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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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식전서』로 시작해 45년간 이어온 독립운동가 후손의 선의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9.10.23 (최종수정 : 2019.10.31)
조회수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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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학을 설립하신 범정 장형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셨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내 부친의 공적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며 살아왔지만 후손으로서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자부심에 앞서 명예로운 정신적 유산을 우리 대학 발전과 교육적에 제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왔다. 그런 소명의식을 바탕으로 대학을 운영하며 얻은 인연 가운데 소중하면서 보람찬 경우가 있다. 우리 대학 법인의 22대 이사장을 지낸 박유철 전 국가보훈처 장관과의 인연이 그렇다. 박유철 전 장관과 교례를 하게 된 배경에는 동양학연구소 설립과 연구 활동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단과대학이었던 단국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우리 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겠다”는 약속을 했다. 고군분투 끝에 이를 단기간에 실현하고 총장에 취임했는데 이 때가 1967년이었다. 총장으로 취임하고 내가 가장 역점을 둔 일이 동양학연구소 설립이었다. 민족사학을 자부하는 우리 대학에 한국 최고의 한국학 전문 연구소를 만들겠다는 것이 내 포부였다. 당대의 석학이신 일석 이희승 선생님을 모시고 연구소의 기틀을 잡아갔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일이 <동양학총서>를 펴내는 일이었다. 한국학 연구의 기본이 되는 명저, 고서적 가운데 국내에서 원본을 찾기 힘든 원전을 찾아 이를 영인본으로 간행, 보급하자는 사업이었다.

동양학연구소의 노력에 학계도 뜨거운 찬사를 보내기도 했는데 그 네 번째 편찬 작업이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였다. 백암 박은식 선생은 유학자로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문> 등 애국언론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중국으로 망명해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선임된 원로 독립운동가이다. 박은식 선생은 항일애국운동만이 아니라 역사학자로서도 뚜렷한 업적을 쌓은 분이었다. 특히,  『한국통사』는 일제의 침략과 민족운동의 전개과정을 실증적으로 체계화한 명저였다. 이 밖에도 구한말이나 망명시절에 각종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많은 글을 발표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했는데 이런 글들이 일제강점기에 유실되고 불온서적으로 취급되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약 4 년여의 시간을 들여 이 자료와 서적들을 집대성하고, 교정과 해제를 거쳐 마침내 1975년에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를 사회에 봉정할 수 있었다. 이 전집이 나오자 가장 먼저 구입을 신청한 대학이 서울대학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사범대 역사과가 뜨거운 찬사를 보내왔다. 왜냐하면 서울대 사범대 역사과는 박은식 선생의 역사관이나 한국사를 바라보는 인식을 자신들의 정신적 뿌리로 존중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큰 감격 속에 학계 원로들을 모시고 출판기념식을 갖도록 했고 이 자리에 박은식 선생의 유족들도 초대해 애국지사를 조상으로 둔 자부심도 높여드리고자 했다. 내 기억 속에는 아마도 1975년 2학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9월이었다. 기념식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박은식 선생의 가족을 뵈었는데 나중에 우리 대학 법인 이사장으로 초빙한 박유철 전 보훈처 장관을 만날 수 있었다. 



박유철 전 장관은 박은식 선생의 손자이다. 그의 집안은 조부와 부친이 모두 항일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가의 집안이었다. 부친이신 박시창 장군(朴始昌, 1903 ~ 1986)은 황포군관학교, 중국 육군대학을 나온 엘리트 군인으로 국민당 정부군에서 항일 전쟁에 참전하고, 상해 임정의 광복군 참모부 참모 일하다가 해방이 되자 상해의 광복군 수호지대장으로 중국에 망명했던 동포, 광복군들의 귀국을 지휘했던 독립투사였다. 나중에 귀국 뒤에는 국군 창설에 몸담았고 한국전쟁에 종군해 군단장을 지내고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박 장군이 해방 직후 상해지대장으로 있을 때 비슷한 경력을 가진 김홍일 장군은 광복군 총참모장을 지내며 만주 심양시에서 교포들의 환국을 도왔다. 이 분이 평북 용천 출신이고 나의 부친 범정 장형 선생과 막역한 사이여서 나도 모친의 손에 이끌려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다. 박유철 전 장관과는 처음 만났지만 김홍일 장군과 부친이 만주 망명시절에 가진 교유관계, 그리고 김홍일 장군과 박시창 장군이 중국대륙을 종횡하며 광복군으로 항일전쟁을 치룬 전우관계를 더하면 간접적으로 적잖은 인연이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출판기념회에서 이를 언급하고 교분을 만들 일은 아니어서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를 박시창 장군께 정중히 헌정하고 행사를 마쳤다. 책을 받고 박시창 장군은 감격에 겨워했다. 

