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전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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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 '반혁명 고문'에서 '정계입문권유'까지 이어진 곡절(하편)

2019.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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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름지기 “사람이 가진 능력이란 일을 하면 할수록 커진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종합대학 승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을 비롯해 국무총리 등 행정부 고위관료, 국회의원과 일선에서 활약하는 동문들과 인연 내지는 친분을 두터이 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단국대학을 싫어하고, 내 선친을 반대하던 이들도 만나서 얘기하다보면 하나 둘 우호적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37세의 젊은 총장이 시들어가던 대학을 키워보겠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한다. 또 하나, 사회를 이끄는 세대의 교체기라는 점도 나에게는 긍정적 조건이었다.1961년 5‧16군사정변을 일으킬 당시 ‘혁명주체세력’의 나이는 35세에서 45세의 연령대였다. 이들이 ‘국가재건’의 명분을 걸고 국정을 운영하는 전면에 나서자 우리 사회는 급작스러운 세대교체를 경험하게 되었다. 내가 총장직에 오른 나이도 36세였는데, 총장으로서는 젊은 나이었지만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50세, 공화당 당의장을 지낸 김종필 의원이 41세였다. 자연스럽게 사회분위기도 ‘경륜’보다는 ‘패기’가 앞서는 시대였다. 이런 사회적 환경에 더해 일찍부터 사업을 하면서 몸으로 배운 ‘하면 된다’는 도전정신은 자연스럽게 당시 우리 사회를 이끌던 주도세력의 호감을 받는 원인이 되었다. 이같은 안팎의 여건이 잘 맞아서 이뤄진 일이 내곡동 국유지 매입을 성사시킨 일이었다. 1967년에 총장 취임을 하고, 다시 1971년에 연임을 하게 되면서 내 마음 속에는 ‘신 캠퍼스’를 건설해야 한다는 의욕이 불처럼 일었다. 죽전캠퍼스를 신축하기 전 서울캠퍼스가 자리하고 있던 한남동 부지는 터도 비좁지만 주변이 군사시설보호지역, 개발 제한구역으로 묶여 설사 학교가 돈을 들여도 부지를 넓힐 수가 없었다. 넓고 자연환경이 좋은 부지에서 우리 학생들을 공부시키고 싶었다. 공과대학, 체육대학, 예술대학처럼 실습 공간이 많이 필요한 학과들을 육성할 캠퍼스를 새로 짓고 싶었다. 그것은 혁신적으로 교육, 연구시설을 확장해 단국대를 한국 최고의 사립대학으로 도약시킨다는 나의 비전이기도 했다. 다부진 마음으로 수소문 끝에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전신)가 보유하고 있는 강남구(당시는 성동구로 편입되어 있었음) 내곡동의 국유지를 후보지로 물색하게 되었다. 처음 이 땅을 보러갔을 때 받았던 인상을 지금도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대모산 기슭에서 남향으로 완만히 펼쳐진 구릉과 넓게 펼쳐진 논밭, 햇빛이 잘드는 남향의 지형은 내가 그리던 캠퍼스 건설 부지로 딱 마음을 설레게 했다. 면적도 79만㎡(24만 여 평)으로 한남동 부지의 6배 정도로 넓었다. 정부에서는 지금의 강남구에 해당하는 당시 영동지구를 국가 정책목표로 세우고 개발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단국대의 미래를 여는 캠퍼스로 딱 맞는 땅이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이 땅의 소유주는 개인이 아닌 국가였다. 거기에 국유지 불하를 둘러싼 각종 비리, 부정부패 사건이 줄이어 터지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나서 ‘국유지 불하 금지’ 지시를 내려 공무원들은 국유지 불하 신청을 접수하려 하지도 않았다. 열망은 크지만 여건이 따라 주지 않아 고민이 커져 갔다. 그 때, 연당(硏堂) 이갑성 선생(1889~1981)께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아직 봄의 기운이 희미했던 1971년 3월 쯤으로 기억한다. 이갑성 선생은 3‧1만세운동의 독립선언문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이었다. 일제강점기에 두 번이나 투옥이 된 강골이기도 했지만 민립대학 설립운동, 신간회 발족 등에서 선친인 범정 장형 선생과 인연을 갖고 있었다. 선친 생존 시에는 형님, 아우로 지내며 자주 내왕을 하신 덕에 나 역시 이갑성 선생께 의지를 하고 있었다. 이갑성 선생은 5‧16 군사정변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를 처음부터 공표하기도 했는데 이런 연유로 공화당 발기위원, 공화당 총재 고문 등을 역임한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이기도 했다. 연당 선생의 기별을 받고 만나러 갔더니 선생께서는 나에게 정치입문을 권하였다. “곧 총선이 있을 예정인데 박 대통령께서 장 총장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해요. 지난번에 대통령을 만났는데 ‘장 총장이 젊은 나이인데도 학교를 잘 운영하고 있고, 파월 장병 위문 때도 정말 열심히, 잘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좋은 말을 하시더라구. 이번 총선에서는 전국구를 정치적 배경보다는 직능 위주로, 비정치적인 전문가를 영입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어요. 그래야 전국구 공천으로 매번 논란이 생기는 야당과 차별성을 둘 수 있으니까.” 연당 선생의 결론은 박정희 대통령이 나를 호의적으로 마음에 들어한다는 점과 나를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낙점했다는 것이다. 연당 선생은 그러면서 나에게 정치에 입문할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국회의원이 되면 단국대를 더 발전시킬 수 있는 힘도 생긴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을 했다. “선생님 각하께서 저를 호의적으로 보시는 건 저도 기쁩니다. 하지만 저의 선친께서는 생전에 교육자가 정치를 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 아니라 여러 번 역설을 하셨어요. 저를 앞에 앉히고 강조하셨고... 저는 이 말씀을 유언으로 생각합니다. 저라고 권력이 싫겠어요. 하지만 대학 총장으로 있으면서 대학을 키우고, 우리 학생들 하고 있는 게 더 행복하고 저한테도 어울리는 일입니다.” 나는 웃음을 띄우며 사양의 뜻을 밝혔다. 내 뜻은 정말 거짓없는 진심이었다. 연당 선생은 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듯 했다. 그래서일까? 대학이 개강을 하고 이런저런 업무에 경황이 없을 때 길재호 당시 공화당 사무총장이 나를 만나자고 했다.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길재호 사무총장의 연락이니 피할 수 없었다. 어떤 얘기인지 예감이 들었다. 과연 연당 선생과 같은 얘기였다. “이건 저의 뜻이 아니고 각하의 뜻입니다. 총장님을 공화당 전국구 19번으로 영입하라는 당부이십니다.” 더 구체적인 제안이었다. 아니 이 정도면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라고 생각해야 하는 무게가 실린 제안이었다. 그렇지만 내 마음은 이미 결론이 내려진 상태였다. 고민스럽지만 내 소신이고 인생관인데 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연당 선생께 했던 얘기를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길 사무총장은 내 말에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후 내 마음은 참으로 복잡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최고 권력자의 말을, 어쩌면 나름 정치적 구상을 하고 나에게 부탁을 한 것일 수도 있는데 이를 거절한 셈이 아닌가. 자칫 나로 인해 단국대학을 망치는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몇 날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러나 나는 정치권력을 갖지 않기로 한 내 소신을 지켜온 내 결심을 한번도 후회하지 않고 있다. 전국구 의원 후보자 선정이 끝나고 다시 연성 선생을 만났다. “장 총장도 참 고집이 세군요. 하하하. 그 좋은 국회의원 자리를, 그것도 대통령이 주겠다는데 거절을 하니 말이요.” 연성 선생은 한편으로는 내가 교육에 전력을 기울이겠다고 강한 결심을 보인 점에 감명을 받았다는 얘기도 했다. 나는 이런 때가 오히려 우리 대학에 새로운 기회가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선생님, 제 진정을 아셨다니 이런 시기에 제 소원 하나를 각하께 전달해주세요.” 나는 그토록 열망하고 있던 강남구 내곡동 문화공보부 소관의 국유지 불하 문제를 꺼냈다. 그동안 나름대로 조사한 여러 가지 경과와 문제점도 설명했다. “선생님, 이만한 땅은 있어야 지금 한남동 캠퍼스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결심해주셔야 이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저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고 영리기관도 아닌 단국대가 더 좋은 곳에서 젊은이들을 교육시키자는 뜻이니 명분도 있는 일입니다. 대통령께 제 고민을 전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연성 선생은 껄껄껄 웃었다. “장 총장 이제 보니 욕심이 진짜 많은 분이 구만요. 대학을 키우겠다는 욕심이 말이요. 그래요. 땅을 굴려서 돈 벌자는 얘기도 아닌데 젊은 총장이 국회의원도 마다할 만큼 교육에 열성을 쏟고 있으니 각하께서도 나쁘게만 생각하시지는 않을 꺼예요.” 연성 선생은 그 뒤 대통령을 만났다는 얘기며 내 뜻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문공부에 말해두겠다’는 답도 있었다는 얘기를 전해주었다. 그 뒤로 국유지 매입문제는 순조롭게 풀렸다. 1971년 4월 말 쯤이었다. 다만 문화공보부의 매각조건은 매우 까다로웠다. 불하 대금을 분납이 아니라 일시불로 납입하라는 조건이 붙은 것이다. 매각 대금은 5억 7천만 원이었다. 부채를 얻어야 했지만 그래도 우리 대학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할 기반이 생겼다는 기쁨에 하늘을 나는 기쁨을 느꼈다. 같은 해 5월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총선 결과는 민주공화당이 지역구 86명에 전국구 27명, 전체 113명의 의석을 차지했다. 내가 제안받은 전국구 19번이라는 의석은 확정적인 순위였음을 알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나에게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음을 확인한 소득이 있었다. 반대로 이같은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과 배려가 나에게는 무언의 압력이 되었다. 대통령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바르고 정당하게 대학을 육성하고,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책임의식이 더욱 커졌다. 국유지 불하를 받고 나서 매입 대금을 구하는데 진땀이 날 정도로 분주하게 뛰어다니던 때였다.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 25개 종합대학의 총장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 간담회를 한다는 연락이 왔다. 당시 대학가는 교련반대시위 등으로 대학생들과 정부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었다. 동시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부터 ‘새마을운동’을 처음으로 가동해 이를 국가 차원의 농촌개발사업으로 확대하려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물론 새마을운동은 그로부터 2년 정도 지난 뒤 그야말로 국가적 명운을 건 대형 사업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많은 개발도상국이 채택한 개발사업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이런 중대한 의미까지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대통령의 의중을 읽었다면 나이 40세를 갓 넘은 내가 함부로 나서지 못했으리라. 이날 간담회에 참가한 총장들은 마음 속으로 대학가 시위 문제를 놓고 대통령의 당부 말씀과 정책적 협력에 필요한 사안들이 제시될 거라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간담회가 시작되니 무거운 주제는 나오지 않고 대학에 대한 다양한 소재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분위기였다. 박 대통령도 총장들에게 담배를 권하며 웃음을 잃지 않고 얘기를 이끌어갔다. 그러던 중에 박 대통령은 대화를 새마을운동으로 전환했다. “지난해부터 농어촌에 시멘트와 재정지원을 곁들여 스스로 생활여건개선과 소득증가사업을 벌이도록 돕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업이 지금 내무부(현재 행정안전부의 전신)와 농어촌의 힘만으로는 안되지 않겠어요? 이들에게 새로운 영농기술, 마을들 마다 다른 여건에 맞는 개발 모델 같은 걸 전수해줘야 하는데 이런 부문에서는 대학이 큰 일을 해줘야 합니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새마을운동을 국가미래의 사활을 건 사업으로 확신하고 있었고, 이를 성공시키려면 관청과 농어촌 외에 대학이 힘을 더해야 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대학의 총장들은 이 얘기가 나오자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대학과 정부의 갈등이 높아지던 시점에서 총장이 대통령 편을 들어 새마을운동에 나선다면 ‘어용 총장’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게 훤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새마을운동이 농어촌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당시에는 박정희 정부가 정치적 목적으로 이를 강행한다는 비판이 컸었다. 또한 시멘트 몇 푸대 풀어준다고 농어촌이 달라지겠냐는 지식인들의 냉소적 비난이 주류였다. 그래서인지 참석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경북대학 총장이 대학의 입장을 전했다. “지금 교련 교육에도 학생들이 반대를 하는데 새마을운동을 하자고 나서면 아마 데모가 더 심해질 것입니다.” 이런 요지로 대학의 새마을 운동 참여의 어려움을 설명하자 듣고 있던 박정희 대통령은 갑자기 굳은 얼굴로 변하며 반박을 했다. “제가 새마을운동을 하려는 것은 정치적 목적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공업화를 할수록 농촌이 도시보다 살기가 힘들어지니까 이를 극복하자는 거죠. 이걸 정부 힘만으로는 안 되니까 대학 교수님들, 학생들이 나서서 같이 해보자는 겁니다. 농촌은 원래 가난하니 어떻게 가난을 이길 수 있냐고 해보지도 않고 반대를 하면 우리나라가 언제 잘살 수 있겠습니까.” 말을 마친 박 대통령은 빈 담배 갑을 우그리더니 툭 탁자에 던지듯 떨어뜨렸다. 동석한 보좌관들도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하물며 낯선 총장들이야 어떻겠는가. 분위기는 갑자기 경색되고 모두들 말이 없어졌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마음속에 갖고 있던 박 대통령에 대한 고마움, 그러니까 국유지 불하를 도와준 호의에 내가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새마을운동에 내가 가진 힘을 기울여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바로 공언을 했다. “아직 연륜도 부족하고 대학도 역량이 부족할 수 있지만 단국대가 이 문제를 풀어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경직된 분위기를 풀고, 박 대통령이 종합대학 승격이나 내곡동 부지 확보에서 받은 은혜에 어떻게든 보답을 하겠다는 뜻이 앞서서 나를 이끌었다. 대통령이 화를 낸다는 분위기를 다들 감지해서였을까. 총장들이 나서서 나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안색이 풀어지고 웃음을 되찾자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간담회가 마치 나의 새마을운동 협력사업 의지를 확인하는 발표장이 된 셈이었고 다들 나를 주목하는 결과가 되었다. 대통령 앞에서 그것도 25개 종합대학 총장 앞에서 한 약속을 했으니 일초도 머뭇거릴 수 없었다. 우선 우리 대학이 새마을운동을 펼치기 좋은 여건을 가진 마을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지역개발학을 전공한 김유혁 교수, 농학을 전공한 김봉구 교수와 상의를 했다. 김봉구 교수는 충청남도 청양군 장곡마을을 생각하고 있었다. 칠갑산에 가려진 벽지로서 전국에서 가장 낙후된 농촌지역이라는 설명이었다. 땅이 척박하여 소득을 늘릴 작물을 기르기도 부적합하다고 했다. 여기에 새로운 영농기술과 작물을 보급한다면 눈에 띠는 성장이 가능하다고 김봉구 교수도 뜻을 보탰다. 이곳을 단국대 새마을운동 후보지로 정하려 하자 이번에는 문교부(현 교육부 전신)가 반대를 했다. 심지어 충남도청에서도 그랬고, 소식을 들은 청와대의 새마을운동 관련 보좌진도 다른 지역이 좋겠다며 반대를 했다. 이유는 대통령 앞에서 이뤄진 공약이니 단국대가 나서서 새마을운동 성공 사례를 만들어야 하는데 청양군 장곡마을은 정말 너무 궁벽한 곳이라 실패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반대가 나와 단국대를 위한 호의임을 알면서도 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계곡이 깊으면 산이 높다고 이런 열악한 환경일수록 작은 성과를 내도 그로 인해 마을주민들이 얻을 자신감과 성취감도 크고 높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마침내 1972년 4월,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 장곡마을과 자매결연을 맺고 새마을사업을 개시했다. 청양군 장곡마을은 장곡사라는 사찰이 있다. 역사학을 전공한 나는 장곡사를 답사한 적도 있어서 전혀 낯설기만 한 지역도 아니었다. 군용 지프 차를 타고도 오가기가 힘든 오지마을이었다. 나는 새마을운동을 떠나 이곳이 잘사는 농촌의 모델이 되도록 한번 부딪혀 보자고 결심했다. 김유혁 교수를 통해 지역개발 이론과 적용 방법을 강구토록 하고, 김봉구 교수를 통해 장곡마을에 적합한 소득증가용 작물과 이를 안착시킬 방법을 연구토록 했다. 당시 김봉구 교수는 농업기술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있었는데 이를 수행하기 위해 교수로 초빙하기까지 했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30여 차례가 넘도록 장곡마을을 오가고, 마을 어른들께 편지를 보내 협력을 호소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장곡마을에 대한 단국대의 새마을운동 전개사업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산비탈을 깍아 목장을 조성해 젖소 사육을 하면서 해당 기술을 교육, 보급했다. 특히 불가능에 가깝다는 돌밭을 개간하고 퇴비를 통해 지질을 개선해 사과농사가 가능함을 실증한 것은 우리 스스로도 놀랄만한 성과였다. 