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전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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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감으로 분신을 외친 학생, 봉사하는 지성으로 키워내다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8.10.18
조회수 59,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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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한국 대학가의 봄은 이미 펄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대학생들의 잇단 분신자살, 박종철 군 물고문 치사 사건으로 불거진 민주화 요구 시위는 대학을 분노의 함성과 거센 시위의 열기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 열풍이 우리 대학에도 드세게 불어 닥쳤다. 4월 들어 학내 복지문제 해결을 주장하던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방향을 학내민주화, 학사부정 척결 등으로 틀었다. 수업거부, 중간고사 거부가 대세를 이루더니 급기야 대학 본관 총장실을 점거했다. 매일 2~3천여 명의 학생들이 농성과 시위를 펼치면서 학내는 사실상 교육과 연구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일련의 사태로 당시 총학생회의 퇴진 요구를 받던 김 모 부총장이 사직의사를 전 했지만 사태는 진정되지 않았다. 그 앞자리에 당시 총학생회장인 양종곤 군이 있었다. 양종곤 군은 매일 학내 농성, 혹은 학원 밖의 민주화 시위를 주도하고, 때론 단식과 대중연설로 수천 명의 학생들을 강의실 밖으로 끌어냈다. 개교 이래 최대의 학생 시위가 이뤄졌다.



4월 27일로 기억한다. 한남동 캠퍼스의 본관 앞에 있는 노천극장에 5천 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함성을 외쳐댔다. 학생들은 대학민주화로 민주사회 앞당기자고 외쳤다. 노천극장의 중심에 양종곤 학생회장이 서있었다. 어쩌면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이 날은 달랐다. 양 군은 자기 옆에 20리터 기름통을 두고 있었다. 그 안에는 신나가 가득했다. 멀리 한강 쪽으로 이른 노을이 다가오는 시간이었다. 양 군이 신나 통을 들어 자기 몸에 부었다. 여학생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학생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양종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김 부총장이 물러났지만 아직 교직에 있습니다. 학교를 떠나야 합니다. 진상규명도 철저하게 이뤄져야 합니다. 학내에 군부정권에 협조한 어용무능 교수들이 퇴진해야 합니다. 장충식 총장님이 학생들 앞에 서서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저는 오후 6시에 분신을 하겠습니다.”

노천극장이 본관 앞에 있기에 한 눈에 상황을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은 극도의 흥분에 휩싸였다. 학생뿐만이 아니라 본관에서 이를 지켜보던 교무위원들이나 관계자들도 경악하고 충격에 말을 하지 못했다. 신나에 흠뻑 젖은 양종곤 군은 라이터를 들고 있었다. 잠시 뒤 동료 학생이 라이터를 인수해 치켜들었다. 신나는 발화점이 낮아 약간의 불꽃으로도 큰 불이 날 수 있다. 너무 위험하고 무모한 장면이었지만 현실이었다. 5천 명의 학생들은 학생대로, 학교 관계자들은 그들대로 이성을 잃을 지경이었다. 이 날 시위 전에 총학생회장이 모종의 극단적 조치를 결심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학원 동향을 체크하는 경찰이나 안기부에서도 같은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한 강경책을 준비하리라 짐작은 했지만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 결론이 나오리라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총장으로서 몸에 불을 붙이는 자살방법을 5천 명의 학생 앞에서 공언하는 광경을 보고 있는 일 자체가 가슴이 아팠다. 저 젊은이가 얼마나 상황에 몰리고, 쫒기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저런 도박같은 일을 약속하는 걸까...


상황이 벌어지자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정보 당국이나 공안 당국, 심지어 문교부(지금 교육부 전신)나 소방서까지 현장 상황을 확인하고, 대책을 묻거나 조언하는 전화들이었다. 노천극장과 가까운 정문 근처에는 소방서의 화재진압용 차, 구급차가 대기했다. 그 안쪽으로 경찰 진압대도 잠복해있었다. 노천극장과 주변으로 십 수 명의 기자들도 취재를 하고 있었다. 공안 당국은 학생들을 자극할까 병력을 드러내지 않고 적절한 현장진압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걸려온 전화들은 한 결 같이 지금 총장이 현장에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시위대를 더 흥분시키고, 자칫 구타나 폭력 시위 같은 상황으로 확대시킬 가능성이 크다는 주장이었다. 심지어 저 휘발유통에 있는 액체는 물 같은 비인화물질이고 협박용일 뿐이라는 예단도 있었다. 학생들은 절규에 가까운 외침으로 장충식 총장은 노천극장으로 나오라 아우성이었다.

