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식 이사장의 단국인, 대학인으로 살면서 맺은 아름다운 인연과 교육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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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애정신으로 역사의 앙금을 뛰어넘은 이시가와 다카오 선생

2019.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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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양국의 역사해석을 둘러싼 갈등이 확대되면서 경제와 안보문제로 불이 번지더니 급기야 혐이니 혐일이니 다투다가 양국 민간부문도 분쟁에 휘말려 들어가고 있다. 전쟁과 한일병탄이라는 아픈 역사를 가진 양국에 그나마 60 여 년에 걸쳐 쌓은 친선관계가 뿌리째 흔들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나는 중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기도 했지만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 있는 매동소학교(현 매동초등학교)에서 교육과정을 마쳤다. 당시 총독부는 국어, 그러니까 일본어를 학교에서 일상 언어로 사용토록 강제하고 있었다. 나는 독립운동을 하는 아버지와 만주에서 생활하며 유년기를 보냈기에 본능적으로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일본어는 어색하기도 했거니와 이미 유년기부터 일제에 대한 반항심을 몸으로 길러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조선어’(당시 국어는 일본어였다)가 입밖으로 불쑥불쑥 튀어 나오곤 했다. 그럴 때 선생님이 계시면 그 날은 치도곤을 당하는 날이 되었다. 국어(일본어)를 안쓰고 조선어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손바닥을 맞거나 뺨을 맞고 걷어차이는 폭력을 당했다. 그런 폭력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잘못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분하고 화가 나는 심정이었다. 그것이 지금도 70년을 넘어서까지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힘이 센 선생님이 힘 약한 어린이를, 내 나라말을 안 쓴다는 이유로 구타를 할 만큼 제국주의통치는 무섭고 비인간적 체제였다, 피식민 국가의 국민은 서러운 운명이었다. 내가 학연가연에서 밝히듯 내 힘이 닿는 한 사람들을 돕고 청년 인재를 아끼는 이유도 바로 이 어린 시절에 겪은 설움을 통해 ‘억강부약(抑强扶弱)’의 뜻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만주로 망명을 하고, 어린 아들은 식민지에서 매를 맞으며 아동기 시절을 보냈으니 나 역시 일본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대학과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했고,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어서 한일관계를 미움과 갈등의 맥락에서만 해석하지 않을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거기에 대학을 경영하면서 만나 인연을 맺은 많은 일본인들과의 우의도 큰 역할을 했다. 그 중에 내가 영원히 잊지 못할 일본인으로 이시가와 다카오(石川堯雄) 선생을 꼽을 수 있다. 이시가와 선생은 1916년 생으로 동경대에서 치의학을 배운 치과의사이다. 츠루미대학(學見大學)에 치학부(齒學部, 우리의 치과대학에 해당)를 설치하는 개설위원으로 초빙되어 교수 생활을 시작한 분이다. 츠루미 대학은 치의학 분야에서 일본의 최상위권의 성가를 거두고 있는데 이같은 경쟁력의 기반이 바로 이시가와 선생이 쌓은 학덕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이 분과의 인연으로 1987년 츠루미 대학과 자매결연을 맺었고 지금도 양쪽 대학이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대학이 이시가와 선생과 맺은 인연은 자매결연에 앞선 치과대 설립을 위한 준비작업에서 시작했고 치과대 병원을 설립하는 결실로 이어졌다. 이시가와 선생은 우리 치과병원 설립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이자 안내자였다. 어찌보면 오늘날 한강 이남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천안캠퍼스 치과병원을 있게 한 동반자라고 해도 과한 말이 아니다. 내가 이시가와 다카오 선생을 만난 것은 1977년이었다. 당시 나는 마음 속으로 천안캠퍼스를 종합대학으로 성장시킨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다른 대학들은 지방에 설치한 제2캠퍼스를 ‘분교’로 취급하며 서울에 있는 본교의 부속기관으로 취급하는 정도였다. 나는 미국의 대학처럼 천안캠퍼스를 문자 그대로 하나의 완결된 교육, 연구체계를 갖춘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 만들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당초 천안캠퍼스를 설립할 때 천안시에 제시한 미래상이고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인구가 갓 10만 여 명을 넘은 천안시에 내가 대학을 세우겠다며 나설 때 천안시장을 비롯한 지역 유지들은 내 의지와 포부를 반신반의했다. 나는 그들에게 천안을 한국 최고의 교육도시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우리가 성공하면 다른 대학들이 몰려올 것이라 확신했고 그렇게 설득했다. 당시만 해도 천안시는 경부고속도로에 인접한 교통요충지임을 내세워 관광업을 미래 발전목표로 갖고 있었다. 이에 근거해 지금 천안캠퍼스가 위치한 부지도 관광호텔을 세울 부지로 설정하고 있었다. 나는 천안시장에게 그 부지를 대학캠퍼스 부지로 활용하자고 했다. 부지 매입을 위한 자금이 들어있는 통장을 천안지역 유지들의 공동체인 천안시번영회에 맡겨놓고 일을 시작했다. 엉뚱한 부동산 투자가 아니냐는 지역사회의 의구심을 처음부터 불식시키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고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렇게 시작한 천안캠퍼스를 처음 약속대로 발전시키려면 치과대나 의과대를 세우고 병원을 세워야 천안시와 충남지역의 의료복지도 증진시키면서 천안캠퍼스의 성장기반도 확고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의학관련 교육연구시설을 세우는 일이니 쉬울 리가 없었다. 자금력도 없었고, 쌓아놓은 노하우도 없었다. 당연히 다른 대학의 선례를 알아보고 여러 가지 도움을 받아야 했다. 우선 국내 최고라는 서울대와 연세대 치과대에 도움을 요청했다. 결과는 외면이었다. 아니 사실상의 거절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의학계는 자신들의 영역에 높은 울타리를 쌓길 원한다. 진입장벽을 높이려면 치과나 의과 대학 설립, 병원 건설부터 의료장비 확보 등의 노하우를 공유하기 힘들지 않겠는가. 거기에 천안시에 치과대와 병원을 세운다니, 그들 생각에는 단국대가 되지도 않을 일에 헛된 꿈을 꾼다고 비아냥거리기 좋은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이렇다 저렇다 답이 없었다. 나는 일본에 가보자는 결심을 했다. 한국에서 안 되니 외국에서 병원 설립 자문도 받고 뭔가 돌파구를 찾자고 생각했다. 상대국가로 일본을 정했다. 가깝고, 대학의 운영체제도 비슷하면서 의학이 발달한 곳이 일본이니 멀리 생각할 수도 없었다. 마침 일본에는 <일본사립치과대학협회>가 있었다. 이를 알고서 나는 바로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나지만 협회의 사무총장에게 우리의 의사를 전달했다. 이내 응답이 왔다. 추천해준 대학과 병원은 두 개였다. 하나는 동경에 있는 니혼대학교의 마츠도치과대학(松戶齒科大學)이었고 다른 하나가 요코하마에 있는 츠루미대학(鶴見大學)의 치과학부였다. 나는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였다. 일본 치의학계에서 학덕이 높고 인품이 좋은 교수님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한국의 치의학자들한테 들을 수 없었던 병원 설립에 대한 자문을 듣고 싶었다. 내 말을 들은 그 사무총장은 망설이지 않고 학자 한 분을 추천해줬다. 그 분이 바로 이시가와 다카오 선생이었다. 더군다나 그 분은 바로 우리가 방문할 츠루미대학 치과학부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뭔가 좋은 방향으로 일이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만남을 주선해달라 부탁하고 바로 요코하마에 있는 츠루미대학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1977년 8월로 기억한다. 일본의 여름은 우리나라의 무더위를 능가한다. 앉아있어도 짜증이 나는 더위 속에서 캠퍼스를 찾아가 만난 이시가와 선생은 생김새부터 호인의 기질이 보였다. 둥근 턱선과 인자한 눈빛이 누구라도 포용할 인상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내 생각을 전했다. “자그마한 지방도시인 천안시에 치과병원을 세우고 싶습니다. 우리나라가 공업화는 빠르게 진행하지만 의료복지는 그렇지 못합니다. 좋은 의료시설은 서울에 편중되어 지방 농촌도시는 그 혜택을 받기가 힘듭니다. 더군다나 치과 병원은 보건소가 고작이고 있더라도 작은 개인병원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지방도시에도 서울 못지않은 치과 전문병원을 세워 농민들의 구강보건을 돌보고 싶군요. 제가 그 일을 하고 싶은데 뜻은 있지만 처음 하는 일이라 여러모로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시가와 선생은 내 말을 진지하게 경청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되물었다. “장 총장님은 의사 출신 총장이신가요?” “아뇨, 저는 역사학을 전공했습니다. 문과대 출신이죠.” 내 답변을 듣는 이시가와 선생은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 말했다. “의외로군요. 의사 출신도 아니신데 시골 사람들의 의료 복지에 이처럼 강한 소신을 갖고 계시다뇨. 제가 오늘 정말 훌륭한 총장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힘닿는 데로 돕겠습니다.” 강한 어조로 이시가와 선생은 처음 만난 나에게 병원 설립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시가와선생은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나를 만난 날 저녁에 만찬을 대접한다는 의사를 전하더니 그 자리에 쓰루미대학 치의학부 보직교수 전체를 불러 동석케 했다. 나를 비롯해 출장에 동행한 우리 대학의 병원 설립 관계자들과 보직 교수들이 상견례를 하도록 주선하겠다는 취지였다. 이 자리에서 이시가와 선생은 저녁 식사의 목적을 밝히며 직접 “장충식 총장님과 단국대학이 하려는 훌륭한 일들이 성취되도록 우리 츠루미대 치의학부 교수들이 최선을 다해달라.”고 당부했다. 같은 동포인 한국의 치과대 의사들이 외면하고 거절했던 일을 일본인들이 나서서 팔을 걷어 부친 것이다. 의사로서 가장 기본인 박애주의(博愛主義)를 발휘해 국경을 넘어 도움을 주려는 이시가와 선생의 소신은 단순히 감사한 정도가 아니라 마음을 울리는 일이었다. 나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으로 귀국을 해서 치과대 부속병원 건축에 착수했다. 이시가와 선생의 지원을 약속받고 치과대학과 치과대 부속병원 설립 작업을 본격화했다. 천안캠퍼스 신축 작업이 선행되어야 해서 이를 준공한 뒤 치과대학 신설을 허가받았다. 여기에 4년의 세월이 들어갔다. 천안캠퍼스가 안착되었다는 확신이 들은 1981년 가을에 이시가와 선생, 그리고 당시 츠루미대학 치과병원 원장이었던 와타나베 선생 등 3명을 초청했다. 우리 대학의 현황을 직접 시찰하고 난 그들은 “단국대가 이렇게 크고 한창 발전하는 대학인 걸 미처 몰랐다”며 치과병원을 충분히 성공시킬 힘이 있다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후 우리 대학의 관계자들을 츠루미 대학에 보내 병원 설계, 교육과정 등을 자문받게 했다. 그들 역시 실무자들을 파견해 병원 부지, 입지, 원하는 기자재의 배치 등을 자세히 조사했다. 구체적 건축 계획이 잡히자 그들은 아예 자기들이 병원 건축 설계도 해주기로 했다. 사실 국내에 병원 건물을 설계할 전문가들은 그리 많지도 않았고, 설계비도 큰 돈이 필요로 하는 난제였다. 국내에 맡기면 수억 원을 상회하는 거액이 필요했다. 감당하지 못할 금액을 요구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있었는데 이시가와 선생을 비롯한 츠루미 대학의 전문가들은 이를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나중에 설계도 및 시방서를 완성해 이를 제출했는데 나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 건설 사업을 시작하면서 입수한 우리나라 대학의 치과병원은 1권으로 매듭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제출한 설계도는 그 분량이 10배를 상회하고 있었다. 대단히 정밀하고 꼼꼼한 설계도였다. 더욱이 그 설계도는 일본어가 아니라 모두 영어로 작성해 놓았다. 그들은 이 설계도를 만들기 위해 한번은 츠루미 치과대의 교수 및 치과진료장비 제작회사인 모리타제작소의 관계자 15명이 천안캠퍼스 병원 부지와 우리나라 치과병원을 시찰, 조사하고 가기도 했다. 이 때도 출장비를 부담하겠다는 내 제의를 거절하고 전액을 츠루미대학이 부담했다. 그들은 이렇게 정성을 들여 만든 병원 설계도를 우리 대학에 선선히 기증을 했다. 나중에 이만한 규모의 병원 설계비는 얼마나 필요한지 알아봤더니 달러 기준으로 약 40~50만 달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들의 진정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2년 치과병원을 착공하고 나니 역시 재정문제가 걸림돌로 다가왔다. 병원 공사비는 어찌 어찌 꾸리겠지만 그 안에 들어갈 치과 의료장비를 수입해야 하는데 이를 해결하기가 막막했다. 사실 나는 치과대 설립과 치대 병원 신축을 기획하면서 우리나라 치의학계에 대한 조사를 했다. 국내 치의학은 의과대의 산하에 부속된 일개 전공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의료시설도 종합병원의 진료과목에 병합되어 있는 현실이었고, 치과 의사를 낮춰보는 편견이 있었다. 종합병원 내에서 인식이 그러니 진료시설 투자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나는 이를 바로잡고 싶었다. 독립된 치과대를 세웠으니 병원도 종합병원 규모의 독립적 시설과 시스템을 마련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우리를 돕는 일본 측 교수들도 내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했다. 독립병원을 세운다고 나섰으니 그 큰 규모의 병원에 들어갈 의료장비도 이에 걸맞게 채워줘야 하지 않겠는가. 병원 착공 당시 우리 대학은 대대적인 교육시설 투자를 진행하고 있었다. 대학 본관, 천안캠퍼스 학생회관, 체육관, 과학관 등 건설 공사가 중을 잇고 있었다. 이 상황에 치대 부속병원에 설치해야 할 기자재 구입비를 산출해보니 미화 80만 달러가 필요한 것으로 나왔다. 당시 원화로 환산하면 6억4천 여 만원 안팎의 거금이었다. 당시 등록금이 1인당 40만원 정도였으니 1천6백 여 명의 학생이 내는 등록금을 합쳐야 의료장비를 들여올 수 있는 규모였다. 대학 수입으로 감당이 어려운 대형 투자였다. 지금이라도 하기 힘든 투자였다. 산업은행을 찾아가 대출이 가능한지 설득했지만 교육기관에 뭘 믿고 그 큰 돈을 대출하냐는 논리로 거절당했다. 고민 끝에 나는 다시 이시가와 선생을 찾아가 이를 털어 놓았다. 이시가와 선생은 이 문제를 들고 유수의 의료장비 전문 회사인 모리타제작소, 모리타 상회를 찾았다. 이 회사의 CEO인 모리타 대표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모리타 대표는 구입 대금을 일본수출입은행에서 우리 대학에 대출해주어 대금을 충당토록 주선했다. 혹자는 모리타 대표가 자기네 회사 장비를 팔려는 욕심에 대출을 주선하지 않았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사야 할 기자재는 모리타 회사만이 아니라 독일 제품도 상당히 많았다. 이 장비들을 포함한 구입대금 대출만이 아니라 대출 상환을 보증할 보증인이 필요했는데 이 보증문제도 모리타 상회가 서주기로 했다. 처음 보는 외국의 대학에 이같은 호의를 베풀기가 과연 쉬었을까? 설계도를 작성해 무상기부하고, 장비 구입비를 보증까지 서면서 대출하도록 도와주는 이 호의의 참뜻은 무엇일까? 우리나라 치과병원, 치의학계에 새로운 기원을 열어달라는 대학인으로서의 동료애, 국경을 넘어 사회적 약자들에게 좋은 의료 서비스를 하자는 인간애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건물을 짓자 츠루미대학의 교수, 모리타 상회의 기술자들이 와서 꼼꼼히 장비를 설치하고, 점검했다. 의료 기자재를 설치하는데 1년이 필요했다. 이 기간 동안 이시가와 선생은 츠루미 치과대의 시설 담당 간부를 우리 치대병원이 개원때 까지 한국에 상주시키며 자문, 기술 감독을 하도록 했다. 우리대학에서 채재비 부담을 하려고 해도 절대 받아들이 않고 자신들의 비용으로 다 감당해주었다. 단국인의 도전정신, 일본 전문가들의 우의로 치과대 병원을 준공할 수 있었다. 그 때가 1984년 9월 경이었다. 개원 이후 단대 치과병원의 위용을 본 국내 치의학 관계자, 병원 관계자들은 시설과 규모에 감탄을 했고 입소문을 탔다. 견학 신청이 줄이어 병원 운영에 방해가 된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다른 대학은 우리 최과대의 시설을 보고 자기들의 현실을 성찰했다. 국내 치과대와 치과병원들도 시설 현대화 사업을 앞 다퉈 개시했다. 우리 대학 치과대 부속병원이 가져온 작은 성과인 셈이다. 다행히 처음 일본수출입은행의 대출조건대로 10년 간 분할을 해서 전액 상환을 했다. 사실 일본의 전문가들도 인구 13만 명의 소도시에 이만한 설비를 갖춘 치과병원을 세워 기대만큼 운영 수익을 거둘 수 있을지 염려하는 의견도 있었다. 인구가 50만 명은 되어야 안정적 운영이가능하다고 전망했다. 개원 초기에는 약간의 시련이 있었다. 그러나 개원할 때 최고의 의료진을 초빙했고 교직원 모두가 힘을 합쳐 무사히 대출금을 상환할 수 있었다. 나는 이시가와 선생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어떤 대가도 없이 큰 호의를 베푼 이시가와 선생에게 내 우정의 뜻을 전하고 싶었다. 1989년 3월 그가 오랜 교직생활을 접고 정년 퇴임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개교 42주년을 맞아 선생과 부인을 초청했다. 그리고 선생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증정했다. 총장인 내가 바치는 최고의 헌사인 셈이었다. 현재 우리는 일본과 역사, 경제, 국제정치 등 여러 면에서 근 60년 만의 큰 갈등을 겪고 있다. 나 역시 일제 강점기에 나고 자란 세대로 마음 속에 남아있는 여한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나는 일본의 역사적 책임과 아울러 이시가와 선생같은 휴머니즘과 박애정신을 갖춘 의인이 많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우리의 이웃이다. 이웃과 싸울 수는 있지만 그를 적으로 내몰고 서로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새롭게 주고 받는 일은 피해야 한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다. 역사를 평가하고 자성하는 일은 언제나 필요하다. 동시에 미래를 향해 마음을 열고 우정을 공유하며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한국과 일본이 함께 증진하는데 앞장서야 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일본을 이기는 길이고 조국을 발전시키는 길이다. 끝으로 이시가와 다카오 선생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박원순 : 시국사범 굴레 쓴 젊은이에게 대학문을 열어준 이유

