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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식 이사장 "한반도 문제, 천천히 빠르게 가는 지혜 발휘해야" 월간중앙 인터뷰
분류 이슈
작성자 홍보팀 가지혜
날짜 2018.12.20 (최종수정 : 2018.12.21)
조회수 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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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 체육교류 산증인 장충식 단국대 이사장

“한반도 문제, 천천히 빠르게 가는 지혜 발휘해야”


 90년 남북 체육회담 이끌며 흰색 바탕 하늘색 한반도기 만든 주역...
 “미국이 체제 안전 보장해 주기 전에 북한은 핵 포기하지 않을 것”

 
시사 저널 <월간중앙>(중앙일보 자매지)이 2019년 신년호(1월호)에 장충식 이사장의 인터뷰를 실었다. 최근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와 관련하여 과거 남북 체육교류 최 일선에서 한민족의 동질성 회복과 평화 정착을 위해 애쓴 장충식 이사장의 다양한 활동을 회고담 형식으로 담았다. 인터뷰를 통해 장충식 이사장의 영구적 평화 구축을 위한 나름의 혜안과 삶의 철학이 엿보인다. 다음은 게재 전문(월간중앙 2019.1월호 144~150면)  [글 양영유 교육전문기자/사진 박종근 기자(월간중앙 2019년 1월호)]



▲ 장충식이사장이 지난 7일 월간중앙 양영유 교육전문기자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2018년 2월 9일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에서 남북 단일팀이 한반도기를 흔들며 입장했다. 역사적인 장면을 보던 장충식(87) 단국대 이사장의 눈시울이 불거졌다. 28년 전인 1990년, 남북 체육회담을 이끌며 흰색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기를 만들었던 남북체육의 산증인으로서 가슴이 뭉클했던 것이다. 평창 겨울올림픽 이후 남북 관계는 급진전했다. 4월에 열린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은 9월 평양 정상회담으로 이어졌다.

장 이사장은 “체육회담처럼 서둘지 말고 단계적으로 가야 북한의 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남북 체육회담 대표와 베이징 아시아경기(1990년) 단장, 200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단 단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을 역임해 남북 관계에 정통한 장 이사장을 만났다.

인터뷰 약속을 한 12월 7일 한파가 몰아쳤다. 그런데도 장충식 이사장은 오전 10시 약속 시각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나와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부지런하게 사람을 만나는 생활습관이 평생 몸에 밴 것이다. 사재를 헌납해 만든 강남구 언주로에 있는 범은장학재단에서 만난 장 이사장은 정열적이고 논리 정연했다.

“스포츠와 음악은 가장 비(非)정치적이어야 하는데 남북 관계에서는 그렇게만 작동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핵 문제를 둘러싼 남북, 북미 간 힘겨루기는 어떻겠어요? 천천히 빠르게 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미수(米壽)를 앞둔 나이지만 한반도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꿰뚫는 장 이사장의 혜안과 열정이 인터뷰 내내 이어졌다.

○ 남북 체육 단일팀을 성사시킨 장본인입니다. 평창올림픽도 감개무량하셨을 텐데 격동의 해였던 2018년의 남북 관계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북한은 지난 반세기 동안 적화 통일이 목표였다. 남북 간 불신의 골이 깊어졌는데 그걸 스포츠를 통해 어느 정도 완화했다고 볼 수 있다. 평창올림픽 때 남북이 하나가 되어 응원하고 격려한 것, 그걸 계기로 긴장 관계가 완화되고 정상회담이 열린 건 큰 성과다.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정책은 보수적 입장에선 위험 부담이 크다. 일본이나 중국과는 달리 북한 사회는 특수성이 있다. 북한의 지도자는 나이가 어리고 경험도 적다. 그가(김정은 국무위원장) 모든 것을 정하는 것처럼 권위를 내세우지만, 그 뒤에 움직이는 세력(북한 엘리트)들은 남북 간의 소통에 위험부담을 느낄 수도 있다.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해왔지만 그들은 3대 세습을 하면서 폐쇄적이었다. 너무 독촉하면 안 된다.”

