 발족 등에서 선친인 범정 장형 선생과 인연을 갖고 있었다. 선친 생존 시에는 형님, 아우로 지내며 자주 내왕을 하신 덕에 나 역시 이갑성 선생께 의지를 하고 있었다. 이갑성 선생은 5‧16 군사정변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처음부터 공표하기도 했는데 이런 연유로 공화당 발기위원, 공화당 총재 고문 등을 역임한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이기도 했다.


연당 선생의 기별을 받고 만나러 갔더니 선생께서는 나에게 정치입문을 권하였다. 

“곧 총선이 있을 예정인데 박 대통령께서 장 총장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해요. 지난번에 대통령을 만났는데 ‘장 총장이 젊은 나이인데도 학교를 잘 운영하고 있고, 파월 장병 위문 때도 정말 열심히, 잘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좋은 말을 하시더라구. 이번 총선에서는 전국구를 정치적 배경보다는 직능 위주로, 비정치적인 전문가를 영입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어요. 그래야 전국구 공천으로 매번 논란이 생기는 야당과 차별성을 둘 수 있으니까.”

연당 선생의 결론은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호의적으로 마음에 들어한다는 점과 나를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낙점했다는 것이다. 연당 선생은 그러면서 나에게 정치에 입문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국회의원이 되면 단국대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힘도 생긴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 각하께서 저를 호의적으로 보시는 건 저도 기쁩니다. 하지만 저의 선친께서는 생전에 교육자가 정치를 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라 여러 번 역설을 하셨어요. 저를 앞에 앉히고 강조하셨고... 저는 이 말씀을 유언으로 생각합니다. 저라고 권력이 싫겠어요. 하지만 대학 총장으로 있으면서 대학을 키우고, 우리 학생들 하고 있는 게 더 행복하고 저한테도 어울리는 일입니다.”



나는 웃음을 띄우며 사양의 뜻을 밝혔다. 내 뜻은 정말 거짓없는 진심이었다. 연당 선생은 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대학이 개강을 하고 이런저런 업무에 경황이 없을 때 길재호 당시 공화당 사무총장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길재호 사무총장의 연락이니 피할 수 없었다. 어떤 얘기인지 예감이 들었다. 과연 연당 선생과 같은 얘기였다.

“이건 저의 뜻이 아니고 각하의 뜻입니다. 총장님을 공화당 전국구 19번으로 영입하라는 당부이십니다.”

더 구체적인 제안이었다. 아니 이 정도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라고 생각해야 하는 무게가 실린 제안이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은 이미 결론이 내려진 상태였다. 고민스럽지만 내 소신이고 인생관인데 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연당 선생께 했던 얘기를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길 사무총장은 내 말에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후 내 마음은 참으로 복잡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최고 권력자의 말을, 어쩌면 나름 정치적 구상을 하고 나에게 부탁을 한 것일 수도 있는데 이를 거절한 셈이 아닌가. 자칫 나로 인해 단국대학을 망치는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몇 날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나 나는 정치권력을 갖지 않기로 한 내 소신을 지켜온 내 결심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고 있다. 

전국구 의원 후보자 선정이 끝나고 다시 연성 선생을 만났다.

“장 총장도 참 고집이 세군요. 하하하. 그 좋은 국회의원 자리를, 그것도 대통령이 주겠다는데 거절을 하니 말이요.”

연성 선생은 한편으로는 내가 교육에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강한 결심을 보인 점에 감명을 받았다는 얘기도 했다. 나는 이런 때가 오히려 우리 대학에 새로운 기회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선생님, 제 진정을 아셨다니 이런 시기에 제 소원 하나를 각하께 전달해주세요.”

나는 그토록 열망하고 있던 강남구 내곡동 문화공보부 소관의 국유지 불하 문제를 꺼냈다. 그동안 나름대로 조사한 여러 가지 경과와 문제점도 설명했다. 

“선생님, 이만한 땅은 있어야 지금 한남동 캠퍼스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결심해주셔야 이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고 영리기관도 아닌 단국대가 더 좋은 곳에서 젊은이들을 교육시키자는 뜻이니 명분도 있는 일입니다. 대통령께 제 고민을 전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연성 선생은 껄껄껄 웃었다.