당시 내 집무실, 그러니까 총장실은 이미 총학생회의 활동대에게 점거를 당해 강남구 논현동에 있는 재단 소유 <단국빌딩>에 임시 사무실을 차려 근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위 시작과 함께 나는 현장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가고자 해서 본관 회의실에 있었다. 모든 소리와 장면들을 선명히 보고 들을 수 있었다. 6시가 다가올수록 상황은 더 소란스럽고 어지러워 졌다. 

정보 당국에서는 양종곤 총학생회장의 분신 자살 압박이 본인의 판단이라기 보다는 당시 시국을 주도하던 운동권 최상층부에서 내려온 지시라고 귀뜸했다. 그러니 총학생회가 분신으로 협박해도 절대로 ‘장충식 총장이 나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경찰이나 소방서 측도 총학생회장이 뿌린 것은 물일 수도 있으니 협박에 굴하지 말라고 거듭 강권했다. 심지어 문교부 장관실에서 조차 지금 단국대가 이 상황에서 양종곤 군의 요구를 들어주면 다른 대학도 교내 문제를 앞세워 학생들을 대대적인 시위로 유도할 빌미가 되니 결코 들어주지 말라는 얘기가 왔다. 시간이 임박하자 이것은 ‘장관님 지시’라는 압박이 더해졌다. 내 옆에 있는 교무위원들, 나를 걱정해주는 교직원들도 저런 위험한 현장에 나가서 봉변을 당하면 안된다며 총학생회장의 협박을 거부하자고 했다. 심지어 강경론자는 끝내 분신을 하면 그것은 극단적 운동권 학생의 죽음이지 학교는 할 만큼 했다는 주장까지 했다. 



나는 그 소음과 오가는 논의와 대책의 혼란 사이에서 시간이 갈수록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은 ‘저 젊은이를 그냥 놔둬서는 안 된다’는 소리였다. 나는 교육자이다. 총장이기 이전에 교수이고, 저런 젊은이도 내 학생이다. 시대와 이념, 현실과 이상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여러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가르치는 학생에게, 우리 대학의 젊은이에게 닥칠 비극이 있다면 기꺼이 교수인 내가 먼저 나서서 막아줘야 한다. 그것이 내 마음 속 울림이었다. 

신나를 뿌리고 연단에 주저앉아 오후 6시가 넘으면 분신하겠다는 저 어린 학생의 마음은 어떨까? 50일이 넘게 소리치고, 밥을 굶고, 때론 교직원과 멱살잡이를 하고, 심지어 기물을 파손하면서까지 저 젊은 친구가 얻으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정의감이라고 믿었다. 기성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바로 잡으려는 열망이 저 젊은이의 피를 끓게 했을 것이다. 저 학생은 입학 당시 최우등급의 성적을 거둬 특별장학금을 받은 학생이었다. 서울에서 8시간을 차로 달려야 갈 수 있는 먼 객지에서 홀어머니의 기대를 안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 가슴 속에 어찌 성공과 행복에 대한 열망이 없겠는가? 그 모든 것들을 읽었기에 결국 저 젊은이는 ‘차라리 죽겠다’고 나선 것은 아닌가. 

“구해야 한다. 흥분한 시위대에 의해 내가 돌을 맞고, 정부의 지시를 어겨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내가 나서서 풀어줘야 한다.” 내 마음 속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결론이었다. 그것은 교수로서의 본능이었다. 나는 관계자들 앞에서 내 입장을 천명했다. “저 학생을 외면할 수 없어요. 내가 외면하면 이번에는 양종곤 학생이 시위대의 외면을 감당 못하고 죽음을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가겠습니다. 혼자 나갈 테니 이해해주세요.”


본관에서 노천극장을 내려가는 계단의 양쪽에는 이미 수 천 명의 학생들이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취재하는 내외신 기자들도 많았다. 그리고 이마에 붉은 띠를 두르고 쇠파이프나 목봉을 들고 마스크를 쓴 채 시위 지도부를 호위하는 사수대 학생들도 많았다. 그들은 내 뒤를 따르던 교무위원들을 제지해 운동장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았다. 홀로 운동장에 섰고, 연단에 올랐다. 5 천명이 넘는 학생들의 이목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십여 분 남짓한 연설을 통해 “학생들의 요구를 애교심의 결과로 본다.”고 전제하면서 학생들에게 사과를 했다. 그리고 “학사관리에 오류가 있다면 총학생회가 지정하는 평교수들로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진상을 파악하고, 책임질 일이 있다면 총장인 내가 지겠다.”고 약속했다. 학생들은 내 말에 공감을 했다. 돌이 날아올 수도 있다던 주위의 걱정과 달리 우렁찬 박수로 내 고민과 대책을 공감해주었다. 