" 북한, 핵 포기 이후 방어수단 없어 버티는 것"

○ 남북 관계에는 미국의 영향력이 큰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행보가 관건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핵 폐기를 주장하지만, 그가 영구 집권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김정은이 트럼프 말만 믿고 핵을 폐기했다가 나중에 중국이 ‘너 왜 배신해?’라고 하면서 ‘나 몰라라’ 하면 북한은 큰일 난다. 극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이런 역학 관계를 문 대통령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일각에선 ‘북한의 술책에 넘어가고 있는 게 아니냐’고도 한다. 일례로 군사분계선의 시설물을 폐기하고 남북철도를 연결하는 것에 대해 의심도 한다. 하지만 북한 입장에선 핵을 폐기 이후의 방어수단이 없다. 그래서 버티는 것이다. 그게 핵심이다.”

○ 북한이 우리나라와 미국을 의심하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핵 시설을 다 없애려면 북한 공산주의자와 좌파 세력들을 설득할 ‘한방’이 필요한데 미국이 안 주고 있다. 트럼프는 공화당 틈바구니에 있다. 트럼프가 하는 이야기를 보라. 미국 돈으로는 북한 경제 도와주지 않을 테니 한·중·일이 맡으라는 것 아닌가. 북한이 빈손이 됐을 때 경제 투자나 경제개발을 안 해주고 북한 체제를 없애려고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는 건 당연하다.”

장 이사장은 꼿꼿한 자세로 말을 이어갔다. 잠시 회상하더니 89년부터 90년까지 이어진 남북 체육회담 얘기를 꺼냈다. 그는 남북 체육교류를 통해 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 우승과 제6회 포르투갈 리스본 세계청소년축구대회 8강을 일궈냈다.

○ 당시 상황이 어땠습니까?
“88년 12월에 북한이 베이징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남북 단일팀 구성 회담을 제안했다. 당시 대한올림픽위원회(KOC) 부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회담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노 대통령이 ‘당신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선친은 북한 태생이니 잘해낼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해서 맡았다. 89년 3월 첫 회담을 시작으로 90년 2월 9차까지 남북 간에 밀고 당기기가 치열했다. 회담이 9차에서 결렬되긴 했어도 성과가 컸다. 그때 한반도기를 만들었다.”

○ 한반도기를 둘러싼 대립은 없었나요?
“단일팀 단가(團歌)는 남북이 아리랑을 제안해 이견이 없었다. 단일팀 명칭 ‘코리아’와 영문 표기는 우리가 제안한 것을, 단기(團旗)는 북한이 제안한 것을 택했다. 우리는 흰색 바탕에 녹색을, 북한은 하늘색을 주장했다. 두 가지 색을 합칠 수는 없었다. 한쪽은 양보해야 하니까 마음 편하게 양보했다. 남북관계도 그런 식으로 하면 좋겠다.”

○ 당시 북한이 어려운 상황에서 체육회담으로 돌파구를 찾으려 한 것이지요?
“북한은 우리에게 매달리는 입장이었다. 동유럽이 무너지는 과정에서 김일성과 가까웠던 루마니아 대통령이 국민에게 처형당했다. 소련이 루마니아 대통령을 보호하지 못한 것처럼 북한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었던 것 같다. 체육으로 관심을 돌려 화해 무드로 가려고 북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지금의 남북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 차근차근 진행하자는 말씀이지요?
“북한의 입장을 이해해가면서 대화를 풀어나갔다. 60% 양보하고 40% 양보를 받았다. 비용도 반반씩 부담하려 했는데 북한은 체육복 같은 것을 만들기 어려웠다. 그래서 우리가 연습비를 주기도 했다.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평양에 8차례 다녀와...단일팀처럼 핵문제 단계적으로 풀어야"

평창올림픽 여자 단일 아이스하키팀을 계기로 남북 단일팀이 연달아 성사됐다. 지난 5월 스웨덴 세계탁구대회 여자 단체전을 시작으로 7월에는 코리아오픈 남북 복식팀, 8월에는 남북통일 축구대회, 9월에는 아시안게임 여자 농구와 조정·카누 단일팀으로 이어졌다. 정부는 새해 2월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2032년 하계올림픽 남북공동개최 의향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단일팀이 올림픽 공동 개최 추진으로 진화한 것이다.

