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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연가연 (學緣佳緣)
장충식 전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백건우 피아노의 추억 H
‘백건우’하면 많은 한국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자랑스러워 한다. 실제로 그는 매년 세계 각국에서 독주회를 여는 연주가로, 그리고 한때 한국을 대표하던 배우 윤정희 씨와 가정을 이뤄 좋은 삶을 살고 있다. 한국 피아니스트 1세대의 원로급 음악가인 백건우 씨이지만 나는 ‘소년 백건우’와, 그것도 피아니스트로서 명성을 쌓는데 필수적인 ‘피아노’를 통해 또 다른 인연을 맺었다. 반세기가 훨씬 넘은 60년 전의 일이다. 내가 백건우 씨를 직접 만나게 된 것은 그가 배재중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그는 중학생이었지만 이미 피아노 신동으로 국내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특히 1956년, 열 살이었던 어린 나이에 국립교향악단과 에드바르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을 협연하며 클래식 음악계에 정식으로 데뷔를 했다. 음악의 영재 또는 수재라는 칭찬을 벗어나 한국을 빛낼 인재로 촉망받고 있었다. 한국동란의 포성이 멎은 지 10년도 안된 한국 땅에 피아노를 가진 집이 흔할 리 없었다. 그 척박한 환경에서 등장한 백건우 소년에 대한 관심은 국가적이라 할 만큼 컸었다. 그 국민적 관심이 필자의 선친에게도 손을 내밀었었나보다. 선친께서는 어느 날 나에게 피아노 연주회에 가자고 제의를 하셨다. 명동에 있는 국제극장에서 백건우 소년이 미8군 군악대와 피아노 협연을 한다는 것이다. 클래식 음악이야 내가 좋아하는 분야이기에 일부러라도 연주회를 가겠지만 선친께서는 국악은 매우 좋아하셨지만 서양 음악을 좋아하시는 편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중학생의 피아노 연주를 관람하신다고 나를 동행시켜 가실 분은 아니었다. 아버님을 따라 공연장에 가서야 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연주회는 대단한 성황이었다. 공연장인 국제극장에는 관람객으로 북적였고 밖에는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표를 구하다가 되돌아 갈 정도였다. 들어가고 보니 그 곳에는 이북출신, 특히 평안북도 출신 유명 인사들은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북오도청(주 : 행정법 상 미수복지구인 황해도·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함경북도의 행정 및 조사연구를 위해 세워진 이북오도위원회의 산하 도청)의 평안북도 지사를 비롯해 각 군민회장, 기타 법조인 언론인 교육계 종교계 등에 재직 중인 많은 동향 분들을 볼 수 있었다. 선친께서는 그 중에서도 평안북도 도민회 회장의 특별 초대를 받고 가신 것이다. 각별한 이유가 또 있었다. 나는 모르고 있었지만 백건우 군 할아버지와 내 아버지는 고향친구 사이였다. 전쟁의 참혹함을 타향에서 견뎌야 하는 실향민이자 고향 친구의 일가에 생긴 경사이니 선친은 아들인 나를 특별히 동행해 연주회를 간 것이리라. 평안북도 도민회 회장이 백건우 군의 연주회에 내 아버지를 초대한 것은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백건우 소년의 재능을 살릴 장학지원에 대한 기대가 그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피아노는 일반 가정에 들여 놓을 수 없었던 고가의 악기인 동시에 가구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피아노를 생산하지 못했다. 수입에 의존해야 하지만 달러가 귀한 시절이라 당연히 외국산 피아노를 취급할 대리점 개설도 쉽지 않았기에 돈이 있어도 개인이 사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평안북도 출신 인사들 중에는 경제적으로 유력한 분은 많았으나 백건우 군에게 피아노를 선뜻 사줄만한 분도 없었다. 평안도민회 회장은 피아노 천재 백건우 군을 위해 피아노를 기증해줄 분을 백방으로 찾았으나 나서는 인사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범정 장형 선생을 떠올린 것이다. 선친께서는 단국대를 설립해 육영 사업가로 이미 동향인들에게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 불우한 사람을 위해서 봉사를 많이 하는 분으로도 소문이 나있었다. 당시 평북도민회장은 이 점에 착안을 하여 내 선친을 찾아와 피아노를 사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물론 백건우 군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다. 따로 개인 연습용 피아노를 사줄 수 없었다. 선친께 피아노 기증을 설득할 그 당시에 듣기로는 백건우 군이 배재중학교 강당에 있는 피아노를 방과 후 사용한다고 했다. 겨울에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난방 시설이 없는 추운 강당에서 나이 어린 소년이 피아노 연습을 하는 것은 ‘연습’ 이전에 ‘고행’이었으리라. 백건우 ‘어린이’는 매일 학교 강당에 가서 시린 손을 녹이고 연습을 하다가 다시 추위에 손가락이 굳으면 손을 비비며 녹이고 연습을 한다고 했다. 유일한 위로는 아버지가 저고리 속에 품어 보온을 한 온 우유를 마시는 것이었다. 어린 소년의 의지고 대단하고, 이를 사랑으로 뒷받침하는 부모의 심정이 또 어땠을까. 백건우 소년의 아버지가 하는 말씀을 듣자 선친의 마음은 바로 굳어졌다. 추위에 밥을 굶는 고학생을 봐도 어떻게든 장학금을 마련해주시던 선친이시니 이런 사연을 듣고 가만히 계실 분이 아니었다. 당장 피아노를 기증해준다는 약속을 하셨다. 다만 그 약속의 결과물, 즉 피아노를 마련하는 방법이 남달랐다. 선친께서는 나를 부르시더니 피아노를 내노라 분부하셨다. 연주회를 같이 가자하신 이유는 음악을 듣자는 것이라기 보다는 “너가 가진 피아노를 백건우 군에게 주라”는 암묵적 동의를 구하려는 '사전작업'이었던 셈이다. 백건우 군의 재능이야 하늘이 주신 선물이고, 그 노력 또한 감동스럽지만 내가 마련한 피아노 역시 내게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었다. 그 피아노는 독일산이었는데 우리 집에 들이기까지, 즉 수입과정에 1년의 시간이 걸렸다. 비단 수입 과정에서 들인 노고가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그 피아노를 마련한 이유는 내 큰딸아이 때문이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던 나는 내 자식들에게 음악 교육을 제대로 받게 하고픈 희망이 있었다. 자식들이 음악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도록 키워주고픈 아비의 마음이 담긴 피아노였다. 그 피아노를 사고 싶어 아내와 나는 첫 아이인 큰 딸이 태어나고부터 저축을 했다. 큰 딸이 4살 나던 해에 간신히 피아노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나마 증권회사와 개인 사업으로 약간의 돈을 만지던 때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몇 해를 걸쳐 저축을 하고, 1년을 들여 수입해온 피아노를 다른 집 아이를 위해 기증하신다니 내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선친께서는 한마디 위로의 말도 건네지 않고 당연한 일을 하시는 듯 피아노를 가져가셨다. 선친의 의지를, 더군다나 어려운 환경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는 소년에게 필요하다는 장학사업을 거부할 수도 없었다. 선친께서는 피아노를 가져 가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계림이(큰 딸의 이름)는 아직 어리잖니, 그리고 백건우 같은 영재도 아니고, 당장 피아노가 없어도 될 거야. 하지만 백건우를 보라구. 이제 해외 연주도 해야 한다 하고, 미국으로 유학도 간다는데 연습할 피아노가 꼭 있어야 하지 않겠니? 나중에 나라를 빛낼 재능이 있는 아이에게 좋은 일을 하는게 우리가 할 일이야.” 그리고는 우리 딸에게 준 피아노를 가지고 가셨다. 내 기억으로는 세관에서 수속을 마치고 피아노를 집으로 옮겨 놓은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은 날이었다. 피아노를 다른 사람에게 내준다고 얘기를 했지만 네 살배기 어린 아이가 이해를 할 수 없었으리라. 혹시 피아노가 상할까 마음대로 치지도 못했는데... 큰 딸은 영문도 모른 채 피아노가 집밖으로 실려 나가는 날 많이 울었다. 피아노가 들어오자 좋아했던 만큼 슬픔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피아노가 있던 자리를 보면서 울기도 했다. 나는 피아노가 있던 자리에 화분을 놓았다. 딸 아이에게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그런 일이 있은 후 배재중학교로부터 연락이 왔다. 피아노 기증식을 정식으로 갖기로 결정하였으니 참석해달라는 것이다. 날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배재중학교 강당 현관 앞에서 여러분들과 기념 촬영을 한 일은 선명하다. 당시 배재중학교 교장선생님, 평북도민회 회장, 평북지사와 용천군 군민회장, 그리고 나의 선친과 내가 참석하였다. 우리 대학 측에서도 많은 분들이 동석을 하여 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기증식에서 만난 백건우 군은 무척 마르고 왜소한 체격에 상고머리를 하고 있었다. 기증식을 치루면서 나는 조용하고 차분해보이던 그 소년에게 새로 얻은 피아노가 큰 기쁨이 되길 염원했다. 나 역시 음악 교육을 위해 애를 써서 마련한 피아노였고, 그 피아노를 집에 들이자 뛸 듯이 기뻐한 내 딸아이의 표정이 눈에 선했으니까. 물론 일주일도 못 채우고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가서 헤어져야 했고 딸의 눈물만 자아내고 말았지만... 그 뒤, 백건우 소년은 1961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줄리어드음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스무살을 넘기자마자 국제콩쿠르에 입상해 성공가도에 입문하고 지금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노연주가로 전 세계를 누비고 있다.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내 큰딸은 유년기에 겪은 ‘피아노 기증 사건’때문인지 피아노대신 첼로로 선회해 성실히 음악 공부를 했다. ‘상고머리 중학생’이었던 백건우 소년은 이미 고희를 넘겨 인생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나 역시 세월의 무게를 실감하고 있다. 피아노 기증은 이미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그야말로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 피아노가 과연 내 선친께서 희망했던 대로 백건우 소년의 성장에 유익했었는지, 그리고 어찌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다. 혹시나 비록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집에서 쓰던 피아노를 기증했다고 타박이라도 받지 않았을까 염려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너무도 소중한 물건이고, 나름 갸륵한 정성이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그 가치가 티끌처럼 가벼워지기도 하는 것이 세상의 일이니까. 언젠가 같은 자리에서 만나 그 희미한 옛 일을 놓고 정담을 나눌 일이 생길 수도 있겠지. 아니 흘러간 강물이니 추억 속으로 흘려보내는 게 도리인 걸까...
2018.08.21 5745
노태우 : 럭비선수 인연으로 탈냉전, 남북화해의 물꼬를 열다 H
나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대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다. 그 분과 나는 1932년 생으로 같은 나이이기도 하지만 대학시절 럭비선수로 활동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나는 서울대 사범대, 그 분은 육군사관학교의 럭비부 선수였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한 공사, 해사는 모두 스포츠를 통해 군인정신을 기른다는 교육 방침을 갖고 있어서 서로 경쟁심이 대단했다. 럭비 경기는 개인은 막강한 체력이 필요하고, 단체로는 빈틈없는 단합이 필수적인 종목이다. 공격과 수비의 역할이 분명하고, 과감한 전진과 후퇴하지 않는 감투정신이 럭비의 강점인데 이는 군인정신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 사관학교로서는 럭비를 교기처럼 떠받들 수밖에 없었고 럭비 선수는 사관학교의 주목을 받았다. 나 역시 서울대 사범대의 럭비부에 속해있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문예반과 송구부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한국전쟁 때 학도의용군으로 전쟁을 겪으면서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격언을 몸으로 깨달았기에 대학에 진학해서는 럭비부에 입단했다. 서울대 사범대 럭비부는 일제시대부터 유지된 전통있는 럭비팀이었다. 평균 성적을 B학점 이상 유지해야 선수 생활이 허용되어서 선후배 모두 엘리트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사범대 럭비부는 또한 내 기억으로는 전쟁 중에 서울대가 공인한 운동부로는 유일했다. 그만큼 자부심이 강했다. 전쟁 통에 서울대 운동장을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서 운동 여건은 좋지 않았다. 따라서 그나마 멀쩡한 운동장을 가진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연습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육사 럭비부와 연습 경기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대회를 앞두면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육사 럭비부와 만나는 일이 매일이다 시피 했다. 그렇게 4년을 보내니 육사 선수들과 우정도 가볍지 않았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은 럭비부 주장이었으니 더 자주 만난 셈이었다. 특히 나는 스포츠 만이 아니라 공부에서도 노태우 전대통령과 인연이 있다. 노 전대통령이 육사시절에 법학을 배웠던 이광신 교수님이 계시는데 이 교수님은 내가 휘문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의 담임 선생님이셨다. 한국전쟁이 나자 이 교수님은 군복무를 치루느라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가셨고, 거기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광신 교수님은 그 뒤에 내가 우리 대학으로 초빙했고, 부총장을 지내시며 정년을 하셨다. 서울대나 단국대 교정에서는 아니었지만 나와는 또 다른 ‘학연’을 갖고 있는 셈이었다. 이같은 각별한 인연으로 그 분은 나를 변함없이 신뢰했고 올림픽 유치부터 북방정책, 남북 단일팀 협상 같은 중대사에서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내가 노태우 전 대통령과 서울올림픽 유치 캠페인에 나서게 된 첫 발자국은 전두환 전 대통령 때문이었다. 나는 스포츠를 통해 우리 대학의 젊은이들을 스포츠정신을 갖춘 지도자로 키우고 싶었다. 럭비, 씨름, 스키, 스케이트, 조정 등의 비인기 종목을 키운 것도 스포츠가 가진 교육적 기능을 인기 종목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내 소신 때문이었다. 그런 활동이 이어져 대한체육회 이사 겸 대학체육위원회 위원장(1977년~1983년)을 맡고 있었다. 제5공화국이 출범한지 얼마 안된 1981년 봄이었다.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동생이자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전경환 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형님께서 문교부(현 교육부 전신) 장관을 맡기고 싶어 하십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도 비슷한 제안을 받은 바 있었고 전두환 대통령과도 럭비선수로 같이 운동을 했던 인연도 있었다. 거기에 5공화국 출범에 공을 쌓은 여러 지인, 원로들이 나를 천거했다는 풍문도 들은 바 있었다. 물론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계나 관계에 발을 내딛지 않는다는 내 철학, 교육자가 권력을 가지면 결국 자신도 권력에 망가진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내 철학을 설파할 수는 없어서 “제가 허물이 많은 데 문교부 장관이 되면 다른 대학 총장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서 사양을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대한체육회장을 맡으라는 것이다. “나를 높게 평가하시는 건 고맙지만 대한체육회장은 상근직입니다. 대학 총장 일을 하기도 벅찬데 체육회장으로 상근하면 단국대학에 누를 미치는 일이니 양해해주세요.” 이렇게 설명했더니 다음에 한국올림픽위원회(KIOC) 부위원장으로 일해 달라는 요구가 왔다. KIOC 위원장은 대학체육회장이 겸직하도록 되어 있으니 부위원장이라도 맡으라는데 이를 거절하면 정부에 반대하는 총장으로 비칠까 염려해 수용했다. 당시 대한체육회는 유신정권 당시에 임명된 주요 인사들이 물러나면서 신군부 인사들이 빈자리를 채워나가던 일종의 과도기였다. 이 때 가장 큰 화두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학체육회를 중심으로 선언한 ‘올림픽 유치 사업’이었다. 사실 올림픽을 ‘대한민국 서울’로 유치한다고 세계 스포츠계에 선언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을 당하면서 스포츠계는 혼란 속에 손을 놓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박정희 정부 시절에 우리나라는 1970년 아시안게임을 서울로 유치했다가 파기한 경력도 있었다. 아시안 게임 유치는 성공했지만 경제개발 우선론과 무장간첩사건 등이 겹치면서 벌금 25만 달러를 물어내며 개최권을 반납했다. 세계 스포츠계에서 큰 비난을 받았고 신용을 잃어버린 계기가 되었다. 국내 상황이 어렵다고 기껏 올림픽 유치를 세계인에게 공언하고 나선 마당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적 자존심과 신뢰성의 문제가 될 판이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올림픽 유치 캠페인을 제대로 전개할 형편도 아니긴 했다. 우선 중심이 될 대한체육회가 흔들리고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존 당시 그의 측근이었던 박종규 경호실장이 육영수 피격사건으로 낙마를 해 앉은 자리가 대한체육회장이었다. 올림픽 유치 사업은 박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결정된 사업이었다. 나는 당시 대한체육회 이사로 있었는데 박종규 회장이 검토하던 서울올림픽 유치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었다. 