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전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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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호 여사, 김대중 선생 부부 : 그 따뜻하고 정의롭던 마음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습니다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9.06.18 (최종수정 : 2019.06.20)
조회수 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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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초였다. 이제는 영면하신 이희호 여사님을 찾아갔다. 입원 하셨다는 소식을 들어 문병을 하러 갔다. 마침 잠에서 깨어나신 시간이라 면회가 가능하였다. 여사님의 손을 만져 보니 온기가 없었다. 당신도 기력이 없어서 나에게 제대로 말씀을 하시지 못했다. 그동안 노환을 앓은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었지만 전과는 다른 병색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사님은 언제나 내가 찾아 뵈면 온화한 웃음으로 반겨주셨고 그 때마다 항상 정장 차림으로 맞이해주셨건만  입조차 열기 힘들어하시는 여사님을 보니 울컥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병실을 나오며 그 따뜻했던 미소와 다정하지만 정중한 언행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돌아오며 더 나쁜 소식을 듣기 전에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선생, 두 부부에 대한 인연을 글로 옮기자 결심했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자 애를 쓰며 며칠을 보냈고 이 글을 다 마쳤을 때 바로 여사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야 말았다. 이 또한 인연이런가...여사님은 이제 김대중 선생님과 하늘나라를 산책하고 계실 것이다. 


고 이희호 여사님과 나는 서울대 사범대 선후배 사이이지만 그 인연은 내가 아닌 선친(범정 장형 선생)의 육영사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사님은 1950년도에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했는데 재학 당시 사범대 학생대표, 사범대 학도호국단 부단장을 지낼 만큼 활동적이었다. 이때 친했던 동료 중에 고려대 학생회장을 지낸 김기호 씨가 있는데 이 분은 우리 대학 재단에 근무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여사님이 유학을 결심하고 입학허가를 받았지만 문제는 유학 자금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정을 들은 김기호 씨가 여사님을 당시 우리 대학 이사장이신 범정 장형 선생께 소개시켰다고 한다. 이희호 여사님, 아니 ‘청년학도 이희호 양’은 선친께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사회학과 신생독립국인 한국에서 여성계몽의 중요성을 고백했는데 선친께서는 이에 공감을 하고 선뜻 유학자금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미국가는 여비와 일정한 기간 미국에 체류할 수 있는 자금을 후원했는데 ‘유학생 이희호 양’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을 거란 것이 이 자리를 주선한 김기호 씨의 전언이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 김기호 씨는 우리 대학 정치과 교수로서 사무처장 보직을 맡고 있었기에 소상한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선친의 일인 만큼 이후 내가 이희호 여사와 특별히 교류를 할 기회도 따로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내가 김대중 총재와 인연을 맺을 일이 생겼다. 그 인연은 김상현 의원과의 우정에서 시작되었다. 김상현 의원과는 호형호제를 할 만큼 깊은 우애를 쌓았던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서 <학연가연 10회(2019.01.25.) : 동문처럼, 친구처럼, 그러나 아픔을 준 김상현 의원>편에 밝힌 바 있다. 위의 글에 나왔다시피 1972년 10월에 김상현 의원이 10월 유신 개헌을 위해 선포한 비상계엄조치로 보안사에 끌려갔는데 나를 물고 들어간 것이었다. 회의를 하다가 나는 ‘노재현 계엄사령관’ 명의로 날인이 찍힌 체포영장을 내보이는 수사관들에게 끌려갔다. 

용산구에 있던 당시 주한 미8군 사령부가 있는 언덕의 제법 큰 2층 건물. 구석진 방으로 끌려가는 데 복도가 꽤 긴 편이었다. 그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사람의 비명 소리, 수사관의 악쓰는 소리가 들리는데 누구라도 공포감이 커질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이름도 밝히지 않는 수사관들이 험악하고 살벌한 눈초리로 나를 확인하더니 심문을 시작했다.  옆방에서는 계속 매를 맞는지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울다가 흐느끼기도 하고 참기 힘든 고통에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기도 하였다. 듣는 내가 다 공포심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마도 그것이 심문하려는 이들의 의도였을 것이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수사관은 A4 용지 한 장을 꺼내주면서 내가 아는 정치인들 명단을 아는 대로 적으라 했다. 나는 나와 교분이 있는 사람들 보다는 수사관들도 알만한 인지도가 있고 별로 교류도 없는 전현직 국회의원 20명 정도를 써냈다. 그들은 내 진술서를 받더니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놓고 내가 적어낸 것과 대조를 했다. 수사관은 대뜸 “왜 김상현 이 자식 이름을 빼놓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상현은 담당 수사관에게 장충식 총장하고 제일 가깝다고 실토했다”면서 “대학 총장이 빨갱이들을 잡는데 협조해줘야지 거짓말을 해서 수사를 망치게 하면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계속 엄포를 놓았다. 