“선친의 논문, 저서를 수집해 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라고 평생 생각을 했지만 작업이 너무 힘들어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오늘 책을 접하니 내 가슴에 맺힌 한이 풀리는 느낌입니다.” 

박 장군은 몇 번이나 일선 이희승 선생께 감사를 드리고 나에게도 과분한 치하를 주었다. 당시 박유철 전 장관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미국의 조지아텍에서 학사과정을 마치고 MIT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유수기업에서 일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해외인재 유치’ 정책에 따라 귀국을 했다. 이런 경력은 나중에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알게 된 사실이다. 출판 기념식에서 부친 옆에 서있는 박유철 청년은 내 눈에는 과묵하면서 강인한 의지와 명석한 두뇌를 가진 젊은이로 보였다.  

그 뒤로 별다른 일을 함께 할 기회는 없었다. 다만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공식적 모임에서 인사를 나누곤 했었다. 박유철 전 장관은 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뒤에 건설부 공무원 교육을 총괄하는 교육원장으로 전직했다. 그러다가 내가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일을 하다보니 박유철 전 장관과 직간접적으로 만날 일이 생겼다. 특히 박유철 전 장관은 백범 선생 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좋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 때 서로 힘을 모을 일이 자주 생겼다. 박유철 전 장관은 이 일을 계기로 독립유공자 추모 사업에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괄목할만한 사업이 자신의 조부이신 박은식 선생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하는 사업에 참여한 일이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박은식 임시정부 대통령, 신규식 선생 등 중국 상해에 있던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고 정부 차원에서 이를 추진해 봉환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박유철 전 장관의 진중한 품성이 유가족들을 화합하는데 기여를 했고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뜻에 부합되어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봉직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일을 하다가 나와 박유철 전 장관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 전 장관의 부인되는 분이 우강 양기탁 선생(1871~1938)의 손녀라는 것이다. 양기탁 선생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신민회를 창설한 뒤 고려혁명당을 세워 무장투쟁을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그 분의 경력을 떠나 선친인 범정 장형 선생은 생전에 양기탁 선생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해준 일을 자주 말씀하셨다. 만주에서 귀국 한 뒤 대학 설립을 추진하면서 주위 사람들과 정담을 나눌 때면 빠짐없이 양기탁 선생의 용감한 투쟁 행적을 얘기하고, 당신께서 이에 감동해 은밀한 모금을 통해 많은 자금을 지원했음을 자랑스러워 하셨다. 

선친이 그토록 존경하고, 뜻을 같이했던 분의 손녀가 박은식 선생의 손자와 혼인을 맺어 해방된 조국에서 자녀들을 기르고 살다니... 박유철 전 장관은 자신의 집안 내력에 대해 별 말이 없었고, 나 역시 그런 성격이니 1975년에 처음 만난 뒤 이런저런 공식적인 일로 만남을 가지면서도 이런 인연을 털어놓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100년이 넘는 시간을 관통하는 현대사 속에서 가시밭길을 함께 걸었던 선열의 자식으로서 어찌 공감하는 바가 없겠는가. 신비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뒤로 나는 박유철 전 장관을 마음 속으로 믿고, 그의 가정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편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박 전 장관은 문민정부에서 독립기념관 관장의 중책을 맡았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 4대, 5대 관장을 6년간 봉직하며 열심히 소임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응원을 했다. 이윽고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급으로 격상된 보훈처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우리나라의 국가유공자들을 숭모하면서 유가족들을 돌보는 국가행정의 총본산을 책임지는 자리이니 박 장관으로서도 선조에게 자랑스럽고 보람찬 자리인 셈이다. 그런데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공감은 하며 지냈지만 박유철 당시 장관은 참으로 우리 대학에 고마운 일을 많이 해주었다.