이렇게 해서 새로이 일군 농장이 22만 여 평에 이르렀다. 동시에 새마을농민학교를 세워 2천5백 여 명의 농민지도자가 교육받고 나갔다. 장곡마을 주민이 당시 360여 명이었으니 장곡마을의 성공 사례를 공부하러 온 충청남도와 전국의 농민 지도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이 이렇게 되고보니 반대를 하던 교육부는 물론이고 청와대에서도 놀라워하며 큰 박수를 보내주었다. 문교부 장관과 충남도지사가 직접 장곡마을을 방문해 사업 성과를 시찰오고 청와대 비서진도 답사를 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 사업을 추진하면서 2차례나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천만 원의 격려금과 영농기계를 수여받기도 했다. 장곡마을의 성공 사례는 청와대와 교육부에게 좋은 모범사례가 되었다. 대학과 농촌이 단순한 봉사활동이 아니라 직접 개발 사업을 기획, 실천하는 일이 얼마나 유효한지 입증한 사례가 되었다. 이후 대학의 새마을운동 참여 사업들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나는 장곡마을 새마을사업 과정에서 30여 차례를 넘게 이 지역을 지나고, 숙박을 했다. 그 과정에서 나에게는 새로운 착안점이 생겼다. 천안에 새로운 캠퍼스를 짓고 싶다는 목표가 생긴 것이다. 마침 당시 정부 차원에서 10년 간의 경제개발을 추진한 결과 수도권집중현상이 가속화되는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특히 대학의 서울집중이 인구집중을 부른다는 비판이 많았고 이를 해결할 대책으로 미국같은 선진국의 ‘분교(제2캠퍼스)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같은 정책전환을 감지한 나는 천안시의 잠재력이 적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1973년 당시 천안시는 시로 승격한지 10년이 되었지만 인구가 8만 여 명에 불과한 소도시였다. 그렇지만 예로부터 서울과 충청, 호남의 기차교통 중심지였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서울에서 1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준 수도권’ 도시가 되었다. 마침 천안시에는 4년제 대학이 없었다. 정부의 수도권 분산 정책에도 부합이 되는 도시였다. 천안시에 캠퍼스를 세우면 고속도록를 통해 한강 이남의 대학교육수요를 유입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나는 내 마음 속에 이미 우리 대학을 세울 캠퍼스 부지도 정해놓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지금 천안캠퍼스가 세워진 안서호반의 땅이었다. 새마을운동 자매마을인 장곡마을을 가려면 경부고속도록에서 천안을 지나야 했다. 천안IC 직전에 보이는 안서호반의 땅은 남동향으로 온화한 기운이 들면서 넓은 호수를 앞으로 끼고 있어 풍경도 좋았다. 나는 문교부에 ‘천안분교 개설 허가’를 신청했다. 당시 문교부내 관료들은 우리 대학의 역량을 믿지 않는 편이었다. ‘단국대가 한국 최초로 지방에 분교를 세운다니 가능하겠는가?’라는 분위기였다. 당시 문교부 차관으로 있던 분을 중심으로 관료들이 이런 주장을 했고 인가가 늦어졌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박정희 대통령의 호의가 작용을 했다. 문교부 장관의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이 “장충식 총장이 하는 일이니 긍정적으로 검토하라”는 말이 있었다는 전언이 있었다. 대통령의 지시가 있자 관료 중심의 단국대 천안분교 반대 여론도 자연스럽게 잦아들었다. 거기에 당시 황산덕 문교부 장관은 대학의 분교제도를 도입하는데 긍정적이어서 우리 대학의 분교 개설사업에 도움을 주었다. 1977년 5월 마침내 원하던 부지를 매입했다. 넓이는 약 20만㎡(6.6만 평)이고 전형적인 배산임수형의 지세에 풍광이 빼어나 우리 대학에 큰 발전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 8월부터 토목공사에 들어갔는데 이 때도 박정희 대통령의 나에 대한 호의를 확인할 수 있었던 일화가 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산림녹화’를 국정의 최고목표로 앞세우고 있었다. 산에서 나무 한 그루를 허투루 베어내도 자칫 큰 처벌을 받고, 간혹 녹화정책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가 박 대통령의 불호령을 받고 하루 아침에 옷을 벗는 공무원들도 많았다. 그런 판국에 박 대통령이 충청남도 순시를 위해 경부고속도로를 지나다가 천안캠퍼스 토목 공사 현장을 보게 되었다.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땅이 맨살을 드러내고 나무도 발려져 나가고 있으니 박 대통령이 좋게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당장 굳은 목소리로 옆에 있던 정석모 충남 도지사에게 따지듯 물었다. “저거 뭐하는 건데 땅을 깎고 저리 넓게 벌목을 하고 있는거요?” 질문을 받은 정석모 지사는 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관청의 인허가를 다 받고 하는 일이지만 자칫 “아니 그렇다고 저렇게 나무를 잘라내면 어쩌겠는가!”는 질책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설명을 들은 박 대통령은 “아, 그런가요. 장 총장이 하는 일이면 틀린 일이 아닐 거요. 장 총장은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요. 걱정말고 대학을 키우라 하세요.”라며 단국대 천안캠퍼스기 충남 발전에 기여하도록 도와주라는 당부가 있었다고 한다. 정석모 지사는 이같은 대화내용을 나에게 기쁜 낯으로 전해주며 한 가지 얘기를 덧붙였다. “각하께서 이런 재밌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장 총장이 실향민으로 알고 있는데, 이왕 충청남도에 대학을 세우기로 했으니 아예 주민등록도 충남으로 옮기면 좋겠구만.” 대화를 마치며 정석모 지사는 자신도 충청남도에 큰 대학이 생기니 기쁜 일이라 강조하며 어려운 일이 있으면 알려달라 했다. 나 역시 기분이 좋았다. 대통령이 나의 신상을 파악하고 있을 만큼 관심을 갖고 있으며, 신뢰를 갖고 있다는 점을 확인받은 일이 아닌가. 나와 박 대통령과의 만남이래야 두어 번이고, 내가 무슨 정치자금을 돕거나 정치활동에 나서서 여당 편을 든 일도 없었다. 다만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내 간절한 마음이 결코 공수표가 아니라는 점을 증명하고 싶어 대학 육성에 노력을 다한 것 뿐이었다. 감사한 마음이 컸지만 따로 그런 인사를 차릴 관계도 아니고, 그럴 여력도 없었다. 대신에 박 대통령의 바람대로 내 주민등록을 천안시의 옆인 아산으로 옮겼다. 대통령에 대한 내 나름의 감사 표시인 셈이다. 천안캠퍼스는 1978년 3월에 개교했다. 개교 당시에는 ‘산업대학’이라는 단과대학으로 출범했지만 지금은 인문, 예술, 체육부터 사회과학, 자연과학, 약학, 의학 등에 이르기까지 종합대학으로서 교육편제를 완비하고 있다. 그 거대한 뿌리는 나의 비전에서 출발했지만 그 자양분은 박정희 대통령의 나에 대한 호의가 잠재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1970년대에는 대학의 증과증원이 각 대학의 미래를 좌우하는 요인이었다. 대학 간에도 치열한 경쟁과 로비가 있었으니 이 문제는 자연스레 대통령의 관심사가 되었고, 인가권 역시 대통령의 손에 있었다. 내 기억으로는 내가 총장이 되고부터, 특히 1970년대 초반부터는 우리 대학의 증원이 거부된 적이 거의 없었다. 천안캠퍼스를 개설하고 부터는 그 추세가 더 강화되어 1970년대 종반에는 사립대학 가운데 전국 10위 안에 드는 대학정원을 보유하게 되었다. 처음 내가 총장으로 부임할 당시 대학 정원을 살펴보니 우리 대학이 전국 4년제 대학 가운데 맨 끝에서 두 번째 였다. 문교부 관리들은 우리 대학의 관계자들을 만나면 “대통령 각하께서는 단국대의 증원 신청에 한번도 거부를 하지 않으시니 참으로 놀랄 일이요.”라는 전언을 하곤 했다. 증과증원의 일만이 아니었다. 지금도 회고를 하면 새삼스레 놀랄만한 일이 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8대 국회 전국구 제안을 거부한 적이 있다. 대통령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나는 10월 유신 개헌 직후 김상현 의원과의 친분으로 인해 보안사령부에 연행되고, 고문까지 받았던 전력이 있다(학연가연 2019. 1.25 김상현 편 참조). 김대중 의원 정치자금을 지원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나를 믿기 힘들었을 터인데도 지속적인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나는 “박 대통령이 내가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을 받을 만큼 중대한 혐의를 받았던 걸 모르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통치권력이 더욱 강화되던 시기였다. 1978년 12월로 10대 국회의원 선거가 확정되었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국회의원은 1선거구에 2인을 뽑는 중선거구제로 바뀌었고, 기존 전국구는 폐지되는 대신에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구에서 77명의 국회의원을 별도로 뽑아 이를 대체케 했다. 대통령 중심제를 넘어서는 강력한 권력독점으로 국내외에서 민주화 요구가 점증하고 있었다. 또 한번 나에게 정계입문의 요구가 닥쳤다. 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이 나를 찾았다. 민 장관은 1971년부터 4년 간 문교부 장관과 대한체육회장을 지낸 분으로 내가 체육계에서 각종 경기단체장을 맡으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강력한 업무 장악능력, 추진력으로 박 대통령의 아낌을 받고 있었다. 민 장관이 나를 만난 이유는 10 총선 출마 때문이었다. “이건 내가 각하의 심부름을 하는 거요. 각하께서 장 총장이 출마하기를 원하십니다. 지역구도 단국대가 있는 용산구로 배려를 하셨어요. 1선거구에서 2명을 뽑는건데, 공화당으로 나오면 따논 당상이 아니겠소. 더군다나 학교가 있는 용산구인데.” 정말 곤란한 요청, 아니 지시였다. 벌써 한 번 거부를 했던 정계입문인데 다시 거절한다면 대통령의 체면이 상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대학에서 내 삶을 다 바치고 싶었다. “장관님, 죄송하지만 이런 의사를 8대 국회 때도 받았습니다. 그때는 전국구였지만요. 선거의 당락 여부가 중용한 게 아니라 저는 곤란합니다. 도저히 이제 막 천안캠퍼스가 문을 열었고, 대학이 간신히 성장세를 타고 있는데 단국대를 버리고 국회로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단국대와 상관없이 정치계에 발을 딛고 싶지 않습니다. 정치권력과 싸우면 안된다는 소신을 가족 있지만 동시에 정치권력을 소유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내 철학입니다. 아버지의 유훈이기도 하고요. 각하께 제 진정을 잘 설득해주세요.” 민 장관은 이해하기 힘들다며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도 계속 호소를 했다. 결국은 민 장관이 설득을 포기했다. 나를 아끼는 선배님인 만큼 혹시라도 있을 후환을 같이 걱정해주기도 했다. 민 장관이 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였을까 염려했던 일들이나 긴급 상황은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1978년 가을 단풍이 짙어지던 시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산’으로 불리는 중앙정보부에서 나를 호출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데 국장급 인사였다. 나는 ‘올 것이 온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갖고 그를 만났다. 이번에도 정치 입문 얘기였다. 그런데 각도가 전혀 달랐다. “지금 박근혜 영애께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시면서 구국여성봉사단 명예총재를 맡고 계신 거 아시죠? 이 봉사단이 앞으로 박근혜 영애께서 직접 총재로 취임하시고 전국적인 봉사활동을 펼칠 겁니다. 그런데 총재를 보좌해 줄 사무총장이 필요합니다. 청와대에서 각하와 여러분들이 고민을 했는데 이 사무총장에 장 총장님 부인께서 봉사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사무총장은 유정회 소속으로 국회의원 직도 수여됩니다. 박근혜 총재 보좌역이니 국회의원 신분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육영수 여사가 1974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피격당해 별세한 뒤로 박근혜 씨가 영부인을 대신하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봉사단에 사무총장을 두고, 거기에 국회의원 신분을 준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내 아내는 식품영양학을 전공해 경기대, 국민대에서 강의를 했지만 무슨 여성운동에 나선 적도 없고, 무슨 봉사단에 나가서 리더 역할을 한 적도 없었다. 집안 일 하기도 바쁜데 전국 규모의 봉사단을, 그것도 영부인이나 다름없는 박근혜 영애를 보좌하다니... 물론 나는 반대를 했다. “아니, 전국에서 이런 일을 하고 싶어하는 여성들이 얼마나 많을 텐데요. 장차관 부인들이니 정치인, 사업가의 부인들이 얼마든지 있는데 정치도 모르고, 아는 건 식품영양학밖에 모르는 사람을 사무총장에 앉히려는 겁니까. 더군다나 국회의원이라뇨.” 그 국장의 말인 즉 실제로 이런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여성 지도자, 권력가의 부인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내 아내를 지목했다는 것이다. 봉사단은 정치 조직이 아니고, 약한 사람을 돕는 일을 하는 곳이니 그동안 청와대 근처에서 왔다 갔다 하던 사람이 아니라 공부하고 자식 기르고 남편 잘 돕는 그런 평범한 여성을 사무총장으로 초빙하라는 뜻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찬성하기 힘들었다. 아무리 뜻이 그래도 정치적 일과 단절할 수 없을 것이고, 또 그 역시 권력의 논리에 휩쓸릴 수밖에 없으리라 믿었다. 며칠이고 찬성을 하지 않고 버티자 그 국장이 나를 찾아왔다. “아니 이 자리를 탐내는 사람들이 한 두 명인 줄 아십니까. 각하께서 여러 생각을 하고 고민 끝에 결정하신 일인데 정말 이러시깁니까. 이것저것 다 반대를 하면 각하의 체면이 뭐가 되는 겁니까. 어디 장 총장님이 그렇게 반대만 하시면 단국대는 총장님 뜻대로 운영하실 수 있다고 자신하세요?” 국장의 거친 반문에 나도 끝까지 나 몰라라 버티기 힘들었다. 아니, 당시 상황에서는 모 국장의 으름장이 언제든 실현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내가 아내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못해요. 난 찬성은 아니지만 아내에게 하지 말라 강요는 안하겠습니다. 정 원한다면 그쪽에서 직접 설득하세요.” 나는 한 걸음 물러났고 아내에게는 이런 사정을 얘기하지 않았다. 며칠이 다시 흐른 뒤 아내의 답이 궁금해 물으니 사무총장직을 수락했다고 했다. “중앙정보부가 설명을 하는데 다 듣고보니 내가 거부하면 아무래도 당신이랑 학교에 뭔가 일이 나겠더라구요. 그래서 봉사활동만 시킨다면 열심히 해보겠다고 했어요.” 이렇게 해서 정말 팔자에도 없는 국회의원을 나대신 아내가 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우리 대학 학생들이 내가 새마을운동에 열심인 것 빗대어 ‘새마을 총장’이라 불렀다. 그런데 아내가 유정회 의원이 되자 나를 ‘어용 총장’으로 바꿔 불렀다. 내가 정치권력을 갖지 않으려 애쓴 이유가 바로 이같은 일들을 염려해서 였는데... 그래도 나는 모르는 척했다. 내 진심을 알아줄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 오로지 단국대학을 키우고, 내 학생들을 지키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힘센 정보기관에 끌려가 매를 맞기도 했지만 우리 대학의 학생들을 지키는 일에는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일을 하는 데도 ‘박정희 대통령이 아끼는 대학총장’이라는 후광이 큰 힘을 보태주었다. '유신체제'가 들어서고 부터는 민주화운동을 하거나 시위를 하다가 법을 적용받는 학생들은 가차없이 대학에서 추방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운동권 학생들의 제적을 거부했다. 형법의 적용을 받으면 모르지만 학칙으로 학생을 제적하는 일은 피하려 최선을 다했다. 학생만이 아니라 교수님들에게도 그랬다. 나는 동베를린간첩단 사건으로 징역형을 받았던 이들도 우리 대학 교수로 모셔오고, 강단에 서도록 했다. 일석 이희승 선생님처럼 민주화를 요구하며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운 분도 초대 동양학연구소장으로 모셨다. 심지어 박원순 현 서울시장처럼 다른 대학에서 시국사범으로 몰려 제적된 학생들도 우리 대학에 입하시켜 학업을 마치도록 했다. 그럴 때마다 겁을 주고, 으름장을 놓는 권력기관, 공포의 정보기관에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나는 이를 무시하거나 반박하면서 총장직을 수행했다. 사실 그 이면에는 이같은 박정희 대통령의 우호적 관심과 지원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단국대의 품에서 돕고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어용 총장’ 이니 ‘새마을 총장’이니 하는 그 힐난을 받은 대가가 아니겠는가. 아무튼 내 아내의 국회의원 생활은 불과 1년 여 만에 백지로 돌아갔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별세를 한 것이다. 절대 권력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려 국가사회를 철저히 통제하던 박정희 대통령인데 가장 믿었던 중앙정보부장의 손에 죽은 것이다. 허망하고 비통한 일이었다. 나는 박 대통령에게서 많은 은혜를 입었다. 비상식적인 정부의 단국대 탄압에 항의하려 대통령을 독대한 일을 시작으로 12년 여의 시간 동안 내가 가진 열정을 단국대에 쏟고 성과를 얻게 한 결과가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에 힘입은 바 크다고 생각한다. 박 대통령에게 이런 고마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달리한 것이 서운하기도 하다. 한편으로 높은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사랑과 은혜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세상의 순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학연가연을 통해 내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바로 이같은 세상의 순리에 관한 것이다. 대통령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권력을 선하게 행사하면 나같은 젊고 나약한 교육자에게 대학을 성장시키는 은혜가 된다. 나 역시 대학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단국대의 발전을 누구보다 열망하는 구성원으로서 대학의 교수, 직원, 학생들에게 내가 가진 작은 힘이나마 선하게 쓰겠다는 다짐을 실천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떤 이에게는 은혜를 베푸는 일이 될 수도 있었고,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주는 일이 될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대학이란 결국 지식과 사랑을 서로 나는 곳이 아니겠는가. 그런 인연이 새로이 우리 후배와 후세에 전해져 다시 아름다운 인연을 낳는다면 단국대는 우리 역사 속에 영원할 것이라 생각한다.

