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뷰
게시판 뷰페이지
한시준 초빙교수“임정 100돌 참뜻은 군주국에서 민주공화국 세운 거죠”한겨레 인터뷰
분류 피플
작성자 홍보팀 가지혜
날짜 2019.03.21
조회수 3,815
썸네일 /thumbnail.48790.jpg

한겨레신문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사 및 임시정부 연구의 권위자인 한시준 초빙교수를 인터뷰했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는 명예교수로 소개되었음) 다음은 게재 전문(한겨레 2019.3.21.일자 인물19면) [글 강성만 선임기자]


△ 한시준 초빙교수

“다른 사람들은 안 하려고 하고 난 좀 어리숙해서… 사실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는 데 역사학자로서 그냥 있을 수 없었죠.”

지난달 단국대 사학과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한 한시준 단국대 명예교수 말이다. 그는 2008년 뜻하지 않게 ‘대정부 투쟁’ 앞자리에 섰다. 무기는 글과 말이었다. 이 때문에 당시 맡고 있던 단국대 인문대학장과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도 스스로 내려놓았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내내 정부 지원 연구비도 받지 못했단다. 불이익을 감수하고 그가 맞선 것은 1948년 8월 15일을 건국기념일로 지정하려는 시도였다. 다행히 싸움은 승리로 끝났다. “건국일 제정이 무산된 것은 <한겨레> 등 진보언론 역할이 컸죠. 고맙게 생각해요.” 그를 18일 경기 용인시 단국대 죽전캠퍼스에서 만났다.

그는 국내 사학계의 대표적인 임시정부 연구자다. 임정 외무총장을 지낸 조소앙 연구로 석사를, 한국 광복군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을 책으로 낸 <한국 광복군 연구>(1993)는 월봉저작상을 받았다. 김준엽·장준하 등 광복군 출신의 회고에 기댔던 기존 연구와 달리 중국 쪽 원자료를 발굴해 광복군 조직과 인원, 미국 오에스에스(OSS) 첩보부대와 함께한 작전의 실체 등을 밝혀 광복군 연구를 한 차원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석 달 뒤인 2008년 5월 총리실 산하에 ‘대한민국 건국 60년 기념사업위원회’를 만들었다. 그는 바로 건국론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글을 써 신문사에 보내기 시작했다. 건국론 비판서 <역사농단-1948년 건국론과 건국절>(역사공간·2017)을 펴내기도 했다.

건국론이 고개를 숙였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다. 건국론의 가장 큰 문제는? “1948년 제헌헌법 속기록에도 건국 이야기가 없어요. 뉴라이트가 건국 대통령이라고 추앙하는 이승만조차 건국이란 말을 쓴 적이 없어요. 이승만은 제헌헌법에 전문을 두고 거기에 임정을 계승한다는 구절을 넣자고 했죠. 건국이라고 하면 미국이 나라를 세워준 꼴이 된다는 게 그의 논리였죠. 그렇게 되면 1919년 출발한 대한민국이 쌓아온 민주주의 역사가 묻힌다고요.”

그가 보기에 건국절 주장은 ‘역사농단’이다. 건국론 배경에는 일제 협력자를 건국 공훈자로 포장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시절만 해도 친일파들이 권력을 다 장악했어요. 그런데 노무현 정부 때 처음 제동이 걸렸어요. 그때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진상 조사도 했잖아요. (친일파들이) 처음으로 당했죠. 노무현 정부의 이런 움직임에 대항해 나온 게 뉴라이트입니다. 일제 협력자가 건국 공로훈장을 받으려면 1919년 만든 임정을 인정해선 안 되겠죠. 그래서 온갖 논리를 써서 임정을 부정하려고 했죠.”

내달 11일은 임정 수립 100년이다. 1990년부터 작년까지는 4월 13일이 임정 수립 기념일이었다. 기념일 정정도 그의 문제 제기로 시작됐다. “기념일 제정 때 참고한 자료에 오류가 있었다며 2006년부터 고쳐야 한다고 했죠. 너무 뻔한 건데 한번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가 쉽지 않더군요.”