올림픽이 단순히 ‘달러를 소비하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경제와 문화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국가개발의 계기’라는 점을 역설했다. 박종규 회장은 “그렇다면 당신이 나랑 같이 박 대통령께 가서 올림픽 유치 필요성을 설명하자.”는 그의 지시 아닌 지시를 받고 이사 자격으로 동참해 같은 박대통령에게 논리를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 뒤 당시 중앙정보부가 분석에 나서서 서울올림픽 유치 가능성이 적지 않고, 경제개발에도 이롭다는 보고서가 나와서 올림픽 유치를 공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올림픽 유치 선언이 1979년 3월에 있었는데 바로 그해 10‧26이 발생해 서울의 봄을 거쳐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단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이 사퇴를 했고, 조상호 전 청와대 의전실장이 후임으로 와있었다. 올림픽 유치 사업을 하자던 주역이 없어졌으니 사업의 추진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아예 서울올림픽 자체를 반대하는 쪽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직후 측근들에게 서울올림픽 유치 활동를 중단시키고 새마을운동 역시 계승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전두환 정권은 유신정권의 후계자가 아닌 제5공화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의 상징인 새마을운동을 이어받으면 새로운 정부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는 정치적 문제라기 보다는 올림픽을 유치하면 도로, 경기시설 등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데 당시 극심한 불경기인 만큼 국가 재정에 무리를 주는 사업에 돈을 쓰지 않겠다는 경제적 계산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1979년 12월에 IOC로부터 1988년 올림픽 유치 후보도시로 공인받았음에도 1981년 2월, 제5공화국 출범 뒤에는 경제개발에 방해가 된다는 논리를 앞세운 고위관료들의 반발로 유치 신청 철회라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한체육회 부회장직을 맡은 지 한 달도 안 된 시간에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있던 이상주 수석이 나를 불렀다. 이 수석은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입니다. 서울올림픽 유치 사업을 포기한다는 결의를 해주십시오.”라는 부탁아닌 부탁을 했다. 대한체육회와 한국올림픽위원회가 공동 이사회를 열어 박정희 정부에서 공표한 서울올림픽 유치를 포기한다는 결의를 통과시키고 공식화해달라는 것이다. 서울올림픽을 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뜻임을 강조했지만 나는 따르지 못한다는 의지를 명확히 밝혔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이는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한 공언입니다. 지금 어려운 경제현실을 들어 올림픽이 경제력을 탕진한다는 주장을 경제 관료나 정치인들이 대통령께 여러 부정적 건의를 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만 해도 동경올림픽을 하고 나서 일본 상품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확 달라졌고 그래서 수출도 더 살아났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경제인들이 앞장서서 지금 1988년 나고야 올림픽을 유치한다고 저 난리를 치는 것 아니겠어요. 이코노믹 애니멀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본능적인 장사감각을 가진 일본이 손해를 본다면 저렇게 관료, 기업, 정치인들이 하나로 뭉쳐서 나고야 올림픽을 열게 해달라고 인심을 얻으려 전 세계를 누비고 있겠습니까?” 이상주 수석은 내 말의 취지를 이해는 하면서도 대통령의 지시이니 수용해달라며 헤어졌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조상호 대한체육회장을 만났다. “회장님은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의 의전실장을 지내신 분이잖습니까. 정권이 바뀌어도 박 대통령이 국제무대에 공언한 바를 이제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회장님이 나서서 청와대를 설득하셔야 합니다.” 조상호 회장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일단 올림픽 유치 포기를 위한 이사회 결의는 지연시키면서 전두환 대통령의 인식을 바꾸는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노태우 당시 정무 제2장관의 도움이 컸다. 조상호 회장과 나는 대한체육회를 통해 올림픽이 국가발전에 미치는 긍정적 사례를 역대 올림픽의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하여 보고서를 만들어 청와대에 제공했다. 노태우 장관도 이에 찬동해 전두환 대통령의 가까운 거리에서 서울올림픽의 중요성과 효과를 설명해나갔다. 자신의 소관 분야인 외교와 안보 쪽의 논리로 서울올림픽이 세계인의 축제인 만큼 이를 준비하고, 개최하는 7년 동안 북한의 대남 침략 위협을 감소시킨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같은 안보논리에 적극 동감했다. 전 대통령은 다시 마음을 바꿔 서울올림픽 개최를 결심했다. 우리보다 국력이 앞선 일본(1980년 당시 일본의 GNP는 우리나라의 16배였음)보다 유치 캠페인도 늦게 시작했으니 유리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쪽에서는 중앙정보부가 백업을 하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같은 기업 총수, 서울시장 등 민간인이 전면에 나서도록 했다. 나고야 올림픽 유치위원들은 한국을 우습게 보고 자신들이 승리한 듯이 기세를 과시했다. 노태우 장관은 나를 불러 면담을 하며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제 한국과 일본의 국가적 자존심을 건 싸움이 됐다며 자신을 도와 IOC 위원들의 마음을 돌리는 득표 활동에 전력을 기울여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1981년 7월 루마니아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의 한국선수단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대회 기간 내내 나는 선수단의 성적보다도 해외 스포츠계 인사들에게 우리나라가 올림픽 유치에 진정성을 갖고 있으며 얼마든지 좋은 대회를 치룰 자신이 있다고 역설하고 다녔다. 힘있는 국제 스포츠계 인사들은 아시안 게임 반납 등의 과거를 예로 들며 우리 한국이 과연 진짜로 올림픽을 유치하겠다는 각오가 있는지를 의문시하고 있었다. 유치 활동이 확실한 전망을 보이지 않아 안절부절하고 있던 1981년 여름이었다. KOC의 김운용 부회장이 나에게 정보를 주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장 총장님, 제가 5월부터 유럽, 아시아 지역의 IOC위원들을 만나고 돌아왔잖아요. 어느 정도 한국의 올림픽 유치에 대한 진정성은 믿게 되었는데, 중동지역 아랍 국가들은 대부분 일본 나고야에 마음이 기울어 있더라구요. 이대로 가면 투표단이 82명인데 한국을 지지하는 위원들은 25명 안팎일 겁니다. 지지자를 더 늘려야 하는데 제가 알아보니 쿠웨이트의 쉐이크 파하드 NOC위원장이 핵심입니다. 이 양반에게 장 총장님이 단국대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시면 어떨까요? 그러면 본인에게도 영예로운 일이고 방한 기간 중에 우리가 잘 설득하면 한국에 친근감을 가질 테고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흔쾌히 응낙했다. 쉐이크 파하드 위원장은 쿠웨이트 왕의 막내 동생이었다. 아시안 올림픽위원회를 관장하는 책임자이고 막강한 권력과 경제력을 갖춘 아시아 스포츠계의 리더였다. 아시아 IOC위원들, 특히 중동국가에 대한 지배력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전통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아 친이스라엘 정책을 유지한데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반이스라엘, 친아랍 정책을 지켜온 북한이 더 가까운 우방인 셈이었다. 그를 한국지지로 돌리면 15표 안팎은 쉽게 일본 지지에서 이탈할 것이고 이는 한국의 득세를 의미하는 일이다. 나는 김운용 부회장에게 교섭을 해달라 부탁했다. 결국 성사되어 방한을 했다. 자신의 전세기를 띄워 가족, 친지, 참모들을 다 데리고 왔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귀국 이후 그는 서울 개최 지지로 방향을 틀었다. 김운용 KOC부회장과 손을 잡고 국제 스포츠 리더들을 친한파로 돌리는 일은 또 있었다. IOC 부위원장을 지내고 있던 코트디부아르(영어식은 아이보리코스트)의 루이스 귀란도 응디아예 위원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뜻을 돌리게 했다. 귀란도 위원은 주 캐나다 대사로 일하던 이였다. 서부아프리카 IOC위원들을 리드한다는 귀뜸을 받고 초청을 해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런 일들은 주로 김운용 부회장, 노태우 장관과 손을 잡고 이뤄졌다. 그들을 한국으로 불러내어 섭외를 할 때 체육단체나 국가기관의 초청장을 내밀 수는 없지만 대학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북한은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하면 체제경쟁에서 뒤떨어진다는 경계심에서 한국의 유치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비동맹 국가나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에 대한 우호적 영향력을 이용해 일본 나고야 개최로 결론 나도록 주력했다. 냉전시대의 경쟁은 민족도 뒤로 돌리는 힘이 있었다. 아랍과 아프리카에 대한 북한의 외교력이 적지 않았던 상황에서 두 스포츠 지도자를 돌려세우는데 단국대의 명예박사학위 수여는 큰 동기가 된 셈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1981년 9월 바덴바덴 총회에서 서울올림픽 개최라는 기적이 탄생한 셈이었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나자 줄이어 서울아시안게임 개최권도 한국에게 굴러왔다. 서울올림픽에서 보여준 우리의 추진력을 보고 경쟁국가가 나서지 않은 결과였다. 노태우 장관은 국제스포츠 행사를 착실히 준비하자는 취지에서 새로이 설치된 체육부의 초대 장관으로 임명되고 이어 내무부 장관을 지내더니 1984년에 대한체육회장과 KOC위원장에 올랐다. 관계와 민간단체를 거치며 서울올림픽, 서울아시안게임을 총괄하는 자리를 역임하고 있었다. 나는 유니버시아드 선수단 단장, 아시안 게임 및 올림픽을 개최하는 나라가 의무적으로 시행하는 세계 스포츠 과학학술회의 주관대학의 총장으로 분주히 민간 스포츠 외교 활동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5년 들어 IOC위 주선으로 서울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납북체육협상이 열렸다.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열린 회담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 회담에서 김종하 KOC 위원장이 수석을 맡았고 KOC 부위원장인 나는 차석으로 회담에 참여했다. 결실을 맺지 못한 회담이었지만 북한의 논리와 회담 진행방식, 우리 측의 전략이 가진 장단점을 숙지하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서울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좋은 경험을 한 것이 있다. 우리나라 에스페란토협회 회장으로 중국에 들어갈 수 있었고 공산권 국가와 교류의 작은 구멍을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에스페란토어는 19세기 말에 폴란드의 의사가 창안한 국제어이다. 언어적 구성을 단순화시켜 세계인이 배우고 쓰기 쉽게 만든 인공언어이다. 나는 언어를 통해 다른 나라 사람들과 격차없이 언어를 습득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1980년쯤부터 학습을 시작했다. 한창 활동을 펼칠 때는 우리 대학에 에스페란토 수업을 정식 교과목으로 만들어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스페란토어협회가 내부 갈등을 겪다가 나를 회장으로 추대해 1982년부터 한국협회장을 맡고 있었다. 에스페란토 협회는 1년에 한번 씩 세계대회를 열어 관련 사업들을 논의하는데 1984년 총회는 중국에서 열렸다. 당시 미국과 소련을 줌심으로 한 냉전이 가열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에스페란토어는 인종, 이념, 국경을 초월해 인류애와 평화를 지향하자고 생긴 언어여서 총회 역시 서구권, 동구권을 가리지 않고 돌아가면 열렸다. 즉 엄격한 비자나 입국심사가 일상화된 사회주의 국가에 입국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한국 대표로 자연스럽게 중국의 비자를 받고 북경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중국은 우리와 비수교 국가이고, 친북한 국가이며 한국의 적성 국가였다. 당연히 북한의 주재요원들이 나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 요원인지, 외교관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북한 요원들은 내가 머무는 호텔까지 찾아와 우리에게 온갖 욕설과 협박을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왔느냐, 죽고 싶냐”는 논지였고 대회장도 가지 못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중국 공안당국에 항의 겸 신변보호를 요청하여 대회장에 나갔고 에스페란토 말로 연설을 하였다. 사실 이렇게 대회 참가에 애를 쓴 이유는 에스페란토 어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이 대회를 통해 동구권 국가에 대한 교류의 실마리를 만들고픈 희망 때문이었다. 중국이라는 거대 공산국가에 당연히 동구권의 다양한 인사들이 참가할 것이 확실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당시 대한체육회장으로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주도하고 있었다. 1984년 LA올림픽에 동구권 국가들이 불참했으니 서울올림픽에는 반드시 참여토록하는 것도 중요한 성공요인이었다. 나는 이 점에 착안했다. 정치적인 문제는 담지 않은 순수하게 한국의 산업발전 상황, 문화 수준을 홍보할 브로슈어를 에스페란토어로 만들어 북경총회에서 배포하고, 회원국가의 지도자들에게 발송하자는 생각이었다. 내 제안을 들은 노태우 회장은 대환영을 했다. 많은 돈이 드는 일이었지만 노태우 회장의 지원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나는 에스페란토 어를 이용해 우리나라의 문화, 산업시설, 아름다운 도시 풍경, 교육시설과 산업제품 등을 컬러로 인쇄해 갖고 갔다. 물론 동구권에 중점적으로 발송하기도 했다. 엄혹한 냉전시대에 남한의 발전상을 적성국가인 중국의 북경 한복판에서 홍보할 수 있었으니 북한 요원들이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할 만하지 않았는가. 과연 한국 홍보책자는 바라던 결과를 가져왔다. 대회에 참가한 헝가리 대표단 가운데 부다페스트 공과대의 부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야노쉬 긴스트러(Janos Ginsztler) 박사님이 있었다. 이 분이 홍보 책자를 보고는 한국과 우리 대학에 호감을 갖게되어 귀국 뒤에도 편지를 보내와 교류를 하게 되었다. 우정 어린 서신이 오고 가면서 점차 양국간 수교관계는 아니지만 우선 양 쪽 대학이라도 자매결연을 맺고 학생들을 교류하자는 데 합의가 되었다. 그 때 노태우 대한체육회장이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고 1987년 12월 직선제 개헌과 대통령선거를 거쳐 이듬해 2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5개월 만에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공표했다. 7‧7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은 <북방정책>으로 가시화되면서 기존관념을 넘어선 대담한 외교관계를 열어갔다. 그 첫 관문이 헝가리였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헝가리 부다페스트공대와 자매결연을 맺고 학생들을 교류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윽고 7‧7선언 이후 첫 결실인 주 헝가리 상주대표부가 설치되고 이듬해 2월에 주 한국 헝가리 상주대표부가 설치되었다. 분단 이후 최초의 동구권 국가와의 수교였다. 나는 1989년 2월에 부다페스트 공과대를 방문했다. 부다페스트 공대는 외형으로 봐서는 규모가 컸지만 자세히 보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기자재는 많이 낡았고 새로 도입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공산화 이전에는 과연 노벨상을 수상한 학자들을 배출하고 유렵의 명문대라 자부할만한 대학이라는 전통이 담겨진 캠퍼스였다. 지금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와 교류한 부총장은 매우 인자하면서 실용적인 분이라는 것을 대화에서 엿볼 수 있엇다. 그는 우리 대학의 홍보물과 한국을 알리는 잡지를 보고 그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우리 대학에는 원자로가 있는데 몇 년 전에 고장이 났지만 고칠 돈이 없어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걸 고치면 헝가리 만이 아니라 동유럽의 이공계 학생들을 위한 재교육기관을 설치해서 공학교육에 진일보시킬 수 있을텐데...” 현실을 안타까워 하던 그는 내가 공감을 하자 1백만 달러 만 지원해달라는 말을 꺼냈다.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No’라고 하자니 선량한 학자에게 실망을 주는 것 같고, ‘Yes’라고 하자니 우리 대학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 떠올랐다. 일단 나는 우리 대학도 사립이라 학부형의 등록금에 의존하고 있으니 교비지원은 어렵다고 솔직히 말했다. 대신에 귀국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서 꼭 도움이 되는 길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또한 이런 지원 사업을 하려면 우선 양교가 자매결연을 맺고 서로 학생도 교환하면서 한국의 지원을 유도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자매 결연을 맺고 돌아왔다. 