박정희 : '반혁명 고문'에서 '정계입문권유'까지 이어진 곡절(상편)

2019.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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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단국대학이 설립할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70여 년의 여정을 지켜봤다. 흐르는 시간 속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과 좋든, 그렇지 않든 많은 인연을 맺었다. 그 짧지 않은 시간 속에서 우리 대학에 가장 혹독한 시련과 고통을 주었던 사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5‧16 군사정변과 주간부 폐교’를 꼽고 싶다. 단국대학에도 힘들었지만 내 인생에 가장 큰 전기가 되었던 시간 역시 그 무렵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의 중심에 박정희 대통령이 있다. 주간부 폐교 사건이 나던 해는 1961년이었고, 나는 30세로 우리 대학에 입교해 학생과장 보직을 맡고 있었다. 선친이신 범정 선생은 당시 우리 대학 이사장직에 계셨다. 군사정부가 들어선지 얼마 안 된 1961년 7월에 ‘장도영 장군 반혁명 사건’이 터졌다. 군사정변의 핵심들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수반으로 모셨던 장도영 장군을 불과 2개월 만에 ‘반혁명 주모자’로 몰아세운 정변은 한국 사회를 얼어붙게 했다. 이 사건은 사실 ‘장도영 장군으로 대변되는 군부 내 비육사 이북출신 세력과 장면이 이끄는 민주당 정치세력’을 추방시키려는 군사정부 주체세력의 의지가 빚어낸 일이다. 그러나 이 여파가 말 그대로 뜬금없이 범정 장형 선생에게 영향을 미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선친과 장도영 장군은 같은 인동(仁同) 장(張) 씨였으니 먼 친척이었다. 고향도 이북이라는 공통점은 있었지만 그것이 막 들어선 군사정부를 전복시키는 ‘반혁명음모’를 공유할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선친은 악연을 맺었던 정상배들의 음모로 반혁명 운동에 자금을 대줬다는 혐의를 받아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졌다. 선친의 도피를 돕던 나는 중앙정보부에 아버지 대신 끌려가 3일 동안 고문과 심문을 당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어머니와 아내를 끌고와 고문으로 일그러진 내 얼굴을 보여주며 선친의 행방을 대라는 협박을 받아야 했다. 결국 풀려나기는 했지만 마음에 남은 상처가 아물기 전에 우리 대학에 더 큰 충격이 닥쳤다. 1961년 11월에 군사정부가 발표한 ‘대학정비령’에 의해 우리 대학 주간부가 폐교를 당한 것이다. 당시 전국 대학들이 실태조사를 받았는데 우리 대학은 학생대비 정교수 확보가 기준에 1명 모자르다는 결과가 나왔고 이로 인해 주간부 폐교 조치가 내려졌다(좀 더 상세한 내용은 『시대를 넘어 미래를 열다』 2011. 9. 노스보스 간. p15~p36 참조). 이런 충격을 받은 후 선친께서는 건강을 잃었다. 그 전에는 나의 유학을 허락하지 않던 범정 선생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에 시달린 일을 무척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또한 군사정부의 난폭함과 현실에 좌절하셨는지 나에게 미국 유학을 허락했다. 나는 브리검영 대학교 (Brigham Young University)에 유학을 갔다. 한국에서 몰몬교 목회활동을 한 스펜서 파머(Spencer J. Palmer, 1927-2001)라는 분이 귀국을 해서 박사학위 연구를 하는데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에 대한 주제가 있었다. 이를 수행하려면 한국, 중국, 일본의 관련 자료를 영어로 번역해야 해야 했다. 파머 교수는 한중일 3개 국어를 잘 알면서 영어도 할 줄 아는 연구 조교가 필요했다. 나는 이 공채 공고를 접했고 응시를 해 합격을 했다. 미국 왕복 항공편, 브리검영 대학 전액 장학금 및 생활비를 지원해주는 좋은 조건이었다. 1963년 9월부터 대학원에 입학해 파머 교수의 연구를 돕고, 박사학위 공부를 하느라 두 배의 노력을 해야 했지만 정말 보람찬 면학의 시간이었다. 파머 교수는 내 도움으로 훌륭한 박사 논문을 완성했다. 내 능력을 인정한 파머 교수는 나에게 박사학위를 빨리 마치고 아예 미국 이민을 하라고 권했다. 나도 그럴 결심을 했다. 한국에서 당한 시련이, 그 과정에서 누구도 아닌 단국대를 나온 동문들과 당시 대학을 이끌던 학장 등 원로 교수, 법인의 이사들이 안겨준 상처가 젊은 나에게는 너무 아프고 쓰라렸기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병이 위중해지고 홀로 한국에서 살림을 꾸리던 아내의 건강도 쇠약해진다는 기별에 나는 잠시 귀국을 했다. 1964년 9월경, 아버지를 뵙고 미국 이민 결심을 알린 뒤 아내와 미국으로 떠나려고 잠시 귀국을 했다. 그러나 단국대와의 인연을 나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이민 수속을 하러 들어갔던 입국은 같은 해 12월 30일에 아버님이 별세를 하면서 계획이 비틀어졌다. 부친의 별세 직후 이사장직에 오른 박정숙 이사장님의 강권으로 다시 단국대 일을 보게 되었다. 이후 1966년에 학장의 보임을 받고나니 내 삶은 내 것이 아니라 단국대의 것이 되고 말았다. 내 나이 서른다섯 때의 일이다. 증권회사도 해보고, 토목건설회사 일도 해봐서 어떻게 하면 돈을 버는지 경험도 있었다. 장학금과 생활비도 줄테니 미국으로 이민 와서 공부를 하라는 제안도 받아 놓았다. 한창 젊은 내가 욕심을 내고 내 앞길을 도모한다면 못 이룰 것이 무엇일까. 만약 안정되고 강건한 교세를 가진 대학이었다면 나는 단국대에 남지 않고 기업 경영을 하거나 학자로서 나의 인생을 개척해나갔을 것이다.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나는 1961년 주간부 폐교로 인해 약해진 교세를 일거에 전환시킬 계기를 찾는데 고민했다. 그 고민 결과 ‘종합대 승격’이 최선책이라는 점에 착안을 하고 이를 실현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아무리 내 주변을 둘러봐도 우리 대학 안에서 나를 도와줄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그래 젊은 내가 나서자. 나 하나 잘되자는 일이 아니고 억울한 일을 당한 대학의 원을 풀어달라는 일인데 뭐가 두려울까.” 굳은 각오로 종합대학 승격 추진에 나섰다. 가만 생각해보니 주간부 폐교나 내 부친의 반혁명 관련 혐의나 모두 군사정부가 등장하고 나서 일어난 일이고, 그 최고 권력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있었다. “박 대통령의 군사정부 시절에 일어난 일로 단국대학이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그 피해를 시정해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담판을 지어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막상 내가 무슨 힘이 있고, 배경이 있어서 청와대를 들어가 대통령을 독대한단 말인가. 대통령을 독대할 기회를 만들어줄만한 사람을 직접 찾기로 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일제 강점기에 대구사범(경북대 병설 교육대의 전신)을 나와 교사 생활을 했고, 지금도 그 동창생들과 교유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작정 대구사범 동창 출신 유명인을 찾아갔다. 서정귀 당시 흥국상사 사장을 찾아갔다. 국회의원, 재무부 차관을 지내고 박정희 대통령의 측근으로 재계에 입신해 자금 후원을 한다는 실력자였다. 그러나 단박에 내 부탁을 거절했다. 그 밖에 여러 사람에게 부탁을 했지만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러던 중 고려대 교육대학원장이던 왕학수 박사님이 나를 돕겠다고 나섰다. 내가 고려대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던 중에 만난 인연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왕 박사님이 나를 돕겠다며 소개를 시켜준 사람은 권상하 당시 청와대 정보비서관이었다. 권상하 비서관은 박정희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동기생이었고 박정희이 대통령이 직접 정보비서관으로 발탁했다. 대통령 친인척에 대한 엄격한 관리를 전담하는 측근이었다. 왕 박사님의 주선으로 권 비서관을 면회할 수 있었다. “대통령 각하를 왜 독대하겠다는 거죠? 뭘 원하는 겁니까?” 권 비서관이 딱딱한 말투로 나에게 물었다. “대통령 각하께 바칠 것이 있습니다.” 그러자 무엇을 바칠 것인지 정보비서관인 자신은 알아야 하니 말하라 했다. “대통령 각하 외에 다른 분께는 결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쁜 일이 아니니 직접 뵙고 말씀드리게 해주세요.” 지금 생각하면 무슨 배짱으로 그런 말을 하기로 결심했는지 이해가 안되지만 내 표정이 하도 진지해서인지, 아니면 젊은 학장이라는 사람이 설마 엉뚱한 일이야 하겠냐는 믿음에서 였는지 “그럼 연락을 기다리라”는 답을 주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청와대 비서실이라며 연락이 왔다. “아침 6시까지 권상하 비서관 집으로 오라.”는 전갈이었다. 그날 권상하 비서관 댁에 갔더니 권 비서관은 자신의 관용차인 지프차에 동승하라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청와대에 들어갔다. 오전 10시로 기억하는데 접견실이라는 곳으로 안내를 받아 들어갔더니 대통령이 들어왔다. 자리를 잡자 권 비서관이 동석해 용건을 말해보라 했다. “각하께 뭐를 바친다는 거죠?” 나는 우리 대학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 반드시 솔직하고 직선적으로 말하겠다고 결심했다. “각하, 단국대학을 각하께 바치고자 합니다..” “단국대를요? 사립대학인데 왜 단국대학을 나에게 바친다는 겁니까?” 박정희 대통령이 정색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대통령은 웃음을 지었지만 약간 긴장하고 정색을 하며 권상하 비서관을 쳐다보았다. 권 비서관도 당황했는지 대통령 앞에서 화를 내며 나를 끌고 나가려 했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대통령이 권 비서관을 만류했다. “권 비서관, 들어봅시다.” 나는 숨을 크게 쉬고 대통령께 내 마음을 담아 진정을 했다. 독립유공자 표창을 받은 선친이 억울하게 반혁명 분자로 낙인 찍히고 나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일, 이로 인해 응당 받아야 했던 채권을 포기하고야 반혁명 후원자의 음해를 벗어날 수 있었던 일, 거기에 결국 교수 1명이 부족하다 해서 주간부를 폐교 당하고 그 뒤 개인 집을 팔아서 교직원 월급을 주면서 대학을 운영한 일.... 그동안의 억울한 일을 풀어낸 나는 이렇게 매듭을 지었다. “그러니 사립대학인 단국대를 저는 더 이상 운영할 힘이 없습니다. 국가이든 대통령 각하께서든 이 대학을 기증받아 좋은 대학으로 키워주신다면 더 이상 보람이 없겠습니다. 아니시면 우리 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켜 주시면 단국대가 회생하고 제 모든 걸 바쳐 대학을 성장시키겠습니다. 그리고 각하께 누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 청원에 좀 당황하는 표정이었지만 가타부타 언급도 하지 않았다. 대통령임에도 시종일관 사립대의 고민을 듣는 자세가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면담이 끝나자 권 비서관은 나를 내쫒듯 청와대 밖으로 보냈다. 그러나 내 사연을 터무니 없게 받아들여 내치거나 불쾌해 하지도 않았다. 이 점 역시 고마운 일이었다. 그 뒤 나는 국회의원도 만나고, 장관도 만나고, 국무총리도 만나고 정말 최선을 다해 단국대의 억울함과 종합대학 승격의 절실함을 설득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직접적인 도움의 손길을 피부로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정말 무수히 많은 곡절을 겪고, 어려움이 있을 때면 뭔가 단국대와 나에 대한 호의가,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뜻에 가까운 이들일수록, 알게 모르게 나에게 무언의 도움이 작용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학장으로 취임한지 70여 일 만에 우리 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겠다는 다짐을 실현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단과대학, 종합대학, 전문대학이라는 명칭으로 대학의 수준이 정해지지 않고 그 차이도 지금의 정서로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1967년 당시에 종합대학이냐 아니냐의 기준에 따라 대학에 대한 신뢰, 또는 대학졸업장에 대한 기업의 인식이 달라졌다. 다른 측면에서는 대학 발전의 중대한 갈림길이어서 전국 대학들의 로비가 극심했고, 그 후유증으로 장관이나 정치인들의 운명이 갈라지기도 했다. 오죽하면 우리 대학의 종합대 승격이 공표되자 이를 시기한 정치인들이 나를 공격하고, 중앙정보부도 나서서 나를 연행하기에 이르렀을까. 실제로 1967년 이후 우리 대학은 단과대 체제에서 벗어나 학과 신설, 모집정원 증원에서 급성장세에 접어들었다. 초대 총장으로 부임한 나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대학을 키우는데 내 모든 정성을 바친다는 각오로 밤낮없이 일했다. 종합대학 승격이 된 이듬해, 1968년에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이 좀 더 가까워진 계기가 생겼다. 이에 앞서 우리나라는 1965년 10월부터 전투병력을 베트남에 파견했다. 전 세계적 냉전이 치열했던 당시 정세에서 베트남전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진영의 입김이 들어간 전쟁이었다. 미국의 전략을 거부하기 힘든 우리나라는 베트남파병을 받아들였다. 1966년 경에는 파견 병력이 청룡부대 1개 여단, 맹호부대 1개 사단, 지원부대를 합치면 군단급 규모에 이르렀다. 당시 베트남전쟁에 파견된 국군을 위문하는 일은 정부가 나서지 않아도 사회적으로 큰 관심사였고, 중대한 민간 봉사였다. 정부는 대학생, 교수들로 위문단을 구성해 젊은 파월군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주길 바랬다. 종합대학의 학생처장, 학생회장, 교수들이 참여한 전국 규모의 위문 봉사단이었다. 그런데 이를 이끌 단장으로 대학총장이 필요함에도 묘하게 나서는 이가 없었다. 나야 이제 막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대학의 총장이라 나설 입장이 안 되어 관망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치열한 월남전 일선을 누벼야 하는데 자칫 그 전장에서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대학 총장들의 발길을 잡아 둔 이유였다. 베트남은 전형적인 게릴라전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전방과 후방이 따로 없고, 어디서 폭탄과 수류탄이 터질지 모르는 형국이었다. 거기에 한국군은 그 용맹함으로 인해 미국군과 더불어 가장 최일선에서 전쟁을 감당하고 있었다. 이 위험지대를 2주 동안 누비고 다녀야 하니 쉽게 “내가 가리다”나서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교육부의 권유를 받고 잠시 망설였다. 원로 선배 총장들이 있는데 나서기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기도 싫었고 심지어 당시 37세인데 내가 인솔하고 나갈 학생처장들은 모두 나보다 한참 연상이었다. 전장의 위험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젊은 총장이라는 대학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미룰 명분이 없었다. 당시 문홍부 문교부 장관도 “차라리 가장 젊은 장 총장이 나서서 다른 선배 총장들 부담을 덜어주는게 좋겠소.”라며 권유했다. 결국 내가 단장을 맡겠다고 했다. 전국대학 학생처장, 학생회 임원 등을 해서 관련 공무원까지 합치니 400 여 명이 가까운 대식구였다. 해군 수송선을 타고 월남에 도착해 격전지를 방문했다. 육로에서는 일행들은 군용트럭을, 나는 헬리콥터를 이용했다. 어디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긴장도 겪었다. 모두들 지치고, 힘든 일정이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장병들을 만났다. 장병들도 정말 형제, 부모를 만난 것처럼 반겨주었다. 처음으로 정부의 공식적 사업을 이끄는 중책을 맡았지만 큰 보람을 얻은 활동이었다.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아서인지, 좋은 평가가 줄을 이어서인지, 박정희 대통령은 나와 주요 인물들을 청와대로 불러 사업보고를 겸한 위로 다과회를 열었다. 청와대에서 두 번째로 대통령을 만났다. 내가 귀국 보고를 직접했고 박정희 대통령은 진심으로 위문단에게 위로와 고마운 인사를 건넸다. 간담회에서 대통령은 나에게 질문을 했다. “장 총장, 동란 때 전쟁에 나갔어요?” 한국전쟁 때 참전했냐는 질문이었다. “네, 학도의용군 1기생이었습니다. 나중에 학도병이 육군으로 편입되어서 1등병으로 제대했습니다.” 내 답변을 들은 박 대통령의 낯에 부드러운 웃음이 흘렀다. 한국전쟁이라는 난리 통에 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그 전쟁을 피하려 그 못지않게 각종 연줄과 핑계를 동원해 복무를 회피한 일도 많았다. 군인으로서 전쟁을 치룬 박 대통령이기에 전쟁에 참전한 총장이 나름 흡족했으리라. 그래서 일까, 위문단을 위로하는 틈틈이 박 대통령은 나에게 많은 격려를 해주었다. 자리를 함께 한 교육부 장관이나 관료들, 정치인들도 나에게 인사와 덕담을 건네었다.

『박은식전서』로 시작해 45년간 이어온 독립운동가 후손의 선의

2019.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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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학을 설립하신 범정 장형 선생은 독립운동을 하셨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내 부친의 공적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으며 살아왔지만 후손으로서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자부심에 앞서 명예로운 정신적 유산을 우리 대학 발전과 교육적에 제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왔다. 그런 소명의식을 바탕으로 대학을 운영하며 얻은 인연 가운데 소중하면서 보람찬 경우가 있다. 우리 대학 법인의 22대 이사장을 지낸 박유철 전 국가보훈처 장관과의 인연이 그렇다. 박유철 전 장관과 교례를 하게 된 배경에는 동양학연구소 설립과 연구 활동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단과대학이었던 단국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면서 “우리 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겠다”는 약속을 했다. 고군분투 끝에 이를 단기간에 실현하고 총장에 취임했는데 이 때가 1967년이었다. 총장으로 취임하고 내가 가장 역점을 둔 일이 동양학연구소 설립이었다. 민족사학을 자부하는 우리 대학에 한국 최고의 한국학 전문 연구소를 만들겠다는 것이 내 포부였다. 당대의 석학이신 일석 이희승 선생님을 모시고 연구소의 기틀을 잡아갔는데 이때 가장 중요한 일이 <동양학총서>를 펴내는 일이었다. 한국학 연구의 기본이 되는 명저, 고서적 가운데 국내에서 원본을 찾기 힘든 원전을 찾아 이를 영인본으로 간행, 보급하자는 사업이었다. 동양학연구소의 노력에 학계도 뜨거운 찬사를 보내기도 했는데 그 네 번째 편찬 작업이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였다. 백암 박은식 선생은 유학자로서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문> 등 애국언론을 통해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중국으로 망명해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선임된 원로 독립운동가이다. 박은식 선생은 항일애국운동만이 아니라 역사학자로서도 뚜렷한 업적을 쌓은 분이었다. 특히, 『한국통사』는 일제의 침략과 민족운동의 전개과정을 실증적으로 체계화한 명저였다. 이 밖에도 구한말이나 망명시절에 각종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 많은 글을 발표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했는데 이런 글들이 일제강점기에 유실되고 불온서적으로 취급되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다. 약 4 년여의 시간을 들여 이 자료와 서적들을 집대성하고, 교정과 해제를 거쳐 마침내 1975년에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를 사회에 봉정할 수 있었다. 이 전집이 나오자 가장 먼저 구입을 신청한 대학이 서울대학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사범대 역사과가 뜨거운 찬사를 보내왔다. 왜냐하면 서울대 사범대 역사과는 박은식 선생의 역사관이나 한국사를 바라보는 인식을 자신들의 정신적 뿌리로 존중하는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큰 감격 속에 학계 원로들을 모시고 출판기념식을 갖도록 했고 이 자리에 박은식 선생의 유족들도 초대해 애국지사를 조상으로 둔 자부심도 높여드리고자 했다. 내 기억 속에는 아마도 1975년 2학기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9월이었다. 기념식 자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박은식 선생의 가족을 뵈었는데 나중에 우리 대학 법인 이사장으로 초빙한 박유철 전 보훈처 장관을 만날 수 있었다. 박유철 전 장관은 박은식 선생의 손자이다. 그의 집안은 조부와 부친이 모두 항일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가의 집안이었다. 부친이신 박시창 장군(朴始昌, 1903 ~ 1986)은 황포군관학교, 중국 육군대학을 나온 엘리트 군인으로 국민당 정부군에서 항일 전쟁에 참전하고, 상해 임정의 광복군 참모부 참모 일하다가 해방이 되자 상해의 광복군 수호지대장으로 중국에 망명했던 동포, 광복군들의 귀국을 지휘했던 독립투사였다. 나중에 귀국 뒤에는 국군 창설에 몸담았고 한국전쟁에 종군해 군단장을 지내고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박 장군이 해방 직후 상해지대장으로 있을 때 비슷한 경력을 가진 김홍일 장군은 광복군 총참모장을 지내며 만주 심양시에서 교포들의 환국을 도왔다. 이 분이 평북 용천 출신이고 나의 부친 범정 장형 선생과 막역한 사이여서 나도 모친의 손에 이끌려 인사를 드린 적이 있었다. 박유철 전 장관과는 처음 만났지만 김홍일 장군과 부친이 만주 망명시절에 가진 교유관계, 그리고 김홍일 장군과 박시창 장군이 중국대륙을 종횡하며 광복군으로 항일전쟁을 치룬 전우관계를 더하면 간접적으로 적잖은 인연이 있는 셈이었다. 그렇다고 출판기념회에서 이를 언급하고 교분을 만들 일은 아니어서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를 박시창 장군께 정중히 헌정하고 행사를 마쳤다. 책을 받고 박시창 장군은 감격에 겨워했다. “선친의 논문, 저서를 수집해 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라고 평생 생각을 했지만 작업이 너무 힘들어 손을 놓고 있었습니다. 오늘 책을 접하니 내 가슴에 맺힌 한이 풀리는 느낌입니다.” 박 장군은 몇 번이나 일선 이희승 선생께 감사를 드리고 나에게도 과분한 치하를 주었다. 당시 박유철 전 장관은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미국의 조지아텍에서 학사과정을 마치고 MIT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미국 유수기업에서 일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해외인재 유치’ 정책에 따라 귀국을 했다. 이런 경력은 나중에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알게 된 사실이다. 출판 기념식에서 부친 옆에 서있는 박유철 청년은 내 눈에는 과묵하면서 강인한 의지와 명석한 두뇌를 가진 젊은이로 보였다. 그 뒤로 별다른 일을 함께 할 기회는 없었다. 다만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공식적 모임에서 인사를 나누곤 했었다. 박유철 전 장관은 나를 처음 만났을 때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뒤에 건설부 공무원 교육을 총괄하는 교육원장으로 전직했다. 그러다가 내가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아 일을 하다보니 박유철 전 장관과 직간접적으로 만날 일이 생겼다. 특히 박유철 전 장관은 백범 선생 기념관 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좋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 때 서로 힘을 모을 일이 자주 생겼다. 