“장 총장 이제 보니 욕심이 진짜 많은 분이 구만요. 대학을 키우겠다는 욕심이 말이요. 그래요. 땅을 굴려서 돈 벌자는 얘기도 아닌데 젊은 총장이 국회의원도 마다할 만큼 교육에 열성을 쏟고 있으니 각하께서도 나쁘게만 생각하시지는 않을 꺼예요.”

연성 선생은 그 뒤 대통령을 만났다는 얘기며 내 뜻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문공부에 말해두겠다’는 답도 있었다는 얘기를 전해주었다. 그 뒤로 국유지 매입문제는 순조롭게 풀렸다. 1971년 4월 말 쯤이었다. 다만 문화공보부의 매각조건은 매우 까다로웠다. 불하 대금을 분납이 아니라 일시불로 납입하라는 조건이 붙은 것이다. 매각 대금은 5억 7천만 원이었다. 부채를 얻어야 했지만 그래도 우리 대학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할 기반이 생겼다는 기쁨에 하늘을 나는 기쁨을 느꼈다. 

같은 해 5월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총선 결과는 민주공화당이 지역구 86명에 전국구 27명, 전체 113명의 의석을 차지했다. 내가 제안받은 전국구 19번이라는 의석은 확정적인 순위였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나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음을 확인한 소득이 있었다. 반대로 이같은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과 배려가 나에게는 무언의 압력이 되었다. 대통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바르고 정당하게 대학을 육성하고,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더욱 커졌다. 



국유지 불하를 받고 나서 매입 대금을 구하는데 진땀이 날 정도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25개 종합대학의 총장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 간담회를 한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대학가는 교련반대시위 등으로 대학생들과 정부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다. 동시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부터 ‘새마을운동’을 처음으로 가동해 이를 국가 차원의 농촌개발사업으로 확대하려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물론 새마을운동은 그로부터 2년 정도 지난 뒤 그야말로 국가적 명운을 건 대형 사업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많은 개발도상국이 채택한 개발사업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이런 중대한 의미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대통령의 의중을 읽었다면 나이 40세를 갓 넘은 내가 함부로 나서지 못했으리라.

이날 간담회에 참가한 총장들은 마음 속으로 대학가 시위 문제를 놓고 대통령의 당부 말씀과 정책적 협력에 필요한 사안들이 제시될 거라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간담회가 시작되니 무거운 주제는 나오지 않고 대학에 대한 다양한 소재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분위기였다. 박 대통령도 총장들에게 담배를 권하며 웃음을 잃지 않고 얘기를 이끌어갔다. 그러던 중에 박 대통령은 대화를 새마을운동으로 전환했다. 

“지난해부터 농어촌에 시멘트와 재정지원을 곁들여 스스로 생활여건개선과 소득증가사업을 벌이도록 돕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업이 지금 내무부(현재 행정안전부의 전신)와 농어촌의 힘만으로는 안되지 않겠어요? 이들에게 새로운 영농기술, 마을들 마다 다른 여건에 맞는 개발 모델 같은 걸 전수해줘야 하는데 이런 부문에서는 대학이 큰 일을 해줘야 합니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새마을운동을 국가미래의 사활을 건 사업으로 확신하고 있었고, 이를 성공시키려면 관청과 농어촌 외에 대학이 힘을 더해야 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대학의 총장들은 이 얘기가 나오자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대학과 정부의 갈등이 높아지던 시점에서 총장이 대통령 편을 들어 새마을운동에 나선다면 ‘어용 총장’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게 훤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새마을운동이 농어촌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당시에는 박정희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이를 강행한다는 비판이 컸었다. 또한 시멘트 몇 푸대 풀어준다고 농어촌이 달라지겠냐는 지식인들의 냉소적 비난이 주류였다.

그래서인지 참석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경북대학 총장이 대학의 입장을 전했다.

“지금 교련 교육에도 학생들이 반대를 하는데 새마을운동을 하자고 나서면 아마 데모가 더 심해질 것입니다.”

이런 요지로 대학의 새마을 운동 참여의 어려움을 설명하자 듣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갑자기 굳은 얼굴로 변하며 반박을 했다. 

“제가 새마을운동을 하려는 것은 정치적 목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공업화를 할수록 농촌이 도시보다 살기가 힘들어지니까 이를 극복하자는 거죠. 이걸 정부 힘만으로는 안 되니까 대학 교수님들, 학생들이 나서서 같이 해보자는 겁니다. 농촌은 원래 가난하니 어떻게 가난을 이길 수 있냐고 해보지도 않고 반대를 하면 우리나라가 언제 잘살 수 있겠습니까.”