2019.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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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0월 유신을 선포하면서 정치상황은 한겨울의 호수처럼 얼어붙었다. 비상계엄시대나 마찬가지인 현실이었지만 대학생들의 항거는 끊이지 않았다. 1975년 5월이었던 일로 기억한다. 서울대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 앞서 4월에 발생한 서울대 학생 김상진 군이 10월 유신을 철회하라는 주장을 외치며 할복자살을 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충격을 받은 학생들이 5월 22일 김상진 군 추모 행사를 하다가 대대적인 항의시위를 벌인 것이다. 4천 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했는데 10월 유신 발동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고 투석전까지 벌어졌다. 이 시위로 서울대 총장이 사임을 하고,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과 남부서장이 경질되었다. 70명이 넘는 서울대 학생들도 무더기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살거나 제적이 되었다. 여기에 박원순 군(당시 서울대 사회계열 재학)이 있었다. 이 시위가 있던 해인 1975년은 박원순 군이 입학을 한 해였다. 입학한 지 두 달도 안 된 신입생이 알면 무엇을 얼마나 알았겠는가? 나중에 들어보니 운동권 조직에 속해서 시위를 한 것이 아니라 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진압경찰들이 시위 학생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는 장면을 보고 시위에 참가했다고 했다. 동기는 단순했지만 결과는 엄혹했다. 박원순 군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국가 사범으로 전락했다. 19살의 미성년자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은 박 군은 4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하고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물론 대학은 제적을 당했다. 법학과 진학(당시는 계열별 입시였고 2학년 때 학과를 선택했음)을 꿈꾸는 시골 수재에서 국가 안보를 훼손한 위험인물로 전락하면서 박 군과 나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1979년도 입시전형이 막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우리 대학을 담당하는 정보기관의 출입자가 나를 면담하고자 했다. 만나보니 박원순 군에 대한 일이었다. 정보기관 출입자의 주장은 이랬다. “박원순이란 학생이 단국대에 입학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박원순을 합격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을 장 총장님께 꼭 전달하라는 상부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습니다.” 나는 기관원의 말이 나의 원칙을 거스르는 말이라 반박을 할 수 밖에 없었다. “특별 지시를 받았다지만 대학이 학생을 입학시키고 말고는 담당 학과 교수와 총장인 나에게 있는 것이지 어찌 정보기관의 책임자가 입학 시켜라 말라 하는 거요. 법적인 하자가 없으면 입학을 하겠다고 원서를 넣은 학생을 놓고 합격 여부를 미리 정하는 것은 교육기관이 할 일이 아니니 상관에게 내 방침을 잘 전해줘요.” 담당 기관원을 돌려보내고 교무처(당시는 입학업무도 담당했음)에 박원순 이라는 학생이 입학원서를 제출했는지 알아봤다. 박원순 학생 입학원서가 접수되어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학생처장, 교무처장과 업무 담당자들을 불러 현황을 파악토록하고 입장을 피력하라 했다. “박원순 학생은 이미 서울대에서 제적당하고 교도소도 복역하고 나온 학생입니다. 타 대학에서 형사 처벌받고 제적된 학생을 입학시켜서는 안됩니다. 유신정부의 방침이 시위 학생은 대학에 적을 두어서는 된다는 것인데 우리 대학 재학했다가 제적된 학생도 아니고 다른 대학의 제적생을 받아줄 수 없습니다.” 처장들이나 직원들 모두 학생보다는 정권에 밉보일 때 당할 대학과 나의 안위를 걱정해 박원순 군의 입학을 불허하자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에게 내 생각을 밝혔다. “박원순 군은 서울대 학생 신분으로 데모를 주동했다고 해서 이미 제적을 당한 학생입니다. 지금 박원순 학생은 편입생이 아니라 신입생으로 입학하는 겁니다. 일반 고등학교 졸업장하고 예비고사 성적표를 갖고 입학 허가를 요청한 겁니다. 단국대 입시생으로 자격을 갖추었는데 서울대에서 있었던 일을 가지고 우리 대학이 서울대의 처사를 따라가라는 법은 없어요. 우리는 우리의 철학과 입장이 있는 겁니다. 교육 당국이나 정보기관의 입장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나는 결론을 내리면서 ‘다른 학생과 동등하게 입시를 치루도록 해주라’고 거듭 지시하였다. 총장 재직을 하면서 나는 반정부 데모에 참가한 학생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시위에 참여하여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등을 위반해 실형을 받으면 제적 처분을 받기는 하지만 법적 책임을 다 지고 나오면 전원 복학을 허락했다. 또한 그들이 졸업해서 사회인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내가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편의를 제공했다. 학생들은 정부가 독재라고 생각하면 반대 의사를 밝힐 권리가 있고 그런 시위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 교수들의 자세여야 한다고 믿었다. 이제와 하는 얘기지만 나는 박원순 학생이 단국대학에 지원한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박원순 군이 직접 밝힌 얘기를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총장님(박원순 씨가 쓰는 장충식 이사장의 명칭)을 처음 빈 것은 내가 서울대에서 제적되어 감옥에 갔다 온 후 어느 대학에서도 받아주지 않던 때였다. 당시 유신 정권 아래에서는 시위 사건으로 학교에서 제적되고 감옥까지 갔다 온 사람은 어느 대학도 갈 수가 없었다. 천형과도 같은 것이었다. (중략) 장충식 총장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총장님은 예상과는 달리 젊은 시절에 데모한 것은 자랑이면 자랑이지 결코 흠이 될 수 없다면서 오히려 격려를 해 주셨다. 시대의 굴절 때문에 상처 입은 젊은이에게 그것은 새로운 인간상이기도 했다. 사회에 대한 좌절과 고민이 어려 있을 때 이런 총장님도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으로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후 단국대학교를 거쳐간 많은 사람들에게서 총장님에 대해 내가 느꼈던 동일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그런 모습이 누구에게나 여의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략) 그 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되고 민주화의 봄바람이 잠시 불었던 1980년 초, 서울대학교에서 복학하라는 통지가 왔다. 나는 한 번 내쫓은 대학을 어떻게 다시 다니겠는가 하고 그 복학 통지서를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 단국대 사학과를 야간에 까지 수강하여 간신히 졸업할 수 있었다. 정말 주경야독인 셈이었다.”(『빈 들에 씨를 뿌리며』, ‘비범한 정신력의 중재(中齋)’ 중 발췌) 박원순 군의 말처럼 나는 학생운동을 하는 젊은이들을 이데올로기나 정권의 이해관계로 가름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가진 정의감,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나 역사의식을 잘 가르쳐서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대학이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박원순 군은 우리 대학에 입학할만한 좋은 성적을 얻었고 결국 입학했다. 그러나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도 중앙정보부, 보안사령부, 경찰 공안담당 부서에서는 박 군이 입학하면 다시 소요를 일으켜 대학과 사회를 어지럽힐 거라 근거 없는 예단을 하며 여러 가지 협박을 했다. 나중에는 학원 담당 고위 간부들도 나에게 여러 안좋은 얘기를 하며 입학 철회를 압박했다. 심지어 학교 안에서도 박원순 학생을 합격시키기 전에 그로 하여금 입학하면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케 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교육자로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내는지 화가 났지만 웃는 낯으로 자제를 시켰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 언약을 주었다. “박원순 학생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 했어요. 공부하기도 바쁠 겁니다. 만약에 당신들이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면 내가 총장의 직을 걸겠소!” 물론 박원순 학생은 입학 뒤로 정말 열심히 공부를 했다. 내가 기증한 집을 기반으로 고시 준비 학생들을 위해 설립된 법선재에서 후배들과도 같이 공부를 하기도 하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이윽고 재학생 시절에 법원 사무관 시험에 합격해 등기소 소장을 지내더니 1980년에는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로 임용되었다. 검사에 임용된 지 6개월인가 지나서 박원순 검사는 스스로 검찰을 떠났다. 사람에게 벌을 주는 직업을 견디기 힘들다고 했고 변호사로 인권을 지키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1982년 소중한 배필을 만나 혼례를 치루는 데 나에게 주례를 부탁했다. 물론 쾌히 승낙을 했다. 나중에 박 변호사는 “(신원보증인이 되어 대학 입학을 허락한) 인연으로 평생에 한 번 있는 결혼식의 주례로 모셨는데 신랑의 넥타이 색깔이 무엇인지 물어보신 후 당신이 넥타이 색깔까지 거기에 맞추어 매고 나오셨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의 결혼식에는 많은 하객들로 북적였는데 그들 가운데는 정보기관 사람들도 많았다. 내가 주례를 서려 식장에 들어가려는 데 정보과 형사가 “아니 이제 총장님께서 데모꾼 주례도 서주시냐?”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데 그 말 속에 심한 비아냥이 느껴져 지금도 불쾌한 기분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정보기관의 비뚤어진 감시가 있던 없건 박원순 군은 가정에도 충실하면서 자신의 활동에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학업에도 시간이 허락하는 최선을 다한 끝에 1985년 사학과를 졸업했다. 인권변호사로 맹활약하던 박원순 변호사는 법률적 성과에 그치지 않고 본격적인 시민운동에 나섰다. 나는 먼발치에서 박 변호사를 응원했다. 그는 1995년 참여연대를 창립하고 사무처장에 취임했다. 하루는 나를 찾아 와 도움을 요청했다. 내용인 즉 우리 대학 병원이 업무 상 보험회사와 보험을 많이 계약하는데 이 알선 업무를 자신이 이끄는 참여연대에 위임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시민운동 단체이다 보니 활동의 자율성을 지키는 것이 핵심원칙인데 대기업의 기부금, 정부의 지원금을 함부로 받아들일 수 없고, 시민들의 후원금도 미약해 재정이 어렵다는 고충을 밝혔다. 물론 나는 이를 받아들였다. 개인이 아니라 신민운동의 정의를 지키려는 박 변호사를 노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참여연대를 안정적 기반에 올려놓은 박원순 변호사는 이번에는 <아름다운 가게>라는 새로운 사업 모델을 갖고 나를 찾아왔다. 처음듣는 사업이라 내용을 물었다. “생활형편에 여유가 있는 가정에서 쓰지 않는 의류, 가정용 비품 등을 기부하면 이를 수집, 정리하고 수선하여 필요한 사람들이 구입하도록 하는 사업입니다. 자원도 절약하고, 환경도 보호하고, 중산층이 서민들의 가계에 보탬도 되면서 수익금은 다시 시민운동단체에 환원되는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단국대 교직원도 참여하고 총장님께서 나서주시면 이 운동을 확산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장호성 당시 부총장으로 하여금 대학 차원에서 이를 돕는 방안을 찾도록 했다. 장호성 당시 부총장은 박원순 변호사와 경기고등학교 동기동창이어서 친분이 두터워 이내 ‘후원기관 협정식’을 맺게 되었다. 기증용 물품을 수집하는 시설도 설치하고, 홍보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개인적으로는 아내와 함께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가까운 이웃들에게 이를 소개하고 여러 물품들을 기부하도록 했다. 내가 사는 워커힐아파트는 젊은이들보다는 나이든 분들이 많이 살거니와 소득 수준도 낮지 않은 세대가 많아서 그만큼 도움 될 만한 물품들이 많았다. 아내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600가구 가운데 알고 지내는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기부를 설득했다. 나중에는 친구들까지 참가토록 했고 며느리(주 : 장호성 전 총장의 부인 조기정 씨)도 힘을 보탰다. 여러 물품을 모으고 거두어 아름다운 가게에 보내다 보니 수집한 분량이 좀 아쉽다 싶을 때는 아예 철이 바뀌면 입어야 할 옷들도 꺼내서 기증품에 넣기도 했다. 많이 기부해서 이름을 과시하려는 욕심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애정이 그런 행동을 하게 만든 것이었다. 새로운 시민운동의 실마리를 열려는 박원순 변호사의 노력을 격려하고픈 마음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 때 활동을 열심히 한 며느리는 <아름다운 가게 서초점> 점장을 맡기도 했다. 2003년 당시 내며느리는 모 대학교의 영문과 교수로 출강하고 있었다. 남편의 동창이 하는 일이라 관심을 갖고 참가했는데 아름다운 가게의 가치를 마음에 들어 하더니 급기야 기존의 직업은 뒤로 하고 이 일에 전념했다. 일체의 보수도 받지 않고 개인의 이익보다 시민 공동체의 발전에 애정을 기울이는 며느리가 한결 지혜롭게 느껴졌다. 박원순 변호사가 하는 아름다운 가게에 대해 나는 주위에서 받는 좋은 평가를 기뻐했다. 정치계 입문에 대한 얘기가 돌 때 나는 그가 서민을 위한 자선사업과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을 하리라 기대했다. 어느 날 갑자기 서울시장에 출마를 한다고 해서 깜작 놀랬다. 진심으로 나는 그가 정치적 권력을 잡지 않기를 희망했다. 박 변호사는 정의를 위해 권력을 비판하면서 겪는 고초는 감수할 수 있지만 권력을 행사하면서 부딪힐 갈등은 매우 힘들어할 성격으로 보였다. 1천만 명을 대표하는 서울시장이 된다면 얼마나 많은 갈등을 감당해야 하겠는가... 그래도 선거를 시작하자 나는 처음 생각과 달리 박원순 후보를 돕고 있었다. 이왕 출마했는데 낙선을 하면 또 상처를 받을까 염려되었다. 내가 그의 결혼의 주례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어느 잡지사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나는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분명히 그가 서울 시장에 출마하지 않기를 원한다고 내 생각을 밝혔다. 그러나 막상 그가 최종적으로 서울시장 입후보로 등록을 하자 내 생각은 바꾸어졌다. 휴대폰을 한 대 더 마련했다. 기존의 휴대폰은 업무용으로 겸용을 하니 전화가 수시로 오고 사용이 번거로웠다. 서울시에 거주하는 친지들을 찾아보고 전화를 돌렸다. 내가 있는 단국대를 나온 인재이니 시장으로 활약할 기회를 주라는 부탁을 했다. 그런데 내 얘기를 듣는 상대편은 “박 후보가 무슨 단국대 출신이냐, 언론에는 서울대로 나온다.”며 나를 당황하게 했다. 많은 미디어에서 그를 단국대가 아닌 서울대 출신으로 소개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박 후보가 학력을 속이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도 나왔다. 언론의 속성에 실망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열심히 박 후보를 도와달라며 전화를 돌렸다. 얼핏 추산해보니 전화만 1천 통을 넘긴 것 같았다. 그래도 박원순 후보에게는 일체의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왕 시작한 일이니 동문이 잘되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한 일었을 뿐이다. 나중에 선거에서 당선되고 박원순 시장은 나와 아내, 그리고 아들 내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헤아려보니 그의 주례를 서고 나서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였다. 저녁 자리보다 우리 동문 20만 명 가운데 처음으로 서울시장이 나왔다는 그 사실이 기뻤고, 나에게 이런 기쁨을 준 박 시장이 고마웠다. 나와 박원순 시장의 이런 저런 인연이 알려지면서 여기저기에서 많은 부탁이 들어왔다. 세상 인심이란 그런 것이고 애써 그런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 연락을 않고 지낸다. 우리는 ‘대학(大學)’이라는 단어를 ‘크고 심오한 학문’을 배우는 곳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대학’에는 그 정신적 터전,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게 가지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이에게 시국사범의 굴레를 씌우고 삶을 송두리째 흔들면서 이를 당연시하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도 우리 기성세대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을 수도 있다. 젊은이에게 더 넓고 관대한 문호를 열어주려는 노력이 대학의 본분일 것이다. 그 인간적 풍토에서 미래를 열어갈 인재가 성장하지 않겠는가.