총학생회장인 양종곤 군도 분신 자살이 아닌 학생들의 박수 속에 신나와 라이터를 거두고 시위 해산을 선언할 수 있었다. 극한적으로 치닫던 학교와 총학생회의 갈등도 조금씩 진정했다. 사태가 진정 국면으로 전환되었지만 양종곤 군은 총학생회장으로서 그동안 주도해온 일련의 일들에 매듭을 지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총학생회 지도부는 학생처의 집기를 파손했다. 거기에 총장실, 총무처까지 더해 피해액이 8천 만 원에 이르렀다. 공안당국은 이를 부각시켜 나에게 양종곤 군의 제적시켜 학원 밖으로 추방시키라 강권했다. 이를 거부하기는 했지만 대낮에 집단적으로 학교 기물을 파손한 일을 모른 척 할 수도 없었다. 책임자인 양종곤 군은 이미 집시법 위반, 기물파손죄로 수배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나는 자수를 권유했다. 하지만 양종곤 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이때 양종곤 군을 자수시킨 뒤 그의 미래를 함께 고민해야 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다. 그가 단국대 학생을 대표하는 총학생회장으로서 보여준 리더십과 정의감을 긍정적으로 승화시키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4,5월이 지나면서 총학생회는 학내문제에서 급격하게 사회민주화로 역량을 전환할 수 밖에 없었다. 6월 항쟁이라는 거대한 민주화 동력이 불어 닥쳤기 때문이다. 양종곤 군은 6월 항쟁에 동참하는 와중에 결국 체포되었다. 공안당국은 양종곤 군에 대한 수배 조치 이후 그를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그의 동선을 파악한 사복 형사들은 6월 항쟁 기간 중 학교에서 기숙하다 시위를 위해 빠져나가던 양종곤 군 일행을 한남동 캠퍼스 후문 근처에서 덮쳐 체포에 성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나는 바로 우리 재단의 고문변호사를 선임해 양종곤의 법률대리인을 맡겼다. ‘양종곤 군 제적’이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내가 나서서 그의 면학을 도울 테니 공부할 기회를 유지케 해 달라 설득했다. 법정에서 같은 취지의 호소를 했다. 양종곤 군은 재판을 통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처벌을 받고 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다. 나는 비서를 통해 그를 만나서 내 뜻을 전하고 운동권보다는 학문의 길에 들어와 장기적으로 우리 사회를 개혁하는 진로에 대해 생각해보라 권유했다. 선 듯 자신에게는 ‘청산의 대상’이었던 나의 권유를 받기가 정서적으로 힘들어서인지 취업을 하기도 했다. 나는 양종곤 군의 경제 형편이 어렵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게 방을 임대할 보증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내 의지의 일단을 일깨우고 싶었다.

그 당시에 양종곤 군은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사귀던 동료 여학생이 있었다. 둘은 동료에서 연인으로 발전해 결혼을 하고 싶어 했다. 그를 만나던 내 비서는 이같은 사실을 알리면서 처가될 집에서 양종곤 군의 집안 형편이 어렵고, 양종곤 군 본인의 미래도 불투명해 결혼을 강력히 반대한다고 보고했다. 나는 두 젊은이의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 딸들도 그렇게 결혼시켰다. 내 딸이 사랑하는 남자라면 그 믿음을 존중한다는 것이 내 소신이다. 그래서 내가 나서기로 결심했다. “그래 아들을 하나 더 두는 셈으로 치자.” 그렇게 결심했다. 나는 경기도 용인으로 달려가 신부 측 부모를 만났다. 부모님들은 매우 강경했다. 험한 소리도 들었지만 이를 삭히면서 그 분들에게 약속했다. “내가 양종곤 군을 유학 보내고자 합니다. 물론 따님도 결혼시켜 같이 미국에서 공부토록 하겠습니다. 너무 심려마시고 양종곤 군의 미래를 믿어주세요.”

결국 결혼 승낙을 받아 1989년 봄에 혼례를 치뤘다. 물론 나는 주례를 자청해 두 사람을 축복했다. 양 군은 직장 생활과 결혼 과정에서 내가 권유하던 유학과 학문에 대한 결심을 굳혔다. 1990년에 두 사람은 대망의 꿈을 함께 나누며 오레곤 주에 있는 서던 오레곤 대학(Southern Oregon University)에 입학했다. 이런 과정에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은 총장을 쫓아내려한 운동권 학생을 결혼시키고, 유학 보내는 내 행동을 비판하기도 했다. 퇴학을 시켜도 분이 덜 풀릴 정도로 대학과 교직원들에게 위해를 했던 학생을 키우는 게 너무 온정적이라는 지적이었다. 내 생각은 달랐다. 그는 총학생회 회장으로서 학생들을 대표해 나를 비판한 것이다. 그의 주장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 것은 없다. 인재를 키우는 것은 내 취향에 부합하는 젊은이를 선호하는 일이 아니라 정의감, 희생정신, 잠재력을 고려해 시작해야 한다. 그것이 내 생각이었고, 양종곤 군은 그런 고려 사항에 적합했다. 