말을 마친 박 대통령은 빈 담배 갑을 우그리더니 툭 탁자에 던지듯 떨어뜨렸다. 동석한 보좌관들도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하물며 낯선 총장들이야 어떻겠는가. 분위기는 갑자기 경색되고 모두들 말이 없어졌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마음속에 갖고 있던 박 대통령에 대한 고마움, 그러니까 국유지 불하를 도와준 호의에 내가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새마을운동에 내가 가진 힘을 기울여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바로 공언을 했다. 

“아직 연륜도 부족하고 대학도 역량이 부족할 수 있지만 단국대가 이 문제를 풀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고, 박 대통령이 종합대학 승격이나 내곡동 부지 확보에서 받은 은혜에 어떻게든 보답을 하겠다는 뜻이 앞서서 나를 이끌었다. 대통령이 화를 낸다는 분위기를 다들 감지해서였을까. 총장들이 나서서 나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안색이 풀어지고 웃음을 되찾자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간담회가 마치 나의 새마을운동 협력사업 의지를 확인하는 발표장이 된 셈이었고 다들 나를 주목하는 결과가 되었다.



대통령 앞에서 그것도 25개 종합대학 총장 앞에서 한 약속을 했으니 일초도 머뭇거릴 수 없었다. 우선 우리 대학이 새마을운동을 펼치기 좋은 여건을 가진 마을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지역개발학을 전공한 김유혁 교수, 농학을 전공한 김봉구 교수와 상의를 했다. 김봉구 교수는 충청남도 청양군 장곡마을을 생각하고 있었다. 칠갑산에 가려진 벽지로서 전국에서 가장 낙후된 농촌지역이라는 설명이었다. 땅이 척박하여 소득을 늘릴 작물을 기르기도 부적합하다고 했다. 여기에 새로운 영농기술과 작물을 보급한다면 눈에 띠는 성장이 가능하다고 김봉구 교수도 뜻을 보탰다.

이곳을 단국대 새마을운동 후보지로 정하려 하자 이번에는 문교부(현 교육부 전신)가 반대를 했다. 심지어 충남도청에서도 그랬고, 소식을 들은 청와대의 새마을운동 관련 보좌진도 다른 지역이 좋겠다며 반대를 했다. 이유는 대통령 앞에서 이뤄진 공약이니 단국대가 나서서 새마을운동 성공 사례를 만들어야 하는데 청양군 장곡마을은 정말 너무 궁벽한 곳이라 실패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반대가 나와 단국대를 위한 호의임을 알면서도 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계곡이 깊으면 산이 높다고 이런 열악한 환경일수록 작은 성과를 내도 그로 인해 마을주민들이 얻을 자신감과 성취감도 크고 높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마침내 1972년 4월,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장곡마을과 자매결연을 맺고 새마을사업을 개시했다.

청양군 장곡마을은 장곡사라는 사찰이 있다. 역사학을 전공한 나는 장곡사를 답사한 적도 있어서 전혀 낯설기만 한 지역도 아니었다. 군용 지프 차를 타고도 오가기가 힘든 오지마을이었다. 나는 새마을운동을 떠나 이곳이 잘사는 농촌의 모델이 되도록 한번 부딪혀 보자고 결심했다. 김유혁 교수를 통해 지역개발 이론과 적용 방법을 강구토록 하고, 김봉구 교수를 통해 장곡마을에 적합한 소득증가용 작물과 이를 안착시킬 방법을 연구토록 했다. 당시 김봉구 교수는 농업기술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었는데 이를 수행하기 위해 교수로 초빙하기까지 했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30여 차례가 넘도록 장곡마을을 오가고, 마을 어른들께 편지를 보내 협력을 호소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장곡마을에 대한 단국대의 새마을운동 전개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산비탈을 깍아 목장을 조성해 젖소 사육을 하면서 해당 기술을 교육, 보급했다. 특히 불가능에 가깝다는 돌밭을 개간하고 퇴비를 통해 지질을 개선해 사과농사가 가능함을 실증한 것은 우리 스스로도 놀랄만한 성과였다. 이렇게 해서 새로이 일군 농장이 22만 여 평에 이르렀다. 동시에 새마을농민학교를 세워 2천5백 여 명의 농민지도자가 교육받고 나갔다. 장곡마을 주민이 당시 360여 명이었으니 장곡마을의 성공 사례를 공부하러 온 충청남도와 전국의 농민 지도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반대를 하던 교육부는 물론이고 청와대에서도 놀라워하며 큰 박수를 보내주었다. 문교부 장관과 충남도지사가 직접 장곡마을을 방문해 사업 성과를 시찰오고 청와대 비서진도 답사를 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사업을 추진하면서 2차례나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천만 원의 격려금과 영농기계를 수여받기도 했다. 