이렇게 시작된 수사관과의 말씨름을 통해 알게 된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김상현은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맞선 김대중 후보의 핵심 참모(실제로 김상현 의원은 김대중 후보의 비서실장, 선거대책본부장 등을 맡았다)인데 이 자가 김대중의 대통령 선거운동 자금책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장충식 총장, 서울시장 지낸 모씨가 선거 자금을 가장 많이 대줬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혐의였다. 우리 대학 교직원들 월급 줄 돈이 없어서 사채를 빌리느라 전전긍긍하던 재정형편으로 무슨 대선 자금을 지원할 여력이 있겠는가. “김상현 의원과는 오랜 우정이 있어서 술이나 밥을 사거나 선거에 나간다면 호감의 표시로 격려금을 보탠 적은 있지만 대통령 선거에 거금을 지원할 힘도 없고, 형편도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수사관들은 전혀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수사관들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서 김상현 의원의 진술내용을 보여줬다. 그의 진술에는 내가 그에게 4천 만 원의 선거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4 천만 원은 그 당시 서울에 있는 최고급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내가 곰곰이 속셈을 해보니 김상현 의원에게 십여 년 동안 지출한 금액의 10배는 넘는 돈이었다. 수사관들은 교대로 돌아가며 나를 윽박지르고 구타를 하며 김 의원의 진술에 동의할 것을 강요했다.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김대중 후보를 잡기 위한 구도에 대학 총장인 나를 얽어매려는 의도였다.


밤을 새우며 나를 겁주고, 욕을 퍼붓던 수사관들은 이윽고 구타를 하며 고문을 했다. 나중에는 물맛을 보여준다며 내 어깨와 머리를 붙잡더니 수조에 처박기에 이르렀다. 발버둥을 치고 저항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거리에 나돌던 “서빙고에 끌려가면 성해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허위가 아니었음을 몸으로 깨달았다. 철야로 잠을 안 재우고 그 수모를 당하면서도 나는 ‘4천만 원 지원’ 진술을 거부했다. 내 완강한 자세 때문이었던지 나중에는 김대중 후보에 대한 정치자금 지원은 뒤로하고 우리 대학 출신의 국회의원인 오치성 씨에 대한 뇌물을 진술하라 억지를 부렸다. 직감적으로 당시 보안사령부 최고위직에 있었지만 국회의원 자리를 노리고 있던 K 장군이 떠올랐다. 그는 오치성 의원과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가 겹쳐서 출마를 못하고 군부에 있어야 했는데 이를 상당히 원통해 한다는 후문을 들은 바 있었다. 억지와 고문으로 나를 김대중이든 오치성이든 고위 정치인에게 엮어 정치자금 스캔들로 만들려는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 더 강하게 저항해야 했다. 그들이 사실이 아닌 허위자백으로 음해를 하려는 의도에 굴복할 수 없었다. 