첫 번째는 범정 장형 선생의 묘소를 한남동 캠퍼스에서 죽전캠퍼스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를 해결해준 일이다. 

한남캠퍼스 시대에도 범정 선생의 묘소는 학교 안에 있었다. 오래 전부터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인정받아 교정 안에 설치가 가능했다. 면적이 비좁아 학생들의 휴식 공간이 많지 않던 한남캠퍼스에서 설립자 묘역 근처는 분위기가 호젓한 숲속에 있어 학생들이 독서를 하고 사색을 할 수 있어 좋아했다. 그런데 죽전캠퍼스를 이전하면서 허가 신청을 하니 용인시에서 난색을 보이는 것이었다. 독립유공자인 건 인정하겠지만 대학 설립자인 것도 사실이니 교정에 새로이 묘역을 꾸미는 것은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법령이 바뀌어서 캠퍼스 안에 묘지를 설치하는 일이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난감한 일이었다. 대학을 새로 설립하는 것도 아니고 이사를 온 것인데 다른 시설물의 진입은 되지만 묘소는 안된다니...

나로서는 대학의 창학정신과 무형의 전통을 담고있는 교육적 상징으로 설립자 묘소를 전승시키는 일이 당연했지만, 내 부친의 묘소이기도 해 자칫 공과 사를 혼돈한다는 뒷얘기를 들을 수 있가에 오히려 나서지 못하며 냉가슴을 앓고 있었다. 이때 박유철 당시 보훈처 장관이 나서서 묘역 설치허가를 하도록 용인시를 설득해주었다. 

범정 선생 묘역은 단순히 대학 관계자 묘소가 아니고 국가유공자로서 자신의 독립운동 정신을 대학교육에 투신하려 모든 것을 바치고 삶을 마감했으니 당연히 그가 세운 대학에 안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국립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의 연장으로 인정하는 공식문건을 전달해 관계 기관이 잘 보전하라는 당부도 있었다. 국가 중앙 관청으로서 독립유공자의 예우와 관련된 일이니 지방자치단체가 막을 일이 아니라는 설득도 주효했다. 다행히 용인시도 이를 받아들여 무사히 설립자 묘역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독립기념관에 범정 선생의 어록비(語錄碑)를 세워준 일이다.

독립기념관은 2004년부터 독립운동에 헌신한 주요 지사들의 시, 어록, 경구를 비석으로 만들어 전시하기로 했다. 현재까지 모두 애국지사 103명의 어록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범정 장형 선생이 포함되어 있다. 유가족인 나에게나 우리 단국인에게 자랑스러운 일인데 이를 대학에서 강권하거나 하지 않았음에도 독립기념관 측에서 기꺼이 어록비 설치를 감당했다. 

어찌된 일인지 경위를 알아보니 박유철 전 장관이 1975년에 우리 대학이 펴낸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의 발간에서 받은 감동을 되갚겠다는 뜻에서 베푼 후의였다는 것이다. 어록비 설치는 독립기념관장이나 보훈처 장관의 결재가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심의위원회의 토론과 비준을 거쳐야 했다. 관계부서에 필요성을 설득하고, 위원들을 비준을 호소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박 전 장관은 기꺼이 이를 감수했다. 독립기념관장으로 6년 간 재직하고, 보훈처 장관으로 재임하던 박유철 전 장관의 경륜과 선의 덕분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2009년에 세워진 범정 선생의 어록비에는 “독립은 남이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경구가 실려있다.



해마다 우리 대학의 젊은이들이 국토순례를 하거나 기념식을 가질 때 이 어록비를 탐방하며 단국인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다짐한다. 이처럼 좋은 교육시설, 애교심의 상징을 독립기념관에 둘 수  있게 된 것이 박유철 전 장관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일이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세 번째는 대학이전사업 과정에서 불거진 정부와의 갈등을 완화시킨 일이다. 