장곡마을의 성공 사례는 청와대와 교육부에게 좋은 모범사례가 되었다. 대학과 농촌이 단순한 봉사활동이 아니라 직접 개발 사업을 기획,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유효한지 입증한 사례가 되었다. 이후 대학의 새마을운동 참여 사업들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나는 장곡마을 새마을사업 과정에서 30여 차례를 넘게 이 지역을 지나고, 숙박을 했다. 그 과정에서 나에게는 새로운 착안점이 생겼다. 천안에 새로운 캠퍼스를 짓고 싶다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마침 당시 정부 차원에서 10년 간의 경제개발을 추진한 결과 수도권집중현상이 가속화되는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특히 대학의 서울집중이 인구집중을 부른다는 비판이 많았고 이를 해결할 대책으로 미국같은 선진국의 ‘분교(제2캠퍼스)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같은 정책전환을 감지한 나는 천안시의 잠재력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1973년 당시 천안시는 시로 승격한지 10년이 되었지만 인구가 8만 여 명에 불과한 소도시였다. 그렇지만 예로부터 서울과 충청, 호남의 기차교통 중심지였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서울에서 1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준 수도권’ 도시가 되었다. 마침 천안시에는 4년제 대학이 없었다. 정부의 수도권 분산 정책에도 부합이 되는 도시였다. 천안시에 캠퍼스를 세우면 고속도록를 통해 한강 이남의 대학교육수요를 유입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내 마음 속에 이미 우리 대학을 세울 캠퍼스 부지도 정해놓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지금 천안캠퍼스가 세워진 안서호반의 땅이었다. 새마을운동 자매마을인 장곡마을을 가려면 경부고속도록에서 천안을 지나야 했다. 천안IC 직전에 보이는 안서호반의 땅은 남동향으로 온화한 기운이 들면서 넓은 호수를 앞으로 끼고 있어 풍경도 좋았다. 



나는 문교부에 ‘천안분교 개설 허가’를 신청했다. 당시 문교부내 관료들은 우리 대학의 역량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단국대가 한국 최초로 지방에 분교를 세운다니 가능하겠는가?’라는 분위기였다. 당시 문교부 차관으로 있던 분을 중심으로 관료들이 이런 주장을 했고 인가가 늦어졌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호의가 작용을 했다. 문교부 장관의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이 “장충식 총장이 하는 일이니 긍정적으로 검토하라”는 말이 있었다는 전언이 있었다. 대통령의 지시가 있자 관료 중심의 단국대 천안분교 반대 여론도 자연스럽게 잦아들었다. 거기에 당시 황산덕 문교부 장관은 대학의 분교제도를 도입하는데 긍정적이어서 우리 대학의 분교 개설사업에 도움을 주었다. 1977년 5월 마침내 원하던 부지를 매입했다. 넓이는 약 20만㎡(6.6만 평)이고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지세에 풍광이 빼어나 우리 대학에 큰 발전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 8월부터 토목공사에 들어갔는데 이 때도 박정희 대통령의 나에 대한 호의를 확인할 수 있었던 일화가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산림녹화’를 국정의 최고목표로 앞세우고 있었다. 산에서 나무 한 그루를 허투루 베어내도 자칫 큰 처벌을 받고, 간혹 녹화정책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가 박 대통령의 불호령을 받고 하루 아침에 옷을 벗는 공무원들도 많았다. 그런 판국에 박 대통령이 충청남도 순시를 위해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다가 천안캠퍼스 토목 공사 현장을 보게 되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땅이 맨살을 드러내고 나무도 발려져 나가고 있으니 박 대통령이 좋게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장 굳은 목소리로 옆에 있던 정석모 충남 도지사에게 따지듯 물었다.

“저거 뭐하는 건데 땅을 깎고 저리 넓게 벌목을 하고 있는거요?”