○ 남북 단일팀이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북한 핵 문제는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현 정권 인사 중 과거 북한을 다뤄본 사람이 거의 없다. 나는 북한을 여덟 번 다녀왔다. 2015년 이희호 여사와 갔던 게 가장 최근의 일이다. 북한 사람들하고 터놓고 이야기하는 편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 사람들을 우리가 보호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하기 싫으면 그만두면 그만이지만 북한은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얼음 밟듯이 깨지지 않게 조심조심한다. 깨질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걸 문 대통령이 하나씩 설득하고 있는데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 사람들은 약속을 잘 깨는데 ‘왜 관계를 개선해야 하느냐’고 반문하는 강경파도 있다. 이해해 주면서 가야 한다.”

○ 성급해선 안 된다는 말씀 같습니다.
“미국이 체제 안전을 보장해주기 전에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제재를 풀어주든, 경제개발을 약속하든 구체적인 안이 나와야 한다. 김정은이 그런 카드를 갖고 인민들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데 그런 게 없이 ‘핵을 포기하라’고 다그치는 건 북한 체제를 너무 모르는 거다. 트럼프가 북한 사람들을 어떻게 알겠나?”


<왼쪽 사진>1989년 10월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열린 제3차 남북체육회담. 남측 장충식(오른쪽)수석대표와 북측 김형진 수석대표가 흰색 바탕에 하늘색 지도를 넣은 한반도기에 합의한 뒤 깃발을 들어 보이고 있다. <오른쪽 사진>1991년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 구성 평가전 남측 장충식(오른쪽)수석대표와 북측 김형진 수석대표(왼쪽) 위해 평양을 방문한 장충식 코리아팀 단장(오른쪽). 왼쪽은 평양공항에 마중 나온 북측 인사.

○ 경제제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북측 인사들은 우리에게 ‘우리는 같은 민족 아니냐. 우리를 굶길 거냐?’라고 말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를) 굶기는 건 이질적이라서 그렇다 해도, 남한은 정치적으로 갈라져 있을 뿐인데 먹고사는 건 좀 해결해주는 게 좋지 않겠냐는 얘기다. 민족 생존에 대한 도덕적 책무를 지라는 인식이 있다. 이희호 여사와 함께 방북할 때 보청기 200개를 갖고 갔다. 북한에도 노인이 많은데 회의 때 잘못 듣더라. 보청기가 필요해도 공개적으로 요구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은밀히 가져다 줬다. 링거도 부족하다. 야매 시장에서 중국을 통해 들어오는 걸 산다. 진통제도 우리처럼 쉽게 구할 수 없다. 맹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 진통제가 없어 난리다. 그래서 링거도 2000개 가져갔다.”

장 이사장은 “북한 측 자존심을 생각해서 발표를 안 했다”고 했다. 응급차도 배로 4대 보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 북측이 자존심 상해 한다는 것이다. 같은 민족이고 같은 조상 밑에서 자랐는데 이렇게 치사하게 망신을 줄 수 있느냐고 오해한다는 얘기다. 이희호 여사와의 인연은 이 여사가 젊은 시절 유학 갈 때 선친이 도와준 게 계기가 됐다고 했다.

○ 박근혜 정부 때는 남북 관계가 얼어붙었는데요.
“정부 측에 아무것도 안 보냈다. 그래서 구호품을 가져왔다는 말도 못했다. 정부가 작은 쪽지라도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평양 갔다 와서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냉정하더라. 박근혜 대통령은 나에게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북에 대한 시각이 너무 좁다는 걸 느꼈다.”

"남북 문제 해법, 만델라 정신에서 찾아라"

남북 관계는 문재인 정부 들어 급변하고 있다. 한반도에 화해 무드가 형성되고는 있어도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장 이사장은 '넬슨 만델라 정신'을 강조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 ‘아파르트 헤이트’에 저항하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간 수형 생활을 한 만델라(1918년 7월 18일~2013년 12월 5일)의 화해·용서·평화 정신이다.

