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전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게시판 뷰
게시판 뷰페이지
시대를 초월하는 '참 스승'의 길
작성자 법인 장충식
날짜 2018.09.07 (최종수정 : 2018.09.11)
조회수 4,448
썸네일 /thumbnail.42856.jpg

교수는 연구와 교육이 존재 이유이다. 그러나 시대와 갈등을 겪고, 국가권력의 불의에 항의하다 핍박을 받기도 한다. 가르치는 일이 강단과 연구실에서 이뤄지기도 하지만 지식인으로서 비판적 지성을 실천하는 일도 ‘선생님의 또 다른 길’일 수 있다. 훌륭한 학덕을 갖고 계신 선생님이 정권과 타협하지 않을 때 생기는 불이익은 비단 선생님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 대학의 총장으로서 나 역시 교수들의 참여정신과 실천으로 난처한 경우를 직면하기도 했다. 이런 분들 가운데 지금까지 나의 지표로 기억 속에 살아 숨쉬는 분이 일석 이희승 선생님이시다.


한국 최고의 국어학자이자 국학자인 일석 선생님은 박정희 정권과 타협없는 불화를 겪었다. 하긴 일석 선생님이 박정희 정권과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선생님은 이미 일제 강점기에 한글연구를 통해 민족정신을 지키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수감을 당했던 강골이기도 했다. 1969년은 대통령의 연임을 허용하자는 삼선개헌문제로 나라가 큰 진통을 겪을 때 일석 선생님은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에 윤보선, 함석헌, 장준하, 김대중, 김영삼 등 정치인, 사상가 등과 함께 학계를 대표해 참여해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물론 이 반대운동의 여파로 일석 선생님은 성균관대 대학원장에서 물러나 야인으로 있었다. 나는 일석 선생님을 찾아가 우리 대학의 동양학연구소 소장직을 맡아 달라 설득했다. 물론 선생님은 “여러 형편이 여의치 않은데 내가 단국대에 가면 장충식 총장이 난처해질 수 있다”면서 소장직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나는 “동양학연구소를 단국대의 간판 연구소로 키우고 싶은데 선생님의 학덕이 없이는 안된다”고 간곡히 부탁드렸다. 오히려 “이왕 소장직을 맡으시는 것만 아니라 동양학연구소의 기틀을 잡으려면 10년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며 “10년 간 저와 함께 동양학연구소를 키워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젊은 총장의 패기가 맘에 드셨는지, 아니면 삼고초려를 마다않는 내 열의에 공감을 하셨는지, 선생님은 1971년에 1월에 동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셨다. 선생님이 고희를 눈앞에 둔 시기였다. 

일석 선생님을 내가 모셔온다고 할 때 ‘남산’으로 불리던 정보기관의 관계자가 나에게 걱정하는 말투로 이렇게 충고하기도 했다. “재야인사로 대통령의 앞길에 사사건건 반대를 일삼는 양반을 단국대로 모셨다가 봉변을 당하면 어쩌시려 하십니까. 그것도 이미 정년퇴임을 한 나이든 양반을 굳이 소장직까지 임명하면서 말이죠...” 걱정의 말투에는 “잘 알아서 하라”는 경고의 냄새가 짙었다. 그러든 말든 일석 선생님은 정치에 대한 소신에 앞서 학식으로나 업적으로나 석학(碩學)이고 원로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선생님의 지행일치, 강직과 겸손이 조화를 이룬 품성도 모자름이 없었다. 



부임하시고 두 해가 지난 1973년 가을이었다. 당시 사회상황은 유신헌법이 발효되어 정치적으로 얼음처럼 냉랭한 상황이었다. 겨울이 막 시작되던 12월의 중순 경이었다. 시인 고은 씨가 이희승 소장님을 모시고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고은 씨는 “유신헌법에 대한 국민들의 반대가 심해지고 있는데 원로들의 참여가 절실하다. 일석 선생님이 삼선개헌에도 반대하는 성명서에 참여하셨으니 이번 유신헌법 철폐 운동에도 기꺼이 뜻을 같이 하시리라 믿고 뵈었는데 선생님께서 단국대와 장충식 총장님이 피해를 볼 수 있으니 미리 뵙고 거취를 알리시겠다며 이리 오셨다.”고 경위를 설명했다. 개헌 촉구 서명을 받으러 왔다가 일석 선생님이 사표에 서명을 하는 걸 먼저 보게 된 고은 시인도 난처한 표정이었다. 정작 일석 선생님은 평소의 온화한 표정과 말투에서 조금도 흔들림 없이 동향학연구소 소장직 사표를 제출하였다. 

“박정희 정권의 자세를 보건데 제가 유신헌법을 고치라 요구하는 성명에 동참하면 나야 그렇다 치고, 장 총장님과 단국대도 불의의 피해를 볼 겁니다. 내가 앞으로도 내 소신을 바꾸지 않을 텐데 차라리 학교를 떠나야 총장과 대학이 편할 것입니다.” 