질문을 받은 정석모 지사는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관청의 인허가를 다 받고 하는 일이지만 자칫 “아니 그렇다고 저렇게 나무를 잘라내면 어쩌겠는가!”는 질책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설명을 들은 박 대통령은 “아, 그런가요. 장 총장이 하는 일이면 틀린 일이 아닐 거요. 장 총장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요. 걱정말고 대학을 키우라 하세요.”라며 단국대 천안캠퍼스기 충남 발전에 기여하도록 도와주라는 당부가 있었다고 한다. 

정석모 지사는 이같은 대화내용을 나에게 기쁜 낯으로 전해주며 한 가지 얘기를 덧붙였다.

“각하께서 이런 재밌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장 총장이 실향민으로 알고 있는데, 이왕 충청남도에 대학을 세우기로 했으니 아예 주민등록도 충남으로 옮기면 좋겠구만.” 

대화를 마치며 정석모 지사는 자신도 충청남도에 큰 대학이 생기니 기쁜 일이라 강조하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알려달라 했다.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대통령이 나의 신상을 파악하고 있을 만큼 관심을 갖고 있으며, 신뢰를 갖고 있다는 점을 확인받은 일이 아닌가. 나와 박 대통령과의 만남이래야 두어 번이고, 내가 무슨 정치자금을 돕거나 정치활동에 나서서 여당 편을 든 일도 없었다. 다만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내 간절한 마음이 결코 공수표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고 싶어 대학 육성에 노력을 다한 것 뿐이었다. 감사한 마음이 컸지만 따로 그런 인사를 차릴 관계도 아니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대신에 박 대통령의 바람대로 내 주민등록을 천안시의 옆인 아산으로 옮겼다. 대통령에 대한 내 나름의 감사 표시인 셈이다.


천안캠퍼스는 1978년 3월에 개교했다. 개교 당시에는 ‘산업대학’이라는 단과대학으로 출범했지만 지금은 인문, 예술, 체육부터 사회과학, 자연과학, 약학, 의학 등에 이르기까지 종합대학으로서 교육편제를 완비하고 있다. 그 거대한 뿌리는 나의 비전에서 출발했지만 그 자양분은 박정희 대통령의 나에 대한 호의가 잠재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70년대에는 대학의 증과증원이 각 대학의 미래를 좌우하는 요인이었다. 대학 간에도 치열한 경쟁과 로비가 있었으니 이 문제는 자연스레 대통령의 관심사가 되었고, 인가권 역시 대통령의 손에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내가 총장이 되고부터, 특히 1970년대 초반부터는 우리 대학의 증원이 거부된 적이 거의 없었다. 천안캠퍼스를 개설하고 부터는 그 추세가 더 강화되어 1970년대 종반에는 사립대학 가운데 전국 10위 안에 드는 대학정원을 보유하게 되었다. 처음 내가 총장으로 부임할 당시 대학 정원을 살펴보니 우리 대학이 전국 4년제 대학 가운데  맨 끝에서 두 번째 였다. 문교부 관리들은 우리 대학의 관계자들을 만나면 “대통령 각하께서는 단국대의 증원 신청에 한번도 거부를 하지 않으시니 참으로 놀랄 일이요.”라는 전언을 하곤 했다. 



증과증원의 일만이 아니었다. 지금도 회고를 하면 새삼스레 놀랄만한 일이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8대 국회 전국구 제안을 거부한 적이 있다.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나는 10월 유신 개헌 직후 김상현 의원과의 친분으로 인해 보안사령부에 연행되고, 고문까지 받았던 전력이 있다(학연가연 2019. 1.25 김상현 편 참조). 김대중 의원 정치자금을 지원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나를 믿기 힘들었을 터인데도 지속적인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나는 “박 대통령이 내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받을 만큼 중대한 혐의를 받았던  걸 모르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권력이 더욱 강화되던 시기였다. 1978년 12월로 10대 국회의원 선거가 확정되었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국회의원은 1선거구에 2인을 뽑는 중선거구제로 바뀌었고, 기존 전국구는 폐지되는 대신에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구에서 77명의 국회의원을 별도로 뽑아 이를 대체케 했다. 대통령 중심제를 넘어서는 강력한 권력독점으로 국내외에서 민주화 요구가 점증하고 있었다. 또 한번 나에게 정계입문의 요구가 닥쳤다. 

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이 나를 찾았다. 민 장관은 1971년부터 4년 간 문교부 장관과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분으로 내가 체육계에서 각종 경기단체장을 맡으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강력한 업무 장악능력, 추진력으로 박 대통령의 아낌을 받고 있었다. 민 장관이 나를 만난 이유는 10 총선 출마 때문이었다.