노태우 : 럭비선수 인연으로 탈냉전, 남북화해의 물꼬를 열다

2019.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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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태우 전 대통령과 대학생 때부터 알고 지냈다. 그 분과 나는 1932년 생으로 같은 나이이기도 하지만 대학시절 럭비선수로 활동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나는 서울대 사범대, 그 분은 육군사관학교의 럭비부 선수였다. 당시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한 공사, 해사는 모두 스포츠를 통해 군인정신을 기른다는 교육 방침을 갖고 있어서 서로 경쟁심이 대단했다. 럭비 경기는 개인은 막강한 체력이 필요하고, 단체로는 빈틈없는 단합이 필수적인 종목이다. 공격과 수비의 역할이 분명하고, 과감한 전진과 후퇴하지 않는 감투정신이 럭비의 강점인데 이는 군인정신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 사관학교로서는 럭비를 교기처럼 떠받들 수밖에 없었고 럭비 선수는 사관학교의 주목을 받았다. 나 역시 서울대 사범대의 럭비부에 속해있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문예반과 송구부에서 많은 활동을 했다. 한국전쟁 때 학도의용군으로 전쟁을 겪으면서 ‘건강한 육신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격언을 몸으로 깨달았기에 대학에 진학해서는 럭비부에 입단했다. 서울대 사범대 럭비부는 일제시대부터 유지된 전통있는 럭비팀이었다. 평균 성적을 B학점 이상 유지해야 선수 생활이 허용되어서 선후배 모두 엘리트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사범대 럭비부는 또한 내 기억으로는 전쟁 중에 서울대가 공인한 운동부로는 유일했다. 그만큼 자부심이 강했다. 전쟁 통에 서울대 운동장을 군부대가 점령하고 있어서 운동 여건은 좋지 않았다. 따라서 그나마 멀쩡한 운동장을 가진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연습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육사 럭비부와 연습 경기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대회를 앞두면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육사 럭비부와 만나는 일이 매일이다 시피 했다. 그렇게 4년을 보내니 육사 선수들과 우정도 가볍지 않았는데 노태우 전 대통령은 럭비부 주장이었으니 더 자주 만난 셈이었다. 특히 나는 스포츠 만이 아니라 공부에서도 노태우 전대통령과 인연이 있다. 노 전대통령이 육사시절에 법학을 배웠던 이광신 교수님이 계시는데 이 교수님은 내가 휘문고등학교를 다닐 때 나의 담임 선생님이셨다. 한국전쟁이 나자 이 교수님은 군복무를 치루느라 육군사관학교의 교관으로 가셨고, 거기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광신 교수님은 그 뒤에 내가 우리 대학으로 초빙했고, 부총장을 지내시며 정년을 하셨다. 서울대나 단국대 교정에서는 아니었지만 나와는 또 다른 ‘학연’을 갖고 있는 셈이었다. 이같은 각별한 인연으로 그 분은 나를 변함없이 신뢰했고 올림픽 유치부터 북방정책, 남북 단일팀 협상 같은 중대사에서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내가 노태우 전 대통령과 서울올림픽 유치 캠페인에 나서게 된 첫 발자국은 전두환 전 대통령 때문이었다. 나는 스포츠를 통해 우리 대학의 젊은이들을 스포츠정신을 갖춘 지도자로 키우고 싶었다. 럭비, 씨름, 스키, 스케이트, 조정 등의 비인기 종목을 키운 것도 스포츠가 가진 교육적 기능을 인기 종목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내 소신 때문이었다. 그런 활동이 이어져 대한체육회 이사 겸 대학체육위원회 위원장(1977년~1983년)을 맡고 있었다. 제5공화국이 출범한지 얼마 안된 1981년 봄이었다.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때에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동생이자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전경환 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형님께서 문교부(현 교육부 전신) 장관을 맡기고 싶어 하십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에도 비슷한 제안을 받은 바 있었고 전두환 대통령과도 럭비선수로 같이 운동을 했던 인연도 있었다. 거기에 5공화국 출범에 공을 쌓은 여러 지인, 원로들이 나를 천거했다는 풍문도 들은 바 있었다. 물론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계나 관계에 발을 내딛지 않는다는 내 철학, 교육자가 권력을 가지면 결국 자신도 권력에 망가진다는 소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내 철학을 설파할 수는 없어서 “제가 허물이 많은 데 문교부 장관이 되면 다른 대학 총장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서 사양을 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대한체육회장을 맡으라는 것이다. “나를 높게 평가하시는 건 고맙지만 대한체육회장은 상근직입니다. 대학 총장 일을 하기도 벅찬데 체육회장으로 상근하면 단국대학에 누를 미치는 일이니 양해해주세요.” 이렇게 설명했더니 다음에 한국올림픽위원회(KIOC) 부위원장으로 일해 달라는 요구가 왔다. KIOC 위원장은 대학체육회장이 겸직하도록 되어 있으니 부위원장이라도 맡으라는데 이를 거절하면 정부에 반대하는 총장으로 비칠까 염려해 수용했다. 당시 대한체육회는 유신정권 당시에 임명된 주요 인사들이 물러나면서 신군부 인사들이 빈자리를 채워나가던 일종의 과도기였다. 이 때 가장 큰 화두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대학체육회를 중심으로 선언한 ‘올림픽 유치 사업’이었다. 사실 올림픽을 ‘대한민국 서울’로 유치한다고 세계 스포츠계에 선언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을 당하면서 스포츠계는 혼란 속에 손을 놓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박정희 정부 시절에 우리나라는 1970년 아시안게임을 서울로 유치했다가 파기한 경력도 있었다. 아시안 게임 유치는 성공했지만 경제개발 우선론과 무장간첩사건 등이 겹치면서 벌금 25만 달러를 물어내며 개최권을 반납했다. 세계 스포츠계에서 큰 비난을 받았고 신용을 잃어버린 계기가 되었다. 국내 상황이 어렵다고 기껏 올림픽 유치를 세계인에게 공언하고 나선 마당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적 자존심과 신뢰성의 문제가 될 판이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올림픽 유치 캠페인을 제대로 전개할 형편도 아니긴 했다. 우선 중심이 될 대한체육회가 흔들리고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생존 당시 그의 측근이었던 박종규 경호실장이 육영수 피격사건으로 낙마를 해 앉은 자리가 대한체육회장이었다. 올림픽 유치 사업은 박 회장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해 결정된 사업이었다. 나는 당시 대한체육회 이사로 있었는데 박종규 회장이 검토하던 서울올림픽 유치에 적극적으로 지원을 했었다. 올림픽이 단순히 ‘달러를 소비하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경제와 문화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국가개발의 계기’라는 점을 역설했다. 박종규 회장은 “그렇다면 당신이 나랑 같이 박 대통령께 가서 올림픽 유치 필요성을 설명하자.”는 그의 지시 아닌 지시를 받고 이사 자격으로 동참해 같은 박대통령에게 논리를 설명한 적이 있었다. 그 뒤 당시 중앙정보부가 분석에 나서서 서울올림픽 유치 가능성이 적지 않고, 경제개발에도 이롭다는 보고서가 나와서 올림픽 유치를 공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올림픽 유치 선언이 1979년 3월에 있었는데 바로 그해 10‧26이 발생해 서울의 봄을 거쳐 전두환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단 박종규 대한체육회장이 사퇴를 했고, 조상호 전 청와대 의전실장이 후임으로 와있었다. 올림픽 유치 사업을 하자던 주역이 없어졌으니 사업의 추진력이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아예 서울올림픽 자체를 반대하는 쪽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정권을 잡은 직후 측근들에게 서울올림픽 유치 활동를 중단시키고 새마을운동 역시 계승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전두환 정권은 유신정권의 후계자가 아닌 제5공화국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 했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의 상징인 새마을운동을 이어받으면 새로운 정부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는 정치적 문제라기 보다는 올림픽을 유치하면 도로, 경기시설 등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데 당시 극심한 불경기인 만큼 국가 재정에 무리를 주는 사업에 돈을 쓰지 않겠다는 경제적 계산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1979년 12월에 IOC로부터 1988년 올림픽 유치 후보도시로 공인받았음에도 1981년 2월, 제5공화국 출범 뒤에는 경제개발에 방해가 된다는 논리를 앞세운 고위관료들의 반발로 유치 신청 철회라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그래서인지 대한체육회 부회장직을 맡은 지 한 달도 안 된 시간에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으로 있던 이상주 수석이 나를 불렀다. 이 수석은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입니다. 서울올림픽 유치 사업을 포기한다는 결의를 해주십시오.”라는 부탁아닌 부탁을 했다. 대한체육회와 한국올림픽위원회가 공동 이사회를 열어 박정희 정부에서 공표한 서울올림픽 유치를 포기한다는 결의를 통과시키고 공식화해달라는 것이다. 서울올림픽을 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뜻임을 강조했지만 나는 따르지 못한다는 의지를 명확히 밝혔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이는 세계 스포츠 무대에서 한 공언입니다. 지금 어려운 경제현실을 들어 올림픽이 경제력을 탕진한다는 주장을 경제 관료나 정치인들이 대통령께 여러 부정적 건의를 하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만 해도 동경올림픽을 하고 나서 일본 상품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이 확 달라졌고 그래서 수출도 더 살아났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경제인들이 앞장서서 지금 1988년 나고야 올림픽을 유치한다고 저 난리를 치는 것 아니겠어요. 이코노믹 애니멀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큼 본능적인 장사감각을 가진 일본이 손해를 본다면 저렇게 관료, 기업, 정치인들이 하나로 뭉쳐서 나고야 올림픽을 열게 해달라고 인심을 얻으려 전 세계를 누비고 있겠습니까?” 이상주 수석은 내 말의 취지를 이해는 하면서도 대통령의 지시이니 수용해달라며 헤어졌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조상호 대한체육회장을 만났다. “회장님은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의 의전실장을 지내신 분이잖습니까. 정권이 바뀌어도 박 대통령이 국제무대에 공언한 바를 이제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손바닥 뒤집듯 바꿀 수는 없는 일입니다. 회장님이 나서서 청와대를 설득하셔야 합니다.” 조상호 회장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일단 올림픽 유치 포기를 위한 이사회 결의는 지연시키면서 전두환 대통령의 인식을 바꾸는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노태우 당시 정무 제2장관의 도움이 컸다. 조상호 회장과 나는 대한체육회를 통해 올림픽이 국가발전에 미치는 긍정적 사례를 역대 올림픽의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하여 보고서를 만들어 청와대에 제공했다. 노태우 장관도 이에 찬동해 전두환 대통령의 가까운 거리에서 서울올림픽의 중요성과 효과를 설명해나갔다. 자신의 소관 분야인 외교와 안보 쪽의 논리로 서울올림픽이 세계인의 축제인 만큼 이를 준비하고, 개최하는 7년 동안 북한의 대남 침략 위협을 감소시킨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이같은 안보논리에 적극 동감했다. 전 대통령은 다시 마음을 바꿔 서울올림픽 개최를 결심했다. 우리보다 국력이 앞선 일본(1980년 당시 일본의 GNP는 우리나라의 16배였음)보다 유치 캠페인도 늦게 시작했으니 유리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 쪽에서는 중앙정보부가 백업을 하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같은 기업 총수, 서울시장 등 민간인이 전면에 나서도록 했다. 나고야 올림픽 유치위원들은 한국을 우습게 보고 자신들이 승리한 듯이 기세를 과시했다. 노태우 장관은 나를 불러 면담을 하며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제 한국과 일본의 국가적 자존심을 건 싸움이 됐다며 자신을 도와 IOC 위원들의 마음을 돌리는 득표 활동에 전력을 기울여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1981년 7월 루마니아에서 열린 하계 유니버시아드의 한국선수단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대회 기간 내내 나는 선수단의 성적보다도 해외 스포츠계 인사들에게 우리나라가 올림픽 유치에 진정성을 갖고 있으며 얼마든지 좋은 대회를 치룰 자신이 있다고 역설하고 다녔다. 힘있는 국제 스포츠계 인사들은 아시안 게임 반납 등의 과거를 예로 들며 우리 한국이 과연 진짜로 올림픽을 유치하겠다는 각오가 있는지를 의문시하고 있었다. 유치 활동이 확실한 전망을 보이지 않아 안절부절하고 있던 1981년 여름이었다. KOC의 김운용 부회장이 나에게 정보를 주면서 지원을 요청했다. “장 총장님, 제가 5월부터 유럽, 아시아 지역의 IOC위원들을 만나고 돌아왔잖아요. 어느 정도 한국의 올림픽 유치에 대한 진정성은 믿게 되었는데, 중동지역 아랍 국가들은 대부분 일본 나고야에 마음이 기울어 있더라구요. 이대로 가면 투표단이 82명인데 한국을 지지하는 위원들은 25명 안팎일 겁니다. 지지자를 더 늘려야 하는데 제가 알아보니 쿠웨이트의 쉐이크 파하드 NOC위원장이 핵심입니다. 이 양반에게 장 총장님이 단국대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하시면 어떨까요? 그러면 본인에게도 영예로운 일이고 방한 기간 중에 우리가 잘 설득하면 한국에 친근감을 가질 테고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흔쾌히 응낙했다. 쉐이크 파하드 위원장은 쿠웨이트 왕의 막내 동생이었다. 아시안 올림픽위원회를 관장하는 책임자이고 막강한 권력과 경제력을 갖춘 아시아 스포츠계의 리더였다. 아시아 IOC위원들, 특히 중동국가에 대한 지배력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전통적으로 미국의 영향을 받아 친이스라엘 정책을 유지한데 큰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반이스라엘, 친아랍 정책을 지켜온 북한이 더 가까운 우방인 셈이었다. 그를 한국지지로 돌리면 15표 안팎은 쉽게 일본 지지에서 이탈할 것이고 이는 한국의 득세를 의미하는 일이다. 나는 김운용 부회장에게 교섭을 해달라 부탁했다. 결국 성사되어 방한을 했다. 자신의 전세기를 띄워 가족, 친지, 참모들을 다 데리고 왔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귀국 이후 그는 서울 개최 지지로 방향을 틀었다. 김운용 KOC부회장과 손을 잡고 국제 스포츠 리더들을 친한파로 돌리는 일은 또 있었다. IOC 부위원장을 지내고 있던 코트디부아르(영어식은 아이보리코스트)의 루이스 귀란도 응디아예 위원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뜻을 돌리게 했다. 귀란도 위원은 주 캐나다 대사로 일하던 이였다. 서부아프리카 IOC위원들을 리드한다는 귀뜸을 받고 초청을 해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이런 일들은 주로 김운용 부회장, 노태우 장관과 손을 잡고 이뤄졌다. 그들을 한국으로 불러내어 섭외를 할 때 체육단체나 국가기관의 초청장을 내밀 수는 없지만 대학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북한은 한국이 올림픽을 개최하면 체제경쟁에서 뒤떨어진다는 경계심에서 한국의 유치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자신들이 갖고 있는 비동맹 국가나 중동과 아프리카 국가에 대한 우호적 영향력을 이용해 일본 나고야 개최로 결론 나도록 주력했다. 냉전시대의 경쟁은 민족도 뒤로 돌리는 힘이 있었다. 아랍과 아프리카에 대한 북한의 외교력이 적지 않았던 상황에서 두 스포츠 지도자를 돌려세우는데 단국대의 명예박사학위 수여는 큰 동기가 된 셈이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1981년 9월 바덴바덴 총회에서 서울올림픽 개최라는 기적이 탄생한 셈이었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나자 줄이어 서울아시안게임 개최권도 한국에게 굴러왔다. 서울올림픽에서 보여준 우리의 추진력을 보고 경쟁국가가 나서지 않은 결과였다. 노태우 장관은 국제스포츠 행사를 착실히 준비하자는 취지에서 새로이 설치된 체육부의 초대 장관으로 임명되고 이어 내무부 장관을 지내더니 1984년에 대한체육회장과 KOC위원장에 올랐다. 관계와 민간단체를 거치며 서울올림픽, 서울아시안게임을 총괄하는 자리를 역임하고 있었다. 나는 유니버시아드 선수단 단장, 아시안 게임 및 올림픽을 개최하는 나라가 의무적으로 시행하는 세계 스포츠 과학학술회의 주관대학의 총장으로 분주히 민간 스포츠 외교 활동에 공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5년 들어 IOC위 주선으로 서울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납북체육협상이 열렸다.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열린 회담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이 회담에서 김종하 KOC 위원장이 수석을 맡았고 KOC 부위원장인 나는 차석으로 회담에 참여했다. 결실을 맺지 못한 회담이었지만 북한의 논리와 회담 진행방식, 우리 측의 전략이 가진 장단점을 숙지하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서울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좋은 경험을 한 것이 있다. 우리나라 에스페란토협회 회장으로 중국에 들어갈 수 있었고 공산권 국가와 교류의 작은 구멍을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에스페란토어는 19세기 말에 폴란드의 의사가 창안한 국제어이다. 언어적 구성을 단순화시켜 세계인이 배우고 쓰기 쉽게 만든 인공언어이다. 나는 언어를 통해 다른 나라 사람들과 격차없이 언어를 습득하고 소통할 수 있다는 점에 매력을 느껴 1980년쯤부터 학습을 시작했다. 한창 활동을 펼칠 때는 우리 대학에 에스페란토 수업을 정식 교과목으로 만들어 보급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에스페란토어협회가 내부 갈등을 겪다가 나를 회장으로 추대해 1982년부터 한국협회장을 맡고 있었다. 에스페란토 협회는 1년에 한번 씩 세계대회를 열어 관련 사업들을 논의하는데 1984년 총회는 중국에서 열렸다. 당시 미국과 소련을 줌심으로 한 냉전이 가열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에스페란토어는 인종, 이념, 국경을 초월해 인류애와 평화를 지향하자고 생긴 언어여서 총회 역시 서구권, 동구권을 가리지 않고 돌아가면 열렸다. 즉 엄격한 비자나 입국심사가 일상화된 사회주의 국가에 입국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한국 대표로 자연스럽게 중국의 비자를 받고 북경에 들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중국은 우리와 비수교 국가이고, 친북한 국가이며 한국의 적성 국가였다. 당연히 북한의 주재요원들이 나를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 요원인지, 외교관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북한 요원들은 내가 머무는 호텔까지 찾아와 우리에게 온갖 욕설과 협박을 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여기가 어딘지 알고 왔느냐, 죽고 싶냐”는 논지였고 대회장도 가지 못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중국 공안당국에 항의 겸 신변보호를 요청하여 대회장에 나갔고 에스페란토 말로 연설을 하였다. 사실 이렇게 대회 참가에 애를 쓴 이유는 에스페란토 어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이 대회를 통해 동구권 국가에 대한 교류의 실마리를 만들고픈 희망 때문이었다. 중국이라는 거대 공산국가에 당연히 동구권의 다양한 인사들이 참가할 것이 확실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당시 대한체육회장으로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주도하고 있었다. 1984년 LA올림픽에 동구권 국가들이 불참했으니 서울올림픽에는 반드시 참여토록하는 것도 중요한 성공요인이었다. 나는 이 점에 착안했다. 