나는 귀국하는 즉시 이상희 과학기술처 장관을 만났다. 부다페스트 공대를 후원하여 두 나라가 국교를 맺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자고 역설했다. 헝가리부터 한국 기업과 상품이 진출하면 동구권으로 문호가 더 열리지 않겠냐고 지원을 호소했다. 이상득 장관은 나의 논리에 공감했다. 지원 가능자금을 검토한다 하더니 300만 달러 정도 가능하다고 답을 줬다. 그러면서 대통령도 보고를 듣고 궁금해 한다며 직접 면담을 하며 여러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노 대통령과 오랜만에 면담을 했다. 대학 간의 민간 교류가 확대되어야 헝가리나 동구권 지식인들에게 반공국가라는 고정 관념을 말금히 털어내어 마음을 사고, 이를 통해 대기업들이 진출하여 경제 교류로 확산시키는 방안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오랜 인연이 있어서인지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었다. 면담 뒤에 지원 액수가 300만 달러에서 500만 달러로 증액되었다. 주선을 하는 나로서는 부다페스트 공과대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알릴 수 있어서 기쁘고 감사했다. 이 지원금으로 부다페스트 공대는 원자로를 고치는 숙원사업을 해결했다. 또한 주변 동구권 국가의 인재들을 불려 들여 기획했던 공학생 재교육 과정을 신설했다. 그리고 단국대의 학생들을 부다페스트 공과대에 교환학생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이 때 파견한 3명의 학생 가운데 한 명인 지금 우리 대학에서 근무하는 현준원 군은 자연과학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있었다. 현준원 군은 석사학위 과정에 입학해 열심히 공부하여 부다페스트 공대에서 성실한 학생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현준원 군은 1994년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동구권 유학생이면서 사회주의 국가에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한 당시 내가 삼성문화재단의 이사로 있었던 인연으로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그룹의 헝가리 진출을 권유해 현실화했는데 이 때 현준원 학생이 통역을 맡아 맹활약을 하기도 했다. 우리 학생들이 헝가리로 나간 이후 헝가리에서도 5명의 학생들이 우리 대학에 들어왔다. 동구국가에서 온 최초의 교환학생이었다. 어찌보면 귀한 손님같은 학생들인데 막상 그들이 머물 숙소가 마땅치 않았다. 우리 대학 서울캠퍼스에 운동부 기숙사는 있지만 유학생을 위한 기숙사는 없었던 탓이다. 한국어나 영어가 익숙치 않은 학생들이라 아무데나 의탁시킬 수도 없었다. 화곡동에 있던 내 집을 그들의 기숙사로 내놓았다. 나는 아파트로 전세를 얻어 이사를 갔다. 화곡동 집은 자연스럽게 대학에 기부를 한 셈이 되었다. 화곡동 집은 대지가 160평, 건평이 180평인 큰 집이었다. 두 세 명이 잘 수 있는 방이 7개나 있었다. 이 집은 선친이 물려주신 유산과 내 아내가 저축한 돈으로 지은 것이다. 한남동에 있던 집도 법선재로 기부한 뒤여서 평생 산다는 각오로 내 딴에는 든든하고 고급스럽게 짓겠다는 결심으로 공사를 감독하며 마련한 집이다. 이역에서 고생하는 헝가리 유학생들이 집이 따뜻해서 좋다는 말을 들으면 스스로 더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내놓은 집이지만 애정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 지금의 죽전캠퍼스를 신축하는 과정에서 건설 감리비가 급히 필요하다는 이유로 기부자인 나와는 상의도 없이 매각이 결정되었다. 이윽고 번개 불에 콩 구어 먹듯이 하루 아침에, 그것도 헐값에 팔리고 보니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북방정책을 성사시키느라 뛰어다니면서 정작 내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모습까지 봐야 했으니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옛말이 실감된다. 헝가리와 교류를 시작하며 북방정책의 실마리를 푸는 과정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나의 추진력이나 이념을 넘어서는 실용주의에 더 큰 신뢰를 받은 듯 했다. 바로 1989년 3월에 시작되는 <북경 아시안게임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의 남측 수석대표로 나를 임명했다. 나는 한양대 체육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학래 교수(당시 KOC 상임위원)를 차석대표로 앉히고 회담을 개시했다. 북경아시안게임이 2년도 안남은 상태에서 북한이 제의해 열린 회담은 1989년 3월 9일부터 1990년 2월까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본회담 9차례, 실무대표 접촉이 6차례 이뤄졌다. 남북한 모두 굉장한 관심을 받으며 회담을 진행했고, 나는 체력의 한계를 느낄 정도로 신경과 에너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북단일팀의 호칭, 단기, 단가, 공동단장제, 선수단 구성 및 실무 사무국 설치 등의 구체적 합의를 끌어낸 것은 남북 양측 모두 자부할만한 성과였다. 회담을 통해 얼개를 완성했지만 최종 협상의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시점에서 북측은 더 이상의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남측도 원로 체육인들은 해당 경기종목이 단일팀 구성으로 메달을 못 따면 뒤따를 불이익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부 쪽에서는 북경아시안 게임에서 종합순위 2위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 일본에 질 수 없다는 주장도 득세를 해갔다. 이 자리에서 소상하게 밝히기 어려운 여러 가지 정치적 셈법, 우여곡절이 얽히면서 결국 회담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협상을 통해 많은 문제가 풀렸고, 그 성과는 북경 아시안 게임으로 이어졌다.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정동성 당시 체육부 장관이 나를 만났다. 세 가지 지침을 받았다. 하나, 북경 아시안 게임의 선수단장을 맡아달라. 둘, 북경 아시안게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도록 중국과 우호관계를 구축해달라. 셋, 아시안 게임이 끝나면 이어지는 국제대회에서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참가하도록 비밀리에 성사시키라는 것이었다. 정동성 체육부 장관은 유도부 출신으로 기백이 씩씩하고 성격이 활달했다. 스스로 대통령의 지시라면서 “장충식 총장님이 좋은 성과를 거두도록 도울 수 있는 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나는 이미 유니버시아드 단장을 네 번이나 역임을 했다. 그 당시 헝가리, 몽골, 남북체육협상 등으로 육체적으로 지치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었다. 좌절한 남북체육협상의 불씨를 되살리고 싶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이 결국은 남북간의 화해로 이어져야 그 값어치가 살고, 우리 민족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다섯 번째 선수단장 직을 수락하기로 했다. 1990년 9월, 한국선수단장으로 북경을 입성하고 나니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집무실이 준비되어 있었다. 겉은 김우중 회장의 집무실이지만 남북한 협상 관계자들이 여기에서 비밀 회담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놓았다. 언론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협상을 할 수 있어 얘기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시안 게임의 개막식 다음날인 9월 23일 남북체육장관 회담이 열렸다. 양측 장관은 단일팀 구성을 한다는 문제에 합의를 했다. 원칙은 정하고 각론은 다시 “남측은 장충식 수석, 이학래 차석이, 북측은 김형진 수석과 박시남 차석이 만나 타결키로 했다.”는 결론을 공유했다. 우리 대표단은 이미 지난 회담에서 상당한 합의를 이뤘기에 이번 회담은 더욱 스피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결국 9월 29일 나와 김형진 수석이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남북통일축구경기>를 갖기로 했음을 선언했다. 협상 가운데 어려운 점은 취재언론인의 규모를 제한하는 일이었다. 북측은 취재단을 7명으로 제한하자고 했지만 나는 그들의 강력한 주장을 성의껏 설득해 12개 언론사 20명으로 확대했다.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쉴 때 청와대에서 긴급 훈령이 왔다. 정동성 체육부 장관이 우리 선수단과 평양에 같이 참석할 수 있도록 교섭하라는 지시였다. 원래는 선수단장인 내가 선수단을 이끌고 방북하기로 합의한 문제였다. 북측 대표와 얘기하니 난색을 보였다. 협상이 끝난 사안이라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고, 이를 번복할 결심은 ‘최고 수령 동지’만이 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북경에 주재하는 북한 대사를 면담하고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간절히 호소를 하자 김정일 위원장의 재가를 받았다며 정 장관의 참가로 변경할 수 있었다. 나 역시 해방 후 최초로 열리는 통일축구 경평전에 왜 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나는 나의 입장을 단 한 번도 내세우지 않았다. 나는 협상을 성사시키는 사명을 받았으니 정부의 뜻을 이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일이 마무리되자 노태우 대통령은 축하의 전문을 보내주고 격려해주었다. 중국과의 수교를 현실화하려면 중국에 남한이 가진 힘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는 진정성을 전달하는 일이 중요했다. 북경 아시안 게임은 달리보면 해방 이후 단절된 남한의 젊은이, 그 배경이 되는 한국사회의 역량을 중국의 심장에서 펼쳐보이는 기회의 장이기도 했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이기도 했다. 마침 북경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있었던 장백발(張百發) 체육위원회 부위원장(우리나라 차관급)은 나와 오랜 인연이 있었다. 그는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88 서울올림픽에 맞춰 열린 스포츠과학 학술회의에 중국대표단을 인솔하고 참석하여 많은 활동을 펼쳤다. 이 회의의 조직위원장인 나와는 각별히 자주 만났는데 성(姓)이 같은 장 씨에다 나이도 나보다 훨씬 위라 사석에서는 나를 동생이라고 호칭하면서 가깝게 지냈다. 그와 만나다 보니 북경 아시안 게임이 눈앞에 왔는데 가장 큰 걱정은 자동차 문제라는 고백을 들었다. 각국 선수단 단장과 임원들이 사용해야 할 차량이 500 여대 정도 필요한데 예산 형편이 감당키 어려워 택시를 활용할 실정이라 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자동차를 생산하기 힘들었고,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자동차 생산 국가였으니 이를 수입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장 부위원장은 한국에서 자동차를 생산하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통사정하였다. 나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님을 찾아가 이 문제를 전달했다. 정주영 회장은 도량이 큰 기업가였다. 현대차 500대를 북경대회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조직위원회는 대단히 기뻐하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뜻을 나와 정주영 회장에게 전해왔다. 내가 북경대회에 선수단장으로 참석하였을 때 장백발 위원장이 가장 크게 기뻐했다. 한국선수단에 관련된 일이라면 조직위원회는 내 요구를 대부분 다 들어주었다. 우선 선수촌에 입촌하려고 남북한 선수단의 숙소 위치를 알아보니 동과 서, 양쪽 끝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혹시나 가까이 배치했다가 불상사가 일어날까 염려해 격리하다시피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같은 민족인데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젊은이들의 마음이 어떻겠느냐 설득했다. 그들은 선선히 나의 요구를 들어줬다. 대회 기간 중에 남북한 선수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나중에는 반가운 인사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지기도 했다. 또한 선수촌 가까이 한식 식당을 차리도록 허가를 내달라 부탁을 했다. 대회 기간 중 한국 손님들이 많이 올 텐데 식당이 멀리 있으면 귀빈들과 관광객들이 불편할 거라며 협조를 구했다. 이 역시 허가를 받아내 많은 이들이 한국 음식을 먹으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1990년 10월 7일 북경 아시안 게임은 막을 내렸다. 한국은 중국에 이어 종합순위 2등을 차지했다. 나는 처음 선수단장을 맡으며 부여받은 노태우 대통령의 지침을 모두 마쳤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곧 다가올 한중수교를 예감하면서 중국 정부 관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대회 기간 중 한국을 도와줘 감사하다는 인사를 나눴다. 그 때마다 중국 측에서는 한국이 500대의 차량을 지원해준 것을 사례로 들며 한국 측의 지원에 거듭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이에 앞서 9월 29일 남북 통일 축구를 공표하면서 남북한 대표단이 기자회견을 끝나고 서로를 포옹했을 때의 감격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찐한 격정이 서로에게 전달되면서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북경을 떠난 뒤 나는 노태우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했다. 여러 가지 수고를 했다며 오찬을 대접받는 식사 자리였다. 2시간의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노태우 대통령과 나, 단 둘만 있는 편안한 자리였다. 북경 아시안 게임을 치루면서 진행된 여러 가지 일들, 남북협상의 향후 전망, 중국 인사들의 한국에 대한 생각 등을 부담 없이 전하고 듣는 자리였다. 나는 마음 속에 오랫동안 품어왔던 얘기를 꺼냈다. “노 대통령님, 우리나라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시고 물러나 편안한 세월을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님을 보면 더욱 걱정이 되고 안타깝습니다. 대통령 임기를 끝내면 정치나 권력에 연연해 하시지 말아야 합니다. 노 대통령님이 새로운 길을 열어보이세요. 제가 단국대 총장직을 물러날 테니 대통령께서 우리 대학의 총장으로 오세요. 그래서 대통령 재임 때 쌓은 인덕으로 단국대를 발전시켜주세요. 대통령님이 총장으로 오시면 대학에 발전기금을 내려는 이들도 많아질 겁니다. 대통령님도 정계나 기업계가 아닌 대학의 교육자로 계시는데 누가 사시로 볼 수 있겠습니까.” 내 진지한 주장이 통했을까. 노 대통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더니 이윽고 대답을 했다. “장 총장님 말씀이 맞아요. 나는 전두환 대통령처럼 일해재단을 만든다거나 참모들과 어울려 다닐 뜻이 없어요. 아내랑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제가 퇴임하면 단국대 총장으로 갈께요. 장 총장님 약속 지키시는 겁니다.” 이렇게 언약을 주고 받으며 오찬 자리는 즐겁게 끝이 났다. 1992년 8월 24일 우리나라와 중국은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리고 한달 뒤인 9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중국 북경에 발을 내딛었다. 그때 한중 교류가 활발해지는 것을 상징하듯 북경 한복판에 서라벌이라는 한식당이 문을 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났다. 내가 느끼는 남다른 감회를 노태우 대통령도 공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치하를 주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체육부 장관으로 다른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건넸다. 물론 나는 대학에 있고 싶다는 대답을 했다. 그것이 나로서는 최선의 길이니까. 임기가 1년을 채 남기지 않았을 때도 노 대통령은 나에게 총리직을 제의했다. 무엇이 그 분으로 하여금 나에 대한 믿음을 그리 크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제안 역시 거부했다. 대신에 내가 고려대 대학원을 다닐 때 학생처장을 역임하신 현승종 박사님을 추천하였다. 그 분이 가진 담백한 인품과 제자를 아끼는 마음, 소탈한 자세라면 정권 과도기를 무난히 이끌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현 박사님은 노태우 정권 말기의 화두였던 중립내각의 총리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나와 노태우 대통령만이 아는 비밀이었는데 나중에 현 박사님이 대통령에게 자신을 어떻게 총리로 임명하실 생각을 했냐고 묻자 이를 알려줘다고 한다. 나는 노 대통령이 단국대 총장으로 오라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를 실천한다는 약속을 믿었다. 럭비 선수로 함께 땀 흘렸던 남자로서 그는 분명히 대학의 문을 두드릴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퇴임 이후 노 태통령은 단국대로 온다는 약속을 미루었다. 아니 갓 출범한 김영삼 정부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부는 바람은 점점 강해지더니 수천 억 원에 이르는 정치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노 전대통령은 철창 안으로 전락했고 단국대 총장 부임의 약속도 흐려졌다. 대학시절 럭비 선수로 시작해 대통령과 체육인으로 함께 일을 하며 통일을 위한 일을 함께 했으니 보통 인연이 아니지 않을까. 이후로 노 대통령은 수감 생활을 하고나서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은둔을 하고 있다. 뇌 질환을 앓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권력의 속성은 늘 우리 같은 범상한 사람의 마음에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기 마련인가보다. 부디 건강하고 복된 나날이 돌아오길 기원한다.