○ 만델라 정신을 강조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세계적인 정치지도자 중 가장 혹독하게 형벌을 받은 분이다. 탄압을 받은 인사들은 위치가 달라지면 증오의 반격을 한다. 하지만 만델라는 자신을 억압했던 이들을 용서하고 포용했다. 김대중(DJ) 대통령도 큰 영향을 받았다. DJ가 만델라에게 손목시계를 선물 받았는데 김대중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남북은 인종 문제가 아닌 정치적 이념으로 분단됐다. 만델라는 한국전쟁을 겪은 한민족이 갈라져 사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용서해야 평화가 이뤄진다. 한국 사회에 필요한 마음인데 우리가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 의문이다. 그래서 만델라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 동족상잔을 일으킨 북을 쉽게 용서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KAL기 폭파 사건도, 천안함 사건도 다시 꺼내서 사과하라고 한다. 점진적으로 참고 인도해줘야 하는데 무조건 다그쳐선 안 된다. 북미 회담이 잘 안 되는 것도 처음엔 OK하고 나왔는데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선언만 했을 뿐 후속 조치가 없다. 말만 했지 책임질만한 언급이 없었다. 트럼프가 동맹국이 아닌 장사꾼 입장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재선을 위해 한반도를 이용하는 것 같다. 지금 이런 처지를 누가 만들었는가? 미국과 옛 소련이다.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 만델라와 특별한 인연이 있으신지요?
“개인적인 연은 없다. 미래를 향해 나가려면 만델라 정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난 10월 31일 만델라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를 단국대 난파음악관에서 열었다. 아프리카 12개국과 유럽 6개국, 아시아 및 중남미 7개국 등 32개국 주한 대사와 외교관 100여명이 참석해 만델라 정신을 기리고 추모했다. 만델라는 생전에 음악을 사랑했다. 음악을 통한 자유와 단결의 힘, 하모니의 아름다움을 설파한 분이다.”

만델라는 음악의 힘으로 세상 밖으로 다시 나왔다. 88년 6월 11일,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는 만델라 고희(古稀) 축하 콘서트가 열렸다. 스티비 원더와 조지 마이클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 80여 명이 공연했고,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콘서트 시민운동이었다. 콘서트 이후 석방 여론이 들끓었고, 마침내 만델라는 2년 뒤인 90년에 자유를 되찾았다.

○ 만델라 탄생 100주년 기념음악회에서 직접 무대에 오르셨습니다.
“노주코 글로리아 밤 주한 남아공 대사가 행사 끝 무렵에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부르더니 나를 무대 위로 이끌어 오르게 했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아리랑을 불렀는데 관객이 모두 따라 불렀다. 만델라의 화합과 관용 정신이 울려 퍼진 듯했다. 얼마 전 만델라 국제평화대학원을 설립키로 결정했는데 새해 하반기쯤 열 예정이다.”

민족 대표 33인 뜻 살리려 평화통일단체총연합 창립

장 이사장은 음악 애호가다. 바이올린·클라리넷·플루트 연주 실력은 프로급이고 성악은 CD까지 냈다. 남북 간 체육·음악 교류가 한민족의 동질성 회복에 큰 동력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는 2017년 7월 통일 관련 단체 대표 33인과 함께 '평화통일단체총연합'도 창립했다. 3.1운동 민족 대표 33인의 정신을 계승해 한반도 통일과 완전한 광복을 실현하는 데 힘을 보태자는 취지에서다.

○ 평화통일단체총연합의 이사장을 맡고 계시다.
"7·4 남북 공동성명과 이산가족 상봉실현,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 국회회담, 남북 체육인 회담과 단일팀 구성 등에 참여했던 분들이 주축이 됐다. 경륜을 발휘해 작금의 대립과 갈등을 화해와 협력으로 전환하도록 하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 문화교류와 의료지원, 산림녹화 등 인도적 지원을 추진하고 있다.”