박유철 전 장관은 이 일을 계기로 독립유공자 추모 사업에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괄목할만한 사업이 자신의 조부이신 박은식 선생의 유해를 고국으로 봉환하는 사업에 참여한 일이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박은식 임시정부 대통령, 신규식 선생 등 중국 상해에 있던 독립운동가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고 정부 차원에서 이를 추진해 봉환이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박유철 전 장관의 진중한 품성이 유가족들을 화합하는데 기여를 했고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뜻에 부합되어 독립기념관 관장으로 봉직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일을 하다가 나와 박유철 전 장관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 전 장관의 부인되는 분이 우강 양기탁 선생(1871~1938)의 손녀라는 것이다. 양기탁 선생은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고 신민회를 창설한 뒤 고려혁명당을 세워 무장투쟁을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그 분의 경력을 떠나 선친인 범정 장형 선생은 생전에 양기탁 선생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해준 일을 자주 말씀하셨다. 만주에서 귀국 한 뒤 대학 설립을 추진하면서 주위 사람들과 정담을 나눌 때면 빠짐없이 양기탁 선생의 용감한 투쟁 행적을 얘기하고, 당신께서 이에 감동해 은밀한 모금을 통해 많은 자금을 지원했음을 자랑스러워 하셨다. 선친이 그토록 존경하고, 뜻을 같이했던 분의 손녀가 박은식 선생의 손자와 혼인을 맺어 해방된 조국에서 자녀들을 기르고 살다니... 박유철 전 장관은 자신의 집안 내력에 대해 별 말이 없었고, 나 역시 그런 성격이니 1975년에 처음 만난 뒤 이런저런 공식적인 일로 만남을 가지면서도 이런 인연을 털어놓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100년이 넘는 시간을 관통하는 현대사 속에서 가시밭길을 함께 걸었던 선열의 자식으로서 어찌 공감하는 바가 없겠는가. 신비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뒤로 나는 박유철 전 장관을 마음 속으로 믿고, 그의 가정에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편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박 전 장관은 문민정부에서 독립기념관 관장의 중책을 맡았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 4대, 5대 관장을 6년간 봉직하며 열심히 소임을 수행하는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응원을 했다. 이윽고 노무현 정부에서 장관급으로 격상된 보훈처 장관으로 발탁되었다. 우리나라의 국가유공자들을 숭모하면서 유가족들을 돌보는 국가행정의 총본산을 책임지는 자리이니 박 장관으로서도 선조에게 자랑스럽고 보람찬 자리인 셈이다. 그런데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공감은 하며 지냈지만 박유철 당시 장관은 참으로 우리 대학에 고마운 일을 많이 해주었다. 첫 번째는 범정 장형 선생의 묘소를 한남동 캠퍼스에서 죽전캠퍼스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생긴 문제를 해결해준 일이다. 한남캠퍼스 시대에도 범정 선생의 묘소는 학교 안에 있었다. 오래 전부터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인정받아 교정 안에 설치가 가능했다. 면적이 비좁아 학생들의 휴식 공간이 많지 않던 한남캠퍼스에서 설립자 묘역 근처는 분위기가 호젓한 숲속에 있어 학생들이 독서를 하고 사색을 할 수 있어 좋아했다. 그런데 죽전캠퍼스를 이전하면서 허가 신청을 하니 용인시에서 난색을 보이는 것이었다. 독립유공자인 건 인정하겠지만 대학 설립자인 것도 사실이니 교정에 새로이 묘역을 꾸미는 것은 안된다는 입장이었다. 법령이 바뀌어서 캠퍼스 안에 묘지를 설치하는 일이 금지되었다는 것이다. 난감한 일이었다. 대학을 새로 설립하는 것도 아니고 이사를 온 것인데 다른 시설물의 진입은 되지만 묘소는 안된다니... 나로서는 대학의 창학정신과 무형의 전통을 담고있는 교육적 상징으로 설립자 묘소를 전승시키는 일이 당연했지만, 내 부친의 묘소이기도 해 자칫 공과 사를 혼돈한다는 뒷얘기를 들을 수 있가에 오히려 나서지 못하며 냉가슴을 앓고 있었다. 이때 박유철 당시 보훈처 장관이 나서서 묘역 설치허가를 하도록 용인시를 설득해주었다. 범정 선생 묘역은 단순히 대학 관계자 묘소가 아니고 국가유공자로서 자신의 독립운동 정신을 대학교육에 투신하려 모든 것을 바치고 삶을 마감했으니 당연히 그가 세운 대학에 안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국립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의 연장으로 인정하는 공식문건을 전달해 관계 기관이 잘 보전하라는 당부도 있었다. 국가 중앙 관청으로서 독립유공자의 예우와 관련된 일이니 지방자치단체가 막을 일이 아니라는 설득도 주효했다. 다행히 용인시도 이를 받아들여 무사히 설립자 묘역을 유지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독립기념관에 범정 선생의 어록비(語錄碑)를 세워준 일이다. 독립기념관은 2004년부터 독립운동에 헌신한 주요 지사들의 시, 어록, 경구를 비석으로 만들어 전시하기로 했다. 현재까지 모두 애국지사 103명의 어록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범정 장형 선생이 포함되어 있다. 유가족인 나에게나 우리 단국인에게 자랑스러운 일인데 이를 대학에서 강권하거나 하지 않았음에도 독립기념관 측에서 기꺼이 어록비 설치를 감당했다. 어찌된 일인지 경위를 알아보니 박유철 전 장관이 1975년에 우리 대학이 펴낸 『박은식전서(朴殷植全書)』의 발간에서 받은 감동을 되갚겠다는 뜻에서 베푼 후의였다는 것이다. 어록비 설치는 독립기념관장이나 보훈처 장관의 결재가 있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심의위원회의 토론과 비준을 거쳐야 했다. 관계부서에 필요성을 설득하고, 위원들을 비준을 호소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박 전 장관은 기꺼이 이를 감수했다. 독립기념관장으로 6년 간 재직하고, 보훈처 장관으로 재임하던 박유철 전 장관의 경륜과 선의 덕분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2009년에 세워진 범정 선생의 어록비에는 “독립은 남이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만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는 경구가 실려있다. 해마다 우리 대학의 젊은이들이 국토순례를 하거나 기념식을 가질 때 이 어록비를 탐방하며 단국인의 자부심과 애국심을 다짐한다. 이처럼 좋은 교육시설, 애교심의 상징을 독립기념관에 둘 수 있게 된 것이 박유철 전 장관과의 인연에서 비롯된 일이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세 번째는 대학이전사업 과정에서 불거진 정부와의 갈등을 완화시킨 일이다. 노무현정부가 들어선 이후 이전 사업 시행권을 둘러싼 사업자들의 분쟁이 커지더니 정부의 개입을 불러들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대학 이전사업의 지연이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금융기관에 투입한 구제금융 상환을 지체하는 원인이 된다는 논리를 씌우고, 예금보험공사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나는 검찰에 기소를 당하고 이사장직까지 물러나야 했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배경에는 내가 아끼던 직원과 그를 통해 추천받은 변호사, 그리고 이를 비호하여 이권에 동참하려던 정치인들의 야심이 적잖게 작용을 했다. 당시 이전사업의 법적 분쟁을 교육부 장관까지 나서서 나에게 책임을 지도록 강압하는 분위기였고, 마치 내가 어마어마한 국고를 마음대로 유용한 사람으로 법정에 서야 했다. 그 분노와 실망감도 컸지만 나를 쳐다보는 지인들의 눈길도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2005년 8월에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열리는 광복절 축하행사에 대통령을 대신해 정부대표로 참가해달라는 공식 제의가 왔다. 광복 6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해외동포의 중요행사에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참가하는 것은 나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이 되었다. 이어서 2년 뒤에는 중국 중경에서 열리는 임시정부 수립 88주년 기념식에도 역시 대통령을 대신하는 정부대표로 참가했다. 이 일은 나를 음해하던 정치인이나 그들의 청탁에 따라 이전사업을 흔들려 하던 관료, 사업자들에게 큰 시사를 주는 일이 되었다. 대통령을 대신해, 정부를 대표해 정부 차원의 행사를 주도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나에 대한 신원보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이런 일을 만들 의지도 없고,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이런 일을 한 사람이 박유철 당시 보훈처 장관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얘기지만 박 전 장관은 “내가 존경하는 분인데 그런 불상사를 당한 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면서 “독립유공자의 후손이고 평생을 교육사업에 헌신한 분이니 얼마든지 광복절 기념행사를 주관할 자격이 있눈 분이라 믿었다.”고 했다. 그래도 대통령의 결재를 받아야 하는 일인데 자신있게 나의 결백을 믿고, 남들에게도 이를 설득하려면 적잖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믿고 길러준 비서와 이전 사업이 잘되도록 단국대 편에 서서 나쁜 사람들을 막아달라고 교수로 초빙한 이가 나를 수렁에 빠트렸는데 정작 별다른 친분도 없고, 30여 년 전에 책을 출판하며 맺은 인연을 이렇게 은혜로 생각하고 되갚아주는 박 전 장관에게 새로운 신뢰가 생겼다. 어렵고 긴 시간이 흐르면서 죽전캠퍼스는 무사히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과거 시행사들이 제기한 소송, 복잡하게 얽힌 공사비 등의 정산과 이를 통한 부채 청산...신중하면서도 확고한 신념, 이권에 흔들리지 않는 정직한 성품을 가진 분을 이사장으로 모셔야 했다. 나는 공직을 물러나 있던 박유철 전 장관을 떠올렸다. “그 분이라면 이사장직을 맡아 이전사업의 마무리를 지을 것이다.” 나는 결론을 내리고 박유철 전 장관을 만났다. 이사장직을 맡아달라는 것은 그에게 내가 처음으로 한 청탁인 셈이다. 박 전 장관은 고민 끝에 내 제의를 수용했다. 2008년부터 3년 간 이사장직에 있으면서 박 전 장관은 연일 격무에 시달리고 다양한 난제에 시달려야 했다. 하나씩 하나씩 쌓인 문제들을 해결하던 그는 다시 광복회 회장으로 불려갔다. 독립지사를 조상으로 둔 박 전 장관에게는 애국지사를 추모하면서 그 후손들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가장 기쁘고 보람찬 소명이리라. 살다보면 여러 인연을 만난다. 나는 선의를 다해 은혜를 베풀지만 그 대가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니다. 아니, 나를 이용해 자신의 앞길을 여는 데 만족하지 않고 대학을 위험하게 만들고, 파탄내려는 이들도 있다. 그 험난한 여정에서 박유철 전 장관같은 분을 만났다는 것은 나에게도 큰 행운이다. 기울어져 가던 조국을 위해 구국계몽, 투쟁의 횃불을 들었던 박은식 선생을 추모하려 펴낸 책을 통해 그 후손들을 만나 주고받은 우의는 늘 내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 평소에는 피차 나누지 못한 말이지만 이렇게 글로나마 고마운 마음을 남기고 싶다.

박애정신으로 역사의 앙금을 뛰어넘은 이시가와 다카오 선생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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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양국의 역사해석을 둘러싼 갈등이 확대되면서 경제와 안보문제로 불이 번지더니 급기야 혐이니 혐일이니 다투다가 양국 민간부문도 분쟁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전쟁과 한일병탄이라는 아픈 역사를 가진 양국에 그나마 60 여 년에 걸쳐 쌓은 친선관계가 뿌리째 흔들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나는 중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기도 했지만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매동소학교(현 매동초등학교)에서 교육과정을 마쳤다. 당시 총독부는 국어, 그러니까 일본어를 학교에서 일상 언어로 사용토록 강제하고 있었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와 만주에서 생활하며 유년기를 보냈기에 본능적으로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일본어는 어색하기도 했거니와 이미 유년기부터 일제에 대한 반항심을 몸으로 길러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조선어’(당시 국어는 일본어였다)가 입밖으로 불쑥불쑥 튀어 나오곤 했다. 그럴 때 선생님이 계시면 그 날은 치도곤을 당하는 날이 되었다. 국어(일본어)를 안쓰고 조선어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손바닥을 맞거나 뺨을 맞고 걷어차이는 폭력을 당했다. 그런 폭력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잘못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분하고 화가 나는 심정이었다. 그것이 지금도 70년을 넘어서까지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힘이 센 선생님이 힘 약한 어린이를, 내 나라말을 안 쓴다는 이유로 구타를 할 만큼 제국주의통치는 무섭고 비인간적 체제였다, 피식민 국가의 국민은 서러운 운명이었다. 내가 학연가연에서 밝히듯 내 힘이 닿는 한 사람들을 돕고 청년 인재를 아끼는 이유도 바로 이 어린 시절에 겪은 설움을 통해 ‘억강부약(抑强扶弱)’의 뜻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만주로 망명을 하고, 어린 아들은 식민지에서 매를 맞으며 아동기 시절을 보냈으니 나 역시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했고,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어서 한일관계를 미움과 갈등의 맥락에서만 해석하지 않을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거기에 대학을 경영하면서 만나 인연을 맺은 많은 일본인들과의 우의도 큰 역할을 했다. 그 중에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일본인으로 이시가와 다카오(石川堯雄)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이시가와 선생은 1916년 생으로 동경대에서 치의학을 배운 치과의사이다. 츠루미대학(學見大學)에 치학부(齒學部, 우리의 치과대학에 해당)를 설치하는 개설위원으로 초빙되어 교수 생활을 시작한 분이다. 츠루미 대학은 치의학 분야에서 일본의 최상위권의 성가를 거두고 있는데 이같은 경쟁력의 기반이 바로 이시가와 선생이 쌓은 학덕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분과의 인연으로 1987년 츠루미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었고 지금도 양쪽 대학이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대학이 이시가와 선생과 맺은 인연은 자매결연에 앞선 치과대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에서 시작했고 치과대 병원을 설립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이시가와 선생은 우리 치과병원 설립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이자 안내자였다. 어찌보면 오늘날 한강 이남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천안캠퍼스 치과병원을 있게 한 동반자라고 해도 과한 말이 아니다. 내가 이시가와 다카오 선생을 만난 것은 1977년이었다. 당시 나는 마음 속으로 천안캠퍼스를 종합대학으로 성장시킨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다른 대학들은 지방에 설치한 제2캠퍼스를 ‘분교’로 취급하며 서울에 있는 본교의 부속기관으로 취급하는 정도였다. 나는 미국의 대학처럼 천안캠퍼스를 문자 그대로 하나의 완결된 교육, 연구체계를 갖춘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 만들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당초 천안캠퍼스를 설립할 때 천안시에 제시한 미래상이고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인구가 갓 10만 여 명을 넘은 천안시에 내가 대학을 세우겠다며 나설 때 천안시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은 내 의지와 포부를 반신반의했다. 나는 그들에게 천안을 한국 최고의 교육도시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우리가 성공하면 다른 대학들이 몰려올 것이라 확신했고 그렇게 설득했다. 당시만 해도 천안시는 경부고속도로에 인접한 교통요충지임을 내세워 관광업을 미래 발전목표로 갖고 있었다. 이에 근거해 지금 천안캠퍼스가 위치한 부지도 관광호텔을 세울 부지로 설정하고 있었다. 나는 천안시장에게 그 부지를 대학캠퍼스 부지로 활용하자고 했다. 부지 매입을 위한 자금이 들어있는 통장을 천안지역 유지들의 공동체인 천안시번영회에 맡겨놓고 일을 시작했다. 엉뚱한 부동산 투자가 아니냐는 지역사회의 의구심을 처음부터 불식시키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고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렇게 시작한 천안캠퍼스를 처음 약속대로 발전시키려면 치과대나 의과대를 세우고 병원을 세워야 천안시와 충남지역의 의료복지도 증진시키면서 천안캠퍼스의 성장기반도 확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의학관련 교육연구시설을 세우는 일이니 쉬울 리가 없었다. 자금력도 없었고, 쌓아놓은 노하우도 없었다. 당연히 다른 대학의 선례를 알아보고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아야 했다. 우선 국내 최고라는 서울대와 연세대 치과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결과는 외면이었다. 아니 사실상의 거절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의학계는 자신들의 영역에 높은 울타리를 쌓길 원한다. 진입장벽을 높이려면 치과나 의과 대학 설립, 병원 건설부터 의료장비 확보 등의 노하우를 공유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거기에 천안시에 치과대와 병원을 세운다니, 그들 생각에는 단국대가 되지도 않을 일에 헛된 꿈을 꾼다고 비아냥거리기 좋은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이렇다 저렇다 답이 없었다. 나는 일본에 가보자는 결심을 했다. 한국에서 안 되니 외국에서 병원 설립 자문도 받고 뭔가 돌파구를 찾자고 생각했다. 상대국가로 일본을 정했다. 가깝고, 대학의 운영체제도 비슷하면서 의학이 발달한 곳이 일본이니 멀리 생각할 수도 없었다. 마침 일본에는 <일본사립치과대학협회>가 있었다. 이를 알고서 나는 바로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협회의 사무총장에게 우리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내 응답이 왔다. 추천해준 대학과 병원은 두 개였다. 하나는 동경에 있는 니혼대학교의 마츠도치과대학(松戶齒科大學)이었고 다른 하나가 요코하마에 있는 츠루미대학(鶴見大學)의 치과학부였다. 나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일본 치의학계에서 학덕이 높고 인품이 좋은 교수님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한국의 치의학자들한테 들을 수 없었던 병원 설립에 대한 자문을 듣고 싶었다. 내 말을 들은 그 사무총장은 망설이지 않고 학자 한 분을 추천해줬다. 그 분이 바로 이시가와 다카오 선생이었다. 더군다나 그 분은 바로 우리가 방문할 츠루미대학 치과학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뭔가 좋은 방향으로 일이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만남을 주선해달라 부탁하고 바로 요코하마에 있는 츠루미대학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1977년 8월로 기억한다. 일본의 여름은 우리나라의 무더위를 능가한다. 앉아있어도 짜증이 나는 더위 속에서 캠퍼스를 찾아가 만난 이시가와 선생은 생김새부터 호인의 기질이 보였다. 둥근 턱선과 인자한 눈빛이 누구라도 포용할 인상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내 생각을 전했다. “자그마한 지방도시인 천안시에 치과병원을 세우고 싶습니다. 우리나라가 공업화는 빠르게 진행하지만 의료복지는 그렇지 못합니다. 좋은 의료시설은 서울에 편중되어 지방 농촌도시는 그 혜택을 받기가 힘듭니다. 더군다나 치과 병원은 보건소가 고작이고 있더라도 작은 개인병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지방도시에도 서울 못지않은 치과 전문병원을 세워 농민들의 구강보건을 돌보고 싶군요. 제가 그 일을 하고 싶은데 뜻은 있지만 처음 하는 일이라 여러모로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시가와 선생은 내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되물었다. “장 총장님은 의사 출신 총장이신가요?” “아뇨, 저는 역사학을 전공했습니다. 문과대 출신이죠.” 내 답변을 듣는 이시가와 선생은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의외로군요. 의사 출신도 아니신데 시골 사람들의 의료 복지에 이처럼 강한 소신을 갖고 계시다뇨. 제가 오늘 정말 훌륭한 총장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힘닿는 데로 돕겠습니다.” 강한 어조로 이시가와 선생은 처음 만난 나에게 병원 설립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시가와선생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나를 만난 날 저녁에 만찬을 대접한다는 의사를 전하더니 그 자리에 쓰루미대학 치의학부 보직교수 전체를 불러 동석케 했다. 나를 비롯해 출장에 동행한 우리 대학의 병원 설립 관계자들과 보직 교수들이 상견례를 하도록 주선하겠다는 취지였다. 이 자리에서 이시가와 선생은 저녁 식사의 목적을 밝히며 직접 “장충식 총장님과 단국대학이 하려는 훌륭한 일들이 성취되도록 우리 츠루미대 치의학부 교수들이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같은 동포인 한국의 치과대 의사들이 외면하고 거절했던 일을 일본인들이 나서서 팔을 걷어 부친 것이다. 의사로서 가장 기본인 박애주의(博愛主義)를 발휘해 국경을 넘어 도움을 주려는 이시가와 선생의 소신은 단순히 감사한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울리는 일이었다.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귀국을 해서 치과대 부속병원 건축에 착수했다. 이시가와 선생의 지원을 약속받고 치과대학과 치과대 부속병원 설립 작업을 본격화했다. 천안캠퍼스 신축 작업이 선행되어야 해서 이를 준공한 뒤 치과대학 신설을 허가받았다. 여기에 4년의 세월이 들어갔다. 천안캠퍼스가 안착되었다는 확신이 들은 1981년 가을에 이시가와 선생, 그리고 당시 츠루미대학 치과병원 원장이었던 와타나베 선생 등 3명을 초청했다. 우리 대학의 현황을 직접 시찰하고 난 그들은 “단국대가 이렇게 크고 한창 발전하는 대학인 걸 미처 몰랐다”며 치과병원을 충분히 성공시킬 힘이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후 우리 대학의 관계자들을 츠루미 대학에 보내 병원 설계, 교육과정 등을 자문받게 했다. 그들 역시 실무자들을 파견해 병원 부지, 입지, 원하는 기자재의 배치 등을 자세히 조사했다. 구체적 건축 계획이 잡히자 그들은 아예 자기들이 병원 건축 설계도 해주기로 했다. 사실 국내에 병원 건물을 설계할 전문가들은 그리 많지도 않았고, 설계비도 큰 돈이 필요로 하는 난제였다. 국내에 맡기면 수억 원을 상회하는 거액이 필요했다. 감당하지 못할 금액을 요구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있었는데 이시가와 선생을 비롯한 츠루미 대학의 전문가들은 이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중에 설계도 및 시방서를 완성해 이를 제출했는데 나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 건설 사업을 시작하면서 입수한 우리나라 대학의 치과병원은 1권으로 매듭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제출한 설계도는 그 분량이 10배를 상회하고 있었다. 대단히 정밀하고 꼼꼼한 설계도였다. 더욱이 그 설계도는 일본어가 아니라 모두 영어로 작성해 놓았다. 그들은 이 설계도를 만들기 위해 한번은 츠루미 치과대의 교수 및 치과진료장비 제작회사인 모리타제작소의 관계자 15명이 천안캠퍼스 병원 부지와 우리나라 치과병원을 시찰, 조사하고 가기도 했다. 