양종곤 군에게 지원하는 유학비는 전적으로 나의 ‘사재’였다. 집에 줄 생활비를 아끼고, 내 쓸돈을 아껴가며 학비를 조달했다. 나는 대학의 어떤 지원도 거기에 추가하지 않았다. 학내에 그를 제적시켜도 아깝지 않다는 여론이 많은데 교비를 학비지원에 쓰면 오히려 양종곤 군이 더 욕을 먹을 것 같고, 그의 미래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양종곤 군은 석사 과정을 잘 마치고 박사 과정에 입학했다. 나는 양종곤 군을 좋은 학자로 길러줄 훌륭한 경영학교수를 물색했다. 네브라스카 주립대의 이상문 교수를 양종곤 군에게 추천했다. 이상문 교수는 서울대를 나와 조지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의 대표적 경영학회인 <Decision Science>의 회장을 장기간 역임했다. 한국인으로서는 유례를 찾기 힘들게 미국 경영학계에서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네브라스카 주립대에서 석좌교수를 거쳐 정년퇴직한 의사결정, 글로벌 전략, 혁신경영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다.

양 군은 기꺼이 내 조언을 받아들였다. 다행히 이상문 박사는 양종곤 군을 기꺼이 제자로 받아주었다. 양 군은 정들었던 오레곤을 떠나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인 네브라스카로 떠났다. 그 때, 나로서는 정말 힘든 시기가 닥쳤다. 나와 김영삼 정부와의 불화로 내가 총장의 직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나야 야인이 되면 그만이었지만 당장 급여를 받지 못하니 양종곤 군 학비를 지원할 수 없게 된 것이 큰일이었다. 집에 가져다 줄 월급이 없으니 유학비 지원은 여력이 더 없어졌다. 낯선 땅에서 그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아내와 아들까지 건사하면서. 나는 정권의 압박에 힘겨웠지만 양종곤 군의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더 힘들어지기도 했다. 결국 이상문 박사에게 나의 진심을 전달했다. 이 박사는 다시 한번 큰 호의를 베풀어주었다. 박사과정에 드는 어마어마한 학비를 상당 부분 해결해준 것이다. 그래도 가족의 생활비는 따로 풀 방법이 없었다. 양종곤 군은 결국 가족을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홀로 유학을 마치기로 했다. 

모자른 학비도 벌고, 생활비도 벌면서 연구를 계속해야 하는 고달픈 시간이었다. 거기에 가족을 떠나보내고 감당해야 했던 깊고도 큰 고독...나 역시 홀로 미국 유학을 했기에 그 막막함을 공감할 수 있었지만 어린 자식을 양육하다가 떨어져 살아야 하는 경우는 그 정도가 더 심했을 것이다. 고된 개인적 시련과 높은 벽을 넘어야 하는 학문적 단련을 거치면서 양종곤 군은 ‘운동권 학생’에서 ‘경영학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그가 전해오는 편지나 선후배들의 전언을 통해 양종곤 군이 양종곤 박사로 잘 커나가고 있음을 간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내 기쁨이기도 했다.

1997년에 그는 정말 어렵고 힘든 과정과 논문 심사를 무사히 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훌륭한 지도 교수 덕분에 미국에 정착할 수도 있었지만 귀국을 해 좋은 직장에 안착하였다. 국내 경영컨설팅 회사를 거쳐 마지막으로는 세계적 글로벌 경영컨설팅 회사인 IBM BCS에서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 경영자문을 하며 전공 실무경험을 쌓았다. 주변에서 들으면 기업체 특강에서도 좋은 평을 받아 초청 강연이 많다고 했다. 나는 양종곤 박사를 만나자 했다. 그리고 그에게 마지막 미션을 주었다. 

“양 박사 이제 모교에서 후배들을 지도해야 겠어.”

양 박사는 부담스러웠을 게다. 모교에는 여전히 그에게 부정적 시작을 갖고 있는 선배들과 교수님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또 그로 인해 상처를 받은 이들이 날선 비난을 오래오래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도 그는 지원을 해야 했다. 그것은 또 다른 사명이니까. 후배이자 제자인 우리 대학 학생과 자신의 모교를 위해 감내해야 할 빚이니까. 다행히도 그는 공채 과정을 잘 통과해 모교의 교수로 발령받았다. 비단 옷을 입고 고향에 돌아온 셈이지만 나는 그가 학생운동을 통해 짊어진 숙제를 기억해 달라 말하고 싶다. 총학생회장 양종곤 군에서 양종곤 교수로 걸어갈 그의 삶 속에서 후배들을 위해 더 큰 일을 해달라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선배가 되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