독립운동에서 임정의 역할을 묻자 그는 “임정은 우리 민족 전체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받았다. “지금 우리는 국민주권 시대, 민주 공화제에서 살고 있잖아요. 그 시작이 임정이죠.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이래 여러 나라가 들어서고 망했지만 반만년 동안 대부분은 군주 주권이었어요. 임정 때 완전히 바뀐 거죠.” 임정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업적은 카이로 회담(1943년 11월)에서 한국 독립 결의를 끌어낸 점이라고 했다. 미·영·중은 이 회담에서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독립시킨다고 결의했다. “미국과 영국은 카이로 회담 전에 한국을 국제공동관리한다고 뜻을 모았어요. 이 소식을 듣고 김구 조소앙 등 임정 요인들이 장제스를 만나 설득했어요. 이런 노력 끝에 한국 독립 결의가 나왔죠.” 그는 1998년 대만 국민당사를 찾아 임정 요인들과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 넉 달 전에 나눈 대화록 ‘총재 접견 한국 영수 담화 요기’를 찾아내기도 했다.

△ 한시준 교수가 대만에서 찾아낸 중국 국민당 문건 '총재 접견 한국 영수 담화 요기'의 한 부분.
    카이로 회담을 넉달 앞두고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이 장제스를 만나 나눈 대화를 기록 했다.

그는 2011년에 15년 동안 해온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적 심사위원을 자진해서 사퇴했다. “박승춘 전 보훈처장이 취임하고 나서 그만뒀죠. 공적 심사엔 전문 지식이 많이 필요해요. 그런데 박 처장이 심사위원을 뉴라이트 계열로 바꾸더군요. 심지어 퇴직 관료도 들어왔죠.”

김원봉 같은 독립운동 거목도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독립운동 자체만으로 평가했으면 해요. 북 정권에 참여했다고 빼면 그 사람들의 역할이나 활동은 독립운동에서 제외됩니다. 독립운동이 한 게 100이라면 60이나 70으로 줄어들죠. 45년 8월 일본 패망 때까지 독립운동을 한 분들은 이후 행적과 상관없이 서훈해야죠.”

정부가 추진하는 임정 100년 기념사업을 두고는 이렇게 말했다. “기념사업은 ‘100년을 왜 기념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해요. 그런데 유관순 열사 서훈 조정이나 음악회·전시회 같은 일에 힘을 더 쏟는 것 같아 아쉬워요. 임정으로 반만년 군주제에서 국민주권, 민주공화제로 바뀌었잖아요. 이런 점이 강조돼야죠.”

2008년 ‘건국기념일’ 저지에 앞장 , “사실 아니니 역사학자로서 당연”
보수정권 10년 연구비 지원 ‘중단’ , 조소앙 선생 조카와 함께 군 복무
삼균사상 배우며 독립운동사 관심 , 원사료 기반 ‘광복군 연구’ 큰 업적

그는 1975년 단국대 사학과에 들어가 석·박사 학위도 모교에서 받았다.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은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간 군대에서 키웠단다. “조소앙의 아우인 조시원(독립장 서훈) 선생 아들과 군 생활을 같이했어요. 그 친구가 책 <조소앙 사상>(홍선희 작·1975)을 읽어보라고 주더군요. 흥미를 느껴 열심히 봤어요. 제대하고는 조시원 선생을 직접 찾아뵙고 이야기를 들었어요. 학부 때 1년6개월 정도 찾아갔죠. 나중엔 조 선생이 저에게 ‘한 동지’라고 하시더군요. 사모님은 싫어하셨어요. 제가 돌아가면 조 선생님이 앓으신다고요. 소앙 선생 자제분(조인제·독립장 서훈) 집에도 1년 이상 다니며 이야기도 듣고 보관하고 있던 자료도 필사했죠. 당시는 얼마나 귀중한지도 모르고 온종일 베꼈어요.”

그가 사학과를 다닐 때만 해도 한국사는 개항기까지만 가르쳤단다. 그러니 독립운동사 과목이 따로 있을 리 없다. 지금은 어떨까. “대학 사학과에 독립운동사나 현대사 강의가 들어온 게 90년대 중반 정도 됩니다. 지금도 없는 대학이 있어요.” 갈수록 독립운동 전공자들이 줄어들고 있다면서 덧붙였다. “서울대나 경북대, 부산대 같은 국립대에 독립운동사를 전공한 정규직 교수가 없어요.”

‘1961년 군사쿠데타, 1965년 한-일 협정, 1987년 독립기념관 개관’. 국내 독립운동사 연구에 영향을 끼친 ‘사건’들이라고 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에 나온 독립운동사 연구 저술이 10권이 안 됩니다. 이승만이 물러나면서 독립운동사 연구가 시작되었죠. 한-일 협정으로 받은 돈을 가지고 국사편찬위에서 일본 외무성 자료를 모았어요. 일본 강점기에 일경이나 밀정이 보고한 자료가 일 외무성에 많았거든요. 또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뒤 독립유공자 포상을 시작했어요. 그때 원호처(국가보훈처 전신)에서 독립운동가 공적 자료집을 만들기 시작했죠. 독립기념관 개관도 독립운동 연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어요.”