밤잠을 재우지 않고 협박과 구타를 견뎌야 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던 차에 갑자기 석방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내력을 들어보니 보안사령부에서 중책을 맡고 있던 우리 동문 중 한 사람이 학교 측의 하소연을 듣고는 나를 수소문했고, 계엄사령부의 고위 인사들을 찾아가 직접 나의 결백을 호소하며 신원을 보증했다고 한다. 천만다행으로 그 동문의 호소가 힘을 발휘해 옥고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선생과는 그 전에도 직접적으로 만나고 연락을 주고받을만한 친분이 없었지만 이로써 더욱 그 인연은 엷어졌다. 1972년 이후 김대중 선생은 ‘빨갱이 정치인’으로 덧칠이 칠해져 망명과 투옥을 거듭했다. 급기야 서울의 봄 이후 선생은 ‘내란음모의 수괴’로 낙인찍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와중에 이희호 여사라고 어떻게 편할 날이 있었겠는가. 망명자의 아내, 사형수의 아내로 도피와 옥바라지가 교차되는 험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연결되면서 정치인 김대중의 길도 좀 더 평탄해졌다. 동시에 우리나라는 민주화의 거센 격랑에 휩싸였다. 직선제 개헌에 이어 광주항쟁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함성이 거세어졌다. 그 선두는 대학생이었는데 우리 대학의 최덕수 군(당시 천안캠퍼스 법학과 2학년)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임으로써 사회적 열망의 정점을 앞당겼다. 1988년 5월 18일 최덕수 군이 천안캠퍼스 시계탑 앞에서 분신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다른 무엇보다 그 학생의 생명이 다치지 않기를 빌었다. 개인이 시도한 일이지만 학교가 나서서 지원에 최선을 다하도록 지시했다. 덕수 군의 어머님은 광주시에서 떡장수를 한다고 했다. 고생하며 키운 아들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클지 십분 이해가 되었다. 전신에 3도 이상의 화상을 입은 덕수 군의 병실을 찾아가니 덕수 군은 고통에 몸을 비틀며 삶을 붙잡고자 했다. 그러나 26일 오후에 덕수 군은 숨을 거두었다. 진심으로 가여웠다. 이념이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고 간에 가난한 어머님의 희망이자 기둥이었을 아들이 기성세대의 파행을 규탄하느라 목숨을 바치다니. 나 역시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공안당국은 덕수 군의 장례식이 가져올 파급효과를 두려워 했다. 가능한 한 조용히 장례를 치루는 것이 그쪽의 바램이었다.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교직원들에게 덕수 군의 장례식을 천안캠퍼스가 아닌 서울캠퍼스에서 치룰 준비를 하도록 했다. 사회적 시선이 집중되어 조문객들이 많을 것이고 규모도 커질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직원부터 근조 넥타이를 매고 덕수 군의 죽음을 추모하도록 했다. 

그럴수록 공안당국에서는 여러 협조 사항을 전달해왔다. 그중에는 장례비가 2천만 원 이상 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도 있었다. 말하자면 장례식 규모를 최소화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내 마음이 불끈했다.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장례비의 상한선을 정해 장례를 치루라니, 젊은이의 죽음을 어른인 우리가 그런 식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빚을 얻기로 했다. 학교 공금을 투입하면 정부 측에서 어떤 식으로 책임을 따지자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리저리 돈을 구해 사비 5천만 원을 내놓았다. 재야 단체가 나서서 ‘민주국민장’이라는 형식으로 장례식 규모가 커졌지만 장례식 비용을 묻고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장례를 치루던 중 김대중 선생이 조문을 왔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떨어지고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상황이었다. 김대중 선생은 무엇보다 대학 당국이 얼마나 고생이 많냐며 위로를 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죽어 나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 자리에서 김대중 선생은 처음으로 이희호 여사와 우리 선친의 인연을 얘기했다. “아내가 미국 유학을 갈 때 범정 선생님께서 여비랑 생활비를 보태주신 덕분에 무사히 유학을 갈 수 있었다.”는 회고담인데 “지금도 아내가 고마워 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나 자신도 선배로 부터 듣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36년 전 일을 기억하고 있다니... 듣는 내가 오히려 “기억해줘서 고맙다.” 말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20년을 총장직에 근속하면서 경험을 통해 “도움 준 사람은 기억하지만 도움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만남을 통해 나는 김대중 선생이 상당히 꼼꼼하고 섬세한 성품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다른 만남을 통해 나는 김대중 선생이 섬세한 성격이 넓은 지식체계와 결합해 큰 정치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내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재임할 때였다. 나는 1991년부터 회장으로서 백범사업회를 8년 동안 운영을 책임진 적이 있었다. 부회장이나 고문으로 사업회 운영에 지원한 것을 포함하면 10년이 넘는다. 이 긴 시간 동안 당시 정부도 백범사업회에 어떤 재정지원도 하지 않았고, 재계도 도움을 주지 않고 있었다. 명색이 항일전쟁을 이끈 상해임정의 수반이었던 건국유공자였지만 그의 유지를 받드는 사업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명예도, 돈도 없는 단체라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존재가 위태했다. 독립유공자들이 나에게 회장 취임을 부탁했을 때 나는 선선히 응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기념사업회를 도왔다. 백범일지를 중국어로 번역, 출간했고 상해 임시정부 청사 복원과 백범 동상 건립 등을 기념사업회가 주도토록 했다. 



그중에서도 백범 선생 추도식은 어찌 보면 고인의 유지를 기리는 가장 기본적인 행사이다. 그러나 추도식에 주요 인사들을 초대하면 나오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 정부 주요 인사, 정치인, 기업인, 군인 등 직업을 막론하고 추도식에 자리를 함께 해주는 분들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백범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추도식에 참석해주고 독립 유공자들을 위로하며 격려를 했다. 독립유공자 원로, 학자들과 환담을 나누다보면 김대중 선생이 항일운동사와 관련 인물들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인식도 상해 임정을 중심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갖고 있었다. 정치인이 그만한 지식과 철학을 가지려면 직접 공부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애국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 때 나는 김대중 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강해졌다.