이 때도 출장비를 부담하겠다는 내 제의를 거절하고 전액을 츠루미대학이 부담했다. 그들은 이렇게 정성을 들여 만든 병원 설계도를 우리 대학에 선선히 기증을 했다. 나중에 이만한 규모의 병원 설계비는 얼마나 필요한지 알아봤더니 달러 기준으로 약 40~50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들의 진정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2년 치과병원을 착공하고 나니 역시 재정문제가 걸림돌로 다가왔다. 병원 공사비는 어찌 어찌 꾸리겠지만 그 안에 들어갈 치과 의료장비를 수입해야 하는데 이를 해결하기가 막막했다. 사실 나는 치과대 설립과 치대 병원 신축을 기획하면서 우리나라 치의학계에 대한 조사를 했다. 국내 치의학은 의과대의 산하에 부속된 일개 전공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의료시설도 종합병원의 진료과목에 병합되어 있는 현실이었고, 치과 의사를 낮춰보는 편견이 있었다. 종합병원 내에서 인식이 그러니 진료시설 투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이를 바로잡고 싶었다. 독립된 치과대를 세웠으니 병원도 종합병원 규모의 독립적 시설과 시스템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를 돕는 일본 측 교수들도 내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독립병원을 세운다고 나섰으니 그 큰 규모의 병원에 들어갈 의료장비도 이에 걸맞게 채워줘야 하지 않겠는가. 병원 착공 당시 우리 대학은 대대적인 교육시설 투자를 진행하고 있었다. 대학 본관, 천안캠퍼스 학생회관, 체육관, 과학관 등 건설 공사가 중을 잇고 있었다. 이 상황에 치대 부속병원에 설치해야 할 기자재 구입비를 산출해보니 미화 80만 달러가 필요한 것으로 나왔다. 당시 원화로 환산하면 6억4천 여 만원 안팎의 거금이었다. 당시 등록금이 1인당 40만원 정도였으니 1천6백 여 명의 학생이 내는 등록금을 합쳐야 의료장비를 들여올 수 있는 규모였다. 대학 수입으로 감당이 어려운 대형 투자였다. 지금이라도 하기 힘든 투자였다. 산업은행을 찾아가 대출이 가능한지 설득했지만 교육기관에 뭘 믿고 그 큰 돈을 대출하냐는 논리로 거절당했다. 고민 끝에 나는 다시 이시가와 선생을 찾아가 이를 털어 놓았다. 이시가와 선생은 이 문제를 들고 유수의 의료장비 전문 회사인 모리타제작소, 모리타 상회를 찾았다. 이 회사의 CEO인 모리타 대표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모리타 대표는 구입 대금을 일본수출입은행에서 우리 대학에 대출해주어 대금을 충당토록 주선했다. 혹자는 모리타 대표가 자기네 회사 장비를 팔려는 욕심에 대출을 주선하지 않았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사야 할 기자재는 모리타 회사만이 아니라 독일 제품도 상당히 많았다. 이 장비들을 포함한 구입대금 대출만이 아니라 대출 상환을 보증할 보증인이 필요했는데 이 보증문제도 모리타 상회가 서주기로 했다. 처음 보는 외국의 대학에 이같은 호의를 베풀기가 과연 쉬었을까? 설계도를 작성해 무상기부하고, 장비 구입비를 보증까지 서면서 대출하도록 도와주는 이 호의의 참뜻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치과병원, 치의학계에 새로운 기원을 열어달라는 대학인으로서의 동료애, 국경을 넘어 사회적 약자들에게 좋은 의료 서비스를 하자는 인간애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건물을 짓자 츠루미대학의 교수, 모리타 상회의 기술자들이 와서 꼼꼼히 장비를 설치하고, 점검했다. 의료 기자재를 설치하는데 1년이 필요했다. 이 기간 동안 이시가와 선생은 츠루미 치과대의 시설 담당 간부를 우리 치대병원이 개원때 까지 한국에 상주시키며 자문, 기술 감독을 하도록 했다. 우리대학에서 채재비 부담을 하려고 해도 절대 받아들이 않고 자신들의 비용으로 다 감당해주었다. 단국인의 도전정신, 일본 전문가들의 우의로 치과대 병원을 준공할 수 있었다. 그 때가 1984년 9월 경이었다. 개원 이후 단대 치과병원의 위용을 본 국내 치의학 관계자, 병원 관계자들은 시설과 규모에 감탄을 했고 입소문을 탔다. 견학 신청이 줄이어 병원 운영에 방해가 된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다른 대학은 우리 최과대의 시설을 보고 자기들의 현실을 성찰했다. 국내 치과대와 치과병원들도 시설 현대화 사업을 앞 다퉈 개시했다. 우리 대학 치과대 부속병원이 가져온 작은 성과인 셈이다. 다행히 처음 일본수출입은행의 대출조건대로 10년 간 분할을 해서 전액 상환을 했다. 사실 일본의 전문가들도 인구 13만 명의 소도시에 이만한 설비를 갖춘 치과병원을 세워 기대만큼 운영 수익을 거둘 수 있을지 염려하는 의견도 있었다. 인구가 50만 명은 되어야 안정적 운영이가능하다고 전망했다. 개원 초기에는 약간의 시련이 있었다. 그러나 개원할 때 최고의 의료진을 초빙했고 교직원 모두가 힘을 합쳐 무사히 대출금을 상환할 수 있었다. 나는 이시가와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어떤 대가도 없이 큰 호의를 베푼 이시가와 선생에게 내 우정의 뜻을 전하고 싶었다. 1989년 3월 그가 오랜 교직생활을 접고 정년 퇴임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개교 42주년을 맞아 선생과 부인을 초청했다. 그리고 선생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증정했다. 총장인 내가 바치는 최고의 헌사인 셈이었다. 현재 우리는 일본과 역사, 경제, 국제정치 등 여러 면에서 근 60년 만의 큰 갈등을 겪고 있다. 나 역시 일제 강점기에 나고 자란 세대로 마음 속에 남아있는 여한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나는 일본의 역사적 책임과 아울러 이시가와 선생같은 휴머니즘과 박애정신을 갖춘 의인이 많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우리의 이웃이다. 이웃과 싸울 수는 있지만 그를 적으로 내몰고 서로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새롭게 주고 받는 일은 피해야 한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역사를 평가하고 자성하는 일은 언제나 필요하다. 동시에 미래를 향해 마음을 열고 우정을 공유하며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한국과 일본이 함께 증진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일본을 이기는 길이고 조국을 발전시키는 길이다. 끝으로 이시가와 다카오 선생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박원순 : 시국사범 굴레 쓴 젊은이에게 대학문을 열어준 이유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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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면서 정치상황은 한겨울의 호수처럼 얼어붙었다. 비상계엄시대나 마찬가지인 현실이었지만 대학생들의 항거는 끊이지 않았다. 1975년 5월이었던 일로 기억한다. 서울대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 앞서 4월에 발생한 서울대 학생 김상진 군이 10월 유신을 철회하라는 주장을 외치며 할복자살을 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학생들이 5월 22일 김상진 군 추모 행사를 하다가 대대적인 항의시위를 벌인 것이다. 4천 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는데 10월 유신 발동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고 투석전까지 벌어졌다. 이 시위로 서울대 총장이 사임을 하고,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과 남부서장이 경질되었다. 70명이 넘는 서울대 학생들도 무더기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살거나 제적이 되었다. 여기에 박원순 군(당시 서울대 사회계열 재학)이 있었다. 이 시위가 있던 해인 1975년은 박원순 군이 입학을 한 해였다. 입학한 지 두 달도 안 된 신입생이 알면 무엇을 얼마나 알았겠는가? 나중에 들어보니 운동권 조직에 속해서 시위를 한 것이 아니라 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진압경찰들이 시위 학생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장면을 보고 시위에 참가했다고 했다. 동기는 단순했지만 결과는 엄혹했다. 박원순 군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국가 사범으로 전락했다. 19살의 미성년자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은 박 군은 4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물론 대학은 제적을 당했다. 법학과 진학(당시는 계열별 입시였고 2학년 때 학과를 선택했음)을 꿈꾸는 시골 수재에서 국가 안보를 훼손한 위험인물로 전락하면서 박 군과 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1979년도 입시전형이 막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우리 대학을 담당하는 정보기관의 출입자가 나를 면담하고자 했다. 만나보니 박원순 군에 대한 일이었다. 정보기관 출입자의 주장은 이랬다. “박원순이란 학생이 단국대에 입학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박원순을 합격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장 총장님께 꼭 전달하라는 상부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나는 기관원의 말이 나의 원칙을 거스르는 말이라 반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특별 지시를 받았다지만 대학이 학생을 입학시키고 말고는 담당 학과 교수와 총장인 나에게 있는 것이지 어찌 정보기관의 책임자가 입학 시켜라 말라 하는 거요. 법적인 하자가 없으면 입학을 하겠다고 원서를 넣은 학생을 놓고 합격 여부를 미리 정하는 것은 교육기관이 할 일이 아니니 상관에게 내 방침을 잘 전해줘요.” 담당 기관원을 돌려보내고 교무처(당시는 입학업무도 담당했음)에 박원순 이라는 학생이 입학원서를 제출했는지 알아봤다. 박원순 학생 입학원서가 접수되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학생처장, 교무처장과 업무 담당자들을 불러 현황을 파악토록하고 입장을 피력하라 했다. “박원순 학생은 이미 서울대에서 제적당하고 교도소도 복역하고 나온 학생입니다. 타 대학에서 형사 처벌받고 제적된 학생을 입학시켜서는 안됩니다. 유신정부의 방침이 시위 학생은 대학에 적을 두어서는 된다는 것인데 우리 대학 재학했다가 제적된 학생도 아니고 다른 대학의 제적생을 받아줄 수 없습니다.” 처장들이나 직원들 모두 학생보다는 정권에 밉보일 때 당할 대학과 나의 안위를 걱정해 박원순 군의 입학을 불허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내 생각을 밝혔다. “박원순 군은 서울대 학생 신분으로 데모를 주동했다고 해서 이미 제적을 당한 학생입니다. 지금 박원순 학생은 편입생이 아니라 신입생으로 입학하는 겁니다. 일반 고등학교 졸업장하고 예비고사 성적표를 갖고 입학 허가를 요청한 겁니다. 단국대 입시생으로 자격을 갖추었는데 서울대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우리 대학이 서울대의 처사를 따라가라는 법은 없어요. 우리는 우리의 철학과 입장이 있는 겁니다. 교육 당국이나 정보기관의 입장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나는 결론을 내리면서 ‘다른 학생과 동등하게 입시를 치루도록 해주라’고 거듭 지시하였다. 총장 재직을 하면서 나는 반정부 데모에 참가한 학생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시위에 참여하여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을 위반해 실형을 받으면 제적 처분을 받기는 하지만 법적 책임을 다 지고 나오면 전원 복학을 허락했다. 또한 그들이 졸업해서 사회인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내가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편의를 제공했다. 학생들은 정부가 독재라고 생각하면 반대 의사를 밝힐 권리가 있고 그런 시위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 교수들의 자세여야 한다고 믿었다. 이제와 하는 얘기지만 나는 박원순 학생이 단국대학에 지원한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원순 군이 직접 밝힌 얘기를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총장님(박원순 씨가 쓰는 장충식 이사장의 명칭)을 처음 빈 것은 내가 서울대에서 제적되어 감옥에 갔다 온 후 어느 대학에서도 받아주지 않던 때였다. 당시 유신 정권 아래에서는 시위 사건으로 학교에서 제적되고 감옥까지 갔다 온 사람은 어느 대학도 갈 수가 없었다. 천형과도 같은 것이었다. (중략) 장충식 총장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총장님은 예상과는 달리 젊은 시절에 데모한 것은 자랑이면 자랑이지 결코 흠이 될 수 없다면서 오히려 격려를 해 주셨다. 시대의 굴절 때문에 상처 입은 젊은이에게 그것은 새로운 인간상이기도 했다. 사회에 대한 좌절과 고민이 어려 있을 때 이런 총장님도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후 단국대학교를 거쳐간 많은 사람들에게서 총장님에 대해 내가 느꼈던 동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런 모습이 누구에게나 여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략) 그 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되고 민주화의 봄바람이 잠시 불었던 1980년 초, 서울대학교에서 복학하라는 통지가 왔다. 나는 한 번 내쫓은 대학을 어떻게 다시 다니겠는가 하고 그 복학 통지서를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 단국대 사학과를 야간에 까지 수강하여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정말 주경야독인 셈이었다.”(『빈 들에 씨를 뿌리며』, ‘비범한 정신력의 중재(中齋)’ 중 발췌) 박원순 군의 말처럼 나는 학생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이데올로기나 정권의 이해관계로 가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가진 정의감,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나 역사의식을 잘 가르쳐서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대학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박원순 군은 우리 대학에 입학할만한 좋은 성적을 얻었고 결국 입학했다. 그러나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도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경찰 공안담당 부서에서는 박 군이 입학하면 다시 소요를 일으켜 대학과 사회를 어지럽힐 거라 근거 없는 예단을 하며 여러 가지 협박을 했다. 나중에는 학원 담당 고위 간부들도 나에게 여러 안좋은 얘기를 하며 입학 철회를 압박했다. 심지어 학교 안에서도 박원순 학생을 합격시키기 전에 그로 하여금 입학하면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케 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교육자로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내는지 화가 났지만 웃는 낯으로 자제를 시켰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 언약을 주었다. “박원순 학생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 했어요. 공부하기도 바쁠 겁니다. 만약에 당신들이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면 내가 총장의 직을 걸겠소!” 물론 박원순 학생은 입학 뒤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내가 기증한 집을 기반으로 고시 준비 학생들을 위해 설립된 법선재에서 후배들과도 같이 공부를 하기도 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이윽고 재학생 시절에 법원 사무관 시험에 합격해 등기소 소장을 지내더니 1980년에는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로 임용되었다. 검사에 임용된 지 6개월인가 지나서 박원순 검사는 스스로 검찰을 떠났다. 사람에게 벌을 주는 직업을 견디기 힘들다고 했고 변호사로 인권을 지키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1982년 소중한 배필을 만나 혼례를 치루는 데 나에게 주례를 부탁했다. 물론 쾌히 승낙을 했다. 나중에 박 변호사는 “(신원보증인이 되어 대학 입학을 허락한) 인연으로 평생에 한 번 있는 결혼식의 주례로 모셨는데 신랑의 넥타이 색깔이 무엇인지 물어보신 후 당신이 넥타이 색깔까지 거기에 맞추어 매고 나오셨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의 결혼식에는 많은 하객들로 북적였는데 그들 가운데는 정보기관 사람들도 많았다. 내가 주례를 서려 식장에 들어가려는 데 정보과 형사가 “아니 이제 총장님께서 데모꾼 주례도 서주시냐?”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그 말 속에 심한 비아냥이 느껴져 지금도 불쾌한 기분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정보기관의 비뚤어진 감시가 있던 없건 박원순 군은 가정에도 충실하면서 자신의 활동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학업에도 시간이 허락하는 최선을 다한 끝에 1985년 사학과를 졸업했다. 인권변호사로 맹활약하던 박원순 변호사는 법률적 성과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시민운동에 나섰다. 나는 먼발치에서 박 변호사를 응원했다. 그는 1995년 참여연대를 창립하고 사무처장에 취임했다. 하루는 나를 찾아 와 도움을 요청했다. 내용인 즉 우리 대학 병원이 업무 상 보험회사와 보험을 많이 계약하는데 이 알선 업무를 자신이 이끄는 참여연대에 위임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시민운동 단체이다 보니 활동의 자율성을 지키는 것이 핵심원칙인데 대기업의 기부금, 정부의 지원금을 함부로 받아들일 수 없고, 시민들의 후원금도 미약해 재정이 어렵다는 고충을 밝혔다. 물론 나는 이를 받아들였다. 개인이 아니라 신민운동의 정의를 지키려는 박 변호사를 노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를 안정적 기반에 올려놓은 박원순 변호사는 이번에는 <아름다운 가게>라는 새로운 사업 모델을 갖고 나를 찾아왔다. 처음듣는 사업이라 내용을 물었다. “생활형편에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 쓰지 않는 의류, 가정용 비품 등을 기부하면 이를 수집, 정리하고 수선하여 필요한 사람들이 구입하도록 하는 사업입니다. 자원도 절약하고, 환경도 보호하고, 중산층이 서민들의 가계에 보탬도 되면서 수익금은 다시 시민운동단체에 환원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단국대 교직원도 참여하고 총장님께서 나서주시면 이 운동을 확산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장호성 당시 부총장으로 하여금 대학 차원에서 이를 돕는 방안을 찾도록 했다. 장호성 당시 부총장은 박원순 변호사와 경기고등학교 동기동창이어서 친분이 두터워 이내 ‘후원기관 협정식’을 맺게 되었다. 기증용 물품을 수집하는 시설도 설치하고, 홍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개인적으로는 아내와 함께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가까운 이웃들에게 이를 소개하고 여러 물품들을 기부하도록 했다. 내가 사는 워커힐아파트는 젊은이들보다는 나이든 분들이 많이 살거니와 소득 수준도 낮지 않은 세대가 많아서 그만큼 도움 될 만한 물품들이 많았다. 아내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600가구 가운데 알고 지내는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부를 설득했다. 나중에는 친구들까지 참가토록 했고 며느리(주 : 장호성 전 총장의 부인 조기정 씨)도 힘을 보탰다. 여러 물품을 모으고 거두어 아름다운 가게에 보내다 보니 수집한 분량이 좀 아쉽다 싶을 때는 아예 철이 바뀌면 입어야 할 옷들도 꺼내서 기증품에 넣기도 했다. 많이 기부해서 이름을 과시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애정이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새로운 시민운동의 실마리를 열려는 박원순 변호사의 노력을 격려하고픈 마음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 때 활동을 열심히 한 며느리는 <아름다운 가게 서초점> 점장을 맡기도 했다. 2003년 당시 내며느리는 모 대학교의 영문과 교수로 출강하고 있었다. 남편의 동창이 하는 일이라 관심을 갖고 참가했는데 아름다운 가게의 가치를 마음에 들어 하더니 급기야 기존의 직업은 뒤로 하고 이 일에 전념했다. 일체의 보수도 받지 않고 개인의 이익보다 시민 공동체의 발전에 애정을 기울이는 며느리가 한결 지혜롭게 느껴졌다. 박원순 변호사가 하는 아름다운 가게에 대해 나는 주위에서 받는 좋은 평가를 기뻐했다. 정치계 입문에 대한 얘기가 돌 때 나는 그가 서민을 위한 자선사업과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을 하리라 기대했다. 어느 날 갑자기 서울시장에 출마를 한다고 해서 깜작 놀랬다. 진심으로 나는 그가 정치적 권력을 잡지 않기를 희망했다. 박 변호사는 정의를 위해 권력을 비판하면서 겪는 고초는 감수할 수 있지만 권력을 행사하면서 부딪힐 갈등은 매우 힘들어할 성격으로 보였다. 1천만 명을 대표하는 서울시장이 된다면 얼마나 많은 갈등을 감당해야 하겠는가... 그래도 선거를 시작하자 나는 처음 생각과 달리 박원순 후보를 돕고 있었다. 이왕 출마했는데 낙선을 하면 또 상처를 받을까 염려되었다. 내가 그의 결혼의 주례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어느 잡지사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는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분명히 그가 서울 시장에 출마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내 생각을 밝혔다. 그러나 막상 그가 최종적으로 서울시장 입후보로 등록을 하자 내 생각은 바꾸어졌다. 휴대폰을 한 대 더 마련했다. 기존의 휴대폰은 업무용으로 겸용을 하니 전화가 수시로 오고 사용이 번거로웠다. 서울시에 거주하는 친지들을 찾아보고 전화를 돌렸다. 내가 있는 단국대를 나온 인재이니 시장으로 활약할 기회를 주라는 부탁을 했다. 그런데 내 얘기를 듣는 상대편은 “박 후보가 무슨 단국대 출신이냐, 언론에는 서울대로 나온다.”며 나를 당황하게 했다. 많은 미디어에서 그를 단국대가 아닌 서울대 출신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박 후보가 학력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도 나왔다. 언론의 속성에 실망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박 후보를 도와달라며 전화를 돌렸다. 얼핏 추산해보니 전화만 1천 통을 넘긴 것 같았다. 그래도 박원순 후보에게는 일체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왕 시작한 일이니 동문이 잘되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한 일었을 뿐이다. 나중에 선거에서 당선되고 박원순 시장은 나와 아내, 그리고 아들 내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헤아려보니 그의 주례를 서고 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였다. 저녁 자리보다 우리 동문 20만 명 가운데 처음으로 서울시장이 나왔다는 그 사실이 기뻤고, 나에게 이런 기쁨을 준 박 시장이 고마웠다. 나와 박원순 시장의 이런 저런 인연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에서 많은 부탁이 들어왔다. 세상 인심이란 그런 것이고 애써 그런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 연락을 않고 지낸다. 우리는 ‘대학(大學)’이라는 단어를 ‘크고 심오한 학문’을 배우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대학’에는 그 정신적 터전,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게 가지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이에게 시국사범의 굴레를 씌우고 삶을 송두리째 흔들면서 이를 당연시하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도 우리 기성세대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 수도 있다. 젊은이에게 더 넓고 관대한 문호를 열어주려는 노력이 대학의 본분일 것이다. 그 인간적 풍토에서 미래를 열어갈 인재가 성장하지 않겠는가.