2019.07.12 9054
조명래, 김병량, 김경현 : 특별장학금으로 길러낸 동문 인재의 세가지 유형 H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전국의 지방도시에는 각 지역의 내로라하는 명문고등학교가 산재해 있었다.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도입되기 전이라 지방의 수재들이 몰리는 고등학교가 따로 있었다. 나는 당시 총장으로 학생선발을 책임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우수한 인재를 우리 대학에 끌어올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아무래도 세칭 명문대라 인정받는 대학에 입학을 하고 싶어 했다. 이 현실의 벽을 뚫고 인재를 단국대에 입학시키는 방법은 결국 총장이 직접 나서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전국의 지방 명문 고등학교를 골라 학업에 열의가 있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추천받았다. 그들을 직접 만나거나 해당 지방 출신의 교수들을 보내 모교를 방문하도록 지원했다. 나는 당시 다른 대학들이 하지 못하던 과감하고 획기적인 장학지원책을 마련했다. 지방의 우수 학생들에게는 4년간 숙소와 장학금을 수여할 뿐 아니라 교재와 참고서적까지 공급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당시만 해도 나라의 경제형편이 어려워 대학 등록금은 온 집안이 힘을 모아야만 해결되는 난제였다. 그 고민을 덜어줄 테니 단국대에서 마음껏 공부를 해서 나라와 모교를 빛내는 인재가 되라는 것이 내 진심이었다. 뜻이야 컸지만 대학의 힘은 그렇지 못했다. 1970년대만 해도 우리 대학은 입학정원이래야 2천명도 넘지 않았고, 재정규모나 여력이 다른 대학보다 많이 취약했다. 기숙사가 필수적인데 지을 힘이 없었다. 내가 하자고 해서 마련된 사업이니 내가 나서기로 결심했다. 우선 내가 살고 있던 집을 내놓았다. 학교 근처에 있던 한남동 소재의 내 집은 70 여 평 정도였다. 이 집을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활용토록 대학에 기부하였다. 바로 이 집이 수많은 판검사를 배출한 ‘법선재’였다. 내가 살 집이 없어서 나는 지금의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160평의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지금이야 강서구가 화려하게 변모했지만 당시 화곡동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먼 변두리였다. 나는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하니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경기중학교와 이화여중에 다니는 내 아들과 딸들은 등하교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한남동에서 살 때는 학교가 있는 광화문 지역까지 길어야 40분 걸리는 등교시간이 화곡동으로 이사한 뒤로는 빨라야 90분이 걸렸다. 하루에 3시간을 버스에 시달려야 했다. 한창 민감한 사춘기를 겪던 아이들이기에 애비 된 마음으로 왜 미안한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래도 인재를 키우는 것이 나의 숙명이니 가족들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아이들도 내 결정과 이후 겪어야 했던 불편을 비록 몸이 고단하고 마음이 힘들었겠지만 아빠인 나에게 일체 불평하거나 반발하지 않았다. 기특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훗날 한남동 집에서 숙식을 하던 고시반 학생들 가운데 부장검사, 차장 검사 그리고 부장판사 등 기라성 같은 인재가 속속 배출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서울대, 고대, 연대 다음으로 사법시험 합격자를 많이 배출하는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우리 대학이 한때 ‘사시단대(司試檀大)’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사법시험에서 강세를 보인 것도 이렇게 입학한 장학생들이 낳은 결과였다. 고시생 만이 아니라 많을 때는 100 여 명씩 특별 장학생으로 입학을 시켰다. 나의 의도는 꽤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 대학에 의과대나 치과대가 설치되기 전이어서 장학생들 가운데 과반수 이상은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다음은 관계로 진출했고 경제나 경영학을 공부한 학생들은 공인회계사나 은행으로 진로를 잡았다. 일일이 이름을 들추기는 뭐하지만 50대 이상의 동문들 가운데 국장, 차관급의 고위 관료나 은행장들을 종종 만나는데 이들은 대부분 이같은 특별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이들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장학생 중 정치인이 된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장학제도를 통해 단국대를 입학한 인재들이 많지만 나는 3명의 장학생이 살아온 내력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다. 첫 번째는 경상북도 안동고등학교 출신 조명래 군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조명래 군은 지금 환경부장관이 되었다. 조명래 장관은 지역개발학과(현재 도시계획 부동산학부의 전신)를 신설하면서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우수학생으로 입학했다. 학부 재학 4년간 전액 장학금을 후원했는데 조명래 군 본인이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보다 학문에 뜻을 두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고 나는 대학원 과정의 전장학금을 후원했다. 조명래 군은 주위의 평을 들어보면 성격이 조용하고 차분해 공부를 즐기는 편이어서 학자로 성장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었다. 좀 더 지원을 하면 모교를 빛낼 좋은 학자가 되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만났다. 나는 유학을 가는 것이 어떻냐고 물었더니 본인도 영국에서 박사 과정을 하고 싶다 포부를 밝혔다. 문제는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보내고 나서 학교 당국에 예비 전임강사로 발령하는 문제를 검토토록 했다. 다행히 교수들이 뜻을 모아 결국 좋은 결과를 얻었다. 영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조명래 교수는 급여와 내 개인적 후원을 받으며 등록금과 가족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귀국한 뒤 조명래 박사는 모교의 조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에게 대학발전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도움 받을까 하는 마음으로 보직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그는 학생지도와 연구에 전념하기를 원했다. 만약 그에게 나의 의욕을 앞세워 ‘유학에서 배운 지식을 대학행정에 연결시켜 나를 도와 달라’ 강력하게 인도했다면 그는 보직을 받아 모교에 봉사하는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아마도 학자로서의 성장을 못했을 것이다. 그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내가 직접 그를 만난 것은 아주 드물다. 서울대 대학원으로 보낼 때 그리고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인사 왔을 때 그리고 이번 장관에 취임하여 전화로 인사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의 장인되는 분이 우리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어서 그의 정황은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에 아쉬운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이런저런 사는 얘기나 자녀들 성장 등을 듣는 것은 사람을 기르고 돕는 사람에게 가장 큰 선물인데... 하지만 그 이쉬움은 나의 아쉬움이고 나라에 봉사하는 인재로 잘 성장한 것은 그의 노력이고 운명이다. 자기가 후원한 사람이 성공하면 그를 자기 기억에서 잊어야 하는 것이 인재를 키우는 사람의 본분이다. 영남 출신의 장학생으로 조명래 군을 선발했다면 호남 지역 출신 장학생으로 기억나는 인물이 김병량 교수이다. 김병량 군은 호남을 대표하는 명문 전주고등학교를 다닐 때 우수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나와 인연을 맺었다. 나중에 모교 교수로 봉직하여 부총장을 지냈지만 김병량 군 역시 조명래 군 못지않은 수재였다. 공부 잘하는 수재형 인물로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으나 크게 다른 점은 조명래 장관은 조용히 숨어서 일하고 연구하기를 좋아하는 편이나 김병량 부총장은 예능에도 소질 있고, 사교적이며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유형이다. 돌아보면 내가 학교 일로 어려움에 빠진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럴 때 학교를 위해서 행정적 방면에서 앞장서서 나를 도와준 졸업생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병량 교수이다. 김병량 군은 우리 대학에서 4년간 장학금으로 공부하고 내 권유로 일본 츠쿠바 대학(筑波大学)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일본 츠쿠바 대학은 일제시대 동경대학과 경쟁관계였던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모태로 하는 대학이다. 이후 1970년대에 종합대학으로 전환하면서 전후 유럽과 미국식 제도를 다양하게 받아들인 신흥 명문대학이다. 그는 일본에서 도시계획 및 지역개발을 연구하면서 특히 지역의 병원을 비롯한 공공시설계획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김병량 교수 유학 초기에는 일본의 도큐장학재단의 장학금으로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지원이 여의치 않아 금전적 고생이 많았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나와 친분이 깊은 일본의 유명한 저술가인 호소키 카즈코(細木水子)여사를 소개시켜 줘서 그의 장학금으로 박사학위를 받게 해주었다. 학위를 마친 김 박사는 1991년도에 천안캠퍼스 도시행정학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이에 앞서 김병량 군이 나를 돕게 된 계기는 천안캠퍼스에 의과대 부속병원을 신축할 때였다. 1988년에 의과대학을 설립하고, 이듬해 의과대 교사동과 부속병원을 신축 공사에 착수했는데 여러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처음 천안캠퍼스를 세울 때 가졌던 비전대로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종합병원을 짓고 싶었다. 800병상 규모의 대형 병원, 서울을 능가하는 최신식 의료시설을 갖춘 첨단 병원, 환자중심의 병원을 짓자는 것이 내 목표였다. 대학 내부에서는 재정적 어려움이 크다며 반대가 심했다. 실제 공사비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에 돈이 있어도 종합병원을 지으려면 설계나 공간배치 등에서 고도의 전문지식이 뒷받침해줘야 하는데 국내 대학들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때 김병량 군이 일본에서 병원 건축, 의료자원 공간배분 계획을 전공하고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박사 학위 지도 교수인 타니무라 히데히코(谷村秀彦)교수는 일본의 유명한 병원건축 설계 전문가였다. 또한 타니무라 교수의 장인되는 요시타케 야스미(吉武泰水)교수도 일본병원 건축 분야의 태두로서 당시 고오베 예술대학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김병량 군의 소개로 나는 이 두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김병량 군을 통해 내가 가진 인재양성에 대한 진심을 이해했고, 선뜻 도움을 주기로 결심했다. 이어서 장인과 사위를 필두로 자신들이 길러낸 제자들, 달리 보면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최고의 전문가들을 동원해 우리 종합병원 설계를 도와주었다. 이 모든 과정은 전적으로 한 푼의 금전적 대가없는 순전한 봉사로 이뤄졌다. 이후 많은 공사를 진행하면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그 결과 의과대학과 800 병상의 부속 병원을 완성할 수 있었고 거기에 최첨단 시설을 갖추어 전국의 많은 의료인들이 견학을 할 만큼 우수한 병원으로 우뚝설 수 있었다. 김병량 교수는 이 과정에서 병원 설계를 무상으로 마치도록 한 일도 공이 컸지만 내가 천안캠퍼스를 천안의 대표적 고등교육기관으로 성장시키는데 필요한 일들을 펼칠 때마다 내 옆에서 충직스럽게 내조를 해주었다. 좋은 일은 함께 하려하지만 어렵고 힘든 일, 자칫 욕먹을 일은 슬슬 피하려는게 사람의 속성이다. 천안캠퍼스에 대형 종합병원을 짓겠다며 설계하고 공사를 진행해갈 당시 나는 김영삼 정부에 미운 털이 박혀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난국이었다. 여러 행정 수단을 통해 신축사업을 방해했고 이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나를 돕다가 함께 망할까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병량 군은 아직 박사과정 재학 중인 수련생의 입장에서 자기 은사와 자기 은사의 제자들을 설득해 우리 병원이 완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온 힘을 쏟아 부었다. 비단 병원 신축사업만이 아니었다. 특히 죽전캠퍼스 신축 사업에서는 힘든 일을 넘어 욕 먹을 일인데도 이를 마다않고 감내하였다. 죽전 캠퍼스 신축 사업은 그 규모가 컸고 한남동 부지 개발에서 발생할 막대한 이권 때문에 정권의 실세들을 등에 업은 업자들이 사업권 쟁탈을 둘러싼 이전투구에 나서기도 했다. 때론 드러나는 행정 조치로, 때론 주무 관청을 통해, 때론 그늘에서 여러 압박과 압력이 전해졌다. 누구 하나 나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 험악하고 냉냉한 분위기 속에서 김병량 교수는 자칫 욕먹고 자신을 망칠 수도 있는 일에 자신을 내놓았다. 설계부터 시공에 이르는 과정에서 공개적으로 모든 구성원들이 알 수 있도록 일을 성사시켰다. 공개 입찰을 통해 설계안을 받고 한국건축가협회와 일본건축가협회가 공동으로 심사하도록 진행하여 추호의 부정이 개입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의 개입을 막아낸 길이기도 했다. 나중에 외환위기로 중단된 신축 공사를 재개할 때 실타래처럼 얽힌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의 이해관계를 풀어내는데도 김 교수의 인내와 분투가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장학금을 주어서 공부시킨 졸업생 가운데 대부분은 입신양명 형의 인물이 많았다. 공부 잘하고 출세하면 그것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사고방식이다. 모교에서 장학 혜택을 받았으나 모교를 위해서 헌신한다는 정신을 실천한 사례를 만나기 힘들다. 아니 나는 그동안 숱한 인재들에게 장학금을 주었지만 한번도 드러내놓고 모교에 그 은혜의 결실을 돌려주길 바란 적이 없다. 사회에 나가서 좋은 일꾼이 되어주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였다. 그러나 김병량교수는 자신을 위해서 연구만 하고 자기 이속을 차리는 형이 아니라 전적으로 봉사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게 여기는 삶의 철학을 가졌다. 20여 년 전에 NGO단체를 창설해서 이사장 등을 거치면서 봉사한 공로로 몇 년 전에 홍조근정훈장을 받은 일이나 전셋집에 살면서도 70주년 기념관 건립에 1억원을 약정하여 완납한 일에서 김교수의 철학의 일면이 읽혀진다. 이제 그는 학사 부총장의 자리에서 떠나서 조용히 자신의 학문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나는 그가 있었기에 천안 단국대병원의 성공이 있었고, 방대한 죽전캠퍼스 신축사업을 둘러싼 권력 실세들의 개입을 다 물리치고 이전을 마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경상도 안동 출신의 조명래 군, 전라도 전주 출신의 김병량 군이 자랑스러운 인재라면 서울 출신으로 김경현 군이 있다. 김경현 군은 서울 휘문고 출신이다. 김경현 군은 한마디로 ‘공부 벌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모교 출신 후배이기도 해서 각별한 애정을 갖고 그를 후원했다. 우리 대학 사학과에 진학한 그에게 나는 4년간 전액 장학금을 수여했다. 학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사 석사 과정을 이수한다 했을 때도 기꺼이 학비를 지원했다. 석사학위를 받은 뒤에는 내가 석사학위를 받은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밟으라 권유했고 김경현 군도 기꺼이 이를 따랐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학비를 지원했다. 나는 장학생을 고를 때 내 나름대로 하나의 기준을 우선 적용했다. 그것은 ‘학업성적과 가정형편’ 중 가정형편을 먼저 적용한다는 점이다. 전국에서 성적이 탁월한 학생을 추천받으면 나는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형편이 좋은 가정의 학생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최고의 성적은 아니더라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 거기에 학업에 성실한 학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대학을 다니지 못할 청년들이야말로 장학제도가 꿈이요 성공의 자극제가 될 것이라는 것이 내 믿음이었다. 그래야 우리나라의 인재가 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나름의 철학이기도 했다. 김경현 군도 그런 사례였다. 박사학위를 받자 나는 학과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 대학 사학과 전임강사 발령을 받도록 도왔다. 김경현 군은 우리 대학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본 동경대학과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추가로 자신의 고대 서양사 연구를 더 할 수 있었다. 마침 좋은 배필을 만났다 해서 주례를 부탁받고 기꺼이 주례를 서주었다. 사회적으로, 또한 학자로서 성장하는데 필요한 일, 그가 원하는 여러 가지 일을 나는 가능하면 다 들어주었다. 어려운 가정에서 공부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려는 그의 열정으로 좋은 학자로 자라도록 돕고 싶었다. 나의 기대에 부응하듯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학문에 열의를 바쳤다. 학생들이나 학계의 평판도 좋았다. 공부하는 교수, 연구에 몰두 하는 교수라는 좋은 평판에 좋은 논문을 많이 발표했다. 당연히 여러 대학에서 그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 무렵 고려대로 교수 자리를 옮길 기회가 생겼다. 나도 그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를 후원한 나와의 인간적 의리로는 모교에 남아 후배를 길러내야 했지만 고려대학교에서 자신을 탐내어 오라는 데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하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그의 고민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나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명예욕이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를 교수로 길러내기 까지 기울인 선배이자 스승인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면 처음부터 고민을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많은 동료, 선배 교수들이 그의 고민을 보며 ‘배신’이라는 말을 썼다. 그들이 보기에 내가 그에게 기울인 애정과 후원의 크기가 컸기에 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김경현 교수에게 고려대로 전직해도 무방하다는 말을 건넸다. 단국대 졸업생이 고려대 교수로 가는 것이 작게는 모교 사학과의 전통을 빛내주는 일이고 길게는 대학들의 학문적 성장을 촉진하는 일이라 덧붙였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내 마음은 어찌 편할 수 있었겠는가. 10 여 년 동안 장학금과 연구비 등을 후원하여 길러낸 인재가 단국대를 떠난다는데 서운하고 아픈 마음이 안 든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무엇보다 나마저 그를 비난하면 그는 모교의 배신자가 되고, 학계에서도 배은망덕한 인간이라 손가락질을 면치 못한다. 자칫 젊은 학자의 앞길을 매장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더군다나 내 마음대로 부리고,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 인재를 길러내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외국에서 길러낸 인재가 우리 대학에서 봉사를 할 수 있고, 우리 대학에서 길러낸 인재가 세계를 나가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재를 기르는 참뜻이기도 하다. 나는 아픈 마음을 뒤로 하고 그를 웃으며 보냈다. 시대가 바뀌고, 많은 대학들도 내가 시도한 방식의 장학생 유치를 시도하면서 특별 장학생 선발은 시대의 물결에 묻혀져 갔다. 그러나 우리 대학의 특별장학생 제도, 나의 후원을 거쳐간 많은 인재들이 사회의 지도자로 활약하고 자주 나에게 안부를 전하곤 한다. 그들을 찬찬히 회고하면 이렇게 언급한 세가지 부류의 인재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공직자가 된 인재, 모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봉사형 인재, 학식을 바탕으로 학문적 명예를 이루는 인재. 나는 그들을 통해 사람을 키우는 기쁨을 누렸으니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다.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들은 결국 모두 우리 단국인과 같은 길을 걸었던 소중한 인재들이다. 부디 모교의 명예를 빛내주길 바라고 응원할 뿐이다.