노무현정부가 들어선 이후 이전 사업 시행권을 둘러싼 사업자들의 분쟁이 커지더니 정부의 개입을 불러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대학 이전사업의 지연이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금융기관에 투입한 구제금융 상환을 지체하는 원인이 된다는 논리를 씌우고, 예금보험공사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나는 검찰에 기소를 당하고 이사장직까지 물러나야 했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배경에는 내가 아끼던 직원과 그를 통해 추천받은 변호사, 그리고 이를 비호하여 이권에 동참하려던 정치인들의 야심이 적잖게 작용을 했다. 당시 이전사업의 법적 분쟁을 교육부 장관까지 나서서 나에게 책임을 지도록 강압하는 분위기였고, 마치 내가 어마어마한 국고를 마음대로 유용한 사람으로 법정에 서야 했다. 그 분노와 실망감도 컸지만 나를 쳐다보는 지인들의 눈길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2005년 8월에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열리는 광복절 축하행사에 대통령을 대신해 정부대표로 참가해달라는 공식 제의가 왔다.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해외동포의 중요행사에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참가하는 것은 나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이 되었다. 이어서 2년 뒤에는 중국 중경에서 열리는 임시정부 수립 88주년 기념식에도 역시 대통령을 대신하는 정부대표로 참가했다. 이 일은 나를 음해하던 정치인이나 그들의 청탁에 따라 이전사업을 흔들려 하던 관료, 사업자들에게 큰 시사를 주는 일이 되었다. 대통령을 대신해, 정부를 대표해 정부 차원의 행사를 주도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에 대한 신원보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런 일을 만들 의지도 없고,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이런 일을 한 사람이 박유철 당시 보훈처 장관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얘기지만 박 전 장관은 “내가 존경하는 분인데 그런 불상사를 당한 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면서 “독립유공자의 후손이고 평생을 교육사업에 헌신한 분이니 얼마든지 광복절 기념행사를 주관할 자격이 있눈 분이라 믿었다.”고 했다. 그래도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 일인데 자신있게 나의 결백을 믿고, 남들에게도 이를 설득하려면 적잖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믿고 길러준 비서와 이전 사업이 잘되도록 단국대 편에 서서 나쁜 사람들을 막아달라고 교수로 초빙한 이가 나를 수렁에 빠트렸는데 정작 별다른 친분도 없고, 30여 년 전에 책을 출판하며 맺은 인연을 이렇게 은혜로 생각하고 되갚아주는 박 전 장관에게 새로운 신뢰가 생겼다.



어렵고 긴 시간이 흐르면서 죽전캠퍼스는 무사히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과거 시행사들이 제기한 소송, 복잡하게 얽힌 공사비 등의 정산과 이를 통한 부채 청산...신중하면서도 확고한 신념, 이권에 흔들리지 않는 정직한 성품을 가진 분을 이사장으로 모셔야 했다. 나는 공직을 물러나 있던 박유철 전 장관을 떠올렸다. “그 분이라면 이사장직을 맡아 이전사업의 마무리를 지을 것이다.” 나는 결론을 내리고 박유철 전 장관을 만났다. 이사장직을 맡아달라는 것은 그에게 내가 처음으로 한 청탁인 셈이다. 

박 전 장관은 고민 끝에 내 제의를 수용했다. 2008년부터 3년 간 이사장직에 있으면서 박 전 장관은 연일 격무에 시달리고 다양한 난제에 시달려야 했다. 하나씩 하나씩 쌓인 문제들을 해결하던 그는 다시 광복회 회장으로 불려갔다. 독립지사를 조상으로 둔 박 전 장관에게는 애국지사를 추모하면서 그 후손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가장 기쁘고 보람찬 소명이리라.

살다보면 여러 인연을 만난다. 나는 선의를 다해 은혜를 베풀지만 그 대가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아니, 나를 이용해 자신의 앞길을 여는 데 만족하지 않고 대학을 위험하게 만들고, 파탄내려는 이들도 있다. 그 험난한 여정에서 박유철 전 장관같은 분을 만났다는 것은 나에게도 큰 행운이다. 기울어져 가던 조국을 위해 구국계몽, 투쟁의 횃불을 들었던 박은식 선생을 추모하려 펴낸 책을 통해 그 후손들을 만나 주고받은 우의는 늘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평소에는 피차 나누지 못한 말이지만 이렇게 글로나마 고마운 마음을 남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