노태우 : 럭비선수 인연으로 탈냉전, 남북화해의 물꼬를 열다

2019.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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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대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다. 그 분과 나는 1932년 생으로 같은 나이이기도 하지만 대학시절 럭비선수로 활동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나는 서울대 사범대, 그 분은 육군사관학교의 럭비부 선수였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한 공사, 해사는 모두 스포츠를 통해 군인정신을 기른다는 교육 방침을 갖고 있어서 서로 경쟁심이 대단했다. 럭비 경기는 개인은 막강한 체력이 필요하고, 단체로는 빈틈없는 단합이 필수적인 종목이다. 공격과 수비의 역할이 분명하고, 과감한 전진과 후퇴하지 않는 감투정신이 럭비의 강점인데 이는 군인정신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 사관학교로서는 럭비를 교기처럼 떠받들 수밖에 없었고 럭비 선수는 사관학교의 주목을 받았다. 나 역시 서울대 사범대의 럭비부에 속해있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문예반과 송구부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한국전쟁 때 학도의용군으로 전쟁을 겪으면서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격언을 몸으로 깨달았기에 대학에 진학해서는 럭비부에 입단했다. 서울대 사범대 럭비부는 일제시대부터 유지된 전통있는 럭비팀이었다. 평균 성적을 B학점 이상 유지해야 선수 생활이 허용되어서 선후배 모두 엘리트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사범대 럭비부는 또한 내 기억으로는 전쟁 중에 서울대가 공인한 운동부로는 유일했다. 그만큼 자부심이 강했다. 전쟁 통에 서울대 운동장을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서 운동 여건은 좋지 않았다. 따라서 그나마 멀쩡한 운동장을 가진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연습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육사 럭비부와 연습 경기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대회를 앞두면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육사 럭비부와 만나는 일이 매일이다 시피 했다. 그렇게 4년을 보내니 육사 선수들과 우정도 가볍지 않았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은 럭비부 주장이었으니 더 자주 만난 셈이었다. 특히 나는 스포츠 만이 아니라 공부에서도 노태우 전대통령과 인연이 있다. 노 전대통령이 육사시절에 법학을 배웠던 이광신 교수님이 계시는데 이 교수님은 내가 휘문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의 담임 선생님이셨다. 한국전쟁이 나자 이 교수님은 군복무를 치루느라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가셨고, 거기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광신 교수님은 그 뒤에 내가 우리 대학으로 초빙했고, 부총장을 지내시며 정년을 하셨다. 서울대나 단국대 교정에서는 아니었지만 나와는 또 다른 ‘학연’을 갖고 있는 셈이었다. 이같은 각별한 인연으로 그 분은 나를 변함없이 신뢰했고 올림픽 유치부터 북방정책, 남북 단일팀 협상 같은 중대사에서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내가 노태우 전 대통령과 서울올림픽 유치 캠페인에 나서게 된 첫 발자국은 전두환 전 대통령 때문이었다. 나는 스포츠를 통해 우리 대학의 젊은이들을 스포츠정신을 갖춘 지도자로 키우고 싶었다. 럭비, 씨름, 스키, 스케이트, 조정 등의 비인기 종목을 키운 것도 스포츠가 가진 교육적 기능을 인기 종목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내 소신 때문이었다. 그런 활동이 이어져 대한체육회 이사 겸 대학체육위원회 위원장(1977년~1983년)을 맡고 있었다. 제5공화국이 출범한지 얼마 안된 1981년 봄이었다.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동생이자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전경환 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형님께서 문교부(현 교육부 전신) 장관을 맡기고 싶어 하십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도 비슷한 제안을 받은 바 있었고 전두환 대통령과도 럭비선수로 같이 운동을 했던 인연도 있었다. 거기에 5공화국 출범에 공을 쌓은 여러 지인, 원로들이 나를 천거했다는 풍문도 들은 바 있었다. 물론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계나 관계에 발을 내딛지 않는다는 내 철학, 교육자가 권력을 가지면 결국 자신도 권력에 망가진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내 철학을 설파할 수는 없어서 “제가 허물이 많은 데 문교부 장관이 되면 다른 대학 총장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서 사양을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대한체육회장을 맡으라는 것이다. “나를 높게 평가하시는 건 고맙지만 대한체육회장은 상근직입니다. 대학 총장 일을 하기도 벅찬데 체육회장으로 상근하면 단국대학에 누를 미치는 일이니 양해해주세요.” 이렇게 설명했더니 다음에 한국올림픽위원회(KIOC) 부위원장으로 일해 달라는 요구가 왔다. KIOC 위원장은 대학체육회장이 겸직하도록 되어 있으니 부위원장이라도 맡으라는데 이를 거절하면 정부에 반대하는 총장으로 비칠까 염려해 수용했다. 당시 대한체육회는 유신정권 당시에 임명된 주요 인사들이 물러나면서 신군부 인사들이 빈자리를 채워나가던 일종의 과도기였다. 이 때 가장 큰 화두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학체육회를 중심으로 선언한 ‘올림픽 유치 사업’이었다. 사실 올림픽을 ‘대한민국 서울’로 유치한다고 세계 스포츠계에 선언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을 당하면서 스포츠계는 혼란 속에 손을 놓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박정희 정부 시절에 우리나라는 1970년 아시안게임을 서울로 유치했다가 파기한 경력도 있었다. 아시안 게임 유치는 성공했지만 경제개발 우선론과 무장간첩사건 등이 겹치면서 벌금 25만 달러를 물어내며 개최권을 반납했다. 세계 스포츠계에서 큰 비난을 받았고 신용을 잃어버린 계기가 되었다. 국내 상황이 어렵다고 기껏 올림픽 유치를 세계인에게 공언하고 나선 마당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적 자존심과 신뢰성의 문제가 될 판이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올림픽 유치 캠페인을 제대로 전개할 형편도 아니긴 했다. 우선 중심이 될 대한체육회가 흔들리고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존 당시 그의 측근이었던 박종규 경호실장이 육영수 피격사건으로 낙마를 해 앉은 자리가 대한체육회장이었다. 올림픽 유치 사업은 박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결정된 사업이었다. 나는 당시 대한체육회 이사로 있었는데 박종규 회장이 검토하던 서울올림픽 유치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었다. 올림픽이 단순히 ‘달러를 소비하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경제와 문화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국가개발의 계기’라는 점을 역설했다. 박종규 회장은 “그렇다면 당신이 나랑 같이 박 대통령께 가서 올림픽 유치 필요성을 설명하자.”는 그의 지시 아닌 지시를 받고 이사 자격으로 동참해 같은 박대통령에게 논리를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 뒤 당시 중앙정보부가 분석에 나서서 서울올림픽 유치 가능성이 적지 않고, 경제개발에도 이롭다는 보고서가 나와서 올림픽 유치를 공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올림픽 유치 선언이 1979년 3월에 있었는데 바로 그해 10‧26이 발생해 서울의 봄을 거쳐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단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이 사퇴를 했고, 조상호 전 청와대 의전실장이 후임으로 와있었다. 올림픽 유치 사업을 하자던 주역이 없어졌으니 사업의 추진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아예 서울올림픽 자체를 반대하는 쪽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직후 측근들에게 서울올림픽 유치 활동를 중단시키고 새마을운동 역시 계승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전두환 정권은 유신정권의 후계자가 아닌 제5공화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의 상징인 새마을운동을 이어받으면 새로운 정부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는 정치적 문제라기 보다는 올림픽을 유치하면 도로, 경기시설 등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데 당시 극심한 불경기인 만큼 국가 재정에 무리를 주는 사업에 돈을 쓰지 않겠다는 경제적 계산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1979년 12월에 IOC로부터 1988년 올림픽 유치 후보도시로 공인받았음에도 1981년 2월, 제5공화국 출범 뒤에는 경제개발에 방해가 된다는 논리를 앞세운 고위관료들의 반발로 유치 신청 철회라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한체육회 부회장직을 맡은 지 한 달도 안 된 시간에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있던 이상주 수석이 나를 불렀다. 이 수석은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입니다. 서울올림픽 유치 사업을 포기한다는 결의를 해주십시오.”라는 부탁아닌 부탁을 했다. 대한체육회와 한국올림픽위원회가 공동 이사회를 열어 박정희 정부에서 공표한 서울올림픽 유치를 포기한다는 결의를 통과시키고 공식화해달라는 것이다. 서울올림픽을 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뜻임을 강조했지만 나는 따르지 못한다는 의지를 명확히 밝혔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이는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한 공언입니다. 지금 어려운 경제현실을 들어 올림픽이 경제력을 탕진한다는 주장을 경제 관료나 정치인들이 대통령께 여러 부정적 건의를 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만 해도 동경올림픽을 하고 나서 일본 상품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확 달라졌고 그래서 수출도 더 살아났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경제인들이 앞장서서 지금 1988년 나고야 올림픽을 유치한다고 저 난리를 치는 것 아니겠어요. 이코노믹 애니멀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본능적인 장사감각을 가진 일본이 손해를 본다면 저렇게 관료, 기업, 정치인들이 하나로 뭉쳐서 나고야 올림픽을 열게 해달라고 인심을 얻으려 전 세계를 누비고 있겠습니까?” 이상주 수석은 내 말의 취지를 이해는 하면서도 대통령의 지시이니 수용해달라며 헤어졌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조상호 대한체육회장을 만났다. “회장님은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의 의전실장을 지내신 분이잖습니까. 정권이 바뀌어도 박 대통령이 국제무대에 공언한 바를 이제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회장님이 나서서 청와대를 설득하셔야 합니다.” 조상호 회장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일단 올림픽 유치 포기를 위한 이사회 결의는 지연시키면서 전두환 대통령의 인식을 바꾸는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노태우 당시 정무 제2장관의 도움이 컸다. 조상호 회장과 나는 대한체육회를 통해 올림픽이 국가발전에 미치는 긍정적 사례를 역대 올림픽의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하여 보고서를 만들어 청와대에 제공했다. 노태우 장관도 이에 찬동해 전두환 대통령의 가까운 거리에서 서울올림픽의 중요성과 효과를 설명해나갔다. 자신의 소관 분야인 외교와 안보 쪽의 논리로 서울올림픽이 세계인의 축제인 만큼 이를 준비하고, 개최하는 7년 동안 북한의 대남 침략 위협을 감소시킨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같은 안보논리에 적극 동감했다. 전 대통령은 다시 마음을 바꿔 서울올림픽 개최를 결심했다. 우리보다 국력이 앞선 일본(1980년 당시 일본의 GNP는 우리나라의 16배였음)보다 유치 캠페인도 늦게 시작했으니 유리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쪽에서는 중앙정보부가 백업을 하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같은 기업 총수, 서울시장 등 민간인이 전면에 나서도록 했다. 나고야 올림픽 유치위원들은 한국을 우습게 보고 자신들이 승리한 듯이 기세를 과시했다. 노태우 장관은 나를 불러 면담을 하며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제 한국과 일본의 국가적 자존심을 건 싸움이 됐다며 자신을 도와 IOC 위원들의 마음을 돌리는 득표 활동에 전력을 기울여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1981년 7월 루마니아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의 한국선수단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대회 기간 내내 나는 선수단의 성적보다도 해외 스포츠계 인사들에게 우리나라가 올림픽 유치에 진정성을 갖고 있으며 얼마든지 좋은 대회를 치룰 자신이 있다고 역설하고 다녔다. 힘있는 국제 스포츠계 인사들은 아시안 게임 반납 등의 과거를 예로 들며 우리 한국이 과연 진짜로 올림픽을 유치하겠다는 각오가 있는지를 의문시하고 있었다. 유치 활동이 확실한 전망을 보이지 않아 안절부절하고 있던 1981년 여름이었다. KOC의 김운용 부회장이 나에게 정보를 주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장 총장님, 제가 5월부터 유럽, 아시아 지역의 IOC위원들을 만나고 돌아왔잖아요. 어느 정도 한국의 올림픽 유치에 대한 진정성은 믿게 되었는데, 중동지역 아랍 국가들은 대부분 일본 나고야에 마음이 기울어 있더라구요. 이대로 가면 투표단이 82명인데 한국을 지지하는 위원들은 25명 안팎일 겁니다. 지지자를 더 늘려야 하는데 제가 알아보니 쿠웨이트의 쉐이크 파하드 NOC위원장이 핵심입니다. 이 양반에게 장 총장님이 단국대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시면 어떨까요? 그러면 본인에게도 영예로운 일이고 방한 기간 중에 우리가 잘 설득하면 한국에 친근감을 가질 테고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흔쾌히 응낙했다. 쉐이크 파하드 위원장은 쿠웨이트 왕의 막내 동생이었다. 아시안 올림픽위원회를 관장하는 책임자이고 막강한 권력과 경제력을 갖춘 아시아 스포츠계의 리더였다. 아시아 IOC위원들, 특히 중동국가에 대한 지배력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전통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아 친이스라엘 정책을 유지한데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반이스라엘, 친아랍 정책을 지켜온 북한이 더 가까운 우방인 셈이었다. 그를 한국지지로 돌리면 15표 안팎은 쉽게 일본 지지에서 이탈할 것이고 이는 한국의 득세를 의미하는 일이다. 나는 김운용 부회장에게 교섭을 해달라 부탁했다. 결국 성사되어 방한을 했다. 자신의 전세기를 띄워 가족, 친지, 참모들을 다 데리고 왔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귀국 이후 그는 서울 개최 지지로 방향을 틀었다. 김운용 KOC부회장과 손을 잡고 국제 스포츠 리더들을 친한파로 돌리는 일은 또 있었다. IOC 부위원장을 지내고 있던 코트디부아르(영어식은 아이보리코스트)의 루이스 귀란도 응디아예 위원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뜻을 돌리게 했다. 귀란도 위원은 주 캐나다 대사로 일하던 이였다. 서부아프리카 IOC위원들을 리드한다는 귀뜸을 받고 초청을 해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런 일들은 주로 김운용 부회장, 노태우 장관과 손을 잡고 이뤄졌다. 그들을 한국으로 불러내어 섭외를 할 때 체육단체나 국가기관의 초청장을 내밀 수는 없지만 대학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북한은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하면 체제경쟁에서 뒤떨어진다는 경계심에서 한국의 유치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비동맹 국가나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에 대한 우호적 영향력을 이용해 일본 나고야 개최로 결론 나도록 주력했다. 냉전시대의 경쟁은 민족도 뒤로 돌리는 힘이 있었다. 아랍과 아프리카에 대한 북한의 외교력이 적지 않았던 상황에서 두 스포츠 지도자를 돌려세우는데 단국대의 명예박사학위 수여는 큰 동기가 된 셈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1981년 9월 바덴바덴 총회에서 서울올림픽 개최라는 기적이 탄생한 셈이었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나자 줄이어 서울아시안게임 개최권도 한국에게 굴러왔다. 서울올림픽에서 보여준 우리의 추진력을 보고 경쟁국가가 나서지 않은 결과였다. 노태우 장관은 국제스포츠 행사를 착실히 준비하자는 취지에서 새로이 설치된 체육부의 초대 장관으로 임명되고 이어 내무부 장관을 지내더니 1984년에 대한체육회장과 KOC위원장에 올랐다. 관계와 민간단체를 거치며 서울올림픽, 서울아시안게임을 총괄하는 자리를 역임하고 있었다. 나는 유니버시아드 선수단 단장, 아시안 게임 및 올림픽을 개최하는 나라가 의무적으로 시행하는 세계 스포츠 과학학술회의 주관대학의 총장으로 분주히 민간 스포츠 외교 활동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5년 들어 IOC위 주선으로 서울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납북체육협상이 열렸다.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열린 회담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 회담에서 김종하 KOC 위원장이 수석을 맡았고 KOC 부위원장인 나는 차석으로 회담에 참여했다. 결실을 맺지 못한 회담이었지만 북한의 논리와 회담 진행방식, 우리 측의 전략이 가진 장단점을 숙지하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서울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좋은 경험을 한 것이 있다. 우리나라 에스페란토협회 회장으로 중국에 들어갈 수 있었고 공산권 국가와 교류의 작은 구멍을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에스페란토어는 19세기 말에 폴란드의 의사가 창안한 국제어이다. 언어적 구성을 단순화시켜 세계인이 배우고 쓰기 쉽게 만든 인공언어이다. 나는 언어를 통해 다른 나라 사람들과 격차없이 언어를 습득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1980년쯤부터 학습을 시작했다. 한창 활동을 펼칠 때는 우리 대학에 에스페란토 수업을 정식 교과목으로 만들어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스페란토어협회가 내부 갈등을 겪다가 나를 회장으로 추대해 1982년부터 한국협회장을 맡고 있었다. 에스페란토 협회는 1년에 한번 씩 세계대회를 열어 관련 사업들을 논의하는데 1984년 총회는 중국에서 열렸다. 당시 미국과 소련을 줌심으로 한 냉전이 가열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에스페란토어는 인종, 이념, 국경을 초월해 인류애와 평화를 지향하자고 생긴 언어여서 총회 역시 서구권, 동구권을 가리지 않고 돌아가면 열렸다. 즉 엄격한 비자나 입국심사가 일상화된 사회주의 국가에 입국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한국 대표로 자연스럽게 중국의 비자를 받고 북경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중국은 우리와 비수교 국가이고, 친북한 국가이며 한국의 적성 국가였다. 당연히 북한의 주재요원들이 나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 요원인지, 외교관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북한 요원들은 내가 머무는 호텔까지 찾아와 우리에게 온갖 욕설과 협박을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왔느냐, 죽고 싶냐”는 논지였고 대회장도 가지 못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중국 공안당국에 항의 겸 신변보호를 요청하여 대회장에 나갔고 에스페란토 말로 연설을 하였다. 사실 이렇게 대회 참가에 애를 쓴 이유는 에스페란토 어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이 대회를 통해 동구권 국가에 대한 교류의 실마리를 만들고픈 희망 때문이었다. 중국이라는 거대 공산국가에 당연히 동구권의 다양한 인사들이 참가할 것이 확실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당시 대한체육회장으로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주도하고 있었다. 1984년 LA올림픽에 동구권 국가들이 불참했으니 서울올림픽에는 반드시 참여토록하는 것도 중요한 성공요인이었다. 나는 이 점에 착안했다. 정치적인 문제는 담지 않은 순수하게 한국의 산업발전 상황, 문화 수준을 홍보할 브로슈어를 에스페란토어로 만들어 북경총회에서 배포하고, 회원국가의 지도자들에게 발송하자는 생각이었다. 내 제안을 들은 노태우 회장은 대환영을 했다. 많은 돈이 드는 일이었지만 노태우 회장의 지원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나는 에스페란토 어를 이용해 우리나라의 문화, 산업시설, 아름다운 도시 풍경, 교육시설과 산업제품 등을 컬러로 인쇄해 갖고 갔다. 