2019.06.04 9097
박원순 : 시국사범 굴레 쓴 젊은이에게 대학문을 열어준 이유 H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면서 정치상황은 한겨울의 호수처럼 얼어붙었다. 비상계엄시대나 마찬가지인 현실이었지만 대학생들의 항거는 끊이지 않았다. 1975년 5월이었던 일로 기억한다. 서울대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 앞서 4월에 발생한 서울대 학생 김상진 군이 10월 유신을 철회하라는 주장을 외치며 할복자살을 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학생들이 5월 22일 김상진 군 추모 행사를 하다가 대대적인 항의시위를 벌인 것이다. 4천 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는데 10월 유신 발동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고 투석전까지 벌어졌다. 이 시위로 서울대 총장이 사임을 하고,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과 남부서장이 경질되었다. 70명이 넘는 서울대 학생들도 무더기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살거나 제적이 되었다. 여기에 박원순 군(당시 서울대 사회계열 재학)이 있었다. 이 시위가 있던 해인 1975년은 박원순 군이 입학을 한 해였다. 입학한 지 두 달도 안 된 신입생이 알면 무엇을 얼마나 알았겠는가? 나중에 들어보니 운동권 조직에 속해서 시위를 한 것이 아니라 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진압경찰들이 시위 학생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장면을 보고 시위에 참가했다고 했다. 동기는 단순했지만 결과는 엄혹했다. 박원순 군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국가 사범으로 전락했다. 19살의 미성년자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은 박 군은 4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물론 대학은 제적을 당했다. 법학과 진학(당시는 계열별 입시였고 2학년 때 학과를 선택했음)을 꿈꾸는 시골 수재에서 국가 안보를 훼손한 위험인물로 전락하면서 박 군과 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1979년도 입시전형이 막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우리 대학을 담당하는 정보기관의 출입자가 나를 면담하고자 했다. 만나보니 박원순 군에 대한 일이었다. 정보기관 출입자의 주장은 이랬다. “박원순이란 학생이 단국대에 입학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박원순을 합격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장 총장님께 꼭 전달하라는 상부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나는 기관원의 말이 나의 원칙을 거스르는 말이라 반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특별 지시를 받았다지만 대학이 학생을 입학시키고 말고는 담당 학과 교수와 총장인 나에게 있는 것이지 어찌 정보기관의 책임자가 입학 시켜라 말라 하는 거요. 법적인 하자가 없으면 입학을 하겠다고 원서를 넣은 학생을 놓고 합격 여부를 미리 정하는 것은 교육기관이 할 일이 아니니 상관에게 내 방침을 잘 전해줘요.” 담당 기관원을 돌려보내고 교무처(당시는 입학업무도 담당했음)에 박원순 이라는 학생이 입학원서를 제출했는지 알아봤다. 박원순 학생 입학원서가 접수되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학생처장, 교무처장과 업무 담당자들을 불러 현황을 파악토록하고 입장을 피력하라 했다. “박원순 학생은 이미 서울대에서 제적당하고 교도소도 복역하고 나온 학생입니다. 타 대학에서 형사 처벌받고 제적된 학생을 입학시켜서는 안됩니다. 유신정부의 방침이 시위 학생은 대학에 적을 두어서는 된다는 것인데 우리 대학 재학했다가 제적된 학생도 아니고 다른 대학의 제적생을 받아줄 수 없습니다.” 처장들이나 직원들 모두 학생보다는 정권에 밉보일 때 당할 대학과 나의 안위를 걱정해 박원순 군의 입학을 불허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내 생각을 밝혔다. “박원순 군은 서울대 학생 신분으로 데모를 주동했다고 해서 이미 제적을 당한 학생입니다. 지금 박원순 학생은 편입생이 아니라 신입생으로 입학하는 겁니다. 일반 고등학교 졸업장하고 예비고사 성적표를 갖고 입학 허가를 요청한 겁니다. 단국대 입시생으로 자격을 갖추었는데 서울대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우리 대학이 서울대의 처사를 따라가라는 법은 없어요. 우리는 우리의 철학과 입장이 있는 겁니다. 교육 당국이나 정보기관의 입장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나는 결론을 내리면서 ‘다른 학생과 동등하게 입시를 치루도록 해주라’고 거듭 지시하였다. 총장 재직을 하면서 나는 반정부 데모에 참가한 학생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시위에 참여하여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을 위반해 실형을 받으면 제적 처분을 받기는 하지만 법적 책임을 다 지고 나오면 전원 복학을 허락했다. 또한 그들이 졸업해서 사회인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내가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편의를 제공했다. 학생들은 정부가 독재라고 생각하면 반대 의사를 밝힐 권리가 있고 그런 시위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 교수들의 자세여야 한다고 믿었다. 이제와 하는 얘기지만 나는 박원순 학생이 단국대학에 지원한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원순 군이 직접 밝힌 얘기를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총장님(박원순 씨가 쓰는 장충식 이사장의 명칭)을 처음 빈 것은 내가 서울대에서 제적되어 감옥에 갔다 온 후 어느 대학에서도 받아주지 않던 때였다. 당시 유신 정권 아래에서는 시위 사건으로 학교에서 제적되고 감옥까지 갔다 온 사람은 어느 대학도 갈 수가 없었다. 천형과도 같은 것이었다. (중략) 장충식 총장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총장님은 예상과는 달리 젊은 시절에 데모한 것은 자랑이면 자랑이지 결코 흠이 될 수 없다면서 오히려 격려를 해 주셨다. 시대의 굴절 때문에 상처 입은 젊은이에게 그것은 새로운 인간상이기도 했다. 사회에 대한 좌절과 고민이 어려 있을 때 이런 총장님도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후 단국대학교를 거쳐간 많은 사람들에게서 총장님에 대해 내가 느꼈던 동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런 모습이 누구에게나 여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략) 그 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되고 민주화의 봄바람이 잠시 불었던 1980년 초, 서울대학교에서 복학하라는 통지가 왔다. 나는 한 번 내쫓은 대학을 어떻게 다시 다니겠는가 하고 그 복학 통지서를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 단국대 사학과를 야간에 까지 수강하여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정말 주경야독인 셈이었다.”(『빈 들에 씨를 뿌리며』, ‘비범한 정신력의 중재(中齋)’ 중 발췌) 박원순 군의 말처럼 나는 학생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이데올로기나 정권의 이해관계로 가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가진 정의감,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나 역사의식을 잘 가르쳐서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대학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박원순 군은 우리 대학에 입학할만한 좋은 성적을 얻었고 결국 입학했다. 그러나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도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경찰 공안담당 부서에서는 박 군이 입학하면 다시 소요를 일으켜 대학과 사회를 어지럽힐 거라 근거 없는 예단을 하며 여러 가지 협박을 했다. 나중에는 학원 담당 고위 간부들도 나에게 여러 안좋은 얘기를 하며 입학 철회를 압박했다. 심지어 학교 안에서도 박원순 학생을 합격시키기 전에 그로 하여금 입학하면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케 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교육자로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내는지 화가 났지만 웃는 낯으로 자제를 시켰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 언약을 주었다. “박원순 학생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 했어요. 공부하기도 바쁠 겁니다. 만약에 당신들이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면 내가 총장의 직을 걸겠소!” 물론 박원순 학생은 입학 뒤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내가 기증한 집을 기반으로 고시 준비 학생들을 위해 설립된 법선재에서 후배들과도 같이 공부를 하기도 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이윽고 재학생 시절에 법원 사무관 시험에 합격해 등기소 소장을 지내더니 1980년에는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로 임용되었다. 검사에 임용된 지 6개월인가 지나서 박원순 검사는 스스로 검찰을 떠났다. 사람에게 벌을 주는 직업을 견디기 힘들다고 했고 변호사로 인권을 지키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1982년 소중한 배필을 만나 혼례를 치루는 데 나에게 주례를 부탁했다. 물론 쾌히 승낙을 했다. 나중에 박 변호사는 “(신원보증인이 되어 대학 입학을 허락한) 인연으로 평생에 한 번 있는 결혼식의 주례로 모셨는데 신랑의 넥타이 색깔이 무엇인지 물어보신 후 당신이 넥타이 색깔까지 거기에 맞추어 매고 나오셨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의 결혼식에는 많은 하객들로 북적였는데 그들 가운데는 정보기관 사람들도 많았다. 내가 주례를 서려 식장에 들어가려는 데 정보과 형사가 “아니 이제 총장님께서 데모꾼 주례도 서주시냐?”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그 말 속에 심한 비아냥이 느껴져 지금도 불쾌한 기분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정보기관의 비뚤어진 감시가 있던 없건 박원순 군은 가정에도 충실하면서 자신의 활동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학업에도 시간이 허락하는 최선을 다한 끝에 1985년 사학과를 졸업했다. 인권변호사로 맹활약하던 박원순 변호사는 법률적 성과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시민운동에 나섰다. 나는 먼발치에서 박 변호사를 응원했다. 그는 1995년 참여연대를 창립하고 사무처장에 취임했다. 하루는 나를 찾아 와 도움을 요청했다. 내용인 즉 우리 대학 병원이 업무 상 보험회사와 보험을 많이 계약하는데 이 알선 업무를 자신이 이끄는 참여연대에 위임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시민운동 단체이다 보니 활동의 자율성을 지키는 것이 핵심원칙인데 대기업의 기부금, 정부의 지원금을 함부로 받아들일 수 없고, 시민들의 후원금도 미약해 재정이 어렵다는 고충을 밝혔다. 물론 나는 이를 받아들였다. 개인이 아니라 신민운동의 정의를 지키려는 박 변호사를 노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를 안정적 기반에 올려놓은 박원순 변호사는 이번에는 <아름다운 가게>라는 새로운 사업 모델을 갖고 나를 찾아왔다. 처음듣는 사업이라 내용을 물었다. “생활형편에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 쓰지 않는 의류, 가정용 비품 등을 기부하면 이를 수집, 정리하고 수선하여 필요한 사람들이 구입하도록 하는 사업입니다. 자원도 절약하고, 환경도 보호하고, 중산층이 서민들의 가계에 보탬도 되면서 수익금은 다시 시민운동단체에 환원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단국대 교직원도 참여하고 총장님께서 나서주시면 이 운동을 확산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장호성 당시 부총장으로 하여금 대학 차원에서 이를 돕는 방안을 찾도록 했다. 장호성 당시 부총장은 박원순 변호사와 경기고등학교 동기동창이어서 친분이 두터워 이내 ‘후원기관 협정식’을 맺게 되었다. 기증용 물품을 수집하는 시설도 설치하고, 홍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개인적으로는 아내와 함께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가까운 이웃들에게 이를 소개하고 여러 물품들을 기부하도록 했다. 내가 사는 워커힐아파트는 젊은이들보다는 나이든 분들이 많이 살거니와 소득 수준도 낮지 않은 세대가 많아서 그만큼 도움 될 만한 물품들이 많았다. 아내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600가구 가운데 알고 지내는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부를 설득했다. 나중에는 친구들까지 참가토록 했고 며느리(주 : 장호성 전 총장의 부인 조기정 씨)도 힘을 보탰다. 여러 물품을 모으고 거두어 아름다운 가게에 보내다 보니 수집한 분량이 좀 아쉽다 싶을 때는 아예 철이 바뀌면 입어야 할 옷들도 꺼내서 기증품에 넣기도 했다. 많이 기부해서 이름을 과시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애정이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새로운 시민운동의 실마리를 열려는 박원순 변호사의 노력을 격려하고픈 마음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 때 활동을 열심히 한 며느리는 <아름다운 가게 서초점> 점장을 맡기도 했다. 2003년 당시 내며느리는 모 대학교의 영문과 교수로 출강하고 있었다. 남편의 동창이 하는 일이라 관심을 갖고 참가했는데 아름다운 가게의 가치를 마음에 들어 하더니 급기야 기존의 직업은 뒤로 하고 이 일에 전념했다. 일체의 보수도 받지 않고 개인의 이익보다 시민 공동체의 발전에 애정을 기울이는 며느리가 한결 지혜롭게 느껴졌다. 박원순 변호사가 하는 아름다운 가게에 대해 나는 주위에서 받는 좋은 평가를 기뻐했다. 정치계 입문에 대한 얘기가 돌 때 나는 그가 서민을 위한 자선사업과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을 하리라 기대했다. 어느 날 갑자기 서울시장에 출마를 한다고 해서 깜작 놀랬다. 진심으로 나는 그가 정치적 권력을 잡지 않기를 희망했다. 박 변호사는 정의를 위해 권력을 비판하면서 겪는 고초는 감수할 수 있지만 권력을 행사하면서 부딪힐 갈등은 매우 힘들어할 성격으로 보였다. 1천만 명을 대표하는 서울시장이 된다면 얼마나 많은 갈등을 감당해야 하겠는가... 그래도 선거를 시작하자 나는 처음 생각과 달리 박원순 후보를 돕고 있었다. 이왕 출마했는데 낙선을 하면 또 상처를 받을까 염려되었다. 내가 그의 결혼의 주례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어느 잡지사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는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분명히 그가 서울 시장에 출마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내 생각을 밝혔다. 그러나 막상 그가 최종적으로 서울시장 입후보로 등록을 하자 내 생각은 바꾸어졌다. 휴대폰을 한 대 더 마련했다. 기존의 휴대폰은 업무용으로 겸용을 하니 전화가 수시로 오고 사용이 번거로웠다. 서울시에 거주하는 친지들을 찾아보고 전화를 돌렸다. 내가 있는 단국대를 나온 인재이니 시장으로 활약할 기회를 주라는 부탁을 했다. 그런데 내 얘기를 듣는 상대편은 “박 후보가 무슨 단국대 출신이냐, 언론에는 서울대로 나온다.”며 나를 당황하게 했다. 많은 미디어에서 그를 단국대가 아닌 서울대 출신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박 후보가 학력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도 나왔다. 언론의 속성에 실망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박 후보를 도와달라며 전화를 돌렸다. 얼핏 추산해보니 전화만 1천 통을 넘긴 것 같았다. 그래도 박원순 후보에게는 일체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왕 시작한 일이니 동문이 잘되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한 일었을 뿐이다. 나중에 선거에서 당선되고 박원순 시장은 나와 아내, 그리고 아들 내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헤아려보니 그의 주례를 서고 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였다. 저녁 자리보다 우리 동문 20만 명 가운데 처음으로 서울시장이 나왔다는 그 사실이 기뻤고, 나에게 이런 기쁨을 준 박 시장이 고마웠다. 나와 박원순 시장의 이런 저런 인연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에서 많은 부탁이 들어왔다. 세상 인심이란 그런 것이고 애써 그런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 연락을 않고 지낸다. 우리는 ‘대학(大學)’이라는 단어를 ‘크고 심오한 학문’을 배우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대학’에는 그 정신적 터전,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게 가지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이에게 시국사범의 굴레를 씌우고 삶을 송두리째 흔들면서 이를 당연시하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도 우리 기성세대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 수도 있다. 젊은이에게 더 넓고 관대한 문호를 열어주려는 노력이 대학의 본분일 것이다. 그 인간적 풍토에서 미래를 열어갈 인재가 성장하지 않겠는가.