정치적인 문제는 담지 않은 순수하게 한국의 산업발전 상황, 문화 수준을 홍보할 브로슈어를 에스페란토어로 만들어 북경총회에서 배포하고, 회원국가의 지도자들에게 발송하자는 생각이었다. 내 제안을 들은 노태우 회장은 대환영을 했다. 많은 돈이 드는 일이었지만 노태우 회장의 지원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나는 에스페란토 어를 이용해 우리나라의 문화, 산업시설, 아름다운 도시 풍경, 교육시설과 산업제품 등을 컬러로 인쇄해 갖고 갔다. 물론 동구권에 중점적으로 발송하기도 했다. 엄혹한 냉전시대에 남한의 발전상을 적성국가인 중국의 북경 한복판에서 홍보할 수 있었으니 북한 요원들이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할 만하지 않았는가. 과연 한국 홍보책자는 바라던 결과를 가져왔다. 대회에 참가한 헝가리 대표단 가운데 부다페스트 공과대의 부총장으로 재직 중이던 야노쉬 긴스트러(Janos Ginsztler) 박사님이 있었다. 이 분이 홍보 책자를 보고는 한국과 우리 대학에 호감을 갖게되어 귀국 뒤에도 편지를 보내와 교류를 하게 되었다. 우정 어린 서신이 오고 가면서 점차 양국간 수교관계는 아니지만 우선 양 쪽 대학이라도 자매결연을 맺고 학생들을 교류하자는 데 합의가 되었다. 그 때 노태우 대한체육회장이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고 1987년 12월 직선제 개헌과 대통령선거를 거쳐 이듬해 2월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5개월 만에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을 공표했다. 7‧7선언으로 불리는 이 선언은 <북방정책>으로 가시화되면서 기존관념을 넘어선 대담한 외교관계를 열어갔다. 그 첫 관문이 헝가리였다. 나는 노태우 대통령에게 헝가리 부다페스트공대와 자매결연을 맺고 학생들을 교류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이윽고 7‧7선언 이후 첫 결실인 주 헝가리 상주대표부가 설치되고 이듬해 2월에 주 한국 헝가리 상주대표부가 설치되었다. 분단 이후 최초의 동구권 국가와의 수교였다. 나는 1989년 2월에 부다페스트 공과대를 방문했다. 부다페스트 공대는 외형으로 봐서는 규모가 컸지만 자세히 보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기자재는 많이 낡았고 새로 도입한 것이 눈에 띄지 않았다. 공산화 이전에는 과연 노벨상을 수상한 학자들을 배출하고 유렵의 명문대라 자부할만한 대학이라는 전통이 담겨진 캠퍼스였다. 지금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와 교류한 부총장은 매우 인자하면서 실용적인 분이라는 것을 대화에서 엿볼 수 있엇다. 그는 우리 대학의 홍보물과 한국을 알리는 잡지를 보고 그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우리 대학에는 원자로가 있는데 몇 년 전에 고장이 났지만 고칠 돈이 없어 사용하지 못하고 있어요. 이걸 고치면 헝가리 만이 아니라 동유럽의 이공계 학생들을 위한 재교육기관을 설치해서 공학교육에 진일보시킬 수 있을텐데...” 현실을 안타까워 하던 그는 내가 공감을 하자 1백만 달러 만 지원해달라는 말을 꺼냈다.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No’라고 하자니 선량한 학자에게 실망을 주는 것 같고, ‘Yes’라고 하자니 우리 대학도 여의치 않은 형편이 떠올랐다. 일단 나는 우리 대학도 사립이라 학부형의 등록금에 의존하고 있으니 교비지원은 어렵다고 솔직히 말했다. 대신에 귀국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서 꼭 도움이 되는 길을 마련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또한 이런 지원 사업을 하려면 우선 양교가 자매결연을 맺고 서로 학생도 교환하면서 한국의 지원을 유도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자매 결연을 맺고 돌아왔다. 나는 귀국하는 즉시 이상희 과학기술처 장관을 만났다. 부다페스트 공대를 후원하여 두 나라가 국교를 맺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자고 역설했다. 헝가리부터 한국 기업과 상품이 진출하면 동구권으로 문호가 더 열리지 않겠냐고 지원을 호소했다. 이상득 장관은 나의 논리에 공감했다. 지원 가능자금을 검토한다 하더니 300만 달러 정도 가능하다고 답을 줬다. 그러면서 대통령도 보고를 듣고 궁금해 한다며 직접 면담을 하며 여러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노 대통령과 오랜만에 면담을 했다. 대학 간의 민간 교류가 확대되어야 헝가리나 동구권 지식인들에게 반공국가라는 고정 관념을 말금히 털어내어 마음을 사고, 이를 통해 대기업들이 진출하여 경제 교류로 확산시키는 방안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오랜 인연이 있어서인지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었다. 면담 뒤에 지원 액수가 300만 달러에서 500만 달러로 증액되었다. 주선을 하는 나로서는 부다페스트 공과대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고 알릴 수 있어서 기쁘고 감사했다. 이 지원금으로 부다페스트 공대는 원자로를 고치는 숙원사업을 해결했다. 또한 주변 동구권 국가의 인재들을 불려 들여 기획했던 공학생 재교육 과정을 신설했다. 그리고 단국대의 학생들을 부다페스트 공과대에 교환학생으로 파견하게 되었다. 이 때 파견한 3명의 학생 가운데 한 명인 지금 우리 대학에서 근무하는 현준원 군은 자연과학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있었다. 현준원 군은 석사학위 과정에 입학해 열심히 공부하여 부다페스트 공대에서 성실한 학생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현준원 군은 1994년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동구권 유학생이면서 사회주의 국가에서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또한 당시 내가 삼성문화재단의 이사로 있었던 인연으로 이건희 회장에게 삼성그룹의 헝가리 진출을 권유해 현실화했는데 이 때 현준원 학생이 통역을 맡아 맹활약을 하기도 했다. 우리 학생들이 헝가리로 나간 이후 헝가리에서도 5명의 학생들이 우리 대학에 들어왔다. 동구국가에서 온 최초의 교환학생이었다. 어찌보면 귀한 손님같은 학생들인데 막상 그들이 머물 숙소가 마땅치 않았다. 우리 대학 서울캠퍼스에 운동부 기숙사는 있지만 유학생을 위한 기숙사는 없었던 탓이다. 한국어나 영어가 익숙치 않은 학생들이라 아무데나 의탁시킬 수도 없었다. 화곡동에 있던 내 집을 그들의 기숙사로 내놓았다. 나는 아파트로 전세를 얻어 이사를 갔다. 화곡동 집은 자연스럽게 대학에 기부를 한 셈이 되었다. 화곡동 집은 대지가 160평, 건평이 180평인 큰 집이었다. 두 세 명이 잘 수 있는 방이 7개나 있었다. 이 집은 선친이 물려주신 유산과 내 아내가 저축한 돈으로 지은 것이다. 한남동에 있던 집도 법선재로 기부한 뒤여서 평생 산다는 각오로 내 딴에는 든든하고 고급스럽게 짓겠다는 결심으로 공사를 감독하며 마련한 집이다. 이역에서 고생하는 헝가리 유학생들이 집이 따뜻해서 좋다는 말을 들으면 스스로 더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내놓은 집이지만 애정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내가 이사장에서 물러난 뒤 지금의 죽전캠퍼스를 신축하는 과정에서 건설 감리비가 급히 필요하다는 이유로 기부자인 나와는 상의도 없이 매각이 결정되었다. 이윽고 번개 불에 콩 구어 먹듯이 하루 아침에, 그것도 헐값에 팔리고 보니 마음이 좋지가 않았다. 북방정책을 성사시키느라 뛰어다니면서 정작 내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는 모습까지 봐야 했으니 인간사 새옹지마라는 옛말이 실감된다. 헝가리와 교류를 시작하며 북방정책의 실마리를 푸는 과정에서 노태우 대통령은 나의 추진력이나 이념을 넘어서는 실용주의에 더 큰 신뢰를 받은 듯 했다. 바로 1989년 3월에 시작되는 <북경 아시안게임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의 남측 수석대표로 나를 임명했다. 나는 한양대 체육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학래 교수(당시 KOC 상임위원)를 차석대표로 앉히고 회담을 개시했다. 북경아시안게임이 2년도 안남은 상태에서 북한이 제의해 열린 회담은 1989년 3월 9일부터 1990년 2월까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본회담 9차례, 실무대표 접촉이 6차례 이뤄졌다. 남북한 모두 굉장한 관심을 받으며 회담을 진행했고, 나는 체력의 한계를 느낄 정도로 신경과 에너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북단일팀의 호칭, 단기, 단가, 공동단장제, 선수단 구성 및 실무 사무국 설치 등의 구체적 합의를 끌어낸 것은 남북 양측 모두 자부할만한 성과였다. 회담을 통해 얼개를 완성했지만 최종 협상의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시점에서 북측은 더 이상의 용기를 내지 못했다. 남측도 원로 체육인들은 해당 경기종목이 단일팀 구성으로 메달을 못 따면 뒤따를 불이익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정부 쪽에서는 북경아시안 게임에서 종합순위 2위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 일본에 질 수 없다는 주장도 득세를 해갔다. 이 자리에서 소상하게 밝히기 어려운 여러 가지 정치적 셈법, 우여곡절이 얽히면서 결국 회담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협상을 통해 많은 문제가 풀렸고, 그 성과는 북경 아시안 게임으로 이어졌다. 노태우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정동성 당시 체육부 장관이 나를 만났다. 세 가지 지침을 받았다. 하나, 북경 아시안 게임의 선수단장을 맡아달라. 둘, 북경 아시안게임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도록 중국과 우호관계를 구축해달라. 셋, 아시안 게임이 끝나면 이어지는 국제대회에서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참가하도록 비밀리에 성사시키라는 것이었다. 정동성 체육부 장관은 유도부 출신으로 기백이 씩씩하고 성격이 활달했다. 스스로 대통령의 지시라면서 “장충식 총장님이 좋은 성과를 거두도록 도울 수 있는 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나는 이미 유니버시아드 단장을 네 번이나 역임을 했다. 그 당시 헝가리, 몽골, 남북체육협상 등으로 육체적으로 지치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었다. 그러나 거절할 수 없었다. 좌절한 남북체육협상의 불씨를 되살리고 싶었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정책이 결국은 남북간의 화해로 이어져야 그 값어치가 살고, 우리 민족에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다섯 번째 선수단장 직을 수락하기로 했다. 1990년 9월, 한국선수단장으로 북경을 입성하고 나니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의 집무실이 준비되어 있었다. 겉은 김우중 회장의 집무실이지만 남북한 협상 관계자들이 여기에서 비밀 회담을 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놓았다. 언론의 이목을 피해 조용히 협상을 할 수 있어 얘기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시안 게임의 개막식 다음날인 9월 23일 남북체육장관 회담이 열렸다. 양측 장관은 단일팀 구성을 한다는 문제에 합의를 했다. 원칙은 정하고 각론은 다시 “남측은 장충식 수석, 이학래 차석이, 북측은 김형진 수석과 박시남 차석이 만나 타결키로 했다.”는 결론을 공유했다. 우리 대표단은 이미 지난 회담에서 상당한 합의를 이뤘기에 이번 회담은 더욱 스피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결국 9월 29일 나와 김형진 수석이 공동기자회견을 통해 <남북통일축구경기>를 갖기로 했음을 선언했다. 협상 가운데 어려운 점은 취재언론인의 규모를 제한하는 일이었다. 북측은 취재단을 7명으로 제한하자고 했지만 나는 그들의 강력한 주장을 성의껏 설득해 12개 언론사 20명으로 확대했다.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쉴 때 청와대에서 긴급 훈령이 왔다. 정동성 체육부 장관이 우리 선수단과 평양에 같이 참석할 수 있도록 교섭하라는 지시였다. 원래는 선수단장인 내가 선수단을 이끌고 방북하기로 합의한 문제였다. 북측 대표와 얘기하니 난색을 보였다. 협상이 끝난 사안이라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수 있고, 이를 번복할 결심은 ‘최고 수령 동지’만이 할 수 있다고 했다. 결국 북경에 주재하는 북한 대사를 면담하고 사정을 설명했다. 물론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간절히 호소를 하자 김정일 위원장의 재가를 받았다며 정 장관의 참가로 변경할 수 있었다. 나 역시 해방 후 최초로 열리는 통일축구 경평전에 왜 가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나는 나의 입장을 단 한 번도 내세우지 않았다. 나는 협상을 성사시키는 사명을 받았으니 정부의 뜻을 이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일이 마무리되자 노태우 대통령은 축하의 전문을 보내주고 격려해주었다. 중국과의 수교를 현실화하려면 중국에 남한이 가진 힘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는 진정성을 전달하는 일이 중요했다. 북경 아시안 게임은 달리보면 해방 이후 단절된 남한의 젊은이, 그 배경이 되는 한국사회의 역량을 중국의 심장에서 펼쳐보이는 기회의 장이기도 했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이기도 했다. 마침 북경 아시안 게임 조직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있었던 장백발(張百發) 체육위원회 부위원장(우리나라 차관급)은 나와 오랜 인연이 있었다. 그는 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88 서울올림픽에 맞춰 열린 스포츠과학 학술회의에 중국대표단을 인솔하고 참석하여 많은 활동을 펼쳤다. 이 회의의 조직위원장인 나와는 각별히 자주 만났는데 성(姓)이 같은 장 씨에다 나이도 나보다 훨씬 위라 사석에서는 나를 동생이라고 호칭하면서 가깝게 지냈다. 그와 만나다 보니 북경 아시안 게임이 눈앞에 왔는데 가장 큰 걱정은 자동차 문제라는 고백을 들었다. 각국 선수단 단장과 임원들이 사용해야 할 차량이 500 여대 정도 필요한데 예산 형편이 감당키 어려워 택시를 활용할 실정이라 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은 자동차를 생산하기 힘들었고,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자동차 생산 국가였으니 이를 수입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장 부위원장은 한국에서 자동차를 생산하니 협조를 부탁한다고 통사정하였다. 나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님을 찾아가 이 문제를 전달했다. 정주영 회장은 도량이 큰 기업가였다. 현대차 500대를 북경대회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조직위원회는 대단히 기뻐하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뜻을 나와 정주영 회장에게 전해왔다. 내가 북경대회에 선수단장으로 참석하였을 때 장백발 위원장이 가장 크게 기뻐했다. 한국선수단에 관련된 일이라면 조직위원회는 내 요구를 대부분 다 들어주었다. 우선 선수촌에 입촌하려고 남북한 선수단의 숙소 위치를 알아보니 동과 서, 양쪽 끝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혹시나 가까이 배치했다가 불상사가 일어날까 염려해 격리하다시피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같은 민족인데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젊은이들의 마음이 어떻겠느냐 설득했다. 그들은 선선히 나의 요구를 들어줬다. 대회 기간 중에 남북한 선수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었고 나중에는 반가운 인사를 나눌 정도로 가까워지기도 했다. 또한 선수촌 가까이 한식 식당을 차리도록 허가를 내달라 부탁을 했다. 대회 기간 중 한국 손님들이 많이 올 텐데 식당이 멀리 있으면 귀빈들과 관광객들이 불편할 거라며 협조를 구했다. 이 역시 허가를 받아내 많은 이들이 한국 음식을 먹으며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1990년 10월 7일 북경 아시안 게임은 막을 내렸다. 한국은 중국에 이어 종합순위 2등을 차지했다. 나는 처음 선수단장을 맡으며 부여받은 노태우 대통령의 지침을 모두 마쳤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곧 다가올 한중수교를 예감하면서 중국 정부 관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대회 기간 중 한국을 도와줘 감사하다는 인사를 나눴다. 그 때마다 중국 측에서는 한국이 500대의 차량을 지원해준 것을 사례로 들며 한국 측의 지원에 거듭 감사의 뜻을 전해왔다. 이에 앞서 9월 29일 남북 통일 축구를 공표하면서 남북한 대표단이 기자회견을 끝나고 서로를 포옹했을 때의 감격을 나는 잊을 수가 없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찐한 격정이 서로에게 전달되면서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북경을 떠난 뒤 나는 노태우 대통령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했다. 여러 가지 수고를 했다며 오찬을 대접받는 식사 자리였다. 2시간의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노태우 대통령과 나, 단 둘만 있는 편안한 자리였다. 북경 아시안 게임을 치루면서 진행된 여러 가지 일들, 남북협상의 향후 전망, 중국 인사들의 한국에 대한 생각 등을 부담 없이 전하고 듣는 자리였다. 나는 마음 속에 오랫동안 품어왔던 얘기를 꺼냈다. “노 대통령님, 우리나라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시고 물러나 편안한 세월을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두환 대통령님을 보면 더욱 걱정이 되고 안타깝습니다. 대통령 임기를 끝내면 정치나 권력에 연연해 하시지 말아야 합니다. 노 대통령님이 새로운 길을 열어보이세요. 제가 단국대 총장직을 물러날 테니 대통령께서 우리 대학의 총장으로 오세요. 그래서 대통령 재임 때 쌓은 인덕으로 단국대를 발전시켜주세요. 대통령님이 총장으로 오시면 대학에 발전기금을 내려는 이들도 많아질 겁니다. 대통령님도 정계나 기업계가 아닌 대학의 교육자로 계시는데 누가 사시로 볼 수 있겠습니까.” 내 진지한 주장이 통했을까. 노 대통령은 심각한 표정으로 내 말을 듣더니 이윽고 대답을 했다. “장 총장님 말씀이 맞아요. 나는 전두환 대통령처럼 일해재단을 만든다거나 참모들과 어울려 다닐 뜻이 없어요. 아내랑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제가 퇴임하면 단국대 총장으로 갈께요. 장 총장님 약속 지키시는 겁니다.” 이렇게 언약을 주고 받으며 오찬 자리는 즐겁게 끝이 났다. 1992년 8월 24일 우리나라와 중국은 정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리고 한달 뒤인 9월 27일 노태우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중국 북경에 발을 내딛었다. 그때 한중 교류가 활발해지는 것을 상징하듯 북경 한복판에 서라벌이라는 한식당이 문을 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노태우 대통령을 만났다. 내가 느끼는 남다른 감회를 노태우 대통령도 공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그동안 수고하셨다는 치하를 주었다. 그러면서 이제는 체육부 장관으로 다른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말을 건넸다. 물론 나는 대학에 있고 싶다는 대답을 했다. 그것이 나로서는 최선의 길이니까. 임기가 1년을 채 남기지 않았을 때도 노 대통령은 나에게 총리직을 제의했다. 무엇이 그 분으로 하여금 나에 대한 믿음을 그리 크게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제안 역시 거부했다. 대신에 내가 고려대 대학원을 다닐 때 학생처장을 역임하신 현승종 박사님을 추천하였다. 그 분이 가진 담백한 인품과 제자를 아끼는 마음, 소탈한 자세라면 정권 과도기를 무난히 이끌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현 박사님은 노태우 정권 말기의 화두였던 중립내각의 총리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나와 노태우 대통령만이 아는 비밀이었는데 나중에 현 박사님이 대통령에게 자신을 어떻게 총리로 임명하실 생각을 했냐고 묻자 이를 알려줘다고 한다. 나는 노 대통령이 단국대 총장으로 오라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이를 실천한다는 약속을 믿었다. 럭비 선수로 함께 땀 흘렸던 남자로서 그는 분명히 대학의 문을 두드릴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퇴임 이후 노 태통령은 단국대로 온다는 약속을 미루었다. 아니 갓 출범한 김영삼 정부가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부는 바람은 점점 강해지더니 수천 억 원에 이르는 정치비자금 사건이 터졌다. 노 전대통령은 철창 안으로 전락했고 단국대 총장 부임의 약속도 흐려졌다. 대학시절 럭비 선수로 시작해 대통령과 체육인으로 함께 일을 하며 통일을 위한 일을 함께 했으니 보통 인연이 아니지 않을까. 이후로 노 대통령은 수감 생활을 하고나서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은둔을 하고 있다. 뇌 질환을 앓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권력의 속성은 늘 우리 같은 범상한 사람의 마음에 날카로운 상처를 남기기 마련인가보다. 부디 건강하고 복된 나날이 돌아오길 기원한다.