“이건 내가 각하의 심부름을 하는 거요. 각하께서 장 총장이 출마하기를 원하십니다. 지역구도 단국대가 있는 용산구로 배려를 하셨어요. 1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건데, 공화당으로 나오면 따논 당상이 아니겠소. 더군다나 학교가 있는 용산구인데.”

정말 곤란한 요청, 아니 지시였다. 벌써 한 번 거부를 했던 정계입문인데 다시 거절한다면 대통령의 체면이 상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대학에서 내 삶을 다 바치고 싶었다. 

“장관님, 죄송하지만 이런 의사를 8대 국회 때도 받았습니다. 그때는 전국구였지만요. 선거의 당락 여부가 중용한 게 아니라 저는 곤란합니다. 도저히 이제 막 천안캠퍼스가 문을 열었고, 대학이 간신히 성장세를 타고 있는데 단국대를 버리고 국회로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단국대와 상관없이 정치계에 발을 딛고 싶지 않습니다. 정치권력과 싸우면 안된다는 소신을 가족 있지만 동시에 정치권력을 소유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내 철학입니다. 아버지의 유훈이기도 하고요. 각하께 제 진정을 잘 설득해주세요.”


민 장관은 이해하기 힘들다며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도 계속 호소를 했다. 결국은 민 장관이 설득을 포기했다. 나를 아끼는 선배님인 만큼 혹시라도 있을 후환을 같이 걱정해주기도 했다. 민 장관이 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였을까 염려했던 일들이나 긴급 상황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1978년 가을 단풍이 짙어지던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산’으로 불리는 중앙정보부에서 나를 호출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데 국장급 인사였다. 나는 ‘올 것이 온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갖고 그를 만났다. 이번에도 정치 입문 얘기였다. 그런데 각도가 전혀 달랐다.

“지금 박근혜 영애께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시면서 구국여성봉사단 명예총재를 맡고 계신 거 아시죠? 이 봉사단이 앞으로 박근혜 영애께서 직접 총재로 취임하시고 전국적인 봉사활동을 펼칠 겁니다. 그런데 총재를 보좌해 줄 사무총장이 필요합니다. 청와대에서 각하와 여러분들이 고민을 했는데 이 사무총장에 장 총장님 부인께서 봉사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사무총장은 유정회 소속으로 국회의원 직도 수여됩니다. 박근혜 총재 보좌역이니 국회의원 신분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육영수 여사가 1974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피격당해 별세한 뒤로 박근혜 씨가 영부인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봉사단에 사무총장을 두고, 거기에 국회의원 신분을 준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내 아내는 식품영양학을 전공해 경기대, 국민대에서 강의를 했지만 무슨 여성운동에 나선 적도 없고, 무슨 봉사단에 나가서 리더 역할을 한 적도 없었다. 집안 일 하기도 바쁜데 전국 규모의 봉사단을, 그것도 영부인이나 다름없는 박근혜 영애를 보좌하다니...

물론 나는 반대를 했다. 

“아니, 전국에서 이런 일을 하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을 텐데요. 장차관 부인들이니 정치인, 사업가의 부인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정치도 모르고, 아는 건 식품영양학밖에 모르는 사람을 사무총장에 앉히려는 겁니까. 더군다나 국회의원이라뇨.”

그 국장의 말인 즉 실제로 이런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여성 지도자, 권력가의 부인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내 아내를 지목했다는 것이다. 봉사단은 정치 조직이 아니고, 약한 사람을 돕는 일을 하는 곳이니 그동안 청와대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던 사람이 아니라 공부하고 자식 기르고 남편 잘 돕는 그런 평범한 여성을 사무총장으로 초빙하라는 뜻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찬성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뜻이 그래도 정치적 일과 단절할 수 없을 것이고, 또 그 역시 권력의 논리에 휩쓸릴 수밖에 없으리라 믿었다. 며칠이고 찬성을 하지 않고 버티자 그 국장이 나를 찾아왔다.

“아니 이 자리를 탐내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인 줄 아십니까. 각하께서 여러 생각을 하고 고민 끝에 결정하신 일인데 정말 이러시깁니까. 이것저것 다 반대를 하면 각하의 체면이 뭐가 되는 겁니까. 어디 장 총장님이 그렇게 반대만 하시면 단국대는 총장님 뜻대로 운영하실 수 있다고 자신하세요?”