2019.08.01 7670
정의감으로 분신을 외친 학생, 봉사하는 지성으로 키워내다 H
1987년, 한국 대학가의 봄은 이미 펄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대학생들의 잇단 분신자살, 박종철 군 물고문 치사 사건으로 불거진 민주화 요구 시위는 대학을 분노의 함성과 거센 시위의 열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 열풍이 우리 대학에도 드세게 불어 닥쳤다. 4월 들어 학내 복지문제 해결을 주장하던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방향을 학내민주화, 학사부정 척결 등으로 틀었다. 수업거부, 중간고사 거부가 대세를 이루더니 급기야 대학 본관 총장실을 점거했다. 매일 2~3천여 명의 학생들이 농성과 시위를 펼치면서 학내는 사실상 교육과 연구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일련의 사태로 당시 총학생회의 퇴진 요구를 받던 김 모 부총장이 사직의사를 전 했지만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그 앞자리에 당시 총학생회장인 양종곤 군이 있었다. 양종곤 군은 매일 학내 농성, 혹은 학원 밖의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고, 때론 단식과 대중연설로 수천 명의 학생들을 강의실 밖으로 끌어냈다. 개교 이래 최대의 학생 시위가 이뤄졌다. 4월 27일로 기억한다. 한남동 캠퍼스의 본관 앞에 있는 노천극장에 5천 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함성을 외쳐댔다. 학생들은 대학민주화로 민주사회 앞당기자고 외쳤다. 노천극장의 중심에 양종곤 학생회장이 서있었다. 어쩌면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이 날은 달랐다. 양 군은 자기 옆에 20리터 기름통을 두고 있었다. 그 안에는 신나가 가득했다. 멀리 한강 쪽으로 이른 노을이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양 군이 신나 통을 들어 자기 몸에 부었다. 여학생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학생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양종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김 부총장이 물러났지만 아직 교직에 있습니다. 학교를 떠나야 합니다. 진상규명도 철저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학내에 군부정권에 협조한 어용무능 교수들이 퇴진해야 합니다. 장충식 총장님이 학생들 앞에 서서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저는 오후 6시에 분신을 하겠습니다.” 노천극장이 본관 앞에 있기에 한 눈에 상황을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은 극도의 흥분에 휩싸였다. 학생뿐만이 아니라 본관에서 이를 지켜보던 교무위원들이나 관계자들도 경악하고 충격에 말을 하지 못했다. 신나에 흠뻑 젖은 양종곤 군은 라이터를 들고 있었다. 잠시 뒤 동료 학생이 라이터를 인수해 치켜들었다. 신나는 발화점이 낮아 약간의 불꽃으로도 큰 불이 날 수 있다. 너무 위험하고 무모한 장면이었지만 현실이었다. 5천 명의 학생들은 학생대로, 학교 관계자들은 그들대로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 날 시위 전에 총학생회장이 모종의 극단적 조치를 결심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학원 동향을 체크하는 경찰이나 안기부에서도 같은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강경책을 준비하리라 짐작은 했지만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 결론이 나오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총장으로서 몸에 불을 붙이는 자살방법을 5천 명의 학생 앞에서 공언하는 광경을 보고 있는 일 자체가 가슴이 아팠다. 저 젊은이가 얼마나 상황에 몰리고, 쫒기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저런 도박같은 일을 약속하는 걸까... 상황이 벌어지자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정보 당국이나 공안 당국, 심지어 문교부(지금 교육부 전신)나 소방서까지 현장 상황을 확인하고, 대책을 묻거나 조언하는 전화들이었다. 노천극장과 가까운 정문 근처에는 소방서의 화재진압용 차, 구급차가 대기했다. 그 안쪽으로 경찰 진압대도 잠복해있었다. 노천극장과 주변으로 십 수 명의 기자들도 취재를 하고 있었다. 공안 당국은 학생들을 자극할까 병력을 드러내지 않고 적절한 현장진압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걸려온 전화들은 한 결 같이 지금 총장이 현장에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시위대를 더 흥분시키고, 자칫 구타나 폭력 시위 같은 상황으로 확대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었다. 심지어 저 휘발유통에 있는 액체는 물 같은 비인화물질이고 협박용일 뿐이라는 예단도 있었다. 학생들은 절규에 가까운 외침으로 장충식 총장은 노천극장으로 나오라 아우성이었다. 당시 내 집무실, 그러니까 총장실은 이미 총학생회의 활동대에게 점거를 당해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재단 소유 <단국빌딩>에 임시 사무실을 차려 근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위 시작과 함께 나는 현장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고자 해서 본관 회의실에 있었다. 모든 소리와 장면들을 선명히 보고 들을 수 있었다. 6시가 다가올수록 상황은 더 소란스럽고 어지러워 졌다. 정보 당국에서는 양종곤 총학생회장의 분신 자살 압박이 본인의 판단이라기 보다는 당시 시국을 주도하던 운동권 최상층부에서 내려온 지시라고 귀뜸했다. 그러니 총학생회가 분신으로 협박해도 절대로 ‘장충식 총장이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경찰이나 소방서 측도 총학생회장이 뿌린 것은 물일 수도 있으니 협박에 굴하지 말라고 거듭 강권했다. 심지어 문교부 장관실에서 조차 지금 단국대가 이 상황에서 양종곤 군의 요구를 들어주면 다른 대학도 교내 문제를 앞세워 학생들을 대대적인 시위로 유도할 빌미가 되니 결코 들어주지 말라는 얘기가 왔다. 시간이 임박하자 이것은 ‘장관님 지시’라는 압박이 더해졌다. 내 옆에 있는 교무위원들, 나를 걱정해주는 교직원들도 저런 위험한 현장에 나가서 봉변을 당하면 안된다며 총학생회장의 협박을 거부하자고 했다. 심지어 강경론자는 끝내 분신을 하면 그것은 극단적 운동권 학생의 죽음이지 학교는 할 만큼 했다는 주장까지 했다. 나는 그 소음과 오가는 논의와 대책의 혼란 사이에서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은 ‘저 젊은이를 그냥 놔둬서는 안 된다’는 소리였다. 나는 교육자이다. 총장이기 이전에 교수이고, 저런 젊은이도 내 학생이다. 시대와 이념, 현실과 이상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여러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우리 대학의 젊은이에게 닥칠 비극이 있다면 기꺼이 교수인 내가 먼저 나서서 막아줘야 한다. 그것이 내 마음 속 울림이었다. 신나를 뿌리고 연단에 주저앉아 오후 6시가 넘으면 분신하겠다는 저 어린 학생의 마음은 어떨까? 50일이 넘게 소리치고, 밥을 굶고, 때론 교직원과 멱살잡이를 하고, 심지어 기물을 파손하면서까지 저 젊은 친구가 얻으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정의감이라고 믿었다. 기성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열망이 저 젊은이의 피를 끓게 했을 것이다. 저 학생은 입학 당시 최우등급의 성적을 거둬 특별장학금을 받은 학생이었다. 서울에서 8시간을 차로 달려야 갈 수 있는 먼 객지에서 홀어머니의 기대를 안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 가슴 속에 어찌 성공과 행복에 대한 열망이 없겠는가? 그 모든 것들을 읽었기에 결국 저 젊은이는 ‘차라리 죽겠다’고 나선 것은 아닌가. “구해야 한다. 흥분한 시위대에 의해 내가 돌을 맞고, 정부의 지시를 어겨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내가 나서서 풀어줘야 한다.” 내 마음 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결론이었다. 그것은 교수로서의 본능이었다. 나는 관계자들 앞에서 내 입장을 천명했다. “저 학생을 외면할 수 없어요. 내가 외면하면 이번에는 양종곤 학생이 시위대의 외면을 감당 못하고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가겠습니다. 혼자 나갈 테니 이해해주세요.” 본관에서 노천극장을 내려가는 계단의 양쪽에는 이미 수 천 명의 학생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취재하는 내외신 기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르고 쇠파이프나 목봉을 들고 마스크를 쓴 채 시위 지도부를 호위하는 사수대 학생들도 많았다. 그들은 내 뒤를 따르던 교무위원들을 제지해 운동장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홀로 운동장에 섰고, 연단에 올랐다. 5 천명이 넘는 학생들의 이목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십여 분 남짓한 연설을 통해 “학생들의 요구를 애교심의 결과로 본다.”고 전제하면서 학생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학사관리에 오류가 있다면 총학생회가 지정하는 평교수들로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진상을 파악하고, 책임질 일이 있다면 총장인 내가 지겠다.”고 약속했다. 학생들은 내 말에 공감을 했다. 돌이 날아올 수도 있다던 주위의 걱정과 달리 우렁찬 박수로 내 고민과 대책을 공감해주었다. 총학생회장인 양종곤 군도 분신 자살이 아닌 학생들의 박수 속에 신나와 라이터를 거두고 시위 해산을 선언할 수 있었다. 극한적으로 치닫던 학교와 총학생회의 갈등도 조금씩 진정했다. 사태가 진정 국면으로 전환되었지만 양종곤 군은 총학생회장으로서 그동안 주도해온 일련의 일들에 매듭을 지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총학생회 지도부는 학생처의 집기를 파손했다. 거기에 총장실, 총무처까지 더해 피해액이 8천 만 원에 이르렀다. 공안당국은 이를 부각시켜 나에게 양종곤 군의 제적시켜 학원 밖으로 추방시키라 강권했다. 이를 거부하기는 했지만 대낮에 집단적으로 학교 기물을 파손한 일을 모른 척 할 수도 없었다. 책임자인 양종곤 군은 이미 집시법 위반, 기물파손죄로 수배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나는 자수를 권유했다. 하지만 양종곤 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이때 양종곤 군을 자수시킨 뒤 그의 미래를 함께 고민해야 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그가 단국대 학생을 대표하는 총학생회장으로서 보여준 리더십과 정의감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4,5월이 지나면서 총학생회는 학내문제에서 급격하게 사회민주화로 역량을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항쟁이라는 거대한 민주화 동력이 불어 닥쳤기 때문이다. 양종곤 군은 6월 항쟁에 동참하는 와중에 결국 체포되었다. 공안당국은 양종곤 군에 대한 수배 조치 이후 그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그의 동선을 파악한 사복 형사들은 6월 항쟁 기간 중 학교에서 기숙하다 시위를 위해 빠져나가던 양종곤 군 일행을 한남동 캠퍼스 후문 근처에서 덮쳐 체포에 성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바로 우리 재단의 고문변호사를 선임해 양종곤의 법률대리인을 맡겼다. ‘양종곤 군 제적’이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내가 나서서 그의 면학을 도울 테니 공부할 기회를 유지케 해 달라 설득했다. 법정에서 같은 취지의 호소를 했다. 양종곤 군은 재판을 통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처벌을 받고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나는 비서를 통해 그를 만나서 내 뜻을 전하고 운동권보다는 학문의 길에 들어와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를 개혁하는 진로에 대해 생각해보라 권유했다. 선 듯 자신에게는 ‘청산의 대상’이었던 나의 권유를 받기가 정서적으로 힘들어서인지 취업을 하기도 했다. 나는 양종곤 군의 경제 형편이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게 방을 임대할 보증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내 의지의 일단을 일깨우고 싶었다. 그 당시에 양종곤 군은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사귀던 동료 여학생이 있었다. 둘은 동료에서 연인으로 발전해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를 만나던 내 비서는 이같은 사실을 알리면서 처가될 집에서 양종곤 군의 집안 형편이 어렵고, 양종곤 군 본인의 미래도 불투명해 결혼을 강력히 반대한다고 보고했다. 나는 두 젊은이의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딸들도 그렇게 결혼시켰다. 내 딸이 사랑하는 남자라면 그 믿음을 존중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그래서 내가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래 아들을 하나 더 두는 셈으로 치자.” 그렇게 결심했다. 나는 경기도 용인으로 달려가 신부 측 부모를 만났다. 부모님들은 매우 강경했다. 험한 소리도 들었지만 이를 삭히면서 그 분들에게 약속했다. “내가 양종곤 군을 유학 보내고자 합니다. 물론 따님도 결혼시켜 같이 미국에서 공부토록 하겠습니다. 너무 심려마시고 양종곤 군의 미래를 믿어주세요.” 결국 결혼 승낙을 받아 1989년 봄에 혼례를 치뤘다. 물론 나는 주례를 자청해 두 사람을 축복했다. 양 군은 직장 생활과 결혼 과정에서 내가 권유하던 유학과 학문에 대한 결심을 굳혔다. 1990년에 두 사람은 대망의 꿈을 함께 나누며 오레곤 주에 있는 서던 오레곤 대학(Southern Oregon University)에 입학했다. 이런 과정에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총장을 쫓아내려한 운동권 학생을 결혼시키고, 유학 보내는 내 행동을 비판하기도 했다. 퇴학을 시켜도 분이 덜 풀릴 정도로 대학과 교직원들에게 위해를 했던 학생을 키우는 게 너무 온정적이라는 지적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그는 총학생회 회장으로서 학생들을 대표해 나를 비판한 것이다. 그의 주장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것은 없다. 인재를 키우는 것은 내 취향에 부합하는 젊은이를 선호하는 일이 아니라 정의감, 희생정신, 잠재력을 고려해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내 생각이었고, 양종곤 군은 그런 고려 사항에 적합했다. 양종곤 군에게 지원하는 유학비는 전적으로 나의 ‘사재’였다. 집에 줄 생활비를 아끼고, 내 쓸돈을 아껴가며 학비를 조달했다. 나는 대학의 어떤 지원도 거기에 추가하지 않았다. 학내에 그를 제적시켜도 아깝지 않다는 여론이 많은데 교비를 학비지원에 쓰면 오히려 양종곤 군이 더 욕을 먹을 것 같고, 그의 미래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양종곤 군은 석사 과정을 잘 마치고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나는 양종곤 군을 좋은 학자로 길러줄 훌륭한 경영학교수를 물색했다. 네브라스카 주립대의 이상문 교수를 양종곤 군에게 추천했다. 이상문 교수는 서울대를 나와 조지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의 대표적 경영학회인 <Decision Science>의 회장을 장기간 역임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게 미국 경영학계에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네브라스카 주립대에서 석좌교수를 거쳐 정년퇴직한 의사결정, 글로벌 전략, 혁신경영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양 군은 기꺼이 내 조언을 받아들였다. 다행히 이상문 박사는 양종곤 군을 기꺼이 제자로 받아주었다. 양 군은 정들었던 오레곤을 떠나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인 네브라스카로 떠났다. 그 때, 나로서는 정말 힘든 시기가 닥쳤다. 나와 김영삼 정부와의 불화로 내가 총장의 직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나야 야인이 되면 그만이었지만 당장 급여를 받지 못하니 양종곤 군 학비를 지원할 수 없게 된 것이 큰일이었다. 집에 가져다 줄 월급이 없으니 유학비 지원은 여력이 더 없어졌다. 낯선 땅에서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아내와 아들까지 건사하면서. 나는 정권의 압박에 힘겨웠지만 양종곤 군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더 힘들어지기도 했다. 결국 이상문 박사에게 나의 진심을 전달했다. 이 박사는 다시 한번 큰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박사과정에 드는 어마어마한 학비를 상당 부분 해결해준 것이다. 그래도 가족의 생활비는 따로 풀 방법이 없었다. 양종곤 군은 결국 가족을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홀로 유학을 마치기로 했다. 모자른 학비도 벌고, 생활비도 벌면서 연구를 계속해야 하는 고달픈 시간이었다. 거기에 가족을 떠나보내고 감당해야 했던 깊고도 큰 고독...나 역시 홀로 미국 유학을 했기에 그 막막함을 공감할 수 있었지만 어린 자식을 양육하다가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했을 것이다. 고된 개인적 시련과 높은 벽을 넘어야 하는 학문적 단련을 거치면서 양종곤 군은 ‘운동권 학생’에서 ‘경영학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가 전해오는 편지나 선후배들의 전언을 통해 양종곤 군이 양종곤 박사로 잘 커나가고 있음을 간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내 기쁨이기도 했다. 1997년에 그는 정말 어렵고 힘든 과정과 논문 심사를 무사히 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훌륭한 지도 교수 덕분에 미국에 정착할 수도 있었지만 귀국을 해 좋은 직장에 안착하였다. 국내 경영컨설팅 회사를 거쳐 마지막으로는 세계적 글로벌 경영컨설팅 회사인 IBM BCS에서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 경영자문을 하며 전공 실무경험을 쌓았다. 주변에서 들으면 기업체 특강에서도 좋은 평을 받아 초청 강연이 많다고 했다. 나는 양종곤 박사를 만나자 했다. 그리고 그에게 마지막 미션을 주었다. “양 박사 이제 모교에서 후배들을 지도해야 겠어.” 양 박사는 부담스러웠을 게다. 모교에는 여전히 그에게 부정적 시작을 갖고 있는 선배들과 교수님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또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은 이들이 날선 비난을 오래오래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그는 지원을 해야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사명이니까. 후배이자 제자인 우리 대학 학생과 자신의 모교를 위해 감내해야 할 빚이니까. 다행히도 그는 공채 과정을 잘 통과해 모교의 교수로 발령받았다. 비단 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 셈이지만 나는 그가 학생운동을 통해 짊어진 숙제를 기억해 달라 말하고 싶다. 총학생회장 양종곤 군에서 양종곤 교수로 걸어갈 그의 삶 속에서 후배들을 위해 더 큰 일을 해달라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선배가 되달라고.