물론 동구권에 중점적으로 발송하기도 했다. 엄혹한 냉전시대에 남한의 발전상을 적성국가인 중국의 북경 한복판에서 홍보할 수 있었으니 북한 요원들이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할 만하지 않았는가. 과연 한국 홍보책자는 바라던 결과를 가져왔다. 대회에 참가한 헝가리 대표단 가운데 부다페스트 공과대의 부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야노쉬 긴스트러(Janos Ginsztler) 박사님이 있었다. 이 분이 홍보 책자를 보고는 한국과 우리 대학에 호감을 갖게되어 귀국 뒤에도 편지를 보내와 교류를 하게 되었다. 우정 어린 서신이 오고 가면서 점차 양국간 수교관계는 아니지만 우선 양 쪽 대학이라도 자매결연을 맺고 학생들을 교류하자는 데 합의가 되었다. 그 때 노태우 대한체육회장이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고 1987년 12월 직선제 개헌과 대통령선거를 거쳐 이듬해 2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5개월 만에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공표했다. 7‧7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은 <북방정책>으로 가시화되면서 기존관념을 넘어선 대담한 외교관계를 열어갔다. 그 첫 관문이 헝가리였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헝가리 부다페스트공대와 자매결연을 맺고 학생들을 교류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윽고 7‧7선언 이후 첫 결실인 주 헝가리 상주대표부가 설치되고 이듬해 2월에 주 한국 헝가리 상주대표부가 설치되었다. 분단 이후 최초의 동구권 국가와의 수교였다. 나는 1989년 2월에 부다페스트 공과대를 방문했다. 부다페스트 공대는 외형으로 봐서는 규모가 컸지만 자세히 보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기자재는 많이 낡았고 새로 도입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공산화 이전에는 과연 노벨상을 수상한 학자들을 배출하고 유렵의 명문대라 자부할만한 대학이라는 전통이 담겨진 캠퍼스였다. 지금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와 교류한 부총장은 매우 인자하면서 실용적인 분이라는 것을 대화에서 엿볼 수 있엇다. 그는 우리 대학의 홍보물과 한국을 알리는 잡지를 보고 그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우리 대학에는 원자로가 있는데 몇 년 전에 고장이 났지만 고칠 돈이 없어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걸 고치면 헝가리 만이 아니라 동유럽의 이공계 학생들을 위한 재교육기관을 설치해서 공학교육에 진일보시킬 수 있을텐데...” 현실을 안타까워 하던 그는 내가 공감을 하자 1백만 달러 만 지원해달라는 말을 꺼냈다.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No’라고 하자니 선량한 학자에게 실망을 주는 것 같고, ‘Yes’라고 하자니 우리 대학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 떠올랐다. 일단 나는 우리 대학도 사립이라 학부형의 등록금에 의존하고 있으니 교비지원은 어렵다고 솔직히 말했다. 대신에 귀국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서 꼭 도움이 되는 길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또한 이런 지원 사업을 하려면 우선 양교가 자매결연을 맺고 서로 학생도 교환하면서 한국의 지원을 유도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자매 결연을 맺고 돌아왔다. 나는 귀국하는 즉시 이상희 과학기술처 장관을 만났다. 부다페스트 공대를 후원하여 두 나라가 국교를 맺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자고 역설했다. 헝가리부터 한국 기업과 상품이 진출하면 동구권으로 문호가 더 열리지 않겠냐고 지원을 호소했다. 이상득 장관은 나의 논리에 공감했다. 지원 가능자금을 검토한다 하더니 300만 달러 정도 가능하다고 답을 줬다. 그러면서 대통령도 보고를 듣고 궁금해 한다며 직접 면담을 하며 여러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노 대통령과 오랜만에 면담을 했다. 대학 간의 민간 교류가 확대되어야 헝가리나 동구권 지식인들에게 반공국가라는 고정 관념을 말금히 털어내어 마음을 사고, 이를 통해 대기업들이 진출하여 경제 교류로 확산시키는 방안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오랜 인연이 있어서인지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었다. 면담 뒤에 지원 액수가 300만 달러에서 500만 달러로 증액되었다. 주선을 하는 나로서는 부다페스트 공과대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알릴 수 있어서 기쁘고 감사했다. 이 지원금으로 부다페스트 공대는 원자로를 고치는 숙원사업을 해결했다. 또한 주변 동구권 국가의 인재들을 불려 들여 기획했던 공학생 재교육 과정을 신설했다. 그리고 단국대의 학생들을 부다페스트 공과대에 교환학생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이 때 파견한 3명의 학생 가운데 한 명인 지금 우리 대학에서 근무하는 현준원 군은 자연과학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있었다. 현준원 군은 석사학위 과정에 입학해 열심히 공부하여 부다페스트 공대에서 성실한 학생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현준원 군은 1994년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동구권 유학생이면서 사회주의 국가에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한 당시 내가 삼성문화재단의 이사로 있었던 인연으로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그룹의 헝가리 진출을 권유해 현실화했는데 이 때 현준원 학생이 통역을 맡아 맹활약을 하기도 했다. 우리 학생들이 헝가리로 나간 이후 헝가리에서도 5명의 학생들이 우리 대학에 들어왔다. 동구국가에서 온 최초의 교환학생이었다. 어찌보면 귀한 손님같은 학생들인데 막상 그들이 머물 숙소가 마땅치 않았다. 우리 대학 서울캠퍼스에 운동부 기숙사는 있지만 유학생을 위한 기숙사는 없었던 탓이다. 한국어나 영어가 익숙치 않은 학생들이라 아무데나 의탁시킬 수도 없었다. 화곡동에 있던 내 집을 그들의 기숙사로 내놓았다. 나는 아파트로 전세를 얻어 이사를 갔다. 화곡동 집은 자연스럽게 대학에 기부를 한 셈이 되었다. 화곡동 집은 대지가 160평, 건평이 180평인 큰 집이었다. 두 세 명이 잘 수 있는 방이 7개나 있었다. 이 집은 선친이 물려주신 유산과 내 아내가 저축한 돈으로 지은 것이다. 한남동에 있던 집도 법선재로 기부한 뒤여서 평생 산다는 각오로 내 딴에는 든든하고 고급스럽게 짓겠다는 결심으로 공사를 감독하며 마련한 집이다. 이역에서 고생하는 헝가리 유학생들이 집이 따뜻해서 좋다는 말을 들으면 스스로 더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내놓은 집이지만 애정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 지금의 죽전캠퍼스를 신축하는 과정에서 건설 감리비가 급히 필요하다는 이유로 기부자인 나와는 상의도 없이 매각이 결정되었다. 이윽고 번개 불에 콩 구어 먹듯이 하루 아침에, 그것도 헐값에 팔리고 보니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북방정책을 성사시키느라 뛰어다니면서 정작 내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모습까지 봐야 했으니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옛말이 실감된다. 헝가리와 교류를 시작하며 북방정책의 실마리를 푸는 과정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나의 추진력이나 이념을 넘어서는 실용주의에 더 큰 신뢰를 받은 듯 했다. 바로 1989년 3월에 시작되는 <북경 아시안게임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의 남측 수석대표로 나를 임명했다. 나는 한양대 체육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학래 교수(당시 KOC 상임위원)를 차석대표로 앉히고 회담을 개시했다. 북경아시안게임이 2년도 안남은 상태에서 북한이 제의해 열린 회담은 1989년 3월 9일부터 1990년 2월까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본회담 9차례, 실무대표 접촉이 6차례 이뤄졌다. 남북한 모두 굉장한 관심을 받으며 회담을 진행했고, 나는 체력의 한계를 느낄 정도로 신경과 에너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북단일팀의 호칭, 단기, 단가, 공동단장제, 선수단 구성 및 실무 사무국 설치 등의 구체적 합의를 끌어낸 것은 남북 양측 모두 자부할만한 성과였다. 회담을 통해 얼개를 완성했지만 최종 협상의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시점에서 북측은 더 이상의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남측도 원로 체육인들은 해당 경기종목이 단일팀 구성으로 메달을 못 따면 뒤따를 불이익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부 쪽에서는 북경아시안 게임에서 종합순위 2위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 일본에 질 수 없다는 주장도 득세를 해갔다. 이 자리에서 소상하게 밝히기 어려운 여러 가지 정치적 셈법, 우여곡절이 얽히면서 결국 회담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협상을 통해 많은 문제가 풀렸고, 그 성과는 북경 아시안 게임으로 이어졌다.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정동성 당시 체육부 장관이 나를 만났다. 세 가지 지침을 받았다. 하나, 북경 아시안 게임의 선수단장을 맡아달라. 둘, 북경 아시안게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도록 중국과 우호관계를 구축해달라. 셋, 아시안 게임이 끝나면 이어지는 국제대회에서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참가하도록 비밀리에 성사시키라는 것이었다. 정동성 체육부 장관은 유도부 출신으로 기백이 씩씩하고 성격이 활달했다. 스스로 대통령의 지시라면서 “장충식 총장님이 좋은 성과를 거두도록 도울 수 있는 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나는 이미 유니버시아드 단장을 네 번이나 역임을 했다. 그 당시 헝가리, 몽골, 남북체육협상 등으로 육체적으로 지치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었다. 좌절한 남북체육협상의 불씨를 되살리고 싶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이 결국은 남북간의 화해로 이어져야 그 값어치가 살고, 우리 민족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다섯 번째 선수단장 직을 수락하기로 했다. 1990년 9월, 한국선수단장으로 북경을 입성하고 나니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집무실이 준비되어 있었다. 겉은 김우중 회장의 집무실이지만 남북한 협상 관계자들이 여기에서 비밀 회담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놓았다. 언론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협상을 할 수 있어 얘기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시안 게임의 개막식 다음날인 9월 23일 남북체육장관 회담이 열렸다. 양측 장관은 단일팀 구성을 한다는 문제에 합의를 했다. 원칙은 정하고 각론은 다시 “남측은 장충식 수석, 이학래 차석이, 북측은 김형진 수석과 박시남 차석이 만나 타결키로 했다.”는 결론을 공유했다. 우리 대표단은 이미 지난 회담에서 상당한 합의를 이뤘기에 이번 회담은 더욱 스피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결국 9월 29일 나와 김형진 수석이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남북통일축구경기>를 갖기로 했음을 선언했다. 협상 가운데 어려운 점은 취재언론인의 규모를 제한하는 일이었다. 북측은 취재단을 7명으로 제한하자고 했지만 나는 그들의 강력한 주장을 성의껏 설득해 12개 언론사 20명으로 확대했다.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쉴 때 청와대에서 긴급 훈령이 왔다. 정동성 체육부 장관이 우리 선수단과 평양에 같이 참석할 수 있도록 교섭하라는 지시였다. 원래는 선수단장인 내가 선수단을 이끌고 방북하기로 합의한 문제였다. 북측 대표와 얘기하니 난색을 보였다. 협상이 끝난 사안이라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고, 이를 번복할 결심은 ‘최고 수령 동지’만이 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북경에 주재하는 북한 대사를 면담하고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간절히 호소를 하자 김정일 위원장의 재가를 받았다며 정 장관의 참가로 변경할 수 있었다. 나 역시 해방 후 최초로 열리는 통일축구 경평전에 왜 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나는 나의 입장을 단 한 번도 내세우지 않았다. 나는 협상을 성사시키는 사명을 받았으니 정부의 뜻을 이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일이 마무리되자 노태우 대통령은 축하의 전문을 보내주고 격려해주었다. 중국과의 수교를 현실화하려면 중국에 남한이 가진 힘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는 진정성을 전달하는 일이 중요했다. 북경 아시안 게임은 달리보면 해방 이후 단절된 남한의 젊은이, 그 배경이 되는 한국사회의 역량을 중국의 심장에서 펼쳐보이는 기회의 장이기도 했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이기도 했다. 마침 북경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있었던 장백발(張百發) 체육위원회 부위원장(우리나라 차관급)은 나와 오랜 인연이 있었다. 그는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88 서울올림픽에 맞춰 열린 스포츠과학 학술회의에 중국대표단을 인솔하고 참석하여 많은 활동을 펼쳤다. 이 회의의 조직위원장인 나와는 각별히 자주 만났는데 성(姓)이 같은 장 씨에다 나이도 나보다 훨씬 위라 사석에서는 나를 동생이라고 호칭하면서 가깝게 지냈다. 그와 만나다 보니 북경 아시안 게임이 눈앞에 왔는데 가장 큰 걱정은 자동차 문제라는 고백을 들었다. 각국 선수단 단장과 임원들이 사용해야 할 차량이 500 여대 정도 필요한데 예산 형편이 감당키 어려워 택시를 활용할 실정이라 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자동차를 생산하기 힘들었고,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자동차 생산 국가였으니 이를 수입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장 부위원장은 한국에서 자동차를 생산하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통사정하였다. 나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님을 찾아가 이 문제를 전달했다. 정주영 회장은 도량이 큰 기업가였다. 현대차 500대를 북경대회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조직위원회는 대단히 기뻐하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뜻을 나와 정주영 회장에게 전해왔다. 내가 북경대회에 선수단장으로 참석하였을 때 장백발 위원장이 가장 크게 기뻐했다. 한국선수단에 관련된 일이라면 조직위원회는 내 요구를 대부분 다 들어주었다. 우선 선수촌에 입촌하려고 남북한 선수단의 숙소 위치를 알아보니 동과 서, 양쪽 끝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혹시나 가까이 배치했다가 불상사가 일어날까 염려해 격리하다시피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같은 민족인데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젊은이들의 마음이 어떻겠느냐 설득했다. 그들은 선선히 나의 요구를 들어줬다. 대회 기간 중에 남북한 선수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나중에는 반가운 인사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지기도 했다. 또한 선수촌 가까이 한식 식당을 차리도록 허가를 내달라 부탁을 했다. 대회 기간 중 한국 손님들이 많이 올 텐데 식당이 멀리 있으면 귀빈들과 관광객들이 불편할 거라며 협조를 구했다. 이 역시 허가를 받아내 많은 이들이 한국 음식을 먹으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1990년 10월 7일 북경 아시안 게임은 막을 내렸다. 한국은 중국에 이어 종합순위 2등을 차지했다. 나는 처음 선수단장을 맡으며 부여받은 노태우 대통령의 지침을 모두 마쳤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곧 다가올 한중수교를 예감하면서 중국 정부 관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대회 기간 중 한국을 도와줘 감사하다는 인사를 나눴다. 그 때마다 중국 측에서는 한국이 500대의 차량을 지원해준 것을 사례로 들며 한국 측의 지원에 거듭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이에 앞서 9월 29일 남북 통일 축구를 공표하면서 남북한 대표단이 기자회견을 끝나고 서로를 포옹했을 때의 감격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찐한 격정이 서로에게 전달되면서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북경을 떠난 뒤 나는 노태우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했다. 여러 가지 수고를 했다며 오찬을 대접받는 식사 자리였다. 2시간의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노태우 대통령과 나, 단 둘만 있는 편안한 자리였다. 북경 아시안 게임을 치루면서 진행된 여러 가지 일들, 남북협상의 향후 전망, 중국 인사들의 한국에 대한 생각 등을 부담 없이 전하고 듣는 자리였다. 나는 마음 속에 오랫동안 품어왔던 얘기를 꺼냈다. “노 대통령님, 우리나라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시고 물러나 편안한 세월을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님을 보면 더욱 걱정이 되고 안타깝습니다. 대통령 임기를 끝내면 정치나 권력에 연연해 하시지 말아야 합니다. 노 대통령님이 새로운 길을 열어보이세요. 제가 단국대 총장직을 물러날 테니 대통령께서 우리 대학의 총장으로 오세요. 그래서 대통령 재임 때 쌓은 인덕으로 단국대를 발전시켜주세요. 대통령님이 총장으로 오시면 대학에 발전기금을 내려는 이들도 많아질 겁니다. 대통령님도 정계나 기업계가 아닌 대학의 교육자로 계시는데 누가 사시로 볼 수 있겠습니까.” 내 진지한 주장이 통했을까. 노 대통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더니 이윽고 대답을 했다. “장 총장님 말씀이 맞아요. 나는 전두환 대통령처럼 일해재단을 만든다거나 참모들과 어울려 다닐 뜻이 없어요. 아내랑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제가 퇴임하면 단국대 총장으로 갈께요. 장 총장님 약속 지키시는 겁니다.” 이렇게 언약을 주고 받으며 오찬 자리는 즐겁게 끝이 났다. 1992년 8월 24일 우리나라와 중국은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리고 한달 뒤인 9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중국 북경에 발을 내딛었다. 그때 한중 교류가 활발해지는 것을 상징하듯 북경 한복판에 서라벌이라는 한식당이 문을 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났다. 내가 느끼는 남다른 감회를 노태우 대통령도 공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치하를 주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체육부 장관으로 다른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건넸다. 물론 나는 대학에 있고 싶다는 대답을 했다. 그것이 나로서는 최선의 길이니까. 임기가 1년을 채 남기지 않았을 때도 노 대통령은 나에게 총리직을 제의했다. 무엇이 그 분으로 하여금 나에 대한 믿음을 그리 크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제안 역시 거부했다. 대신에 내가 고려대 대학원을 다닐 때 학생처장을 역임하신 현승종 박사님을 추천하였다. 그 분이 가진 담백한 인품과 제자를 아끼는 마음, 소탈한 자세라면 정권 과도기를 무난히 이끌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현 박사님은 노태우 정권 말기의 화두였던 중립내각의 총리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나와 노태우 대통령만이 아는 비밀이었는데 나중에 현 박사님이 대통령에게 자신을 어떻게 총리로 임명하실 생각을 했냐고 묻자 이를 알려줘다고 한다. 나는 노 대통령이 단국대 총장으로 오라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를 실천한다는 약속을 믿었다. 럭비 선수로 함께 땀 흘렸던 남자로서 그는 분명히 대학의 문을 두드릴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퇴임 이후 노 태통령은 단국대로 온다는 약속을 미루었다. 아니 갓 출범한 김영삼 정부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부는 바람은 점점 강해지더니 수천 억 원에 이르는 정치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노 전대통령은 철창 안으로 전락했고 단국대 총장 부임의 약속도 흐려졌다. 대학시절 럭비 선수로 시작해 대통령과 체육인으로 함께 일을 하며 통일을 위한 일을 함께 했으니 보통 인연이 아니지 않을까. 이후로 노 대통령은 수감 생활을 하고나서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은둔을 하고 있다. 뇌 질환을 앓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권력의 속성은 늘 우리 같은 범상한 사람의 마음에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기 마련인가보다. 부디 건강하고 복된 나날이 돌아오길 기원한다.