1992년 대통령 선거가 본격화되기 전이었다. 독립유공자 원로, 광복군 출신 원로들께서 회장인 나에게 요청을 했다. 출마 예상자들이 백범 선생 추도식에 와서 독립운동사에 대한 식견을 담아 정견을 발표하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대중, 김영삼, 정주영, 세 분의 후보자들에게 원로분들의 의견을 대신 전달하고 가능한지 문의하였다. 김대중 후보는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지만 김영삼 후보 측은 어렵다는 응답을 했다. 그런데 얼마 뒤 참석하겠다는 응답이 왔다. 참모들이 설득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참석하겠는데 나에게 와서 추도식에 대한 사전 설명을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이 때 김영삼 후보를 공식적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정주영 후보도 만나게 되었는데 두 분 모두 독립운동에 대한 식견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애정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서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돌아오는 길에 저절로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김대중 후보와 대비가 되었다. 권력에 대한 열망은 크지만 역사를 알려는 진지한 노력은 부족했다. 김대중 선생을 만나고 나니 이런 차이가 저절로 느껴졌다.


김대중 선생이 1993년 선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뒤 세월이 흘렀다. 그 5년 동안 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미운털이라도 박혔는지 온갖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천안캠퍼스에 종합병원을 세울 때는 모든 인허가권을 이용해 우리 대학이 취할 수 있는 재정적 자구 조치를 막아서 위기가 깊어지도록 했다. 재정난이 심각해지자 이번에는 불과 대통령 임기가 4,50일 정도가 남은 시점에서 교육부를 통해 메시지를 전했다. 모 국장이 당시 대학법인의 김강웅 사무처장과 나를 부르더니 대학운영이 위기 상황에 쳐해있다는 것을 안다면서 1개월 이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대학 경영권을 놓고 물러나라는 요구를 했다. 누구의 지시냐 물었더니 교육부 장관이 서명한 공문을 내밀었다.

이에 앞서 나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 당선자 내외를 만날 수 있었다. 김대중 선생이 초청을 한 것이다. 만나보니 이희호 여사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이 여사는 다정한 미소로 “저를 도와준 분이 단국대 설립자이신데 장 박사님이 그 후손이시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그 분의 막내 아들로 대학에 몸담아 지금까지 대학을 운영해왔다고 밝혔다. 이것이 이희호 여사와 첫 만남인 셈이다. 47년 만에 그 인연의 당사자를 만난 것이다. 그것도 대통령 영부인이 되어서.

그 자리에서 김대중 선생은 또 하나의 인연을 밝혔다. 바로 1972년에 내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던 일이었다. 김대중 선생은 내가 고초를 당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며 비록 김상현 의원의 허위자백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결국 나를 잡으려는 독재정권의 횡포에 당한 셈이니 미안한 일이라 위로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남북체육회담을 통해 단일팀과 단기(團旗)를 성사시킨 일, 당시 회담의 진행과 오간 대화 내용 등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그 속에서 당신이 대통령에 취임하면 남북교류와 화해작업에 앞장서겠다는 의욕도 보였다.