장 이사장은 2000년 제1차 남북이산가족상봉 단장을 맡은 데 이어 제21대 대한적십자사 총재도 지냈다. 적십자사가 학생과 사병들이 헌혈한 피로 재원을 마련한다는 말을 듣고 “국민 피를 판 돈으로 총재 월급을 주느냐”며 월급을 받지 않은 일화는 유명하다.

대한민국 체육계의 거물인 장 이사장은 평생을 교육자로 일해 왔다. 독립 운동가인 장형 선생의 아들로 1932년 중국에서 태어난 그는 원적이 평안북도 선천군이다. 35세 나이였던 1967년에 종합대로 승격한 단국대 초대 총장으로 취임해 93년까지 26년간 학교를 이끌었다. 국내 최연소 종합대 총장이었다. 현재도 학교법인 단국대 이사장과 범은장학재단 이사장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 스포츠나 음악과는 달리 남북 교육교류는 진척이 더딥니다.
“이데올로기와 상관없는 분야부터 해야 한다. 언어 문제가 대표적이다. 남북 간에는 언어 장애가 있다. 내가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을 만들었는데 용어 교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북한 인사들과 회담할 때 보니 소통에 어려움이 있더라. 예를 들어 북한에선 사인을 ‘수표’라고 한다. 수표는 손으로 하는 표시라는 뜻이다. 북한 인사들은 ‘사인은 영어, 서명은 일본말인데 왜 그런 용어를 쓰느냐’고 반문한다. 우리가 주체성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남북 간 언어에 대한 교육이 딱히 없으니까 회담을 하다가도 자꾸 묻게 되는 문제가 있다. 그들은 언어를 만들었는데 우리는 컴퓨터 용어나 외래어를 그대로 쓴다. 언어 교류는 정치와 상관이 없다.”

○ 교육자로서 평생을 보내셨습니다. 단국대가 올해(2018년)로 71주년인데요.
“단국대는 1947년 11월 3일 선친이 세우셨다. 아버님은 백범 선생님 입장에서 독립운동을 하셨고 군자금을 맡았다. 그래서 단국대 교명에 단군의 자손이라는 이념을 넣었다. 민족의 동일성을 담아 통일된 국가의 미래 교육을 주창한 것이다. 49년에 백범 선생님이 암살당하자 그 피해가 아버님에게 돌아왔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단독정부를 반대한 대학으로 찍히니까 학교를 못 짓게 했다. 아버지가 반민특위 위원이었는데 당시 친일 세력 중엔 군부 출신이 많았다. 독립운동가를 고문했던 이들이 요직을 차지하더니 학교를 없애려 했다. 장면 박사를 도왔다는 이유로 반혁명 분자로도 몰았다. 61년 폐교됐다가 67년에 종합대로 승격됐다.”

○ 격변의 시기인데 67년 35세의 나이에 대학 총장이 됐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서 전후 사정을 이야기했다. 야간부도 못 돌리는데 죄 없는 학교에 너무 가혹한 게 아니냐고 했다. 그러자 자기는 몰랐다고 하더라. 그 자리에서 바로 문교부 장관인 문홍주씨를 들어오라고 하더니 단국대도 기준에 맞으면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라고 했다.”

○ 90년대에도 위기가 있었죠?
“김영삼(YS)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을 때 도와달라고 했다. 그런데 돕기가 어렵더라. 전라도 학생과 경상도 학생이 어우러져 공부하는데 어떻게 한쪽을 지원하나. 대학이 선거에 개입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끝까지 버텼다. 그런데 YS가 정권을 잡더니 보복이 가해졌다. 결국 부채를 지고 병원을 못 짓게 돼 부도에 몰렸다. 학교를 없애려고 했다.

“정치가 교육에 관여해선 안돼...고등교육 자율 생태계 중요”

○ 교육은 가장 비정치적이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교육이, 특히 대학이 정치에 휘둘리면 국가의 미래가 없다. 문명사적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고등교육은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대학의 70~80%는 재정적으로 열악하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에 조금만 밉보이면 불이익을 받는다. 그러면 안 된다. 교육에 정치가 들어가면 희망이 없다. 산학협력을 활성화하고 규제를 과감히 풀어 자율적인 고등교육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글로벌 대학이 많이 나올 수 있다.”