이희호 여사, 김대중 선생 부부 : 그 따뜻하고 정의롭던 마음을 영원히 기억하고 싶습니다

2019.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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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초였다. 이제는 영면하신 이희호 여사님을 찾아갔다. 입원 하셨다는 소식을 들어 문병을 하러 갔다. 마침 잠에서 깨어나신 시간이라 면회가 가능하였다. 여사님의 손을 만져 보니 온기가 없었다. 당신도 기력이 없어서 나에게 제대로 말씀을 하시지 못했다. 그동안 노환을 앓은 적이 한 두 번은 아니었지만 전과는 다른 병색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사님은 언제나 내가 찾아 뵈면 온화한 웃음으로 반겨주셨고 그 때마다 항상 정장 차림으로 맞이해주셨건만 입조차 열기 힘들어하시는 여사님을 보니 울컥 눈물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병실을 나오며 그 따뜻했던 미소와 다정하지만 정중한 언행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돌아오며 더 나쁜 소식을 듣기 전에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선생, 두 부부에 대한 인연을 글로 옮기자 결심했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자 애를 쓰며 며칠을 보냈고 이 글을 다 마쳤을 때 바로 여사님의 별세 소식을 듣고야 말았다. 이 또한 인연이런가...여사님은 이제 김대중 선생님과 하늘나라를 산책하고 계실 것이다. 고 이희호 여사님과 나는 서울대 사범대 선후배 사이이지만 그 인연은 내가 아닌 선친(범정 장형 선생)의 육영사업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여사님은 1950년도에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했는데 재학 당시 사범대 학생대표, 사범대 학도호국단 부단장을 지낼 만큼 활동적이었다. 이때 친했던 동료 중에 고려대 학생회장을 지낸 김기호 씨가 있는데 이 분은 우리 대학 재단에 근무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여사님이 유학을 결심하고 입학허가를 받았지만 문제는 유학 자금이 없었던 것이다. 이 사정을 들은 김기호 씨가 여사님을 당시 우리 대학 이사장이신 범정 장형 선생께 소개시켰다고 한다. 이희호 여사님, 아니 ‘청년학도 이희호 양’은 선친께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사회학과 신생독립국인 한국에서 여성계몽의 중요성을 고백했는데 선친께서는 이에 공감을 하고 선뜻 유학자금을 지원해주었다고 한다. 미국가는 여비와 일정한 기간 미국에 체류할 수 있는 자금을 후원했는데 ‘유학생 이희호 양’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을 거란 것이 이 자리를 주선한 김기호 씨의 전언이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왔을 때 김기호 씨는 우리 대학 정치과 교수로서 사무처장 보직을 맡고 있었기에 소상한 내력을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선친의 일인 만큼 이후 내가 이희호 여사와 특별히 교류를 할 기회도 따로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내가 김대중 총재와 인연을 맺을 일이 생겼다. 그 인연은 김상현 의원과의 우정에서 시작되었다. 김상현 의원과는 호형호제를 할 만큼 깊은 우애를 쌓았던 적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서 <학연가연 10회(2019.01.25.) : 동문처럼, 친구처럼, 그러나 아픔을 준 김상현 의원>편에 밝힌 바 있다. 위의 글에 나왔다시피 1972년 10월에 김상현 의원이 10월 유신 개헌을 위해 선포한 비상계엄조치로 보안사에 끌려갔는데 나를 물고 들어간 것이었다. 회의를 하다가 나는 ‘노재현 계엄사령관’ 명의로 날인이 찍힌 체포영장을 내보이는 수사관들에게 끌려갔다. 용산구에 있던 당시 주한 미8군 사령부가 있는 언덕의 제법 큰 2층 건물. 구석진 방으로 끌려가는 데 복도가 꽤 긴 편이었다. 그 복도를 지나가는 동안 사람의 비명 소리, 수사관의 악쓰는 소리가 들리는데 누구라도 공포감이 커질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이름도 밝히지 않는 수사관들이 험악하고 살벌한 눈초리로 나를 확인하더니 심문을 시작했다. 옆방에서는 계속 매를 맞는지 비명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은 울다가 흐느끼기도 하고 참기 힘든 고통에 자지러지는 비명을 내기도 하였다. 듣는 내가 다 공포심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마도 그것이 심문하려는 이들의 의도였을 것이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수사관은 A4 용지 한 장을 꺼내주면서 내가 아는 정치인들 명단을 아는 대로 적으라 했다. 나는 나와 교분이 있는 사람들 보다는 수사관들도 알만한 인지도가 있고 별로 교류도 없는 전현직 국회의원 20명 정도를 써냈다. 그들은 내 진술서를 받더니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놓고 내가 적어낸 것과 대조를 했다. 수사관은 대뜸 “왜 김상현 이 자식 이름을 빼놓냐.”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김상현은 담당 수사관에게 장충식 총장하고 제일 가깝다고 실토했다”면서 “대학 총장이 빨갱이들을 잡는데 협조해줘야지 거짓말을 해서 수사를 망치게 하면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고 계속 엄포를 놓았다. 이렇게 시작된 수사관과의 말씨름을 통해 알게 된 그들의 주장은 이렇다. “김상현은 1971년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맞선 김대중 후보의 핵심 참모(실제로 김상현 의원은 김대중 후보의 비서실장, 선거대책본부장 등을 맡았다)인데 이 자가 김대중의 대통령 선거운동 자금책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장충식 총장, 서울시장 지낸 모씨가 선거 자금을 가장 많이 대줬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혐의였다. 우리 대학 교직원들 월급 줄 돈이 없어서 사채를 빌리느라 전전긍긍하던 재정형편으로 무슨 대선 자금을 지원할 여력이 있겠는가. “김상현 의원과는 오랜 우정이 있어서 술이나 밥을 사거나 선거에 나간다면 호감의 표시로 격려금을 보탠 적은 있지만 대통령 선거에 거금을 지원할 힘도 없고, 형편도 아니다.”라고 항변했다. 수사관들은 전혀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수사관들은 내가 거짓말을 한다면서 김상현 의원의 진술내용을 보여줬다. 그의 진술에는 내가 그에게 4천 만 원의 선거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4 천만 원은 그 당시 서울에 있는 최고급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거액이었다. 내가 곰곰이 속셈을 해보니 김상현 의원에게 십여 년 동안 지출한 금액의 10배는 넘는 돈이었다. 수사관들은 교대로 돌아가며 나를 윽박지르고 구타를 하며 김 의원의 진술에 동의할 것을 강요했다.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김대중 후보를 잡기 위한 구도에 대학 총장인 나를 얽어매려는 의도였다. 밤을 새우며 나를 겁주고, 욕을 퍼붓던 수사관들은 이윽고 구타를 하며 고문을 했다. 나중에는 물맛을 보여준다며 내 어깨와 머리를 붙잡더니 수조에 처박기에 이르렀다. 발버둥을 치고 저항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거리에 나돌던 “서빙고에 끌려가면 성해서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 허위가 아니었음을 몸으로 깨달았다. 철야로 잠을 안 재우고 그 수모를 당하면서도 나는 ‘4천만 원 지원’ 진술을 거부했다. 내 완강한 자세 때문이었던지 나중에는 김대중 후보에 대한 정치자금 지원은 뒤로하고 우리 대학 출신의 국회의원인 오치성 씨에 대한 뇌물을 진술하라 억지를 부렸다. 직감적으로 당시 보안사령부 최고위직에 있었지만 국회의원 자리를 노리고 있던 K 장군이 떠올랐다. 그는 오치성 의원과 국회의원 선거 지역구가 겹쳐서 출마를 못하고 군부에 있어야 했는데 이를 상당히 원통해 한다는 후문을 들은 바 있었다. 억지와 고문으로 나를 김대중이든 오치성이든 고위 정치인에게 엮어 정치자금 스캔들로 만들려는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더욱 더 강하게 저항해야 했다. 그들이 사실이 아닌 허위자백으로 음해를 하려는 의도에 굴복할 수 없었다. 밤잠을 재우지 않고 협박과 구타를 견뎌야 했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정신이 가물가물해지던 차에 갑자기 석방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내력을 들어보니 보안사령부에서 중책을 맡고 있던 우리 동문 중 한 사람이 학교 측의 하소연을 듣고는 나를 수소문했고, 계엄사령부의 고위 인사들을 찾아가 직접 나의 결백을 호소하며 신원을 보증했다고 한다. 천만다행으로 그 동문의 호소가 힘을 발휘해 옥고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선생과는 그 전에도 직접적으로 만나고 연락을 주고받을만한 친분이 없었지만 이로써 더욱 그 인연은 엷어졌다. 1972년 이후 김대중 선생은 ‘빨갱이 정치인’으로 덧칠이 칠해져 망명과 투옥을 거듭했다. 급기야 서울의 봄 이후 선생은 ‘내란음모의 수괴’로 낙인찍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 와중에 이희호 여사라고 어떻게 편할 날이 있었겠는가. 망명자의 아내, 사형수의 아내로 도피와 옥바라지가 교차되는 험난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연결되면서 정치인 김대중의 길도 좀 더 평탄해졌다. 동시에 우리나라는 민주화의 거센 격랑에 휩싸였다. 직선제 개헌에 이어 광주항쟁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함성이 거세어졌다. 그 선두는 대학생이었는데 우리 대학의 최덕수 군(당시 천안캠퍼스 법학과 2학년)이 자신의 몸에 불을 붙임으로써 사회적 열망의 정점을 앞당겼다. 1988년 5월 18일 최덕수 군이 천안캠퍼스 시계탑 앞에서 분신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다른 무엇보다 그 학생의 생명이 다치지 않기를 빌었다. 개인이 시도한 일이지만 학교가 나서서 지원에 최선을 다하도록 지시했다. 덕수 군의 어머님은 광주시에서 떡장수를 한다고 했다. 고생하며 키운 아들이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클지 십분 이해가 되었다. 전신에 3도 이상의 화상을 입은 덕수 군의 병실을 찾아가니 덕수 군은 고통에 몸을 비틀며 삶을 붙잡고자 했다. 그러나 26일 오후에 덕수 군은 숨을 거두었다. 진심으로 가여웠다. 이념이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고 간에 가난한 어머님의 희망이자 기둥이었을 아들이 기성세대의 파행을 규탄하느라 목숨을 바치다니. 나 역시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공안당국은 덕수 군의 장례식이 가져올 파급효과를 두려워 했다. 가능한 한 조용히 장례를 치루는 것이 그쪽의 바램이었다.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교직원들에게 덕수 군의 장례식을 천안캠퍼스가 아닌 서울캠퍼스에서 치룰 준비를 하도록 했다. 사회적 시선이 집중되어 조문객들이 많을 것이고 규모도 커질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교직원부터 근조 넥타이를 매고 덕수 군의 죽음을 추모하도록 했다. 그럴수록 공안당국에서는 여러 협조 사항을 전달해왔다. 그중에는 장례비가 2천만 원 이상 넘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도 있었다. 말하자면 장례식 규모를 최소화하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내 마음이 불끈했다. 사람의 죽음을 앞에 놓고 장례비의 상한선을 정해 장례를 치루라니, 젊은이의 죽음을 어른인 우리가 그런 식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빚을 얻기로 했다. 학교 공금을 투입하면 정부 측에서 어떤 식으로 책임을 따지자 달려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리저리 돈을 구해 사비 5천만 원을 내놓았다. 재야 단체가 나서서 ‘민주국민장’이라는 형식으로 장례식 규모가 커졌지만 장례식 비용을 묻고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이렇게 해서 장례를 치루던 중 김대중 선생이 조문을 왔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떨어지고 국회의원 신분이었던 상황이었다. 김대중 선생은 무엇보다 대학 당국이 얼마나 고생이 많냐며 위로를 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죽어 나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 자리에서 김대중 선생은 처음으로 이희호 여사와 우리 선친의 인연을 얘기했다. “아내가 미국 유학을 갈 때 범정 선생님께서 여비랑 생활비를 보태주신 덕분에 무사히 유학을 갈 수 있었다.”는 회고담인데 “지금도 아내가 고마워 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나 자신도 선배로 부터 듣고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36년 전 일을 기억하고 있다니... 듣는 내가 오히려 “기억해줘서 고맙다.” 말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는 20년을 총장직에 근속하면서 경험을 통해 “도움 준 사람은 기억하지만 도움받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거나 모르는 척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만남을 통해 나는 김대중 선생이 상당히 꼼꼼하고 섬세한 성품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다른 만남을 통해 나는 김대중 선생이 섬세한 성격이 넓은 지식체계와 결합해 큰 정치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내가 <백범 김구 기념사업회> 회장으로 재임할 때였다. 나는 1991년부터 회장으로서 백범사업회를 8년 동안 운영을 책임진 적이 있었다. 부회장이나 고문으로 사업회 운영에 지원한 것을 포함하면 10년이 넘는다. 이 긴 시간 동안 당시 정부도 백범사업회에 어떤 재정지원도 하지 않았고, 재계도 도움을 주지 않고 있었다. 명색이 항일전쟁을 이끈 상해임정의 수반이었던 건국유공자였지만 그의 유지를 받드는 사업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명예도, 돈도 없는 단체라서 바람 앞의 촛불처럼 존재가 위태했다. 독립유공자들이 나에게 회장 취임을 부탁했을 때 나는 선선히 응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기념사업회를 도왔다. 백범일지를 중국어로 번역, 출간했고 상해 임시정부 청사 복원과 백범 동상 건립 등을 기념사업회가 주도토록 했다. 그중에서도 백범 선생 추도식은 어찌 보면 고인의 유지를 기리는 가장 기본적인 행사이다. 그러나 추도식에 주요 인사들을 초대하면 나오는 분들이 거의 없었다. 정부 주요 인사, 정치인, 기업인, 군인 등 직업을 막론하고 추도식에 자리를 함께 해주는 분들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김대중 선생은 그렇지 않았다. 백범 선생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추도식에 참석해주고 독립 유공자들을 위로하며 격려를 했다. 독립유공자 원로, 학자들과 환담을 나누다보면 김대중 선생이 항일운동사와 관련 인물들에 대한 지식이 상당히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한 인식도 상해 임정을 중심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갖고 있었다. 정치인이 그만한 지식과 철학을 가지려면 직접 공부하지 않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애국심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 때 나는 김대중 선생에 대한 존경심이 강해졌다. 1992년 대통령 선거가 본격화되기 전이었다. 독립유공자 원로, 광복군 출신 원로들께서 회장인 나에게 요청을 했다. 출마 예상자들이 백범 선생 추도식에 와서 독립운동사에 대한 식견을 담아 정견을 발표하는 자리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대중, 김영삼, 정주영, 세 분의 후보자들에게 원로분들의 의견을 대신 전달하고 가능한지 문의하였다. 김대중 후보는 긍정적인 답변을 주었지만 김영삼 후보 측은 어렵다는 응답을 했다. 그런데 얼마 뒤 참석하겠다는 응답이 왔다. 참모들이 설득했다는 후문을 들었다. 참석하겠는데 나에게 와서 추도식에 대한 사전 설명을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이 때 김영삼 후보를 공식적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정주영 후보도 만나게 되었는데 두 분 모두 독립운동에 대한 식견은 물론이고 기본적인 애정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서는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돌아오는 길에 저절로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자연스럽게 김대중 후보와 대비가 되었다. 권력에 대한 열망은 크지만 역사를 알려는 진지한 노력은 부족했다. 김대중 선생을 만나고 나니 이런 차이가 저절로 느껴졌다. 김대중 선생이 1993년 선거에서 뜻을 이루지 못한 뒤 세월이 흘렀다. 그 5년 동안 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미운털이라도 박혔는지 온갖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천안캠퍼스에 종합병원을 세울 때는 모든 인허가권을 이용해 우리 대학이 취할 수 있는 재정적 자구 조치를 막아서 위기가 깊어지도록 했다. 재정난이 심각해지자 이번에는 불과 대통령 임기가 4,50일 정도가 남은 시점에서 교육부를 통해 메시지를 전했다. 모 국장이 당시 대학법인의 김강웅 사무처장과 나를 부르더니 대학운영이 위기 상황에 쳐해있다는 것을 안다면서 1개월 이내에 해결하지 못하면 대학 경영권을 놓고 물러나라는 요구를 했다. 누구의 지시냐 물었더니 교육부 장관이 서명한 공문을 내밀었다. 이에 앞서 나는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대중 당선자 내외를 만날 수 있었다. 김대중 선생이 초청을 한 것이다. 만나보니 이희호 여사가 자리를 함께하고 있었다. 이 여사는 다정한 미소로 “저를 도와준 분이 단국대 설립자이신데 장 박사님이 그 후손이시냐?”고 물었다. 나는 내가 그 분의 막내 아들로 대학에 몸담아 지금까지 대학을 운영해왔다고 밝혔다. 이것이 이희호 여사와 첫 만남인 셈이다. 47년 만에 그 인연의 당사자를 만난 것이다. 그것도 대통령 영부인이 되어서. 그 자리에서 김대중 선생은 또 하나의 인연을 밝혔다. 바로 1972년에 내가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갔던 일이었다. 김대중 선생은 내가 고초를 당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며 비록 김상현 의원의 허위자백에서 비롯된 일이지만 결국 나를 잡으려는 독재정권의 횡포에 당한 셈이니 미안한 일이라 위로를 해주었다. 그러면서 남북체육회담을 통해 단일팀과 단기(團旗)를 성사시킨 일, 당시 회담의 진행과 오간 대화 내용 등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그 속에서 당신이 대통령에 취임하면 남북교류와 화해작업에 앞장서겠다는 의욕도 보였다. 이같은 만남을 가진 뒤 나는 대학경영권을 내놓으라는 통첩을 놓고 고민에 빠졌다. 내가 겪고 있는 위기의 저변에 김영삼 정부와의 불화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닌가. 나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대변인으로 있던 박지원 동문(상학과 졸업, 대통령 비서실장, 국민의 당 대표 역임)을 만났다. 그에게 지난 5년 간의 과정을 설명하고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여 단국대의 신캠퍼스 신축사업과 재정난 해결을 관리한다는 방침을 정해 교육부에 통보해줄 것을 청원했다. 박지원 대변인도 적극적으로 모교의 위기를 풀고자 노력했고 다행히 우리 대학의 어려움이 대통령 당선자에게 받아들여졌다. 결국 정권인수위원회를 통해 ‘향후 단국대의 이전사업 정상화 문제는 차기 정부에서 풀어간다’는 입장이 교육부 장관에게 전달되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대학은 법인부도의 위기 속에서 정부의 협조를 받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2000년 6월에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의 김정일을 만나 역사적인 6·15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을 통해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부활할 수 있었다. 가족 상봉사업은 남한과 북한의 적십자가 진행하기로 했는데 뜻밖에도 나를 선임했다. 아마도 당선자 내외를 만났을 때 나에게 남북체육회담에 대해 소상히 묻고, 어떻게 회담을 이끌었는지 물었던 일들이 모두 이런 일과 연관이 있었구나 하는 짐작이 들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희호 여사가 나의 적십자 총재 추천에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이다. 다른 쪽에서는 경희대의 조영식 총장을 천거하기도 했으나 이희호 여사가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단일팀을 성공시킨 장 총장이 적격이라며 강하게 주장을 해 이를 관철시켰다는 후문을 듣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두 분의 후의에 힘입어 대학의 재정적 위기도 차분히 해결해날 수 있었다.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고 시간이 더 많이 걸렸지만 2007년에 신캠퍼스로 이전을 할 수 있었다. 내 개인의 안위를 떠나 1998년 1월에 김대중 선생의 결단이 없었다면 우리 대학은 깊고 깊은 혼란과 침체의 늪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 신캠퍼스 준공과 입주 기념식을 할 때 나는 김대중 선생과 이희호 여사의 참석을 간곡히 부탁했다. 두 분의 도움이 맺은 결실을 보여드리고 싶어었다. 불행히도 김대중 선생은 당시 폐렴이 악화되어 외출이 불가능했다. 이희호 여사가 참석하여 선생을 대신해 신캠퍼스 평화의 공원에 나무를 심어 주었다. 지금도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다른 대통령들도 여러 대학에 나무나 기념물을 증정, 기탁했지만 역사가 바뀌면 사라지거나 훼손되거나 욕을 먹거나 없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두 분이 심은 나무는 지금도 우리 캠퍼스에서 정정하게 빛을 펼치고 있다. 돌아보면 두 분의 앞길을 여는데 내가 기여한 일은 거의 없다. 있다면 선친의 덕이고, 김상현 의원과의 우정이었을 뿐이다. 내게 베푼 은혜가 너무 크다고 생각할 뿐 따로 갚을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김대중 선생은 2009년 8월에 세상을 달리하고 말았다. 선생에 대한 미안함을 갚고자 이희호 여사를 뵙고 도울 일을 알려 달라 했다. 사양하던 여사는 북한에 대한 의료지원 사업을 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기꺼이 동행을 약속했다.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다. 북한이 보청기를 생산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보청기 200개, 링거액 2,000개, 진통제 등 다양한 약을 준비했다. 구급차도 준비해 따로 배편으로 실어 보냈다. 모두 이희호 여사께서 국내외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아 준비한 일이다. 이희호 여사를 모시고 평양에 도착하자 우리 일행이 가지고 간 그 많은 의약품에 북한 당국도 감탄하고 또한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였다. 그런데 남한 정부에서 북한에 대한 형식적인 메세지라도 보내올 줄 알았는데 대통령이건 총리이건 아무런 의사 표시가 없으니 북한이 오히려 당황하는 듯했다. 정치적인 교류 재개 제안이나 아니면 하다못해 이희호 여사의 방북에 많은 편의를 해달라는 정도의 인사말이라도 보내는 것이 상식 아니냐는 듯했다. 정치적인 문제는 별도로 이 방북은 여사님의 박애정신, 동포에 대한 사랑이 잘 드러난 사업이었다. 이후에도 나는 6·15선언 기념 행사, 김대중 대통령 노벨상 수상 기념 행사 등에 빠짐없이 참가했다. 김대중 선생이 돌아가신 뒤로는 더욱 열심히 참가했다. 더 나아가 이들 행사에 우리 대학 음악대 교수님들, 무용이나 음악 전공 학생들의 공연을 해 행사를 빛내주었다. 그때마다 이희호 여사는 “단대 식구들이 참석해서 행사를 빛나게 해줬다.”며 큰 칭찬과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렇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글을 쓰는데 여사님의 별세 뉴스가 도착했다. 선친께서 펼친 육영의지가 맺은 인연은 얼마나 큰 결실로 돌아왔던가. 한국 여성학의 문을 열었고, 여성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시대를 앞서가는 정치인에게 따뜻한 가정을 만들어 주었고, 민주화의 결기를 죽음 앞에서도 잃지 않도록 독려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정치인 김대중이 한국을 이끌어 외환위기를 이겨내고, 북한과 새로운 동반자의 길을 열었다. 나 역시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하지만 슬픔을 어찌 몇 마디의 글로 다 풀 수 있겠는가. 부디 영면하소서, 어진 웃음으로 반겨줄 남편의 손을 잡고 서로 환하게 웃으며 천국에서 영생하시길...