사표를 건네시면서도 옅은 웃음을 띠셨지만 단국대에 누를 미치지 않겠다는 의지는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 뜻을 알기에 더욱 더 나 역시 물러날 수 없었다. “선생님께서 서명하신 건 선생님의 소신이니까 그건 그거대로 됐습니다. 하지만 왜 동양학연구소장직 사표를 내십니까. 소장직은 정치나 유신헌법과 관계없이 저하고 하신 약속입니다. 저하고 처음 약속하시기를 동양학연구소에서 10년간 근무하시기로 하셨습니다. 한한대사전 편찬이 이제 시작인데 이 사전의 완간 책임을 다 하시고 떠나셔야 합니다.” 나 역시 웃으며 선생님의 사표를 반려했습니다. 같은 취지의 말이 몇 번 반복되었지만 나는 끝내 선생님의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 일석 선생님께서는 결국 허허 웃으셨다. “장 총장 고집도 대단하시다”라면서 사표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가셨다. 나라고 대학 경영인으로서 왜 여러 생각이 생기지 않았을 까만은 당시 내가 이렇게 즉각적인 사표 거부를 한 동기는 나라도 선생님을 지켜야 한다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해득실을 떠나 내 은사님, 대학의 선생님을 지키는 것이 총장의 임무라는 믿음이 본능처럼 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이희승 선생님과 고은 시인이 돌아간 뒤 두 시간 쯤 지났을까. 모 장관실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이희승 박사님이 유신개헌 서명에 앞장섰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요. 동양학연구소 소장 사표를 장 총장님이 책임지고 처리 하세요.” 마치 상사가 지시를 하는 명령조의 말투였다. 아무리 장관이라 해도, 대통령의 권력에 직결되는 문제라 해도 이런 지시를 받고 “네, 네”할 수는 없었다. 나는 장관에게 바로 응답했다. “저는 이희승 선생님의 사표를 수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 진심을 담아 설명했다. “일석 선생님은 제 은사님이십니다. 내가 서울대 학생시절에 선생님한테서 교양 국어를 1년간 배웠습니다. 제자가 은사님께 어떻게 사표를 운운합니까. 대학에서 선생님을 그리 모실 수는 없습니다. 만약 사표를 내야 한다면 제가 총장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가능합니다만 저는 총장으로서 내 선생님의 사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제의 도리이지만 결국 장관의 지시를 거부한 셈이 되었다. 대학을 관장하는 장관의 지시를 거부하였으니 조만간에 나의 총장 승인 취소 통지가 오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총장직 사표제출에 대한 움직임이나 일석 선생님을 대학 바깥으로 나가게 하려는 압력도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유신헌법의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적 서명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기도 했고, 정권은 ‘긴급조치 선포’라는 강경책을 실행해 치열한 대치국면에 접어들었다. 다행히도 일석 선생님에 대한 정부 차원의 비토는 더 이상 없었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내 철학이‘정치교수’, 혹은 ‘반정부 교수’에 대한 보호로 연장된 셈이다. 일석 선생님과 맺은 사제의 인연이 서울대 학부시절에서 비롯되었다면 대학원 시절에 맺은 인연을 지키려는 노력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앞서 얘기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삼선개헌을 추진할 때 일석 선생님 만이 아니라 많은 대학 교수들이 개헌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고려대의 김성식 교수님도 그런 분이었다. 특히, 김 교수님은 삼선개헌 반대성명을 고려대에서 제일 먼저 발표하는 바람에 정부의 압력도 그만큼 클 수 밖에 없었다. 교수가 강단이 아닌 실물정치에 참여했으니 캠퍼스를 떠나라는 강요가 음으로, 양으로 대학에 통하던 시절이었다. 고려대는 김성식 교수님을 보호하지 못했고 김 교수님은 졸지에 해직교수가 되었다. 

그런데 그 김 교수님은 내가 고려대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할 때 서양사를 수강한 은사님이었다. 자연스럽게 김 교수님의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막상 사직을 하고나니 생계를 꾸리기가 힘들다는 것이었다. 비록 나는 동양사를 전공했지만 김성식 교수님의 학문적 성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직접 김 교수님의 강의를 수강한 내가 확신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우리 대학 사학과 교수님들을 설득했다. 사실 김성식 교수님의 해직에 앞서 나는 그 분의 수제자인 지동식 교수를 단국대에 초빙하기도 했다. 서양사 전공자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대학원생 시절의 스승인 김성식 교수님의 간곡한 부탁도 간접적 원인이 되었다. 이같은 과정을 잘아는 사학과 교수님들은 당연히 김 교수님의 영입을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첫째는 서울대 출신 교수들이 당시 사학과의 주류였는데 고려대 출신 교수를 연이어 초빙하는 것에 대해 강한 반발을 했다. 두 번째는 정부의 서슬퍼런 압력이 있는데 정치교수로 낙인찍힌 교수를 포용했을 때 단국대와 장충식 총장이 해를 입을 수 있다는 염려였다. 