이같은 만남을 가진 뒤 나는 대학경영권을 내놓으라는 통첩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내가 겪고 있는 위기의 저변에 김영삼 정부와의 불화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닌가. 나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대변인으로 있던 박지원 동문(상학과 졸업, 대통령 비서실장, 국민의 당 대표 역임)을 만났다. 그에게 지난 5년 간의 과정을 설명하고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여 단국대의 신캠퍼스 신축사업과 재정난 해결을 관리한다는 방침을 정해 교육부에 통보해줄 것을 청원했다. 박지원 대변인도 적극적으로 모교의 위기를 풀고자 노력했고 다행히 우리 대학의 어려움이 대통령 당선자에게 받아들여졌다. 결국 정권인수위원회를 통해 ‘향후 단국대의 이전사업 정상화 문제는 차기 정부에서 풀어간다’는 입장이 교육부 장관에게 전달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대학은 법인부도의 위기 속에서 정부의 협조를 받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2000년 6월에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을 만나 역사적인 6·15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을 통해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부활할 수 있었다. 가족 상봉사업은 남한과 북한의 적십자가 진행하기로 했는데 뜻밖에도 나를 선임했다. 아마도 당선자 내외를 만났을 때 나에게 남북체육회담에 대해 소상히 묻고, 어떻게 회담을 이끌었는지 물었던 일들이 모두 이런 일과 연관이 있었구나 하는 짐작이 들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희호 여사가 나의 적십자 총재 추천에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다른 쪽에서는 경희대의 조영식 총장을 천거하기도 했으나 이희호 여사가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단일팀을 성공시킨 장 총장이 적격이라며 강하게 주장을 해 이를 관철시켰다는 후문을 듣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두 분의 후의에 힘입어 대학의 재정적 위기도 차분히 해결해날 수 있었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고 시간이 더 많이 걸렸지만 2007년에 신캠퍼스로 이전을 할 수 있었다. 내 개인의 안위를 떠나 1998년 1월에 김대중 선생의 결단이 없었다면 우리 대학은 깊고 깊은 혼란과 침체의 늪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 신캠퍼스 준공과 입주 기념식을 할 때 나는 김대중 선생과 이희호 여사의 참석을 간곡히 부탁했다. 두 분의 도움이 맺은 결실을 보여드리고 싶어었다. 불행히도 김대중 선생은 당시 폐렴이 악화되어 외출이 불가능했다. 이희호 여사가 참석하여 선생을 대신해 신캠퍼스 평화의 공원에 나무를 심어 주었다. 지금도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다른 대통령들도 여러 대학에 나무나 기념물을 증정, 기탁했지만 역사가 바뀌면 사라지거나 훼손되거나 욕을 먹거나 없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두 분이 심은 나무는 지금도 우리 캠퍼스에서 정정하게 빛을 펼치고 있다.



돌아보면 두 분의 앞길을 여는데 내가 기여한 일은 거의 없다. 있다면 선친의 덕이고, 김상현 의원과의 우정이었을 뿐이다. 내게 베푼 은혜가 너무 크다고 생각할 뿐 따로 갚을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김대중 선생은 2009년 8월에 세상을 달리하고 말았다. 선생에 대한 미안함을 갚고자 이희호 여사를 뵙고 도울 일을 알려 달라 했다. 사양하던 여사는 북한에 대한 의료지원 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기꺼이 동행을 약속했다.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다.

북한이 보청기를 생산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보청기 200개, 링거액 2,000개, 진통제 등 다양한 약을 준비했다. 구급차도 준비해 따로 배편으로 실어 보냈다. 모두 이희호 여사께서 국내외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일이다. 이희호 여사를 모시고 평양에 도착하자 우리 일행이 가지고 간 그 많은 의약품에 북한 당국도 감탄하고 또한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였다. 그런데 남한 정부에서 북한에 대한 형식적인 메세지라도 보내올 줄 알았는데 대통령이건 총리이건 아무런 의사 표시가 없으니 북한이 오히려 당황하는 듯했다. 정치적인 교류 재개 제안이나 아니면 하다못해 이희호 여사의 방북에 많은 편의를 해달라는 정도의 인사말이라도 보내는 것이 상식 아니냐는 듯했다. 정치적인 문제는 별도로 이 방북은 여사님의 박애정신, 동포에 대한 사랑이 잘 드러난 사업이었다. 

이후에도 나는 6·15선언 기념 행사, 김대중 대통령 노벨상 수상 기념 행사 등에 빠짐없이 참가했다. 김대중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는 더욱 열심히 참가했다. 더 나아가 이들 행사에 우리 대학 음악대 교수님들, 무용이나 음악 전공 학생들의 공연을 해 행사를 빛내주었다. 그때마다 이희호 여사는 “단대 식구들이 참석해서 행사를 빛나게 해줬다.”며 큰 칭찬과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렇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글을 쓰는데 여사님의 별세 뉴스가 도착했다. 선친께서 펼친 육영의지가 맺은 인연은 얼마나 큰 결실로 돌아왔던가. 한국 여성학의 문을 열었고, 여성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시대를 앞서가는 정치인에게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 주었고, 민주화의 결기를 죽음 앞에서도 잃지 않도록 독려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정치인 김대중이 한국을 이끌어 외환위기를 이겨내고, 북한과 새로운 동반자의 길을 열었다. 

나 역시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지만 슬픔을 어찌 몇 마디의 글로 다 풀 수 있겠는가. 부디 영면하소서, 어진 웃음으로 반겨줄 남편의 손을 잡고 서로 환하게 웃으며 천국에서 영생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