조명래, 김병량, 김경현 : 특별장학금으로 길러낸 동문 인재의 세가지 유형

2019.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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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까지만 해도 전국의 지방도시에는 각 지역의 내로라하는 명문고등학교가 산재해 있었다.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도입되기 전이라 지방의 수재들이 몰리는 고등학교가 따로 있었다. 나는 당시 총장으로 학생선발을 책임지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우수한 인재를 우리 대학에 끌어올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아무래도 세칭 명문대라 인정받는 대학에 입학을 하고 싶어 했다. 이 현실의 벽을 뚫고 인재를 단국대에 입학시키는 방법은 결국 총장이 직접 나서는 것이었다. 나는 우선 전국의 지방 명문 고등학교를 골라 학업에 열의가 있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을 추천받았다. 그들을 직접 만나거나 해당 지방 출신의 교수들을 보내 모교를 방문하도록 지원했다. 나는 당시 다른 대학들이 하지 못하던 과감하고 획기적인 장학지원책을 마련했다. 지방의 우수 학생들에게는 4년간 숙소와 장학금을 수여할 뿐 아니라 교재와 참고서적까지 공급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당시만 해도 나라의 경제형편이 어려워 대학 등록금은 온 집안이 힘을 모아야만 해결되는 난제였다. 그 고민을 덜어줄 테니 단국대에서 마음껏 공부를 해서 나라와 모교를 빛내는 인재가 되라는 것이 내 진심이었다. 뜻이야 컸지만 대학의 힘은 그렇지 못했다. 1970년대만 해도 우리 대학은 입학정원이래야 2천명도 넘지 않았고, 재정규모나 여력이 다른 대학보다 많이 취약했다. 기숙사가 필수적인데 지을 힘이 없었다. 내가 하자고 해서 마련된 사업이니 내가 나서기로 결심했다. 우선 내가 살고 있던 집을 내놓았다. 학교 근처에 있던 한남동 소재의 내 집은 70 여 평 정도였다. 이 집을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기숙사로 활용토록 대학에 기부하였다. 바로 이 집이 수많은 판검사를 배출한 ‘법선재’였다. 내가 살 집이 없어서 나는 지금의 강서구 화곡동에 있는 160평의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이사를 했다. 지금이야 강서구가 화려하게 변모했지만 당시 화곡동은 서울 도심에서 가장 먼 변두리였다. 나는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하니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경기중학교와 이화여중에 다니는 내 아들과 딸들은 등하교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한남동에서 살 때는 학교가 있는 광화문 지역까지 길어야 40분 걸리는 등교시간이 화곡동으로 이사한 뒤로는 빨라야 90분이 걸렸다. 하루에 3시간을 버스에 시달려야 했다. 한창 민감한 사춘기를 겪던 아이들이기에 애비 된 마음으로 왜 미안한 마음이 없었겠는가... 그래도 인재를 키우는 것이 나의 숙명이니 가족들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아이들도 내 결정과 이후 겪어야 했던 불편을 비록 몸이 고단하고 마음이 힘들었겠지만 아빠인 나에게 일체 불평하거나 반발하지 않았다. 기특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훗날 한남동 집에서 숙식을 하던 고시반 학생들 가운데 부장검사, 차장 검사 그리고 부장판사 등 기라성 같은 인재가 속속 배출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서울대, 고대, 연대 다음으로 사법시험 합격자를 많이 배출하는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우리 대학이 한때 ‘사시단대(司試檀大)’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사법시험에서 강세를 보인 것도 이렇게 입학한 장학생들이 낳은 결과였다. 고시생 만이 아니라 많을 때는 100 여 명씩 특별 장학생으로 입학을 시켰다. 나의 의도는 꽤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우리 대학에 의과대나 치과대가 설치되기 전이어서 장학생들 가운데 과반수 이상은 사법고시나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다음은 관계로 진출했고 경제나 경영학을 공부한 학생들은 공인회계사나 은행으로 진로를 잡았다. 일일이 이름을 들추기는 뭐하지만 50대 이상의 동문들 가운데 국장, 차관급의 고위 관료나 은행장들을 종종 만나는데 이들은 대부분 이같은 특별장학금을 받고 공부한 이들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장학생 중 정치인이 된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장학제도를 통해 단국대를 입학한 인재들이 많지만 나는 3명의 장학생이 살아온 내력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다. 첫 번째는 경상북도 안동고등학교 출신 조명래 군이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조명래 군은 지금 환경부장관이 되었다. 조명래 장관은 지역개발학과(현재 도시계획 부동산학부의 전신)를 신설하면서 영남지역의 대표적인 우수학생으로 입학했다. 학부 재학 4년간 전액 장학금을 후원했는데 조명래 군 본인이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보다 학문에 뜻을 두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했고 나는 대학원 과정의 전장학금을 후원했다. 조명래 군은 주위의 평을 들어보면 성격이 조용하고 차분해 공부를 즐기는 편이어서 학자로 성장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었다. 좀 더 지원을 하면 모교를 빛낼 좋은 학자가 되리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를 만났다. 나는 유학을 가는 것이 어떻냐고 물었더니 본인도 영국에서 박사 과정을 하고 싶다 포부를 밝혔다. 문제는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보내고 나서 학교 당국에 예비 전임강사로 발령하는 문제를 검토토록 했다. 다행히 교수들이 뜻을 모아 결국 좋은 결과를 얻었다. 영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조명래 교수는 급여와 내 개인적 후원을 받으며 등록금과 가족 생활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귀국한 뒤 조명래 박사는 모교의 조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에게 대학발전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도움 받을까 하는 마음으로 보직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그는 학생지도와 연구에 전념하기를 원했다. 만약 그에게 나의 의욕을 앞세워 ‘유학에서 배운 지식을 대학행정에 연결시켜 나를 도와 달라’ 강력하게 인도했다면 그는 보직을 받아 모교에 봉사하는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아마도 학자로서의 성장을 못했을 것이다. 그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내가 직접 그를 만난 것은 아주 드물다. 서울대 대학원으로 보낼 때 그리고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인사 왔을 때 그리고 이번 장관에 취임하여 전화로 인사를 받은 것이 전부였다. 물론 그의 장인되는 분이 우리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어서 그의 정황은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에 아쉬운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 이런저런 사는 얘기나 자녀들 성장 등을 듣는 것은 사람을 기르고 돕는 사람에게 가장 큰 선물인데... 하지만 그 이쉬움은 나의 아쉬움이고 나라에 봉사하는 인재로 잘 성장한 것은 그의 노력이고 운명이다. 자기가 후원한 사람이 성공하면 그를 자기 기억에서 잊어야 하는 것이 인재를 키우는 사람의 본분이다. 영남 출신의 장학생으로 조명래 군을 선발했다면 호남 지역 출신 장학생으로 기억나는 인물이 김병량 교수이다. 김병량 군은 호남을 대표하는 명문 전주고등학교를 다닐 때 우수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나와 인연을 맺었다. 나중에 모교 교수로 봉직하여 부총장을 지냈지만 김병량 군 역시 조명래 군 못지않은 수재였다. 공부 잘하는 수재형 인물로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으나 크게 다른 점은 조명래 장관은 조용히 숨어서 일하고 연구하기를 좋아하는 편이나 김병량 부총장은 예능에도 소질 있고, 사교적이며 봉사하기를 좋아하는 유형이다. 돌아보면 내가 학교 일로 어려움에 빠진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이럴 때 학교를 위해서 행정적 방면에서 앞장서서 나를 도와준 졸업생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김병량 교수이다. 김병량 군은 우리 대학에서 4년간 장학금으로 공부하고 내 권유로 일본 츠쿠바 대학(筑波大学)에 유학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일본 츠쿠바 대학은 일제시대 동경대학과 경쟁관계였던 동경고등사범학교를 모태로 하는 대학이다. 이후 1970년대에 종합대학으로 전환하면서 전후 유럽과 미국식 제도를 다양하게 받아들인 신흥 명문대학이다. 그는 일본에서 도시계획 및 지역개발을 연구하면서 특히 지역의 병원을 비롯한 공공시설계획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김병량 교수 유학 초기에는 일본의 도큐장학재단의 장학금으로 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지원이 여의치 않아 금전적 고생이 많았다. 나는 이 소식을 듣고 나와 친분이 깊은 일본의 유명한 저술가인 호소키 카즈코(細木水子)여사를 소개시켜 줘서 그의 장학금으로 박사학위를 받게 해주었다. 학위를 마친 김 박사는 1991년도에 천안캠퍼스 도시행정학과 교수로 강단에 섰다. 이에 앞서 김병량 군이 나를 돕게 된 계기는 천안캠퍼스에 의과대 부속병원을 신축할 때였다. 1988년에 의과대학을 설립하고, 이듬해 의과대 교사동과 부속병원을 신축 공사에 착수했는데 여러 어려움이 많았다. 나는 처음 천안캠퍼스를 세울 때 가졌던 비전대로 충남지역을 대표하는 종합병원을 짓고 싶었다. 800병상 규모의 대형 병원, 서울을 능가하는 최신식 의료시설을 갖춘 첨단 병원, 환자중심의 병원을 짓자는 것이 내 목표였다. 대학 내부에서는 재정적 어려움이 크다며 반대가 심했다. 실제 공사비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거기에 돈이 있어도 종합병원을 지으려면 설계나 공간배치 등에서 고도의 전문지식이 뒷받침해줘야 하는데 국내 대학들의 도움을 받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때 김병량 군이 일본에서 병원 건축, 의료자원 공간배분 계획을 전공하고 있어서 매우 중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박사 학위 지도 교수인 타니무라 히데히코(谷村秀彦)교수는 일본의 유명한 병원건축 설계 전문가였다. 또한 타니무라 교수의 장인되는 요시타케 야스미(吉武泰水)교수도 일본병원 건축 분야의 태두로서 당시 고오베 예술대학 총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김병량 군의 소개로 나는 이 두 분을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김병량 군을 통해 내가 가진 인재양성에 대한 진심을 이해했고, 선뜻 도움을 주기로 결심했다. 이어서 장인과 사위를 필두로 자신들이 길러낸 제자들, 달리 보면 일본에서 활약하고 있는 최고의 전문가들을 동원해 우리 종합병원 설계를 도와주었다. 이 모든 과정은 전적으로 한 푼의 금전적 대가없는 순전한 봉사로 이뤄졌다. 이후 많은 공사를 진행하면서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그 결과 의과대학과 800 병상의 부속 병원을 완성할 수 있었고 거기에 최첨단 시설을 갖추어 전국의 많은 의료인들이 견학을 할 만큼 우수한 병원으로 우뚝설 수 있었다. 김병량 교수는 이 과정에서 병원 설계를 무상으로 마치도록 한 일도 공이 컸지만 내가 천안캠퍼스를 천안의 대표적 고등교육기관으로 성장시키는데 필요한 일들을 펼칠 때마다 내 옆에서 충직스럽게 내조를 해주었다. 좋은 일은 함께 하려하지만 어렵고 힘든 일, 자칫 욕먹을 일은 슬슬 피하려는게 사람의 속성이다. 천안캠퍼스에 대형 종합병원을 짓겠다며 설계하고 공사를 진행해갈 당시 나는 김영삼 정부에 미운 털이 박혀 제대로 일을 할 수 없는 난국이었다. 여러 행정 수단을 통해 신축사업을 방해했고 이런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나를 돕다가 함께 망할까 몸을 사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김병량 군은 아직 박사과정 재학 중인 수련생의 입장에서 자기 은사와 자기 은사의 제자들을 설득해 우리 병원이 완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온 힘을 쏟아 부었다. 비단 병원 신축사업만이 아니었다. 특히 죽전캠퍼스 신축 사업에서는 힘든 일을 넘어 욕 먹을 일인데도 이를 마다않고 감내하였다. 죽전 캠퍼스 신축 사업은 그 규모가 컸고 한남동 부지 개발에서 발생할 막대한 이권 때문에 정권의 실세들을 등에 업은 업자들이 사업권 쟁탈을 둘러싼 이전투구에 나서기도 했다. 때론 드러나는 행정 조치로, 때론 주무 관청을 통해, 때론 그늘에서 여러 압박과 압력이 전해졌다. 누구 하나 나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 험악하고 냉냉한 분위기 속에서 김병량 교수는 자칫 욕먹고 자신을 망칠 수도 있는 일에 자신을 내놓았다. 설계부터 시공에 이르는 과정에서 공개적으로 모든 구성원들이 알 수 있도록 일을 성사시켰다. 공개 입찰을 통해 설계안을 받고 한국건축가협회와 일본건축가협회가 공동으로 심사하도록 진행하여 추호의 부정이 개입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의 개입을 막아낸 길이기도 했다. 나중에 외환위기로 중단된 신축 공사를 재개할 때 실타래처럼 얽힌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의 이해관계를 풀어내는데도 김 교수의 인내와 분투가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장학금을 주어서 공부시킨 졸업생 가운데 대부분은 입신양명 형의 인물이 많았다. 공부 잘하고 출세하면 그것으로 자신의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사고방식이다. 모교에서 장학 혜택을 받았으나 모교를 위해서 헌신한다는 정신을 실천한 사례를 만나기 힘들다. 아니 나는 그동안 숱한 인재들에게 장학금을 주었지만 한번도 드러내놓고 모교에 그 은혜의 결실을 돌려주길 바란 적이 없다. 사회에 나가서 좋은 일꾼이 되어주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였다. 그러나 김병량교수는 자신을 위해서 연구만 하고 자기 이속을 차리는 형이 아니라 전적으로 봉사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게 여기는 삶의 철학을 가졌다. 20여 년 전에 NGO단체를 창설해서 이사장 등을 거치면서 봉사한 공로로 몇 년 전에 홍조근정훈장을 받은 일이나 전셋집에 살면서도 70주년 기념관 건립에 1억원을 약정하여 완납한 일에서 김교수의 철학의 일면이 읽혀진다. 이제 그는 학사 부총장의 자리에서 떠나서 조용히 자신의 학문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나는 그가 있었기에 천안 단국대병원의 성공이 있었고, 방대한 죽전캠퍼스 신축사업을 둘러싼 권력 실세들의 개입을 다 물리치고 이전을 마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경상도 안동 출신의 조명래 군, 전라도 전주 출신의 김병량 군이 자랑스러운 인재라면 서울 출신으로 김경현 군이 있다. 김경현 군은 서울 휘문고 출신이다. 김경현 군은 한마디로 ‘공부 벌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모교 출신 후배이기도 해서 각별한 애정을 갖고 그를 후원했다. 우리 대학 사학과에 진학한 그에게 나는 4년간 전액 장학금을 수여했다. 학부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사 석사 과정을 이수한다 했을 때도 기꺼이 학비를 지원했다. 석사학위를 받은 뒤에는 내가 석사학위를 받은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밟으라 권유했고 김경현 군도 기꺼이 이를 따랐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학비를 지원했다. 나는 장학생을 고를 때 내 나름대로 하나의 기준을 우선 적용했다. 그것은 ‘학업성적과 가정형편’ 중 가정형편을 먼저 적용한다는 점이다. 전국에서 성적이 탁월한 학생을 추천받으면 나는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형편이 좋은 가정의 학생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최고의 성적은 아니더라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 거기에 학업에 성실한 학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했다.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대학을 다니지 못할 청년들이야말로 장학제도가 꿈이요 성공의 자극제가 될 것이라는 것이 내 믿음이었다. 그래야 우리나라의 인재가 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나름의 철학이기도 했다. 김경현 군도 그런 사례였다. 박사학위를 받자 나는 학과 교수들의 도움을 받아 우리 대학 사학과 전임강사 발령을 받도록 도왔다. 김경현 군은 우리 대학에서 월급을 받으며 일본 동경대학과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추가로 자신의 고대 서양사 연구를 더 할 수 있었다. 마침 좋은 배필을 만났다 해서 주례를 부탁받고 기꺼이 주례를 서주었다. 사회적으로, 또한 학자로서 성장하는데 필요한 일, 그가 원하는 여러 가지 일을 나는 가능하면 다 들어주었다. 어려운 가정에서 공부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려는 그의 열정으로 좋은 학자로 자라도록 돕고 싶었다. 나의 기대에 부응하듯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학문에 열의를 바쳤다. 학생들이나 학계의 평판도 좋았다. 공부하는 교수, 연구에 몰두 하는 교수라는 좋은 평판에 좋은 논문을 많이 발표했다. 당연히 여러 대학에서 그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 무렵 고려대로 교수 자리를 옮길 기회가 생겼다. 나도 그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를 후원한 나와의 인간적 의리로는 모교에 남아 후배를 길러내야 했지만 고려대학교에서 자신을 탐내어 오라는 데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하는 것이 그의 고민이었다. 그의 고민을 다른 사람들을 통해 나는 그의 마음 깊은 곳에 명예욕이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를 교수로 길러내기 까지 기울인 선배이자 스승인 내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면 처음부터 고민을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많은 동료, 선배 교수들이 그의 고민을 보며 ‘배신’이라는 말을 썼다. 그들이 보기에 내가 그에게 기울인 애정과 후원의 크기가 컸기에 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김경현 교수에게 고려대로 전직해도 무방하다는 말을 건넸다. 단국대 졸업생이 고려대 교수로 가는 것이 작게는 모교 사학과의 전통을 빛내주는 일이고 길게는 대학들의 학문적 성장을 촉진하는 일이라 덧붙였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내 마음은 어찌 편할 수 있었겠는가. 10 여 년 동안 장학금과 연구비 등을 후원하여 길러낸 인재가 단국대를 떠난다는데 서운하고 아픈 마음이 안 든다면 그것은 거짓이다. 무엇보다 나마저 그를 비난하면 그는 모교의 배신자가 되고, 학계에서도 배은망덕한 인간이라 손가락질을 면치 못한다. 자칫 젊은 학자의 앞길을 매장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다. 더군다나 내 마음대로 부리고, 내 뜻대로 움직이게 하려 인재를 길러내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외국에서 길러낸 인재가 우리 대학에서 봉사를 할 수 있고, 우리 대학에서 길러낸 인재가 세계를 나가 봉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인재를 기르는 참뜻이기도 하다. 나는 아픈 마음을 뒤로 하고 그를 웃으며 보냈다. 시대가 바뀌고, 많은 대학들도 내가 시도한 방식의 장학생 유치를 시도하면서 특별 장학생 선발은 시대의 물결에 묻혀져 갔다. 그러나 우리 대학의 특별장학생 제도, 나의 후원을 거쳐간 많은 인재들이 사회의 지도자로 활약하고 자주 나에게 안부를 전하곤 한다. 그들을 찬찬히 회고하면 이렇게 언급한 세가지 부류의 인재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공직자가 된 인재, 모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봉사형 인재, 학식을 바탕으로 학문적 명예를 이루는 인재. 나는 그들을 통해 사람을 키우는 기쁨을 누렸으니 오히려 고마운 마음이다. 자신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이들은 결국 모두 우리 단국인과 같은 길을 걸었던 소중한 인재들이다. 부디 모교의 명예를 빛내주길 바라고 응원할 뿐이다.