2018.10.18 62061
팔 대신 열정으로 화가의 꿈 이룬 오순이 교수 H
이제 교수가 된 오순이 양이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순이 학생’, ‘마산의 오뚝이 순이’가 더 낯익고 정겹다. 내가 순이 학생을 만난 것은 43년 전이었다. 순이 학생이 초등학교 4학년, 그러니까 11살쯤 이었다. 퇴근을 하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이었다. 특이하게도 그 소녀는 발가락에 붓을 끼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동양화를 그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어린 아이가 팔이 없는 불행을 안고 사는 것도 놀랍지만 그럼에도 의연하게 발가락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는 것이 더 놀라웠다. 담임 선생님이 강요를 한다고 될 일이겠는가? 얼마나 노력을 해야 발가락에 붓을 잡고, 원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어린아이의 의지가 낳은 결과였다. 놀람과 감동은 이내 걱정으로 변했다. 저렇게 연약한 아이가, 화면으로 보면 가정 형편이 넉넉해 보이지도 않던데, 얼마나 저 가상한 뜻을 지킬 수 있을까? 아니, 만약 단순한 의지가 아니라 그 의지가 화가로 열매 맺을 수 있는 재능도 함께 갖고 있다면... 재능이란 꿈이라는 꽃을 피울 씨이다. 그 씨가 꽃피려면 여건과 격려, 교육이라는 알맞은 토양이 있어야 한다. 나는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했다. 자칫 한 인간의 미래를 내 교육자적 의욕만으로 대들었다가 이도 저도 아닌 결과를 낳는 게 아닌지 두려웠다. 그러나 몇 번을 고민해도 결론은 같았다. 지금 내가 나서야 한다. 순이 양의 열의, 재능이 꽃피울 수 있도록 내가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다음 날 비서로 하여금 마산을 내려가 오순이 학생을 직접 면담하고 여러 가지 알아보도록 했다. 순이 학생은 부친이 경상남도 마산시에서 목공으로 가계를 꾸리고 있었고, 집이 철로 변에 있었다. 복구할 수 없는 불행을 당한 것은 3살 때였다. 집 근처 철로 변에서 놀다 넘어졌는데 달려온 열차에 치여 두 팔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깊고 깊은 어두움에 빠진 순이 학생에게 작은 빛을 던진 분은 초등학교 4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다. 어린 순이가 가슴에 묻어두고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아픔을 그림으로 풀어보라 이끌어주었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의 애정이 아무리 커도 순이 양을 화가로 성공시키려면 좀 더 장기적이고 강한 지원이 필요했다. 현장을 살피고 온 비서의 보고를 받고 나는 이것이 하늘에서 나에 내려준 계시라 생각했다. 고민을 접고 순이 학생 후원을 실천한다는 결심을 했다. 다시 비서를 오순이양 집으로 보내 부모님과 담임선생을 만나도록 했다. 앞으로 순이 학생이 좋은 화가로 성장하도록 돕겠다는 내 뜻을 전했다.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도 기꺼이 동의를 해주었다. 만남을 시작하고 다음 달 부터 좋은 화가를 구해서 순이 양의 개인 지도를 맡게 했고, 화가로서 커나갈 기본기를 키워 주라는 책임을 지웠다. 강사료나 그림 공부에 필요한 비용은 내가 부담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좋은 화가의 개인 지도를 받도록 경제적 후원을 지속했다. 순이 양은 비록 팔을 잃어서 발로 붓을 잡기는 했지만 대단히 의지가 강한 노력형의 인재였다. 무엇보다 집중력이 좋았고 한번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는 뒤로 미루거나 포기하지 않고 울며불며 힘들어하면서도 지도를 따라갔다. 예술은 매우 민감한 작업이다. 순이 양에게는 남모를 장애의 고통과 불편함이 매 순간마다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순이 양은 붓을 놓지 않고 하루하루 정진했다. 그 인고의 시간은 결국 큰 보람으로 바뀌었다. 순이 학생이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5년이었을 게다. 지금은 없지만 당시 홍익대학 주최로 열리는 ‘전국 남녀 고교 미술 실기대회’가 있었다. 대학 입학의 특전이 걸린 상당한 권위의 대회였는데 순이 학생이 이 대회 사군자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한 것이다. 소식을 들은 나는 내 딸이 우승한 듯한 기쁨을 느꼈다. 몸이 겪는 그 고통과 불편함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로 인해 마음이 당하는 아픔을 이겨내려면 얼마나 인내를 해야 했겠는가. 아무리 재능이 있다한 들 발로 동양화를, 그것도 섬세한 붓놀림이 필수적인 사군자에서 우승을 하다니... 순이 양보다 더 좋은 육체적 조건과 물리적 환경에서 동양화를 배우고 익힌 내로라하는 고등학생들이 구름처럼 모여든 전국대회에서 차지한 1등의 영예는 얼마든지 자랑해도 부족함이 없는 보람이었다.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홍익대에 입학하기를 희망한다. 순이 학생인들 안 그랬겠는가. 홍익대도 오순이 양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겠다면 입학을 종용하였다. 순이 양은 기쁜 마음으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홍대에 입학하겠다고 희망을 말했다. 그래서 물어봤다. 다른 특혜는 없는가 물었더니 없다고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홍익대에 가지 말라고 했다. 나는 바로 이유를 설명했다. “순이야, 홍익대가 설사 4년 동안 장학금을 준다 해도 너는 그 대학에 가면 안된다. 너는 장학금만으로는 너가 가진 핸디캡을 이겨내고 예술가로 성장할 수 없단다. 그러니 너를 화가로 성장시키고 평생 동안 창작 활동을 하도록 도와줄 그런 대학을 찾아서 그 대학에 입학해야 해.” 나의 말에 순이 학생은 어리둥절해 하며 되물었다. “그런 대학이 어딨을 까예?”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단국대학이란다.” 이어서 나는 순이 양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순이 너의 몸은 하나이지만 다른 학생과 달리 너는 두 몸을 가지고 있는 셈이야. 네 언니가 잠시라도 곁에 없으면 생활을 할 수가 없는 입장이잖니?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하는 자잘한 일을 언니가 수발을 들어줘야 하는 거고. 그리고 통학하기 보다는 기숙사를 써야 하는데 너는 다른 학생과 한 방을 같이 사용할 수가 없을 거야. 언니하고 같은 방을 써야 하니까. 식사도 발로 수저를 들어 홀로 먹지만 식판을 들고, 식당 자리나 강의실 좌석도 특별히 배려를 받아야 할 꺼고... 이런 일상적인 생활 속에 필요한 시설, 제도적 지원, 그리고 전면적인 경제적 후원을 해줄 수 대학이 필요한 거지. 나와 단국대학은 너를 성공시킬 때 까지 후원할 꺼야.” 순이 양의 부모님이 이런 모든 일을 해결할 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이런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할 수도 없었다. 나는 순이 양을 만난 이후 9년 동안 순이 양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맺은 인연이 결국 평생을 가야 한다는 것을 이미 나는 결심하고 있었다. 단국대 입학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오순이 화백’의 꿈을 향한 하나의 중간 과정이었던 셈이다. 내 권유에 맞춰 오순이 양은 우리 대학 동양화과에 지원을 하였다. 이제는 단국대의 품에서 청년 예술가의 꿈을 키워나가면 된다는 생각에 나도 순이 양의 합격 소식을 고대하고 있었다. 실기 점수의 비중이 높은 만큼 당연히 입학 전형을 무사통과하리라 믿고 있었는데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순이 양이 낙방을 하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경위를 알아보니 면접시험에서 당시 미술대 학장이 오순이 양에게 F 등급을 줬다는 것이다. 더 알아보니 미술대 학장은 서양화 전공이었다. 이미 경력이 말해주듯 순이 양의 동양화 실기실력을 전국 최상위권이었다. 평소 생활 자세를 이미 10년 동안 봤기에 자세가 불량하거나 예의 없는 성품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면접 과정에서 F 등급을 줬다는 것은 순이 양을 학생으로 입학시키고 싶지 않다는, 즉 장애인이기에 우리 대학에서 미술 교육을 받을 수 없음을 공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우리가 주변에서 교수를 만나고는 하지만 때로는 명목이 대학교 선생님이지 교육자로서 사고력과 인간성이 수준 이하인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문제는 이런 교수님들로 인해 유망한 학생들이 아픔을 겪고 좌절하는 일이 발생하는 경우이다. 불행히도 대학가에서 그런 경우를 당하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무척 놀랐다. 뒤이어 분노가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선친 때부터 억강부약(抑强扶弱)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장애는 약점이지 불가능이 아니다. 교육자, 그것도 대학 교수이면 제자와 학생들에게는 강자이다. 강자가 약자를 도와야 하는 법이다. 강자는 약자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것이 도리이고, 바로 그 사명을 자부하는 사람이 교수가 아닌가. 나는 대학의 공식 회의가 있는 자리에서 미술대 학장을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학장님, 오순이 수험생에게 면점 점수를 F로 주었는데 어떤 이유때문입니까?” “미술 전공 학생이 팔이 없다는데 과연 전공을 제대로 이수할지 회의적이라서 그랬습니다.” “학장님, 그러면 오순이 양이 발로 그린 그림을 본적이 있습니까?” “아뇨 없습니다.” “그럼 구족화가라는 말은 들어보셨나요?” “네, 있습니다.” “오순이 학생이 바로 구족화가입니다. 순이 학생은 발로 그림을 그립니다. 면접을 보면서 그 학생이 어떻게 그림을 배우고, 이 자리에 까지 왔는지 물어보고, 확인해보지도 않으시다니...” 나는 머리가 뜨거워졌지만 차마 성미 그대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대신에 순이 학생의 과거와 나의 생각을 여러 사람 앞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 “그 학생은 전국 고등학교 학생 미술대회에서 1등을 해서 홍익대가 4년 장학금을 주고 특기생으로 선발하려던 학생입니다. 그런 젊은이를 내가 공부하는데 뒤따르는 여러 가지 난제를 후원해주고, 장차 외국에 유학 까지 보낼 생각으로 우리 대학에 원서를 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학장님이 장애에 대한 선입견으로 입학을 거부했으니 당신이야 말로 교육자로서 능력이 의심스럽고 통찰력이 부족한 교수님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였기에 우리 대학과 나의 교육 철학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제가 우리 대학에 전국 대학에서는 가장 앞장서서 특수교육과를 창설하고 입학생들에게 전액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인재들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대학 출신 특수교육 교사들이 교장부터 교원까지 우리나라 특수교육계를 리드하고 있습니다. 장애인은 ‘특수한 조건을 가진 일반인’입니다. 이 사람들이 가진 특수한 조건을 이겨내 일반인으로 살게 하는 것이 대학의 봉사정신이고, 우리 대학이 갈 길입니다.” 나는 총장(당시)으로서 해당 교수님을 면접단에서 제외하도록 조치했다. 오순이 양은 1986년 우리 대학에 입학했다. 순이 학생을 기숙사에 거주토록했고, 언니와 같이 쓸 수 있는 방으로 정해 주었다. 순이 양은 식사를 발로 하는데 간혹 철없는 이들이 그걸 구경하듯 바라봐 마음에 상처를 받곤 했다. 그래서 별도의 방에서 언니와 식사를 하도록 했다. 학비만 감면받아 살 수는 없었고, 순이 양 언니도 직업이 필요했다. 나는 순이 양의 언니를 우리 대학 직원으로 특채했다. 그후 오순이양은 4년간 열심히 공부를 했다. 전공과목인 미술 과목만이 아니라 국어, 경영학원론, 법학통론 등 다른 교양과목도 모두 A학점을 받았다. 1990년 학과 수석으로 졸업했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할까. 이미 10살 때부터 미술에 입문할 때는 붓을 잡느라 걷지도 못할만큼 발가락이 부어오를 때까지 연습을 했던 순이 양이었다. 나는 입학 때 공언한 대로 대만으로 유학을 보냈다. 중국이 아닌 대만을 선택한 것은 나의 오랜 친구이자 대만의 저명한 화가 리치마오(李奇茂)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리치마오 교수는 스페인 미술박물관 등 유럽의 국립미술관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화가로 작품을 소장하고 있을 만큼 인정받는 화가이다. 그는 내 부탁을 들어 자신의 집에서 기숙시키며 2년 동안 대만 중화미술원에서 교육을 받도록 했다. 그림을 사사받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를 통해 중국어를 배운 것도 큰 소득이었다. 이후 1994년 항저우(杭州)의 <항저우국립 중국미술대>에 입학했다. 오랜 이역 생활에 지치고 힘들었지만 이 역시 잘 이겨냈다. 순이 양은 10년을 넘는 산고를 겪으며 마침내 산수화 분야를 전공한 한국 유학생으로서 중국 최초의 박사학위 논문이라는 기록을 새로이 만들고 귀국했다. 순이 양은 이제 마산의 오뚝이 소녀 순이 학생이 아니라 어엿한 지성인이자 장인정신을 갖춘 한국화가로 성장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2004년 이후 그녀는 자신의 모교인 우리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화단에서도 중견으로 맹활약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보람찬 일이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 했는데 오순이 교수를 보면 그 말이 진실임을 새삼 실감한다. 작고 여린 싹이 이제는 훤칠한 나무가 되어 제자들에게 그늘도 줄 만큼 컸으니 내가 처음 순이 양을 만났을 때 결심한 바를 얼추 이룬 셈이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나의 노력이 아직 미흡하다는 아릿한 자책감이 있다. 오순이 교수의 반려자를 찾아주지 못한 것이다. 그뿐인가. 오 교수를 곁에서 도와준 오 교수의 언니도 아직 독신의 길을 걷고 있다. 지금까지는 둘이 서로 손발이 되고, 마음의 기둥이 되어 살아왔는데 이제 좋은 배우자를 만나 의좋게 삶을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면 얼마나 기쁠 터인가. 부디 큰 사랑의 빛이 순이 양과 언니의 곁에 가득해지길 염원한다.