임정 연구를 위해선 뭉텅이로 사라진 자료를 찾는 게 시급하다는 말도 했다. “임정 자료가 두 번에 걸쳐 사라졌어요. 윤봉길 의사 의거 당일(1932년 4월 29일) 일경이 2시간도 안 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있던 임정 청사에 들이닥쳤어요. 이때 자료를 다 가져갔어요. 임정 요인들은 몸만 빠져나갔죠. 1932년 말에 재일 상하이 영사관이 <조선민족운동연감>을 냅니다. 거기에 청사에서 가져간 압수 문건 목록 980점이 나와요. 그 뒤에는 임정이 문서를 잘 챙겼어요. 해방 뒤 가죽가방 13개에 자료를 잘 담아서 귀국했어요. 그런데 한국전쟁이 나면서 당시 한국독립당 총무과장 조남직이 성북동 집에 보관하던 임정 자료가 송두리째 사라졌어요. 지금 임정 자료는 조소앙 선생 후손이 가지고 있는 게 유일하죠.” 그는 사라진 자료를 20년 이상 추적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파악하고 있다면서 자료 환수에 정부가 적극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했다.

“임정서 이승만은 권한만 누리려 해… 건국론 주장에는 일제 협력자를 건국 공훈자 포장하려는 의도 있어”
“국립대에 독립운동사 전공 교수 없어”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전까지만 해도 독립운동 지도기관으로서 존재감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극심한 내분에 시달렸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가장 큰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어요. 그는 상해에 오지 않고 미국에서 대통령 노릇을 했죠. 의무는 안 하고 권한만 행사하려고 했죠. 상해에 오고 안 오는 문제로 이동휘 국무총리와 감정싸움을 벌여 막말이 오가고 나중엔 ‘돌대가리’라는 말까지 나왔어요. 이승만은 미국에 가서도 임정 정부 조직도 않고 방치했죠. 대통령 자리는 내놓지 않고요. 이승만 탄핵을 두고도 임정에서 분란이 4~5년 이어졌어요. 이승만 탄핵 뒤 그 후유증을 김구 선생이 수습했어요.”

그렇다면 왜 민족진영은 1919년 이승만을 최고 지도자로 추대했을까? “이승만은 자기선전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승만이 1910년 프린스턴대에서 박사 학위를 했을 때 윌슨이 이 대학 총장이었어요. 1919년에는 윌슨이 미국 대통령이었잖아요. 이승만은 자신이 윌슨 대통령 수제자라고 과장해 국내에 선전했어요. 당시 한국 독립을 위해 열강에 매달려야 했던 터라 이승만 스스로 윌슨과 막역한 사이라고 하니 그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죠. 이승만은 하버드대(석사 과정)를 들어갈 때도 자신이 태종 장남 양녕대군 16대손이라는 걸 내세워 입학 허가를 받았어요.”

‘남들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행동하지 않은 것을 가능하다고 믿고 행동하기’. 그가 생각하는 ‘독립정신’이다. “다른 사람들은 일본은 바위 같은 존재여서 독립운동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했어요. 일본에 협력하는 게 현실적이라고 했죠. 독립운동가들이라고 계란으로 바위를 깰 수 있다고 생각했겠어요. 하지만 결국 불가능한 게 이뤄졌잖아요. 독립정신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 중요한 재산입니다. 우리 민족이 식민 지배와 전쟁을 거쳐 지금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보유하게 되었잖아요. 그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독립정신 자산이 있어 가능했어요.”

퇴임 뒤 계획은? “대한민국에 살면서 이 나라가 언제 세워졌는지도 잘 몰라요. 나라가 독립운동 활동으로 이어졌다는 걸 알려야죠. 국군이나 국회가 광복군(1940년 9월17일 창설)과 임시의정원(1919년 4월10일 개원)에서 이어졌다는 걸 알리려고 해요.”

마지막으로 ‘역사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인지 물었다. “역사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시류에 이용당하거나 시류를 이용하려고 해서 안 됩니다. 역사적 진실을 가지고 학문을 해야죠. 학문을 이용해 자기 이익을 취하려는 자세를 경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