이희호 여사, 김대중 선생 부부 : 그 따뜻하고 정의롭던 마음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습니다

2019.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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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초였다. 이제는 영면하신 이희호 여사님을 찾아갔다. 입원 하셨다는 소식을 들어 문병을 하러 갔다. 마침 잠에서 깨어나신 시간이라 면회가 가능하였다. 여사님의 손을 만져 보니 온기가 없었다. 당신도 기력이 없어서 나에게 제대로 말씀을 하시지 못했다. 그동안 노환을 앓은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었지만 전과는 다른 병색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사님은 언제나 내가 찾아 뵈면 온화한 웃음으로 반겨주셨고 그 때마다 항상 정장 차림으로 맞이해주셨건만 입조차 열기 힘들어하시는 여사님을 보니 울컥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병실을 나오며 그 따뜻했던 미소와 다정하지만 정중한 언행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돌아오며 더 나쁜 소식을 듣기 전에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선생, 두 부부에 대한 인연을 글로 옮기자 결심했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자 애를 쓰며 며칠을 보냈고 이 글을 다 마쳤을 때 바로 여사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야 말았다. 이 또한 인연이런가...여사님은 이제 김대중 선생님과 하늘나라를 산책하고 계실 것이다. 고 이희호 여사님과 나는 서울대 사범대 선후배 사이이지만 그 인연은 내가 아닌 선친(범정 장형 선생)의 육영사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사님은 1950년도에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했는데 재학 당시 사범대 학생대표, 사범대 학도호국단 부단장을 지낼 만큼 활동적이었다. 이때 친했던 동료 중에 고려대 학생회장을 지낸 김기호 씨가 있는데 이 분은 우리 대학 재단에 근무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여사님이 유학을 결심하고 입학허가를 받았지만 문제는 유학 자금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정을 들은 김기호 씨가 여사님을 당시 우리 대학 이사장이신 범정 장형 선생께 소개시켰다고 한다. 이희호 여사님, 아니 ‘청년학도 이희호 양’은 선친께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사회학과 신생독립국인 한국에서 여성계몽의 중요성을 고백했는데 선친께서는 이에 공감을 하고 선뜻 유학자금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미국가는 여비와 일정한 기간 미국에 체류할 수 있는 자금을 후원했는데 ‘유학생 이희호 양’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을 거란 것이 이 자리를 주선한 김기호 씨의 전언이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 김기호 씨는 우리 대학 정치과 교수로서 사무처장 보직을 맡고 있었기에 소상한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선친의 일인 만큼 이후 내가 이희호 여사와 특별히 교류를 할 기회도 따로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내가 김대중 총재와 인연을 맺을 일이 생겼다. 그 인연은 김상현 의원과의 우정에서 시작되었다. 김상현 의원과는 호형호제를 할 만큼 깊은 우애를 쌓았던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서 <학연가연 10회(2019.01.25.) : 동문처럼, 친구처럼, 그러나 아픔을 준 김상현 의원>편에 밝힌 바 있다. 위의 글에 나왔다시피 1972년 10월에 김상현 의원이 10월 유신 개헌을 위해 선포한 비상계엄조치로 보안사에 끌려갔는데 나를 물고 들어간 것이었다. 회의를 하다가 나는 ‘노재현 계엄사령관’ 명의로 날인이 찍힌 체포영장을 내보이는 수사관들에게 끌려갔다. 용산구에 있던 당시 주한 미8군 사령부가 있는 언덕의 제법 큰 2층 건물. 구석진 방으로 끌려가는 데 복도가 꽤 긴 편이었다. 그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사람의 비명 소리, 수사관의 악쓰는 소리가 들리는데 누구라도 공포감이 커질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이름도 밝히지 않는 수사관들이 험악하고 살벌한 눈초리로 나를 확인하더니 심문을 시작했다. 옆방에서는 계속 매를 맞는지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울다가 흐느끼기도 하고 참기 힘든 고통에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기도 하였다. 듣는 내가 다 공포심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마도 그것이 심문하려는 이들의 의도였을 것이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수사관은 A4 용지 한 장을 꺼내주면서 내가 아는 정치인들 명단을 아는 대로 적으라 했다. 나는 나와 교분이 있는 사람들 보다는 수사관들도 알만한 인지도가 있고 별로 교류도 없는 전현직 국회의원 20명 정도를 써냈다. 그들은 내 진술서를 받더니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놓고 내가 적어낸 것과 대조를 했다. 수사관은 대뜸 “왜 김상현 이 자식 이름을 빼놓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상현은 담당 수사관에게 장충식 총장하고 제일 가깝다고 실토했다”면서 “대학 총장이 빨갱이들을 잡는데 협조해줘야지 거짓말을 해서 수사를 망치게 하면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계속 엄포를 놓았다. 이렇게 시작된 수사관과의 말씨름을 통해 알게 된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김상현은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맞선 김대중 후보의 핵심 참모(실제로 김상현 의원은 김대중 후보의 비서실장, 선거대책본부장 등을 맡았다)인데 이 자가 김대중의 대통령 선거운동 자금책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장충식 총장, 서울시장 지낸 모씨가 선거 자금을 가장 많이 대줬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혐의였다. 우리 대학 교직원들 월급 줄 돈이 없어서 사채를 빌리느라 전전긍긍하던 재정형편으로 무슨 대선 자금을 지원할 여력이 있겠는가. “김상현 의원과는 오랜 우정이 있어서 술이나 밥을 사거나 선거에 나간다면 호감의 표시로 격려금을 보탠 적은 있지만 대통령 선거에 거금을 지원할 힘도 없고, 형편도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수사관들은 전혀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수사관들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서 김상현 의원의 진술내용을 보여줬다. 그의 진술에는 내가 그에게 4천 만 원의 선거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4 천만 원은 그 당시 서울에 있는 최고급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내가 곰곰이 속셈을 해보니 김상현 의원에게 십여 년 동안 지출한 금액의 10배는 넘는 돈이었다. 수사관들은 교대로 돌아가며 나를 윽박지르고 구타를 하며 김 의원의 진술에 동의할 것을 강요했다.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김대중 후보를 잡기 위한 구도에 대학 총장인 나를 얽어매려는 의도였다. 밤을 새우며 나를 겁주고, 욕을 퍼붓던 수사관들은 이윽고 구타를 하며 고문을 했다. 나중에는 물맛을 보여준다며 내 어깨와 머리를 붙잡더니 수조에 처박기에 이르렀다. 발버둥을 치고 저항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거리에 나돌던 “서빙고에 끌려가면 성해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허위가 아니었음을 몸으로 깨달았다. 철야로 잠을 안 재우고 그 수모를 당하면서도 나는 ‘4천만 원 지원’ 진술을 거부했다. 내 완강한 자세 때문이었던지 나중에는 김대중 후보에 대한 정치자금 지원은 뒤로하고 우리 대학 출신의 국회의원인 오치성 씨에 대한 뇌물을 진술하라 억지를 부렸다. 직감적으로 당시 보안사령부 최고위직에 있었지만 국회의원 자리를 노리고 있던 K 장군이 떠올랐다. 그는 오치성 의원과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가 겹쳐서 출마를 못하고 군부에 있어야 했는데 이를 상당히 원통해 한다는 후문을 들은 바 있었다. 억지와 고문으로 나를 김대중이든 오치성이든 고위 정치인에게 엮어 정치자금 스캔들로 만들려는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 더 강하게 저항해야 했다. 그들이 사실이 아닌 허위자백으로 음해를 하려는 의도에 굴복할 수 없었다. 밤잠을 재우지 않고 협박과 구타를 견뎌야 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던 차에 갑자기 석방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내력을 들어보니 보안사령부에서 중책을 맡고 있던 우리 동문 중 한 사람이 학교 측의 하소연을 듣고는 나를 수소문했고, 계엄사령부의 고위 인사들을 찾아가 직접 나의 결백을 호소하며 신원을 보증했다고 한다. 천만다행으로 그 동문의 호소가 힘을 발휘해 옥고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선생과는 그 전에도 직접적으로 만나고 연락을 주고받을만한 친분이 없었지만 이로써 더욱 그 인연은 엷어졌다. 1972년 이후 김대중 선생은 ‘빨갱이 정치인’으로 덧칠이 칠해져 망명과 투옥을 거듭했다. 급기야 서울의 봄 이후 선생은 ‘내란음모의 수괴’로 낙인찍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와중에 이희호 여사라고 어떻게 편할 날이 있었겠는가. 망명자의 아내, 사형수의 아내로 도피와 옥바라지가 교차되는 험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연결되면서 정치인 김대중의 길도 좀 더 평탄해졌다. 동시에 우리나라는 민주화의 거센 격랑에 휩싸였다. 직선제 개헌에 이어 광주항쟁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함성이 거세어졌다. 그 선두는 대학생이었는데 우리 대학의 최덕수 군(당시 천안캠퍼스 법학과 2학년)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임으로써 사회적 열망의 정점을 앞당겼다. 1988년 5월 18일 최덕수 군이 천안캠퍼스 시계탑 앞에서 분신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다른 무엇보다 그 학생의 생명이 다치지 않기를 빌었다. 개인이 시도한 일이지만 학교가 나서서 지원에 최선을 다하도록 지시했다. 덕수 군의 어머님은 광주시에서 떡장수를 한다고 했다. 고생하며 키운 아들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클지 십분 이해가 되었다. 전신에 3도 이상의 화상을 입은 덕수 군의 병실을 찾아가니 덕수 군은 고통에 몸을 비틀며 삶을 붙잡고자 했다. 그러나 26일 오후에 덕수 군은 숨을 거두었다. 진심으로 가여웠다. 이념이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고 간에 가난한 어머님의 희망이자 기둥이었을 아들이 기성세대의 파행을 규탄하느라 목숨을 바치다니. 나 역시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공안당국은 덕수 군의 장례식이 가져올 파급효과를 두려워 했다. 가능한 한 조용히 장례를 치루는 것이 그쪽의 바램이었다.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교직원들에게 덕수 군의 장례식을 천안캠퍼스가 아닌 서울캠퍼스에서 치룰 준비를 하도록 했다. 사회적 시선이 집중되어 조문객들이 많을 것이고 규모도 커질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직원부터 근조 넥타이를 매고 덕수 군의 죽음을 추모하도록 했다. 그럴수록 공안당국에서는 여러 협조 사항을 전달해왔다. 그중에는 장례비가 2천만 원 이상 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도 있었다. 말하자면 장례식 규모를 최소화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내 마음이 불끈했다.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장례비의 상한선을 정해 장례를 치루라니, 젊은이의 죽음을 어른인 우리가 그런 식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빚을 얻기로 했다. 학교 공금을 투입하면 정부 측에서 어떤 식으로 책임을 따지자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리저리 돈을 구해 사비 5천만 원을 내놓았다. 재야 단체가 나서서 ‘민주국민장’이라는 형식으로 장례식 규모가 커졌지만 장례식 비용을 묻고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장례를 치루던 중 김대중 선생이 조문을 왔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떨어지고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상황이었다. 김대중 선생은 무엇보다 대학 당국이 얼마나 고생이 많냐며 위로를 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죽어 나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 자리에서 김대중 선생은 처음으로 이희호 여사와 우리 선친의 인연을 얘기했다. “아내가 미국 유학을 갈 때 범정 선생님께서 여비랑 생활비를 보태주신 덕분에 무사히 유학을 갈 수 있었다.”는 회고담인데 “지금도 아내가 고마워 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나 자신도 선배로 부터 듣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36년 전 일을 기억하고 있다니... 듣는 내가 오히려 “기억해줘서 고맙다.” 말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20년을 총장직에 근속하면서 경험을 통해 “도움 준 사람은 기억하지만 도움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만남을 통해 나는 김대중 선생이 상당히 꼼꼼하고 섬세한 성품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다른 만남을 통해 나는 김대중 선생이 섬세한 성격이 넓은 지식체계와 결합해 큰 정치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내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재임할 때였다. 나는 1991년부터 회장으로서 백범사업회를 8년 동안 운영을 책임진 적이 있었다. 부회장이나 고문으로 사업회 운영에 지원한 것을 포함하면 10년이 넘는다. 이 긴 시간 동안 당시 정부도 백범사업회에 어떤 재정지원도 하지 않았고, 재계도 도움을 주지 않고 있었다. 명색이 항일전쟁을 이끈 상해임정의 수반이었던 건국유공자였지만 그의 유지를 받드는 사업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명예도, 돈도 없는 단체라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존재가 위태했다. 독립유공자들이 나에게 회장 취임을 부탁했을 때 나는 선선히 응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기념사업회를 도왔다. 백범일지를 중국어로 번역, 출간했고 상해 임시정부 청사 복원과 백범 동상 건립 등을 기념사업회가 주도토록 했다. 그중에서도 백범 선생 추도식은 어찌 보면 고인의 유지를 기리는 가장 기본적인 행사이다. 그러나 추도식에 주요 인사들을 초대하면 나오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 정부 주요 인사, 정치인, 기업인, 군인 등 직업을 막론하고 추도식에 자리를 함께 해주는 분들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백범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추도식에 참석해주고 독립 유공자들을 위로하며 격려를 했다. 독립유공자 원로, 학자들과 환담을 나누다보면 김대중 선생이 항일운동사와 관련 인물들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인식도 상해 임정을 중심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갖고 있었다. 정치인이 그만한 지식과 철학을 가지려면 직접 공부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애국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 때 나는 김대중 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강해졌다. 1992년 대통령 선거가 본격화되기 전이었다. 독립유공자 원로, 광복군 출신 원로들께서 회장인 나에게 요청을 했다. 출마 예상자들이 백범 선생 추도식에 와서 독립운동사에 대한 식견을 담아 정견을 발표하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대중, 김영삼, 정주영, 세 분의 후보자들에게 원로분들의 의견을 대신 전달하고 가능한지 문의하였다. 김대중 후보는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지만 김영삼 후보 측은 어렵다는 응답을 했다. 그런데 얼마 뒤 참석하겠다는 응답이 왔다. 참모들이 설득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참석하겠는데 나에게 와서 추도식에 대한 사전 설명을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이 때 김영삼 후보를 공식적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정주영 후보도 만나게 되었는데 두 분 모두 독립운동에 대한 식견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애정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서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돌아오는 길에 저절로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김대중 후보와 대비가 되었다. 권력에 대한 열망은 크지만 역사를 알려는 진지한 노력은 부족했다. 김대중 선생을 만나고 나니 이런 차이가 저절로 느껴졌다. 김대중 선생이 1993년 선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뒤 세월이 흘렀다. 그 5년 동안 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미운털이라도 박혔는지 온갖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천안캠퍼스에 종합병원을 세울 때는 모든 인허가권을 이용해 우리 대학이 취할 수 있는 재정적 자구 조치를 막아서 위기가 깊어지도록 했다. 재정난이 심각해지자 이번에는 불과 대통령 임기가 4,50일 정도가 남은 시점에서 교육부를 통해 메시지를 전했다. 모 국장이 당시 대학법인의 김강웅 사무처장과 나를 부르더니 대학운영이 위기 상황에 쳐해있다는 것을 안다면서 1개월 이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대학 경영권을 놓고 물러나라는 요구를 했다. 누구의 지시냐 물었더니 교육부 장관이 서명한 공문을 내밀었다. 이에 앞서 나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 당선자 내외를 만날 수 있었다. 김대중 선생이 초청을 한 것이다. 만나보니 이희호 여사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이 여사는 다정한 미소로 “저를 도와준 분이 단국대 설립자이신데 장 박사님이 그 후손이시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그 분의 막내 아들로 대학에 몸담아 지금까지 대학을 운영해왔다고 밝혔다. 이것이 이희호 여사와 첫 만남인 셈이다. 47년 만에 그 인연의 당사자를 만난 것이다. 그것도 대통령 영부인이 되어서. 그 자리에서 김대중 선생은 또 하나의 인연을 밝혔다. 바로 1972년에 내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던 일이었다. 김대중 선생은 내가 고초를 당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며 비록 김상현 의원의 허위자백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결국 나를 잡으려는 독재정권의 횡포에 당한 셈이니 미안한 일이라 위로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남북체육회담을 통해 단일팀과 단기(團旗)를 성사시킨 일, 당시 회담의 진행과 오간 대화 내용 등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그 속에서 당신이 대통령에 취임하면 남북교류와 화해작업에 앞장서겠다는 의욕도 보였다. 이같은 만남을 가진 뒤 나는 대학경영권을 내놓으라는 통첩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내가 겪고 있는 위기의 저변에 김영삼 정부와의 불화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닌가. 나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대변인으로 있던 박지원 동문(상학과 졸업, 대통령 비서실장, 국민의 당 대표 역임)을 만났다. 그에게 지난 5년 간의 과정을 설명하고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여 단국대의 신캠퍼스 신축사업과 재정난 해결을 관리한다는 방침을 정해 교육부에 통보해줄 것을 청원했다. 박지원 대변인도 적극적으로 모교의 위기를 풀고자 노력했고 다행히 우리 대학의 어려움이 대통령 당선자에게 받아들여졌다. 결국 정권인수위원회를 통해 ‘향후 단국대의 이전사업 정상화 문제는 차기 정부에서 풀어간다’는 입장이 교육부 장관에게 전달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대학은 법인부도의 위기 속에서 정부의 협조를 받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2000년 6월에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을 만나 역사적인 6·15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을 통해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부활할 수 있었다. 가족 상봉사업은 남한과 북한의 적십자가 진행하기로 했는데 뜻밖에도 나를 선임했다. 아마도 당선자 내외를 만났을 때 나에게 남북체육회담에 대해 소상히 묻고, 어떻게 회담을 이끌었는지 물었던 일들이 모두 이런 일과 연관이 있었구나 하는 짐작이 들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희호 여사가 나의 적십자 총재 추천에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다른 쪽에서는 경희대의 조영식 총장을 천거하기도 했으나 이희호 여사가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단일팀을 성공시킨 장 총장이 적격이라며 강하게 주장을 해 이를 관철시켰다는 후문을 듣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두 분의 후의에 힘입어 대학의 재정적 위기도 차분히 해결해날 수 있었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고 시간이 더 많이 걸렸지만 2007년에 신캠퍼스로 이전을 할 수 있었다. 내 개인의 안위를 떠나 1998년 1월에 김대중 선생의 결단이 없었다면 우리 대학은 깊고 깊은 혼란과 침체의 늪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 신캠퍼스 준공과 입주 기념식을 할 때 나는 김대중 선생과 이희호 여사의 참석을 간곡히 부탁했다. 두 분의 도움이 맺은 결실을 보여드리고 싶어었다. 불행히도 김대중 선생은 당시 폐렴이 악화되어 외출이 불가능했다. 이희호 여사가 참석하여 선생을 대신해 신캠퍼스 평화의 공원에 나무를 심어 주었다. 지금도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다른 대통령들도 여러 대학에 나무나 기념물을 증정, 기탁했지만 역사가 바뀌면 사라지거나 훼손되거나 욕을 먹거나 없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두 분이 심은 나무는 지금도 우리 캠퍼스에서 정정하게 빛을 펼치고 있다. 돌아보면 두 분의 앞길을 여는데 내가 기여한 일은 거의 없다. 있다면 선친의 덕이고, 김상현 의원과의 우정이었을 뿐이다. 내게 베푼 은혜가 너무 크다고 생각할 뿐 따로 갚을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김대중 선생은 2009년 8월에 세상을 달리하고 말았다. 선생에 대한 미안함을 갚고자 이희호 여사를 뵙고 도울 일을 알려 달라 했다. 사양하던 여사는 북한에 대한 의료지원 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기꺼이 동행을 약속했다.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다. 북한이 보청기를 생산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보청기 200개, 링거액 2,000개, 진통제 등 다양한 약을 준비했다. 구급차도 준비해 따로 배편으로 실어 보냈다. 모두 이희호 여사께서 국내외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일이다. 이희호 여사를 모시고 평양에 도착하자 우리 일행이 가지고 간 그 많은 의약품에 북한 당국도 감탄하고 또한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였다. 그런데 남한 정부에서 북한에 대한 형식적인 메세지라도 보내올 줄 알았는데 대통령이건 총리이건 아무런 의사 표시가 없으니 북한이 오히려 당황하는 듯했다. 정치적인 교류 재개 제안이나 아니면 하다못해 이희호 여사의 방북에 많은 편의를 해달라는 정도의 인사말이라도 보내는 것이 상식 아니냐는 듯했다. 정치적인 문제는 별도로 이 방북은 여사님의 박애정신, 동포에 대한 사랑이 잘 드러난 사업이었다. 이후에도 나는 6·15선언 기념 행사, 김대중 대통령 노벨상 수상 기념 행사 등에 빠짐없이 참가했다. 김대중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는 더욱 열심히 참가했다. 더 나아가 이들 행사에 우리 대학 음악대 교수님들, 무용이나 음악 전공 학생들의 공연을 해 행사를 빛내주었다. 그때마다 이희호 여사는 “단대 식구들이 참석해서 행사를 빛나게 해줬다.”며 큰 칭찬과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렇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글을 쓰는데 여사님의 별세 뉴스가 도착했다. 선친께서 펼친 육영의지가 맺은 인연은 얼마나 큰 결실로 돌아왔던가. 한국 여성학의 문을 열었고, 여성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시대를 앞서가는 정치인에게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 주었고, 민주화의 결기를 죽음 앞에서도 잃지 않도록 독려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정치인 김대중이 한국을 이끌어 외환위기를 이겨내고, 북한과 새로운 동반자의 길을 열었다. 나 역시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지만 슬픔을 어찌 몇 마디의 글로 다 풀 수 있겠는가. 부디 영면하소서, 어진 웃음으로 반겨줄 남편의 손을 잡고 서로 환하게 웃으며 천국에서 영생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