○ 역사학을 전공하셨는데 서울대와 단국대에서 학부를 두 번 다닌 이유가 궁금합니다.
“서울대 사범대 역사과 4학년 때 1년 후배인 아내와 연애를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사범대 다니면서 연애한다고 단국대 법정학부 정치과로 이적시켰다. 교생실습도 못 나갔다. 아내도 결혼하고선 숙명여대로 갔다. (웃으며) 사범대 체면이 안 선다는 이유였다.”


<왼쪽 사진> 장충식 이사장이 30년 만에 완간한 세계 최대 한자사전 <한한대사전> 16권  <오른쪽 사진> 장충식 이사장이 1964년 2월 28일 부인 신동순 여사에게 보낸 편지

○ 대학을 이끌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뭔가요.
“2007년 8월에 서울 한남동 캠퍼스를 경기도 용인 죽전캠퍼스로 옮긴 일이었다. 당시 서울캠퍼스에 있던 93만 권의 장서와 2만2000점의 유물을 트럭 3,147대에 실어 옮겼다. 1만4300t 규모다. 겨울스포츠 불모지인 빙상과 스키 종목 선수를 발굴하고, 럭비와 조정 등 비인기 종목을 키운 것도 기억에 남는다.”

장 이사장은 65년 대학배드민턴 협회장을 맡은 이후 국내 대학 스포츠를 이끌어왔다. 대학스키연맹, 대학축구연맹, 대학태권도연맹, 대학농구연맹, 대학테니스연맹 회장 등 안 맡아 본 종목이 없을 정도다.

○ 국가 스포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셨습니다.
“운동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좋다. 나도 대학생 때 럭비를 했다. 서울대 사범대에서 B학점 이상 아니면 선수도 못했다. 단국대는 체덕지(體德智)를 강조한다. 우리 대학 출신들이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아경기 등에서 딴 메달만 100개가 넘는다.”

○ 장자인 장호성(64) 단국대 총장은 처음에 숭실대 강사로 일하다 한양대 전자공학과 교수가 됐습니다. 2000년에야 단국대로 옮겼는데 아들이 섭섭했겠습니다.
“자기 힘으로 하게 했다. 미국서 공부하고 돌아와 한양대에서 8년 있었다. 거기서 1등 교수로 인정받았다. 캠퍼스 이전 계획이 알려지자 학생들이 계란 세례를 했다. 서울 소재 대학이 캠퍼스를 서울 밖으로 옮긴 전례가 없고 국가 지원도 없으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주차할 공간도, 인프라도 부족한 한남동 캠퍼스에선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때 아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캠퍼스 개혁에 힘을 보태라고 했다.”

장호성 총장은 장 이사장의 1남 3녀 중 맏이로 2000년 단국대 교수로 옮긴 뒤 2008년부터 총장으로 일하고 있다. 전국 4년제 대학 총장들의 협의체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 회장이기도 하다.

○ 단국대 홈페이지에 연재 중인 ‘학연가연(學緣佳緣)’에 나오는 경주 9남매 스토리가 뭉클합니다.
“99년 설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TV를 보는데 9남매가 밥상 앞에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들의 삶이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사정을 알아봤다. 당시 7남 2녀 중 맏이인 장녀가 17세였는데 부모가 성실해 밥은 굶지 않지만, 학비가 문제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9남매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모든 학비를 지원하기로 했다. 그 뒤로 9남매 중 3명이 단국대에 들어왔다. 큰 아이가 대학원까지 마치고 범은장학재단에서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 2015년에 『다시 태어나도 오늘처럼』을 출간하셨다. 결혼 60주년인 회혼(回婚)을 기념한 책인데.
“집사람과 젊었을 때부터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뒀더니 500여 통이나 되더라. 그중 53년부터 85년까지 주고받은 134편을 추렸다. 사랑 고백 글도 있고, 속바지를 보내달라는 투정도 있고….”

"통일되면 아들·손주와 함께 북한 조부 묘소 찾고 싶어"

장 이사장은 그 대목에서 수줍어했다. 평생 반려자의 젊은 시절이 떠오르는 듯했다. 책을 펼쳐보니 “졸렬하고 무지한 이 몸과 넋이 그대 마음의 등불이 될 수 있다면 그대는 이 마음의 영원한 행복의 꽃송이입니다”라는 구절도 있었다.