나는 사학과 교수님들을 일일이 만나서 역사학자로서 김 교수님이 밝힌 소신으로 지금 고초를 당하는데 같은 역사학자들인 우리가 울타리를 쳐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역설했다. 거기에 만약 이번 일로 대학이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면 당연히 총장인 내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각오도 밝혔다. 그렇게 설득을 거듭하여 결국 김성식 교수님을 단국대에 안착시켰다. 김 교수님은 우리 대학에 출근하자마자 나를 찾아왔다.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고려대도 외면한 나를 단국대에서 불러주니 내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을 것”이라며 거듭 고마움을 밝혔다. 그러면서 “ 신의 수제자인 지동식 교수를 사학과에 영입해준 것이 첫 번째 신세인데 본인까지 신세를 져, 결국 평생 두 번의 은혜를 입었으니 장충식 총장이 베푼 신의를 꼭 단국대에서 갚겠다”고 약속을 했다. 

일석 선생님도 그렇고, 김성식 교수님의 일도 있고 하니 자연스럽게 중앙정보부(국정원 전신)에 호출을 받기도 했고, 문교부(교육부 전신) 장관의 면담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또 다른 진보적 노동경제학자인 김윤환 교수 역시 해직이 되었는데 이 분을 우리 대학 상경대로 영입하자 관련 기관들의 눈초리는 더욱 싸늘해졌다. 특히 중앙정보부의 고압적 자세는 도를 넘어 ‘단국대 총장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식으로 확대되었다. 동시에 “김성식 교수, 김윤환 교수를 다시 내보내라.”고 압박을 했다.

“교수가 연구를 위해서라면 이념적 좌우를 넘어 다양한 학문적 편력을 하는 것이고, 학생들을 가르치다보면 선생님으로서 자신의 소신을 피력하고 실천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나는 반문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말을 할 때는 총장 해임의 경우를 스스로 각오했기에 할 수 있었다. 다행히 박정희 대통령이 나의 대학경영 철학과 성과에 대한 긍정적 이해가 있었기 때문인지 그 이상의 강제 조치는  없었다. 오히려 교육부 장관은 이러한 압력이 한숨 지난 뒤에  나를 만나 “고맙다.”고 하시면서“장 총장이 어떻게 설득했는지 모르지만 단국대에 가서는 이희승 박사나 김성식 교수와 김윤환 교수가 정치 활동을 안 하고 조용히 계시니 다행”이라 고마워했다. 거기에 덧붙여“이희승 박사의 사표를 받고 김성식 교수와 김윤환 교수를 단국대에서 받아주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분들은 정부와 고려대를 향한 원망이 쌓이고 쌓여 정말 정치교수가 되어 극단적 비난을 퍼부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나에게 사의를 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힘들게 시간이 흐르고 어느 정도 정치상황이 이완된 시기가 왔다. 아쉽게도 김성식 교수님은 자신의 전직 대학으로 복귀를 했다. 평생을 단국대 학생을 위해 봉사하겠다던 눈물어린 약속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아니 물거품을 넘어서 고려대 출신으로 우리 사학과에 재직하던 제자 교수들도 함께 데리고 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사제의 인연을 지키려 내 총장직을 담보로 걸고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고, 또 최고의 대우와 연구비 지원까지 아끼지 않았기에 개인적으로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신의를 경우에 따라 헌신짝처럼 버리는 유형의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나는 이 때 배웠으니 이 역시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일면이라 여겨야 할런지...


반면에 일석 선생님은 이후 우리 대학의 한한대사전 편찬 사업의 기틀을 잡아주시고, 동양학연구소의 학술활동, 연구업적 간행사업 등을 체계화하시는 등 왕성한 활동을 펼치셨다. 나이어린 제자인 나에게도 늘 정중히 대해주셨다. 나는 그것이 대학의 권위를 지키려는 선생님의 배려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동양학연구소 관련 업무를 상담할 때는 선생님을 오시라 하지 않고 내가 소장실을 찾아가 만났다. 그러면 선생님은 오히려 응당 총장실로 가야 한다면 노구를 이끌고 본관을 오시려 했다. 그러니 나 역시 방문 전화를 하고나면 부랴사랴 동양학연구소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그러다 보면 정작 사무실이 아니라 캠퍼스 한 복판인 범은정 앞, 학생회관 앞 계단(구 한남동캠퍼스)에서 만나기도 했으니 돌이켜보면 그 속에 숨은 선생님의 자애로움이 얼마나 컸던가.

이후 선생님은 나와의 약속대로 10년의 기간을 근무하시고 소장직을 떠났다. 더도 아닌, 덜도 아닌 1971년 1월부터 1981년 1월까지 임기를 마친 것이다. 나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약속과 후학들을 위한 배려를 앞세워 터럭만큼의 주저함이 없었다. 돌아가시면서도 평생 모은 정재를 후배 국어학자를 위한 학술기금으로 환원하신 것도 선생님다운 마무리였다. 존칭어로서의 ‘선생님’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그 뜻 그대로 삶을 일관하신 ‘선생님’이 바로 일석 이희승 선생님인 것이다.


가르침은 교단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삶과 생활 속에서도 부단히 그 진면목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우리는 교수의 권위와 이익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일석 선생님의 삶을 통해 인연이란 만들어지는 것보다 그 인연을 가꾸는 노력과 신의가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