정치권력과의 불화 속에서 만난 봉사하는 지성

2019.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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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년 시절에 사업가로 큰 돈을 벌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 꿈을 접고 단국대학에 투신하게 된 배경에는 정치권력의 거대한 힘과 그 힘에 좌초할 수도 있는 사학의 숙명이 있다. 특히 1961년 5‧16군사정변이 발생하고 우리 대학은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위기에 직면했다. 갓 출범한 군사정부는 몇몇 모리배의 모략을 믿고 선친이자 설립자인 장형 당시 이사장을 ‘반혁명분자’로 낙인찍고 체포령을 내렸다. 다행히 감옥을 가지는 않았지만 뒤이어 ‘주간부 폐쇄’라는 보복성 행정조치를 당해야 했다. 주간부 폐쇄의 이유가 ‘교수 1명 부족’으로 인한 기준미달이었다. 경고를 하거나 충원 지시를 내려 이행 조치를 하면 될 수준이었음에도 주간부 전체 학생들의 모집을 중지시켰으니 결국 대학 문을 닫으라는 암묵적 강요였다. 이 조치로 단국대학은 야간부 학생만으로 명맥을 유지해야 했다. 학생들은 대학을 등졌고 강의실은 텅 비었다. 대학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같은 신세와 다름없었다. 이승만 정권 때는 상해 임시정부와 김구 선생을 도와 독립운동을 한 전력 때문에 ‘백범계열 대학’으로 찍혀 탄압을 받았다. 우리 대학 입장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살 길이 열릴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유당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민주당과 가까울 것이고, 장도영 장군(군사정변 당시 육군참모총장, 군사정부 출범 뒤 반혁명운동의 지도자로 숙청당함)의 친척이라는 혐의로 이같은 시련을 겪어야 했으니 힘없는 사학의 설움 치고는 정도가 심하다 할 것이다. 이 난국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나는 박정숙 당시 이사장님의 간곡한 설득을 받아들여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단국대학에 되돌아왔고 평생을 대학과 함께 하고 있다. 대학에 내 운명을 바치기로 하고 대학 경영의 일선에 서면서 나는 한 가지 철칙을 세웠다. “정치권력에 날선 대립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치권력에 영합해 권력을 갖지도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정치권력을 대하는 자세였고 실천적 철학이었다.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주간부 폐쇄로 단국대학이 겪은 어려움을 설명하고, 종합대학 승격을 직접 호소하여 뜻을 이뤘을 때가 내 나이 37세였다. 당시 나의 패기를 눈여겨 본 박정희 대통령은 이후 단국대학의 성장과 이를 위해 기울이는 나의 열정을 긍정적으로 살펴보았다. 국회의원 출마 권유나 문교부(교육부의 전신) 장관 입각과 같은 제안이나 권유가 왜 없었겠는가.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 말기에 도입한 10월 유신이라는 막강한 권력독점체제에서 설치된 유정회 의원으로 국회에서 활동하라는 제안은 제안이라기 보다 지시에 가까웠다. 서슬퍼런 대통령의 강권을 정면으로 거부하기가 어려웠지만 내 철칙을 허물어뜨릴 수도 없었다. 대학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의 결과로 ‘친정부 총장’이라는 학생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이는 감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총장 팔아 권력을 얻은 교육자’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당시 수많은 교육자들이 대학을 떠나 관계로, 국회로 변신을 하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지던 시대였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선친의 꿈, 박정숙 이사장님의 희망이었던 단국대 발전의 목표를 꼭 이루고 싶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완곡하게 공직 진출이 어렵다는 설명을 해 내 철칙을 지킬 수 있었다. 이같은 나의 자세는 정치적 격변기에서 나와 우리 대학에 불어 닥칠지도 모를 태풍이나 해일을 지키는 보이지않는 방파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정치 권력에 아부를 하여 당시 최고권력자로부터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특혜를 받아낼 수 있지만 언젠가 격변기가 되면 그 특혜는 음해와 험담의 소재가 되어 우리 대학을 해치는 독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의 이같은 철학도 받아들이는 상대방에 따라 다시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1993년에 온몸으로 체험케 된다. 1993년 2월에 김영삼 정부가 출범했다. 김영상 대통령은 새로운 정부를 ‘문민정부’라 불러 달라했다. 전두환, 노태우 전임 대통령이 서울의 봄 이후 탄생한 군사정권으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의 정권이 5‧16군사정변 이후 탄생한 최초의 민주정부라 차별화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에 앞서 1992년 김영삼 씨가 민자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고 조금 지난 가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김 후보의 인척이라는 분이 내 조카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왔다. “김영삼 후보가 만나고 싶어 하는 데 서울 롯데호텔 ****호실로 오세요.”라는 전갈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대통령 선거에 도움을 달라는 뜻이라고 했다. 나는 평소 내 방침대로 면담을 사양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국가적 전환기에 대학 총장이 대통령 후보를 만나 선거 지원을 약속하고, 이를 실행하는 일이 좋지 않은 일이고,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로부터 1주일쯤이 지나서였다. 비슷한 얘기가, 이번에는 다른 경로를 통해 전달되었다. 우리 대학 부총장 중 한 사람, 재단 이사 그리고 원로 동창회장 등이 나를 찾아 와서 김영삼 대통령 후보를 만나줄 것을 강력하게 강조하였다. 여당 후보가 당선되도록 적극 돕고 재정 지원도하는 것이 학교 발전에 유익한 일이라고 역설했다. 나는 여야를 막론하고 대학 총장이 선거에 개입하는 일이 부당하고, 중립을 지키는 것이 옳은 길이라 고집했다. 결국 김영삼 후보와의 면담을 끝내 사양한 셈이었다. 그러던 중, 민관식 전 문교부 장관님이 나를 만나자 했다. 민 장관은 대한체육회장도 지낸 교육계와 체육계의 원로로서 나를 매우 아껴주는 각별한 사이였다. 민 장관은 당시 김영삼 캠프를 돕고 있었다.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니 나를 걱정해주는 내용이었다. “내가 얼마 전 김 후보를 만났는데 자기가 당선이 되면 다른 대학은 몰라도 장충식 총장은 가만두지 않겠다하던데 무슨 일이 있었느냐?”며 걱정을 했다. 나는 사정을 설명했다. 얘기를 들은 민 장관님은 “거산(김영삼 대통령의 아호)은 대통령이 되려고 정치에 입문했다고 밝힐 만큼 권력에 대한 집착이 심한 사람이고, ‘내 편’이 안 되면 반드시 대가를 치루게 하는 사람이니 오해를 풀어야 해.”라고 충고를 했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 원로의 말을 듣고 보니 걱정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왜 이런 식의 철학을 갖게 되었는지, 이런 자세를 지키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중언부언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될 사람이 설마 중립을 지키고 싶다는 대학의 총장에게 깊은 원망을 갖기야 하겠는가 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내 기대 섞인 생각은 어긋났다. 우려했던 일들이 일어났다. 김영삼 정부가 문민정부의 닻을 올린 1993년부터 우리 대학의 중요 현안들은 제대로 진행되는 일이 없었다. 당시 대학종합병원 신축공사가 진행되는 시기였다. 재정이 부족해 대출을 하려 해도 승인이 안 되었다. 부채가 많다는 지적에 부동산을 팔아 빚을 갚겠다 하면 이번에는 부동산 매각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부속병원 공사가 지연되면서 부채가 늘고, 이자도 급증하였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하지만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이 주무 관청의 인가 거부로 진척이 없었다. 결국 병원 신축공사를 맡은 극동건설이 아예 공사대금을 외상으로 떠맡겠다는 문서를 작성하고서야 개원준비를 할 수 있었다. 그런 난국 속에서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느닷없이 교육부에서 단국대학에 대한 종합감사를 착수했다. 우리 대학이 입학 관련 서류를 폐기한 혐의가 있다고 시작된 감사는 대학과 재단의 재정 문제도 들추려는 종합감사로 확대되었다. 결국 대학 병원 건설을 위한 재정운용의 하자를 들어 당시 이용우 이사장과 총장이었던 나를 해임하고, 장병규 전 문교부 차관을 이사장으로 파견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장병규 관선 이사장은 취임 일성으로 자신이 교육부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파견된 문자 그대로 ‘관선 이사장’임을 명백히 하면서 우리 대학 부채를 청산할 유일한 방법이 ‘서울캠퍼스 매각’임을 밝혔다. 동시에 서울캠퍼스는 천안캠퍼스로 통합하는 것이 관선 이사장과 관선 이사들의 복안이었다. ‘빚진 죄인’이라고 나를 대학 총장에서 물러나게 한 정부 방침은 수용을 하겠지만 서울캠퍼스를 천안으로 통합하는 것은 방관할 수 없었다. 우선 나는 장병규 관선 이사장을 퇴진시키는데 팔을 걷어붙였다. 장병규 당시 이사장은 우리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이 때 공직자로서 받은 편의가 정도를 넘어섰음을 알게 되었다. 더욱이 이사장은 상근을 해야 하고, 겸직이 안 되는데도 버젓이 이를 무시하고 다른 교육기관과 우리 대학에서 이중으로 겸직을 하며 급여도 각각 수령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단국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관선 이사들의 임무인데 이를 위해 헌신하기는커녕 대책이라고는 서울캠퍼스 매각뿐이라 주장했다. 나는 장병규 이사장을 만나 단국인들은 이런 사실(서울캡퍼스 매각-천안캠퍼스로의 통합)을 알면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고, 단국대의 역사를 망치는 일이라 반박했다. 이 문제로 당시 교육부 장관을 만나 거칠게 항의를 했다. 그리고 한걸음 더나가 청와대의 김정남 교문 수석을 만나기도 했다. 나는 정부 책임자들을 만나 내 온 힘을 기울여 내 생각을 설득했다. 심지어 이런 무책임한 정책을 대학개혁이랍시고 펼치는 실체를 내가 스스로 언론에 기자회견이라도 열어 공개하겠다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결국 장병규 이사장은 사직을 했다. 장병규 이사장의 파행은 막았지만 이제 진정으로 단국대의 진로를 타개할 역량있는 인물을 찾는 일이 시급했다. 이 중요한 시기에 떠오른 분이 김학준 박사였다. 김정남 수석을 만나 관선이사장의 퇴진을 강력히 주장한 얼마 뒤 우리 대학의 임영재 교수를 통해 전갈이 왔다. 김학준 박사와 의논을 해보자는 내용이었다. 당시 임영재 교수는 현승일 박사와 오래된 교분을 갖고 있었다. 대학에 오기 전 언론사에서 같이 기자 생활을 했던 인연이 있었다. 현승일 박사는 또한 당시 청와대에서 문민정부의 패러다임을 짜고, 실행계획을 주도하던 ‘6‧3세대’의 핵심들과 오랫동안 같은 길을 걸어오고 있었다. 김학준 박사 역시 이들 6‧3세대 학자, 정치인들과 동문으로서, 개혁적 학자로서 공감을 나누고 있었다. 나와도 김학준 박사는 개인적으로 인연이 많았다. 김학준 박사는 노태우 정부에서 공보 수석 겸 청와대 비서관을 지내고 있었다. 당시 나는 노태우 대통령을 자주 만나고 있었다. 나는 남북체육협상의 수석대표로 알하기도 했고, 대학 총장으로서는 헝가리나 몽골같은 사회주의 국가의 대학들과 한국 최초로 교류의 문을 열었는데 이것이 노태우정부의 북방정책과 상통해 대통령의 관심을 받고 있기도 했다. 이 때 업무 때문이라도 직간접적으로 김학준 수석과 논의하고, 공적인 관계를 맺어야 했었다. 공직 생활을 할 때도 김학준 박사는 대통령의 수석비서관으로서 책임감, 활동력이 대단했다. 우리나라의 정치학계를 이끄는 석학이면서도 국회의원을 지낼 정도로 정무감각도 뛰어난 분이었다. 정치적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합리적이고 온화한 성품으로 인적 관계도 넓은 현실론자이기도 했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을 한 끝에 김학준 박사를 만났다. 최근의 단국대가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김 박사는 서울대 정치학과에서 25년을 교수로 생활한 교육자였다. 대학의 어려움이나 이사장이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나는 김학준 박사에게 우리 대학 이사장으로 일하시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다만 한가지 조건을 걸었다. “아시다시피 단국대는 설립자께서 내건 건학이념과 이상이 있습니다. 저는 이를 실천하는데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김 박사님이 이사장이 된다면 이를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해주십시오. 현재의 관선이사 체제처럼 교육부 방침대로 이사장 업무를 수행할 뜻이라면 우리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김 박사는 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김 박사의 온화하지만 진지한 말 속에 “단국대를 돕고싶다”는 진정성이 느껴졌다. 김 박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제가 김정남 수석 등과 사적으로는 대학 친구이지만 공적으로 걸어온 길은 전혀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김영삼 정부 사람이 아닙니다. 정부에서 저를 관선 이사장으로 선임하지도 않겠지만 저 또한 정부의 심부름을 하는 형식은 싫습니다. 하지만 장 총장님이 저를 이사장으로 요청하고, 제가 응한다면 이 정부에서 최소한 반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단국대 문제 해결을 위해 제 등을 떠밀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는 진심으로 총장님과 단국대를 돕고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나는 김 박사의 말에 공감했다. 자리가 아니라 대학인으로서 대학의 진로를 함께 고민하고 열어가려는 의지가 있었다. 1994년 5월, 김학준 박사는 우리 대학의 이사장으로 부임했다. 김 이사장은 참으로 진지하고 열정적인 분이었다. 천안으로 서울캠퍼스를 흡수 이전하는 대신에 새로운 부지를 매입하고 신축해 이전하는 대안, 즉 신캠퍼스 건설을 정부가 수용케 했다. 말이 그렇지 이를 실행하는데 얼마나 많은 인허가 절차와 관계 부서들의 협조가 수반되어야 했겠는가. 그 모든 과정에서 김학준 이사장은 기꺼이 자신이 가진 인적 자산을 공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활용을 했다. 지금의 죽전캠퍼스 부지를 매입할 때도 김 이사장은 나를 믿어주었다. 당시 현 죽전캠퍼스 부지 소유자는 대지를 매각하는 조건으로 대금을 일시불로 달라고 전제했다. 500억 원 정도인 그 막대한 거금을 마련하는 문제는 정말 해결이 어려웠다. 급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고민 끝에 내가 현 죽전캠퍼스 부지를 매입키로 결심했을 때 이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이때 한남동 교지를 담보로 제공하고 대금을 차입하는 일도 김학준 이사장이 풀어나갔다. 무엇보다 “안 돼, 안 돼” 일색이던 정부 관청의 고압적 자세를 바꾸고 하나씩 인허가를 받는 일도 정말 어려운 일었다. 김학준 이사장의 역량이 없었다면 죽전캠퍼스 이전사업은 참으로 더 큰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고 나는 믿는다. 그렇게 이전사업의 기초를 닦고 김 이사장은 인천대학 총장으로 부임해갔다. 그 뒤로도 대학과 언론기관에서 그의 부드럽지만 과감한 리더십을 필요로 했고 김 박사는 동분서주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지금 김 박사는 우리 대학의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평일도, 휴일도, 낮과 밤도 가리지 않고 문헌을 파헤치며 공부를 하더니 마지막 역작이라며 <남북한문전>을 간행하고 있다. 상고시대부터 현대까지 우리나라에 관한 문헌, 저서들을 하나씩 짚어보고, 이를 주제어 별로 분류한 문헌사전이라고 한다. 권당 800페이지 씩 1만 페이지가 넘는 대작을 준비하는 김학준 박사의 열정이 한국학의 큰 봉우리로 남기를 기원한다.