국장의 거친 반문에 나도 끝까지 나 몰라라 버티기 힘들었다. 아니, 당시 상황에서는 모 국장의 으름장이 언제든 실현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내가 아내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해요. 난 찬성은 아니지만 아내에게 하지 말라 강요는 안하겠습니다. 정 원한다면 그쪽에서 직접 설득하세요.”

나는 한 걸음 물러났고 아내에게는 이런 사정을 얘기하지 않았다. 며칠이 다시 흐른 뒤 아내의 답이 궁금해 물으니 사무총장직을 수락했다고 했다.

“중앙정보부가 설명을 하는데 다 듣고보니 내가 거부하면 아무래도 당신이랑 학교에 뭔가 일이 나겠더라구요. 그래서 봉사활동만 시킨다면 열심히 해보겠다고 했어요.”

이렇게 해서 정말 팔자에도 없는 국회의원을 나대신 아내가 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우리 대학 학생들이 내가 새마을운동에 열심인 것 빗대어 ‘새마을 총장’이라 불렀다. 그런데 아내가 유정회 의원이 되자 나를 ‘어용 총장’으로 바꿔 불렀다. 내가 정치권력을 갖지 않으려 애쓴 이유가 바로 이같은 일들을 염려해서 였는데... 그래도 나는 모르는 척했다. 내 진심을 알아줄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 오로지 단국대학을 키우고, 내 학생들을 지키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힘센 정보기관에 끌려가 매를 맞기도 했지만 우리 대학의 학생들을 지키는 일에는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일을 하는 데도 ‘박정희 대통령이 아끼는 대학총장’이라는 후광이 큰 힘을 보태주었다. 



'유신체제'가 들어서고 부터는 민주화운동을 하거나 시위를 하다가 법을 적용받는 학생들은 가차없이 대학에서 추방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운동권 학생들의 제적을 거부했다. 형법의 적용을 받으면 모르지만 학칙으로 학생을 제적하는 일은 피하려 최선을 다했다. 학생만이 아니라 교수님들에게도 그랬다. 나는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으로 징역형을 받았던 이들도 우리 대학 교수로 모셔오고, 강단에 서도록 했다. 일석 이희승 선생님처럼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운 분도 초대 동양학연구소장으로 모셨다. 심지어 박원순 현 서울시장처럼 다른 대학에서 시국사범으로 몰려 제적된 학생들도 우리 대학에 입하시켜 학업을 마치도록 했다. 그럴 때마다 겁을 주고, 으름장을 놓는 권력기관, 공포의 정보기관에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나는 이를 무시하거나 반박하면서 총장직을 수행했다. 사실 그 이면에는 이같은 박정희 대통령의 우호적 관심과 지원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단국대의 품에서 돕고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어용 총장’ 이니 ‘새마을 총장’이니 하는 그 힐난을 받은 대가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내 아내의 국회의원 생활은 불과 1년 여 만에 백지로 돌아갔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별세를 한 것이다. 절대 권력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려 국가사회를 철저히 통제하던 박정희 대통령인데 가장 믿었던 중앙정보부장의 손에 죽은 것이다. 허망하고 비통한 일이었다. 나는 박 대통령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었다. 비상식적인 정부의 단국대 탄압에 항의하려 대통령을 독대한 일을 시작으로 12년 여의 시간 동안 내가 가진 열정을 단국대에 쏟고 성과를 얻게 한 결과가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에 힘입은 바 크다고 생각한다. 박 대통령에게 이런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달리한 것이 서운하기도 하다.

한편으로 높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사랑과 은혜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세상의 순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학연가연을 통해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바로 이같은 세상의 순리에 관한 것이다. 대통령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권력을 선하게 행사하면 나같은 젊고 나약한 교육자에게 대학을 성장시키는 은혜가 된다. 나 역시 대학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단국대의 발전을 누구보다 열망하는 구성원으로서 대학의 교수, 직원, 학생들에게 내가 가진 작은 힘이나마 선하게 쓰겠다는 다짐을 실천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은혜를 베푸는 일이 될 수도 있었고,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주는 일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대학이란 결국 지식과 사랑을 서로 나는 곳이 아니겠는가. 

그런 인연이 새로이 우리 후배와 후세에 전해져 다시  아름다운 인연을 낳는다면 단국대는 우리 역사 속에 영원할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