2018.09.20 7039
시대를 초월하는 '참 스승'의 길 H
교수는 연구와 교육이 존재 이유이다. 그러나 시대와 갈등을 겪고, 국가권력의 불의에 항의하다 핍박을 받기도 한다. 가르치는 일이 강단과 연구실에서 이뤄지기도 하지만 지식인으로서 비판적 지성을 실천하는 일도 ‘선생님의 또 다른 길’일 수 있다. 훌륭한 학덕을 갖고 계신 선생님이 정권과 타협하지 않을 때 생기는 불이익은 비단 선생님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 대학의 총장으로서 나 역시 교수들의 참여정신과 실천으로 난처한 경우를 직면하기도 했다. 이런 분들 가운데 지금까지 나의 지표로 기억 속에 살아 숨쉬는 분이 일석 이희승 선생님이시다. 한국 최고의 국어학자이자 국학자인 일석 선생님은 박정희 정권과 타협없는 불화를 겪었다. 하긴 일석 선생님이 박정희 정권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선생님은 이미 일제 강점기에 한글연구를 통해 민족정신을 지키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수감을 당했던 강골이기도 했다. 1969년은 대통령의 연임을 허용하자는 삼선개헌문제로 나라가 큰 진통을 겪을 때 일석 선생님은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 윤보선, 함석헌, 장준하,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인, 사상가 등과 함께 학계를 대표해 참여해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이 반대운동의 여파로 일석 선생님은 성균관대 대학원장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었다. 나는 일석 선생님을 찾아가 우리 대학의 동양학연구소 소장직을 맡아 달라 설득했다. 물론 선생님은 “여러 형편이 여의치 않은데 내가 단국대에 가면 장충식 총장이 난처해질 수 있다”면서 소장직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나는 “동양학연구소를 단국대의 간판 연구소로 키우고 싶은데 선생님의 학덕이 없이는 안된다”고 간곡히 부탁드렸다. 오히려 “이왕 소장직을 맡으시는 것만 아니라 동양학연구소의 기틀을 잡으려면 10년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10년 간 저와 함께 동양학연구소를 키워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젊은 총장의 패기가 맘에 드셨는지, 아니면 삼고초려를 마다않는 내 열의에 공감을 하셨는지, 선생님은 1971년에 1월에 동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셨다. 선생님이 고희를 눈앞에 둔 시기였다. 일석 선생님을 내가 모셔온다고 할 때 ‘남산’으로 불리던 정보기관의 관계자가 나에게 걱정하는 말투로 이렇게 충고하기도 했다. “재야인사로 대통령의 앞길에 사사건건 반대를 일삼는 양반을 단국대로 모셨다가 봉변을 당하면 어쩌시려 하십니까. 그것도 이미 정년퇴임을 한 나이든 양반을 굳이 소장직까지 임명하면서 말이죠...” 걱정의 말투에는 “잘 알아서 하라”는 경고의 냄새가 짙었다. 그러든 말든 일석 선생님은 정치에 대한 소신에 앞서 학식으로나 업적으로나 석학(碩學)이고 원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선생님의 지행일치, 강직과 겸손이 조화를 이룬 품성도 모자름이 없었다. 부임하시고 두 해가 지난 1973년 가을이었다. 당시 사회상황은 유신헌법이 발효되어 정치적으로 얼음처럼 냉랭한 상황이었다. 겨울이 막 시작되던 12월의 중순 경이었다. 시인 고은 씨가 이희승 소장님을 모시고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고은 씨는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가 심해지고 있는데 원로들의 참여가 절실하다. 일석 선생님이 삼선개헌에도 반대하는 성명서에 참여하셨으니 이번 유신헌법 철폐 운동에도 기꺼이 뜻을 같이 하시리라 믿고 뵈었는데 선생님께서 단국대와 장충식 총장님이 피해를 볼 수 있으니 미리 뵙고 거취를 알리시겠다며 이리 오셨다.”고 경위를 설명했다. 개헌 촉구 서명을 받으러 왔다가 일석 선생님이 사표에 서명을 하는 걸 먼저 보게 된 고은 시인도 난처한 표정이었다. 정작 일석 선생님은 평소의 온화한 표정과 말투에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동향학연구소 소장직 사표를 제출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자세를 보건데 제가 유신헌법을 고치라 요구하는 성명에 동참하면 나야 그렇다 치고, 장 총장님과 단국대도 불의의 피해를 볼 겁니다. 내가 앞으로도 내 소신을 바꾸지 않을 텐데 차라리 학교를 떠나야 총장과 대학이 편할 것입니다.” 사표를 건네시면서도 옅은 웃음을 띠셨지만 단국대에 누를 미치지 않겠다는 의지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 뜻을 알기에 더욱 더 나 역시 물러날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 서명하신 건 선생님의 소신이니까 그건 그거대로 됐습니다. 하지만 왜 동양학연구소장직 사표를 내십니까. 소장직은 정치나 유신헌법과 관계없이 저하고 하신 약속입니다. 저하고 처음 약속하시기를 동양학연구소에서 10년간 근무하시기로 하셨습니다. 한한대사전 편찬이 이제 시작인데 이 사전의 완간 책임을 다 하시고 떠나셔야 합니다.” 나 역시 웃으며 선생님의 사표를 반려했습니다. 같은 취지의 말이 몇 번 반복되었지만 나는 끝내 선생님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 일석 선생님께서는 결국 허허 웃으셨다. “장 총장 고집도 대단하시다”라면서 사표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가셨다. 나라고 대학 경영인으로서 왜 여러 생각이 생기지 않았을 까만은 당시 내가 이렇게 즉각적인 사표 거부를 한 동기는 나라도 선생님을 지켜야 한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해득실을 떠나 내 은사님, 대학의 선생님을 지키는 것이 총장의 임무라는 믿음이 본능처럼 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이희승 선생님과 고은 시인이 돌아간 뒤 두 시간 쯤 지났을까. 모 장관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이희승 박사님이 유신개헌 서명에 앞장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동양학연구소 소장 사표를 장 총장님이 책임지고 처리 하세요.” 마치 상사가 지시를 하는 명령조의 말투였다. 아무리 장관이라 해도, 대통령의 권력에 직결되는 문제라 해도 이런 지시를 받고 “네, 네”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장관에게 바로 응답했다. “저는 이희승 선생님의 사표를 수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 진심을 담아 설명했다. “일석 선생님은 제 은사님이십니다. 내가 서울대 학생시절에 선생님한테서 교양 국어를 1년간 배웠습니다. 제자가 은사님께 어떻게 사표를 운운합니까. 대학에서 선생님을 그리 모실 수는 없습니다. 만약 사표를 내야 한다면 제가 총장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가능합니다만 저는 총장으로서 내 선생님의 사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제의 도리이지만 결국 장관의 지시를 거부한 셈이 되었다. 대학을 관장하는 장관의 지시를 거부하였으니 조만간에 나의 총장 승인 취소 통지가 오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총장직 사표제출에 대한 움직임이나 일석 선생님을 대학 바깥으로 나가게 하려는 압력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유신헌법의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적 서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기도 했고, 정권은 ‘긴급조치 선포’라는 강경책을 실행해 치열한 대치국면에 접어들었다. 다행히도 일석 선생님에 대한 정부 차원의 비토는 더 이상 없었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내 철학이‘정치교수’, 혹은 ‘반정부 교수’에 대한 보호로 연장된 셈이다. 일석 선생님과 맺은 사제의 인연이 서울대 학부시절에서 비롯되었다면 대학원 시절에 맺은 인연을 지키려는 노력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개헌을 추진할 때 일석 선생님 만이 아니라 많은 대학 교수들이 개헌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고려대의 김성식 교수님도 그런 분이었다. 특히, 김 교수님은 삼선개헌 반대성명을 고려대에서 제일 먼저 발표하는 바람에 정부의 압력도 그만큼 클 수 밖에 없었다. 교수가 강단이 아닌 실물정치에 참여했으니 캠퍼스를 떠나라는 강요가 음으로, 양으로 대학에 통하던 시절이었다. 고려대는 김성식 교수님을 보호하지 못했고 김 교수님은 졸지에 해직교수가 되었다. 그런데 그 김 교수님은 내가 고려대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할 때 서양사를 수강한 은사님이었다. 자연스럽게 김 교수님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막상 사직을 하고나니 생계를 꾸리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비록 나는 동양사를 전공했지만 김성식 교수님의 학문적 성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직접 김 교수님의 강의를 수강한 내가 확신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 대학 사학과 교수님들을 설득했다. 사실 김성식 교수님의 해직에 앞서 나는 그 분의 수제자인 지동식 교수를 단국대에 초빙하기도 했다. 서양사 전공자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대학원생 시절의 스승인 김성식 교수님의 간곡한 부탁도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이같은 과정을 잘아는 사학과 교수님들은 당연히 김 교수님의 영입을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첫째는 서울대 출신 교수들이 당시 사학과의 주류였는데 고려대 출신 교수를 연이어 초빙하는 것에 대해 강한 반발을 했다. 두 번째는 정부의 서슬퍼런 압력이 있는데 정치교수로 낙인찍힌 교수를 포용했을 때 단국대와 장충식 총장이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염려였다. 나는 사학과 교수님들을 일일이 만나서 역사학자로서 김 교수님이 밝힌 소신으로 지금 고초를 당하는데 같은 역사학자들인 우리가 울타리를 쳐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역설했다. 거기에 만약 이번 일로 대학이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면 당연히 총장인 내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 그렇게 설득을 거듭하여 결국 김성식 교수님을 단국대에 안착시켰다. 김 교수님은 우리 대학에 출근하자마자 나를 찾아왔다.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고려대도 외면한 나를 단국대에서 불러주니 내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며 거듭 고마움을 밝혔다. 그러면서 “ 신의 수제자인 지동식 교수를 사학과에 영입해준 것이 첫 번째 신세인데 본인까지 신세를 져, 결국 평생 두 번의 은혜를 입었으니 장충식 총장이 베푼 신의를 꼭 단국대에서 갚겠다”고 약속을 했다. 일석 선생님도 그렇고, 김성식 교수님의 일도 있고 하니 자연스럽게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에 호출을 받기도 했고, 문교부(교육부 전신) 장관의 면담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또 다른 진보적 노동경제학자인 김윤환 교수 역시 해직이 되었는데 이 분을 우리 대학 상경대로 영입하자 관련 기관들의 눈초리는 더욱 싸늘해졌다. 특히 중앙정보부의 고압적 자세는 도를 넘어 ‘단국대 총장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식으로 확대되었다. 동시에 “김성식 교수, 김윤환 교수를 다시 내보내라.”고 압박을 했다. “교수가 연구를 위해서라면 이념적 좌우를 넘어 다양한 학문적 편력을 하는 것이고,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선생님으로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고 실천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나는 반문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말을 할 때는 총장 해임의 경우를 스스로 각오했기에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박정희 대통령이 나의 대학경영 철학과 성과에 대한 긍정적 이해가 있었기 때문인지 그 이상의 강제 조치는 없었다. 오히려 교육부 장관은 이러한 압력이 한숨 지난 뒤에 나를 만나 “고맙다.”고 하시면서“장 총장이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지만 단국대에 가서는 이희승 박사나 김성식 교수와 김윤환 교수가 정치 활동을 안 하고 조용히 계시니 다행”이라 고마워했다. 거기에 덧붙여“이희승 박사의 사표를 받고 김성식 교수와 김윤환 교수를 단국대에서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분들은 정부와 고려대를 향한 원망이 쌓이고 쌓여 정말 정치교수가 되어 극단적 비난을 퍼부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사의를 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힘들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정치상황이 이완된 시기가 왔다. 아쉽게도 김성식 교수님은 자신의 전직 대학으로 복귀를 했다. 평생을 단국대 학생을 위해 봉사하겠다던 눈물어린 약속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아니 물거품을 넘어서 고려대 출신으로 우리 사학과에 재직하던 제자 교수들도 함께 데리고 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제의 인연을 지키려 내 총장직을 담보로 걸고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또 최고의 대우와 연구비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기에 개인적으로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신의를 경우에 따라 헌신짝처럼 버리는 유형의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이 때 배웠으니 이 역시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일면이라 여겨야 할런지... 반면에 일석 선생님은 이후 우리 대학의 한한대사전 편찬 사업의 기틀을 잡아주시고, 동양학연구소의 학술활동, 연구업적 간행사업 등을 체계화하시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셨다. 나이어린 제자인 나에게도 늘 정중히 대해주셨다. 나는 그것이 대학의 권위를 지키려는 선생님의 배려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양학연구소 관련 업무를 상담할 때는 선생님을 오시라 하지 않고 내가 소장실을 찾아가 만났다. 그러면 선생님은 오히려 응당 총장실로 가야 한다면 노구를 이끌고 본관을 오시려 했다. 그러니 나 역시 방문 전화를 하고나면 부랴사랴 동양학연구소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다 보면 정작 사무실이 아니라 캠퍼스 한 복판인 범은정 앞, 학생회관 앞 계단(구 한남동캠퍼스)에서 만나기도 했으니 돌이켜보면 그 속에 숨은 선생님의 자애로움이 얼마나 컸던가. 이후 선생님은 나와의 약속대로 10년의 기간을 근무하시고 소장직을 떠났다. 더도 아닌, 덜도 아닌 1971년 1월부터 1981년 1월까지 임기를 마친 것이다. 나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약속과 후학들을 위한 배려를 앞세워 터럭만큼의 주저함이 없었다. 돌아가시면서도 평생 모은 정재를 후배 국어학자를 위한 학술기금으로 환원하신 것도 선생님다운 마무리였다. 존칭어로서의 ‘선생님’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그 뜻 그대로 삶을 일관하신 ‘선생님’이 바로 일석 이희승 선생님인 것이다. 가르침은 교단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삶과 생활 속에서도 부단히 그 진면목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교수의 권위와 이익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석 선생님의 삶을 통해 인연이란 만들어지는 것보다 그 인연을 가꾸는 노력과 신의가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는다.
2018.09.08 5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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