○ 90년에는 범은장학재단을 설립했습니다.
“단국대를 세운 선친 범정 장형 선생과 혜당 조희재 여사의 육영의지를 살리기 위해 만든 재단이다. 그동안 1,900명 학생과 교수들에게 68억원을 지원했다.”

○ 가장 존경하는 분이 누구인가요?
"일석 이희승 선생님이다. 서울대 학생 시절 국어를 1년간 배웠다. 한국 최고의 국어학자이자 국학자인 스승은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그런 분을 내가 71년에 단국대의 동양학연구소 소장으로 모셨으니 정권의 눈총을 받은 건 당연하다. 선생님은 약속대로 71년 1월부터 81년 1월까지 10년을 꿋꿋하게 일하시며 한한대사전 편찬의 기틀을 잡아주셨다. 선생님은 돌아가실 때 평생 모은 정재(淨財)를 후학들의 학술기금으로 환원하셨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보여주신 스승이다."

○ 2011년 나온 회고록 『시대를 넘어 미래를 열다』를 보면 "결국 인생은 사람이다. 사람을 만나서 일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또 힘을 모으는 끝없는 순환이 인생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90 가까워지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눈다. 많은 사람이 어울려 사는데 똑같은 결론은 죽음이다. 사는 동안 이해관계와 생각에 따라 인간관계가 달라진다. 가장 중요한 건 재물은 나눠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박애주의이고 기독교 정신이다. 물자에 대한 욕심을 멀리하는 것이 부모님의 가르침이었다. 아버지 유언서에 ‘부모를 통해 얻은 재산은 개인적으로 가지면 안 된다’고 했다.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는 게 인생이다.”

○ 후손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친손주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서울대 박사과정에 있고, 하나는 제약회사에 다닌다. 둘 다 전세 산다. 아들에게 준 돈이 없으니까 손자에게 갈 것도 없다. 전세살이는 당연하다. 아들도 8년 동안 셋방 살다가 옮겼다. 부모 덕에 있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다보면 사회적 책무를 망각하기 싶다. 내 비서나 기사들의 자녀 교육도 내가 맡았다. 자기 수입으로 적게 먹고 남은 것은 다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십니까.
“소식하고 술과 담배를 안 한다. 큰 형님이 서른여섯에 술로 돌아가셨다. 술은 절대 마시지 말라고 했다. 담배는 잠깐 피우다 끊었다.”

장 이사장은 꿈이 하나 있다. 통일이 되면 평안북도 선천에 있는 조부 묘소를 아들·손주와 함께 찾아가는 일이다. 북한을 여덟 번 갔어도 모두 공적인 일이었기에 찾아갈 수 없었다고 했다. 남북 관계가 스포츠 분야처럼 단계적으로 개선되고, 북한의 핵이 폐기되고, 한반도가 통일이 되기를 소망하는 장충식 이사장의 마음이 간절해 보였다.

○ 장충식 이사장은
1932년 중국 텐진 출생
서울대 역사과, 단국대 정치과, 미국 브릭함영대 졸업
단국대 총장, 대학베드민턴협회장, 대학스키연맹회장, 대학축구연맹회장, KOC부위원장
남북체육회담 수석대표(1989년), 베이징아시안게임 단장(1990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단일팀 단장(1991년)
제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단 단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세종문화회관 이사장
현 단국대 이사장, 범은장학재단 이사장, 평화통일단체총연합 이사장



▲ 양영유 교육전문기자
교육자가 되려고 고려대에서 영어교육학을 공부했지만 기자가 됐다. 중앙일보 교육데스크, 정책사회데스크, 사회에디터, 논설위원을 거쳤다. 국민이 공감할 수 있는 사회 정책, 특히 문명사적 전환기의 고등교육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고 있다. 한국외국어대학에서 교육저널리즘으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공저 <대한민국 파워 엘리트>와 역서 <멀티미디어 조직혁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