백 개를 주다가 한 개를 빠트려도 비틀어지는 사람의 마음

2019.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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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팔자는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좋은 팔자는 ‘남을 도울 수 있는 지위나 경제력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남을 돕는 일은 ‘우선 나부터 먹고 쓰고 남아야’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남보다 잘 먹고, 잘 살고, 그러고도 여유가 남아돌아 남들을 돕는 일이야 누군들 못하랴. 남을 돕겠다는 의지와 결단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어렵고 힘든 환경이지만 내가 가진 힘이 남을 도울 수 있다면, 그렇게 삶을 꾸릴 수 있다면 그만한 팔자를 어찌 나쁘다 하겠는가. 다행히 나는 대학을 설립한 아버님을 만나 교육에 입신을 하고, 대학을 성장시키는 일에 매진해왔다. 이 과정에서 생기는 여력이 다른 이들에게 삶을 개척할 기회가 된다면 기꺼이 내 힘을 보탰다. ‘먹고 쓰고 남아서’ 돕는 것이 아니라 내 도움이 상대방의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믿었다. 팔자가 좋아서 돕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너는 이만하면 좋은 팔자가 아니냐? 그러니 스스로 만족하고 남을 돕는데 힘을 보태라.”고 스스로 결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마음가짐은 남을 도울 때 절대로 상대방이 은혜를 갚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저 내 도움을 받은 이들이 잘살고, 성공하면 그것으로 은혜를 갚은 셈치고 살아야 한다. “내 도움을 받았으니 이제 은혜를 갚으라”고 말을 하는 순간 내 삶의 평화는 흐트러진다고 생각한다. 지난 50년 간 얼추 계산해도 주례를 선 사람이 600여 명이 넘는다. 그 중에는 시장, 장관, 차관, 예체능계의 지도자, 총장이나 대학 교수들이 적지 않다. 그들 가운데 나를 찾고, 고마운 마음을 드러내는 이들은 거의 없다. 인간관계란 그런 것이다. 나는 부모님의 유산, 총장 시절의 수입, 아내의 도움 등을 바탕으로 장학재단을 만든 바 있다. 30년이 안되는 세월이지만 장학재단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1천500여명이 넘고, 금액으로는 70억 원이 넘는다. 지원받는 당시에는 “은혜를 기억하겠다. 꼭 다시 갚겠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지만 이를 실천한 경우는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 그래도 서운한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저 성공적으로 자신의 삶을 영위한다는 소식만 들으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이다. 그 만족감이 나를 행복하게 한다. 그 이상으로 바랄 것도 없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것만이 내 삶의 행복을 키우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부딪히는 여러 사람들 가운데 잘 잊혀 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특별히 내가 무엇을 바라지도, 아니 돌아보아도 그 사람들에게 그릇된 일을 하지 않았는데 나와의 인연을 헌신짝처럼 버린 이들이 그렇다. 딱히 그럴만한 이유도 없는데 왜 그랬을까 라고 고민도 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고, 그런 고민은 결국 나에게 아픔이 되어 남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W교수이다. 내가 W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1982년경이었다. 당시 우리 대학 스키부는 한국 최강자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나는 이들을 알프스로 전지훈련 보낸 적이 있었다. 동계 스포츠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허약하던 때라 나는 대학 차원에서라도 세계수준의 여건을 갖춘 해외에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신념이 있어 이런 투자를 했다. 당시 전지훈련은 프랑스 쪽 알프스 산에 있는 스키장에서 이뤄졌다. 나는 훈련에 앞서 프랑스 스키협회에 현지에서 우리 선수들을 가르칠 프랑스 코치와 이를 통역해줄 한국인을 보내 달라 했다. 그래서 현지에 도착하니 바로 한국인 통역자로 나온 사람이 나중에 우리 대학 교수로 온 W교수였다. 당시 유학생이었던 W교수를 처음 본 순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를 마중 나온 통역자는 두 발을 쓰지 못해 양쪽 모두 목발로 도보를 하는 장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당황했다. 가파른 언덕길, 그것도 설원을 헤매야 하는데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동행한단 말인가...나는 그에게 이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현지에 오는 한국인들을 자주 가이드 해줬다고 답했다. 이후 1주일 동안 그는 목발을 짚은 채 스키장을 누비고 다녔다. 물론 자주 넘어지고, 심지어 언덕을 뒹굴기도 했다. 선수들이 놀라 부축을 하려 하면 그는 손사래 치며 도움을 사양했다. 그 모습이 너무 씩씩하고 의젓해 교육자로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일주일을 같이 보내면서 가까워지자 나는 그의 인생 여정을 물었다. 그에게 박사 학위까지 있는데 이런 스키장 가이드로 고생을 하느냐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나를 놀라게 했다. W교수는 어릴 적부터 대학 졸업 때까지 어머니가 업어서 통학을 시켰다고 했다. 경희대 경영학과를 마치기까지 어렵고 힘들게 공부를 했고 신부님의 도움으로 프랑스로 유학 와 명문대인 그로노불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건 만 모국은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했다. 서울이던 지방이던, 심지어 모교에도 지원을 했지만 교직을 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일반 기업체에도 구직을 했지만 장애인, 그것도 양족 목발이 없이는 이동하지 못하는 이를 받아주는 곳이 없어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야 했다고 고백했다. 프랑스는 그래도 장애인들에게 직업의 문호를 열어두고 이런 일이라도 해서 생계를 풀 수 있어 다행이라 말하던 그는 급기야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단국대에 응모한 적은 있느냐?”물었더니 없다는 대답이 왔다. 나는 그에게 단국대 교수 공채에 응시하라 권유했다. “우리 대학은 장애인 교육을 돕는 특수교육학과도 있고, 장애인 학생들도 입학하고 있으니 장애인 교수라고 박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라 격려도 했다. 나는 이듬해 천안캠퍼스 경제학과에서 교수 선발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W교수에게 응모토록 연락을 했다. 다행히 W교수는 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당시 그의 나이 34,5세 정도였다. W교수는 이후 나와 특별한 인연이 없이 지냈다. 총장인 내가 부담스러워서인지 그는 애써 나를 찾지 않았다. 물론 나는 내 철학이 그러하니 따로 그를 불러 얘기를 나누기가 겸연쩍었다. 몇 년이 흐르고 그는 나를 찾았다. 결혼을 하는데 주례를 서달라는 요청을 했다. 당연히 응낙했다. 그는 목발대신 휠체어를 카고 입장했다. 신부에게 결혼 결심을 물었는데 “자신의 오빠도 장애인인데 신랑을 장애인으로 구해 사회의 차별이 그릇된 인식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크게 안심을 하고 기뻐했다.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어야 하는 W교수의 난관, 이를 감내하고 돕겠다는 신부의 갸륵한 결심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 선의를 베풀었다. 당시만 해도 천안캠퍼스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교사동이 없었기에 그가 맡은 과목의 강의실은 1층 강의실로만 배정토록 했다. 워낙 과목이 얽히고 설켜 있으니 이를 조정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같은 학과에서는 “장애인을 데려와 공연히 일을 만든다”는 볼멘소리도 들려왔다. 한바탕 목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애써 모른 척한 기억이 있다. 주례를 선 이후, 이런 일들로 설왕설래가 있는 때에도 W교수는 연락이 없었다. 공치사를 듣고자 함이 아니라 애써 초빙한 교수가 어찌 지내는지, 가정은 어떻게 잘 이끄는지 궁금했건만 전화 한통이 없었다. 그러다가 W교수가 교통사고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번에도 내가 인사를 갔다. 부상을 위로하고 건강을 기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학교 안팎에서 들리는 그에 관한 얘기들을 묻고 싶고, 그리고 같은 대학인으로서 지내는 바가 어떤지도 듣고 싶었다. 퇴원하면 연락이 있겠거니 했지만 이번에도 연락이 없었다. W교수와는 이 만남이 끝이었다. 그와는 총 4번의 만남이 전부였다. 프랑스 현지훈련 스키장에서 처음, 두 번째는 발령장을 줄 때, 세 번째는 결혼 주례를 서줄 때, 네 번째는 그가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 W교수에게 무슨 은혜를 갚아 달라 한 적도 없고, 생색을 낸 적도 없다. 내가 궁금한 것은 혹 부인과의 사이에 불편하고 어려움이 없는지 그리고 자녀는 얻었는지 같은 일상의 변화를 듣고 싶었다. 하다못해 주례를 서고나면 아이를 낳았을 때 이런저런 얘기를 듣거나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인사를 올리는 것이 양속이건만 그런 일도 없었다. 그렇다고 연구에 몰두해 좋은 논문을 생산한다는 얘기를 듣지도 못했다. 오히려 천안시에서 건물을 소개하고, 집을 중개하느라 바쁘다는 전언이 들려왔다. 실망이었다. 정년이 되어 학교를 떠날 때도 어떤 연락이 없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던 걸까? 나도 모르게 내가 그에게 무슨 몹쓸 짓을 하기라도 한 건가? W교수를 생각하면 나는 남 돕기를 좋아하던 나를 보고 사람들이 해주곤 하던 충고가 생각난다. “장 박사, 어렵고 힘든 시절을 겪은 사람이 성공을 하고나면 자기가 받았던 도움은 쉽게 잊거나 아예 모른 척하기 십상이라네. 왜냐하면 불행했던 시절을 이겨낸 동력이 남의 도움 덕분이란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게 인지상정이거든. 그래서 야무진 성격의 사람들은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잘 내밀지 않는 법이야.” W교수는 지금부터 내가 말할 사람과 비교하면 그나마 또 다른 평가를 할 여지가 있다. 때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유로 수십 년 동안 내가 보내준 후의를 물거품으로 만들고 모든 인연을 부정적으로 돌려세운 사람도 있다. 그것도 내 비서실장을 했던 사람이 그럴 때는 남모르는 마음의 상처를 달래야 할 경우도 있었다. 내 비서를 지냈고, 비서실장도 지낸 S교수가 그런 사람이다. 나는 총장, 혹은 이사장으로 일하면서 비서 또는 비서실장을 직접 발탁한 일이 거의 없다. 총무처에 공식적으로 의뢰하여 여러 간부들이 의논해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적합한 인사를 추천하면 이를 받아들였다. 나와 일한 S교수는 서울시 공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아버님이 대학으로 데리고 온 사람이었다. 우리 대학 야간부를 졸업했는데 서무과, 학생과 등을 거쳐 내가 총장으로 취임하자 총장실 비서실장으로 추천되었다. 그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은 학교관련 대외 업무나 민원처리에 능하다는 점이었다. 공무원 생활을 했고, 70년대 식 표현으로 ‘풍채’가 좋아 대인관계에서 호의를 받기 쉬운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내가 부탁하는 대외 업무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고 있어서 나 역시 그를 믿었다. 당연히 승진도 빠르게 이뤄져 학생처장, 총무처장 등의 보직도 맡았다. 그는 한양대학교에서 도시행정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더니 교직에 뜻을 두었다. 나는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그를 교내 직원 인사문제와 재정을 책임 맡는 부총장으로 승진 발령하였다. 가정적으로도 친해져서 그의 아들과 딸의 경혼 주례도 맡아 주었다. 그가 정년을 맞자 나는 내가 설립한 범은장학재단 이사장직에 취임토록 했다. 차량을 공급해주고 아울러 봉급도 주었다. 내가 대한적십자사 총재직을 맡았을 적에는 그에게 적십자간호대학 이사장직에 임명하였다. 말하자면 나는 우리 대학 교직원 중에서 S교수를 가장 신임하고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총장으로서 그에게만 유독 관대한 혜택을 준 것이 있다. 그가 행정직원에서 교원으로 전환하고 싶어 할 때 이를 도와준 것이다. 도시행정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해당 과목을 강의하고 싶다고 했다. 박사학위까지 있는데 그만한 실력이 있으리라 믿었는데 불행히도 학문적 기초체력이 부실했던 것이다. 강의실에서 그 부실함이 학생들에게 드러나면서 자주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학생들이 뒤에서 그의 학문적 부실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에게 들릴 정도였다. 그가 속한 전공에서는 강의 과목 배정을 놓고 언쟁이 높아졌다. 나는 이러한 불협화음을 애써 진정시키느라 교수들에게 자중을 호소하기도 했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을 당해도 인내하곤 했다. 학문은 미흡하지만 그가 학교를 위해 애쓴 일을 존중하기 때문이었다. 정년 뒤 범은장학재단 이사장으로 있게 해 기사딸린 승용차도 배정하며 예우를 했는데 9억 여원의 기금 손실을 가져왔다. 자리를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각별한 만남을 가질만한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천안캠퍼스 설립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장에서 일이 생겼다. 나는 그 자리에서 축사를 했다. 천안캠퍼스 설립 과정을 아는 이라면 당연히 설립 작업 과정에서 김봉구 교수와 김유혁 교수가 얼마나 고생하며 많은 일을 했는지 다 알고 있기에 거기에 걸맞는 찬사를 보냈다. 그뿐이었다. S교수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천안캠퍼스 설립 30주년 축하의 자리에서 S교수에게 찬사를 보내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천안캠퍼스 설립 작업에 직접적인 참여를 한 적도, 업적이라 삼을만한 일을 한 적도 없었다. 더욱이 S교수를 의식해서 그를 무시한 것도, 천안캠퍼스 설립에 큰 기여를 했는데 그를 뺀 것도 아니었다. 연설을 하다가 노년에 들어 할아버지가 된 김유혁 교수, 김봉구 교수가 눈에 띄어 즉흥적으로 개교 당시의 역경을 이겨내던 두 노교수의 공덕을 치하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고 S교수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연설을 듣더니 얼굴을 붉히며 두 사람은 칭찬하면서 자신은 뺐다고 화를 냈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몇 주가 지난 뒤 이번에는 정년퇴임 교수들의 모임에서 S교수가 참석하여 당시 회장에게 말하기를 “이제부터 장충식과 인간관계를 끊겠다”는 절연을 선언했다고 했다. 당시 회장은 나에게 이를 전달하며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나는 의외로 무덤덤했다. “그러시라 하시죠.” 내가 한 말의 전부였다. 겉으로는 그리 말했지만 나는 기가 막히고 불쾌했다. 행정 직원이었던 그에게 신뢰와 중책을 부여했던 사람이 누구인가. 그의 부탁을 받아 아들과 딸의 주례를 서준 이가 누구인가. 그가 교직으로 전직시켜 달라 했을 때. 그의 강의와 연구업적이 기준에 못 미친다고 비난이 일 때마다 이를 내 책임이니 교수님들이 도와주시라 호소했던 이가 누구였던가. 사단법인인 범은장학재단에 자리를 만들어 급여와 예우를 해준 이는 누구였단 말인가?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운 내가 그를 비난한 적도 없고, 단지 공식 연설에서 그를 칭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절을 선언하다니...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S교수는 병원에 입원했다. 문안을 가고 싶었지만 수많은 원로교수들 앞에서 나를 의절하겠다는 선언을 했는데 찾아가는 일도 모양이 좋지 않아 뒤로 미루고 말았다. 그 뒤 S교수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별세를 했다. 그의 의절 소식을 들으며 나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열 가지, 백 가지 도움을 주고 호의를 베풀어도 단 한 가지 섭섭한 일이 생기면 그 전에 모든 일은 없던 일로 되는 것이 사람의 일이 아닌가. 남을 돕는 일이든, 장학 사업을 하던 이점을 잘 기억하고 싶다. 선하고 좋은 일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 사람에게 이를 기대하지 마라. ‘선한 의지에는 보상이 없다. 사람 자체를 돕는 일로 보람을 느낄 뿐이다.’ 그것이 학연(學緣)을 가연(佳緣)으로 만드는 힘이고 내 삶을 성공시키는 길이다.